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과 죄란 무엇인가?
아침에 문뜩 눈을 떠 보니
여느날과 다름없이 시계가 보였다.
음 7시 15분이네
그런데 요즘 눈이 나빠서인지 흐릿 흐릿하게 보이면서
초심이 정상적으로 가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왠지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들어서 머리를 들었다.
자세히 보니 어 잘가고 있는데?
괜히 이상하게 보이고 말이야.
(과연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정상일까? 비정상일까?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허구들은 아닐까? 실상은 그렇다면 어디에 있다는 말일까? 보여줘도 못 본다면 우리의 눈은 가짜이단 말인가?)
그러자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시계가 연상이 되어서 연결이 되었는가 했다.
그러나 그 영화에서처럼 시간이 거꾸로 간다고 해도 그것은 역시나 시간의 반대가 아니라
방향만 달랐을 뿐이지 똑같이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였다.
이런 생각을 하니 문뜩 죄가 무엇이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뒤짚는 종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일단 우리가 생각하는 죄는 죄가 아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도 종말과는 무관하다.
시간을 반대하는 시간이 나타나야 그 시간을 보고 종말이라고 한다.
공간을 반대하는 공간이 나타나야 그 공간을 보고 종말이라고 한다.
반대를 위한 반대
뭔가를 반대할려면 일단 전제되는 것이 앞서 있고
뒤에 오는 똑같이 생겨먹은 쌍둥이가 진짜 참된 실상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앞서있던 것은 가짜로 판명이 나는 식이 되어야 한다.
시간을 반대하는 시간
공간을 반대하는 공간
성전을 반대하는 성전
거룩을 반대하는 거룩
율법을 반대하는 율법
믿음을 반대하는 믿음
행함을 반대하는 행함
보이는 것을 반대하는 보이는 것
안보이는 것을 반대하는 안보이는 것
차이를 반대하는 차이
반복을 반대하는 반복
의인을 반대하는 의인
죄인을 반대하는 죄인
인간을 반대하는 인간의 등장
하나님을 반대하는 하나님의 등장
신을 반대하는 신
죄를 반대하는 죄
죽음을 반대하는 죽음의 등장
생명을 반대하는 생명의 등장
종말을 반대하는 종말
구원을 반대하는 구원의 등장
기적을 반대하는 기적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에 반대하는 요나의 표적처럼)
선민(유대인)을 반대하는 종말적 단체(유대인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반대하면서 새로운 잃어버린 선택된 개처럼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는 새이스라엘 종말단체)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등등등
여기서 분명한 차이꺼리가 나야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에게서는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게 그거고 별 차이가 없다. 오히려 쌍둥이처럼 등장해서인지 더욱더 일치성이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말씀 즉 예수님의 믿음은 오히려 그 일치성의 쌍둥이를 보기좋게 더더욱 또렷하고 명료하게 갈라버린다.
쌍둥이는 무지 무지 헷갈린다.
헷갈리기 때문에 100퍼센트 실패하고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선택해도 답은 늘 빵점이 된다.
그 빵점을 유발케 하여서
명료하게 갈라놓았을 때
그 차이성이 분명했을 때 얼마나 시원하고 명쾌할까?
여기서 반발세력이 생긴다.
졸지에 평화가 깨어지기 때문이다.
둘을 믿어도 무관하고
하나를 믿어도 무관하고
쌍둥이가 나타나도 무관하고
쌍둥이가 나타나 두 배의 매상을, 그리고 확장을 누려도 무관해 지거늘
도리어 졸지에 소동이 발생하고
불공평성의 정치로 누구는 미움받고 누구는 간택이 되는
선택을 반대하는 선택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마치 죽음을 반대하는 죽음처럼
자 그렇다면 기존에 형성된 것들이 고정화 되어 있다.
지혜를 짜내어서 성립한 것들이다.
그런 지혜를 반대를 하는 지혜가 나타났을 때
그 흐름에 휩쓸려서 쓰레기 취급받아야 한다.
마귀 취급 받아야 한다.
그러나 도리어 마귀로 취급해 버린다.
지혜는 그렇게 지혜를 반대하면서 침공해 오는 것이다.
지혜는 자기 밖에 모른다. 널리 이롭게 하는 지혜를 반대하는 이기적인 지혜다.
그래서 종말을 반대하는 종말이요
묵시를 반대하는 묵시오
십자가를 반대하는 십자가이다.
필연성을 반대하는 우연적이다는 것이다.
