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화평을 원하나 저희는 전쟁을 원하는도다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시편 120편)



(마 10:34,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시 120: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시 120:2, 개역)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궤사한 혀에서 내 생명을 건지소서』

(시 120:3, 개역) 『너 궤사한 혀여 무엇으로 네게 주며 무엇으로 네게 더할꼬』

(시 120:4, 개역) 『장사의 날카로운 살과 로뎀나무 숯불이리로다』

(시 120:5, 개역) 『메섹에 유하며 게달의 장막 중에 거하는 것이 내게 화로다』

(시 120:6, 개역)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와 함께 오래 거하였도다』

(시 120:7, 개역)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저희는 싸우려 하는도다』


(마 10:32, 개역)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마 10:33, 개역)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마 10:34,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5, 개역)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개역)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 10:37, 개역)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8, 개역)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 10:39, 개역)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 안되는 이유가 바로 이런 모순 때문입니다.

시편 120편 마지막 구절에는 나는 화평을 원하는데 저희는 전쟁을 원한다 라고 말이죠.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이것이 전복이 됩니다.

나는 화평을 주러 온게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말이죠.


이 모순을 무슨 수로 해결할수 있겠습니까?

결국 문자적으로 다시 말해서 유대인이 해석하는 그 방식을 의도적으로 반대하면서 말쑴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만 해도 글을 읽지 못하는 자들이 99%였다 말이죠.
글 문자를 읽는 다는 자체가 이미 금수저 귀족들에게만 내려오는 겁니다.

곧 문자 자체가 신분상승의 하나의 법이요 권력이 된다 말이죠.


그런 배경을 깔고 문자로써 오신게 아니라
말씀으로 오셨다는 자체가
인간의 신체인 문자를 넘어서는 겁니다.

문자도 오히려 이 말씀 앞에서 갈기 갈기 찢겨져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히 4:7, 개역)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히 4:8, 개역)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히 4:9, 개역)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히 4:10, 개역)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히 4:11,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히 4:12,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3, 개역)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4, 개역)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안식일에 관해 언급하다가 말씀의 운동력을 이야기 하는데 있어서

결국 안식일 지키기냐 아니면 안식의 주인이냐 라는 인물로 모아지는 겁니다.

결국 이 인물을 안쳐다본다는(순종치 않는) 자체가, 그 인물을 안 보고 문자를 해석하고 실천하는 자기라는 인물 밖에 모른다는 것을 들추어냄이다 말이죠.)



이 시편 120편은 여러 설의 배경이 있더군요.

120편과 121편이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가 죽을 즈음에 적었다고 하는 배경이 있고

또 바벨론 포로 이후에 돌아와서 성전에 들어갈때에의 기록이라는 설도 있고


다윗이 바벨론 포로 이후의 시간적 간극이 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을 썩은 입장도 있고

그렇다 말이죠.

그러니 사실상 저도 모르겠지만 이들도 이 배경에 대해서 알수 없다는 식이다는 거죠.


아무튼 다윗이 기록한 것은 맞다고 하는데

그 다윗을 기준으로 해서 나 와 저희 

이렇게 둘 로 나눌수 있는데

또는 바벨론 포로 이후에 돌아와서 성전에 드디어 들어가게 되는 그 이스라엘과

주변의 나라들 메섹과 게달로

나와 저희로 구분한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시 120:5, 개역) 『메섹에 유하며 게달의 장막 중에 거하는 것이 내게 화로다』


즉 메섹은 셈의 세 아들중 야벳의 아들로써 야만민족인 즉 형제 두발과 함께 싸움을 즐기는 민족이고

게달은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로써 역시나 아라비아 광야의 유목민(산적떼) 로써


다윗은 이들과 부딧힌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급하는 것은 비유로써

자신[나]과의 적대적인 [저희]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화평을 원치 않고 전쟁을 좋아하는 자들을 상징한다고 볼수 있는데


이것이 다윗이 [나]와 [저희]로 나누었듯이

예수님을 거쳐서 다시 시편을 보게 되면

다윗이 말한 저희는 결국 사울왕의 사고방식의 세력들이라고 볼 수 있다 말이죠.


