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세우기에 집착하는 인간

2008-10-06 21:34:06,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나안땅에 들어왔다

이제는 눈물과 수고가 남았다 우리가 일본에서 해방되었을때 기쁨도 잠시였고 나라를 다시 재정비하고 건설하지 않았기에 분쟁과 다툼이 일어났고 틈을 타 6.25가 일어 났듯이 우리가 자신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포로가 될것이고 의의열매를 이루지 못할것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아마도 성화구원론자들이 벗어나지못하는 덫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답변 :

가나안 땅이란 약속의 땅이지만 실지로는 원수들의 땅입니다.
즉 약속(곧 사랑)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지 못하면 가짜 약속입니다.

단순히 이슬람교나 종교에서 말하는 인간좋으라고 만들어진 천국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에덴 동산 자체도 예수님만을 위한 땅입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안 땅의 의미는 예수님에 의해서 비로소 밝혀 집니다.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완성한 약속의 승리

그것이 바로 약속의 땅입니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의 승리를 보여주지 못하면 가나안 땅 그 자체로 남아버리는 인간좋아라고 세워지는 우상의 땅인 셈이지요

그래서 다윗언약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우상 나라가 됩니다. 가나안 땅이 인간을 위한 나라가 되어버리고 자기들의 신됨과 신을 이용한 구원선택을 위한 나라로 전락하는 거죠

바로 이런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들은 가나안 땅에 집착을 합니다.
사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싫어했음이 분명했습니다.

저들은 거인이고 우리들은 메뚜기 이다고 했습니다.

보이는 현상 그대로 분명히 거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들어가는 자는 거인들이 도리어 우리들의 밥이다 라고 죽음과 결부 시킵니다.

즉 믿음 곧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지 않으면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아무튼 인간들은 실패 했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약속이 멈출 수 없습니다.
긍휼로 집어 넣었습니다.

넣고 난 뒤에 또 노아가 아들들을 두 갈래로 나누어 버리듯이

가나안 땅에 집어 넣고 또 이스라엘을 두 패로 나누어 버립니다.

한 쪽은 다윗의 하나님
또 한 쪽은 다윗의 하나님을 거슬리는 패

마치 노아의 벗음이 선악의 판단을 유발케 하듯이

다윗의 왕 됨이
(다윗 본인도 사울적인 사고방식으로 왕을 추구했습니다. 즉 힘이죠. 선악. 율법적이었죠.
그러나 밧세바의 사건으로 우리야 장군을 노골적으로 죽이는 그 모습이 율법과 왕직을 지키고 챙기고 유지 보존 사수할려는 목적 아래에서 더 적나라 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사울은 불쌍히 여기지 않았으나 다윗은 불쌍히 여김을 당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율법 외에 한 다른 의가 미래에서 덮쳐짐으로써 율법에서 벗어난 사랑의 세계 용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롬 4장). 이것을 알게 됨으로부터 진짜 이스라엘의 왕의 모습은 바로 백성들로부터 버림받는 모습임을 다윗은 그 사랑의 희생을 깨달았다는 이유로 즉 미래의 확정된 십자가의 영광이 덮쳤다는 이유로 힘없는 왕으로써 쫏겨다니는 왕이 됩니다. 본격적으로 말이죠. 즉 모든 인간들이 십자가에 대한 적개심이 있다라는 것을 다윗은 쫏겨다님을 당함으로써 알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죄가 무엇인지 본격적인 그 실상들이 드러납니다. 빛이 나타나기 까지는 어두움은 어두움의 내막을 알수 없듯이 말이죠. 이런 약함의 왕의 모습이(법이 아니기에 싫어버린바 된 왕) 실상은 이스라엘 내부의 모든 죄성을 까발리고 유발케 합니다.(마치 노아의 벗은 그 자유함이 법적인 인간들에게는 선악의 법을 끄집어 내는 올무가 되듯이) 또한 약한 왕 앞에서는 비로소 모든 백성은 삼킬려고 달려드는 자기들만의 왕 곧 자아의 신 됨(선악과)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마치 베드로가 십자가 지실려고 간다는 예수님을 막는 이유가 자기가 바랬던 메시야의 모습이 아니기에 자기를 위한 왕이 아님으로써 사탄으로부터 심겨진 메시야 이미지가 고발당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일이며 반드시 하나님의 일은 이런 사람의 일을 까발리면서 완성이 됩니다) 바로 이런 모습을 기정 사실화 하여 다윗 이후에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의 두 패의 양상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알게 된 하나님은 참 선지자가 약함의 모습을 취함으로써 이스라엘 전체를 고발하게 되고 거짓선지자는 백성과 결탁한 정치권력으로써 강한 이스라엘 강국을 꿈꿉니다. (마치 현대 교회가 바른 교회를 꿈꾸고 제대로 된 교회를 세워보겠다는 야심을 마치 선한 모습인냥 대중들에게 각인되듯이, 바로 이것이야 말로 사단아 물러가라 라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로만 가득 채우는 교회를 통한 인간 종교성의 야망을 보여주는 겁니다.). 거기에 걸림돌이 되는 참선지자를 강국이 되어야 한다 라는 조건 갖추기와 또는 구원받는 선택민족의 조건 갖춤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참선지자를 배격하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힘이 아닌 긍휼을 보여줘야할 왕임을 즉 미래에 오실 예수님의 섬기는 왕이 참 왕임을 보여줘야할 입장에 놓이게 됨으로써 본격적인 고난 받는 왕의 자리에 놓이게 됩니다. 머리 둘 곳 없는 왕. 대접 받지 못하는 왕. 싫어버린 바 된 왕 곧 하나님의 단절성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확정지어 버렸듯이 그 맛배기를 다윗이 격게 되는 겁니다.

