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원히 너의 3초 이다 (제발 막 사세요)
꿈꾸는 기계
2012-09-04 06:05:49 이름 : 김혜선
장 디디에 뱅상은 인간을 생각하는 기계로 표현하고 들뢰즈는 앙티오디프스에서 똥 만드는 기계로 표현 했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고귀함을 주장하는 현대인들의 사상에서 인간을 기계라고 인식한 것은 본질을 제대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죽는 순간마저 인간답게 고귀하게 죽겠다고 죽음의 고통과 비참함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안락사를 주장하는 인간 존엄주의자들에게는 충격적인 표현일 수 밖에 없으리라.
기계라는 표현의 뜻을 나 나름대로 정리하면 에너지가 공급되는 한에서 끊임없이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일만 한다는 것이다. 쉴새 없이 기계의 용도에 따라 수명이 끝날 때까지. 인간이 살아있는 한 먹고 마셔야 하며 그 결과로 생각해야 하고 똥을 생산해야만 하는 것처럼.
죽는 순간까지 인간의 자존심과 자기 애(愛)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에 존경심마저 일어날 형편이 되어버렸다. 인간들의 인간들에 대한 애착의 끝은 어디까지이며 끝이 있기는 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가져본다. 역시 생각하는 기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빵 없이는 15일을 못살고 물 없이는 40일을 못살고 희망(꿈)없이는 하루를 못산다는 어떤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인간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뜻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죽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인간들은 꿈이 있어야 산다. 꿈이 없다는 것은 곧 죽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산다고 말하는 것은 가지고 있는 꿈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고난과 고통도 감수할 수 있으며 자신의 생명마저 버릴 수 있는 존재들이 인간이다.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위해서, 자본주의자는 자본주의를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세상 사람들이 어떤 꿈이 있고 그 꿈을 위해 어떤 일들을 벌리고 있고 하는 것은 믿는 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믿는 자들이라고 하는 자칭 성도이고 자칭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자들의 꿈은 무엇인가? 그들도 역시 똥 만드는 기계이며 생각하는 기계이기에 세상 사람과 다를 수 없다.
많은 자칭 성도(주님께서 인정하셔야지 인간들이 아무리 성도라고 주장해도 주님과는 상관 없는 공허한 낱 말일뿐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소위 간증과 믿음의 글이라는 이름 하에 이 세상에 넘쳐 날 정도로 많고 이 순간에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글도 그 중의 하나이다.
자세히 안 보아도 모든 간증 글들과 그들의 주장에는 하나같이 극적인 반전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불치 병에 걸렸거나 사업 실패로 자살 직전이던가 자식의 자살로 폐인이 된 상태라든가 아무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들이다. 이들의 주장이 성경적이냐 아니냐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이다. 각자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는 것이니까(사사기).
사업이 잘되어서 벼락 부자가 되어서 혹은 대통령이 되어서, 아니면 병 없이 건강하게 오래 살게 되어서 하는 등의 인간들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져서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간증은 내 기억으로는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다. 모두 절대적인 절망에서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즉 희망을 만났다는 말이다. 이제는 살게 되었다는 긍정적인 신호이다.
그동안 절망으로 잃어버린 꿈을 향하여 매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부를 바라던 자들은 돈을 얻기 위해,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은 그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병든 자들은 기적적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치료 받기 위해, 자신들의 꿈을 이루어 주실 구세주를 만난 것이다. 그 분이 누구신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특별히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시던가?
무엇을 의심하고 꾸물거릴 이유가 있단 말인가? 입을 크게 벌릴수록 더 크게 채우신다고 약속까지 하셨다. 남에게 지지 않기 위해, 남보다 더욱 큰 축복의 경쟁은 시작되었다. 가지고 있던 꿈은 이미 하찮은 것이고 더 큰 꿈을 얻기 위하여 피 눈물 나는 기도는 밤낮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들의 꿈이 이루어 지는 것은 그들의 기도와 간구와 하나님에 대한 충성의 양의 법칙에 속한다고 믿는다.
그들의 꿈이 이루어지는가? 성경에서는 그런 인간들의 꿈을 이루어 주신다고 약속한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꿈을 깨트리기 위해 타작기계를 준비하셨다. 하나님의 타작기계는 인간들의 꿈과 그들이 쌓아 올린 기도의 바벨탑을 바람에 날리는 초개로 만드신다.
