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부장의 믿음과 경계선 허물기
[피 33강] - 죽고 사는 문제 & 141강-눅23장 44-49(백부장의 고백)120819
(엡 2:13, 개역)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엡 2:14, 개역)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 2:15, 개역)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6, 개역)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 2:17, 개역)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 2:18, 개역)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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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101011피p118죽고사는문제
피33강 죽고 사는 경계선 허물기로 새로 성립
[10 대구강의 15] - [피 33] - 죽고 사는 문제
10,10,1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무너지는 경계선 !!
오늘은 교재 118페이지부터 하겠는데,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게 되면, 물론 구약도 그렇지만 특히 신약에는 죽고 사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살았다’, 혹은 ‘죽었다’ 라고 하는 것이 말이다. 보통 사람은 ‘죽었다’ 라는 것은 나중의 일로 미루어버리는데, 즉 지금 자기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잘 살 것인가?” 라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말씀은 인간이 정해놓은, 즉 “죽음은 나중의 문제이다” 라고 하는 그 경계선을, 특히 신약성경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경계선을 지워버리는데, 즉 그 경계선을 그만 계속해서 늘여버린다는 것이다. 즉 “죽어도 사는 것이 되고, 살아도 죽는 것이 된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경계선을 밀어버리니,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고 하니, 신약성경에서 우리 인간이 정해놓은 그 경계선을, 즉 “여기까지는 살아있고, 여기까지는 죽었다” 라고 하는 것을 예수님은 왜 의도적으로 허물어버리는지, 어떤 취지에서 그렇게 경계선을 허물어버리는지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보통 학교에서 보면, 선생님이 조금 늦게 오면 별난 아이들이 칠판에다 낙서를 하곤 하는데, 그러면 선생님이 오게 되면 그것을 그만 사정없이 지워버린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보지도 않고 말이다. 왜냐하면, 본격적으로 자기 수업이 시작되는데, 아이들이 장난을 친다고 “김근호 바보!” 라고 적어놓으면, 그것이 귀하다고 남겨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깨끗하게 지워버린다는 말이다.
◈ 예수님의 행위인가? 인간의 낙서인가?
그와 같이, 예수님이 이 땅이 오시기 전에 사람들이 생각했던 그 모든 것을, 이 성경말씀은 낙서정도로만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아하, 인간이 하는 것이 모두 낙서구나. 그러니 주님께서 하신 것만이 진짜 하나님의 계시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말이다.
그것만 생각하지 말고, 사실 우리는 중립이 아닌 엄연히 인간에 속해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든 것을 낙서정도로 생각한다고 하면, 사실은 우리가 애를 써서 잘한다고 한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한 순간에 허물어져야 하는 낙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 “왜 그러한가?” 라고 하는 의문점을 예수님의 행위를 통해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서, 주님이 하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는데,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주님에게 억울하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소연을 하는 식으로 다가가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일방적인 생각인데, 그러니 또 다시 주님 앞에서 낙서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하소연을 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기에 어쩔 수는 없지만, 그러나 정말 주님의 성령을 받은 자라고 하면, 관심이 자기의 아쉬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철저히 인간을 무시하면서 일을 하신다고 하는, 바로 그 이유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보다도 말이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모든 인간이 예수님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하는 생각보다는, 즉 예수님은 우리가 다가가는 곳에는 계시지 않고, 예수님이 나타나 주실 때만 비로소 만남이 성사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예수를 믿으려고 할 때는, 그런 곳에는 주님은 존재하지 않는데, 가짜만 자꾸 등장하지 말이다.
◈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공백’ 기간이 !!
그래서 성경말씀이 있는 것인데, 물론 구약에서는 성경 대신에 선지자들의 말씀이 있었는데 말이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은, 우리가 자꾸만 잊어버리는 것 중에서 하나인데 말이다.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는 하나님의 예언이 없었다가, 비로소 세례요한에게 예언이 주어지는데, 그러면 약 400년의 공백이 생긴다는 것이다.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데, 우리가 이러한 공백의 의미를 놓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들은 이 400년 동안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만약에 말라기 이전의 선지자의 경우에, 요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아모스나 호세아 등이 자기들이 한이 맺혀서, 그래서 성질이 나서 신의 계시라고 하면서 꾸며댔다고 한다면, 400년 공백도 결코 공백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기간이 너무 길다. 50년이 지났으니 나도 선지자가 한번 되어볼까?” 라고 하면서, “나도 선지자이다. 공백이 이렇게 길 이유가 없어. 신이 우리를 이렇게 버릴 이유가 없다” 라고 하면서 등장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400년의 공백은 엄연히 존재하는데, 그런데 이것을 견디지 못해서 ‘유대 공동체’ 자체가 신의 계시를 발산하는 집단으로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좀 어려운데, 즉 “계시가 멈출 때 마귀는 본색을 드러낸다” 라고 표현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마치 예레미야가 활동할 때는 거짓 선지자들이 기가 죽어 있다가, 그 이후에 죽이고 나서는 설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선지지와 선지자 사이에 꼭 활개를 치는데, 사사기를 봐도 그렇게 말이다. 사사가 등장하다가 없는 그 사이 사이에 꼭 이스라엘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우리도 이제 세상과 더불어 살자” 라는 식으로, 그렇게 자기 욕망이 추구하는 대로 이방나라의 우상을 섬기게 된다는 말이다.
◈ 공백을 메우려는 인간들, 왜?
아무튼 이렇게 공백이 있다는 것을, 그냥 그대로 공백으로 두면 되는데, 인간 쪽에서 어떤 식으로든 메우려고 한다면, 거기에서부터 인간은 자기의 숨겨진 악마의 본색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자기 본성을 드러내어서, 그것으로 메우려고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교회에 나왔는데, 두 달 뒤에 나왔다고 하면, 그것이 과연 공백이겠는가? 전혀 공백이 아닌데, 그것은 바로 주체가 강화되는, 즉 콘크리트화가 된다는 말이다. 콘크리트는 물렁물렁한 것이 아닌데, 딱딱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주체’ 라는 것은, 일종의 자기 ‘자존심’ 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혹은 ‘자아성’ 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말이다. 즉 “나는 나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주체가 하나님의 계시를 계속해서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강화가 되는데, 즉 콘크리트화가 된다는 말이다. 엄청나고도 강렬하게, 매우 딴딴해진다는 말이다.
◈ 목회자와 콘크리트 !!
그 대표적인 인간들이 바로 ‘목회자’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목회는 하면 할수록 자아가 단단해진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를 허물 수 있는 기준점을 자기가 그만 외면해 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목사는 자꾸만 남들을 가르치다가 보니,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전혀 자기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가르치다가보니,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말씀보다도, 자기가 가르쳤던 그것이 뭉쳐져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가리우는, 또 하나의 성경으로 자리잡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동일한 성경본문 보더라도, 전에 5년 차일 때 본 본문말씀과, 10년 차일 때 본 말씀과, 또한 20년 차가 되었을 때 본문말씀이 서로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 동일한 본문을 해석하더라도 !!
예를 들어서,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베들레헴에서 아이가 죽은 그 사건의 경우에도, 그 아기가 죽은 죽음의 의미가 언제나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달라진다는 것은, 그만큼 똑똑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적게 알았던 상태에서 본문을 보게 되면 은혜의 폭이 얇은데, 자기가 목회를 하면 할수록 “나는 지옥에 가는 것이 마땅한 놈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될수록, 그렇게 자기 죄를 더욱 더 깊이 깨달은 상태에서 그 사건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하나님이 왜 이런 아이들을 죽였지? 참 억울한 사건이네” 라고 하다가, 나중에 자기 죄를 깊이 알게 되면, “아하, 이 아이들은 죽어도 할말이 없네. 원래 죽어야만 될 아이들이 죽었구먼. 그리고 그런 죽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남기게 되면, 그것으로 영광을 돌리면 되는 거야. 우리 인간은 오래 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짧게 살더라도 자기 본색이 드러나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면, 그것으로 감사하는 것이지”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자기가 목회를 하면 할수록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임을 깨닫게 되는데, 즉 자기가 목회를 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 부끄럽고 몸 둘 바를 모르게 되는데, 즉 30년을 목회를 했더라도 전혀 자랑거리가 아님을 안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자아는 전혀 콘크리트가 아니라 깨어진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도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시켜서 한 것임을 날마다 깨닫게 되고, 자기의 자국들은 부끄럽기가 짝이 없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알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이지, 자기가 목회를 열심히 해서 알게 된 것은 전혀 아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그런 목회자는 당연히 설교도 그렇게 하는데, 물론 이런 목회자는 거의 없지만 말이다. 그러한 목회자가 거의 없다는 것은, 장로들 중에서도 그런 장로가 거의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 그것은 주체가 계시를 받지 못하면 딴딴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말라기의 예언으로서 ‘끝’ ??
아무튼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계시의 공백기간이 되는데, 이 말라기서의 내용은 책망이지만 말이다. 물론 우리는 아는데, 400년이 지난 이후에 세례요한이 왔음을 말이다. 하지만 그 당시 공백기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다음 선지자가 언제 올지는 기약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말라기의 예언으로 끝났다는 말이다. 그들이 기껏 아는 것은,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아는 것이 아니라, 말라기서까지의 예언을 종합해서, 그것으로부터 자신들의 구원의 길을 뽑아내어야만 될 입장에 놓여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뽑아낸다면, 그들은 누구를 기다리겠는가?
말라기서 마지막인 4장에 보면 엘리야가 등장하는데, 그 엘리야가 와서 하나님(부모?)의 마음을 사람에게,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그렇게 돌이키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엘리야가 오지 않으면, 올 때까지 고대하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말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 4: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그들이 생각하는 폭은 어떠하겠는가? 자기들 이스라엘 민족이 언제쯤 회복이 될는지, 바로 그것이 자기들의 초점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제자들이 만날 “이스라엘의 회복이 언제쯤인가요?” 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 하지만, 세례요한이 와서 보니 !!
하지만 세례요한이 와서 보니까 어떠한가? 물론 사람이 건전하다고 할 때는 “주여, 언제 오십니까?” 라고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지만, 그런데 세례요한이 보니,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릴 수준도 전혀 되지 못하는 인간들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 당시의 성경을 연구한 바리새인들과 세례요한 사이에 큰 갈등을 유발시켰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이 “세례요한아, 당신이 진짜로 선지자가 맞다고 하면, 우리와 연결점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라는 것이다. 마치 터널을 앞뒤로 뚫을 때는 서로 그 출구가 맞아야만 하듯이 말이다. 한 쪽에서는 이쪽으로 가고, 다른 쪽에서는 저쪽으로 간다면, 그 터널이 서로 연결이 되겠는가?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경우에는 밑에서 왔고, 또한 세례요한은 위에서 왔기 때문에, 서로 전혀 맞지를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그들을 보고 “야,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했고, 또한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마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마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마 3: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 3: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 나는 반드시 살고야 말리라 !!
그러니 그들이 엘리야가 어쩌고 하는 것은 다 헛구멍을 뚫은 것인데, 왜 그런고 하니, 그들의 생각이 무엇인가? “나는 살아야 한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거기에다가 이사야, 예레미야, 말라기 등등을 다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나는 죽어야 마땅하다” 라는 생각을 가진 게 아니고,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선지자의 말을 연구해서, 즉 “나는 반드시 살고야 말리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정신으로 가득하니, 그것을 두고 세례요한은 문제가 심각하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 물 속에 들어가자” 라고 하면서, 물 속에 그만 데리고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자” 라는 것인데, 그렇게 새로 시작하는 경우에만 메시야는 오신다고 하면서 말이다.
◈ 메시야는,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에게만 !!
하지만 새로 시작한 그들에게 메시야는 오셨는가? 오지 않다는 것이다. 세례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은 자들에게 메시야는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메시야는 누구에게 왔는가?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에게만 왔는데, 성령을 통해서 말이다. 즉 메시야는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에게만 왔다는 말이다.
지난 대전특강을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성령이 비둘기 같이 왔다고 하는 것은, 어느 특정한 한 사람을 지목해서, 즉 목적을 분명히 하는 차원에서 비둘기를 보냈다는 것이다. 비둘기가 5,000마리씩이나 날아온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온 사방을 뒤덮은 것이 아니라, 단 한 마리가 날아와서는 주목하게 하는데, 즉 “저 비둘기가 누구에게 가는가?” 라고 말이다.
◈ 오직 한 분으로부터 시작을 !!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모든 다수를 다 배격해버리고, 오직 한 분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백 명이 메시야를 기다렸다고 하면 백 명에게 와야 하는데, 주님께서는 백 명에게 그냥 와도 될 문제를, 그렇게 백 명에게 오지 않고, 그런 백 명은 다 도외시해버리고, 즉 물세례를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성령은 단 한 사람에게만 온다는 것이다. 그분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에게만 성령이 임한다는 말이다.
* 질문 - 만약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올라가는 그 상황이, 부활의 가능성이나 승천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온다고 하는 단절개념, 즉 기존의 것을 다 부정해버리는 계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물론 그러한데, 즉 구약에서 말라기와 연결된 터널 노선을, 인간들은 언제나 본능적으로, 육신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까,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는데, 그런데 그 노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노선은 바로 예수님의 역사이지, 인간들을 살리기 위한 그런 인간들의 역사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 성령이 왜 오셔야만 하는가?
성령이 개입되지 않으면, 즉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하는데, 그렇지요? 그러면 “성령이 왜 오셔야만 하는가?” 라는 문제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기다리는 마음에 메시야가 그냥 오면 되는데 말이다. 그 간절한 기다림에 말이다.
개혁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성령은 우리가 성경말씀을 제대로 지키지를 못하니까, 그래서 성령이 오면 지킨다고 한다면,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일단 구원을 하고 그 다음에 성령이 추가적으로 오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게 아니라, 성령이 아니라면 아예 처음부터 우리는 전혀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개혁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구원받은 자가 제대로 말씀을 지키지 못하기에 성령이 오셨다고 하면, 그래서 성령을 통해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한다면, 그렇다면 일단 구원문제에 대해서는 성령이 개입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 성령은, 반드시 예수님을 거쳐서 !!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성령이 개입해야 구원이 된다는 것은, 그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너희는 전혀 구원받지 못할 자이다” 라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오시는데, 그런데 그냥 곧 바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거쳐서 오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뭔가 하신 일이 있고, 만약에 그런 일이 없다고 하면, 애초부터 우리 인간에게 구원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다.
