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신이라고 하는 예수님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07-09 16:45:04, 미래

요한복음 10장 35절의 말씀을 어떻게 봐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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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요 10:35, 개역)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예수님은 요한복음 중에서 10장부터 본격적인 자신의 죽음을 언급하십니다.

곧 죽음이 자신이 누구인가를 드러내는 기준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죽음을 통해서 두 패 곧 빛과 어두움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즉 예수님의 이런 직접적인 활동이 나타나기 까지는 그 동안 그림자와 허상이 실체가 나타나기 까지 왕노릇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겁니다.

쉽게말해 영화감독은 주인공을 부각 시키기 위해서 그 동안 악당들이 사람들을 다 장악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모세가 나타나기 까지 애굽나라가 이스라엘을 다 장악해서

의도적으로 부르짖음을 유발케 하여서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여호와임을 드러내십니다.

이런식으로 관계성을 맺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부르짖지 않으면 안되도록 고통을 애굽왕을 통해서 가하십니다. 견딜수가 없기에 여호와를 찾도록 배려하십니다. 일종의 자작극이지요.

마찬가지로 율법(하나님의 말씀)을 준 이유는 바로즉시 생명(구원)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렇게 되면 구원받는 인간이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뽀빠이가 주인공이 아니라 올리브(여친)이 주인공이 되는 셈이죠.

그래서 올리브가 주인공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서 반드시 브루트스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자 그럼 주인공은 누구냐?

선한 목자입니다. 이 선한 목자가 누구인가를 말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10장은 이제부터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본격적으로 언급하게 되는데

반드시 그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

말씀을 쥔 존재들 그 당시 유대인 중의 바리새인들이지요

그리고 거짓 목자

그리고 반드시 율법을 지킨자들이

예수님과의 차이성을 드러내는데 동원되는 겁니다.

마치 여호와가 누구이신가를 드러내는 그 차이성에
반드시 파라오 왕이라는 주님이 강퍅케 만든 인물과 그들 애굽군사를 통해서 영광받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마귀가 없으면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악당들이 악당 노릇을 해야지만
그 악당과 차이나는 악당을 쳐부수는 주인공이 빛이 납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거짓 목자는 가만히 있는 중립지역의 자들이 아니라,
반드시 선한목자와 반대가 되는 그 차이성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자기 생존 문제를 교묘하게 감추고 거룩인냥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양을 볼모로 잡아서 자기의 영원한 밥풀떼기로 삼아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미 잡아먹힌 양이나 다름없다는 겁니다.

지 그럼 선한 목자는 바로 이런 상황을 무시한채 별개의 모습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목숨을 버리지 아니하면 안되는 입장에서의 선한 목자이고

반대로 삯꾼 목자는 그러니까 자기와는 별개의 문제로써
자기유익만 챙기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이 자기유익이라는 말을 우리 기준의 단순한 이익만을 두고 말하는게 아니라
반드시 자기유익은 예수님과 그의 자녀를 핍박하는 관계로 몰아넣고 있고
예수님의 죽으심이 바로 그렇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뽑아버리고 싶은 걸림돌이요 제거하고픈 거리끼게 하는 부딪히는 돌이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걸림돌만 없으면
진짜 이거 하나만 없으면 자기들 뜻대로 다 되어버린
그야말로 이 십자가만 없다면 완벽한 자기들의 승리인데

유독 이 하나 못이겨서
모든 것으로 건축된 그 건축물이
밖에서 굴러온 건축자들이 버린 돌맹이 하나 때문에
그 완벽하고 튼튼하고 난공불락 성벽이

누가 봐도 아무 힘이 없어 무가치하게 여겨 버려버린 돌맹이가
그 건물의 모퉁이 돌이 되는 주인공으로 드러나는

역전의 명수로써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아무도 힐문 못하도록
그의 지혜(십자가)에 모든 무릎을 꿇도록 하시는 겁니다.

