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하기를 즐기시며 인자하심이 후하신 선하신 주 (시편 86)

 

용서하시기를 즐기시는 선한 주님과 긍휼의 그릇

 

(86:5, 개역) 주는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어무이께서 사유가 뭐냐 하길래

곧바로 [생각하는 것]요 라고 했는데

한자로 된 성경을 보니

용서라는 뜻이라서

바로 수정해서 용서하시기를 즐기신다는 의미라고 다시 알려드렸죠.

 

시편 85편에서는

 

(85:10, 개역)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긍휼과 진리의 만남

의와 화평의 입맞춤이라고 했는데

 

오늘 시편 86편은

 

용서를 즐기심과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하심의 후하심 베푸심이다는 겁니다.

 

마침 찬송가를 처음에는 다른 찬송가를 부를려고 정했는데

좀 느려서 쳐지는 느낌이 들어서

장수를 넘기다 보니

473 아하 내 맘 속에 라는 찬송가를 선택해서 불렀습니다.

 

3절에

주 날개 아래 내가 사는 동안 이 보배를 빛내리라

라는 가사가 있는데

 

(고후 4:7, 개역)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8, 개역)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 개역)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10, 개역)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1, 개역)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4:12, 개역)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 4:13, 개역)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고후 4:14, 개역)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고후 4:15, 개역)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보배를 어떻게 빛내는고 하니

다들 오해를 하기를 성화론자들처럼

 

주의 선하심 때문에

자신도 주의 선하심으로 남을 7번 용서하겠다는 취지로 보배를 빛내겠다고 한다는 겁니다.

 

제가 그게 아니다고 했습니다.

 

부제로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이 어떻게 나누어지는고 하니

바로 보배로 인해서 나누어 지는데

보배 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긍휼을 베푸시면

즉 주의 선하심을 베푸시면

용서를 즐겨하시면

그것이 긍휼의 그릇이고

 

주의 진노를 행하시면

그것이 진노의 그릇이다는 겁니다.

 

(9:21, 개역)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9:22, 개역)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9:23, 개역)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9:24, 개역)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9:25, 개역)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9:26, 개역)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원인이 없습니다.

 

그릇이 설쳐대서 긍휼의 그릇이 될 거야 해서 되는게 아니고

그릇이 설쳐대서 난 진노의 그릇이 되고야 말 거야 라고 해서 되는게 아니라

 

그릇 속에 담겨진 보배가 주체가 된다는 겁니다.

그릇이 보배를 담으니까

그릇 자신이 주체로 착각하는 것이 바로 진노의 그릇이다는 겁니다.

그런 진노의 그릇은 자꾸 남을 7번 용서하겠다고 나서는 겁니다.

곧 의문의 죽이는 것을 반복하는 겁니다.

 

그럼 긍휼의 그릇은 반대로 보배가 770번 용서하는 것을 즐기는 것에 대한

대상물이 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눈으로 보기에는 오히려 정반대로 보이는 겁니다.

진노의 그릇이 긍휼을 받는 것처럼 남을 7번 용서하고 8번 용서하는 것을 따라잡을려고 힘쓰는 선한 경쟁을 하는 것 과 같이 보이고

 

정작 긍휼의 그릇은 저런 배부른 남을 용서하는 위치에 서기는커녕

허구헌날 양사방으로 우겨삼을 당하는 진노를 받기만 하더라 말이죠.

 

(고후 4:8, 개역)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그런데 놀라운 반전은 바로

보배 자신이 770번의 용서를 베풀어서

그릇을 깨뜨려버리니까

저 그릇은 진노를 받아서 깨어졌구나 라고 했는데

오히려 보배가 그릇을 깨뜨려서

이제 보배와 그릇의 경계가 사라져 버렸다는 점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처럼
하나가 되어버려 둘로 나누는 경계가 사라져 버린 하나 가 된 겁니다.

 

이것을 오늘 시편 86편을 통해서 이렇게 어머니께 설명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는데 빠져버리니까

왜 의심하느냐 라고 책망을 듣게 되는 부분에서

 

너희는 신이라 하지 않았더냐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곧 시편을 언급했습니다.

 

(10:34,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10:35, 개역)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82:6, 개역)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왜 언급을 했는고 하니

마귀가 너희는 신이라는 말을

이 시편의 기록을 모를 리가 없다 말이죠.

그래서 너희는 신이라는 말을 반대해서 마귀가 거부하는게 아니라

다들 3초 짜리 밖에 안된다는 것을 안다는 겁니다.

 

심지어 사울왕도 선지자에 해당되느냐 라고 비아냥 거리는 내용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삼상 10:10, 개역)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삼상 10:11, 개역)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이 사울의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의 당한 일이 무엇이뇨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

(삼상 10:12, 개역) 『그곳의 어떤 사람은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비가 누구냐 한지라 그러므로 속담이 되어 가로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

 

즉 성령 받은 적이 있다 말이죠.

 

당연히 다윗도 마찬가지이다 말이죠.
성령받은자가 그래 우리야 장군을 죽이고, 우리야의 아내, 남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다는 것이

말도 안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경계가 또렷했으면 했지
절대 하나가 될 리가 없다는 거죠. 

