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랑)이라는 징계의 실상(자녀됨의 증거) VS 연기력 

자녀와 사생아의 차이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0-20 14:20:05,

하나님 나라는 사랑과 하나님의 의 공평으로 유지 되는 곳이다

거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땅에서 훈련하고 연습하지 않으면

거기에서도 못산다고 합니다 이것때문에 성화구원을 얘기하는거 아닌가요

답변:

하나님 나라 라는 의미와 하나님의 의와
거기에 합당한 열매와
훈련에 대해서 살펴보면 되겠지요

자 이것이 먼저 정립하고. 밑의 질문의 답변의 방향도 같이 보시면 됩니다.

성화론자들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옛언약의 백성인 구약 이스라엘이 실패한 하나님 나라를 이제는 새언약을 완성한 예수님이 모범을 보여줬고 정답을 보여줬으니까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회복할 수 있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이루기 위해서 성령까지 다 도움을 적극적으로 주실 입장에 놓여 있으니 믿음으로 나아가면 되니까 행하면 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바로 바리새인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자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알려면(항상 언약은 비언약의 대비성으로써 파악하면 되듯이) 가짜 하나님 나라를 알면 됩니다. 즉 가짜 천국

이 가짜 천국을 고맙게도 옛언약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새언약은 항상 이 옛언약의 대비에서 부각 됩니다.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말이죠.

바리새인 또한 하나님 나라 전파에 평생을 목숨 걸었고 돈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자기들의 말씀 지키기를 통해서 한 사람이라도 건질려고 목숨까지 버리면서 하나님 나라에 올인 한 자들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문제입니다. 항상 그렇듯이 말이죠.(남 건질 입장이 못된다는 거죠. 소경이 소경을? 내 숙제를 니가 왜 해?)

그들은 자기 의를 쌓을려고 한 적 없습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예수님은 자기 의를 쌓을려고 하는 자들이니 이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라고 합니다. 조심하라고 해서 조심하게 다룰자 없습니다. 이 말은 다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또 그들은 돈을 사랑한적 없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모습이 보인다면 누구보다도 사람들이 벌써 손가락질 하고도 남을 정도로 잘 안다는 것을 알기에(보편성) 돈을 사랑하는 모습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방해가 된다면 얼마든지 그들은 회개하고 고칠려는 자세는 누구보다도 더 완벽하게 갖추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과 만나서 대화를 했던 성경의 부분을 다 살펴보면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인 자였다는 것을 부인 못할 정도입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 보다 나은 의를 이루지 못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못하다 라고 예수님 마저도 바리새인을 앞장세워 들이대시는 것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그들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그저 인간이요 그저 우리와 같은 선정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6, 개역)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즉 같은 보편성에 놓여진 자입니다.  우리가 죄 아래 갇혀 있다면 그들 또한 갇혀 있고
우리가 의를 이루지 못하면 그들 또한 이루지 못합니다.

그들과 우리는 어떤 이유로도 차이점이 없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이런 보편성을 깨뜨리고 차이성을 두겠다고 다가오는 예수님이 문제입니다.

자 이제 죄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인간 쪽에서의 어떤 행동의 유무사항으로 볼게 아니라
예수님의 행동 유무로 파악합시다.

먼저 무엇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했지요? 차이점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지요. 맞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차이를 두어 버립니다. 주님이 편애와 미움을 심어버립니다.

아무리 완벽하게 갖추어도 주님이 미움을 심어버린 이상
그 사람의 말씀 지킴이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주님의 주도권을 부각 시키기 위해서, 극대화 시키기 위해서
철저하게 단절케 하기 위해서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이라고 넉넉한 자유로움으로 바리새인을 앞장세웁니다.
너희들 중에 바리새인 보다 나은 놈 나와봐? 라고 아주 당당하게 자유롭게 외칩니다.

당연히 아무도 없죠

그 시대 상으로써는 최고의 의로운 자들이였으니깐요.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런 바리새인을 앞장세우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가

그 말씀에 걸려서 넘어서질 못하는 단절에 놓였고 갇혀 있다 라는 죽음의 세계와 죄악의 세계와 사망의 문에 못 넘어선다는 마귀에게 잡혀 있다 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취지가 아니라.

남이 아닌 예수님이 말한 말이기 때문에 그 말을 지키면 되는 구나 그래 바리새인 보다 나은 의를 지키면 되겠구나 라고 곡해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자신이 쳐 놓은 바리케이트를 아무도 못 넘어선다는 취지로 증거 했는데
우리는 문자 해석 능력이 있으니 그 문자 말대로 하면 된다고 보는 겁니다.

남도 아닌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남이 아닌 나를 향해 말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보고 말씀 하신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즉 말씀의 관심사는 마귀를 겨냥한 영적인 겁니다.
(요런 마귀새끼들 같은 바리새인 보다 나은 의로움을 완성하는 자가 바로 나 예수다 내가 공짜로 주마 라고 쳐다보기만 하면 되는데 누가 못 볼까요? 자기 의를 포기 못하는 자가 못쳐자 보는 겁니다. 그렇기에 바리새인을 반드시 앞장세워야 하는 겁니다.)