(시 8:2, 개역)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빌 2:5, 개역)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개역)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개역)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개역)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개역)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개역)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개역)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자 이 마음이 바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임한 신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뜻 자체도 하나님(신)과 겨루어 싸워 이긴자 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죽음을 이긴 자 곧 약속에게 붙들림 받은자. 그렇기에 약속 아닌 비약속 곧 우상을 쳐단하는 귀신잡는 해병대 라는 뜻입니다. - 이 부분은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환도뼈 뿌라짐으로써 얻게된 이름이기에 그 부분에서 살펴봐야할 아주 중요한 의미죠. 죽음을 이긴자 그렇기에 죽어도 상관 없는 자 라는 뜻)

구약에서는 성령을 성신 이라고 합니다.

(창 6:3,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는 육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선악과의 사고방식 외에는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단절 되었고 차단 당했다는 뜻입니다. 그저 육의 소욕만 생각할 뿐입니다.)

이 성신이 모세는 광야에서 모든 이스라엘에게 임하기를 바랬습니다.

(민 11:29, 개역)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신과 선지자란 육의 철저한 단절성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두 패로 나누어 지는 사건이 바로 민12장에서 그 유명한 구스 여인 하나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가 무너지는 심판을 격게 됩니다. 사랑은 이런 심판을 통해서 또 지적받는 매를 통해서 자녀임의 관계를 알게 됩니다. 사생아 에게는 매가 없으니 그들에게 있는 자유라고 보여지는 부러움이 자유가 아니라 사실은 죽은 썩은 시체 냄새가 공기 중에 날라다니니 그게 자유라고 보이니 이 얼마나 옷을 찢어야 할 정도로 우리 눈이 썩었다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민 24:2, 개역)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거하는 것을 보는 동시에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

(또 여기 민 24장에서는 발람 선지자인 거짓선지자가 발락 왕에게 돈을 받고서 이스라엘에게 사주하여 저주를 퍼붓고자 예언을 하는데, 분명히 자기 입에서는 저주가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기 귀로 들려오는 자기 입에서 나는 소리와 타인의 귀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이스라엘을 지독스럽게 편애하는 축복만이 넘쳐나는 예언을 하는 겁니다. 아무리 악한 저주를 퍼부어도 정작 말로 표현되기는 축복입니다.)

자 지금까지 제가 위에서 구약을 통해서 언급한 내용은 일종의 성령론에 해당되는 성령 (하나님의 성신)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공부한 성령훼방죄와 연관이 있기에 마침 딱 맞는 질문에 좀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약의 율법이란 지키라 가 목적이 아니라 죄인이 되게 하는 목적입니다.
죄인이 됨으로 인해서 율법의 완성자가 누구임을 보게 됩니다.
이 역할을 맡은 분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의 모든 정신은 십자가 정신인 바로 약자보호법(이웃환대법)에 해당 됩니다.

즉 약자가 반드시 생겨야 하고
보호자가 반드시 생겨야 합니다.

그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 율법인데

정작 율법 지킨 자기자신을 사수하게 되면 자기유익을 챙기게 되고
도리어 약자 보호나 이웃 환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약자에게 다가가는 보호자
또는 이웃에게 다가가는 환대자가 자기자신으로 만들어야 하기에

도리어 율법을 어기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약자가 그 약함을 해결 못하고
그 이웃의 그 섬김을 받지를 못하기에

졸지에 보호자로 나서거나 또는 환대자로 나서는 그 당사자가
이웃과 약자를 짖밟고 핍박하고 괴롭히는 자가 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겁니다.
(이것을 다윗이 율법 쥔 손이 짤리고서야 그 범죄한 손을 외부에서 짤라냄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알고, 율법 외에 다른 의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시편 51편이고 아주 중요하죠, 그리고 이 다윗이 알았다면 다른 인간들은 다윗처럼 이 내용 모르면 다 작살이다 라는 것이 바로 다윗언약이고 이 다윗언약을 기준으로 해서 국가체제의 이스라엘이 참선지자에게 공격을 받게 됩니다. 공격당할 이스라엘이 아니기에 참 선지자를 다 죽여버리는 겁니다. 왜 이 부연설명을 하는고 하니 뒤에 시편 82편을 요10장에서 예수님이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시편 그대로 행해도 시편을 다 외운 행함으로 백날 지켜도 다름아닌 그들의 손에 죽으시러만 오신 겁니다. 곧 시편은 찬양자를 원수 만들겠다는 목적입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주를 삼키니라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약 3:10, 개역)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렇기에 아 맞군요 나는 보호자가 될 수 없고
환대자 (늘 섬기는 자)가 될 수 없군요 라는 죄인됨을 밝혀내는 것이 율법의 목적입니다.
(다윗언약은 왕언약입니다. 결국 인간 중에는 왕이 있을 수 없다 라는 섬기는 왕이 아닌 모조리 다 약탈자인 강도요 이 강도 만난자를 예수님이 이스라엘 속에서 끄집어 냅니다. 그것이 남은자 이고요)