섬기는 왕이 누구인가를 다윗이 보게 됨으로부터 남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는 고난의 왕의 모습을 미리 앞당겨서 선취 하게 됩니다.

바로 다말과 같이 화냥년 취급받아 불태움을 당하게 될 판국에 다윗은 놓이게 되고
유다는 이 다말을 불태울려고 반드시 하나님의 법으로써 죽이겠다는 모든 구색을 갖추듯이 이스라엘 전체가 다윗을 공격합니다. 이것이 확대 되어서 다윗 이후에 두 계열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의 양상으로 확대 됩니다..

다윗은 자신이 그렇게 (우리야 장군을 비열하게 죽였듯이) 했듯이 이제는 본인이 다말이 되어서 전체 이스라엘 국가 민족으로부터 공격받는 다말의 입장이 되는 겁니다.

자 여기까지 살펴보면
결국 가나안 땅이란 인간의 모든 감추인 죄성을 까발리는 약속의 공격 대상이 되는 거죠.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
사실 다윗은 하나의 미끼일 뿐이고 이스라엘은 이 다윗을 덮썩 물게 됨으로써 모든 인간의 내막을 대신 하나하나 낱낱이 악마성을 보여줍니다. 그 악마성을 어떻게 약속은 이기느냐?
약속 홀로 그 전쟁을 펼치는 겁니다. 다윗이라는 개인은 하나의 약속이 담겨진 주머니 또는 그릇 또는 낚시 미끼 또는 씨받이 또는 에얼리언의 시고니 위버? 등등이 되는 거죠.
말씀을 펼치기 위해서 말씀의 씨앗을 퍼트리기 위한 하나의 껍데기 노릇을 하는 겁니다.

인간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곧 인간은 무엇에 갇혀 있는가를
이스라엘이 대변해서 보여주고 또 다윗 또한 보여주는 겁니다. 양 쪽다 다 홀라당 벗겨버리는 겁니다. 둘 다 양발차기로써 다 벗겨서 하나는 긍휼로 입혀주고 하는 진노로 입히는 겁니다.

즉 다윗은 출애굽기로 따지만 히브리인이고 이스라엘은 애굽의 바로왕이 되는 거죠
다윗에게 덮쳐진 긍휼의 피 만을 목적으로 그 피를 보여주기 위해 이스라엘을 강퍅케 하는 겁니다.

바로 그 이스라엘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마당터가 가나안 땅입니다.
이 가나안 땅에서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적나라한 모습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운 모든 거룩한 내막 하나하나가 더럽기 짝이 없는 모습임을
성경 전체가 까발리는 거죠.

자 그렇다면 오늘날은 그 가나안 땅이 어디 일까요?

교회죠.