그래서 성령을 받게 되면 예수님만을 바라보게 되어있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왜냐하면 성령께서 거쳐왔던 그 통로를 다시 밟아가야 되니 말이다. 조금 어렵습니까?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면, 어떤 사람이 상대방을 보고 욕을 하는데, “당신은 신자도 아니야!” 라고 말이다.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그 코스가 “당신은 신자도 아니야!” 라고 바로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디를 거쳐서 가야된다는 말이다. 반드시 거쳐서 말이다. 그러면 누구를 거치는가?
항상 성령님은, 물론 이 사람뿐만이 아니라, 같은 형제이든, 아니면 이단이라고 해도 바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바로 가게 되면, 그것이 그만 인간에게 자기 계시가 되어서, 주체가 더욱 더 강화된, 즉 자기 자신이 느끼고 믿는 것이 자기를 옹호하는, 즉 자기 명예를 위한 하나의 새로운 계시로 굳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 누가 뭐라고 해도, ‘당신은 이단 !!
그러니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성령의 일이 아닌데, 그러면 누구의 일인가? 육신의 일이라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너는 왜 나처럼 되지 않는가?” 라는 의미인데, 즉 “너는 이단이야. 하지만 나처럼 되면 이단이 아니라고 해줄게” 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 십자가 마을이 이런 부분에 대해서 굉장히 오해를 많이 받고 있는데, 그렇지요? 즉 십자가 마을에서 “당신은 이단이야” 라고 하니까, 저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그러면 너거들만 이단이 아니네?” 라고 하면서, 그렇게 되받아 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가 아닌데 말이다.
◈ 여러분, 결국에는 허망할 겁니다 !!
제가 이번에 독일로 여행을 가서, “무엇이든지 다 해보세요. 결국에는 허망할 겁니다” 라고 했더니만, 30대 후반의 처녀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러면 당신의 말에 의하면, 당신이 그렇게 연구한 것도 다 허망한 것이네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제가 올린 여행문에 다 나와있는데 말이다. 바로 그렇게 되받아서 치는 것이 인간이란 말이다.
여기 이렇게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저는 어느 한 쪽을 지목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그 무엇을 하더라도, 음악을 하던, 미술을 하던, 목회를 하던, 무엇을 하던 간에 인간은 모두가 허망하다고 했는데, (어서 오세요!) 그런데 그 처녀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까, ‘이근호’ 라는 인간을 지목하면서 허망함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은, 자기도 포함해서 !!
쉽게 말해서, 사도바울의 경우에, 상대방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당신이 죄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렇게 말하는 사도바울 당신은 뭐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죄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는 것은, 사도바울이 어떤 특정한 사람을 지목해서 한 말이 아닌데, 거기에는 분명히 사도바울 본인도 포함이 된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1장 8절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저주를 받는 대상에는 누가 포함되어 있는가?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라고 함으로서, 복음을 안다고 하는 사도바울 자신이라고 해도, 그 저주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9장에서 “내가 남들에게 전파한 후에, 내가 도리어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한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갈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 종속인가? 포함인가?
이것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려고 하면 ‘집합론’을 강의해야 하는데, 부분집합과 집합론을 말이다. 수학에서 제일로 어려운 최첨단 부분인데, 즉 “종속인가? 포함인가?” 라는 개념인데, 이왕 말이 나왔으니 맛만 한번 보자는 것이다. 맛만 말이다.
오늘 모임에 성 집사님이 참석을 했는데, 그러면 오늘 모임에는 소속이 되어있다고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학원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장로님은 지금 영어학원을 합니까? 아무튼 우리가 지금 이렇게 성경공부를 하고 있지만, 하지만 성 집사님이 여기에 올인은 하지 않는데, 섭섭합니까?(ㅋㅋ) 자기 직업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참석했어도 포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잠시동안 지금 이 순간에만 종속이 된다는 말이다.
◈ 괴델의 ‘불확정성의 논리’ !!
이러한 난제를 ‘괴델’ 이란 사람은 도저히 풀 수가 없어서, “수학의 모든 공식은 수학 내부에서는 그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라고 결론을 내렸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불확정성의 논리’ 라는 것인데, 지금은 철학에서 제일 어려운 문제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3+5=8’이 맞는데, 물론 맞다기보다는 그렇게 정했는데, 하지만 그것이 과연 맞는 것인지, 즉 옳은지에 대해서는, 그것을 수학에서는 아무도 증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사과가 여기 하나있고, 또 하나가 더 있으면, 그러면 두 개가 된다” 라고 했을 때, 그런데 바로 여기에 시비를 건 천재소년이 있었다는 말이다.
◈ 시비를 건 천재소년 ‘에디슨’ !!
그가 바로 ‘에디슨’ 인데, 그 소년은 그게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즉 ‘1+1=2’ 라는 것인데, 그래서 에디슨은 “선생님, 그것을 왜 ‘2’ 라고 합니까? ‘3’ 이라고 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뭡니까?” 라고 했다는 말이다. 에디슨은 왜 사과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두 개가 되는지, 그게 이해가 되니 않았는데, 그게 4살 짜리 아이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는 말이다. 그러니 얼마나 똑똑하냐는 것이다.
* 선생님 : 여러분, ‘1+1=2’ 입니다.
* 에디슨 : 선생님, 왜 ‘2’ 라고 합니까? 왜 ‘3’은 안 됩니까?
* 선생님 : 그것을 ‘2’ 라고 부르자고 정했어요.
* 에디슨 : 그런데 하필이면 왜 ‘2’ 입니까?
* 선생님 : 그렇게 정했어요.
* 에디슨 : 그게 옳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 선생님 : 그렇게 정했따니깐.
* 에디슨 : 저는 ‘2’가 아니라 ‘3’ 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 선생님 :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 에디슨 : 예, 감사합니다.
◈ 성도는 에디슨보다 똑똑해 !!
물론 세례요한은 에디슨보다도 더 똑똑한데, 왜 그런가? 어떻게 해서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 자기보다 앞서는지를, 자기보다 6개월(?) 뒤에 태어난 분이 어떻게 자기보다 앞서서 계시는지, 그게 어떻게 납득이 되고, 또한 전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성도의 모습이어야 하는데, 즉 바보 같은데 너무 똑똑하다는 것이다. 성도는 너무나도 똑똑한 사람인데,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말이다.
그 똑똑함이 무엇인고 하니까, 남을 볼 때 개인적인 자격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임하게 되면, 어떤 특정한 사람을 두고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제가 다 죄인 중의 괴수가 되고, 우리는 이단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때 “그게 맞습니다!” 라는 소리가 나오면 한 형제가 된다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이단임을 아는 말이다.
이것으로 찬양을 한다고 하면, 그 가사가 어떻게 되는고 하니, 1절은 “나는 이단입니다” 라는 것이고, 2절은 “저도 이단입니다” 라는 것이고, 3절은 다같이 합창을 하는데, 즉 “우리는 모두가 이단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려서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어때요? 그러면 제법 멋있는 찬양이 되지 싶은데 말이다.
◈ 할 일이 없어서 합니다 !!
이번에 서울 하나교회에서 강의를 하는데, 모든 것을 다 마치고 나서 누군가가 질문을 했는데, 아마 녹음은 되지 않았지 싶은데 말이다. 실컷 강의를 2시간을 넘게 하고 나서 말이다. 어떤 분이 심각하게 질문하기를, “목사님은 이런 강의를 왜 하십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분위기가 그만 숙연해지고 말았는데, 여기 저기서 “야, 큰일났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제가 대답하기를, “할 일이 없어서 합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ㅋㅋ).
왜 그런 답변을 했는고 하니, 저는 그런 경험을 종종 하는데 말이다. 누군가가 질문을 한다는 것은, 반드시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항상 옳은 일을 한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나는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데, 그런데 ‘이근호’ 라는 작자가 나타나서 다른 엉뚱한 소리를 하니, 그러니 그를 한번 쑤셔보자” 라고, 그렇게 시험하는 차원에서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합니까?” 라고 말이다.
사실 상대방은 “나는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합니다” 라는 답변을 기대했는데, 제가 만약에 그렇게 했다고 하면, 아마 그 사람은, “당신만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강의시간에 그렇게 비난했던 목사님들도 주의 일을 하는 것인데, 그렇게 낮추고 폄하를 하면 됩니까?” 라고, 그런 반박을 준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장담은 못하지만 말이다(ㅋㅋ).
그러니 이 사람은 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보는 것인데, 아무튼 “당신은 왜 이런 강의를 합니까?” 라는 질문이, 그것도 강의가 모두 끝나고 동영상 편집을 한다고 있는 그런 질문을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거기서 제가 말하기를, “저는 놉니다” 라고 대답을 하니, 그렇다면 그 사람은 뭐라고 해야하는가? “저도 놀고 있습니다” 라고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두 시간 동안이나 땀을 뻘뻘 흘리고 나서 “나는 놉니다” 라고 했으면, 그러면 자기도 따라서 “나도 놉니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참으로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데 말이다. 하지만 차마 그런 말은 하지 못하고, 그 다음부터는 입을 다물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 바리새인들과 성도의 차이점은?
바리새인들과 성도의 차이점은 무엇인고 하니까,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하는 행위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데, 그런데 성도는 그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서 하는 것만이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데, 그렇게 자기를 부인한 다음에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이 자기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기를 죽이기 때문에, 자기 십자가를 자기가 짊어진다는 말이다. “나는 죽어야 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데, 하지만 그 십자가는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녹기 때문에 계속해서 주님을 따라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진 십자가가 너무나 초라해진다는 것이다. 마치 뻔데기처럼(?) 말이다.
◈ 신약성경에 나오는 명령법은?
그렇게 해서 주님의 십자가만 점점 더 크게 보인다고 하면, “그러면 너희가 구원을 얻을 것이다” 라는 것이다. 물론 말씀을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지키지 못하는 것 때문에 무효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그것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명령법의 특징이라는 말이다. 즉 분명히 명령은 해놓았는데, 우리는 지키지는 못하고 말이다.
개혁주의는 여기에서 끝나는데, 즉 “주었는데, 못 지킨다. 그래서 안 지킬란다” 라는 것이 개혁주의의 논리라고 하면, 즉 “명령을 주셨다. 못 지킨다. 그러니 너는 못하지? 그런데 성령께서는 하게 하신다” 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 또 다시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 당신, 이단이지? 예, ‘우리’는 이단입니다 !!
그러니 만약에 어떤 사람이 “너는 이단이야” 라고 할 때는, 곧 바로 화를 내지 말고,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즉 “왜 저 양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는가?” 라고 하면서, 그렇게 위를 거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을 지키는 것도 위를 거쳐야 하고 말이다.
만약에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복음도 모르면서 밥만 잘도 쳐 먹는다” 라고 한다면,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르는데, 누구를 특별하게 지목하지 말고 말이다. 왜냐하면, 계시가 자기 계시로서 굳어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 계시로 말이다.
그러니 교회에서 밤이면 밤마다 찡찡거리지 말라는 것인데, 마치 자기 혼자서만 고생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건 자기 혼자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고생을 하던 말던 말이다.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어떤 사람은 부유하게 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이지,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대로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자기가 받은 은사가 너무 힘들다고 해서 투덜거린다고 하면, 즉 그렇게 직접 타인과 비교하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자기 계시가 그만 가로막는 셈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죽지 아니하면, 살 수 없어 !!
계속해서 강의를 하겠는데, 이 신약성경의 특징은 근원적으로, 즉 개인적으로 기다리고 어쩌고 하라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다 죽었다”, 혹은 “다 살았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죽고 사는 문제가 신약성경에서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즉 “죽지 아니하면 살 수 없다” 라는 것이다.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보통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는, “나는 살아있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죽었다, 살았다” 라는 것이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닌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앞장세워서 일을 하시기 때문에 말이다. 지금 교회 안이 덥지 않나요? 창문을 좀 열었으면 좋겠는데, 저만 더운가요? 그러면 저만 옷을 좀 벗고 하겠습니다.
구약은 마치 어떠한고 하니까,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시고, 여기에 이렇게 인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저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니 인간은 다칠 일이 없는데, 즉 인간은 인간으로서 충분히 그 존재감이 유지되는데, 그런 입장에서 멀리 계시는 하나님을 찾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구약은 말이다.
그런데 그만 하나님에게서 누군가가 오셨다는 것인데, 그렇게 예수님께서 오신 입장에서 우리 인간의 존재감은 어떠한고 하니, 그 전체가 살아있다는 말은 있지만, 사실은 죽은 자에 해당이 된다는 겁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신약성경의 해석이 새롭게 시작되어야 하는데, 물론 구약성경도 그렇지만 말이다. 아무튼 여기서 성경해석을 새롭게 하자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개인으로 짧게 보았던 그 인생을 신약성경에서는 길다랗게 늘여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살아있다, 죽어있다” 라고 여기는 경계선을 주님은 ‘낙서’ 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그만 지워버리고, 그 경계선을 새롭게 긋는다는 말이다. 모든 인간들의 경계선을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수평적으로 “살았다, 죽었다” 라는 것이 아니라, 그만 수직적으로 층을 만들게 되는데, 1층과 2층으로 말이다. 그렇게 층을 만들어서, 인간의 역사와 주님의 역사를 대비시키는 방향으로 신약성경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항상 예수님을 앞장세워서 !!
이제 교재 119페이지를 보겠는데, 방금 한 이야기한 것이 바로 그것인데, 즉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항상 앞장세워서 일을 하신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투명하게 쳐다보던 시절은 그만 끝이 나고, 즉 “하나님, 혹시 저를 아십니까?” 라고 하던 시절은 다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게 구약시대인데 말이다.
처음에 교회에 나온 할머니들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나님, 하나님!”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앞에 무엇을 설치할 줄 모르는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그 앞에 놓을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 교인들도 그렇고 말이다.
우리교회의 경우에도 이렇게 아파트 앞에 있다가 보니, 여기에 사시는 할머니들이 제법 많이 다녀가셨는데 말이다. 그런 할머니들이나 일반 교인들을 보면,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해서 생각하는 분들이 없다는 것이다.
◈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라고 예수님을 ??