그래서 신약에서는

이방인에게 구원이 넘어 갔다고 해서 구원만 챙기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모르는 또 알필요가 없는 이방인에게 율법을 알도록 하여서
율법 자체를 지켰느냐 못 지켰느냐를 따지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율법 대로 죽어 마땅한 너희들을
이 율법 그대로 지켜서 다 완성하신 예수님 이런 과정을 통해서 너희들을 죄인으로 삼아서 나타난 구원자 이심을 죄인의 자리에서만 구원자를 보도록 하시는 겁니다.
환자의 자리에서 의사의 차이성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정작 이방인이나 유대인은 성령에 의해서 철저하게 차단 당하고 단절 당해야 하는 겁니다.

자 그럼 본문 (사실은 질문 내용이 보통 어려운게 아닙니다.)

요 10장에서 마치 출애굽기의 모세처럼 파라오 왕을 강퍅케 하듯이 저들(삯꾼목자) 바리새인들이 다 알고 있는 것들을 끄집어 내어서 그 안다고 우기는 것을 웃싸스럽게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했고 그것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대접받는 그야말로 우상의 모습을 확 까발려 버립니다. 마치 다윗처럼 말이죠 가짜 왕이면서 진짜 왕인냥 착각한 것을 진짜 왕이 낮추지 않으면 다윗은 그 왕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 왕자리에서 벗어나 보니 그 자리가 탐심의 자리임을 자기자식들이 다윗왕의 목을 칠려고 달려듬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찬양자가 원수였음을 아는 자는 다윗 뿐이였고 이 기준으로 (성령의 마음= 회개) 참선지자는 다윗언약을 기준으로 이스라엘을 해체작업(회개=자기부인)을 하니, 반대로 미완료를 사수하고자 참선지자를 죽이는데

이 양상이 지금 바로 요10장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겁니다.

소위 죽음 유발 사건이지요

또는 살인 유발 사건

이것은 마치 아벨 사건을 재현합니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린 예수님을 꼴보기 싫어서
자기들 드리는 제사 만을 남기기 위해 없애고 제거합니다.

즉 더 나은 제사란 = 제거 당하는 제사요 아무리 없애고 지우고 제거해도 안 지워지는 제사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제물 되신 제사 뿐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직접 제물 되심)

이것 외에는 다 가짜요 거짓이요 사랑이 아닙니다.

결국 죽음이지요

예수님이 언급하신 시편 82편이라는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이란 신이다 왜냐? 고아 과부 나그네를 건지는 제사장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이 제사장 직분과(모세언약) 다윗언약에서는 선지자 직분을(가짜 왕에게서 진짜 섬기는 왕이 누구인가를 증거하는 선지자의 고발)

수행하지 않고 거부하게 된다면

제 3자 입장으로 남는게 아니라
반대로 가해자 입장이 될 수밖에 없도록

빼도 박도 못하도록 하신 겁니다. (마치 마 25장의 악한 종이 달란트를 땅에 파묻어 숨긴 이유가 왕이 무섭다 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랑의 관계성에는 관심없고 자기가 야단 맞을 상황을 미리 제거해 버리는 아간의 범죄와 다를바 없다는 취지인 종말의 상황을 주님은 의도적으로 빼도박도 못하도록 만드시겠다는 겁니다.)

쉡게말해서 신의 아들이라고 불리워지는 이스라엘이 곧 제사장 나라, 선지자 나라, 신과 동행하는 자, 도리어 신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자 신을 죽이는 자 임을

그들 자신이 신의 자리를 탐내고 있는 가짜 신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시 82편이고 이런 이스라엘은 다른 이방 곧 우상의 나라와 다를바 없는 망해야 함을 말하는 겁니다.