그들의 꿈은 항상 그들 자신 속의 꿈으로만 남아있다. 이루어지지 않는 꿈 때문에 그들이 믿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깨어진 꿈이지만 그들을 살려야 할 꿈은 계속해서 인간들을 더 큰 꿈으로 인도한다. 그동안의 믿음이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더 큰 판돈을 제공하는 것이다.
인간들이 그동안 꾸던 꿈은 너무 세속적이고 물질주의적이었다는 자아비판 아래 꿈은 물질적에서 정신적으로 인도한다. 인간의 마지막 남은 꿈이며 인간 스스로 가장 고귀하고 숭고한 꿈인 천국에 대한 꿈으로 변화된다. 물질적인 축복이나 개인적인 꿈은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고 진리이므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며 성경을 지켜야 믿는 자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이제는 이 숭고한 꿈을 위하여 그동안 깨닫지 못해서 엉뚱한 꿈을 위해 노력한 인간들의 실수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제 제자리를 찾은 것으로 믿는다.
이 꿈을 위해서는 이 세상 것 모두 없어져도 좋다는, 그동안 인간들이 그렇게도 공들이고 기도해서 얻고자 하던 실체를 과감히 버리고, 즉 자기부인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토록 추구하며 모아둔 돈과 모든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 천국에 가는 꿈을 위해서는 중요한 것이 하나도 없고 하나뿐인 목숨도 버릴 결심이 섰다. 주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사건들이 일어난 것으로 간주한다.
천국 가는 꿈을 위해서 주님의 말씀대로 부모형제와 전답을 다 버렸다. 남은 것은 언제 천국에 들어가느냐 하는 시간만 남은 상태이다. 그런데 이들이 또다시 잊고 있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타작기계를 계산하지 못한 실수를 또다시 반복한 것이다. 하나님의 타작기계는 인간들의 꿈과 자동적으로 연결되어있다. 하나님의 타작기계가 인간들의 꿈과 연동되어 인간들의 자신들만의 꿈이 있는 한 하나님의 타작기계도 자동적으로 인간들의 꿈을 파쇄시킨다는 것이다. 다시 바람에 날리는 초개로.
문제는 하나님의 타작기에 분쇄된 꿈은 피닉스처럼 부활한다는 것이다. 일회성이 아니고 항상 가동한다. 꿈꾸는 기계가 작동하는 한. 그처럼 하나님의 타작기계도 역시 꿈꾸는 기계가 소멸될 때까지 작동한다 연동적으로.
구원은 인간들의 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인간들은 정말로 모른단 말인가? 또한 인간들의 노력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정말로 모른단 말인가? 왜 천국에 대한 꿈이 인간에게 필요한가? 천국은 인간들에게 허용된 적이 없다. 그것이 꿈일망정. 인간에게 허용된 곳은 예비된 불뿐이다.
천국은 주님께서 사시는 주님의 나라이다. 그곳의 출입은 주님의 초대뿐이다. 인간의 꿈으로 그 초대권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척 지금도 꿈꾸는 기계는 작동하고 있다.
Monday, September 03, 2012
김대식 12-09-04 09:13
막 사세요
인간이란 원래 막살면서도 그 막산 것을 감추기 위해서 의미를 따집니다.
이 행동이 과연 옳았을까? 아니면 나쁜것일까?
옳았으면 내 자식이나 주변인에게 면목이 써도록 나도 할 말 할수 있는 자격이 생겨버리고
나빳으면 내 자녀에게나 주변인에게 도리어 할 말도 못하는 지적꺼리가 되기 때문에
항상 옳든 나쁘든 결국 내 자신의 이미지에 신경 쓰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라캉의 말대로 그냥 성질 대로 막 사는 것이
차라리 정신건강에 낫지 정신병자처럼 이것이 옳니 저것이 옳니 따지면
본인도 감당 못하는 챗바퀴 공장의 과부하가 걸려 폭발해 버리는 겁니다.
어떤 누가 하도 요즘 성범죄가 심하니까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된다고 했는데,
음악을 사랑하는 자는 큰범죄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유명한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더군요
그게 바로 니체라는 철학자의 말을 인용했는데 과연 니체가 큰 범죄에서 벗어난 인물일까요?