특히 고신 측에서 왔다는 분이 기억이 나는데, 예배시간에도 몇 번을 참석하고 식사도 같이 했는데 말이다. 아마 이 동네에 사는 것 같은데, 또한 전도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분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십계명’ 이라는 것이다. 십계명을 제대로 지켜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라고 예수님을 믿게 하셨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옵션’ 이라고 했는데, 게시판에서 포도나무 교회의 목사를 평해달라고 해서 답변을 하면서 말이다. 즉 하나님은 있는데, 그 다음에 예수님을 하나의 옵션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하나님이 우상이라는 사실을 상상도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 죽은 인간에게서 나온 신은, ‘죽은 신’ !!
무슨 말인고 하니까, “죽은 인간에게서 나온 신은 다 죽은 신이다” 라는 말이다. 즉 죽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신이라고 해도 모두가 우상이란 말이다. 그러한 신은 분명히 잘못된 신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책임이 인간의 죄에 있음을 분명히 하겠다는 것이다. 지금 말이 조금 어려운데 말이다.
로마서 1장에도 나오듯이, 우리 인간은 누구든지 신을 알고 있는데, 그렇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하나님이 예수님 앞에서 우상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그 신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신을 상상해낸 인간 자체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신 관념’ 이라는 것이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 보이지 않는 신, 보이는 신 !!
사도바울이 아테네에 갔을 때 얼마나 신이 많았는지 모르는데, 물론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런 신을 이야기하면서 그 앞에 뭐라고 붙였는고 하니까, ‘보이지 않는’ 이라고, 즉 ‘보이지 않는 신’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신?)
(행 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행 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그러면 보이지 않는 신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물론 ‘보이는 신’ 인데, 여기서 참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런 보이지 않는 신을 보이는 신으로 전개를 시키는데 있어서, 그것을 그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모양으로 조각을 하고, 또한 그림으로, 모자이크로 변경을 시켰다는 것이다.
◈ 이제는 예수님도 그만 우상으로 !!
이러한 작업을 한 자들이 바로 그 당시의 천재들이라고 할 수 있는, 즉 비잔틴과 중세예술의 대가들로서,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등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을 흉내내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있었고 말이다. 바로 그런 자들이 보이지 않는 예수를, 그만 보이는 예수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무엇이 들어갔는가? 인간들의 손과 그 기술력이 가미가 되어있는데,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나타난 예수님은 어떠한가? 십자가로 나타나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십자가를 그림으로 그리는데, 그것도 감동적으로 십자가에 사람을 매달면서 그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과거에는 하나님이 우상이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도 그만 우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들의 작업 때문에 말이다.
◈ 부활 이후의 예수님 모습은?
하지만 예수님의 형체는 그렇게 고정될 수 없다는 것을, 부활 이후에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알 수가 있는데, 즉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두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서도 몰랐고, 그리고 갈릴리 바다가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예수님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라고 하는, 과거 베드로와의 처음 만났던 일에 대한 사건과 기능으로 알게 된 것이지, 인물을 보고 안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요 21: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요 2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요 21: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요 21: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도마의 경우에도,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못자국과 창자국을 만져서 안 것이지, 예수님의 인물을 보고 안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모습은 그때그때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예수님의 모습은 또 달랐다는 것이다. 그때 예수님의 머리카락은 흰 양털과 같고, 눈은 불꽃과 같고,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과 같고,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들의 머리 속에 각인이 되어있는, 그런 인간들이 기존의 기억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에, 인간들이 이해하고 있는 자기 모습에 대한 모든 것들을 다 피해가 버린다는 말이다.
기존의 인간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상(像)은, 아라비아 예수, 한국 예수 등등, 그렇게 되어버리니, 그러한 것들은 기껏해야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죄의 한 단면임을 고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 라는 말이다. 일류 화가가 그림으로 그려서 감동을 받는 십자가가 아니고 말이다.
◈ 보이는 않는 신은, 우발적인 사건으로 !!
(계속해서 ‘따르릉’) 누가 전화를 받아보세요. 여기서 조금 더 상세히 해보겠는데, 즉 “신이 우상이다” 라고 하는 것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바울이 선교를 하면서, 보이지 않는 신을 보이는 신으로 만들었다고 했는데, 그러니 보이는 않는 신은 기존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형체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발적인 사건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우발적인 사건인고 하니까, 그 앞에 무엇이 하나 붙는데, 즉 말씀 사건, 혹은 복음전달 사건이란 말이다. 즉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난다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전달하는데 주체가 누구인고 하니, 성령이 주체가 되어서 말씀사건을 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 성령께서는 말씀을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해석해서 전달하게 되는데, 곧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사도행전과 로마서를 연결시키면 그렇게 정립이 된다는 말이다.
◈ 칼 바르트과 하이데거의 ‘사건’ !!
그래서 칼 바르트가 ‘사건’ 이란 점에 대해서 굉장히 강조했는데, 물론 그것은 하이데거의 철학적인 영향이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주장하기를, 숨어있는 존재가 바깥으로 나올 때는 ‘사건’으로 나온다고 했다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여기서 오해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냥 사건이 아니라 ‘언어사건’ 이라고 했는데, 즉 사건 앞에다 ‘언어’ 라는 것을 붙였다는 것이다. 즉 하이데거가 주장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숨어 있는 존재가 언어사건을 통해서 등장하게 될 때, 그때 ‘존재’가 아닌 ‘존재자’들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가 된다고, 즉 자기 존재자의 기반인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고 보았다는 말이다.
◈ 존재는, 존재자가 없이는 확인될 수 없어 !!
다시 이야기하겠는데, ‘존재자’ 라고 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와 같은 경우를 두고서 존재자라고 하는데, 그런 우리들을 존재자로 되게 하는 것은, 숨어 있는, 즉 보이지 않는, 그러한 밑바탕에 존재라는 것이 있는데, 하지만 그 존재는 존재자가 없이는 확인이 될 수 없다고, 그렇게 하이데거는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존재가 존재자에게 알려질 때는, 그냥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에 존재가 “여기에 내가 있다” 라고 해버리면, 이 존재는 그만 존재자가 되기 때문에 다시 헛방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나는 메시야다” 라고 나오면 헛방인데, 왜냐하면 “니가 뭔데? 니가 뭐가 유별난데? 내가 니보다 못한 것이 뭔데?” 라고 나오니까 말이다.
◈ 니는 니고, 나는 나다 !!
그러니 오늘날 성령을 받지 못한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설교를 들어도, 그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예수는 예수의 인생을 살면 되고, 또 부처는 부처의 인생을 살면 되고, 나는 내 인생을 살면 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어쩌다가 한번 교회에 나와서 설교를 듣는다고 하더라도 “그래, 당신 말이 맞다고 해줄게. 나는 못나고 당신은 훌륭해” 라고 하는데, 그리고 나서 어느 자리에 머무는가? 즉 “니는 니고, 나는 나다” 라는 것에 여전히 머물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도 집안에 시집을 간 며느리가 고집이 센 시부모에게 전도를 하면 뭐라고 하는가? “그래, 니는 니가 믿는 대로 믿어라. 나는 내가 믿는 대로, 조상에게 제사나 지내면서 그냥 살다가 죽을란다. 그러니 나에게 이러쿵저러쿵 하지 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존재는 존재자가 되면 안 되는데, 그냥 그대로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즉 존재가 존재자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는 그대로 있으면서 존재와 만날 때는 사건을 통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언어사건’ 이라는 것이다.
◈ ‘사건’과 ‘언어사건’의 차이점은?
어려워도 이것을 좀 설명을 해서 해결을 해야하는데, 왜냐하면 칼 바르트와 불트만, 그리고 몰트만이 모두 여기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내놓으라고 하는 현대 신학자들인데 말이다. 즉 “사건과 언어사건의 차이가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사건에 되어버리면 여기에 구멍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땅 속에 있는 용암이 분출하면 거기에는 ‘뻥’ 하고 구멍이 생기고, 양쪽에는 화산재가 쌓이는데, 그리고 나중에 비가 오면 백두산의 백록담처럼 분화구가 생기고 해서 화산이 된다는 것이다. 가운데는 구멍이 뚫려있고 말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그렇게 구멍이라고 보지 않고, 언어사건이기 때문에, 언어로서 공동체 의식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 지금 야구가 우째 되었는교?
예를 들어서, 지금 삼성과 두산이 플레이오프를 하고 있는데, 만약에 삼성과 두산이 그런 야구경기를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삼성이 9회 초에 역전을 하는 순간에 ‘와아’ 하고 고함소리가 들리는데, 그때 마침 가게를 지나가다가 TV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우째 되었는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게 주인이 “예, ‘8:7’로 역전을 했심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원래 모르는 사이인데, 그런데 삼성을 응원한다는 것을 매개로 해서, 물론 그것이 일종의 낯선 사건이지만, 하지만 언어가 매개가 되어서 사건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두산이 점수를 내었다고 하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삼성이 점수를 내니, 이제 그 가게에서 맥주를 한 잔 하면서 9회 말을 같이 보는데, 그래서 서로에게는 “이제 한 회만 지키면 하면 된다” 라고 하는 공감대가 생겼다는 것이다.
◈ 언어사건이 발생하게 되면, ‘공동체’가 !!
그렇게 되면, 낯선 두 사람이 서로 하나가 되는, 그런 언어사건이 발생하게 되면, 그것이 곧 사회가 되고,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 인간에게는 감추어진 공통점이 있다는 것인데,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본인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가 어떤 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언제부터 야구를 그렇게 좋아했지? 내가 언제부터 삼성을 그렇게 열렬히 응원했지?” 라고 하면서, 갑자기 두 사람 사에는 서로 짝짝쿵이 되면서 새로운 공동체가 생기게 된다는 말이다.
◈ 교회에도, 복음이란 언어사건이 ??
이런 소리를 들으니, 여러분은 갑자기 어디에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나요? 일종의 아이디어와 같이 말이다. “아하, 교회에도 복음이란 언어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만날 수 있겠구나. 교회부흥에는 그만 짱이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렇게 써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이데거의 이론에 의하면, 존재자들, 쉽게 말해서, 인간들, 혹은 실존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존재자들은 어떤 공통점이 있는고 하니, 전부가 다 ‘존재’ 라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 하지만, 성도와 성도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어 !!
하지만 성도와 성도 사이에는 어떠한가? 그런 인간적인 공통점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목사가 설교를 잘해서 모였다고 하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없는 속성을, 예수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아가페로서 개인에게 심어지게 될 때, 비로소 공통점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잠재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있던 것인가? 예수님에게만 있던 것으로서, 그것이 성령으로 통해서 각각의 개인에게 투입된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그건 우리의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공통점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하이데거가 언약을 모르기에, 또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모르고 말이다. 그냥 그가 관심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 즉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공동체를 잘 이루어서, 사로 사이좋게 지낼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인데, 그러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서로 싸우지 않는 이상적인 천국을 만들어보자고 한다는 것이다.
◈ 하이데거 - 중요한 것은, 대화와 소통 !!
그러니 우리 인간들은 서로 서로 아웅다웅하면서 싸울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서로 이야기를 하게 되면 얼마든지 친구가 될 수 있고, 또한 원수지간이라고 해도 다시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로가 대화를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것인데, 그러니 중요한 것은 ‘대화’ 라는 말이다.
그러니 완전히 노무현 사상과도 같은데, 소위 ‘열린 정부’ 라고 해서, ‘소통’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정치철학이 바로 소통이고 열린 것인데, 그러니 청와대가 국민들과 대화하고 말이다. 그러니 지배하는 정부가 아니고, 국민들도 얼마든지 서울시청 앞에서 촛불로 자기들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국민들의 의사가 소통되고 대화가 되는, 그런 열린 정부가 노무현 정권의 이상이었다는 말이다. 북한의 경우에도 대화하면 된다는 것인데, 물론 퍼주면서 말이다.
◈ 정의사회를 구현해야 ??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이회창을 비롯한 보수진영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그렇게 퍼주고 또 퍼주면, 정치가 추구해야 될 것은 ‘정의사회’ 인데, 만약에 노무현 정부처럼 해버리면 이 정의라는 것이 그만 소통에 완전히 밀려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정의는 무엇인가? 착한 자는 상을 주고, 악한 자는 벌을 주는 것인데 말이다. 로마서 13장 1절에서도, 모든 권세자들은 하나님의 사자로서, 한 자는 상을 주고, 악한 자는 벌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고 하는데 말이다.
(롬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런데 이런 정의로움이 날아가고, 그 정의가 무엇으로 바뀌는가? 소통으로 바뀌는데, 하지만 그렇게 소통을 하려면 북한을 이야기하기에 앞에서 국내의 어려운 사람들을 먼저 돌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해야 가난한 자들과 부자들이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거리가 더 좁아지는데,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수입을 더 늘려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부자들에게 빼앗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게 되면, 그러면 부자들이 생산능력이 떨어지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하나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부자들은 외국으로 도망을 가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민을 가지고 나면, 그 막대한 국가부채는 누가 감당하겠느냐는 말이다. 북한과의 대치상태에서 국방비만 해도 엄청난데, 그런데 상태에서 복지예산이 그렇게 늘어나게 되면, 거기다가 북한까지 도와주게 되면 말이다.
지금 이러한 복지정책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나라들이 한 두 국가가 아닌데, 특히 유럽의 이탈리아가 그러한데 말이다. 물론 프랑스, 독일, 스페인, 그리스, 핀란드, 노르웨이 등도 모두가 다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호주나 뉴질랜드도 그렇고 말이다. 불법 이민자들이 마구 들어오니까, 국가예산이 바닥이 날 정도라는 말이다. 아무튼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대화와 소통도 중요하지만 이런 정의로움이 희석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공동체는, ‘칩’이 박혀서 !!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교회’ 라는 공동체를 만들 때, 인간의 공통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신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공동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너무 모호하게 말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말해보라고 한다면, 그것은 간단하다는 말이다.
그것은 곧,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태어나시고, 고생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리고 부활하신 그 경로를, 하나의 반도체 칩으로 만들어서, 성령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심어주게 되면, 우리의 인생 길은 졸지에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를 쳐다보셨는가?
