배신 때리기의 달인 법궤, 언약궤, 증거궤

2011년 4월 2일 토요일 오후 11:19:11  김대식


(고전 13:11, 개역)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4, 개역)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5, 개역)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 13:6, 개역)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 13:7, 개역)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8, 개역)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 13:9, 개역)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고전 13:10, 개역)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 13:11, 개역)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12, 개역)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3, 개역)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4:20, 개역)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14장 전체

예언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것에서 방언과 통역의 문제로 인한 사건의 취지를 파악, 즉 뚜렷하고 명료하지 흐릿하지 않고 부분적인 것은 지적하고 권면함을 통한 지혜의 상대적인 차이성 곧 아이의 지혜가 아닌 악마에 대한 지혜를 곧 은사인 예언을 사모하라는 취지이다


(히 5:10, 개역)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히 5:11, 개역)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히 5:12, 개역)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히 5:13, 개역)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히 5:14, 개역)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엡 4:1, 개역)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엡 4:2, 개역)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 4:3, 개역)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4, 개역)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 4:5, 개역)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요』
(엡 4:6, 개역)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엡 4:7, 개역)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엡 4:8, 개역)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엡 4:9, 개역)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엡 4:10, 개역)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엡 4:11, 개역)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엡 4:12, 개역)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3, 개역)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4:14, 개역)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엡 4:15, 개역)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자 위의 대표적인 장성함과 어린아이의 대조로써 은사라는 선물은 그리스도의 몸 때문에 드러나는 양상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란 결국 상대적인 인간의 몸을 겨냥한 다른 몸 이다.

아니 누가 감히?
자기 몸도 세우기 바쁜 판국에 다른 몸을 세워야 한다? 그것이 말이 되는가?

흔히 기존 교회에서 자신들의 장성함을 가지고 무시하는 투로써 어린아이 같은 자를
자신들이 책임지는냥 한수 가르치겠다는 심뽀로써 위의 구절들이 많이 활용이 된다.
그래야 질서가 잡힌다나?

그러나 은사란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도저히 감당이 불감당이여서 자꾸 자꾸 퍼뜩 퍼뜩 죽어나가 떨어지는
굴욕의 미끄러짐 곧 삑사리의 현상이다.
은사 괜히 받아서 교회에서 왕따 당하는 것이다.

인간들이 교회에서 자기 몸 외에는 관심이 없는 판국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라고 하니
자꾸 자기 몸을 가지고서 세울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몸이 아니라,
여전히 이 세상의 몸이요
세상적인 교회를 세우는데 활용이 될 뿐이다.
바벨탑으로 소통(연합,일치)을 시도한다.
가증한 것이 서는 것이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다.

그럴 것 같으면 왜 은사를 주시는가?
성령으로 교통함은 인간으로써는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몸 자체가 틀리다.
믿어도 소용없다. 행해도 소용없다.
그저 주님이 직접 하시는 것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 주님이 자기의 몸을 세우시는데 있어서 상대적인 우리의 몸을 가지고서
차이성을 내는 방식으로써 활용을 한다.

그 사람은 결국 미끼가 되는 식이다.
그 한 사람 족쳐서 다른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식이다.
이것이 틀이다. 틀. 본으로 삼는 주틀, 틀이 갖추어지면 붕어빵은 공장에서 생산된다.
결국 그 사람 욕할 입장이 못 되는 식이다.
그래서 다들 도망친다. 서로 하지 않을 려고 한다.
저 사람이 죽도록 해도 욕먹는 것을 보면
할 엄두를 못 내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은사다. 철저한 소모성, 소멸성이다. 위에서 언급된 장성함이란 바로 이 소멸성 때문이다. 이것이 종말에만 나타나는 종말의 영의 인간, 종말인간, 심판인간, 심판성을 자신의 신체에 담아서 이 주틀로 들이내 밀고 붕어빵을 찍어낸다.

왜 그러면 소멸성인가?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것이면 가치성을 느껴서 목숨까지 바친다.
다시 자기에게로 회귀하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것이 보인다! 보여 !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치도 안생기고 동기유발도 생기지 않고 아예 원인을 발생이 될 수가 없기에 결과 조차도 아예 기대할 수가 없다. 손에 쥐어지는 것이 전혀 없다.

바로 이것이 은사의 특징이다. 소멸성이란 결국 악에 대한 것이다.
악마! 악마를 겨냥한 것이 은사다.
그리스도의 몸이란 독자적이지 않고
오직
우리 눈에 도저히 감지 되지 않고 해석 되지 않는
마귀를 겨냥한 것이다.