나 라는 인간 대 예수님 이런 맞짱으로 대면할 수 있는 입장에서의 인격 대 인격의 만남이라고 보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 뒤에 있는 사망의 권세만을 상대로 하신 겁니다.

우리는 죄를 다룰 수 있는 주체자가 아닙니다.
죄가 도리어 우리를 마음껏 다루는 주인입니다.
(죄 개념 조차 성화론자와 다릅니다. 죄란 예수님에 의해 다루어지는 심느냐 아니면 씻어주시냐 라는 문제인데 그렇게 되면 예수가 졸지에 불공평하고 나쁜 이미지로 인간 다수에게 비쳐질까봐 자기들이 이미지를 개선하는 것이 지옥 철폐 등등의 부정적인 의미 보다, 보다 많은 선한 이미지로 다가가기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다룰 수 있다고 보는 거죠. 성령이 도움을 주면 나의 실천력과 결합 시켜서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뒤에 있는 감추어진 배후세력인 주인을 겨냥해서 말씀이 어떤 일을 하시는 가를 상대적으로 증거 합니다.

(히 4:12,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인격이라는 용어를 3번째 질문에서 했는데 성화론자들이 늘 써먹는 용어이기도 하지만요
사실상 이 용어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자는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격이란 결국 나를 나로 봐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항상 주장했지만 자아란 없습니다(옛언약에서 이미 다 밝혀진 겁니다.) 없는 자아를 있다고 일단 전제로 하고 그 헌 부대에 자꾸 예수님을 인격자로 대우하면 그 예수님의 인격과 자아의 인격과의 만남이 이어진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자유의지라는 것도 없는데 자꾸 있다고 우기는 거죠.

즉 베드로처럼 자기 쪽에서 예수님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것을 인격적으로 본다는 겁니다. 만약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혼자 북치고 장구쳐서 혼자 다 해버리면 인격적이지 못하고 반칙이고 불공평한 비인격적 이기에 그런 모습을 방지하기 위한 인간의 방어막인 최소한의 자존심인 겁니다. 그래서 인격이 아니라 그게 위선인 거죠.

그거 벗겨버려야 합니다. 늘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방어하고 변호 할려는 자세로써 혼자 집착하는 모습인 병을 남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 마저도 인격적으로 만들려는 시도입니다. 특히 삼위일체라는 교리를 보면 그런 인간의 노림수가 아주 잘 보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가 선택하여 사랑한 예수님이 죽음의 길로 가야한다는 것을 막을 수 밖에 없지요. 왜냐 예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자기의 선택권 아래에 가두기 위함입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선택하고 믿고 사랑한 그 자기 사랑을 계속 고정화 시킬려면 예수님이 움직이면 안됩니다. 마치 남자들이 여자를 소유해서 자기 공간에 가두어서 남의 아내가 되지 못하도록 빼앗기지 않을려는 소유욕처럼 말이죠. 그래서 인간들이 쓰는 좋은 단어 선한 단어의 내막에는 항상 악함이 있다 라는 것을

예수님은 그 시대의 가장 선하다 라고 하는 자를 동원해서
악한세대로 규정시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가짜 천국 운동을 펼치는 자들을 통해서 그 차이로 예수님 홀로 세우는 인자의 나라인 예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와 vs 예수님 나라 와의 대립이다 라는 글을 제가 쓴적이 있듯이
인간의 머리 속에서 나올수 있는 모든 천국 개념과
그 천국을 반드시 악마의 나라로 규정시키는 예수님 홀로 세우는 인자의 나라로써 대립을 시키는 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약속입니다.

이런 차이성을 말리고픈 자들이 누구 이겠습니까?
자기들이 미리 확보 해 둔 세리와 같지 않은 것을 감사하는 그 감사에
예수님은 역으로 그 차이를 거꾸로 해버리는 겁니다.

세리가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대상이고
바리새인이 악마라는 악한세대를 규정하듯이 말이죠.

이 악마 라는 배후인물을 즉 숨겨진 인물을 끄집어 내지 못하는 의란 가짜요
그런 천국 따위한 인간의 상상에서 나온 우상덩어리 인 욕망의 이데오피아입니다.

참 감사하게도 성화론자들의 교회를 보면 이런 욕망의 이데오피아인 위선 천국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4장에 가짜 메시아를 심은 그 마귀의 활동상을 깔아놓는 이유는
그와 대비된 참 메시아의 활동과 한 개도 일치성이 없다는 차이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마귀는 유대인에게 가짜 메시아를 심어야 하는 겁니다. 누구 허락으로? 천상회의의 허락으로 말이죠. 마귀도 피조물이니 독자적인 행동을 못하듯이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 외에는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강퍅케 했으니 당연히 진노의 그릇 노릇만 해야되겠지요.

