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 되자 라는 말은 장난치자 라는 말임(종교놀이,개혁놀이)


성화 놀이

어떤 개혁주의 쪽 목사가 생명을 외쳐야 한다는 주장에 생명이 아닌 죽음을 앞세우는 것이 복음이다 라는 반박으로 인해 투덜거리고 씩씩 거리면서 비아냥 거리는 질문을 던진다.

성화 되자 할 필요도 없이 성화 자체가 덮쳤고
개혁 하자 할 필요 없이 완성이 덮쳤는데

늘 미완료 상태(추상적)이니 완료로 향하자 라는 말은
이미 완료로써 덮친 피의 약속 성취를 무시하는 것이다.

막연한 추상성 곧 미완료를 계속 이어나아가야 종교놀이를 할 수 있다.
완료가 완성된채로 오면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 미완료의 추상적인 의미로 남겨 두어야
가장 확실하고 믿을만한 것은 자기의 행함이기 때문에
그 자아의 행함을 첨가시키는 뿌듯한 보람을 자기기념화 할 수 있다.
이런 재미 없으면 안믿어주겠단다고 땡깡부린다.
 
예수님의 행하심 만으로는 족하지 못하겠고 반드시 첨가시키는 것이
가장 믿음직 스러운 자기의 행함, 이것만이 유일한 믿을구석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언약적 사고방식이다.

바로 이런 비언약을 동원해서 언약과의 차이성을 드러내는 것이
약속이다. 뱀의 후손이 없으면 여자의 후손의 활동을 알길이 없다.

어두움이 더더욱 깊은 캄캄한 밤일 수록
빛은 대낯처럼 환하게 그 차이를 드러낸다.

이 빛이 덮치는 심판 앞에 나 죽어 마땅한 심판 곧 죽음을 보는 것(자기부인)이 아니라,
자아를 질질 끌고가는 권태로움에 빠져서 성화놀이, 개혁놀이, 종교놀이에 중독되어 있다.


질문 1

2008-10-03 22:07:09 조회 : 321 
        
덜 떨어지고 요상한 질문1.  이름 : 채한욱
 
예수님에게도 성화의 개념이 있는가? 공개 질문에 누구든지 답변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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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득영  08-10-04 11:06 
 
이 세상에서 말하는 성화는 기존의 있음에서 있음로 나가는 것이기에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분은 무에서 유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어둠의 세계에 빛을 몰고 오신, 즉 성화론을 주장하는 인간들이 전혀 감당할 수 없는 분입니다. 물론 그 성화론은 인간배후에 있는 마귀의 작품이고 말입니다. 물론 그 성화의 반대말은 '거룩함'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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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구만  08-10-04 22:39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48)
이와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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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08-10-04 23:27
 
성화야 말로 인간이 자기 멋대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신처럼 되겠다는 죄성을 거룩 뒤에 감추인 속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 멋대로 하시겠다는 것에 인간의 성화탐욕에 거리낌이 되는 겁니다. 인간 자기들은 멋대로 해도 예수님은 멋대로 하면 안된다고 우기는 죄성을 까발리는 것입니다.

성화하겠다는 인간 치고 성화라는 이유로 자기는 살아야 한다는 정당성을 그들은 포기한 적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꺼꾸로 반대의 길로 가셨습니다. 바로 그런 거룩으로 포장하여 살겠다는 본성을 감추인 무화과나뭇잎의 위선을 벗겨 주실려고 예수님은 죽으러 오신 겁니다.

성화론자 치고 죽고자 하는 자 못 봤거든요. 혹시 보셨다면 누가 있는지 좀 알려주세요.
한국교회 어디에도 눈 씻고 봐도 없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 아닌지 모릅니다. 예수님 뿐이다는 것에 감사합시다.
이런 예정 곧 예수님의 죽으심(십자가)만을 예정한 것에 성화론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그야말로 구 목사님 말처럼 악마들 집단인 거죠. 이런 우리들에게 늘 걸림돌을 제시해 주시는 십자가의 영을 예비해 주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예수님의 성화요? 니가 우 하면 나는 좌 하겠다는 넉넉한 자유함입니다. 그래서 거꾸로 쳐박혀 꼬로박을려고 오신 겁니다.
철저한 단절(십자가) 이야말로 예수님의 성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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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범식 08-10-09 16:59 
 
성화라면 예수님의 일에 인간이 조금이라도 의를 보태겠다는 거와 다름 없습니다.

