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책(말씀) 비록 버림받았으나 (시편 119)

 


(
10:8, 개역)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10:9, 개역)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10:10, 개역)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0:11, 개역)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119:103, 개역)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신약에서 시편 119편을 인용한 구절입니다. 

오늘 시편 119편을 보니 찬송가 나의 사랑하는 책 234장 과 달고 오묘한 그 말씀 235장이 생각납니다.

 

가장 긴 시 176절인데 내용은 한마디로 나의 사랑하는 하나님의 법이여 영원하라입니다.

앞의 글 106편에서 하나님의 인자 곧 인애와 자비하심이 영원하리로다 와 같은 의미입니다.

 

문제는 법이여 영원하라 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법이 아닙니다.

사랑의 법입니다.

지키는 법이 아니라 말이죠.

 

우리가 지키는 법은 지킬수가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법 자체가 법을 어기도록 한다는 거죠.

 

유대인들이 이 시편 119편을 통해서 하나님의 법을 얼마나 사랑했겠냐 말이죠.

그런데 그 사랑이 도리어 예수님을 죽인다는 겁니다.

 

너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 라는 것이

오늘 시편 119편의 하나님의 법이여 영원하라이고

시편 106편으로 치면 인애와 자비가 영원하리로다입니다.

 

자 여기서 생각할 것은 상대적인 것은 그럼 뭐냐

즉 한 세트를 이루는 비언약이 뭐냐 라는 겁니다.

 

곧 하나님의 법을 사모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방금 하나님의 법을 사모한 자들이 예수님을 죽였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법의 사모하지 않는 자들이 예수님을 죽여야 문자대로 맞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법을 사모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죽였으니 이게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시편 119편을 문자 그대로 보면

율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편 119편을 십자가를 거쳐서 다시 재해석하게 되면

시편 119편은 십자가만 외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강도만난 자를 레위인 제사장 다 그냥 지나쳤는데

사마리아인이 이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된다고 했습니다.

 

즉 레위인과 제사장이 왜 지나쳤겠냐 말이죠?

하나님의 법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부정한 시체를 만지면 율법에 의하면 부정하게 되니까 말이죠.

결국 율법 자체가 율법을 어기도록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의 철천지 원수 아닙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다 말이죠.

그런데 강도만난자의 이웃이 됩니다.

여기서도 율법 자체가 율법을 어기도록 한다 말이죠.


? 부정탄다는 생각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법을 지킬 이유가 없으니까 말이죠.

 

자 결국 예수님의 시선에서 이 강도만난자의 이웃

 

(10:36, 개역)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10:37, 개역)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10:38, 개역)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10:39, 개역)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10:40, 개역)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10:41, 개역)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10:42, 개역)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곧 십계명 곧 하나님의 큰 계명 두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를

누가 과연 제대로 지킬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답은 하나님의 법을 지킬수 있는 자는 없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자를 외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거죠.

결국 너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될 생각 하지 말고

너가 바로 강도만난 자이고 예수님이 바로 그런 선한사마리아인처럼 이웃이 되겠다는 겁니다.

 

이웃은 인간이 설정하는 이웃이 엉터리임을 아는 자만이 도리어 이웃을 바라게 됩니다.

 

주여 저를 돕는 이웃을 보내주소서 즉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라는 겁니다.

제가 남을 7번 용서할 입장이 아니라

제가 도리어 남으로부터 770번 용서 받아야 할 입장인

이웃이 나타나 주길 바라는 자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이 말은 사랑은 내게 없습니다 라는 겁니다.

다른 말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겁니다.

 

여기에 상대적인 비언약은 나는 의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자입니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결국 의문의 반복이 되고

의문의 제사를 반복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법의 원래 취지인 사랑을 바라는게 아니라

용서를 바라는게 아니라

용서 받는 위치를 오히려 무시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자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사랑하기 때문에

강도 만난 자의 시체 피 흘린 부정성을 과연 만질수가 있겠냐 말이죠.

부정타는데

 

이것이 바로 유대인 곧 사단의 회가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모습입니다.

 

누가 환자를 피 뭍히지 않고

부정을 만지지 않고 고칠수 있겠냐 말이죠.