마귀 자기가 독자적으로 가짜 메시아를 자기 멋대로 유대인에게 심을수 없습니다.

자 이런 입장에서 인격이라는 말이 나올수 있을까요?

자유자와 자유자로 만나자 라구요? 인격적인 존재인 인간과 인격적인 예수님과의 만남?

정말로 웃끼는 소리죠.

그래서 물위에서 베드로와 예수님이 만날 수 없도록
단절 시키는 겁니다. 베드로 반드시 빠뜨립니다. 물 속에 꼬로록 죽여버립니다.
죽음과 죽음에서 만나고
불공평과 불공평 속에서 만나고
저주와 저주에서 만나고
천국? 웃끼는 소리죠.

지옥과 지옥 속에서 만나자 라는 겁니다.

그런 지옥의 권세 사망의 권세 이기지 못하는 교회라면 예수님과 상관이 원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음부(스올) 곧 지옥의 사망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로 삼는 겁니다.

문제는 이것을 때려죽어도 못 믿는 자들이 인격 인격 위선 떨면서
사망의 권세에 다 넘어지고 허물어지는 교회만을 세우고 사수하고 지켜 보호 방어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행함으로 칭칭칭 감아야 하는 거죠. 안 믿겨지니까 그렇게 하는 겁니다.

믿을 것은 자기 행함 뿐인 거죠.

베드로의 자기 선택권을 박살내어야 자기 쪽에서의 예수님 사랑을 박살 내어야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도 못 넘는 주제에 무슨 음부(죽음)의 권세를 이길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인간 쪽에서의 선택은 결국은 자기가 선택했기에 자기가 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을 버릴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 모순을 철저하게 봐야 합니다. 철저한 단절로써 육의 적나라한 모습을 봐야 합니다.
넌 마귀에게 잡혀 있고 사망의 권세에 갇혀 있다고

누가 그 갇혀 있는 것에 못 빠져 나오도록 했나요? 당연히 예수님이지요.

율법을 줘서 아무도 못 빠져 나오도록 죄 아래 갇히도록 했건만
건방지게 도리어 율법의 외침을 손으로 막아서 가로막고
율법을 지켰다고
또 오늘날 성화론자들처럼 말씀을 지켰다고 우기는 것은

예수님이 막으셨던 것을 무색하게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런 믿음으로 약속 성취를 자기들이 또 따로 국밥으로 자기들의 약속 성취로 가로채기 할려는 정말 누룩이 아니고 무엇이냐 말이죠.

그래서 베드로에게 죽었다가 다시 나타나셔서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 묻습니다.
이 말은 니가 날 사랑한게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했다 라고
도저히 넘어 올수 없는 죄책감을 잊게 해주시는 주님의 사랑 퍼붓기가 아니면
베드로는 밀까부듯이 까부는 사단의 노리개에 영원히 갇힐 뿐이다 라고 알려주시는 겁니다.

(눅 22:31, 개역)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개역)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믿음도 행함도 사랑도 그 어떤 것도 내가 다룰수 없는 것이요 오로지 주님이 그 모든 것의 주체자입니다 라는 것을 말이죠.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런 단절을 꼬끼오 라고 우는 닭이 그 작고 작은 나의 무시의 대상이 도리어 내가 무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나 되게 하는 은혜로써 작용케 할려고 창세전에 꼬끼오를 마련해 두신 겁니다.

이런 식으로 이루시는 예수님의 나라와
성화론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차용해서 다루는 하나님 나라와의 그 차이성을
남 보다 더 가차이 두게하심으로써 님에게 알려주실려고 허락하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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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0 14:22:21,

계시록에 나오는 예루살렘으로 무흠무죄한 주님의 단장한 신부를 말하는것이고

결국 구원받은 성도의 온전한 인격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답변 :

종교의 마약성은 항상 자기 구원과 연관 시키도록 되어 있고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선배들의 고백은 마치 계시록의 24장로들의 면류관을 반납해도 상관없는 영광에 자기를 잊어버려도 상관없는 자유의 모습에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는 겁니다.

계시록에서 까지
자기의 구원의 근거를 찾지 못한다면 인간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이 선택했듯이
얼마든지 자기들이 버리겠다는 자세로 일관 합니다.

믿음도 내가 예수님을 믿는 나의 자유 나의 인격성 나의 선택권이듯이
믿음을 안주면 나도 예수님을 버리겠다는 자발적인 인격을 발휘하겠다는 일종의 행패가
믿음 아닌 믿음으로써 자기 신념화 오기 땡깡 부림의 확정으로 자아도취 된 겁니다.

이런 선민 선택의 엉터리 성을 유대인을 대표로 앞세워 이미 다 보여줬습니다.