성령을 지속 적으로 받을리가 없다는 거죠.

3초면 끝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왠걸 예수님의 족보에 아예 넣어버리는 성령이다는 겁니다.

물론 다윗이라는 그릇은 깨져버린 상태로 말이죠.

 

그런데 마귀는 그런 성령 받은 자들이 다들 3초 이상 가는 인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 걸음 만에? 베드로는 물에 빠졌다는 겁니다.

 

요즘 유행하는 언어 중에

1초 누구 누구

잠깐 누구 누구 라는 말이 있습니다.

1초 닮았다는

1초 비슷하다는

그런 의미 이다는 거죠.
어떤 연예인이랑 많이 닮으면 그렇게 표현하고
누구 흉내를 내면 그렇게 표현한다 말이죠.

 

즉 동일성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3초 누구 누구 라는 겁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예수님과 똑같이 물위를 걷기는 걸었는데

1초짜리로 예수님과 같이 물 위를 걸었다는 겁니다.

 

안 걸었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계속해서 걸었다는 것도 아니고

물위를 걷기는 걸었는데 3초 아주 짧게 우연히 걸었다는 거죠.

우연히
그것도 아주 우연히
우발적으로 짤방 처럼 짤 ~~~ 로

그러니 이것은 도리어 더 놀림깜이 되는 겁니다.

마귀가 그것을 놓칠리가 없지요.

그런 굴욕이 따로 없으니 말입니다.

그것을 미리 예수님이 베드로를 물에 빠뜨려 미리 격게 하는 겁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말씀한

너희는 신이라 하지 않았느냐 라는 말씀인 시편 82편을 모르는 자들이 아니다 말이죠.

그것이 틀린 말이다 라고 주장해서 거부하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분명히 그들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러나 다만 3초 이상 가는 놈은 없다 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것을 빌미로 예수님을 십계명의 제 3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컷는다고 참람죄로 몰아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3초가 아닌 영원한 계명, 십계명이니까 말이죠.
성령 받았다 라는 것은 어떤 누구도 그 지속성을 보장 못한다는 것을 잘 아니까 말입니다.

 

즉 마귀는 무엇을 노린 겁니까?

법(말씀)과 법(말씀)의 틈사이를 노린 겁니다.
너희는 신이라 라는 시편과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컷지 말라 라는 말씀의 틈 사이를 노린 거다 말이죠.
그래서 참람죄로 몰아세우는 겁니다.
두 말씀 중에 더 실용성이 있는 것으로 따졌다는 겁니다.

자기 유익에 어느 것이 더 나은가로 말입니다.

(시 82:6, 개역)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출 20:7, 개역)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그래서 하만처럼 에스더(예수님)을 낙시 질로 낚을려다가

그만 [죽으면 죽으리라]를 낚아 버리게 된

그 위에서 예수님이 하만을 낚는 낙시질에 낚이게 되었다 말이죠.

 

즉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잡은 마귀는

이제 어떤 누구도 부인 못한 죄인을 잡아온 겁니다.

물증이 있으니까 말이죠.

 

또렷한 증거물을 있는 이상

제사장 옷이 더러워져 버린 이상

그 어떤 누구도 이 확정된 판결인 진노를 뒤엎어 버릴 자가 없게 된 겁니다.
법에 대해선 꽉 잡고 있다 말이죠.
믿음의 세계는 물증이 필요 없는데 괜히 물증 잡다 보니 말려들게 된 겁니다.
법의 세계에서만 물증이 필요하다 보니 말이죠.

 

그런데 바로 이것이 마귀가 심판을 마땅히 받아야 하는 이유이다는 겁니다.
지가 뭔데 법 위에서 노냐 말이죠.

법 조차도 즉 예수님(법)도 법으로 하지 않고
인애와 자비로 하시는데 이것을 그만 몰랐찡

그러니 마귀는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놓고서는

법으로 하지 않는다고 배신감에 치를 떠는 겁니다.

 

(3:2, 개역)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병신

마귀는 지금 여호수아 대제사장을 잡는데 정신팔리다 보니

지금 원인 없는 결과로 이미 주님이 사단을 책망하는 가운데서

벌어진 사건인줄 모르고

여호수아를 잡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에스더 곧 죽으면 죽으리라를 잡을려고 환장해 있는 겁니다.

 

이미 사단 원수 마귀를 벌써 이기신 십자가의 용서를 확정지은줄도 모르고

뒷북치듯이

정신없이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그 증거를 잡는데 정신팔려 있다 말이죠.

전체 얼굴은 안 보고

전체 심판은 안 보고

부분 부분의 베드로 꼬투리 잡는데 정신팔려 있다 말이죠.

남을 심판할려다가 도리어 본인이 심판 받아 버리는 짖을

참 마귀 답게 하더라 말이죠.

 

이미 십자가의 용서의 확정된 사건이 이미 완성 되었는데

뒷북 치듯이

주여 주여 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잡아 왔습니다 라고

헛발질을 하고 있더라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을 배신한 베드로를 잡아온 마귀를 칭찬하는게 아니라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냐 라고 묻는다 말이죠.