인간들은 법 지키겠다고 거룩을 지키겠다고

부정을 만지지 않는 의사라고 우깁니다.

아니 전염병이 지금 돌고 있지만

그 위험을 만지지 않고 어떻게 고치겠냐 말이죠,.

의사가 그런 의사 봤냐 말이죠?

 

그래놓고 의사라고 우기고 그래놓고 건강한 자라고 우긴다 말이죠.

결백증 환자이지

 

그런자들에게 부정을 만지는 이 진짜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예수님을

곧 율법의 완성자 사랑의 예수님을 누가 방해하겠습니까?

맞습니다. 유대인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법을 안 지키면 몰라도

법을 지키기 때문에 더더욱 방해를 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마치 새누리당과 같다 말이죠. 공범이지요.

 

여기에 한 수 더뜨는 야당은 더더욱 불의한 것에 손을 못댑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국민이 더러우면서도 막상 자기가 뽑은 자는 더러운 짖 거짓말 하지 않기를 바란다 말이죠.

이런 국민의 어리석음을 깨뜨리지 못하는 자가 무슨 사랑을 하겠냐 말이죠.

 

국민은 그저 자기 배 부르는 것 밖에 모르는데 말입니다.

 

긍휼을 바라는 국민은 없어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자들 뿐입니다.

부자를 자꾸 공격 대상에 삼는데

새누리당이나 국민이나 다 똑같은 놈들이기는 마찬가지인데

과연 긍휼을 바랄까요

자기 배를 사랑할까요?

 

역시 유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사랑해서 사랑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 자기 배를 위하여 더 많은 이익이 된다는 계산을 한 겁니다.

 

사랑이 없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겁니다.

더 많은 이익이 된다는 계산을 했기 때문에 말이죠.

사회 구성원 자체가 그런 식입니다.

 

거기에 태클 즉 못때게 다리 걸어 실족케 하는 것이

예수님의 선한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사회자체가 종교화 즉 제사화가 된 사회에서는

이런 예수님의 비유가 기가막힌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마치 유교화 된 사회나

불교화 된 사회나

새누리화 된 사회나

아니면 그 반대인 전복시켜서 이룬 덜민주화된 사회나

예수님의 비유는 어차피 인간은 사랑 없이 법을 지키는 모습에

태클을 거는 겁니다.

 

오늘날 기업에서 신뢰, 신용이 생명이 된다고 우기는 기업윤리가 바로 그런 취지입니다.

외국인들인에게는 신뢰가 생명이 되는 기업이지만

내국인 곧 자국인에게는 호구로 아는 기업이니

이중적이다 말이죠.

어차피 사랑 없기는 마찬가지이니

껍데기라도 진정성 있게 만드는 겁니다.

여기에 다 넘어갑니다.

오히려 그 껍데기를 발달시키는 기술 트릭만이 발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철학이요 신학이다 말이죠.

그리고 그 규칙에 벗어나는 인간 가만히 두지 않는 겁니다.

즉 이 말은 그 규칙을 규정했기에 그 인간이 그 규칙을 어기면서

동시에 그 규칙을 고정화 한 것에 대한 껍데기를 강화 시키면서 말이죠.

 

어쨌든 인간의 세계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아예 땅에 소망두지 말자 말이죠.

자기 자신에게도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사랑이 가득한 모임을 만들려고 하는 것에 매달리지 말고

교회도 말이죠.

그냥 강도 만난 나에게 예수님의 사랑이 이유 없이 이웃으로 왔다 라는 것만 바라보자 말이죠.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참 재미있게도 이 십자가 사랑을 가장 싫어하는 집단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랑이 아닌

행함

실천

윤리

도덕

교리

신학

으로만 가득 채웠습니다.

십자가가 있을 자리가 없다 말이죠.

 

즉 이 말은 죄인은 없고

의인들

건강한 자

곧 의사가 필요없는 성화된 인간들만 가득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자들만 가득하다 말이죠.

얼마나 사랑했으면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주를 삼킬정도로 사랑하고 있고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에다가 저 세리와 같이 토색하지 않고

돈도 밝히지 않고 나라도 민족도 하나님도 팔아먹지 않는 매국노 친일파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오죽하면 그런 것을 내밀정도로 자랑하겠냐 말이죠.