바로 앞의 글에서 사데 교회를 언급했는데

교회를 둘 로 쪼개어서 나와 저희로 나누듯이

교회 속에 교회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로 나눈다 말이죠.


거기서 저희의 교회는 살아있다고 주장하나 실상은 죽은자 곧 사울왕과 같은 사고방식의 패거리 이다는 겁니다.

두아디라 교회 식으로 하자면 거짓선지자 이세벨을 쫏는자 곧 음행 곧 바알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자 이다는 거죠. 힘을 쫏는


그럼 저희라는 전쟁을 추구하는 저희와 상대적인 나 곧 화평을 원하는 나 로써의 교회

선지자 다윗은 무엇을 주장하는가?

두아디라 교회처럼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이세벨의 교훈을 쫒지 않는 자요 교회 속의 교회요

사데 교회처럼 흰옷을 입고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이스라엘 속의 이스라엘이다는 겁니다.


결국 지금 다윗의 시편 120편으로 치자면

사울왕 패거리 곧 메섹과 게달처럼 전쟁이라는 힘을 쫏지 않는

저희들과 구분이 되는 화평을 원하는 나(다윗) 로 구분이 된다 말이죠.


그럼 이것이 예수님에게서는 어떻게 바뀌는가?

로마(전쟁으로 세운 국가)와 손잡고 화친을 도모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에게 마저도 그런 야만족과 화친코자 손잡듯 예수님에게 손 내밀때에

진짜 화평은 오히려 저들 야만족과의 전쟁(전쟁 보다 더 나은 전쟁, 인애와 자비의 전쟁, 십자가 전쟁)이다 라는 식으로


나와 저희를 구분해서

나는 저희의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게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진짜 화평이다 말이죠.

야만족과 손 잡지 않는 것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윗을 죽일려고 이방민족과 손 잡죠

바로 사울왕 패거리가 말이죠. 이스라엘 99.999 % 가 말이죠.


그 나머지 만이, 잉여만이, 찌끄래기 만이 [저희]들과 손 잡지 않는 이유로 인해

공격을 당한다고 합니다.



(마 10:34,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5, 개역)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예수님께서 괜히 시편 120편의 문자에 반대로 증거하시는게 아닙니다.

마태복음 10장 초반 구절에


(마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그냥 이스라엘에게 전하라가 아니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라고 하신다 말이죠.
잃어버림을 강조하신다 말이죠.


(마 10:7, 개역)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마 10:8, 개역)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여기서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앞의 글 시편 107편에서 누가복음 4장의 희년 선포하심에 있어서 이 말씀이 너희 귀에 응했다 라고 선언해 버립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너희 귀에 응했다고 라고 하신 그 너희가 바로

말씀이 응하는 것을 싫어하는 자인(인애와 자비를 원치 않고, 번제와 제사를 원하는, 전쟁을 원하는, 경쟁 또는 힘을 원하는)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다는 거죠. 즉 사울왕 세력과 같다 라는 겁니다.
야만민족인 전쟁을 즐기는 자들과 손잡고 화친하는 자들 말이죠.

계시록 일곱교회로 치자면 힘을 쫏는 거짓선지자 발람 또는 이세벨, 또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 말이죠. 곧 사단의 회(유대인) 입니다.


왜 그런 자들에게 말씀이 응했다 라고 말씀 하실까요? 어차피 말씀이 응했다는 거부하고 말씀 지키기만 고수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잘 아시면서 말이죠.

[나]와 [저희] 로 구분하기 위해서 입니다.

즉 당연히 [말씀 응했음]을 발로 차버릴줄 아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는 말씀이 응하는 것을 듣지도 보지도 않습니다. 원치 않아요.

