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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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4 16:44:56,

출4:24-25 에서 왜 주님은 모세를 죽이려 하엿으며 왜 피남편이라 햇나요

25절의 십보라의 행동도 궁금합니다

답변:

(출 4:19, 개정)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출 4:20, 개정)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출 4:21, 개정)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그가 백성을 보내 주지 아니하리니』
(출 4:22, 개정)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출 4:23, 개정)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출 4:24, 개정)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출 4:25, 개정)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출 4:26, 개정)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출 4:27, 개정)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 하시매 그가 가서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나 그에게 입맞추니』
(출 4:28, 개정)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분부하여 보내신 모든 말씀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이적을 아론에게 알리니라』
(출 4:29, 개정) 『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출 4:30, 개정)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그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출 4:31, 개정)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성경에서의 어떤 인물의 행동들은 모조리 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드러내는데 동원됩니다. 때로는 십자가의 긍휼을 때로는 십자가의 진노를 보여주는데 증거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 또한 따라할수 있느냐 라는 발상은 일체 금물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됨은 곧 계시로써 묵시가 덮쳐서 나타난 결과이지
우리가 따라해버리면 계시를 흉내냄으로써 그 자체로써 계시를 모독하는 셈입니다.

왜냐? 인간의 행동은 항상 타인을 의식해서 나오기 때문에
타인을 자기의 손아귀에 넣을려는 정치성과 때로는 나도 행할수 있다 라는 무시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계선을 긋기 위한 법적인 체제 바벨탑의 사고방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의 성전(캐슬)을 허물수 없다 라는 취지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자 그런 점에서 인간 자체의 행동에 관심 둘 필요가 없습니다.
모세나 십보라나 둘 다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잠깐의 일회용 컵의 소모품으로써

자기 신체 곧 자기 몸에 담고서 증거 되는데 그것이 인간 행동의 밖에서만 나올수 있는

몸이 수용할 수 없는 행동이다는 점에서 불가능의 영역을 소개하는 입장이 모세와 십보라의 입장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담은 모세의 몸 십보라의 몸인데
그 몸의 묵시에 등떠밀려서 외치는 소리가

당신은 피 남편이라는 겁니다.

왜 피냐?

아무리 모세라고 해도 예수님은 피의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 모세는 당장 죽이겠다는 겁니다.

그것을 아무도 못보도록 하고 오로지 십보라의 눈에만 보이도록 하는 겁니다.

그 아내의 노래가 피 남편이라는 노래로써 여호와 자신이 이스라엘이라는 교회 곧 신부의 노래가 피 남편 피 신랑 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맛배기로써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겁니다.

자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의 계열을 두 계열로 나누겠다는 의미가 드러납니다.

그 이유는 마치 야곱의 유언에 의해서 나타난바를 설명했듯이

이제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한 쪽은 긍휼을 한 쪽은 진노를 보여주는 자들로써 야곱이 유언을 했듯이

이스라엘은 두 계열로써 노래를 부르는 자들이 나타나겠지요.

한 쪽은 피 남편이라고 노래 부르는 (율법 밖의) 피 라는 희생의 남편이
미래의 운명을 확정 짖고서 다가오는 계열이 있고

(마치 두 계열의 제사장처럼 한 쪽은 인간(혈통) 제사장 계열과 또 한 쪽은 멜기세덱(족보혈통단절) 제사장 계열이 대립 되듯, 한 쪽은 법적 절차 대로, 또 한 쪽은 법적 절차를 반드시 어기고 무시하고 무법적으로 등장)

또 한 쪽은 인간 쪽에서 율법과 여호와의 전쟁을 자기의 힘으로 지켜서 나아가는 그런 계열이 있다는 겁니다.

이런 모습은 마치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서 마태가 의도적으로 유대인을 향한 유대의 족보를 무효화 시키고, 반대로 유대인들이 반드시 무효화 시킬(십자가에 못박게 될) 믿음의 족보를 의도적으로 대립시킴으로써 십자가의 지혜(비천한 여자 5명을 들어서 강한 머슴아 세계 자칭 약속을 추구한다고 지혜롭다고 하는 자를 부끄럽게)를 구체화 시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전쟁 곧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은 이 피의 의미를 모르는 자는 다 죽이겠다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 전체 역사가 이 피의 의미를 모릅니다.

오로지 예수님 홀로 이 피의 의미만으로써 전쟁을 완성하고
인간은 이 피 마저도 혈통(육)적인 사고방식인 힘 개념으로써
자기 쪽으로 끌어 당김으로써 자기 챙기기를 위한 피 이용해 먹기로 일관합니다.

바로 이 모습을 우리들을 대변해서 이스라엘이 보여줘야만 하는 겁니다.

인간이란 예수님의 희생 마저도 자기 유익으로 이용해 먹는다 라는 것을
이스라엘이 대신해서 보여줘여만 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인간은 이런 정보가 공개 되면 이제 그런 모습을 감춤으로써
자기는 절대 예수님을 이용하지 않겠다 라는 취지로 또 나옵니다.

아니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유발케 하신 겁니다.

그래서 더더욱 성화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런 상대적인 법적인 자체적인 카바를
예수님의 단독적인 긍휼과 대비 시킴으로써 개같은 이방여자와 자칭 하나님의 백성도 대비시켜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죄성의 심각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런 죄악의 심각성이 더하면 더할수록
약속은 어떤 방해에도 불하지 않고 넉넉하게 이긴다 라는 것을
어두움이 캄캄하면 할수록 빛은 더더욱 빛나는 약속의 듬직한 미쁘심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야 모세 마저도 죽일려고 하시네 그럼 나는? 이런 생각을 당연히 들 수밖에 없지만
십보라에게 보여준 피 라는 의미를 통해서
내 쪽에서 출발한 믿음이 아닌
예수님 쪽에서 출발한 희생이 예비 되어 있기에
이 예수님 쪽에서 흘린 피가 아니면 어떤 누구도 넘어갈 수 없음을 도리어
안심이 푹 놓게 되는 든든함을 느끼게 될 겁니다.