아이고 똥 냄새

 

230만명이 모여서 똥내를 전세계적으로 자랑하고 있어요

또 그것을 방해하겠다고 100만명 모여라 라고 새누리 김진철 이놈도 같은 똥내를 풍기더라 말이죠.

 

둘 다 마귀들이지요.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ㅋㅋㅋㅋ

 

자기들이 뿅 맞아서 잠자고 있으면서

깨우겠다고 ㅋㅋㅋㅋ

 

실컷 있다가 이제야 윤리적으로 바꾸겠다고

얼마나 비윤리적이면 그런 말을 ~~~~~

 

아이를 위해서?

아이들이 웃습니다.

 

내가 이럴려고 태어났나 자괴감이 든다고 초등학생이 그러잖아요.

아이들은 대한민국을 위해서 태어난 자들이 아닙니다.

 

남을 7번 용서하는 삶을 살고자 태어난게 아니다 말이죠.

아이들은 평생 되도않는 겨우 7번 용서할려고 태어난게 아니라

 

평생 770번 무한대 용서 받는 삶을 위해 태어난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났다 말이죠.

그런 약속을 알려주는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부모인데

아무도 부모가 없어요.

 

십계명 곧 하나님의 법을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20:12, 개역)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라고 했는데

이 부모가 바로 출애굽한 곧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죽었다가 살아난 선지자 로써의 부모를 공경하라 라고 했다 말이죠.

 

문제는 그런 부모가 없어요.

실제로 유대인에게도 없어요

공경은커녕 그 부모를 다 죽여버렸어요.

선지자를 다 죽였다 말이죠.

다시는 그런 짖을 하지 말자 라고 하면서 또 죽여요

즉 인간은 이게 무슨 소리인지 무슨 의미인지

하나님의 말씀 곧 법이 무슨 내용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모르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법을 지킬수가 있냐 말이죠.

 

하나님의 법은 지킬수 없다 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도리어 지키고 있으니

예수님이 결국 최대의 적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자꾸 선지자를 보내니까

막 죽여요

선지자가 좋은 소리를 안하니까 말이죠.

 

그래서 세운 선지자가 거짓선지자 일 정도이니

왜 거짓선지자가 발생할까요?

즉 듣고픈 것만 듣고

믿고픈 것만 믿고

사랑하고픈 것만 사랑하겠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는 증거죠.

 

그러니 말씀과 고난이 항상 함께 가게 되는 겁니다.

참선지자와 고난이 항상 함께 하게 되는 겁니다.

 

결국 거짓선지자는 고난이 없다는 거죠.

 

고생하고 고난하고 다릅니다.

사랑 때문에 고난 받는 것과

 

법을 지키고자 고생하는 것은 정반대죠.

그래 너가 고생이 많다

 

그러나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나(고생하기 때문에)

너가 무시하는 싸가지 없는 동생 마리아는 좋은 것을 택했다

즉 사랑을 택했다 라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고난 받는다는 겁니다. 너 언니 마르다 로부터

사랑 없는 법 지키기 바쁜 고생하는 너 로부터 말이죠.

 

그래서 언니 마르다와 동생 마리아가 한 세트를 이루는 겁니다.

 

자 좋은 것을 택했기에

물론 택한게 아닙니다.

도리어 택함을 받았기에

고난 받는다는 겁니다.

 

사랑 때문에 말이죠.

 

그런데 법을 지키는 자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지킨 것에 따른 보상을 바란다 말이죠. 즉 계산하기 바쁩니다.

사회적으로 안정이 있으면 보상이 크고(금리가 높아지고)

사회가 불안전하면 보상은커녕 손해가 막심하다 말이죠.(저금리 시대)

 

시편 찬양자가 하나님의 법을 주야로 지키는데 오히려 실족하게 되더라

? 하나님의 법을 사모하지 않는 악인들이 더 잘되더라

죽을때도 너무 잘 죽으니까

오히려 사돈이 땅 사면 배 아파 죽듯이

하나님의 법을 이럴려고 지키나 라는 자괴감이 들더라 라고

낙심케 된다고 한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언제 이것이 반전 전복이 되는고 하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게 되니까

 

(73:17, 개역)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아 이게 그래서 그랬구나 라고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하나님의 성소는 예수님이다 말이죠.