왜냐면 성화라는 개념에는 언제나 등장해야 하는 것이 하늘나라의 상급을 받는다...라는 개념이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언제나 예수님에게 당당하게 나아가고 싶어 합니다...그 성화라는 이름으로...하지만 실제 성도라면 주님이 주신 면류관도 모두 어린양의 공로로 돌립니다...이 얘기는 어떠한 육신이나 인격적인 수양이 하늘나라의 삶의 척도가 될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복음에 성화가 있다면 결국 다른 종교와 다를바 없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교회라는 곳에서 성화를 주장하는 이유는 그렇게 아니하면 많은 교인들이 떠나고 수입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과 성화라는 교묘한 섞어찌개를 만들어서 교인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채한욱님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성도라면 한평생 살면서 주님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알아가는 삶을 사는 것이 복음이지, 복음을 빙자해서 자기의 삶과 인격을 수양해서 하늘의 복(?)을 받으려는 종교인이 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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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2

2008-10-08 00:06:53 조회 : 227          
칠삭둥이 두번째 질문  이름 : 채한욱
 
덜 떨어진 질문(1)의 조회수 만큼 답변 없음에 대한 실망과 있음에 대한 감사와 함께 질문은 앎에대한 비례와 함께 반비레 하므로 서로가 주고 받음으로 많은 유익이 있기를 기대 하면서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 성령충만과 성화는=인가 아니면 상관관계라도 있는지(성령충만을 어떠한 각도에서 보는가에 따라 달라 지겠지만). 첫번 질문에 대한w답변은 좀여유을 가지고 할 까 합니다. 많은 답변 부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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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08-10-08 18:52  

성령충만

성령충만을 어떠한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각도에서 보든지 단 하나 오직 하나만 보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곧 요나의 표적입니다. 십자가입니다.

각기 다르게 보인다는 것 자체가 기적(성령의 역사를 개인소유화 했기에)으로 먹고 배부른 까닭이기에 악한 세대에 갇혀 살고 있음을 직시해야 겠죠. (자기 배를 채우고자 임금삼고자 했듯이-요 6:15)

성령충만이란 인간의 선악의 판단으로 많다 적다의 양적인 의미가 아니라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주님으로부터 발생된 사건이 덮치는 것을 말합니다.

크냐 작냐 라는 것에 평생을 갇혀 사는 인간과 그 비교에서 벗어날 수 없는
도토리 키재기 하며 남과의 우열을 의식하는 성화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선택이냐 버림이냐 편애냐 미움이냐 라는 것에 목매이며 법으로 칭칭감아서 도리어 갇혀버린 가인성, 바벨탑, 국가, 교회처럼

저들의 무화과 나뭇잎이 철저하게 가짜 사랑임을 아는(사람의 손으로 짖지 않은)

철저한 사랑(용서)의 결핍을 아는 순간이 (법이 홀라당 벗겨지는)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즉 제대로 된 심판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제대로 된 저주 죽음 곧 십자가를 만나는 순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는 바울의 고백과
이사야 선지자의 화로다 화로다 이스라엘 중에 거하면서 여호와의 영광을 봤구나 나는 이제 죽어 마땅하구나 라는 고백이 성령충만입니다.

이런 성령 충만이 아닌 인간의 결핍채우기를 주장하는 것은 사단의 역사입니다.
충만에 대한 우열을 결핍 채우기로 우열을 더 심화 시키듯이 말이죠.(인간의 성화개념)

정작 바울은 매일 매일 죽노라 하면서 죽음이라는 철저한 단절성을 주장합니다.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다시 사는 것

베드로가 성령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마 16:16, 개정)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는 고백이 성령충만이 아니라

그 성령이 지금 예수님을 등떠밀어서 사람에게 고난 받아 죽고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비로소 비밀의 세계를 실행케 하심이 성령충만입니다. 십자가에 달리도록 하시는 거죠. 왜냐하면 베드로를 음부(죽음)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자신의 애벌레 집을 만들기 위해, 성령의 전으로 만들기 위함이지요.

(마 16:17, 개정)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8, 개정)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9, 개정)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 16:20, 개정)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마 16:21, 개정)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마 16:22, 개정)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성령의 일을 알길이 없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성령충만 (곧 죽음이라는 철저한 단절성)을 자신이 할 줄 아는 가능성의 세계에만 안주할려고 하기에 그 반대 세계인 육의 충만을 주장합니다. 죽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정반대의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길을 가시지 않으면 누가 베드로를 건져내겠습니까? 님이 성화해서 베드로 건져줄수나 있을까요?
 
그래서 사단아 물러가라 라는 욕을 대따 하시고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의 차이를 드러내시고 베드로를 통해서 우리를 고발하십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라고.

생명이 아닌 죽음이라는 단절성을 주장하지 않는다면 (즉 십자가)
마치 생명을 주장하는 것이 옳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것이 사단의 일입니다.