일치 될수 없는 불가능성임에도 불구하고 일치시킬려는 것에
끊임없이 쪼개어 지고 자가분열로써 바닥을 치기 때문에
그 분열을 막을 길이 없다. 그래서 그 간격은 점점점 멀어지고 그 차이는 명료해 진다.
사랑이라는 차이는 움직이기 때문이다.
결국 죄란 무엇인가?
놀랍게도 죄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 죄가 된다.
아무리 막 살려고 해도, 도저히 그것만은 제발 그것만은 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죄다.
(즉 회개를 못하는 것이 죄다. 회개가 이미 기존의 회개가 있다. 그것은 회개가 아니다. 회개를 반대하는 회개를 못하는 것이 죄다. 결국 아무도 회개할 수 있는 자는 없다. 회개의 영의 숙제이다. 마치 할례가 졸지에 분열이 되어서 손할례와 마음의 할례로 갈라졌을 때 누가 과연 마음의 할례를 자신의 손으로 칼을 잡아서 할수 있단 말인가? 찔러 죽여서 해야하는데? 죽어도 안되고, 살아도 안되고, 이거 뭐 할례 하라는 소리인지? 하지 말라는 소리인지?)
무엇을 할 수 없을까?
하나님을 죽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죽이지도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죄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죄를 모른다면 죽음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죽인 것이 자랑이 되듯이 떠벌렸다가는
이 땅에서 영원히 제명이 되어야 한다.
참 묘하게도 그 경계선의 틈사이를 건드리는 식이 된다.
그래서 건방지게 그 틈사이를 아무 거리낌없이 퍽퍽 수셔대고 건드리는 자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행동이 졸지에 껄끄러움이 되는 것이다.
그의 자유로운 행동이 졸지에 우리에게는 무너지는 육체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막사는 행동이 아무 거리낌 없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행동이
우리의 육체가 졸지에 평행이론에 걸린것처럼 무지 무지 영향을 받는 것이다.
그는 혼자서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죽으러 돌진한다.
그런데 수천 수백 킬로에 떨어져
시간과 공간도 전혀 딴 시간 딴 공간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이 곧 나의 육체가 못박히게 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전혀 무관했고 상관없던 것이
이제는 그 시점으로 인해서 너무 너무 관련성이 있게 되었고
너무 너무 연관되어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라는
졸지에 그와 무관한 전혀 딴 죄 개념의 죄인이였는데
이제는 그와 연관된 죄인이 되어 그가 찔림이 우리의 허물로 인해서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기존의 회개를 반대하는 회개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어찌 그의 상함이 우리의 죄악으로 인함인가? 그는 스스로 자신을 상하게 하고자 스스로 죽음을 맞이 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모하기 짝이 없는 스스로의 죽음이
도리어 우리에게 모든 죄악을 뒤짚어 씌우는 식으로써, 전혀 무관함이 아닌 반드시 연관되게 할려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뒤짚어 씌울려고 한다는 것이다.
마치 선악과를 일부러 동산중앙에 심고서는 안 따먹고는 못배기도록 해놓고서는
올치 걸렸구나 하고서 부랴 부랴 생명나무를 치워버리고서는
감히 접근도 못하도록 아니 아예 접근 자체가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도
예민 예민 혹시나 따먹을까 싶어서 불검을 든 천사보디가드를 사방에 배치시켰다.
그와 같이 이제는 십자가가 멍청하게 인간들의 믿음의 대상이 되어서 믿어주길 바라며 가만히 멍청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자꾸 뒤짚어 씌운다.
가급적이면 역이지 않을려고 멀찍감치 거리를 두고자 도망치는 자들에게
온갖것을 뒤짚어 씌워서라도 역이도록 만들어서 십자가와 무관치 않은 일급살인자로 반드시 만드는 것이다.
죄인 중의 괴수요 괴물 살인자로 뒤짚어 씌운다.
하나님을 죽인자로 이 세상에서 제명시키고자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반대하는 하나님의 등장으로 인해
새하나님이 뒤짚어 씌이는 방식이다.
의인을 반대하는 의인의 등장으로 인해
죄인을 반대하는 죄인으로 졸지에 뒤짚어 씌움을 당해
그 하나님을 살해함으로써
법을 반대하는 법에 뒤짚어 씌움을 당하는 것이다.
이런 종말의 상황에
성령의 활동의 상황에
과연 누가 거부할수 있겠는가?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7, 개역)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8, 개역)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사 53:9, 개역)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사 53:10, 개역)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사 53:11, 개역)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사 53:12, 개역)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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