잘못이해했던 옳게 이해했던 니체 핑계 대고 히틀러가 바그너음악에 빠져서
유대인 말살을 펼치게 되었지만 사실상 그것은 유대인에 대한 유럽인들의 마음을 대신 용감하게 먼저 나서준것이겠지요. 히틀러만 욕먹는 꼴이지만 말이죠. 건지러운 부분을 끌고 싶었는데 고맙게도 고맙게도 히틀러가 대신 끌거주니 얼마나 시원하던지? 유쾌 상쾌 통쾌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온대 다 간섭하고 껄끄럽게 만들고 불편하게 모든 것을 실족케 만드는,
불화케 하는 그 예수님을 고맙게도 고맙게도 유대인이 대신 처단해 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그것을 감춘채로 교회에서 예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하니 기가막히고 코가막히는 거죠.
당사자 예수님이 비웃습니다 비웃어
이런 육의 현실적인 내막
(혼자 깨끗하게 살수있기는 커녕, 서로 서로가 맞물려있는 사망의 권세, stand alone complex 군중 속의 고독)
을 그냥 무시해 버리고
어딜 감히 예수님께 바로 가겠다고 하니
예수님은 베드로의 애정 깊은 손을 뿌리치고
백번만번 죽어 마땅한 극악무도한 십자가 처형대의 한 쪽 강도의 죽음에 뛰어드시는 겁니다.
(stand alone complex 군중 속의 고독, 광할한 네트워크의 홍수 속에 있으면서도 갇혀버린, 밀집되어 빽빽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숨막혀죽는 흐름 속에 고여 썩은 물, 엘리아스 카네티.
모방이 원본보다 더 원본같은, 절대 죽으러 가시면 안된다는 베드로의 애정깊은 것은 그 사랑이 원본이 아니라 사랑을 모방하는 흉내 사본입니다. 정작 원본은 죽으러 오신 겁니다. 이 원본보다 더 사랑스럽게 더 사랑답게 보이는 그 사람의 일인 베드로의 손을 뿌리칠줄 모르는 원본은 원본도 아닌 것이겠지요. 그 허무(우상)을, 모방을 뿌리치고 원래 이 땅에 오신 취지를 다 이루시는 그 처음자리 첫사랑은 감히 베드로가 침범하거나 훼방할수가 없습니다. 어느정도로 침범이 되지 않는지를 직접 베드로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씨알도 먹혀들지 않는 겁니다. 그 처음자리에서 그 원본인 근원의 자리에서 베드로를 반드시 미끄러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보게 됩니다. 주여 뉘 시오니이까? 종말이란 이렇게 원본과 사본의 자리를 팔을 어긋맞게 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왔다는 것을 종말이가 외치고 있습니다. 이 놈이 사랑받는자가 아니고, 저 놈이 사랑받기로 작정된 자 입니다 라고 반드시 ~~ 아니요 를 거쳐서 말이죠. 반드시 허무를 거쳐서 팔을 어긋맞게 전도(전복)시켜 높여버립니다. 일부러 약올려서 말이죠, 마귀보란듯이. 뭐뭐 아니고 누구 이다 라고. 잃어버림을 거쳐서 사귐을 성취하는 것은 십자가의 불륜을 높이기 위함입니다. 형 에서 아니요 야곱, 맏아들 아니요 탕자. 99마리 아니요 한마리 잃어버린 양, 이 실족케 하는 복음을 받을만한 사람은 받게 하시는 목자의 음성은 들을귀 있는 양만 듣도록 되어 있는 사귐, 케뮤니케이션, 통로, 구조, 성령의 일 입니다.)
베드로의 속임수에 속아넘어가지 않겠다는 겁니다. 사랑한다면서 정작 이용해 자신의 방패막으로 삼고자 한 베드로의 손을 뿌리치시고
차라리 평생을 막산 자 한 쪽 강도의 죽음에 뛰어들어
니캉 내캉 낙원을 누리자 라고
죽어가면서 죽는순간까지도 마저 이 말도 안되는 기가막히는 소리를 하니
옆에 강도가 비웃을 정도이니
비웃을 짖만 골라서 하시는 겁니다.
베드로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면
감히 누가 비웃겠습니까? 다 같이 공감하며 감동하지?
왜 그런 막산 인간에게 왜 예수님 마저 막사시면서 막죽어버리시는것일까요?