그저 말씀 지키기 때문에 살인을 하는 가인과 같습니다.
아벨의 제사가 말씀이 응하심의 더 나은 제사라는 것을 아예 안쳐다본다니깐요.

지키기 바쁜데 과연 시선이 돌아가냐 말이죠.

손님 대접하겠다고 착하디 착한 마르다는 그래서 많은 일로 근심하지만

싸가지 없는 마리아는 좋은 것을 택해서 빼앗기지 않는다고 하시는 겁니다.

(눅 10:38, 개역)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눅 10:39, 개역)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눅 10:40, 개역)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눅 10:41, 개역)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눅 10:42, 개역)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자 이렇게 말씀이 응했다 더 이상 지킬 것이 없다 라는 식으로 선언하게 되면

가장 누구와 부딧히게 되는고 하니

바로 이스라엘의 사울왕 패거리와 부딧히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충돌의 예(다윗[나]과 사울왕[저희]의 충돌)를 다시 예수님이 재현하는 사건이 바로 안식의 주인 사건입니다.

(마 12:4, 개역)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막 2:26, 개역)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눅 6:4, 개역)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마 12:1,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마 12:2, 개역)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마 12:3,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마 12:3,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굶주렸을 때에, 다윗이 어떻게 했는지를, 너희는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 ㉠삼상 21:6』

(마 12:4, 개역)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마 12:5, 개역)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마 12:6,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마 12:7, 개역)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마 12:7, 새번역)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너희가 죄 없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 ㉢호 6:6』

(마 12:8, 개역)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마 12:9, 개역)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마 12:10, 개역)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마 12:1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마 12:12, 개역)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마 12:13, 개역)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마 12:14, 개역)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마 12:15, 개역)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마 12:16, 개역)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

(마 12:17,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마 12:18, 개역)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마 12:18, 새번역) 『㉤"보아라, 내가 뽑은 나의 종, 내 마음에 드는 사랑하는 자,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것이니, 그는 이방 사람들에게 공의를 선포할 것이다. / ㉤사 42:1-3』

(마 12:19, 개역)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마 12:20, 개역)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마 12:21, 개역)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 12:21, 새번역) 『㉥이방 사람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 것이다." / ㉥사 42:4(칠십인역)』

)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는 이런 사단의 회 라고 보시면 됩니다. 99.99999...%


그래서 예수님이 이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이 생겨서

물론 당연히 복음을 증거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멀쩡하기 짝이 없고

오히려 소통이 가능하기에 서로가 배려할수 있는 그런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말이죠.

그런데 복음만 증거했다 하면 멀쩡하던 인간이 마귀로 돌변합니다.


(마 10:9, 개역)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마 10:10, 개역)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마 10:11, 개역)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마 10:12, 개역)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마 10:13, 개역)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마 10:14, 개역)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마 10:15,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 10:16, 개역)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즉 복음 증거 자체가 평안을 비는 겁니다.

그 평안이 그 집에 그 사람에게 합당하면

그 평안이 즉 성령이 그에게 임할것이고

합당치 않으면 평안이 나에게 되돌아 온다 말이죠.


문제는 평안이 나에게 되돌아 올때에

저희들은 평안을 발로 차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니 누꼬 어디서 굴러온 뼛따구야? 오 너 얼굴 낯이 익네 맞아 너 요셉의 아들이지?

뭐 그런데 뭐 이 말씀이 너희 귀에 응했다고?

(눅 4:16, 새번역)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나신 나사렛에 오셔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는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서서』

(눅 4:17, 새번역)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 받아서, 그것을 펴시어, 이런 말씀이 있는 데를 찾으셨다.』

(눅 4:18, 새번역)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 ㉤사 61:1; 2』

(눅 4:19, 새번역)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눅 4:20, 새번역)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주시고, 앉으셨다.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은 예수께로 쏠렸다.』

(눅 4:21,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눅 4:22, 새번역)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눅 4:23, 새번역)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내게다 끌어대면서,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해보시오' 하고 말하려고 한다."』