그렇게 되면, 성도 안에 있는 ‘공동체’ 라는 것은 각자 각자의 한 풀이가 아닌, 새롭게 주신 주님의 길, 즉 고난과 영광이 함께 병행된 길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 길을 가시면서 도대체 누구를 쳐다보셨는가? 이 세상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원하셨는가? 예수님이 평소에 누구를 쳐다보면서 말씀을 하셨느냐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행할 때 어떻게 하셨는가? 그냥 “이제 묵자” 라고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저희에게 나타나게 하옵소서” 라고 하니, 계속해서 떡과 물고기가 나왔다는 말이다. 즉 아버지의 뜻이란 말이다. 그러니 우리도 기도할 때는, 아버지의 뜻을 전달하는 하나의 매개물이 되게 해달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주기도문에 나오는 내용이고 말이다.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너와 나’가 아닌, 예수님과 더불어서 ‘우리’ !!
그러므로 예수님의 공통체는 어떠한고 하니, 우리에게 주어진 그 공통적인 요소들로 인해서, ‘너와 나’ 라는 것이 사라지고, 예수님과 더불어서 ‘우리’ 라는 것이다. 기존의 우리끼리의 우리가 아니고 말이다. 오로지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제는 ‘우리’ 라는 새로운 용어를 예수님이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 그것을 두고 ‘연합’ 이라고 하고, 다른 말로 ‘세례’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게 로마서 6장에 나오는데, 즉 “나와 함께 죽고, 나와 함께 산다” 라는 것이다. 그것은 평생을 가야될 문제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자살하자는 것은 아니고, 성령께서 그렇게 죽게 하시고, 살도록 인도를 하신다는 말이다.
(롬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 하나님의 의(義)의 종으로 !!
그렇다면 이렇게 ‘죽고 살면’, 그러면 드러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의(義)의 종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존재에서 나온 본성이 아니라 주님이 심어주신 것이고, 또한 그것이 발현되는 가운데 하나님의 종이 되기 때문에, 윤리나 도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진짜 하나님의 의가 바깥으로 나오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어라!” 라고 하는 것이지, “착하게 살자” 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착하게 살자는 것은 인간들이 알아듣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알아듣는 공통적인 것은 ‘우리’에게 들어있는 것이 아니기에, 예수님의 공동체인 ‘우리’ 라는 것은,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것을 내놓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전혀 이질적인 것을 받았기에 말이다.
그래서 전혀 복음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인간적인 “서로 어려울 때 돕자” 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일반적인 친목계이지, 그것을 교회라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신약성경에서는 항상 죽고 사는 문제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재 119페이지 중간에 나오는데, 한번 살펴보자.
** 성화란,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이토록 완벽하게 거룩하심의 증거로만 나타난다. 그리스도 인에 있는 자는 ‘주님 안’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거룩한 성도이다.
◈ 성화(聖化) - 주님이 하신 일이 이처럼 거룩합니다 !!
이 성화(聖化)를 다른 말로, ‘거룩하게 됨’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완벽한 거룩’ 이라는 말이다. 즉 “주님이 하신 일이 이처럼 거룩합니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예수님 안에서 보여주는 성화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화는 주님이 우리를 데리고 하실 일이란 말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2절을 보게 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거룩하여진 성도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을 해석하기를, 고린도 교회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성도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교회는 양적인 테두리 개념이 전혀 아닌데, 즉 등록을 한다고 해서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결과로서의 교회라는 것이다. 즉 주님께서 성도라고 불러주신다는 것을 믿게 되면, 그런 결과로서 곧 ‘교회’ 라는 것이 형성이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먼저 교회를 만들어놓고, “우리, 거룩하게 삽시다” 라는 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 구원은, 교회가 아닌 주님의 소관 !!
물론 한국교회가 왜 그런 식으로 하고 있는지 뻔한데, 먼저 교회를 만들어놓고, 이제부터는 두 번째 작업에 들어가는데, 즉 거룩하게 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구원은 교회가 아닌 전적으로 주님의 소관이니 말이다. 그러니 진짜 교회는, 우리가 아무리 없애고 없애도, 주님께서 또 만들고 만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추석 때 엄마가 열심히 송편을 만들고 있는데,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3살 먹은 아이가 송편을 만들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송편은 다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 자기가 만든 송편만이 진짜 송편이고, 엄마가 만든 송편은 송편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짓을 한국교회가 하고 있는데, 즉 주님께서 만든 교회는 교회가 아니고, 자기들이 만든 교회를 두고서 교회라고 한다는 말이다. 결국 이쪽은 “이 교회는 내가 만들었다” 라고 하면서, 그런 교회를 만든 자기를 증거하니, 엉터리 계시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 주님의 성화론과 인간의 성화론 !!
그러니 우리가 성화론을 이야기하면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성화론을 거론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즉 주님의 성화론이 이러 이러하다면, 그러면 인간들의 성화론은 과연 어떤지, 그것을 이야기해서, 두 개의 차이점을 뚜렷하게 드러내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을 초연하게 사는 도사들이 아니기에, 인간들이 생각하는 성화론에 항상 미끄러지고 넘어진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육신이 있는 이상은, 그런 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을 지적함으로서, 우리가 어느 성화에 속해있는지 계속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120페이지를 살펴보자.
** 이 거룩이 ‘개인적 거룩’으로 전환된 소지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더 이상 ‘그리스도 안’과 무관한 ‘성도 안’ 이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그리스도 안’에는 성도가 포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종속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포함’과 ‘종속’이란 개념자체가 너무 어려운데 말이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하자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언어가 모든 사건들을 다 함유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종속’, ‘포함’, ‘함유’ 등과 같은 개념들은, “신이 어떻게 자기가 만든 피조물 속에서 신이 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와 연결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우리 생각에는, 자기가 만든 피조물이니까, 하나님은 그 피조물 바깥에 계셔야 하는데, 하지만 자기가 만든 그 안에 들어오면, 그 신은 “포함된 것인가? 종속된 것인가? 함유된 것인가?” 라는 것을 용어로 표현하기가 아주 난처해진다는 것이다. 신학적으로도 난제가 되어버렸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러므로 성도를 증거하기 위한 성화론이란, ‘그리스도 밖’에서나 인정을 받는 이론이다. 성도는 오로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주님의 거룩케 하심을 증거할 따름이다.
◈ 십자가를 믿는 행위로 구원을 ??
무슨 의미인가? 성도는 주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야지,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포도나무 교회의 목사에 대해서 제가 댓글을 달아놓았는데, 제일 먼저 무슨 이야기를 했는고 하니까, “십자가를 믿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주장한다고 말이다. 여기서 믿음과 행위를 같아 썼는데, 즉 십자가를 믿는다는 행위라고 말이다.
로마서 9장에 보면, 믿음과 행위를 같이 사용하면서도 서로가 대립이 되는데, 하지만 제가 여기에서 이렇게 써놓게 되면, 저쪽에서는 어떻게 보이는고 하니까, 믿는다는 것도 그만 행위가 되어버리는데, 그렇게 저쪽에서 막무가내로 우길 수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로마서 9장 32절을 찾아보겠는데, 물론 여러분도 잘 아는 구절이지만 말이다.
(롬 9: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여기에 보면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라고 하는데, 즉 믿음이 아닌 행위에 의지했을 때, 그런 소리를 들은 유대인들이 뭐라고 할 수 있는고 하니까, “그러면 그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의 행위가 맞잖아?” 라고 나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 내가 믿는가?, 누가 믿게 하시는가?
그러니 제가 하는 말을 “당신은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의지합니까?” 라고 들으면, 듣는 사람이 굉장히 기분이 나빠하면서 “아니, 믿더라도 내가 믿지 누가 믿는다는 말인가? 내가 믿어서 내가 구원받는데, 그렇게 내가 믿으니, 그게 행위가 맞잖아” 라고 말이다. 그렇게 반발이 들어오는데, 물론 지금도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고 말이다.
사도바울은 행위와 믿음을 같이 섞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들은 섞어도 된다고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믿음의 주체를 자기 자신으로 보기 때문에, 그러니 자기에게서 나온 것은 모두 자기 행위라는 말이다. 그것도 야고보서를 들먹이면서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
하지만 여기 로마서 9장 32절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그렇게 섞이게 되면,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라고 해서, 행위는 인간이 주체이지만, 그러나 믿음은 결코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즉 주님이 원하는 믿음은 그런 인간의 행위에서는 나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즉 믿음은 전혀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과연 나오는지, 나오지 않는지, 그것을 측정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 자체가 하나의 돌이 되어서, 인간에게서 나오는 믿음은 여기에 부딪쳐서 깨어지게 되어있고,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내가 믿은 것이 아니라, 주께서 믿게 하셨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를 통과해서, 십자가 안에 거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성질이, 즉 “과연 옳은 믿음인가? 믿음이 아닌가?” 라는 것은, 바로 십자가를 기준점으로 해서 걸러내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기준으로 해서 말이다. 바로 그것을 사도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다.
◈ 이근호 신학은, 자기 믿음에 대해서 답변도 ??
어떤 사람이 고맙게도(?) 저를 두고서 그렇게 비난을 했는데, 자기가 “이근호 목사, 당신은 예수님을 믿습니까?” 라고 하니, 이근호 목사가 믿음이 없어서 답변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근호 신학은 아주 간단한데, 자기 믿음에 대해서 답변도 못하는 신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게 어떻게 옳은 신학이냐는 말이다.
그런 소리를 들은 사람이라면, 과연 이근호 목사가 무엇이라고 답변을 했는지 궁금할 텐데, 정말이지 꿀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었는지 말이다. 양무리 마을 사이트에 가보면, 제가 답변한 것이 그대로 올라와 있는데, 즉 “제가 어떻게 믿는지는, 예수님이 아시고 하나님이 아십니다” 라고 말이다.
그 양반이 보기에는 바로 그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그 사람이 저에게 “목사님은 예수님을 믿습니까?” 라고 했을 때, 제가 답변하기를 “제가 어떻게 믿는지는, 우리 주님이 아시고 하나님이 아십니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자기에게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했으니 엉터리 신학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교회에서 있었던 일과 똑같은데, 즉 “목사님은 강의를 왜 합니까?” 라고 했을 때, “저는 놉니다” 라고 하니 그만 입을 다물어버리는데, 만약에 그때 제가 “주의 일이기에 합니다” 라고 하면, 그 양반도 “저도 주의 일을 합니다” 라고 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제가 “저는 놉니다” 라고 하니, 그 사람이 “저도 놉니다” 라는 소리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개인 대 개인’이 아닌, 십자가로 !!
그러니 다음과 같이 하면 되는데, 즉 “이근호 목사님의 믿음을 주님께서 아신다고 하면, 저의 믿음도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둘의 사이가 ‘개인 대 개인’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 올라가게 되는데, 그래서 “아하, 주께서 주신 믿음이라야만 십자가를 통과한 믿음이구나” 라고, 함께 공유를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올라가지 못하는 믿음이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결국 “니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라는 것으로 결과가 귀착되고 만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가? 이 십자가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 인간은 개인적으로 십자가가 없어도 믿을 수가 있는데, 바리새인들이 그러했고 말이다.
◈ 니도 나를 죽일래?
조용기가 “여러분, 믿습니까? 믿습니까?” 라고 얼마나 외쳤는지 모르는데, 거기에 대해서 순복음 교회 교인들은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응답을 했고 말이다. 그것은 온 교회마다, 기도원마다 다 유행을 시켜놓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개그콘서트에도 나왔는데 말이다(ㅋㅋ).
하지만 그런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하는 믿음은 전혀 위로 올라가는 믿음이 아닌데, 즉 십자가를 통과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인간의 행함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오직 십자가만을 증거해야 하는데, 그런데 자기가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을 증거하고 있으니, 그것이 자기 계시이지 무슨 성경의 계시냐는 말이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렇게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는 인간들에게 의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이 곧 십자가 사건이라고 하면, 그 사건이 우리와 동행하면서 펼쳐지는데, 즉 “바리새인들에게 이래서 나는 죽었다. 니도 나를 죽일래?” 라고, 그렇게 덤벼들면서 오시는 동행이란 말이다.
그럴 때 “주님, 왜 이러십니까? 제발 비키세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도 바리새인들 못지 않게 제 자신의 믿음을 믿는 놈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십자가 앞에서 죄인 줄 알았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러한 자가 곧 성도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 치매에 걸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그래서 제가 포도나무 교회의 목사를 비판하면서 치매 이야기를 집어넣었는데, 그것은 그 목사에게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모든 사람이 과연 치매에 걸렸을 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그것을 살펴보자는 말이다. 치매에 걸리기 이전에는 복음으로 열심히 살았는데, 그런데 그만 치매에 걸리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그 해답을 내놓아보라는 것이다. 그러니 도로 제가 숙제를 내준 셈이 되고 말았는데, 답변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그 정답이 무엇인가요? 치매에 걸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그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자기가 치매에 걸렸다고 하면, 그래서 예수고 뭐고 간에 강단에서 “홍도야, 울지 마라♪” 라고 하면서 노래를 부른다고 하면, 과연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개인에서 개인으로 바로 들어갈 수 없는데, 그리고 인간인 자기 자신도 개인적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즉 개인적으로 자기가 10년 뒤에 어떻게 될 것인지, 거기에 대해서는 평가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주님의 것이라고 하면, 우리는 어디로 올라가야 되는가? 주님의 언약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언제 자기가 복음을 전하다가 잘린다고 해서, 자기가 지옥으로 간다고 걱정한 적이 있었는가? 전혀 아닌데, 왜냐하면 자기의 미래도 자기 담당이 아니라 주께서 담당한다는 사실을, 그것을 자기 힘으로 안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주어진 성령께서 알게 하신다면, 그 성령이 보증금으로 이미 오셨다고 하면, 그 성령께서 자기의 미래도 동일하게 보증할 줄로 믿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자신이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전혀 아니기에 말이다. 우리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십자가를 전혀 알 수가 없는데, 즉 성령께서 알게 하신 십자가라고 하면, 성령께서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미래도 포함해서 말이다.
◈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의 특징은? ‘꼬시기’ !!
지금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또 그 사람이 들으면 다음과 같이 말하지 싶은데, “이근호 목사는 자기의 구원도 희미하더라” 라고 말이다. 그러니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지 않았기에 말이다. 그래서 자꾸만 성령을 이야기하면서 사람을 꼬시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끌어 모으려고 말이다.