숨막혀서입니다. 베드로의 악취
교회의 악취
인간 냄새의 악취
온 세상이 지옥의 악취로 가득한데
그 지옥에서 평생 니캉 내캉 악취 맡으면서 살자고 하는 소리에 기가막혀
지금 곧 제대하는 놈 아무나 붙잡고
이 악취에서 벗어나자고 죽어버리시는 겁니다.
곱게 곱게 아름답게 포장된 글들이 홍수처럼 쏟아나는 환경 속에서
정작 포장을 뜯으면 그 썩은내가 평생을 걸쳐 아무리 세탁을 해도 지워지지 않아서
아예 포기해 버리고 그 악취냄새에 배여 그냥 막살고 있으면서
여전히 희망으로 긍정으로 안막살고 있다고 세뇌시켜본들
예수님은 도저히 못견뎌서 도망쳐 버렸습니다.
우리도 빨리 이 악취나는 공장에서 벗어납시다.
막도망칩니다.
도망칠 구멍이 없지만
그 구원받은
기냥 기냥 막판에 막살다가 대박로또 맞은
억수로 억수로 재수좋은 한 쪽 강도를 부러워 하면서 말이죠.
원수와 피의 만남 뿐 입니다. (십자가)
ps
위선자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 모습입니다.
그러나 위악자인 처음부터 악인으로 태어났고
누가봐도 악인인 그 원수를 향해서 예수님은 사귐을 일방적으로 펼쳐 버리십니다.
시편에서 다윗(찬양의 달인)은 이런 위악자의 손에서 건져달라고 외쳤지만
정작 다윗을 원수 삼으시고 악인 삼으신 주님의 맹렬한 진노 앞에서
정작 다윗 자신이 원수였고 다윗이 위악자였음이 탄로나게 됩니다.
위선자로써 율법적으로 4배나 갚으라 라고 범법자를 향해 판결내리는 그 왕을 꿈꿔왔지만
그 왕의 자리는 허상이였음을 쭐꾸떡 미끄러져서 직시하게 됩니다.
정작 위악자로써 그 악한 놈이 바로 너다 라고 판결받는
백번만번 사형집행 당해야 마땅한 놈인 것을 아는 것이
주님의 피의 가치, 대신 피 값을 치르시는 그 용서의 단절성을 직시하겠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속의 [막살지 않겠다]는 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어서
늘 도망치고 쫏겨나는 신세가 다윗이였고 그 노선으로 예수님도 같은 운명이였습니다.
도망치는 예수님
그리고 끝까지 예수님을 임금삼고자 뒤 쫏는 사람들
도대체 이게 무슨 웃기는 장면인가요? 임금은 도망치고 vs 임금삼아줄께 라고 뒤쫏고
과연 숭배의 대상이 될까요?
무엇이 진짜 현실입니까
전혀 가치가 없어 보이는 믿음도 가지않는 나약한 무능과 믿음이 너무 너무가서 임금삼겠다는 것
0.03초 가 순간이라 무능해 보이지만
그 순간에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버렸습니다.
이 어리석고 미련한 가치없는 십자가가, 유일하고 영원한 사랑입니다.
나는 영원히 너의 0.03초 이다
이근호 12-09-04 09:26
아멘! '큰 판돈'이라는 표현이 마음이 와 닿습니다. 판돈을 키워나가는 곳=세속적 판돈에서 천국간다는 판돈으로 키우면서 사기치는 곳=교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예수님) 십자가를 지라"(마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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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이 사라진 후
2012-09-03 04:46:10 조회 : 11 이름 : 김혜선
절망은 인간의 삶을 고통 속으로 몰아 넣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피폐케 하고 육체적으로도 무너지게 만들고 결국은 정신과 육체를 무너트리며 해체시키는 결과를 갖게 만든다.
인간들이 절망을 두려워하는 것은 곧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동서남북을 보나 하늘을 바라보나 길이 없는 것이다. 손을 내밀 곳이나 내민 손을 잡아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버텨나갈 힘을 상실한 것이 희망이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간증들은 그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고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어서 소망을 갖게 되어서 이제는 절망을 극복하고 예수님을 믿고 평안을 얻고 기쁨을 찾았다고들 한다. 정말로 그런 것인가?