 

이미 게임이 오바 되어서 끝났는데 무슨 헛짓을 했느냐 말이죠.

 

3초 짜리 밖에 안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자신 만만하게 잡아 왔는데

주님께서 그 우연의 1초를 영원히 맹글어 완성하는데 있어서

왜 영원한지에 대한 보충물 노릇으로써

마귀는 뒷북치듯이 설쳐대며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니 사단은 책망 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3초 밖에 안되는 그 경계를

보배와 그릇의 따로 따로된 경계를

오히려 마귀가 그 경계를 깨뜨리는 그릇을 깨뜨림으로써

보배와 깨어진 그릇은 졸지에 하나가 되어 버린 겁니다.

 

경계를 없애 버렸으니 말이죠.

7에 70의 용서가 그릇 가득 넘치고 넘쳐 흘러서 그만 경계가 무너져버린 겁니다.

 

그러니 그들 바리새인은 남을 7번 용서한다는 자기 사적인 영역을 여전히 고수하다 보니

저 세리와 같지 않게 해 주심을 감사하면서 십의 이조 이레에 두번 금식 토색치 않음 등이 사적영역이 된 겁니다.


770번 사유하시기를 즐기시는 주님의 용서의 세계를 간구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십자가의 용서의 세계에 풍덩 뛰어들수가 없는 겁니다.

경계선이 가로 막혀 있다 보니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정죄해 버린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오히려 예수님은 770번 용서하심으로써

졸지에 경계선이 없어져 버렸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처럼 경계선이 있는 줄 알고 고자질 하다가

도리어 그들이 말려들게 되었다 말이죠.

 

예수님이 그 마귀가 잡은 부인못할 증거물을 뒤바꿔치기를 해 버린

반칙을 벌린 겁니다.

새옷을 입혀 버릴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연의 1초를 영원한 1초로 만들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잡아온 베드로

베드로 원수 보다

반칙을 벌린 예수님이 미워서

때린 시어마이 보다 말린 시누이가 미워서

이미 진노 받아 마땅한 티를 팍팍내도록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신나게 베드로 잡는 것에만 정신팔렸던 겁니다.
수제자를 잡는 그 월척을 놓칠리가 없잖아요.

정작 베드로를 미끼로 삼아

마귀를 심판하시고자 한

십자가의 피 용서를 완성하신줄도 모르고

전체 그림인 얼굴을 안쳐다 보고

부분만 보면서 정신팔렸던 겁니다.

 

마귀는 절대 예수님의 얼굴을 못 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얼굴을 절대 자랑하지 못합니다.

싫어버린 바 된 얼굴이기 때문에 싫어만 할 뿐입니다.
그 얼굴을 사모한다는 것은 자신의 얼굴 또한 싫어버린바 될까봐 도저히 못하는 겁니다.

절대 그 얼굴에서만 나오는 용서를 못 보기 때문에

이미 벌써 심판 받은 겁니다.

 

오로지 770번의 용서만을 쳐다보는 자만이

그 긍휼을

예수님의 얼굴을 자랑하도록 되어 있다 말입니다.
이것이 긍휼과 진리의 만남 입니다.


용서하시기를 즐겨하시고

인자하심이 후하신 얼굴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 얼굴을 못 쳐다보는 자는

허구헌날

번제와 제사 라는 의문의 죽이는 것을 반복하며

그것으로만 남을 판단할 뿐입니다.
이미 사적인 영역이, 가인의 에녹성처럼, 바벨탑과 같은 육의 자랑인 기념비가 구비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남을 7번 용서했으니

8번 용서한 사람과 경쟁해서 이길려고 할 뿐이고

6번 용서를 한 사람을 정죄할 뿐이다는 겁니다.

탑을 점점 더 높이 쌓아야 하는 겁니다. 9번 용서의 탑, 10번 용서의 탑, 

밑도 끝도 없는 의문의 죽이는 바벨탑을, 강도의 탑을 이유없이 쌓아야 하는 겁니다.

이런 악마의 세계에서

 

주의 인자하심은

770번 이라는 또렷한 완료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남을 7번 용서하는 그 흐릿하고 모호한 의문의 죽이는 것을 반복함에

마침이 되는 겁니다.

 

이제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를 즐겨하시는 주님은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는 그 부르짖음에

후하게 후해도 너무 후하게

자기 목숨을 내어주실 정도로 너무 후해서

흘러 흘러 넘쳐서

그 경계선이 허물어 질정도로 흘러 넘쳐서

모든 허물을 다 덮어버릴 정도로 인자하심 긍휼히 여기심을 베푸시는 겁니다.

 

이것이 못마땅한 마귀는 전체 얼굴을 보는 것 보다

얼라(미련한 애들)처럼 부분만을 따지면서

계속해서 이 주의 용서에 대한 불법에 의문을 제기하는데 마침이 없이

밑도 끝도 없이 불평하면서 지옥에서도 이를 가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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