(눅 4:24, 새번역)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눅 4:25, 새번역)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 시대에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서 온 땅에 기근이 심했을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들이 많이 있었지만,』

(눅 4:26, 새번역) 『하나님이 엘리야를 그 많은 과부 가운데서 다른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시돈에 있는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셨다.』

(눅 4:27, 새번역)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서 아무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고침을 받았다." / ㉥나병을 포함한 악성 피부병 ㉦그, '깨끗하여지다' ㉧그, '깨끗하여지다'』

(눅 4:28, 새번역)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 모두 화가 잔뜩 났다.』

(눅 4:29, 새번역)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눅 4:30, 새번역)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희년을 거부하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포로된 자 갇힌 자 억눌린자 고아 과부 나그네에게 자유를 주심에 있어서

저희들이 거부하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고아 과부 나그네가 되지 않음에 있어서
그들 고아 과부 나그네를 싫어하는

핍박자로 나서게 된다는 겁니다.
즉 전쟁을 원하는 자로 들통이 나는 겁니다.
인애와 자비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거부하면 중간에 있는 중립자가 아니라

고아의 상대적인 위치에 놓인다는 거죠.


다윗을 영접치 않는 것은

곧 다윗을 악인의 손에 넘기우는 것과 같다 말이죠.


(마 10:17, 개역)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마 10:18, 개역)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이렇게 야만인에게 넘겨움을 당하는 것이

오히려 화평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된다는 겁니다.

참 희한한 복음전파이지요?

구체적 보편성이기에 그렇다 말이죠.


이런 부정적인 충돌의 상황이

긍정적인 것만 전파 되기를 바라는 전도자에게

그게 아니라 부정적으로 나(다윗) 자신이 넘기움을 당한다는 자체가

복음이 전파되는

화평케 하는 복음이 전파 되는 식이다는 겁니다.


오늘날 전도, 선교관과 정반대이지요.
그것은 불교의 포교와 다를바 없는 거죠.

그러니 화평을 주러온게 아니라

검을 전쟁을 주러 왔다는 겁니다.

 

평안을 빌라 라고 했잖아요

왜냐하면 전쟁의 마침이 평안이거든요.

그런데 전쟁이 끝난줄도 모르,고

이 평안을 거부하면

중립상태로 끝나는게 아니라

이미 끝난 완료된 이미 말씀이 응해 버린 그 완료에

미완료로써 말씀지키기 라는 의문의 반복을 주장함으로써

이미 말씀이 응했음을 거부하는 식이다는 겁니다.

그래? 전쟁을 원한다 이거지?
전쟁의 마침 화평을 원치 않는다 이거지?
인애와 자비를 원치 않고
제사와 번제를 원한다 이거지?

여기에 주님은 이 인애와 자비인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고
절대 양보 못하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충돌할 수 밖에 없지요
이미 넉넉하게 이긴 승리인데
그 승리에 또 덤벼들고 있으니 말이죠.
뻔한 결과인데 그 원인 없는 결과를 수용하지 못하겠다고 때쓰는 겁니다.


자 이렇게 [나]와 [저희]에서 저희들은

이미 완료된 화평을

미완료취급을 함으로써

도리어 이 화평케 하는 복음에 시비를 거는 모습이 되는 겁니다.


이미 끝난 게임인데 다시 비디오 돌려서 다시 축구게임 하자고 한다 말이죠.

백날 리셋 해본들 혹시나가 역시나입니다.


미래 완료로 끝났는데 뭘 또 다시 되돌리기를 하냐 말이죠.


그러니 바보 같이 도리어 말려드는 꼴이다 말이죠.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끝났는데 이 수건을 안 벗겠다는 똥고집은 과연 어디서 왔냐 말이죠.

선민이라는 수건

나는 구원받은자 이다 라는 수건

요즘 신학들이 다 그런 식입니다.

인간 구원용인 완악한 수건으로써의 신학과 철학이다 말이죠.