절망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희망을 찾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으로 벗어날 방법은 없고 죽음만이 절망의 고통을 해결할 유일한 수단인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게 되어 자신의 절망을 그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신다는 게 믿는 것이고 그래서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자신을 절망으로 빠트렸던 불가능한 자신의 희망을 이루어 줄 힘을 만난 것이다. 그러나 그 희망은 얼마를 못 가는 것이다. 자기 기만이며 자신에 대한 철저한 자신의 속임에 처한 것임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그 절망을 결코 해결해 주시지 않는다.
주님께서 절망을 해결하시는 방법은 마지막 희망을 갖게 만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부터의 해방, 마지막 남은 하늘로부터의 도우심 마저 거절하시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도우심은 없다. 절망 속의 절망이다.
이제는 어떤 선택도 어떤 방법도 남아있지 않다. 마지막 소망인 주님의 도우심 마저 거절당한 상태인 가련한 존재인 것이다. 자살할 것인가 아니면 더 버티어 볼 것인가 하는 마지막 결단의 순간이다.
주님의 방법은 자신을 철저히 볼 수 있는 자리로 내 모신다. 절망에서 절망으로.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가련한 죄인이며 이 세상에서는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살다가 필경은 죽을 수밖에 없는 저주받은 존재임을(창3:15-19). 저주 받은 존재가 무슨, 이 세상에서 희망과 기쁨과 즐거움이 가당키 나 하단 말인가?
저주받은 존재는 당연히 저주받아야 하고 그래서 고통과 괴로움은 기본이며 인간 본래의 자리이다. 지렁이 같은 존재(사41:14)이며 메뚜기 같은 존재로서 홍수에 쓸려나가야 할(시90) 존재가 하나님께 감히 무엇을 간구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인간들이 구더기나 바퀴벌레 보듯 진멸하여 불에 태워 없애버려야 할 존재로 보신다.
인간들이 구더기나 바퀴벌레들을 볼 때 무엇을 생각하는가? 어떻게 하면 저 더러운 것들을 없애는가 이다. 방법은 물로 쓸어버리던가 아니면 불 질러 버리는 것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이래 말씀 밖으로 한치도 벗어나지 않으신다. 인간들이 상상한 하나님이 이 세상과 인간의 마음 속에서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활개치고 있다. 인간을 도우시는 하나님, 인간을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으로. 그 하나님이 인간에게 희망을 주고 영생을 약속한다. 그럴 능력도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바라던 기적이 나타나는 희망마저 사라져버린 후에 절망도 사라진다. 인간은 구더기이며 구더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는 죄짓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진멸의 대상일 뿐이다.
절대적인 절망의 상태가 거짓 희망을 버리게 만들고 인간 본래의 자리로 환원시킨다. 고통이 사라진 후 우주에서처럼 마음의 무중력 상태가 된다. 이 세상은 허상이며(히11) 그동안 허상 속에서 허상을 바라보며 고통 당하고 괴로워하고 살아왔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거짓에 속아서 거짓의 희망을 품고 하나님의 홍해가 갈라졌던 기적을 꿈꾸며. 인간은 결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직 허상을 바라보며 그 허상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든 하나님이든 이용하기만 한다. 믿음이라는 포장으로.
이 마음의 무중력 상태가 나를 없애고 세상을 없애는 주님의 방법이다. 세상은 나에게 존재하지 않고 나는 세상에서 죽은 존재이며 나의 일도 나의 존재도 없고 주체가 내가 아니다. 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홍수에 쓸려나갈. 그 홍수에서 건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구원하신다.
생명이 피에 있나니(레2),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만 생명이 있고 건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몫이다.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믿고 십자가의 은혜를 믿고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건짐 받고 못 받고는 인간이 간여할 수 없는 주님의 창세전의 예정하심이다.
*이 무중력 상태와 비슷한 상황의 전개가 나치 독일군과 소련군과의 스탈린그라드의 전투에서 나타난다. 단기간이 아닌 장기간 소련군에 포위되어 물자와 무기가 떨어지고 굶주림으로 죽기 직전의 독일군들에게서 나타난다. 본국으로부터의 어떤 도움이나 구원의 희망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에서 절망이 없어지고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마음의 평화와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된다. 그렇게 죽어 갔다.
마음의 무중력 상태를 느끼는 것이 주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그 결과로 자기포기가 일어나고 절망이 사라지는 것인지 아니면 독일군처럼 자연인에게도 일어나는 인간의 일반적인 상태인지는 모른다. 주님만이 아신다.
