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미끄러지다? 몸(공간)에 삐꺽거리다?


2012년 8월 18일 토요일 오후 9:01:11   김대식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 2011)



시간이라는 현실에서 미끄러지고
몸이라는 공간에서 삐걱 해체되고

이 영화를 정말 정말 지루하게 봤다.
1주일 동안 찔끔찔끔 정말 재미없게도 말이다.
그런데 제일 마지막 부분에서 드디어 내용의 핵심이 나온다.
아무리 아름다운 파리의 풍경을 필름 속에 담아도
곧 바로 지루해 진다.

저장해둔 공간이라는 몸은, 이내 시큰둥해져서 그 아름다운 감탄사는 곧바로 썩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시간을 미끄러져 가서 현실을 도피한다.
영원히 잉여를 맛보기 위해 황금타임의 전성기만을 누리고파서 이다.

미(美)도 더 이상의 아름다운 미가 아니다.
황금도 더 이상의 황금이 아닌 돌에 지나지 않는다.

최고의 전성기 (무지 무지 많이 나오는 자막)은 곧 지루함이요 허무다. 허상.

돌 삐

아무리 막살고자 해도 막살기를 반대하는 막살기가 따라 붙어서, 이내 지루해 진다.

이것이 일상이다.

일상은 솔직하다.
되돌아오는 것은 균열된 자아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자아가 자아를 심판하는 그 몸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몸을 반대해도 그 몸을 심판해도 그 몸을 미친 듯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지독한 자기애의 소유욕인 자기 몸 밖에 희망이 없다.

어딜 감히 너의 몸뚱아리에서 벗어날려고 하느냐 라고 묻는다.

아무리 이 몸 뚱아리에 풍부한 상상력을 부여해도
몸에서 배설되는 고통은 곧 죽음의 흔적들은 부인할수 없는 실제상황이다.

그래서 십자가보다 더 확실한 현실은 없다.

누가 꾀더냐?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십자가를 회피하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런 몸의 철학은
(철학은 오로지 인간의 몸 밖에 관심없다. 신을 연구해도 되돌아 오는 것은 인간 몸이고, 무자아를 외쳐도 결국은 회귀되는 것은 자기 몸 뿐이다. 자살을 해도 몸만 남는다. 그 몸의 흔적만 뒤 쫏을 뿐이다. 이 몸의 철학을 반대하는 유일한 것은 이 몸을, 인간의 모든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는 십자가 뿐이다. 유일하게 딴 몸이 창조된 갈라진 지점이다.)

아무리 떠날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나 라는 자아의 몸뚱아리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 갇혀있는 현실을 매일 매일 직시함으로써

그 상대적인 딴 몸의 영광성을 드러낸다.

그 딴 몸을(바울신학 그리스도의 몸) 보고서야
이 몸이 저주받아 마땅한 몸인줄 알게 된다.

아무리 지금의 몸이 청춘과 아름다운의 열정으로 가득차 있더라도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도(돈 되는 몸, 돈을 누리는 몸)
언젠가는 시들고 늙고 썩고 삭제되고야 마는 냄새나는 몸이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무리 막아도 소용이 없다. 썩은 냄새가 퍼져나가는 것을 방지할 길이 없다.
하늘에서 떨어진 광야의 만나를 먹어도 썩는 몸이다.

(요 6:31, 개역)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요 6:32,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요 6:33, 개역)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 6:34, 개역)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요 6:35,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6,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딴 몸이 있다는 것이 단순히 희망이 아니라
사랑만이 유일하게 되돌아오는 것으로써
오히려 썩어질것들과의 차이를 낸다는 것이
너무 너무 감사한 일이다. (썩는 몸을 구체화 시킨다.)

기생 라합은 그 여호와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수많은 남자들이 여자인 자신의 몸을 범하고 더렵혀서 이제 더 이상
아름다움은커녕 몸에 썩은내가 진동하는 판국에

그 여호와의 소식에 간담이 녹고 녹아서

(수 2:9, 개역)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수 2:24, 개역)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십자가에 썩을 자신의 몸을 붙이는 전쟁
그 몸을 못 박아 버리는 전쟁이
비로소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을
아주 아주 역설적으로
곧 죽음이 참된 생명이라고 외친다.

자신을 죽이는 그 십자가의 죽음이 그 저주가 어떻게 참된 생명인가?

마치 죽어가고 있는 예수님을 보고 낙원에서 저를 기억해 달라는 구원받은 강도의 고백이 아닌가?
베드로의 손을 뿌리치고 곧장 십자가로 달려가 구원받는 강도에게 뛰어드셔서 차이내는 그 십자가의 창조성

나누시는 그 차이성

인간들이 입에 발린 십자가를 운운하는 그 십자가와 비교도 되지 않는 차이나는 십자가다.

그 적극적인 죽음에 뛰어드는 십자가는

인간들의 믿음 조차도 거부하면서

내리 꼿는 불쌍히 여기심이다.

그리고 두 세계로 그 꼿힌 십자가를 기준으로해서 땅이 갈라지듯 세계가 갈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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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오늘 오전 설교에 그대로 나온다.

몸이라는 공간 해체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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