건물이 아니라 인물입니다.

율법 외에 한 의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자들이 건축물 세우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데

그 지킴에 있어서 가장 쓸모없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지켜 버리면

물론 지킬수 없지만 지킨다고 치고 지켜버리면

앞의 것들이 다 사라지게 되는 블랙홀과 같아져 버리니까

계산 상 버릴 수밖에 없다 말이죠.

건축물을 세울수가 없어요.

모래성이 되니까

그래서 버렸는데

그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된다 말이죠.

 

이거 무슨 수로 계산하겠습니까?

 

어떤 누구가 성경해석을 순엉터리 수학계산공식으로 한다고 하는데

답은 맞다고 하더라 말이죠.

그런데 진짜 제대로 된 수학계산 공식이 마치 있는냥 말하던데

지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이고 그런 공식이 있다고 해 버리면 그 자체가 모순 되니까

공식을 말하지 못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제가 댓글로 그런 해석이 있으면 엉터리이다고 했지요.

 

인간은 그 어떤 공식을 만들어도 주님은 그 공식 피해가는 겁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지난 앞의 글에서 괴팍함이다 라고 했고

또 다른 말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사랑은 폭력입니다.

 

이유 없는데

자꾸 인간은 이유 있음을 만드는데 있어서

정식 공식을 만드는데 있어서

무자비하게 그 공식을 파괴하는 것이

이유 없는 사랑이다는 겁니다.

 

요즘 결혼하는 사람들은 미국을 따라하면서 결혼 서약? 계약? 뭐였더라

아무튼 조건을 서로가 내걸고 한다고 하더라 말이죠.

즉 이미 헤어질 것을 염두하고 하는 겁니다.

얼마나 똑똑합니까? 서로가 상처 받지 말고 헤어질 때 다른 사람을 만나는데 전혀 어려움없이

또 새출발하는데 있어서 아무 문제 없도록 하자 라는 식입니다.

마치 유대인의 약자보호법 이웃환대법처럼 보이지만

사랑이 없다는 거죠.

 

아예 속 편하게 초식남에서 요즘 금식남? 절식남이 일본에서 유행하더라 말이죠.

초식남 즉 온순한 남자를 넘어서

절식남

식욕 성욕(색욕) 욕망 자체에 아예 관심 없는 남자가 등장하게 되니까

여자 보다 더 여자 같은 여성의 등장으로 오히려 여자의 경쟁자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사랑이 없는채 법만 강하다 보니

아예 법에 저촉을 받지 않는 남자 아니 여자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미모가 여자 보다 더 뛰어나요

트레스젠더 저리 가라입니다.

 

즉 사랑 자체가 고난이 된다는 것을 잘 안다 말이죠.

그런 계산 법 외에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아예 여자를 욕망할 빠에 여자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여자-되기

그렇게 여성 보다 꾸미기에 전부를 걸어버리는데

여자에 대한 욕망이 있겠냐 말이죠.

계산해 보세요

투자한 것에 더 관심 두는데

 

유대인이 얼마나 자기들 신념에 투자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데 투자 했겠냐 말이죠.

그런데 고난이 없어요.

사랑이 없기에

 

마치 다윗은 안식일날 제사장만 먹는 진설병을 먹는데 있어서

이것을 율법을 어겼다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자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사울왕과

한 세트를 이루는 겁니다.

 

마귀가 세가지 시험으로 예수님을 시험하고 잠시 떠났는데

그 마귀가 바로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면서 지킨다는 유대인 곧 바리새인에게 들어가서

그 실체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비유는 그들의 하나님 법 지키기와 대조를 이루는 겁니다.

 

그럼 시편 119편은 사랑 없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유대인과 연결이 될까요?

그런 자들로부터 핍박받는 고난 받는 예수님과 연결 될까요?

 

사랑하기 때문에 고난 받는데 말이죠.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 고난이 오는데

도리어 핍박하는 위치인 유대인이라면 이 시편 119편을 지키는 유대인은

 

자기 꾀에 자기 배를 위하여 시편 119편을 이용한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우리는 가해자이지

핍박 받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법을 사랑한 적도

지킨 적도 없어요.