1 교회란 인간의 죄성을 늘 지적당하는 곳입니다.(만인이 기도하는 집 = 죽어도 마땅한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아는 자 = 눅 18장 성전의 두 사람의 기도, 그래서 긍휼만을 바라는 자)

그러나 구약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2 인간들은 교회를 통해서 하늘을 탐하고자 하는 바벨탑이라는 하늘의 통과 문으로 여겨
직접 자기의 몸으로 실행한 의롭다 라는 것들을 모아서 통과 할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악마성입니다. 왜냐하면 그 의로움이 외부에서 오는 의로움을 싫어하고 악취로 여기기 때문이고 외부에서의 의로움은 인간의 내부에서 갖춘 의로움이 더럽기 때문에 거부합니다. 미흡하고 미완료다 라는 이유로 말이죠.

이 두 모습을 교회는 다 같이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한 쪽은 다윗이 알게 된 긍휼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자기부인을 당하게 되고
(기뻐하심을 입음을 당하고, 비천한 여자로 여김 당하여서 하늘의 전쟁을 보게되는 기쁨을 보고 = 즉 잃어버림 당함에 동참케 당하고)

또 한 쪽은 긍휼이 아닌 제대로 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 법과 지식으로 더더욱 똘똘똘 뭉치게 하는 ( 선택받을 조건들을 두루 두루 완벽하게 갖추는) 강퍅케 되는 겁니다.

그 강퍅성이 바로 교회를 교회 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의 노력들을 선하고 정의롭게 제대로 바르게 갖출려는 입장들입니다. 자기들이 하지 않으면 불안한 겁니다.

선물이란 내 쪽에서 어떤 선물 받을 조건을 갖춘적이 없이 무조건으로 주어진 겁니다.

그 만큼 선물이 아니면 가망이 없다 라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죄인에게만 해당 됩니다. 의인에게는 그야말로 쓸데 없습니다.
건강한 자에게 약을 주지 않는 이유는 쓸데 없거든요 어차피 버립니다.
죄인이라야 원수이라야 긍휼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약속)은 가나안 땅을 쳐들어가서 모든 인간의 원수성을 까발려서 죄인 만들 듯이

그 죄인들만이 (여호와 전쟁의 전리품) 사는 나라가 바로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마 11:12, 현대어) 『침례 요한이 설교하고 침례를 주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공격 받아왔고 공격하는 자들이 힘으로 지배하려고 하였다.』

(마 11:12, 현대인)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침략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침략하는 사람이 그 나라를 빼앗는다.』

(마 11:12, 한글킹) 『침례인 요한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폭력으로 탈취되고, 폭력을 쓰는 자들이 힘으로 그것을 차지하느니라.』

(마 11:12, 킹흠정) 『침례자 요한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하늘의 왕국은 폭력을 당하며 폭력배들이 강제로 그것을 빼앗나니』

(마 11:12, 쉬운) 『침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힘있게 성장하고 있다. 힘있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마 11:12, 가톨릭) 『침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마 11:12, 공동) 『"㉠침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 ㉠어떤 사본에는 12절, 13절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12]침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줄기차게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애써 힘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차지한다. [13]그 나라에 대하여는 요한까지의 모든 예언자와 율법이 이미 예언했던 것이다."』

(마 11:12, 우리말) 『침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침략당하고 있으니 침략하는 사람들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마 11:12, 새번역) 『㉩세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 / ㉩또는 '침례자' ㉪또는 '폭행을 당한다' ㉫또는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약탈한다'』

번역상 뜻이 반대로 했든 제대로 순차적으로 했든 상관없이

이 의미 자체가 하여튼 천국(불)을 빼앗아 소유하든 또는 역으로 공격하든
이래나 저래나 니 발만 아플 것이다. 천국을 대상으로 했다는 자체가
이미 천국은 완료된 승리이고
인간은 이 천국을 끌어 붙잡고 야곱처럼 밤새도록 씨름해 본들 야곱은 이래나 저래나 죽어야할 입장에 놓일 뿐이다는 겁니다. 결국 천국의 공격에 아무도 당해낼자 없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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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0-06 21:36:27,

뭐 이것도 제가 걱정할 필욘 없죠 주님이 알아서 할것이니 하하 근데  이런 원리를 적용하여 말할땐 참 이치적으로 맞는것 같거든요

답변:

당연히 맞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란 항상 법적인 구색을 갖추기 때문에 법에 제대로 걸려들지 않으면 고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약점을 잘 찾습니다. 약점 찾는데 귀신들입니다. 그 약점을 감추일게 아니라 빨리 퍼뜩 보여질 수 밖에 없도록 주님은 일 하십니다.
(그래서 밭 주인의 상속자를 죽이는 그 진짜 속셈이 드러나거든요)

그리고 미흡함 없이 반드시 이치적으로 맞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거리낌이 되고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인간으로써 나올수 있는 모든 거룩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았으니까요. 하나님의 법으로만 죽였지 하나님의 법이 아닌 것으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야 말로 십자가의 원수인 이유가 법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법에 걸려든 인간만이 마귀에게 고소 당하는 겁니다. 죄인이 되는 겁니다.(스가랴 서 여호수아 제사장)
그래서 그들은 항상 성경의 문자에 예민하게 법적으로 적용하는데 도사가 될 수 밖에 없도록 주님이 일부러 키우십니다. 그래야 그런 법관처럼 된 자들에 의해 고소 당해야 하니까요. (솔로몬의 재판의 지혜도 법을 쥔자와 사랑을 쥔 자를 왕은 가려야 합니다. 사람이 법을 쥐는 이유는 가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어쩔수 없이 살인을 했지만 그 살인을 한 것을 가려야 할 입장은 역으로 법을 가장 많이 쥐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법을 강하게 쥐면 쥘수록 그 법에 의해서 희생자가 생긴다는 겁니다. 이 구조를 주님은 의도적으로 세상 전체에 깔아 놓았습니다. 결국 인간들은 법에 손 때라 라는 겁니다. 왕이 알아서 하겠다는 겁니다. 원수를 갚는 것도 하나님에게 맡기라 라고 하는 이유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기여이 자기 손으로 법을 수행하겠다는 자체가 바로 뭔가를 감출려는 속셈이다 라는 것입니다.)

개 같은 이방 여자도 법적인 유대인과 또 예수님에 의해서 양 쪽에서 다 고소당하는 중간에 낑끼인 미끼가 되는 겁니다.

그랬을때에 유대인들이 거봐 거봐 넌 더러운 개 맞잖아 라는 것이 확정이 됩니다.

그래서 공의와 법의 무서움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선악의 법으로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법이 필요 없었던 사랑으로 만든 창조였음을 지금 그 법과의 차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여인은 의도적으로 중간에 낑길 수밖에 없는 겁니다.

현장에서 잡힌 간음한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간에 미끼가 되어야 빛과 어두움의 경계선이 그 차이로써 두드러지는 극대화가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확정 된 것을 알지요.

옛언약의 도사인 유대인에게 정죄 받고
또한 새언약의 예수님에게서도 그 여인은 고개 들 수 없는 입장입니다.
맞습니다. 법적으로 죄인 맞습니다.

법적으로 죄인이 맞아야 그 법 밖의 사랑이라는 것이
사랑이 부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은 법을 동원해서 증거 됩니다.
법 아래서 철저하게 갇힌 정죄함 뿐입니다.

그 정죄함 뿐인 자가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라는 것은

법이 아닌 목숨을 버린 사랑으로써 법의 형벌을 대신 받았다는 뜻입니다.

어느정도로 대신 받았는고 하니

영원히 정죄함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을

영원히 정죄함이 없도록 모든 형벌을 대신 받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내막을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단번에 사함받을 그 내막들을

십자가가 깔아 놓은 자아파괴 라는 지뢰를 깔아 놓음으로써
하루 하루 그 지뢰를 밟아서 자아 폭발이라는 기쁨을 누리는 삶을 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매일 매일 죽노라 라는 것은 바울의 행함이 아니라
바울을 지워버릴려고 매일 매일 십자가 지뢰를 깔아서 밟도록 해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확정지음 당했다 라는 것을 누리도록 바울을 철저하게 이용하신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실겁니다 라고 믿음이 있는냥 우리는 고백하지만
안그렇습니다.

주님은 그 말이 베드로처럼 성령으로 인한 것인지 아닌지를 늘 십자가 지뢰를 깔아서 터트리셔 확정 하는 겁니다.