강남 대치동의 영어학원 강사들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아닌데, 그들이 뭐라고 하는가? “다른 곳에 가면 다 떨어져. 그러니 나에게 와서 한 달만 해봐. 20점은 보장해줄게” 라고 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꼬시고 꼬드기는 것인데, 전혀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주께서 20점을 올려준다” 라고 하는, 즉 “주님께서 여러분의 성적을 올려주십니다” 라고 하는 학원강사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학원강사는 자기 실력을 믿는 것이지, 위로 올라가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즉 “저도 그분 앞에서는 실력이 없습니다” 라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저 강사보다 실력이 더 낫습니다” 라고 하지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목사가 “나는 당신을 구원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라는 소리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꼭 치매에 걸려봐야 아는가?
그러면 우리가 지금부터 주님 앞에서 “주여, 저의 믿는 행위로 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라고, 그런 고백을 하게 되면, 우리는 이미 치매에 걸린 자들이 되는데,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걸리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지금 치매에 걸렸다고 여기고, 치매에 걸리기 이전에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맡기게 되면, 치매에 걸리더라도 계속해서 보장이 되어서, 모든 것을 다 맡기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치매에 걸리게 하든지 말든지, 다 알아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런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데, 즉 자기가 경험대로 판단해서 자기의 논리대로 믿음이라고 우긴다면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다. 성령에게 맡기지 않고, 저기 선에서 어떤 기회를 잡아나가는 것을, 그것을 믿겠다고 하면, 그것을 누가 말리겠느냐는 것이다.
* 질문 - 만약에 양무리 마을에서 “이근호, 당신은 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는 고백을 우리에게 하지 못하는가?” 라고 하면, 그런데 바로 사람들의 입장이 바로 주일학교 아이들이라고 한다면, 그 아이들에게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라고 대답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방법을 배우기 때문에 그러한데, 즉 방법을 찾고자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다 다른데, 그런데 특정한 인간이 받은 은혜를 마치 특이성을 가진 것으로 여긴다면, 그래서 그것이 모델이 되어버리면 곤란하다는 말이다.
* 질문 - 주일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런 방식이 아니면 곤란하지 싶어서 말입니다.
주일학교는 어떤 특정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주일학교는 바로 우리 어릴 적이란 말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어떤 식으로 새로운 소식을 접했는지, 그래서 그 아들에게 복음의 소식을 전하게 되면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내에서 주님께서 알아서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사가 “나를 본받아라” 라고 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만이 가능하고 말이다.
그들은 어린아이들이고 우리는 어른이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를 본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이런 것이 있다” 라고 전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다 마찬가지인데, 목사가 결코 모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되면, 그게 자기 계시가 되니 말이다. 그래서 선생이 된 자는 주의하라고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120페이지를 살펴보자.
** 성화론이 성립되지 않는 이유는, ‘예수 안’에서는 예수님께서 성도가 자기 것으로 전환한 의를 늘 빼앗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의로 대체시키기 때문이다.
◈ 성화는, 곧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 !!
그러니까 성화는 오직 누구의 의만 계속해서 남아있는가? 예수님의 의만이 계속 남아있는데, 그런데 예수님의 의는 십자가 사건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로 그러한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만이, 주님 안에서의 유일한 성화, 즉 거룩이란 말이다.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이 말이다.
그렇게 주님의 거룩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런 우리를 보고 “당신들은 성화를 거부한다” 라고 하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이야기하고, 거룩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그것 말고, 당신의 의를 내보이시오” 라고 하니, 그러면 정말이지 곤란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의의 종에 불과한데 말이다. 종이 무슨 자기 것이 있고, 내놓을 것이 있는가? 오로지 주인의 것만 쳐다보고 사는데 말이다.
◈ 포스트맨은 편지를 내놓아야 !!
예를 들어서, 우편배달부가 상대방이 부친 편지를 내놓아야지, 자기 물건을 내놓으면 되겠는가? 우편배달부의 개인 물건이 받는 사람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교회에서 왜 그러한 일을 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자기 교회의 교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처럼 되면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는, 자기 계시를 앞장세워서 “너는 나에게 무조건 복종을 해야만 돼” 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성령을 받지 않은 교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 외는 모르고 말이다. 목사와 교인 사이만 잘 된다면, 주님께서 구원을 해줄 줄로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영이 임한 사람은 언제나 주님의 지시를 받게 되어있지, 사람에게 지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로 죽은 것’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지 보여준다.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죄로 인해서 죽은 것 !!
과연 죄로 죽은 것을 우리가 연기할 수 있겠는가? “꼴까닥! 이것은 죄로 죽은 것이다” 라고 말이다. 물론 죄의 결과로서 우리는 죽지만, 하지만 그것이 죄의 결과로 인한 죽음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한강에서 떨어져서 죽고, 또 어떤 사람은 목을 매달아서 죽는데, 그러면 그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죄로 인해서 죽은 것인가? 그것은 판정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죄로 죽은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라고 유일하게 확정을 지었는데, 그것은 곧 십자가밖에 없다는 것이다. 죄의 저주로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하, 예수님이 죽은 것을 보니, 우리는 죽지 않아도 이미 죄로 인해서 죽어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실체를 말이다.
◈ 불트만의 경우에 !!
그래서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철학에 근거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되었는고 하니, 하이데거의 철학을 무엇으로 바꾸는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로, 즉 루터신학으로 바꾸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바로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불트만 신학이란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트만 신학은 무엇인고 하니, 존재가 아닌 존재자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바꾸게 되면, 십자가에서 피어나는 것을 존재자가 알 수 있다고 여겨서, 그런 식으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어사건까지도 다 수용해서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 다시, 언어사건과 사건의 차이점을 !!
이런, 아까 언어사건과 사건의 차이점을 하다가, 제가 그만 빠트리고 말았는데 말이다. 사건은 공백이, 즉 빈 공간이 생기는데, 하지만 언어사건은 공백이 생기지 않고, 언어의 촘촘한 거물망만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언어를 제대로 설계하게 되면 좋은 설교가 되고, 그런데 설계가 시원찮게 되면 나쁜 설교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설교가 논리적으로 이상해지면 말이다.
왜 그런가? 왜 나쁜 설교가 되느냐는 말이다. 이 언어사건에 준하면, 즉 “이런 이번 설교시간에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그래서 몇 명은 그만 또 지옥에 가게 생겼구나” 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설교자가 어느 정도로 해야 완벽한 설교가 되겠는가? 사실 완벽한 설교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 사도바울의 설교조차도 !!
결과를 본다고 하면, 사도바울의 설교조차도 완벽한 설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행전 마지막에 보면, 사도바울이 설교를 했더니만 어떻게 되었는가? 사람들이 모이고 난리가 났는가? 오히려 모두가 가버렸다는 것이다.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어제 오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여기 병원이 하나 생겨서 환자가 백 명이나 생겼는데, 그런데 저기 아래에 있는 수정교회에서 99명을 데리고 가버리고, 우리교회에 한 명이 나왔다고 하면, 그러면 누가 승리자인가? 저기 밑에 있는 수정교회는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백 명 가운데서 무려 99명이나 데리고 왔으니 말이다.
◈ 과연 진정한 승리는 무엇인가?
하지만 예수님이 왕이라고 하면 과연 무엇이 승리이겠는가? 그렇게 사람들을 꼬시는 과정에서 우리 인간들에게 잠재가 되어있는 죄의 본색이 드러나기만 한다면, 그러면 우리 가운데 주님이 함께 계신다고 하는 것을 드러내는 승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약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꺾은 것이 결코 승리가 아니고, 그러한 와중에서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그리고 무엇에 기가 죽어서 살았으며, 무엇에 벌벌 떨면서 살았는지, 바로 그것을 노출시킬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진정한 승리이고 말이다.
◈ 죄를 알면, 행복은 저절로 !!
그러니 양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죄가 들추어진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이라고 해도 그 순간만큼은 감사함으로, 물론 2초나 3초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말이다. 천지가 다 깨어진다고 해도, 그 순간만큼은 감격과 고마움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죄만 안다면, 행복은 저절로 주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니 죄를 알면 자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행복해져서 죽을 마음도 그만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약을 먹기 이전에 죄를 먼저 알게 되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감지덕지한 것임을 알아서, 앞으로도 더 살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살하는 인간들은 자기 죄를 모르는데, 죄를 알면 감히 자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하이데거의 ‘언어사건’을 좀 더 깊이 있게 !!
이제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언어사건을 좀 더 깊이 있게 해보자는 말이다. 언어사건은 무엇인고 하니, 그렇다고 해서 하이데거가 위대하다는 것이 아닌데, 일반인들도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니 말이다. 하이데거가 “존재는 언어사건을 통해서 나타난다” 라는 주장을 왜 했는고 하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냥 입을 다물고 있으면, 어떻게 사귐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말이다. 무슨 퍼포먼스를 하는가? 그냥 가만히 있게 말이다.
하여튼 우리교회는 새로운 사람이 와도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는데, 사건은 되는데 언어사건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ㅋㅋ). 오면 그냥 오는 줄 알고, 가면 그냥 가는 줄 알지, 도무지 언어사건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냥 가만히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교회에서는 언어사건이 너무 잘 되는데, 즉 “어디서 오셨습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같은 교회 안에서도 서로 서로가 자기 구역으로 데리고 가려고 하는데, 거기에 부교역자들도 한 몫을 하고 말이다. “이번에 우리 구역은 몇 명이 모였어” 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당회장은 팔짱을 끼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흐뭇해하는데 “음, 교회가 점점 더 활성화가 되는구먼. 역시 내가 경쟁을 붙여놓기를 잘했어. 암 그렇게 해야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당회장실에서 구역별로 막대 그래프나 그리면서 말이다.
◈ 오잉, ‘사건은 언어를 부셔버려’ !!
아무튼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인간은 왜 언어가 없으면 하나가 되지 않는가?” 라는 것인데, 사건은 언어를 부셔버린다는 것이다. 자칫하면 여기서 동양철학에 빠지는 수가 있는데, 불교에 보면 도를 닦으면서 입을 다물고 있는데, ‘음!’ 하면서 말이다. 즉 “말하는 것조차 더럽도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제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고, 사건이 오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헉! 허걱! 으악!”,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즉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것이다. 혹은 “윽! 죄네” 라고 하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 “내가 무엇을 할까요? 어떻게 밥을 먹고살까요? 어제 싸움을 했는데 어떻게 화해를 하면 됩니까?” 라는 것이 그만 모두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 너는 이단이기에 밥 먹을 자격도 없어 ??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저에게 말하기를 ‘너는 이단이기에 밥 먹을 자격도 없다’ 라고 해서, 그만 화가 나서 지난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를 못했습니다” 다고 한다면, 그러한 순간에도 자기에게 그런 말을 한 상대방을 보지 말고, 즉 언어사건으로서 소통을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내가 입을 어떻게 잘 놀려서 되받아 쳐서 그만 기를 죽여놓을까?” 라고 말이다.
그러니 언어사건으로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주님 앞에서 우리는 ‘허걱!’ 이라고, 즉 십자가 앞에서 ‘죄인’ 임을 알게 된다면, 그것 자체가 바로 성령의 열매가 주르르 맺혔다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건은 우리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는데, 즉 그 짧은 순간에 그만 구멍을 내어버린다는 말이다. 구멍을 말이다.
◈ 주체가 또 다시 구멍을 매워 !!
그런데 그렇게 구멍이 나게 되면, 그러면 우리의 주체는 어디에 있는가? 그 구멍의 바깥쪽에 있는데, 즉 구멍의 언저리에 조금씩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형성되면, 결국에는 또 다시 그 구멍을 매워버린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나는 어제 밤에 은혜를 받았어” 라고 하면서, 또 다시 말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나불나불거리면서 말이다. 그러면 저쪽 교회에서는 초청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소위 ‘간증집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당신이 받은 은혜를 좀 시부려 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는, 말이 그만 주체의 구멍을 그만 매워버린다는 것이다.
◈ 주님은, 또 다시 면도칼로 ‘좌악’ !!
그런데 밀가루 포대를 면도칼로 그어버린다면 어떻게 되는가? 허연 밀가루가 줄줄 쏟아지게 되는데, 즉 주님께서 말씀이라는 면도칼로 날려버리면, ‘좌악’ 갈라지면서 우리는 또 다시 ‘허걱!’ 이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을 다 끄집어내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이 아주 짧은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가지만, 계속해서 반복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란 말이다. 성도에게 유일하게 반복되는 사건, 곧 십자가 사건이란 말이다. 그러니 20년을 목회한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고, 책을 30권을 내도 전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 베임을 당하는 자가 곧 ‘성도’ !!
처음으로 교회에 나오더라도, 지금 베임을 당하는, 그러한 자가 곧 성도라는 것이다. 항상 십자가로 베임을 당하는 자가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12번이나 면도칼에 베임을 당했다고 자랑하지는 말고 말이다. 무슨 별을 단 것도 아니고 말이다.
어제 염려는 어제로 날아갔는데, 그러니 그런 것은 전혀 기억하지 말라는 거이다. 그리고 오늘은 오늘대로, 이렇게 자기가 십자가 앞에서 살아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은혜임을 깨닫는, 그러한 모습들이 날마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저희들이 성화론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감히 어떻게 거룩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가 저희들을 통해서 나온다고 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황공한 일이고, 그래서 저희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10,19 새벽 2시 25분에 마침.
어휴, 지금이 도대체 몇 시야?