이미 끝났는데 말씀이 응했는데 뭐가 억울하다고 촛불집회 라는 그 의문의 제사를 반복하냐 말이죠.

또 그 촛불집회에 맞불집회를 하겠다는 놈도 역시나 똑같은 놈이고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데? 배달의 민족???

세상에 민주주의 곧 평화를 주러 온게 아닙니다.

검을 주러 왔다 말이죠.


이미 말씀이 응한 것이 이들에게는 없기 때문에

의문의 제사를 반복하는 겁니다.


정의라는 이름의 사단의 회에게

화평을 주러 온게 아니다 말이죠.

그들은 복음을 영접 할수 조차 없어요.

이미 복음을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복음이 자기에게 합당할때만 받아들이겠다는 사단의 회 이다 말이죠.


이미 정의가 완료가 되었는데 뭘 또 정의를 구현해???

정의구현사제들이 그래서 운동 뭐시기를 하는 겁니다.

구국운동 시국운동 하나님나라 돌려도 운동 말이죠.


이들은 야만족과 같아서

평안을 빌어본들 스스로가 거부한다 말이죠.

그럼 고맙죠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자들에게 이 평안이 돌아가는 겁니다.


친일파 청산 운동을 펼치고 있으니 아마 평안이 친일파에게 넘어가겠죠.


자 이런식으로 화평을 주러 온게 아니라 검을 주시는 겁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자를 넘기우는 겁니다.


왜? 거짓선지자의 교훈을 쫏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들 거짓선지자의 손에 빼내시는 방법이 바로

바벨론 포로 당하게 하시는 겁니다.


참으로 신기하게 그 많던 바른 소리하던 정의를 외치던

평강 평강 평화 평화를 외치던 평화집회를 하던

거짓선지자들이 단 하나도 안 남고 다 사라집니다.


이것이 주님이 저들의 손에서 빼내시는 방법이다 말이죠.


저희들이 넘겨버리면 넘기움을 당하라 말이죠.

이것이 도리어 이방인에게 증거가 되는 겁니다.


고향 이스라엘에서 영접받지도 않던 선지자들이

이방인들에게 영접 받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런 노선으로 가시는 겁니다.

지금도 유대인이 아무리 성경을 쥐고 있어도

시편 120편을 달달 외워도

때려죽어도 예수님을 믿을수 없는 이유입니다.


자신들이 야만인인줄도 모르고

화평을 이용해서 주변의 야만인과 손잡고

다윗을 떠 넘겨버린 줄도 모르고

여전히 다윗의 자손이 오기를 바라고 있다 말이죠.

즉 지키고 있다 말이죠. 말씀을 지키고 있어요


그런데 말씀은 이미 응해버렸습니다.

그 응한 말씀을 못 보기 때문에

자신이 야만인처럼 예수님을 다윗을 넘기운줄도 모르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구체적 보편성의 진리 지혜는

남이 아닌 내가 예수님께 야만인처럼 굴어서 넘겨버린 사실을 들추어내는 지혜입니다.


오히려 이방인은 이 예수님을 어찌할꼬 우리가 예수님을 죽였꾸나

그러나 주님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평안의 복음 앞에

무릎꿇게 하심으로써 구주로 영접을 했지만


유대인들은 이 시편 120편을 아무리 달달 외우고 달달 지켜도

결국 남 이야기 이다는 겁니다.

예수는 저희들에게서는 그저 남 일 뿐입니다.

이 관계성을 다윗은 예수님을 보고서 외치고 있습니다.


나 예수는 화평을 원하나

저희는 전쟁을, 힘을 원하는도다

(마 12:3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 12:39,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표징 밖에는, 이 세대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 12:39, 공동)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악하고 절개 없는 이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마 12:39, 한글킹)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찾으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줄 표적이 없도다.』

(마 12:39, 현대어)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악하고 믿음이 없는 세대일수록 더욱더 증거를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에게 일어났던 이적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

(고전 1:22, 새번역)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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