특히 계시록에 나타난 모든 영광과 모든 의미들은 예수님에게로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으로 모아집니다. 여기서 양이라는 것은 제물이 되었다 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합니다. 제물이 된 철저한 찢겨짐의 단절과 희생타가 된 유일한 죽음을 제대로 격은 자
하나님의 저주를 유일하게 제대로 받은자에 대한 의미로써 어린양이라고 했고
이 어린양에게 모든 영광이 돌려지는 의미는 역전이 되었다 라는 것을 팔을 어긋맞게 했다는 의미로써 모든 입과 무릎을 꿇게 한다는 굴욕적인 상대적인 승리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양의 승리요.
땅(육,죽음,사망,죄)을 1. 다스리고 2. 정복하고 3. 충만케 그리스도의 형상의 승리의 잔치

그러니 24 장로가 벌벌벌 떨면서 면류관을 감히 반납 안하고 못배기는 거죠.
자기 것이 일체 없는 겁니다.

이런 분위기를 파악을 못하는 자들은 마치 예복(그리스도의 옷)을 입지 않은 것처럼
여전히 땅의 생각인 구원의 탐욕을 하늘의 대 영광 잔치 행사에서 마저도
자기 옷 버리기는커녕 예복을 무시하는 짖만 골라서 하는 겁니다.

(마 22:2, 개역)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어린 양을 위한 잔치를 예복도 무시하고 땅에서 입던 옷을 여전히 고집하면서 예비된 형상도 입지 않는 주제에 무슨 구원까정 챙길려고 하는 것일까요?
 
어린양의 승리의 의미 조차도 모르기에 구원받은 성도의 온전한 신부됨됨이만 쳐다보는 겁니다. 그런 인격 조차도 신경쓰지 못할 정도로 자아를 잊어버리는 날마다 신랑(어린양 제물)과 함께 죽고 날마다 신랑과 함께 사는 신부입니다.

* [온전한] 이라는 의미를 다윗의 고백에서 알지 못하면 자의적인 해석이 됩니다.

다윗은 비로소 자기 마음에 정직한 영이 없음을 알고(단절) 불쌍히 여겨 정직한 마음을 달라고 합니다. 결국 그 이전에는 자기가 그런 정직함을 소유했다고 착각한 겁니다. 그 착각을 주님이 사건으로써(희생 제물인 3가지 인격화 된 증거물 우리야의 죽음, 밧세바의 부정케 됨, 이름 없는 아기의 저주=이 3가지는 더더욱 다윗의 율법 지킴의 거룩이라는 행동과 결부시킨다. 그 거룩이 가짜임을 들추어내는 진짜 거룩은 대신 더렵혀지는 부정케 된 제물이다.) 다가가지 않으면 다윗은 자기의 거룩실천 행함에서 나온 가짜 거룩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다.

(시 51:10, 개역)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마치 믿음이 뭔가를 말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열심과 결부시켜 나온 열매인 이스마엘이라는 육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그래서 육의 도저히 할 수 없는 100세를 일부러 넘기고  순푼 순풍 아기 잘 놓는 순풍여성이 아닌 일부러 죽은태인 불임여성에게서 창조 곧 자유를 보여준다.

(롬 4:17, 개역)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갈 4:19, 개역)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21, 개역)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개역)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차라리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내가 회복 못하고 그리스도의 예복을 내 힘으로 입을수 없는 무능한 자임을 솔직하게 고백해야 할 것이다. 누구처럼? 아브라함처럼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2008-10-20 14:27:13,

결국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의 인격이 된 사람만이 주님의 사람이다

하는데 이것도 사람 쪽에서 땡김일까요

답변 :

그리스도의 형상은 그리스도에게 주도권이 있는 토기장이의 빚어댐입니다.

교회 사람들이 이 토기장이에게 맡길수가 없기 때문에

운동을 벌리는데 토기장이를 운운하기는 하지만
토기장이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당하는 것이 일체 없이
자기 쪽에서 미리 앞당겨서 고난도 믿음도 실천도 미리 다 땡겨해 버리고
그 댓가를 달라는 식입니다.

예수님이 제일 미워하는 죄란 바로 이겁니다.

주님이 매를 대시면 그냥 그 매를 맞으면 됩니다.
그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심판 자체가 사랑이요 단절 자체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마음을 우리는 정직한 영, 새 영이 없어서 모르기 때문에

매 자체에만 의미를 둡니다.

그래서 이렇게 겸손을 순종의 가면을 쓰고 가장한 위선을 떠는 것이 바로
매를 대시는 주님의 아픈 마음에는 관심 없고 그 매를 빼앗아서 주님이 저를 때리시면 마음 아플테니 제가 제 손으로 징계하고 때리겠습니다 라고

자기가 자기를 때립니다.

제가 깜짝 놀라고 또 교회 속이라는 환경과 또 내 자신의 모습과 심지어 성경의 비언약 곧 옛언약의 모든 인간의 속성 곧 육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을 실감나게 알았습니다.

연기를 하는 겁니다 연기

이런 연기를 목사부터 주일학교 어린아이까지 에브리 바디 모두다 단 한번도 멈춘적이 없이 이 짖꺼리만 평생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연기가 아닌 실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자아도취적인 연기력에 자기가 연기 뛰어나다고 도취된 자들에게

믿음은 실상이요 연기가 아님을 규정하기 위해서

(롬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아끼지 않고 원수들인 우리에게 내어줍니다.