마귀 보란 듯이 세워지는 몸이고
정작 우리들은 이 다른 몸에 반감을 실감케 되는
훼방하는 자로써 그 현장 사건의 배치물 가구로써 동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제목을 배신때리기의 달인 법궤 라고 했다.

법이란 놀랍게도 거룩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룩이란 뭔가를 거쳐서 오지 않으면 거룩 근처로 올 생각을 하지 말라는 취지다.

그렇다면 법이란 간단하다. 불법을 거쳐 오라는 것이다.
그런데 불법을 거쳐 와서 행하면 이 법이 너 불법자 맞지 라고 도리어 감옥에 지옥에 쳐 넣는 편법을 실행할 수 있기에 나중에 딴소리 할 수 있어서 선뜻 불법을 거칠수가 없게 된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한 두 번 격은 것이 아니다. 아니 몸 자체가 그런 지식을 흡수 통합 스폰지처럼 빨아들여서 능구렁이가 다 될 수밖에 없도록 한다. 내성이 생긴 것이다. 슈퍼박테리아처럼. 몸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뒤로 자신의 신체 조차도 법처럼 편법으로 뒤로 꼬불쳐 놓는다.

여기서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로 나누어진다.

결국 어린아이란 불법을 거치지 않는다는 취지다. 그래서 사적인 영역이 강하다.

그러나 장성한 자는 다른 몸이 있기에 그 사적인 영역을 가감히 철수 시키고
또 불법을 거쳐서 거룩에, 의에, 사랑에 부합이 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사랑 보다 가장 폭력적인 것이 없다고 했다.
일방적이여. 배타적이다. 철저하게 독선이다. 이 부조리를 깔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사랑만이 유일한 생명이다.

결국 그 사랑이란 죽음을 거쳤다는 뜻이기 때문이요
우리는 상대적으로 죽음 아래에 갇혔다는 뜻이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는 지독한 미움을 거치는 것,
결국 생명은 죽음을 거치지 않는 것은 다 가짜다. 그러니 우리는 근처도 갈 생각을 말아야 한다. 재수 더럽게 없이 당첨된 자만이 그것도 은혜로만 은사로만 가는 것이다.)

자 또 이렇게 말하니 서로 가해자 노릇을 하고 참선지자의 폭력성을 무턱대고 따라한다.
문제는 그 이후에 과연 불법을 또 이길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바로 시원하게 남을 지옥에 넣었다고 자신만만히 정죄 심판 하고
믿음 없는 가짜 성도를 지옥 보내 버리고
또 마귀가 주의 이름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기뻐서 자신감이 넘칠 때

과연 슬며시 다가오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죄책감이라는 불법

분명히 말씀대로 지켰고
시키는대로 명령하는대로 준행 했음에도 불구하고
몰려오는 이 죄책감을 이길수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문제는 자신의 신체성 자체가 다른 몸이 아니기에
역시 그 정죄에 자신의 신체성도 포함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마음대로 또 사단의 가시 조차도 못 뺀다.
심은 분은 주님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기가막힌 것은 그것이 은혜로써 내게 족하다 라는 것이다.

(고후 12:7, 개역)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12:8, 개역)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 12:9, 개역)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10, 개역)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아니 이게 말이 되나? 아니 도대체 성경말씀 중에 그 어느 하나도 말이 되는게 없다.
말이 되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 전혀 우리 신체에 맞지 않는 언어 뿐이다.
그러니 매 맞는 신체, 핍박 당하는 신체, 지독한 저주와 미움 심판을 받는 신체가 된 것이 기쁨이요 사도의 표 된 증거 곧 은사자 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결국 첫 아담의 몸에 다 갇힌 판국에
그 몸을 저주 했다면
자신의 신체성도 포함해서 마땅함의 짤라냄을
곧 가해성 폭력성을 수긍해야 할 것이다.
자신을 쏙 빼버리고서 한다면 본인 자체가 법의 굴레에 걸려든 것이며
그 올무에 자신이 넘어설 수가 없다.

이것을 어린아이라고 표현했다.

이스라엘 속에 있으면서 항상 이스라엘을 움직이는 즉 이스라엘이라는 없는 의미를 있는 의미로 부여해서 곧 할례 로써 언약으로 움직이시는 그 흐름을 전혀 인지도 하지 않고

그저 껍데기 이스라엘 그것도 제사장 가문 속에서
자신들의 직분으로 폭력성과 가해성을 마음껏 발휘하다가 언제 작살이 나는고 하니

이제야 법궤 뒤에 숨었을 때
법궤의 기능을 가장 잘 해석하고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누구보다더 더 잘 인지를 해서
그 뒤에 숨었을 때

어라?

법궤가 배신을 때린다.

여호와가 배신 때리는 것이다.

