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이 아닌 단절 : 성령의 소통(구조:커뮤니케이션) , 화해가 아닌 불화, 평강이 아닌 심판
김대식 12-09-03 08:32
쭐꾸덕 미끄러지는 언어 , 랑그(시스템)에 상대적인 언어 - 빠롤, 삑사리
(여자는 남자의 징후(증상)이다 라는 말이 있듯이, 여자는 레비 스트로스 말대로 소통(구조 곧 흐름=통로)을 만드는 유일한 잉여가 바로 여자인데, 라캉은 남자는 이 구조(잉여) 없이는 근친상간의 오이디푸스(법)를 넘어설수가 없다고 합니다다. 곧 흐름이 없으면 고이게 되고, 고이고 정체된 것은 썩고 죽어버리는 것이겠죠. 미래가 없는 겁니다. 그저 어른이되지 못하는 남자가 아닌 아이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의 미래이듯이, 잉여로 흐름을 만들고 그 잉여로 구조 속에 흐름을 타는 겁니다. 결국 여자가 남자보다 두 배나 부정하고(구약 레위기에서) 남자보다 약할수 밖에 없도록 된 신체구조는 생명을 품기 위함이고, 그러므로 긍휼의 은혜체제가 은혜구조가 아니면 미래가 없도록 한, 몇배나 긍휼을 베풀기 위한 창조성 생명성을 죽음 속에서 부정속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아담이 아내 하와에게 생명이라고 이름붙이는 이유는, 남자에게서 나올수 없는 생명, 곧 창조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그 생명을 보고서 유일하게 잉여 곧 선물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받게 되는 겁니다. 그 잉여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는 나는 영원히 너의 3초 이다는 은혜의 케뮤니케이션을 단절인 죽음 속에서, 부정 속에서, 십자가 속에서, 피 속에서 찜 당하는 겁니다. 이중분절의 균열, 그 균열된 틈사이에서 부정을, 허물을, 죄악을 뚫고서 나온 열매, 즉 죽음속에서의 생명, 심판 속에서의 구원, 단절 속에서의 소통, 잃어버림 속에서의 사귐을 돌출해 내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은 이 십자가만 증거합니다. 유일한 커뮤니케이션인 소통이요 구조이며 원수만들어 피의 가치를 높이고자, 유일한 여자의 후손을 높이는 뱀의 후손과의 싸움을 붙이는 미래완료이기 때문입니다. 다 이루었다 라는 십자가의 영광만 남기고 다 누락시키는 주 되심만을 남기고 높이는 성취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로마서 8:32-34)
성령의 소통(구조:커뮤니케이션)은 개방성이 아닌 단절성으로 예수 안에 들어갑니다. 예수안
반드시 베드로를 물에 빠뜨려 죽여서 새롭게 바라본 예수님은 방금 전 까지만해도 경험 속에 축척시켜 알게된 그 예수님이 절대 절대 아니였습니다.
죽음을 거쳐 예수님을 보니, 주여 누구십니까? 당신 도대체 누구요?
내가 알던 예수님이 아닌 것 같은데? 누구세요?
얼마나 낯설었을까요? 심지어 나는 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라고 하시니 원.
그 단절성(거룩, 차이)를 거치지 않고서는 내 속의 가짜 하나님을 지적받을 리가 없으니 말이죠.
기름이 나를 준비했었고, 양의 자리가 나를 준비했었지.
(기름과 자리가 졸지에 주체가 되어버리고 난 그 대상물이 됨. 잉여란 닭울음이 주체가 되어 난 그 유물이 되는 무시받아야 마땅한 자로 팔을 어긋맞게 됨, 내가 주체가 아니요 야들이 선지자 이며 나는 그 대상물, 소품, 전리품입니다.)
절대 내가 기름 준비, 내가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음을
일방적이고 단절로써 무조건으로 사귐을 뻔뻔스럽게 실행하신 예수님 믿음 때문입니다.
그렇게도 남이 헐벗고 목마르고 배고플때 이웃사랑을 평생을 걸쳐 해온 자들에게는
무조건 염소다 라고 일방적으로 취급해 버리시고
단 한번도 남이 헐벗든말든 배고프든말든 목마르든말든 손가락 한번 까딱하지 않던 자들에게
너는 내가 헐벗었을때 목마를때 배고플때 주었구나 라고 일방적으로 사귐을 선포해 버리니
단 한번도 말씀 어긴적이 없는 맏아들이 그 아버지의 긍휼에 안색이 변해 버리는 이 구조
탕자에게 일방적인 사귐을 선포해 버리는 이 긍휼
이 소통
이 단절성은
오직 십자가가 옳았고
나머지 모든 것인
나(육인 인간)는 무조건 틀렸다는
십자가의 사랑만 높이고 남기시겠다는 주님의 똥고집이
은혜(희년의 완성)로 약속을 이루시는,
어두움을(개방성) 물러가게 하시는, 사망권세를 깨뜨리시는 유일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사랑도 아닌 것들의 차이를 격게 하기 위해서
거짓들의 활동 또한 목격해야 되겠지요. 그 단절성을 말이죠. 어딜 감히 개방이라고 사기를 치는지
죽음 속에서 보니 그 차이가 명료하니
종말 속이 아니면, 단절 속이 아니면,
그 차이 속이 아니면
십자가 속에서가 아니면
백번 만번 속아도 싼 인간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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