사건이 시간을 마구 집어삼키는구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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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44-49 백부장의 고백
현장이란 누가 어떤 식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여러 증언들에 의해서 달리 알려지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달린 현장을 같이 목격했다고 해도 강조점이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과연 나와는 상관없는 ‘타인의 죽음’에 불과하냐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해서 자신이 덩달아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성령님이 임한 경우에만 해당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인간이 자기 죽음을 미리 생각한다는 것은 생뚱 맞는 일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시간을 아껴서라도 살려고 주력해야 될 그 귀한 순간에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처럼 간주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죽음을 생각하지 아니하면 중심부에서 자꾸만 멀어져서 허상과 공상 속에서 헤매는 바가 됩니다. 즉 사람은 중심부와 이어진 채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백부장이 예수님의 죽음을 보는 순간, 그동안 자신이 다듬어 놓은 자아상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고백이 바로 ‘의로움’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큰 재물이 모아서 축복된 인생을 살아왔느냐가 궁금하고 부러운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저런 죽음을 보여줄 수가 있느냐?”고 감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아름다운 죽음’이라서 부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죽는 죽음’으로 본 것입니다. 유일한 의인이 품고 있는 의는 하나님에 의한 사건에 하나님에 의해서 말려들고 참여하게 될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살기 위해서 자신에게 취할 아이디어들은 인간들이 얼마든지 뽑아낼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의인된 자임을 보이기 위해 죽어야 하는 경우는 지금까지 인간들이 평생 노력했던 모든 것을 다 부정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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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장의 고백
2012년 8월 19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23:44-49
(눅 23:44, 개역)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눅 23:45, 개역)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눅 23:46, 개역)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눅 23:47, 개역)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눅 23:48, 개역)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눅 23:49, 개역) 『예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예수님을 구경하는 사람들, 이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 주목을 받습니다. 그 사람은 백부장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달리 보았습니다. 단순한 동정심에서 바라본 게 아닙니다. 이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형당하는 죄수를 향하여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도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죽이라고 외친 사람은 뭐가 됩니까? 정녕 죄인들이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은 사람이 손 쓸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불가능한 것은 구원입니다. 구원에 대한 모든 계획과 추진과 마무리는 모두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되며 사람은 조금도 개입하지 못합니다.
“거듭나라”는 명령은 사실 인간들 입장에서는 하나마나의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육이 육을 거듭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기 설교란 바로 이런 겁니다. 육이 육을 조작해서 영으로 거듭나게 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은 다 실패로 끝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백부장은 “저 분이야말로 진정 의인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예수님에 대한 감상이라면 백부장에게 구원이 이루어고 할 수 없습니다. 마치 어떤 주부가 시장에서 물건 사다가 가게에 걸려있는 예수님의 초상화를 보면서 “저 외국인 참 잘 생겼다”고 언급하는 것이 그 사람의 구원에 전혀 보탬이 되지를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백부장은 십자가 사건 속에 같이 휘말려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릴 때,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이 기적이고 성전 휘장이 찢어지는 것이 기적이듯이 이런 기적들과 더불어 백부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 분은 진정 의인이다”고 말입니다. 결국 이런 주변의 일들은 그 중심을 향하여 집결되게 되어 있는데 모두 십자가 효과를 위함입니다.
십자가 효과란 갈라디아서 2:20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고백이 단순한 사도 바울의 감상문이나 과장된 표현법을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함께 죽었습니다. 이런 결과는 성령님에 의해서만 발생된 반복적 사건입니다. ‘반복적 사건’이란 내 쪽에서 한 번 경험했다고 해서 과거의 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마치 홍콩 무술 영화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는다고 해서 그 다음의 상영에는 더 이상 죽을 사람이 안 나오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필름 안에는 앞으로 전개될 모든 내용이 이미 담겨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자가 안에는 천국의 모든 사정이 다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주어진 십자가 효과가 먼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에서 먼저 임하게 됩니다.
백부장은 그 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과는 달리 구경꾼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과 자기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이란 자신을 위해 마련된 자기 공간이 먼저 있고, 그 안에 들어앉아서 밖을 살피게 되어 있습니다. 이 안과 밖 사이가 바로 경계선입니다. 이 경계선이 있게 되면 관찰자 입장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즉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으시는 그 십자가 사건의 현장까지 관찰자로서 살펴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죽음과 자신과의 죽음이 상관없게 됩니다. 단순한 관찰의 대상에 머물고 맙니다. 백부장이 예수님의 죽음을 보는 순간, 그동안 자신이 다듬어 놓은 자아상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9:23-24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또한 에베소서 1:8-9에 보면,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받은 사람들의 보편적이고 공통점이 규정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규정은 “내가 사는 것은 예수님의 껍데기로 사는 것이다”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무런 이유나 의미나 목적이 없이 삽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아름다운 죽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죽는 죽음’입니다.
즉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유일하게 화목한 것은 ‘누군가 죽어야 성사될 일’입니다. 그 분의 죽음 이외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이란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 자신들이 수 백번 죽고 또 죽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좋게 보지는 않습니다. 오직 예수라는 그 분의 죽음만이 화목이 성립됩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도 다 이 사실을 위하여 집중하면서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만이 의미없이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은 자기만의 고유 공간을 따로 장만하면서 그것을 지키고자 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전에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과학사를 놓고 보면, 톰슨이라는 사람은 원자에서 전자가 나온다는 사실을 음극선 실험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하지만 전자가 원자 공간에 어떤 식으로 들어있는 지를 알지 못해서 그저 빵 위에 건포도가 군데군데 놓여 있는 식의 푸딩처럼 생겼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러더퍼드라는 사람이 알파선으로 원자를 투시해보니 가운데서 튕겨져 나오고 알파선이 산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자라는 공간 내부가 균등하게 퍼져 있는 것이 아니라 중심부에 딱딱한 핵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에게도 그 중심 부위가 딴딴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인류사 최고의 발견이 됩니다. 그 가운데 계신분이 인간의 죄로 인해 깨어지면서 비로소 천국이, 곧 진짜 하늘이 열려진 것입니다.
이 사실을 품고 사는 사람, 이 사건에 의해서 생산된 공간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가 성령받는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나오는 능력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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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강-눅23장 44-49(백부장의 고백)1208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3장 44절에서 49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38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23:44-49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예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서 서서 이 일을 보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폴짝 폴짝 뛴다고 해서 하늘나라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우선 하늘나라가 하늘에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하늘에 가도 하늘나라가 없고 땅 밑에도 하늘나라가 없고 이 지상에도 하늘나라가 없어요. 이 지상에도 하늘에도 바다에도 땅 밑에도, 어디에도 하늘나라는 없는데 예수님은 엄청난 이야기를 하십니다. ‘네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볼 수 없다.’(요 3:3) 했으니까 우리보고 뭘 어쩌란 말입니까? 하늘에 가겠다고 비행기 만들고 우주선 만들어서 가 봐도 화성이나 목성은 있는데 하늘나라는 없어요.
바다 밑에 들어가려고 잠수함을 만들었는데 거기에도 없어요. 멀리 가려고 기차 만들고 자동차 만들고 비행기 만들고 철로 놓고 고속도로 닦고 하늘로 올라가 봐도 하늘나라가 거기 없지요. 깊은 산중에도 없지요. 중들은 깊은 산중에 들어가는데 거기에도 없어요. 하늘나라는 없는데 없는 나라를 왜 들어가는데요? 기껏 온다는 게 교회까지 오지요. 교회는 여러 군데가 많으니까. 교회까지는 왔는데 하늘나라는 못 들어간다, 이것은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이 문제 정도가 아니고 이것이 사기다, 사기가 될 가능성이 많아요.
사기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 못 간다, 할 때에 그 당시 니고데모는 이미 자기의 유대교라는 것이 있었어요. 유대교가 하늘나라를 대체해서 꽉 쥐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사람들을 거기에 몰아서 집어넣었습니다. 유대교에 있으면 뭔가 승부가 날 겁니다, 뭔가 일이 날거예요, 했는데 아무 일도 안 나는데 어떻게 합니까? 아무 소용이 없었는데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겁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위로 올라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보고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위에서 핀셋으로 집듯이, 젓가락으로 집어내는 식으로 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젓가락을 목사가 갖고 있으면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나 필요한 사람, 자기 가족부터 먼저 집어낼 것이고 뒤에서 욕하는 사람들이나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다 없애버릴 것인데 그 핀셋이 나한테는 없다 이 말이지요. 여러분한테도 없어요. 여기서 사건이라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사건이라는 것. 사도바울이 썼던 모든 편지, 사도바울의 설교인데요, 그 설교는 그 설교에 참석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도바울의 설교에 참석하고 욕한 사람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의 설교가 곧 하나님의 계시였는데 그 설교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느냐하면, 이 설교 듣고 성령의 사건이 되는 사람만 구원 받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내 말고 내 지혜로 여러분을 호리거나 설득하거나 가르치거나 하는 것은 아니고 성령의 나타남이 여러분에게 도달되면 여러분들은 제 말을 여러분 속에 심게 될 것입니다.’(고전 2:1-5) 라고 되는 거예요.
쉬운 예를 든다면 바늘이 있다면 그 바늘에 실을 꽂는 거예요. 그러면 바늘로 땀을 뜨게 되면 거기에 바늘구멍만 뚫리는 것이 아니고 바늘 따라가는 실이 거기에 심겨지지요. 누비이불 아닙니까, 누비이불. 누빈 거잖아요. 어떤 강의에서 저는 그것을 바늘로 한 땀 한 땀 뜨는 것보다 아예 미싱으로 두두둑, 박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사도바울이 설교를 하게 되면 그 구원의 능력이, 그것을 십자가의 효과라고 하는데요, 그 십자가의 효과, 구원의 효과, 거듭남의 효과가 바늘 가는데 실가는 것처럼 그 말씀과 같이 달려서 꽂히면 되는데 실은 없는채 바늘만 가면 이것은 학문이 돼요, 교육이 된다고요.
저는 십자가마을 수련회 할 때마다 실은 꽂히는 것이 없는 채 그저 지식으로나 될까 싶어서 좀 걱정이 돼요. 걱정 하나 마나 제 소관 아니니 어쩔 수는 없는 것이고. 교회사를 강의하는데 ‘목사님, 복음은 언제 전합니까?’ 할 때에 저는 가슴이 쿵덕, 했어요. 지금까지 계속 복음 전했는데 바늘만 꽂히고 실은 안 따라온다는 느낌이 들고……. 사도바울의 설교는 그 자체가 자기는 성령에 의해서, 성령에 떠밀려서 전하는 거예요. 그것을 ‘부득불’이라 합니다. 무슨 노림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안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에스겔을 보고 예레미야를 보고 이사야를 보세요. 부득불 하는 겁니다. 오늘 오후설교에 나오는 미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오후 설교 제목이 ‘욕설과 예언’이에요. 사람이 욕하고 싶은 사람 없어요. 그런데 그들에게 말씀 전하니까 욕설을 전하는 것이 되니 그들로서는 욕하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나를 향하여 욕하시고 나를 향하여 심판하시는 그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는 문제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이단과 정통을 구분도 못하는 사람 돼 버려요. 그래서 항상 성령께서는 사건으로 오는데 우리가 다른 것은 몰라도 되고 본문에서 하나 알아야 될 것은 그겁니다.
사도바울의 모든 성령의 사건들이 어느 사건에 의해서 그것이 유발되었는가, 어느 사건의 되풀이로서, 반복성으로서 오늘날 2012년의 우리에게까지 동일하게 주어지는가, 우리가 진짜 어느 사건을 쳐다봐야 되는냐, 하는 거지요. 예를 들면 사도바울이 설교했다, 참석했다, 이것은 사건이 아니거든요. 사도바울이 전하는 말씀 속에서 어떤 사건을 이야기하는데 그 사건은 바로 십자가사건을 이야기하더라는 말이지요. ‘여러분, 내 설교하는 거 그 사건을 경험했지요? 그러면 되었습니다.’ 그런 소리는 아니라는 말이지요. 설교는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설교 가운데서 십자가가 박아져야 되지 설교 했다, 설교 들었다, 이것은 소용없습니다.
이것은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내가 어느 교회에 몇 년, 수십 년 다녔다, 이것은 소용없는 겁니다. 항상 사도바울은 십자가효과를 이야기해요. 십자가 피 만이 구원의 능력이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전해서 어떤 이익을 챙긴다든지 그런 생각도 하지 말고 십자가 그 사건 속에 있어야 돼요. 그 사건이 들어올 때는 뭉텅이로 들어오는 거예요. 한 30년쯤 전의 옛날이야기에요. 촌의 할머니들이 영화를 봤답니다. 그 할머니가 무식해서가 아니고 순진해서 그런 거예요. 중국영화를 봤는데 그 영화에 무사가 하나 등장해서 추풍낙엽처럼 계단 올라가면서 사람들을 다 쳐 죽여요. 옛날 가설극장이죠. 경상도 말로 그랑가, 시냇가에 천막 쳐 놓고 영화 보여주는데 홍콩영화였던 모양이지요.
그 영화를 보고 할머니들이 놀랜 거예요. 아버지 원수 갚는다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도 기분 나쁘지만. 친구 할머니 보고 ‘야, 그 사람 무섭더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하니까 친구 할머니 하는 말이 ‘그래, 그럼 낼 나도 봐야지.’ 하니까 그 영화 본 할머니 하는 말이 ‘가 봐야 그 사람들 다 죽었어.’ 그 할머니는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에요. 그 사람들이 다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구경이고 뭐고 더 이상 없는 거예요. 이것은 그 할머니가 영화의 반복성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런 거예요. 십자가가!
그 할머니만 무식한 것이 아니에요. 오늘날 십자가 믿는다는 우리들도 무식한 거예요. 5년 전에 십자가 믿었다고 그만 믿는 것 아닙니다. 2천 년 전에 십자가 졌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 효과라는 것은 현재 우리가 구축한 나의 세계관을 그 경계를 허물어 버립니다. 경계선 알지요,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죽을까, 어떻게 비참하게 죽을까, 그거 구경하러 온 겁니다. 구경하러온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성경말씀, 계시에 편입돼요. 그게 우리 같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사람이 백부장입니다.
백부장이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했습니다. 이 사람 사건이 굉장히 중요한 이유는요, 상식에 의하면 우리는 뭐냐, ‘예수님이 죽었다. 고요했다.’ 한다면 ‘죽을 사람이 죽었구나. 하나님한테 별 가치도 없는 인간이 죽었구나.’ 이렇게 되겠는데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했다? ‘어? 살아났어? 그럼 나도 살 수 있겠네? 나도 예수 믿어야지.’ 이것이 인간들의 노림수잖아요. 인간들의 노림수! 죽었다, 할 때는 죽은 것은 죽은 것이지 뭐, 하다가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하니까 ‘야, 나도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다. 나도 영생 불사의 존재가 될 수 있구나. 중국의 진시황제가 그렇게도 찾고 싶었던 그 불사의 약, 그게 가까운데 있었네. 십자가 믿으면 그 불사의 약을 먹는 것과 같은 것이니까 나도 이제 예수의 십자가 믿고 부활을 믿어서 영생 해야지.’