이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헐 ~~~~~~~~

사무엘상 4장

블레셋 군사들이 홉니와 비느하스 요기 요기 숨어있다.
퍼뜩 잡아 죽였뿌라?

도대체 누구편인가? 엘리제사장 두 아들 죽이기 위해서 이스라엘 전체를 배신 때리기인가? 빈대 잡을려고 초가삼간 태울 것인가?

문제는 법궤를 빼앗아간 블레셋 ㅋㅋㅋ  이스라엘 배신당한 것 웃을 입장이 못된다.

괜히 건드렸어 괜히 건드렸어 지옥의 뚜껑을 괜히 열어재낀 셈이니
그 저주 무슨 수로 감당할 것인가?

도대체 누가 누구 편인가? 편도 없이 자기멋대로인 저 박스신체는 도대체 뭔가?   

은사란 배신 때리기 이다. 해석불가다. 해석해 본들 역으로 당한다.
은사 자체가 우리를 항상 배신 때린다.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뻔뻔 스럽게 배신 때린다. 반칙이다 반칙

내가 동 하면 서 해 버리는 배신
그래서 다시 요시 이제는 일치 되겠지 싶어서
서 하면 동 해 버리는 배신 때리기

이것이 바로 은사다.

왜 그럴까?

이미 그 어떤 발현도 출처가 내 몸이다.
몸에서 출발한 것은 결국 자기 몸으로 귀결 된다.

그렇다면 은사가 주체가 되는 것은 고맙게도 얄밉겠지만
그 반대로만 행하면 되는 것이다.
은사란 그리스도의 몸 곧 다른 몸에게만 귀결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 그 어떤 말씀 도
내 몸에서 출발해서 되는 것이 하나도 없고
또 내 몸으로 귀결 되는 것도 하나도 없다.

이것이 바로 거룩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대의 것만 느끼도록 되어 있다.(은사자만)

바로 저런 일치성이 아닌
단절성이다.

뚝뚝 끊어지는 느낌이다.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 넉넉함이요 이미 완료된 승리다 라고 했다.

넉넉히 이기었느니라

즉 이 말은 철저하게 뚝뚝 떨어지는 완전 패배를 실감나게 현실로 격게 된다는 것이다.

동 떨어진 느낌
단절
곧 버림 받음이요
쓴잔인 고난의 잔이요
쓰디 쓰디 쓴 속이 쓰려서 잠도 못자는 전혀 이 몸과 맞는 것이 단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은사다. 선물이다.

세상에나 결국 몽둥이가 선물이였다는 것이다.
뭘 해도 몽둥이다. 매다. 이것이 자식이라는 이유다.


그러나 인기 끌고 누가 봐도 넌 믿는자야 라고 승리자로 취급받는 자는
매도 없다. 그래서 더더욱 다들 부러워 한다.
그래 저렇게 믿어야 해 저봐 저봐 다들 칭찬하잖아.
저런 눈에 보이는 몸이 보이니 나도 저런 몸이 되면 돼 어차피 같은 몸이니 뭐

자 이렇게 되면 다른 몸은 이제 거부와 싫어버린바 되는 상황으로 몰려
교회에서 조차도 외면 받는 몸이 된다.

성령은 이런 사건을 자꾸 일으킨다.
끝까지 이 두 몸의 차이성을 점점 벌려 놓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갈라버린다. 그 차이의 간격이 넘어올수 없도록 말이다.

별 차이 없는 몸들끼리 부딧끼며 이질감이 없이 지내는 것에 익숙한 몸은
비슷한 몸들 끼리 모이기를 원한다.

그래서 다 끼리 끼리이다.

성령은 그런 흐름을 용납 못하심을 저런 몸의 흐름을 유발케 하면서
쳐 버린다.

그 차이성을 극대화 시키는 폭력성이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항상 삑사리 나는 메이져를 파토 시키는 미끼로써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굴러들어오게 된다.

이미 다 차지해 버린 영역을
승리했다고 자축하는 그 잔치상을
뒤 엎어버리는 전복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 미끼 됨에 아무도 나설자가 없다.

누가 폭탄 노릇을 하겠는가

그러나 재수 더럽게 없는 자는 걸려든다.
원수의 성문을 활짝 열어서
지옥 뚜껑을 야무지게 메꾸어 잠궈버린 그 문을
눈치 없이 활짝 열어서 이 화평을 깨뜨리는 저주의 심판을 열어재낀다.

이것이 사랑이다.

죽음을 이기지도 못하는 가짜 사랑은 빨랑 빨랑 발각당하라 라는 취지다.

이것이 십자가다.

십자가는 배신때리는 법궤와 같다.