그 내어준 아들의 살쩜과 피를 먹지 않는 자는 자기연기력에 도취되어 갇혀버린 그 자아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은사란 반대의 길로 가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준 그 살쩜과 그 피의 잔만을 극대화 시키기 위해서 가짜 은사 곧 성화죠 연기죠 연기

그 뛰어난 연기력이 우글 우글 거리는 강도의 소굴에 은사는 자녀를 집어 넣습니다.

(마 10:16, 개역)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다윗은 이 철저한 단절의 내 속에 정직한 영이 없음을 비로소 알고
불쌍히 여겨 달라는 요청, 부르짖음 브로큰 애로우를 통해서

종교꾼들 누구나 할 수 있는 제사 번제 행함 실천 아닌
좁은 길인 상한심령만을 쳐다봅니다. 내 때문에 불뱀처럼 달려야 할 인자 만을 쳐다봅니다.

비로소 다윗은 바울이 눈에 비늘 벗겨지듯 눈을 뜹니다.
자기가 왕이라고 있던 그 이스라엘이 늑대들의 소굴이라는 것을 비로소 보았고
그 곳에서 대장질 했던 자가 남이 아닌 다윗 자신임을 말이죠.

바울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죄인 중의 괴수죠

이제 바울도 다윗도 거꾸로 쳐박히듯이 그 늑대들의 소굴에서
갈기 갈기 찢겨지는 내리막길로만 갑니다.

본격적인 고난이 닥치는데 도리어 그것이 은혜임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괜히 눈뜨는 바람에, 아니지, 눈 뜨임을 당하는 바람에
모든 이스라엘이 자기를 죽일려고 달려들면서 거지행세까지 하면서 철저한 잃어버림과 단절과 버림을 통해서
인간의 내막은 중심(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이 아닌 겉모양으로써 자신을 대우했고 그 껍데기가 왕 자리라는 위치로 인한 연기력의 가식적인 모든 관계망 구조임을 실상으로 알게 됩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타내어서 돈이 있을때는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친구들, 여자들이 자아를 인정해주고 연결되어 잇는 네트워크망이 형성된 그 중심에 [자기를 위하여]가 딱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것이 막상 돈이 없을 때는 든든한 중심이 아닌 껍데기 같은 안개의 허상처럼 날라가 버리는 겁니다. 자아가 허상인 것을 알려면 늑대소굴 연기력 소굴에 가보면 자기의 실상을 알게 됩니다.

이 허상의 실체를 실감나게 격어야
1 아버지가 공짜로 주는 금 가락지와 맨발에 신발까정
2 은혜로 불쌍히 여겨서 입혀주시는 가장 제일 좋은 옷
3 그리고 살진 송아지로 = 긍휼의 증거 불쌍히 여겨주심의 허물치 않음의 증거 십자가박스
잔치 잔치 열렸네 풍악을 울려라 먹고 마시고 즐기며 춤추자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한 드라크마 찾았다고 하루치 일당을 찾았다고
http://crosslamb.tistory.com/134
너무 너무 기뻐서 99일치의 유 가치를 하루(1) 일당의 무 가치와 맞바꾸어도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도리어 기뻐 신나서 잔치를 베풀 정도로 자유로운 사랑의 세계 용서의 세계 긍휼의 세계의 승리 잔치가 어린양의 승리 곧 요한계시록(기록된 대로예언대로 이루어짐)입니다. 더 보탤 행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의 세계는 300 데라니온의 가치를 잘 아는 제자들에게 연자맷돌에 씌여 참수시키듯이, 예수님의 발에 300 데라니온 향유를 부어 자기 머리카락으로 더러운 발을 씻는 무가치하게 허비하는 더러운 여자의 이 어리석은 지혜를 도저히 알 길이 없는 차단된 생명의 길입니다.(예수님의 죽으심을 예비))

그러나 이 매(사랑)의 실상을 거부하고 죄인 중의 괴수임의 증거인 십자가에 달린 불뱀을 눈이 있어도 못보는 자는

딱딱한 음식을 먹을 줄 아는 장성한 자의 겉멋을 연기해야 하고 흉내내어야 합니다.
(마치 꼬마들이 소꿉놀이 하듯이 특히 여자아이들은 빵깨이 장난감으로 도마 플라스틱 칼 플라스틱 냄비 가스렌지 등등으로 요리해서 단단한 음식을 먹는 엄마 아빠 흉내를 내듯이)

그리고 어린아이에 머무는 자를 죽은 믿음이요 장성치 못한 자 라는 둥의 자기들의 연기력을 그런 식으로 성경따라하기를 하는 겁니다.

장성한 자와 어린아이에 머무는 것은 매(사랑) 곧 징계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아이의 특징은 매 자체를 무서워 할 뿐이지 그 매를 대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아직 잘 모릅니다.

그러나 장성한 자는 상대적으로 그 매 보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립니다.