물론 십보라는 시껍했겠지만 그런 십보라를 움직이신 계시가 밀어붙인 그 의미가
도리어 우리 쪽에서의 출발이 얼마나 미흡하고 더러울 뿐만 아니라
심지어 기념비가 되어서 죽을 때 까지 자랑 밖에 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님 쪽에서 막았다는 것에서 너무 너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자기 잘난 맛에 조금 자랑했을지 모르지만 (성화가 처음에는 자기만족이 되겠지만)
점점 더 깊고 넓고 높은 거룩의 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성화된채 까불면 (왜? 남을 의식해서 지난 번 보다 더 성숙해야 하니까?)
도리어 자기 뿐만 아니라 남까지 삼킬려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 쪽에서 출발한 피가 무색해 지니까
막아버리시는 겁니다.

이 피 남편이라는 의미는 곧 할례에 관한 의미인데
할례라는 의미를 율법적인 차원과 십자가적인 차원 곧 마음판의 할례 개념으로써
마음판의 할례(십자가)를 말하기 위해서 가짜 할례를 반드시 보여줘야 하는 겁니다.

육의 단절, 육의 차단, 혈통의 단절, 그래서 이스마엘은 때려 죽어도 아니다 라는 것을
육의 단절에서 낳은 자식 이삭을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스마엘을 동원해서 차이를 말하듯

할례를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종류의 할례를 말해서 그 차이를 드러내어야 하는 겁니다.

결국 마음 판의 할례는 인간 쪽에서는 불가능 하고
인간 쪽에서의 할례 곧 포경수술은 인간 자체적으로 할 수 있다 라는 구별적인 행동에 자아도취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넌 할례 안한 더러운 인간, 난 할례 한 깨끗한 거룩한 약속의 사람

그런데 약속의 사람이라고 자칭 아무리 온 몸을 칭칭 감아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정신이 없다는 그 자체로써 여전히 더러운 인간임을

유다와 다말의 차이로써 드러냈듯이 이 두 모습을 역사 끝까지 밀어 붙입니다. (죄의 소원이 덮치듯이, 율법이 가입된 이유도 그러합니다.)

한 쪽은 계속 역사(율법)에 의해 밀리도록 되어 있고

한 쪽은 비록 율법이 밀어붙임으로써 거기서 빠져 나올수 없는 입장이나
율법 외의 (이방 여자 다말처럼) 한 의로운 피가 개입 됨으로써
묵시가 미래에서 빼냄으로써 미래의 확정된 긍휼이 덮치게 함으로써
긍휼만이 옳았다 라는 것을 확정된 채로 미래에서 거꾸로 현실을 삼키는 식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답변이 좀 길었죠?

피 란 곧 할례란 또는 세례란

죽음 속에서 만나자 라는 겁니다.

그러니 십보라는 이 죽음 속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는 할례만이 육을 이기는 할례만이 참 남편 곧 피로써만 밀어붙이는 진짜 남편이라는 겁니다. 우상이 아닌 참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십보라는 약속의 하나님이 누구인가? 이 하나님이 아니면 다른 하나님은 다 우상이고 가짜라는 겁니다. 십보라가 경험만 하나님만이 진짜 라는 겁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속에 있어도 이 경험(십자가)에서 만난 하나님이 아니면 다 가짜라는 것을 피 남편이라는 표현에서 우리에게 증거하는 겁니다.

피 흘리는 하나님 곧 예수님만이 참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우리 또한 그 피 흘림이라는 십자가 속에서의 만남 만이
참 신랑과 참 신부의 만남인 거죠. (할례 세례 등등 모든 성경의 개념이 이런 의미입니다.)

피만 보고 넘어가는 (약속만 보고 넘어가는) 언약을 보여주는 겁니다.

십보라의 고백은 뭐뭐는 아니요 뭐뭐 입니다를 고백하는 거죠

피 흘리지 않는 남편은 가짜요 피 흘리는 남편이 옳았습니다 라는 고백 말이죠.

우리의 고백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만 들이대시는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고 십자가를 빼버리는 하나님은 가짜라는 것을 말이죠. 이것이 비언약을 동원하여 증거하는 확정된 사랑의 언약의 속성입니다.


추신 :

교회도 두 종류의 교회가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인간을 목회자로 삼고 바른교회 꿈꾸는 교회 (늘 개혁을 꿈꾸는) 완료를 향하는 교회

이미 확정된 더 이상 하나 될 필요도 없고 바른교회 될 필요 조차도 없는
이미 하나 되었고 이미 거룩한 교회가 완료로써 덮쳐진 예수님이 목회하는
미흡함이 없는 하늘의 교회 입니다.

하늘의 교회를 믿는 자는 이 땅의 교회가 왜 아닌지를 확인하는 그 차이를 발견함으로써 기뻐하고 (피 외에는 없음만 보고)

가짜 교회는 그야말로 지성이면 감천으로써 인간의 모든 정성을 다 모으는 겁니다.

우리가 살펴본 두 언약을 두 여자로써 증거한 갈라디아서의 내용과 같은 의미로써

이미 확정된 교회가 아무리해도 안 믿겨지는 자는
눈에 보이는 교회의 미흡한 위기의 모습에 늘 목사들의 호통개그에 휘둘릴 뿐입니다.
 
그래서 피 남편만을 외치는 십보라의 고백은 오늘날 가짜 교회의 귀에는 또 한가지의 따라하기 흉내내기의 숙제 추가 밖에 안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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