반드시 너의 고백에 착각 도취되도록 만들지 않고(무조건 인간 쪽에서 나온거면 무조건 배격하고 그 배격하는 사건을 매일 매일 터트리심= 이것이 관계성)

반드시 천국의 공격으로써 나온 항복으로써 나를 매일 매일 점령해서
자아가 초토화 된 입장에서 전리품 됨 그 자체로만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싫기 때문에 그 대신 비스무리 한 자기의 고생과 힘듬과 노력과 정성과 대신 채워서 교회에서 십의 일조 꼬박하고 두 번 금식하고 즉 아무리 거룩으로 채워도

(눅 18:11, 개정)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2, 개정)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완벽한 거룩이 아닌 단 하나가 빠진 미흡한 99%의 거룩도 더럽다는 겁니다.

차라리 더러우니 100%의 거룩 뿐인 주님의 긍휼을 바라는 것이
주님이 의도적으로 불의한 자를 앞장세워서 미흡한 거룩 99%를 주장하는 미완료의 교만들을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자기의 피로만 긍휼을 베풀고자 하시는 100%의 완벽한 예수님의 거룩한 피가
온세상을 덮고도 남는 온세상의 허물을 덮고도 남는
남을 사랑하는 진짜 사랑이다는 겁니다.

인간은 99%의 거룩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만큼 더러운 짓(선악으로 판단)만 골라했다 라는 것을
눅 18장 전체에서 보여주듯이 말이죠.

자 그럼 왜 그런 교회에 님을 주님이 쑥 집어 넣었을까요?

차이를 알라는 겁니다. 법적인 것과 긍휼 과의 차이를

정작 법에 의한 자들에 의해서 불의함 취급 받아야
(저들은 점점 완벽하고 님은 그들에 비해서 그야말로 하잘 것 없이 무시 받아 마땅하니까?)

저들과 차원이 다른 주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고마움이 더 큰 겁니다.

많이 탕감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 겁니다.

저들은 행동의 변명은 딱 하나입니다.
많이 탕감받지 않도록 하자입니다.
마치 이것이 아주 예수님을 위한듯한 말이지만
제가 위에서 언급했지요?

뭔가를 감추인 말이라고

예수님은 자기 손으로 죽여 놓고도 죄인(법에 의해 무시받는 개같은 이방여자)이 되기 싫어서 나오는 법적인 구색 갖추어서 자기를 보호하고자 스스로가 자기를 챙길려고자 하는 술수입니다. 이것이 다름아닌 선악적인 악마성입니다.

(예수님이 목숨 버리면서 까지 만들어낸 죄인 됨을 선악의 사고방식에서는 용납 못하는 거죠. 죄인 됨이 중요한게 아니라 죄인이어야 원수이어야 사랑의 피가 의미가 있으니까 피 때문에 그렇게 십자가의 지혜로 몰아 붙이시는 겁니다.)

교회에 집착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유행은 성화론이지만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나중에 성화론도 다른 사상으로 얼마든지 바꿀수 있는 겁니다.
어차피 인간 쪽에서의 출발은 최종적은 목적이 인간 자아에게 귀결 되니까
없는 자아 라는 허상에, 우상에 충성한 거죠. 그 자아의 확대된 조직이
신이 된 거룩한 자아 확대가 교회 집착 바벨탑 이름 내기 그리고 원조인 가인이 이마 표 받고 가장 먼저 한 자아보호막인 국가형성의 원조인 캐슬(성 짖기) 쌓기입니다.

죽기를 무서워서 보호막이라는 방패막이 필요한 겁니다.

예수님이 세운 교회는 방패막이 필요 없는 죽기 뻔한 곳만 골라 다니는 교회입니다.
이것이 바로 광야교회처럼 죽을 곳만 골라서 가는 겁니다.
그래야 음부의 권세(사망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예수님이 말씀한 교회와 일치 하죠.
(반대의 길 = 예를들면 엘리야는 반대로 제단에 불이 붙도록 기름 뿌렸나요? 아닙니다. 물 뿌렸습니다.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 저들의 생각에 무조건 반대로 한 겁니다. 이것이 자유 (영의 일)입니다. 도리어 인간의 계산은 이 반대의 길이 계산상 나올수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모든 육을 파 하는, 뚫어버리는 희년을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적었습니다. 더 적고픈데 ㅋ ㅋ ㅋ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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