매를 대시는 그 자체가 사랑임을 알고
달게 그 징계를 맞습니다. 오죽 하시면 매를 대실까?

그런데 성화론자들의 특징은 이 부분을 그들은 반대로 봅니다.

마치 예수님이 맏이로써 대신 어린동생들을 대신해서 매를 맞으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았다고 도리어 놀림꺼리로 취급하듯이
징계의 길로 가는 자를 못 봤습니다. 그럼 차라리 어린아이 같은 성도 라고 말하지 말고 자기자신이 장성한 자라고 말은 하지 말든가? 성화를 주장하다 보니 남들이 어린아이 취급할까봐 미리 방어적으로 연기를 하는 겁니다. 장성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둥. 막상 자기보다 장성한자 나타나면 시기하고 미워하고 쫏아내는 거죠. 남이 아닌 장성했다는 자기가 말이죠.

장성이란 인간의 손에 달린게 아니라 다윗에게 달린게 아니라. 정직한 영이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는 이유로 징계의 길로 몰아붙입니다. 그래야 실상을 봅니다. 이스라엘 국가체제가 강도의 소굴, 늑대들의 소굴 속에서 짖밟히고 버림받아 봐야 누가 내 대신 매 맞은 분인가 라는 장성하신 분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를 보듯이

욥이 애매한 알수 없는 고난 속에 쳐해보니 비로소 지혜자를 보게 됩니다.
그 지혜자인 장성한 자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징계 곧 심판이라는 저주를 자기 신체에 담기는 그 애매한 고난 속에 처해 보니 비로소 아는 겁니다.

이 일을 전담하시는 분이 구약에서는 전능자 여호와 즉 전능자란 괴롭히는 자
왜? 너 속에 정직한 영이 없으니까

신약에서는 인자(아들)입니다.
대신 심판 받는 분.

이 심판을 완성하신 인자가 우리의 심판 주가 되심은 이제 정직한 영을 부어주실려고
징계 곧 고난 속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이것을 부활(죽었다가 살아나는 생명)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매를 대실려고 하면 달게 맞는 자가 묵묵히 도살장에 끌려가는 순종의 영이 장성케 하는 것이지 그것이 담겨진 육체(그릇)가 장성을 고정화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구경꺼리 미말에 둔 미끼 

(고전 4:9, 개역)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즉 제대할 때가 된 겁니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 때 입니까?
주님의 예언과 연관된 거지 그릇의 자질과 성숙도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때가차면 무조건 제대입니다. 태권도 단증이나 총쏘기 훈련에서 늘 빵점 맞았다고 제대 안 시켜주는게 아닙니다.

왜냐? 매 이거든요. 매

매(징계. 사랑)가 주도권이지 매 100대 맞으면 장성된 거고 매 1대 맞으면 어린아이 신앙인게 아닙니다. 만약 그런식의 사고방식이라면 향유부은 여인을 비방하고 무시하는 제자들의 돈의 가치를 잘 아는 자들과 같습니다.

바로 이것을 제가 성화론자들과 만나면서 느낀 겁니다. 이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놈을 본 적 조차도 없거든요.

매 100대 맞았으니 병장이고 매 1대 맞고 다시는 안 맞으면 영원한 이등병 제대를 못하나요? 매 맞은 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오죽 못났으면 안때리면 안될 정도로
정직한 영 곧 아버지의 마음과 멀기 때문에 때린 것인데?
또 대신 맏이 되신 예수님을 때린 것은 아예 때릴 가치가 없을 정도로 얼마나 속터지고 무시했으면 맏이가 다 대신 댐팡 모든 허물을 대신 감당하는 겁니다.

나를 상대 조차 안하겠다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성화론자는 하여튼 드라마를 찍어요 아예 각색 각본 연출 감독 조명 음향 다 자기들이 다 해버리는 겁니다.

얼마나 징계(사랑)을 무시했으면 아버지의 마음을 거부한 탕자의 형의 사고방식과 같은 겁니다. 그래서 연기력만 뛰어난 겁니다. 대종상 연기대상 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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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까지 하고

위에 첫 번째 질문에 답변 3개중 하나만 길게 했는데

참 하나님 형상 회복 운동과 그리스도의 형상의 차이를 이야기 했나요?
성화론자들의 키 포인트가 하나님 형상 회복이죠. 그래서 연기를 하는 것임
그러나 그리스도의 형상은 정직한 영 곧 성령의 주도권으로 고난 곧 십자가의 좁은 길로 인도하는 겁니다. 매 맞는 길로만 골라 골라 인도하시는 거죠.
자발적으로 그 좁은 길로 가는 인간이란 아무리 장성을 하든 성화가 되었든 없습니다.
성령의 주도권이라는 말은 포착 불가 인식불가 이해불가 라는 뜻임
욥처럼 당할 뿐이고 바울처럼 가시 빼달라고 부르짖을 뿐입니다.
그 가시가 사단의 가시라는 것은 성령이 푹 수셔 넣었기에 안것이지 알려주지 않으면 바울은 자발적으로 알 길이 없음