(마 16:23, 개정)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 16:24, 개정)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5, 개정)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 철저한 생명으로 부터의 단절인 죽음 만이
십자가에서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사는 영의 세계의 충만을 성령이 주도하시는 겁니다.
날마다 죽이면서 말이죠.

(한번더 다시 설명해 보면

두 사람이 싸웁니다. 서로 크냐 작냐 라는 양적인 많냐 적냐로 다투고 있을때에

엄청나게 큰 우주보다 더 큰 분이 멀리 멀리 그냥 가만히 있지 않고
직접 내려와서 내 발 밑에 깔려 죽으실려고 작정(계획=예정)하고 내려와서
내 손과 발에 의해 죽임을 당해 버리십니다.

비로소 그 사람은 “허걱” 거리면서 그 동안 자신이 법적인 사고방식에 갇혀 살아왔고 그것이 전부임을 알았던 것이 허상이였다는 것을 그 분의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눈에 비니루가 벗겨져서 알게 됩니다. 누가 벗겨버린 것일까요?

이제서야 알게 됩니다.

싸따마우스

아가리 닥쳐

(합 2:20, 개정)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슥 2:13, 개정)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

할 말이 없어지는 겁니다.

크냐 작냐 많냐 적냐 높냐 낮냐 라는 항상 비교대상이 있어서 남을 의식해서 나온 법적인 선악의 사고방식이(자아기준) 더 이상 입을 다물 수밖에 없도록 잠잠케 하신 겁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자는 입 다물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출 14:13, 개정)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출 14:14, 개정)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저 애굽 쪽의 철저한 심판을 실행하시는 여호와의 구원을 제대로 봤다면
왜냐 나는 작고 애굽은 너무나도 컸다고 여겼는데
애굽 보다 더 큰 분이 애굽을 작살내었다면 나 또한 천번 만번 심판 받아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구원 받을 만 해서 구원 받았다고요? 예정 되었다구요?
그래서 그 고마움에 미안 스러워서라도 성화 해야 한다구요?

그런 생각에서 베드로가 막은 거죠. 그것이 사람의 일이고 사단의 모습인 거죠.

그러나 그런 예정 철저하게 단절해 버리고,
매일 매일 허걱 거리면서 할 말이 없도록
내 발 밑에서 끝까지 머리 둘곳 없는 버림받는 모습으로써 날마다 죽지 않는 나를 겨냥해서
날마다 죽는 모습으로 매이 매일 십자가 지시는 모습으로만 다가오시겠다는 것만 예정하심을 밀어 붙이는 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왜냐? 인간이 중요하거나 자아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인 없는 자아를 지워버리기 위함입니다. 그 육의 단절로 영의 충만인 말씀대로만 되었다는 것만 남기기 위함이죠.

예언대로 되었다

(딤후 2:11, 개정)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갈 2:20, 개정)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빌 1:21, 개정)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죽음을 앞장세우지 않는 성령은
마치 기적을 요구하는 악한 세대입니다. (기적을 성령의 역사라고 해석하듯이)
그러나 요나의 표적은 바로 그 악한세대를 규정시키면서 증거 됩니다.

기적을 성령의 역사라고 해석 할 줄 아는 (베드로처럼) 그 세대를 향해
오로지 요나의 표적만 앞장세워서 악한 세대이었음을 까발리고 확정지어서
성령과 단절케 만드는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이 성령의 일하심이 없으면 긍휼을 바라지도 않겠지요.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단절이라고 닭이 대신 베드로를 대신해서 우는 겁니다.

칠삭둥이는 비꼴수 있는 입이라도 있지만
모친의 죄 중에 태어 났는 자임을 성령을 통해 안 자라면 오로지 긍휼만을 바랄 것입니다.
(시 51:5, 개정)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눅 18:10, 개정)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 18:11, 개정)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2, 개정)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 18:13, 개정)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그래서 십자가의 영인 성령은 십자가만 쳐다보도록 긍휼만을 쳐다보도록
철저하게 우리를 심판의 죽음 아래로 몰고 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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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08-10-08 19:06  

영(언약)과 육(비언약)

육이 생각하는 영이란 육에 의해서 판단유무가 가려지는 영만 취급한다.
육의 레이더망에 벗어난 영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영도 어디까지나 가능한 영만 영이다.

그러나 영은 바로 이런 육의 사고방식을 반드시 상대적으로 도구로 삼아서 그 차이성을 드러내면서 단절(불가능)의 의미를 더더욱 부각시킨다.