 

소위 수준높은 성화론자라고 우겨도 가만히 지켜 보세요

사랑 없이 하나님의 법을 지켜요

참 니들이 고생이 많다 말이죠.

 

그런데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주를 삼킨다 말이죠.

 

이거 해석하는 놈 못 봤어요.

 

왜냐하면 위에서 말했듯

부정한 십자가가

모든 인간을 가해자로 만들지

고난 받는 자로 만들지 않거든요.

 

교회에서 죽다?

도리어 교회에서 살인하는 놈이다 말이죠.

 

우리 모두는 교회에서 마저도 예수님을 죽이는 자들이다 말이죠.

 

이런 전제를 자꾸 없애버리고

죄인 죄인 고만좀 캐라 라고

없애버리고 언급을 하게 되니

선지자를 죽였던 장로의 유전을 따르지 말자 하고서는 그대로 역시나 또 따라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교회에서 죽다 라고 외치는 놈이

자기가 선지자 라고 우기기 때문이다 말이죠.

우리는 선지자를 죽이는 자이지

선지자가 아닙니다.

 

자꾸 선지자가 되고 싶으니까

막 살면 안된다고 우기고

촛불집회나 갈려고 하고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라고 고함 지르더라 말이죠. 어이 ~~~

 

하나님의 법 지킬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면 막 어길까?

 

그럼 언제 막 어기지 않았던 날 있던가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취지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진짜 사랑이 있는 자를 보자 말이죠.

되도 않는 자들이 하나님의 법 지키는 것 쳐다볼게 아니라

그것은 의문의 반복이요 모호하고 미흡하기 짝이 없는 것이고

진짜 제대로 또렷하게 명료하게 깔끔하게 다 이루는 사랑을 보자 말이죠.

 

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그러니까 저들은 이 십자가가 불편한 겁니다.

 

십자가를 쳐다보니

율법 잘 지키는 자기들의 존재 가치가 떨어지는 겁니다.

 

일부러 안식일날 고치니까

교인들이 딴데 가버리니까

헌금이 줄어들어요

십자가가

교회존재성을 떨어뜨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번제와 제사를 어떻게 드리냐 말이죠.

 

그러나 인애와 자비는 풍성하기 짝이 없어요.

 

그러니 더 나은 풍성한 제사 때문에

가인은 아벨을 죽여버리는 겁니다.

 

누가 누가 더 나은 제사냐 라는 문제에 걸려 넘어지니까 말이죠.

 

여러분 더 나은 제사 곧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를 쳐다 보라 말이죠.

그 어떤 교회도 그 어떤 예배로 그 어떤 제사도

 

예수님이 직접 드린 십자가에 비하면 족히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이니까

인간이 하는 것 쳐다볼 필요가 없습니다.

 

진짜 제대로 또렷한 구체적 보편성 진리는 십자가의 어리석고 부정한 불의함입니다.

 

이 십자가를 쳐다보지 않는 자를

시편 119편 기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무시하는 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119:20, 개역)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119:21, 개역)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에서 떠나는 자를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

(119:22, 개역) 내가 주의 증거를 지켰사오니 훼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119:23, 개역) 방백들도 앉아 나를 훼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를 묵상하였나이다

(119:24, 개역)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

 

(119:40, 개역)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119:41, 개역)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

(119:42, 개역) 그리하시면 내가 나를 훼방하는 자에게 대답할 말이 있사오리니 내가 주의 말씀을 의뢰함이니이다

(119:43, 개역)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119:51, 개역) 교만한 자가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119:52, 개역) 여호와여 주의 옛 규례를 내가 기억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

(119:53, 개역)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을 인하여 내가 맹렬한 노에 잡혔나이다

 

(119:81, 개역)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오히려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119:85, 개역) 주의 법을 좇지 아니하는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나이다

(119:86, 개역) 주의 모든 계명은 신실하니이다 저희가 무고히 나를 핍박하오니 나를 도우소서

 

(119:123, 개역)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

(119:131, 개역)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119:174, 개역)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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