그렇기에 죽음과 단절과 심판과 늑대소굴과 고난의 길과 좁은 길과 이 모든 의미의 종합적인 부정한 길로만 몰아가는 것이 성령입니다.(부정이란 상대적인 것임 깡패에게 부정한 길은 조폭세계가 아니라 아프카니스탄 선교단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그래야 자기 속의 성깔 다 나오는 거죠. 아무것도 못하는 겁니다. 이게 은사임. 죄인에게 부정한 길은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로 집어넣는 겁니다. 그래야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 그럼 나머지 두 개의 답변은

합당한 열매란 결국 죽음으로써 사망을 딛고 걸림돌을 딛고 실족하여 넘어졌으나 다시 일어나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그 반대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징계죠.
그리고 아들의 열매란 없습니다. 열매란 아버지의 열매가 그 사랑의 대상 긍휼의 대상인 아들 그 자체가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자기 열매를 어떻게 할까요? 자기 열매가 아니면 사생아 이겠지요. 자기 열매이기에 내 열매야 라는 증거가 바로 징계입니다. 같은 원리가 요 15장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성입니다. 가짜 열매와 진짜 열매의 대비로 드러냅니다. 편애와 미움으로 드러냄
(요 15:6, 개역)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성화론자들은 한마디로 열매주의에 목숨 거는데 이 징계와 전혀 상관없는 마일리지 많이 쌓기의 달인이 되냐 못되냐의 유무로 따지는 겁니다. 크냐 작냐 많냐 적냐 맨날 이런 장난 침

정작 주의 자녀는 매(징계, 사랑)가 날마다 날마다 다가옴에 (십자가 사건) 있어서 솔직하게 싫습니다. 아픈게 싫고 맞기가 싫고 구경꺼리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이 사실상 안 기쁩니다.

그러나 돌이켜서 아 이게 아니고 이거구나 라는, 뭐뭐뭐 보다 뭐뭐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는 것이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죽기까지의 복종임, 더 나은 제사. 그래서 두 아들 비유(탕자비유 눅15장 말고 다른 비유인 두 아들 비유 즉 마 21장 성전에서 상을 엎어버리고 강도소굴이라고 일방적으로 외치고 소경을 고치시고 호산나 아이들의 찬양에 짜증내는 대제사장과 서기관에게 말씀에 기록된 대로 되는 상황을 성경을 다루는 저들이 가장 방해자 맞구나 라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식으로 예수님이 기록된 말씀을 언급함 그러면 더더욱 저들이 가만히 있지 못함. 그들의 눈에는 이해불가. 이상하기만한 일만 보임

(마 21:15,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마 21:16, 개역)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아무튼 그 다음날 무화과 나무가 열매를 내지 않은 것에 저주하고 즉시 말라버리는 사건 그 다음에 나오는 사건이 두 아들 비유인데

(마 21:23, 개역)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마 21: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마 21:25, 개역)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마 21:26, 개역)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마 21:27, 개역)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마 21:28, 개역)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마 21:29,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마 21:30, 개역)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마 21:31, 개역)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뉘우친다 라는 회개 돌이키는 것이 법을 쥔 첫째아들보다 뉘우친 둘째가 낫다 라고

뭐뭐 보다 뭐뭐이 낫다 라는 식으로 증거합니다.

즉 첫째아들의 실상을 까발리고 그 모든 인간의 속성을 유대인을 대표자로 삼아서 까발렸고
마찬가지로 둘째인 더러운 개같은 이방인도 마찬가지 속성인데 돌이키는 순종의 영으로 인도함을 통해

이게 중요함 너희들이 더럽다고 하는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 보다 뭐뭐 보다 뭐뭐 낫다. 라고 하나님 나라를 두 패로 나누는 식으로 증거함. 심판과 구원. 미움과 편애. 진노와 긍휼
이런 두 부류의 갈라짐이 종말(성령의 일)인데 성화론자들의 특징은 이 갈라지는 두 패 나누기를 못하는 특징이 있음 지옥 심판 저주 등을 못 증거하는 이유는 미움받기 싫은 것임

예정을 말 못하는 이유가 예정(완료)이 안 믿겨지고 실상이 아니고
자아의 행동 유무만이 실상임 (미완료)

즉 제사 보다 순종이 낫다
제사 원치 않고 상한 심령
번제를 안 기뻐하고 인애와 자비를 원한다 는

뭐뭐 아니요 그것의 상대적인 새로운 이것이라는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피조물, 하나님의 형상 회복 운동 아니요 그리스도의 형상)

미래(인자)의 영광이 덮침(곧 십자가 사건이 완료이지, 체험 경험이라는 것은 여전히 미완료임)이 앞차 똥차를 뒤에서 새차가 삼키는 식으로 덮쳐서 미완료(의문의 증서)를 완료(새차 율법 외의 한 의)와 대비시키는 식으로 증거해야