그리고서는 주섬 주섬 뭔가를 담는다.

올치 이제야 나왔네 라고 우리가 설마 했던 악마성을
암덩어리 몸에서 떼어내듯이 담아서
그 위에 어린양의 피를 뿌리고자
끝까지 추적해서 뽑아낸다.

장성한자는 이것에 동원이 되는 미끼와 같다.
아무리 봐도 무식하고
학력도 짧고
머리에 든 것이 아무것도 없는 데
장성한 자 라니? 말이 되는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바로
소위 저 더러운 여자 보다는 내가 낫다 라는 그 어린아이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상대적인 즉 반대되는 은사자로써 동원이 된다.
다들 낚여버린다.

다말이 어린아이 시아버지 유다를 그런식으로 감당 한다.

너가 나 보다 낫다 라는 식이다. 나는 아니요 라는 식이다.

이 말은 결국

말씀이든 언약이든 같은 말이지만 십자가든 법궤든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든

반드시 부조리로써 작용된다는 것이다. 피 언약이기 때문이다.

이 부조리를 수긍하고 즉 옳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부조리 앞에서 늘 틀리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고 유다처럼 고백하는 것이 바로 찬송 곧 은사다.

이 부조리가 바로 배신때리기의 달인인 법궤다.
법궤는 즉 부조리는 즉 십자가는 우리가 인지 못하고 감각화 할 수 없는

악을 겨냥 한다.

마귀 보란 듯이 움직인다.

은사는 다른 몸을 세우기 위해서
첫 아담의 몸의 기능을 모조리 파토 내는 식으로 다가온다.

은사자 본인 조차도 그 첫 아담에 속한 몸은 파토 난다.

그러나 미래완료로써의 다른 몸이 있지만
망해도 희망이지만

배신때리는 법궤에 담겨 지지만
(다말의 몸에서 낳은 자식 쌍둥이가 바로 요셉이 뺑뺑이 돌리는 은잔시험을 통과 하는 열쇠가 된다. 이 자식의 목숨이(손주) 아비 야곱 언약 전달자의 목숨과 결탁이 되어, 법궤에 담겨져서 패쓰 넘어가는 것이다. 참 쉽다 무시험 합격이다. 알고보면 무지 어렵다. 불가능한 세계다. 그러나 다른 몸 즉 내가 형으로써 죽인 동생 요셉의 신체박스에 형들의 허물이 담겨져야만, 피 흘림으로써 사함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요셉이 장성한 자로써 동원이 되며 죽도록 충성한다. 마치 유다에게 며느리 다말이 죽도록 충성하듯이 말이다. 한 쪽은 반드시 살려고 발버둥 치는 판국에 다른 몸의 출처로써의 다른 한 쪽은 아예 죽을려고 환장하듯이 태클건다.)

배신 때리는 법궤에 담겨질 것이 없는 자는
의사가 필요 없다.

그렇다고 담겨질려고 의도적으로 담을꺼리를 또 내 몸에서 유발케 해도
다른 몸(그리스도의 몸)에 담겨지기는커녕 일종의 자기학대의 마조히즘 마약으로 빠져든다. 그러면 사디즘이 당연히 따라 붙게 된다.

오직 주님 마음대로 하실 주님 숙제이지
우리 소관이 아니다.

그저 이런 부조리가 고맙고
이런 배신 때리기가 아니였다면
알수 없었던 사랑을

이 불의가 훨신 더 나은 제사요 지혜인 십자가임을

그저 그저 더 달리 표현 할 길이 없이

아무리 봐도 구원 받을 요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용서 받을 그 어떤 자격도 없고

그 어떤 조건의 특이성이 없음에도 불구한데

십자가가 옳았음을 나는 늘 틀렸음을 매일 매일 실감하면서

그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를 누리기 바쁘다. 줍기 바쁘다.

뭐야 이거? 매일 매일 주워 담아도 줄지가 않는다.
생수의 강처럼 흘러 흘러 넘친다.
가면 갈수록 더 큰 매가 다가올 뿐이다.
더 큰 사랑이 끊어지지 않고 온다.

이미 넉넉히 승리 한 채로 ~~~
(상대적으로 철저한 패배성 배신당함이 마땅함을 통해서
우리가 늘 예수님을 배신 했음을 배신의 달인 예수님을 통해서 비로소 볼 것이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배신하고 단절시켜 그 철저한 배신 속에서 예수님만 높이신다.
그가 옳았다고, 그가 승리했다고, 승리맞네 어찌 할꼬 어찌할꼬)

(행 2:33, 개역)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 2:34, 개역)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행 2:35, 개역)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행 2:36, 개역)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 2:37,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롬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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