사랑은 우상을 절대 눈꼴 스러워서 못봅니다. 우상은 이 사랑을 절대 못 봅니다.
서로의 소욕을 눈꼴 스러워서 못봅니다. 이것이 바로 전쟁을 벌리는 사랑입니다.

자 그래서 이 선한목자를 놓고 제가 몇 년전에 청년회에서 글을 올렸는데 그때 해결하지 못한 의문점이 지금에서야 해결이 되었습니다.

뭔고 하니 왜 죽냐 라는 겁니다.

선한 목자가 자기 양을 위해 목숨바치는 그 정신력은 이해합니다만 (그 글에서 남겼듯이) 정작 죽어버리면 남아 있는 양과 또 앞으로 계속 등장할 양의 탈을 쓴 삯꾼목자인 늑대들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라는 저는 시간과 공간을 수평적으로 생각 했습니다.

다행히도 이번주 월요일에 그 내용이 풀렸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면 아주 쉽습니다.

결국 사랑은 죽음을 해결 했고 죽음이 아니면 사랑을 모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삯꾼들은 죽음의 공포로 돈만 뜯어내지 정작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린 적은 없습니다.

솔로몬의 왕은 이 죽음에 뛰어드냐 로 사랑을 판결했습니다.
즉 불가능입니다.

선한 목자는 이 불가능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랑입니다.

그러나 종교꾼들은 죽음 근처에서 맴도는 썩은시체를 뜯어먹고 사는 독수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길을 죽음의 길로써 열어주었고 정작 우리가 죽기를 무서워 가지 못하는 길을 믿음으로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인 유일하게 자기부인을 하는 길인데

이 십자가의 길을 외면하고 걸림돌을 제거하면 반대로 반드시 죽음을 등쳐먹고 사는 늑대와 같은 겁니다.

아 그래서 관계성이지 죽음이란 그저 도구이고 실체를 드러내기 위한 그림자 벗기기(육체의 장막 벗기기)라는 의도이구나 라는 것을 알고

사랑의 관계성에 놓였기에
저들 마귀로 부터의 공격을 받도록 하신 겁니다.

그렇다고 자살을 제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살이란 자기부인이 아니라 자기긍정에서 지금의 자기에 못만족하여서 더 나은 자기를 찾을려는 자기긍정의 발악입니다.

자 그럼 참 신이란 예수님 뿐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이란 죽음이 묻지 않음을 죽음을 통해서 알려 줍니다. 죽어도 상관없는 다시 사는 자 그것이 바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였고 광야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광야 때문에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버렸습니다. 죽음을 통과한 자들이 죽음도 통과하지 않는 세상을 원했던 겁니다. 마치 문동병자 10명중 유대인 9명이 그랬고 나머지 사마리아 인은 자기부인이라는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참신이였습니다만 외치는 영광에 (예수님의 마음 = 신) 연합되어서 그 와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는 같은 운명 같은 생명 같이 누리는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다시사는 안식을 누리는 안식의 주인이 졸지에 생겨버린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신은 나 아니요를 통해서 참신은 저 분입니다 라는 것을 증거해야할 찬양이

도리어 나 신 맞아요 제사장 맞아요 선지자 맞아요 라고 자기를 긍정해버렸기에
졸지에 예수님이라는 참신을 죽여버리는 삯꾼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 겁니다.

결국 신이란 십자가에서만 밝혀지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은 선악을 아는 자기를 하나님과 같이 만들어 버리는데 율법과 하나님 마저도 이용한 꼴이 드러났고

예수님은 자신의 참 신 되심을 오로지 선악의 반대인 십자가에서 밝혀버리신 겁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드러내는 어두움의 역할을 한 셈이지요.

이것이 바로 성령 훼방죄 이기도 합니다. 인자 훼방죄 곧 자기를 부인케 하도록 모든 주변의 사람들을 깔아 놓으신 겁니다.

모든 것이 십자가의 은혜 뿐입니다.

(빌 1:20, 개역)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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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가 되든 않든 일단 글을 읽어보신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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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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