편애와(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미움(강퍅케 할 자를 강퍅케 하는)을 언약이 이루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완료 즉 열매가 덮친적이 없기에 열매를 맺자 라고 열매맺기 운동인 미완료를 주장하는 것임. 열매 맺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미 완료된 열매가 덮쳤는데
미래의 영광으로 게임 오바 인데, 따로 국밥 차리고 있는 거죠. 그래서 뭐든지 운동, 운동, 무슨 운동, 무슨 운동 이라는 남들을 의식한 행동을 시스템화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워낙 안 믿겨지니깐요. 무슨 운동 펼치면 다 이단인줄로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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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훈련인데

위에서 언급한 경험 쌓기나 마일리지 쌓는다는 의미는 엉터리이다 라는 것을 언급했기에
다른 의미의 훈련을 살펴보면(물론 같은의미에서의 답변이지만)

(딤전 4:7, 개역)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딤전 4:8, 개역)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 4:9, 개역)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의 연습이라는 의미와

(딤후 3:5, 개역)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에서 능력 에 대해서 저도 좀 새로 알아야 겠습니다.

자 여기서 저는 두 내용을 합쳐서 그들에게서 돌아서는 것을 연습합시다 라고 말하고프네요

어떤 자들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

두 부분 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느냐 하면

자아 기준의 유무와 외부에서 주어진 사건의 벌리시는 영의 활동과의 차이를 알자 라는 겁니다.

경건의 모양은 위에서 말한 연기력이지요. 그러나 성령 곧 자기를 부인케 징계받는 길로만 인도하는 성령의 능력은 거부하는 자에게서 돌아서자 라는 겁니다.

성화를 왜 할까요? 자기 구원 챙기기입니다. 자기 유익입니다.

저는 이것을 시험과 미쁘심의 대립으로써 설명한 바 있습니다.
시험은 자기를 챙기면 챙길수록 안심이 되고 손해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겠지만
그 생각 자체가 이미 시험 들었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미쁘심이란 손을 놓아도 될 정도로 믿음직 스럽다 라는 외부의 의에게 전부 빼앗기는 겁니다.

챙김과 빼앗김

자기신앙 자기가 챙기면 챙길수록 자기의 선택권에 의해서 예수님도 내가 선택했기에 얼마든지 내 선택권으로 버릴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생각 바꾸기 위해서 믿음직 스러운 미쁘신 분이 나의 반대의 길로 가야만 합니다. 죽음의 길입니다.

손 놓아도 될 넉넉한 자유의 든든한 길입니다. 완료입니다.

미완료 꼬라지 주제에 남을 7번 용서 하다뇨? 차라리 7번 용서 받는 대상이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남을 용서할려고 하면 할수록 시험 듭니다.

반대로 미쁘심을 당하세요 남 용서하겠다는 발상 자체를 빼앗겨야 합니다.

이것이 경건의 능력인데 이게 광야 교회입니다.

물 없는 곳 양식 없는 곳 원망할 만한 곳으로만 인도함을 받는 겁니다.

즉 빈 털털이로 빼앗기는 훈련을 받는 겁니다.

이런 훈련 자발적으로 할 인간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당하는 것 뿐이요 당하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이 당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들이 경건의 모양새만 갖추는 겁니다.

그래서 징계를 원치 않는 것이 사생아의 특징인데

솔직히 말해서 아무리 봐도 내가 창기요 세리요 사생아 인데
주님은 나보다 경건의 훈련이 잘 된 성화론자들을 백범 만번 더 잘 훈련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양같은 자를 염소 만들었 뿌고 염소같은 나를 양 으로 만들었 뿌고

가라지를 알곡으로 알곡을 가라지로 만들었 뿌리는

도통 알 수 없는 이상한 일만 골라서 하는 그 이상한 일에 당하는 것이

종말이라는 전체의 판대기를 엎어버리고 규정하는 식이 성령의 일인 종말의 시대 상황이라는 겁니다.

두 아들 비유처럼 말이죠.

매 맞는 것을 누가 연습하겠습니까? 매조키즘 자학증 변태들도 아닌데 물론 성화론자들은 자학증세의 자기 뺨때기 자기가 때리고 그 댓가로 구원해 달라는 거죠.

그러나 매를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이 있다는 것에 미쁘심 곧 믿음직 스러운 든든한 사랑이 있다 라는 것을 사생아가 아닌 아들은 점점점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가 크다는 것을

죄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가 크면 클수록 상대적으로 점점점 알아가게 되는 겁니다.

어두움이 깊을수록 빛은 더더욱 그 가치의 진가를 드러내듯이

내 죄를 나의 비언약적 속성을 점점 지적당하는 그 관계 속에서 간섭을 받으면 받을수록
은혜가 이렇게 놀라울줄을 미쳐 모를 정도로 넘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것 마저도 전부 자기를 챙기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때 마다
시험이라는 미쁘심의 반대 상황에서 자아에게 미쳐버리고 갇혀 버립니다. 집착 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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