이것은 성령이 아니어도, 바늘만 가고 실이 없어도 누구나 영원히 살고 싶은 그 본능과 충동에 의해서 충분히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의 놀라운 점은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부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에요. 그냥 죽었다는 것, 그냥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냥 죽음을 보고도 뭐라고 하느냐, ‘이분은 정녕 의인’이라 했습니다. 이게 되느냐, 이게 우리한테 되느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정녕 의인이라면 예수님 죽이라고 고함쳤던 모든 군중들은 정녕 죄인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예수님 죽는데 막아서지 못한 백부장 본인도 역시 정녕 죄인이지요.
예수님이 죽었다는 그 사건은 분명히 예수님이 단독사건입니다. 예수님 혼자 죽었어요. 여러 명 같이 죽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렇게 보고 여러분도 그렇게 보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뭐가 지금 풀리지 않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도바울의 말이 허풍이 될 수 있고 사기가 될 수 있고 과장된 표현이 될 수 있고, 실체가 아닌데도 그냥 예수님을 너무 사랑해서 오버액션 하는 것일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이것이 그냥 표현상의 수사로서 하나의 비유냐, 아니면 실제로 사도바울이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정말 십자가에 주와 함께 죽었느냐, 그 문제는 사도바울에게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성령이 나타났을 때에 현상을 고정시켜 놓았거든요. ‘성령이 여러분에 오게 되면 내가 경험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삽니다, 라는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입니다.’라고 제시를 했다 이 말이지요. 그렇다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하는 그것이 실제이거나 현실이 아니고 하나의 오버액션이고 본인의 느낌이거나 감상이라면 우리는 그따위 것에 신경 쓸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그렇게 심하게 믿지 않고 그저 예수님은 좋은 분이다, 이 정도 해도 나를 성령 받은 것으로 쳐줘.’ 이렇게 될 수가 있다 이 말이지요.
이것은 자기 맘 대로에요.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성령 받았다, 말로만? 아니지요. 보편적이고 동일한 규정이 나와야 돼요.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히 적용되는 현실이 구축이 돼야 되거든요. 그게 사도바울이 구축하면 안 되고 성령이 살아 계시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살아계시니까 살아계신 예수님 부활하신 분이 성령을 줄때는 딱 규정된 대로 성령이 오게 되어 있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 규정에 일치되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게 뭐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 안에 그리스도라는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사시니까 나는 껍데기로서 사는 것이다, 이것이 딱 규정이 돼야 된다 그 말이지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갑니다. 이것은 난제 중에 난제고 이것은 어떻게 우리가 손댈 수가 없어요. 로켓도 소 없다니까요. 미국 NASA에서 목성으로 로켓 쏴 올려도 그것은 하늘나라 아니에요. 이것은 돈이 많으니 적으니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예레미야 9장 2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전라도 어디 가면 인물 자랑하지 말고 돈 자랑 하지 말라는 소리가 있지요. 여기 말씀에 지혜, 용맹, 부함, 이런 것 자랑하지 말라고 하면 교인들이 교회 와서 자랑할 것이 뭐가 남아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전부 다 이런 실적 자랑하려고 들어오잖아요. 어려울 때는 교회 안 나오다가 좀 된다 싶으면 교회 나오잖아요. 자랑할 것이 없으면 우리는 남 앞에 자기를 안 내세울 정도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명철을 자랑하라, 고 하는데 이 명철은 에베소서 1장에 보면 뭘 가지고 명철이라 하느냐, 성령에 의해서만 아는 명철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령을 받았느냐, 그러면 그 십자가 효과가 있는 사람이니까 십자가 효과로 말미암아 들어가게 되면 하늘나라가 다 보이는 거예요. 십자가를 통해서. 왜, 부활이라 하는 것은 앞에 십자가가 있으니까 십자가가 출입구고 그 안에 들어가게 되면 부활의 세계가 열린다는 말이지요. 십자가에 들어가지도 않은 사람이 부활에 대해서 언급할 수가 없지요.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한다고 했지요.
십자가가 구멍이고 그 구멍에 들어가면 그 안에 부활의 나라가 있다 이 말이지요. 부활의 나라라 하는 것은 그냥 부활의 나라가 따로 없어요. 십자가의 효과가 퍼져 있는 그 공간을 가지고 천국, 아들의 나라, 하늘나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들어가는 것이 성령에 의해서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 어느 지점에도 바로 부활의 나라, 하늘나라가 없지요. 없으면서 주님께서는 어디든지 나 있는 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니 이 말을 남에게 전해야 될 설교자나 사도의 입장에서는 참 난처하기 이를 데가 없어요.
성령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의 세계를 증거 하려 하니까 애초부터 이것은 막혀 있는 상태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기껏 표현한다는 것이 경계가 허물어진다, 이정도 하는데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제가 그 말을 한 이유가 다른 사람들은 십자가를 구경하러 왔잖아요. 오늘 본문에 나오지만 ‘참 사람 안됐다. 괜찮은 사람인데 정말 안됐어.’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다 가슴 아파 했다는 말은 다 동정심을 표현했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백부장은 그렇지 않았어요.
예수님 저쪽은 내가 관찰해야 될 새로운 공간이고 나는 나만의 공간을 따로 챙기고 있는데 그 경계가 허물어진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사건에 같이 흡수 통합돼 버린 겁니다. 흡수 통합된 그것이 그때 그 사건에 단순하게 그치지 않고 영화처럼 그것이 반복이 되어버리면 그 뒤에 태어났던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말을 감히 자신만만하게 실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백부장이 자기는 관찰자고 예수님은 관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 경계가 허물어지고 하나의 공간이 만들어져요. 그것을 공간의 생산이라 하는데 하나의 공간이 생산되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의 능력이 예수님 죽어서 자기 혼자 천당 가려고 한다면 십자가효과라는 것이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나의 죽음은 나의 택한 자를 위해서 대신 죽는 죽음’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과의 화목은 누가 죽어야 화목이 돼요. 하나님과의 화목은 누가 죽어야 된다는 것, 인류사 최고의 발견입니다. 우리는 산채로 살아 있는 사람과 화평하려고 하고 화목하려고 하잖아요. 부부사이에도 살아 있는 내가 살아 있는 당신과 화목하고 살아 있는 애하고 잘 살자, 이것이 화목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화목은 그게 아니고 네가 죽어도 안돼요, 내가 죽어도 안 되고.
화목당할 사람이 죽어서 화목 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천번 만번 다시 태어나서 또 죽어도 화목 안 돼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아들로 받아주지를 않습니다. 저주 받을 자로 취급해 버려요. 그런데 저주 받을 자가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고 참 아들이 되는 것은 내가 죽는 것이 아니고 누가 죽어야 되느냐 하면, 하여튼 누가 죽어야 돼요. 그 일을 예수님이 담당했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죽어서 하나님과 화목 되어버리면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하면, 나의 신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는, 아무 걱정 없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지금 예수님이 죽은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내가 내 안의 공간, 나만의 공간,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내 공간, 내 공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죽도록 고민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은 내 공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새로운 공간문제를 위해서 죽으신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 공간은 쓰레기에요, 쓰레기! 우리는 쓰레기를 들고 걱정하고 고민하고 있었던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데,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데, 우리는 죽을까 싶어서 벌벌 떨고 있다 보니까 지금 문제가 많지요.
영화를 한 번 더 보든지, 십자가 효과를 받든지 해야 돼요. 중국영화를 보든지 홍콩영화를 보든지 해야 돼요. 옛날에 내가 나쁜 짓 했다고 해가지고 지옥 갈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 다음 영화를 안 봐서 그래요. 다음 영화 나머지 또 있어요. 나쁜 짓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저주받는 사이로 갈라진 것 예수님 한 분의 죽으심으로 그 모든 문제가 다 깔끔하게 해결 본 거예요. 그걸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이라 합니다. 그 언약을 이룬 것이 십자가 새 언약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요 6:54)이 있을 것이다. 내 살과 피가 새 언약이니 다시는 먹고 마실 것이 없다 그 말이지요. 다시는!
네가 너에게 어떤 행동을 가하고, 네가 너에게 어떤 버릇을 만들고, 네가 너에게 어떤 선한 일을 가미하는 것, 그것은 기존의 네 공간이지 주께서 새롭게 만든 공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내 공간이 있으면 항상 주변에 경계선을 쳐요. 경계선을 치면 예수님을 하나의 관찰의 대상으로 봅니다. 예수님 참 안됐다, 불쌍하다, 저분을 좋아해 줘야지, 사랑해 줘야지, 그렇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내가 저 분 믿어줘야지, 사랑해 줘야지, 그러면 구원받습니까? 내가 저분 믿어 줘야지, 그런 식으로 믿으면 구원 받습니까? 그것은 행함 들이지요, 행함들.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할 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면서 도대체 이 말을 그 당시에 누가 알아들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다시 이야기해 볼게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사기 아닙니까? 왜냐하면 분명히 십자가에는 달랑 예수님과 그 양편에 강도 둘이 있었다, 이것은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거기에 사도바울은 있지도 않았습니다. 거기에 없었던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하니 저 사람은 대체 무슨 객소리를 하고 있느냐, 무슨 되도 않는 소리를 하고 있느냐, 그 당시에 그 편지를 본 사람들이 그 말을 진짜 알아들었는지 의심스러워요, 정말.
기껏해야 주님을 너무 사랑하니까 과장되게 표현해서 주님을 높인다고 그런 소리 했겠지, 지금 그런 과장된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지요. 교회 나오고 우리가 성경 보면서 우리는 자꾸 상식을 언급해요. ‘목사님, 상식이 옳습니다.’ 제가 과학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과학조차도 상식이 아닙니다. 20세기 초에 톰슨이라는 사람이 음극선실험을 했어요. 음극선을 쬐니 거기서 전자가 나왔거든요. 전자가 나오니까 ‘아, 인간의 가장 작은 단위인 원소 속에 전자라는 것이 또 들어 있구나. 그런데 어떻게 들어 있을까?’ 빵 위에 건포도가 놓인 것처럼 군데군데 전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전자가 튀어 나왔으니까. 빵 위에 군데군데 새까만 건포도가 놓여 있는 것처럼 생각한 거예요. 그 후에 러더퍼드라는 사람이 금속판에 알파선이라는 것을 쬐였어요. 그것을 쬐여보니 만일 푸딩 같다면 이 알파선이 다 통과를 해야 되는데 일부는 휘어지기도 하고 180도로 다시 튕겨져 나오는 것이 있었어요. ‘야, 원자 속은 비율이 동일한 것이 아니고 중간에 단단한 것(핵)이 있구나.’ 그것이 나중에 깨지는 거예요. 그것이 깨지면 원자폭탄이 되는데 그것이 있다는 거예요.
이런 것이 일반상식선에서 보입니까? 알파선을 쬐니까 다른 것은 다 통과하는데 도로 튀어나오는 것을 보니 원자의 중간에 단단한 물질이 있더라는 말이지요. 이게 뭐냐, 하나님 속에 단단한 물질이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습니까? 이게 깨져야 되는 거예요. 깨어지는 하나님을 어느 누가 알았습니까? 인류역사상 아무도 몰랐지요. 하나님은 그냥 푸딩처럼 좋으신 하나님, 어지신 하나님, 점잖으신 하나님인줄 알았지요. 하나님 속에 하나님 들어 있는데 그 하나님은 이 땅에 올 때 깨어져야 된다는 사실, 우리 죄 때문에 깨져야 된다는 사실을 이 세상 어느 종교에서, 어느 도사가, 어느 지혜자가, 어느 용맹한 자가, 어느 부자가 그것을 알아챘느냐 그 말이지요.
그 깨어짐, 그 깨어짐 속에서 비로소 하늘나라가 열리거든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죽습니다. 죽는 하나님, 그동안 인간들은 상식적인 하나님, 상상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진짜 하나님은 단단한 것이 있는데 그 단단한 것이 인간의 죄 때문에 깨어질 때 비로소 인간은 하늘나라에 건너갈 수가 있다는 사실, 참 재미있는 것이 인간은 의가 되면 안 되고 죄가 되어야 돼요. 죄가 되어서 단단한 주님, 연약한 주님을 깰 때 깨어지면서 그 안에서 비로소 십자가가 열리면서 비로소 아무도 갈 수 없었던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주님의 나라, 그 아들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신에 대해서라면 도사, 하나님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었던 사울이라는 사람이, 자기가 상상한 말씀의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님인줄 알고 까불대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훈장 타는 일인 줄 알고 설쳐대던 그 사울이라는 사람이 다메섹에서 핍박받아 깨어진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 ‘아, 이게 주의 언약이구나.’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말을 내 뱉을 수 있는 것은 나쁜 짓이 누적되어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고, 전과 백날 더해봐야 그 말이 안 나오고 오직 십자가 앞에 설 때에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럴 때 이 사도바울은 자기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겁니다. 경계가 허물어지니 그 다음에 나오는 질문은 뭐냐 하면 ‘지금 내가 사는 것이 누가 사는 것입니까?’라는 우리보기에는 미친 질문을 하고 있는 거예요. ‘주여, 내가 지금 살아 있거든요. 그런데 누가 사는 겁니까?’ 당연한 질문 아닙니까? ‘네가 사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사는 겁니까?’ ‘네 안에 같이 죽었던 그리스도가 이미 너를 접수하고 흡수 통합시켜서 네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산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만 네가 산다, 의 그 산다가 된다.’는 거예요.
‘네 안에 나 있다.’는 주의 증인노릇하기 위해서만 사는 것이 사는 것이 되는 겁니다. 지금 사람들 사는 것은요, 중구난방이에요. 왜 사는지 모릅니다. 신문이나 방송 그리고 드라마 같은 것을 보세요. 제가 보면 사는 의미도 모르고 사는 목적도 없고 그저 되는대로 그냥 살아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올림픽 할 때 죽어라고 달리고 헤엄치고 던지고 축구하고 메달 따고,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하다가 메달도 못 따고 그냥 오기도 하고. 그러면 그 모든 것을 한데 모아봅시다. 농사짓고 사업하고 가정주부가 설거지 하고, ‘그런데 그 일 왜 하시는데요? 설거지 왜 하십니까?’