믿음이 좋아서 모든 것을 주님께서 인간을 위해 베푸신 결과로 받아들인다. 모든 것을 성경의 말씀으로 짜 마추는 것이다. 주인은 주님이 아니라 바로 인간(나)인 것이다. 영원히.
노병은 다만 사라질 뿐이다가 아니라 인간은 다만 쓸려 내려 갈뿐이다. 건지심을 받은 자만이 기름을 준비한 자가 되고 양들의 자리에 않는 자들이 되며 누구도 자신의 믿음으로 기름을 준비할 수 없으며 양들의 자리에 않을 수 없다.
Sunday, September 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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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12-09-03 08:32
개방이 아닌 단절
성령의 소통(구조:커뮤니케이션)은 개방성이 아닌 단절성으로 예수 안에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예수안
반드시 베드로를 물에 빠뜨려 죽여서 새롭게 바라본 예수님은 방금 전 까지만해도 경험 속에 축척시켜 알게된 그 예수님이 절대 절대 아니였습니다.
죽음을 거쳐 예수님을 보니, 주여 누구십니까? 당신 도대체 누구요?
내가 알던 예수님이 아닌 것 같은데? 누구세요?
얼마나 낯설었을까요? 심지어 나는 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라고 하시니 원.
그 단절성(거룩, 차이)를 거치지 않고서는 내 속의 가짜 하나님을 지적받을 리가 없으니 말이죠.
기름이 나를 준비했었고, 양의 자리가 나를 준비했었지.
절대 내가 기름 준비, 내가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음을
일방적이고 단절로써 무조건으로 사귐을 뻔뻔스럽게 실행하신 예수님 믿음 때문인것 같습니다.
그렇게도 남이 헐벗고 목마르고 배고플때 이웃사랑을 평생을 걸쳐 해온 자들에게는
무조건 염소다 라고 일방적으로 취급해 버리시고
단 한번도 남이 헐벗든말든 배고프든말든 목마르든말든 손가락 한번 까딱하지 않던 자들에게
너는 내가 헐벗었을때 목마를때 배고플때 주었구나 라고 일방적으로 사귐을 선포해 버리니
단 한번도 말씀 어긴적이 없는 맏아들이 그 아버지의 긍휼에 안색이 변해 버리는 이 구조
탕자에게 일방적인 사귐을 선포해 버리는 이 긍휼
이 소통
이 단절성은
오직 십자가가 옳았고
나머지 모든 것인
나(육인 인간)는 무조건 틀렸다는
십자가의 사랑만 높이고 남기시겠다는 주님의 똥고집이
은혜(희년의 완성)로 약속을 이루시는,
어두움을(개방성) 물러가게 하시는, 사망권세를 깨뜨리시는 유일한 사랑인것 같습니다.
이 사랑 때문에, 사랑도 아닌 것들의 차이를 격게 하기 위해서
거짓들의 활동 또한 목격해야 되겠지요. 그 단절성을 말이죠. 어딜 감히 개방이라고 사기를 치는지
죽음 속에서 보니 그 차이가 명료하니
종말 속이 아니면, 단절 속이 아니면,
그 차이 속이 아니면
십자가 속에서가 아니면
백번 만번 속아도 싼 인간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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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12-09-03 09:23
왜 소위 목회한다는 목사들은 이런 글을 남길 수 없는가? 목회한다는 그것이 자기를 망하게 하는 직업이라는 것을 왜 모를까? 창녀보다 더 더러운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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뚫어 !!! 막힌 길을 뚫어라 !!! 권력의지, 힘에 의지,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려라
뻥뻥뻥 뚫어 !!! 막힌 담을 헐어라 !!! Under Pressure
고독을 사람들은 싫어한다. 그래서 빽빽한 군중의 밀집된 상태를 사랑한다. 살아있는 자신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접속한다. 광활한 네크워크에, 시장에 가야 삶의 활력소를 느끼듯이 흐름의 빽빽함이 리좀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고독을 느낀다. 자살을 한다. 어디에도 생명이 없다. 온통 어두움 뿐이다.
답이 없다. 외로워서 군중의 빽빽한 밀집된 상태를 원했건만, 그 속에서 밀리고 밀려나 압도되어 압사당할까 또 두려워 하며 고독에 빠져버린다.
허물어라 이 허무를 이 담을 폭파하라 파괴하라 전복하라 힘으로 눌러 부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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