사랑은 죽음 보다 강하다 라는 의미는
죽음이라는 불가능을 넘지 못하는 사랑은 어디까지나 남을 지배라고 소유할려는 사랑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접받을 만한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철저하게 버림받는 단절된 머리둘곳 없는 모습으로 오신다. 이것이 영의 일이다.

그렇다면 이 영의 일을 반드시 육은 가능성으로 제시하고 그 가능성으로 바꾼 댓가를 추구하게 된다. 가까이 다가갈수 있도록 해주는 것보다 더 보람된 일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일이다.

영의 일이란 바로 이런 사람의 일의 내막까지 구석구석 그 실체를 다 들추어내면서 증거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미움 받을 짖만 골라서 한 셈이다. 인간들이 싫어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신 것이다. 이런 영의 일이라면 인간은 그동안 영의 일을 늘 자기의 유익과 결부시킨 사람의 일로 취급해 버린다. 그것을 법제화 하고 신앙화 하여서 전수함으로써 집착하면서 사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장로의 유전이다.

이 장로의 유전인 사람의 일을 앞세우면서 증거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다.

(마 15:3,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막 7:8, 개역)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막 7:9, 개역)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사람의 계명 곧 사랑을 앞장세우면서 (육의 사랑, 집착)
하나님의 계명 곧 남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의 사랑)을
대비 시키는 것이다.

이 차이성을 예수님 쪽에서 들추어 내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사랑에 도취될 뿐이다.

그래서 항상 언약이란 비언약(옛언약)과 새언약을 대비시키는 이유도
어두움을 대비시킨 빛의 확정(부인치 못하도록)이다.

(새롭다는 의미도 기존것의 폐기처분의 지나간다는 의미의 대비로써 증거 된다

(고후 5:17, 개역)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율법이라는 전남편으로 부터의 철저한 갇힘에서 완벽한 해방을 대비시키듯이

(롬 7:1, 개역)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롬 7:2, 개역)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롬 7:3, 개역)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롬 7:4, 개역)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7:5, 개역)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롬 7:6, 개역)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롬 7:7,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롬 7:8, 개역)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롬 7:9, 개역)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롬 7:10, 개역)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롬 7:11, 개역)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롬 7:12, 개역)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 7:13, 개역)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롬 7:14, 개역)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롬 7:15, 개역)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롬 7:16, 개역)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롬 7:17, 개역)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18, 개역)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9, 개역)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 7:20, 개역)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21, 개역)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2, 개역)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개역)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철저한 단절


(롬 8:1, 개역)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3, 개역)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4, 개역)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5, 개역)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 8:6, 개역)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7, 개역)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8, 개역)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 8:9, 개역)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10, 개역)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롬 8:11, 개역)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 8:12, 개역)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롬 8:13, 개역)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 8:14, 개역)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5, 개역)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6, 개역)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7, 개역)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 8:18, 개역)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9, 개역)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롬 8:20, 개역)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 8:21, 개역)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 8:22, 개역)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 8:23, 개역)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롬 8:24, 개역)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롬 8:25, 개역)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롬 8:26, 개역)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7, 개역)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28, 개역)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9, 개역)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개역)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31, 개역)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3, 개역)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육과 절처한 대비인 영의 일

사랑이란 죽음으로만 몰고감

그래야 그 사랑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죽여보면 알 듯이 다시 살면 사랑
다시 살지 않으면 사랑이 아님

끊어질 사랑인지 아닌지

성령은 우리를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협 칼
이라는 사망의 권세 속으로 집어 넣으시는 겁니다.

성령충만이란 그런 불가능을 우리 보고 이기라는 말이 아니라
누가 이겼는가를 그 혜택을 선물로 받고 누리고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
성령은 우리를 그 광야 속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롬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나는 늘 끊어버리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 뿐임에도 불구함을 확정지어 버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놓치지 않고 끊지 않고 붙들고 있는 외부에서 붙잡고 꽂아버리는
끊을 수 없다고 다가오는 분 앞에 할말이 없이 잠잠케 되어버리는 나를 이긴 주님의 승리가 주님은 나보다 강하다는 나를 겨냥한 나를 이기시는 육의 승리가 영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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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영 08-10-08 22:07  

아멘. 과연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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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득영 08-10-08 23:12
 
성경에는 성화개념이 없기에, 역시 성령충만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왜 성령충만과 성화가 서로 대비되는지, 참으로 요상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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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구만  08-10-09 00:53 
 
성령충만 이란 성도가 평생동안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함을 말합니다.성령의 인도는 은혜위의 은혜로 오신 예수님을 깊이 알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자가 아니라, 은혜를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일평생 동안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전 2:12)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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