아무 이유가 없어요. 이유도 모르고 목적도 모르고 그냥 떠밀려가요. 탁류에 떠밀려가듯이 그냥 떠밀려 가는 거예요. 떠밀려가다가 군데군데 덥다고 싸우고 민다고 싸우고. 우리 인간이 누구냐 하는 것은 우리가 몰라요. 모르는 것이 당연하니까 그것 때문에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나는 누군지 모른다는 그것에 절망하지 마시고 누군가 아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아는 것이 뭐냐, 예수님께서 아시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거예요. 오늘 본문 44절에 “때가 제 육시쯤 되어(12시죠.)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오후 세시죠.) 계속하며(세 시간 동안 어둠이 지속되었다는 말이지요.)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여러분에게 질문하겠습니다. 해가 어두워지는 것이 기적입니까, 성소가 찢어지는 것이 기적입니까? 둘 다 기적이지요. 그런데 해가 어두워지면 다시 오후 네 시쯤에 밝아지면 그만이거든요. 그런데 오후 세시까지 어두워진 것은 네 시 되면 원상복구가 되는데 문제는 성소 한가운데 휘장이 찢어진 이것은 오후 네 시 40분이 되어도 원상복구가 안돼요. 결국은 뭐냐, 해와 달마저 무의미하게 빙빙 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휘장 찢어지는 타이밍과 맞추기 위해서 해와 달이 배정된 것이고 배치된 거예요. 해와 달이 우리보다 철이 더 들었어요.
우리 인간은 자기 맘대로 살지만 해와 달은 자기 맘대로 안 살아요. 뭔가 노림수가 있어요, 노림수가. 어떤 사건을 겨냥하는 식으로 해와 달은 돌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성소 휘장을 찢어내는 거예요.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졌더라. 이런 저런 사건들의 기적이 모여서 무슨 기적을 낳느냐, “이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는 기적을 유발시키는 겁니다. 그게 과정이 있어요. 여기에 논리적인 과정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그 복음적 사건이 성령을 통해서 사도바울의 편지 안에서 그 사건이 어떻게 홍콩영화처럼 늘 냇가에 설치된 가설극장에 가서 봐도 죽은 사람이 또 나오고 또 나오는 것처럼 단회 적으로 촬영한 영화가 상영할 때는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되고, 계속 되풀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사건이 또 되풀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안에 있던 백부장이었던 사람, ‘저분은 진정 의인이었도다.’ 부활되기 이전에 십자가질 때 그 때의 고백도 십자가 효과로서 성령 안에서 우리한테 매일같이 상영되고 되풀이 되는 거예요. 백부장이 한 ‘저분이 정녕 의인’이라는 말은 이런 뜻이에요. ‘나는 언제 하나님이 죽이시는 그 죽임에 동참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주님의 저 자리에 내가 참여할 수 있을까?’ 하나님 아버지의 의해서, 언약에 의해서, 약속 때문에 죽으시는 그 죽음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느냐, 만일 참여 안 되면 나는 그냥 죄인으로 저주 받는 것이고 참여하면 주와 함께 죽는 것이 되고.
아마 백부장이 이런 생각 했다면 옆에 사람이 말렸을 거예요. ‘너는 백날 해도 안 돼! 안 돼~!’ 하거든요. 그 안 되는 것이 갈라디아서 3장에 성령이 임하게 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경계선이 허물어지는 새로운 피조물이 탄생되는 겁니다. 새로운 공간이 새로운 피조물을 양산해낸 거예요. 니고데모가 말합니다. ‘내가 어찌하면 다시 태어나서 하늘나라 볼 수 있습니까?’ 하여튼 니고데모가 하늘나라를 무진장 보고 싶었던 모양이지요.
자기 신상의 일들은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국회의원이든 뭐든 아무 관계없어요. 하늘나라 못 보면 국회의원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명예도 자랑하지 말고 부한 것도 자랑하지 말고 건강도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안 것을 자랑하라고 하는데 지금 평생 살아온 것이 소용없는 짓이 되는 거예요.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식으로 다시 태어납니까?’라고 했을 때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 그것은 잊어라.’ 쉽게 말하면 육에서 나온 것은 잊어라, ‘성령으로 나게 되면 다시 태어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니고데모가 ‘성령이 뭐꼬?’ 이렇게 된 거예요. 사도바울은 이 성령이라는 것이 ……, 여기서 좀 약간 어려우니 눈 크게 뜨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은 십자가 볼 때 불쌍하다, 안되었다, 관찰자 입장에서 관찰의 대상이었지요. 그것은 나의 공간과 저쪽 공간이 아직도 안 깨졌어요. 주님이 안됐지만 주님은 주님 일이고 나는 집에 가서 빨리 설거지나 해야지, 아직 자기공간이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백부장은 그 경계선이 깨어졌습니다. 깨어져서 ‘저분은 정녕 의인이다. 저분이 정녕 의인이라면 나는 졸지에 저 분 앞에서 죄인이 된다.’라고 되었다 이 말이지요. 관찰자 입장에서 그만 흡수 통합 되었지요.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와버리면 성령을 어떻게 내가 다룰까, 라는 나만의 공간이 아니고 성령께서 지금 나를 성령 자기의 세계로 참여시켜서 주물럭거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나온 요리가 ‘주물럭’이라는 요리가 나왔다는. 고기와 양파를 다져넣고 주물럭거려서 주물럭을 만들어내듯이 주께서 주물럭, 주물럭, 주물럭거리는 거예요. 그 경계선이 허물어지면서 뭐가 배출되느냐하면, 옛날에 나만의 공간이 있을 때 설계했던 나만의 비전과 꿈과 희망, 이런 것은 찌꺼기로 다 거기서 빠져나와야 됩니다.
나는 앞으로 5년 뒤에 이런 일을 하겠다, 나는 앞으로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해서 이득을 보겠다, 이런 꿈들은 다 빠져나와야 돼요. 이것은 상하수도 다 오염시키는 더러운 오염물입니다. 나의 공간은 다 빠져나와 버려야 돼요. 주님의 공간만 남아 있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 말을 제가 조금 더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걸 한꺼번에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모든 행함의 지평선이, 행함의 인생들판이 전부 다 믿음의 들판으로 일거에 바뀌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나는 밥을 먹는다, 한다면 그냥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나는 믿음으로 밥을 먹게 되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믿음으로, 사람은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구원받거든요. 모든 것이, 심지어 오줌 누는 것도 나는 믿음으로 오줌 눈다, 이렇게 믿음의 지평선으로 다 바뀌는 거예요. 여러분 집에 도배를 하는 것이 낫습니까, 아니면 장판부터 해서 다 뜯어내는 것이 나을까요? 도배해봐야 습기 차면 또 마찬가지잖아요. 아예 장판 자체부터 다 뜯어내는 것이 낫겠지요. 성령은 장판 자체를 뜯어내는 거예요. 신앙이나 교양, 이런 것으로 도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뜯어내는 거예요. 뜯어내면 그동안 내가 행함으로 살아왔던 모든 것이 뜯겨져 나가고 그동안 모든 것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심겨준 하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으로 밑바닥 장판을 다시 까는 겁니다.
말을 해놓고 보니 어렵습니다. 제가 사기설교 먼저 전해드리고 사기가 아닌 설교를 또 전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 게으른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을 부지런한 아들로 만들고 싶어서 아들에게 거짓말을 했답니다. ‘저 포도원에는 금이 묻혀 있다. 그러니 네가 그 포도원에서 금을 찾아 봐라.’ 아들이 희망을 품고 금을 찾는 노력을 열심히 했더니 찾는 금은 안 나왔지만 금 찾는다고 밭을 파헤치는 바람에 밭이 갈리고 산소가 유입되고 양질의 땅이 되어 포도가 무럭무럭 자라서 금 수확보다 포도수확이 더 돈이 되었더라, 아버지의 지혜가 이런 지혜구나, 놀라운 지혜다!』 이거 사기설교입니다. 이게 행함의 설교에요.
또 행함의 설교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시는 일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축복이니까 열심히 일도 하시고 거기에 예수까지 믿으시면 여러분은 복도 받고 예수 믿음으로 구원도 받습니다.』 이거 사기설교입니다. 이거 속지 마세요. 그러면 사기설교 아닌 것은 뭐냐, 『여러분이 자기 종사하는 여러분의 업, 농사면 농사, 장사면 장사, 여러분의 업에 인간은 의미를 둘 것입니다. 그 장판 다 뜯어냅니다. 목사는 목사일 한다고 의미 두는 것 다 뜯어냅니다. 다 뜯어내는데 뜯어보니 그것이 전부 다 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죄인으로서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십자가에 합류가 됩니다. 나는 죽어야 될 자요 그 분은 나대신 죽음으로서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해 죽으시는 분이 되는 겁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음을 한 평생 두고두고 온 몸으로 느끼는 것 목사가 되든지 장로가 되든지 아니면 사업을 하든지 전부 다 죄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죄라는 것을 알 때 그 상태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할 때는 예수가 하나의 관찰의 대상이 되지만 나는 죄인입니다, 할 때는 관찰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나 자체가 허물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내가 누굴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이 자체가 문제 있어, 이것도 죄입니다, 라고 자기의 관찰 자체를 박살내는 겁니다. 주님에 의해 주물럭거려지는 가운데. 그것이 모든 것이 믿음이 되는 겁니다.』
재판장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점잖은 판사가 보통 ‘피고는……’ 이렇게 선고할 텐데 ‘아이고, 피고선생님! 실수해서 그런 죄를 지었어요? 미안합니다만 제가 5년 때리겠습니다. 너무 감정 세우지 마세요. 다른 사람은 7년인데 선생님을 존경해서 5년만 때리겠습니다. 미안합니다. 5년 후에 새 출발하세요.’ 이렇게 나오면 그것은 피고를 진짜 존경하는 것이 아니고 무시하는 거예요. 사람이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모독의 한 형태입니다. 몰랐지요? 상대방에게 잘해준다는 것은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을 잘해주는 나를 스스로 존중하는 방법을 찾기 위한 일환입니다.
내가 어떻게 가치 있는 존재가 될까, 연구하다 보면 내가 남한테 대접하고 남을 존중하면 그 남은 또 나를 존중하고 잘 대접할 것이라는 통박, 되도 않는 계산, 이런 것이 있으니까 사기설교가 먹히는 거예요. 만약에 자기 자신을 되게 무시한다면 상대방을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나부터 인간도 아니라고 여긴다면, 나부터 그 점을 안다면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남 보기에는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고 하는 거예요. 하지만 배려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왜, 뭘 보라고? ‘나는 나 안 볼 테니까 당신도 당신 보지 마. 우리는 인간과 하나님의 사이에 누가 죽었다는 그것만 봐.’ 그것만이 사랑이에요. 그것 빼놓고 나머지는 사랑이라는 말을 붙이지 맙시다. 그걸 붙이게 되면 자기 행함이 돼요, 행함이!
행함이라는 것이 뭐냐, 자기존중을 기본으로 까는 것이 전부 행함이에요. 그런데 자기 자신이 나는 모독당해야 되고 무시당해도 마땅하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믿음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와 나 사이에 관찰의 대상의 십자가가 아니라 관찰의 경계가 허물어져 버렸어요. 성전 휘장이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 있던 것이 소통한 겁니다.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누구도 못한 겁니다. 왜 우리는 못하는가, 우리는 못해야 마땅하지요. 왜, 우리는 무시당해야 마땅하니까. 하지만 우리 주님만큼은 그걸 해냈기 때문에 주님만큼은 존경을 받아야 되고 찬양을 받아야 합당한 겁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거기서 나오는 공간이라 하는 것은 기존에 내가 장만한 나의 공간은 의미가 없어요.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 공간에서 일어난 어떤 사태와 사건, 그것 때문에 고민하지 맙시다.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인생에는 턱이 있기 마련입니다. 제가 어느 날 옥정이라는 곳에 갔어요. 옥정, 잘 못 들어보셨지요? 하동 골짜기인데, 거기 가는 아주 좁은 길이 있는데 턱이 열 개가 넘어요. 운전하면서 얼마나 짜증이 나는지. 턱 넘으면 다시 평탄해지고 턱 넘으면 다시 평탄해져요.
그것을 보면 그 턱이 여러 개가 되니 짜증이 나는데 이 턱이 한 개라면 어떻게 되는가? 이 턱만 넘으면 더 이상 아무 턱이 없는 세계가 있으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을 불현 듯이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느낀 것은, 첫 번째는 인간은 턱이 있어야 된다는 것, 턱이 있는 것을 불만스러워하지 말고 있어야 되는데 여러 개가 있으면 곤란다다는 거예요. 단 한 번에 턱만 넘으면 어떻게 되는 그런 세계가 없을까? 백부장이 봤을 때 턱만 넘으면 이제는 그동안 내가 고민했던 것, 나는 어떻게 하면 의인이 되느냐, 라는 그 자체가 의미 없는 고민이라는 사실을, 내가 처음부터 죄인이고 죽을 때도 죄인인데 왜 자꾸 나는 착해야 복 받는다, 착해야 사업이 잘된다, 내가 착한 일 해야 주께서는 행운을 안겨준다, 왜 자꾸 이런 나만의 공간을 스스로 쥐려고 했던가? 나만의 공간, 나만의 경계는 허물어져야 되는데!
아무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는 것을 왜 자꾸 나는 끝까지 붙들려고 하는 이 심보, 대체 누가 나에게 이런 괴로움을 안겨주었던가, 그 말이지요. 이게 마귀가 안겨 준거지요, 마귀가. 이제 믿음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턱 이전이든 이후든 그 모든 것이 주께서 주신 성령의 믿음으로 되었다면 우리가 바라볼 것은 바로 내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죽음중심, 그 예수님 죽으심이 모든 화목,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잘못도, 어떤 정죄도 없다는 사실이에요. 간통한 여인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너를 다시는 정죄하지 않겠다는 그 이야기가 그 영화의 반복성처럼 간통한 여인에게 들린 그때만 들리지 말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일같이 ‘나는 다시는 너희를 정죄하지 않겠다.’는 그것이 그냥 말로만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실제적인 사건을 근거로, 그 피를 근거로 우리 코앞에 내미는 이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지금도 안겨주시는 경계 허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우리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관찰자 입장에서 봤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따로 놀고 나는 내 인생 따로 놀고 그렇게 하면 구원 받는 줄로 착각했습니다. 이제는 나의 모든 것에 쳐들어와서 깨어지게 하옵소서. 나의 모든 것이 깨어져서 주님께서 주무르시고 이끄시는 모든 것이 믿음의 세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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