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 아시죠!! (시편 139)

선한 목자와 양의 관계, 그리고 도적과 강도, 삯꾼 목자와의 차이

14-139 내 이름 아시죠!! (시편 139편).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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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개역)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10:2, 개역)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10:3, 개역)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10:4, 개역)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10:5, 개역)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10:6, 개역)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10:7, 개역)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10:8, 개역)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10:9, 개역)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10, 개역)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0:11, 개역)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0:12, 개역)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0:13, 개역)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0:14, 개역)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0:15, 개역)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0:16, 개역)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0:17, 개역)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0:18, 개역)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0:19, 개역)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10:20, 개역)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10:21, 개역)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139: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139:2, 개역)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139:3, 개역)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139:4, 개역)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139:5, 개역)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139:6, 개역)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139:7, 개역)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139:8, 개역)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139:9, 개역)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139:10, 개역)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39:11, 개역)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39:12, 개역)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139:13, 개역)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139:14, 개역)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39:15, 개역)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139:16, 개역)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39:17, 개역)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39:18, 개역)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139:19, 개역) 하나님이여 주께서 정녕히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139:20, 개역) 저희가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헛되이 주의 이름을 칭하나이다

(139:21, 개역)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한하지 아니하나이까

(139:22, 개역) 내가 저희를 심히 미워하니 저희는 나의 원수니이다

(139:23, 개역)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139:24, 개역)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인간이 예수님을 아는 방식인 오감을 체험으로는 예수님을 알수가 없습니다.

젊었을 때 알던 그 예수님이 늙었을때의 알던 예수님과 다릅니다.

예수님 자체가 달라진다는게 아니라

인간 자체가 육에 갇혀 있기 때문에

어제 알던 예수님도 육체의 상태에 따라 오늘 예수님도 달라지는 겁니다.

 

베드로가 좀 전까지만 해도 물위를 걸으면서 알았던 예수님과

물에 빠져서 알게된 예수님이 너무 너무 달라서

도대체 당신 누구십니까? 라고 도통 모르겠다 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다면 적어도 나는 예수님을 안다 라는 소리를 할텐데

310100년을 따라다녀도 도통 누구인지를 알길이 없다는 것이

제자들의 결론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자신을 알리는 방식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문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문 도어 비밀번호 띡띡띡 눌러야 들어갈수가 있으니

이 비밀번호를 무슨 수로 알겠습니까?

그래서 스마트폰을 담배갑에 몰래 숨겨 촬영해서 문따고 들어간다고

바로 얼마전의 뉴스를 보고 했는데

그것을 오늘 본문에 강도 도둑놈 절도 삯꾼 거짓목자 등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단절의 단절의 상태이면 오죽하면 담을 타넘는 비정상적인 방법을 취하겠습니까?

 

문으로 통할려고 하지 않는 겁니다.

그야 당연히 비밀번호가 걸려 있으니 못들어가거든요.

 

그럼 이 문을 정상으로 통과하는 방식이 뭔고 하니

삼일이라는 간극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삼일이라는 간극이라는 문이 아니면 다른 통로는 없다 말이죠.

바로 십자가입니다.

한때 두때 반때

엘리야 선지자가 비오지 않기를 삼년 반 동안 기도했다 말이죠.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인데

삼년반 딱 지나니까 다시 비오기를 기도하니까 비오더라 말이죠.

어차피 비오게 할꺼 말라꼬 이 삼년반이라는 간극을 두셨을까요?

다니엘서에서 나오는 표현인데

한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죄악 때문에 바벨론으로 포로 당하는 기간입니다.

두때는 이유 없이 짖밟히는 기간이고

반때는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신나게 밟히는 기간이다 말이죠.

결국 한 때 두때 반때는 지근 지근 밟히는 기간인데

바로 어무이 말마따나 광야로 피신해서 아기를 양육하는 기간이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태어난 겁니다. 성도는 말이죠.

그 나머지 인간은 모조리 다 저울에 매달아 보니 부족하다 함량미달이다 라고 하는

짐승의 수,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의 수이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666입니다.

 

여기서 빼내어서 주님을 찬양하게 만든 상대적인 수가 바로 십사만사천이다 말이죠.

주님을 찬양하는 자입니다. 이 새노래를 부를 자들이 이들 밖에 없다는 겁니다.

배울려고 해도 못 배우는 새노래를 부르는 자들입니다.

? 그들이 바로 한때 두때 반때 라는 간극에서 양육받았거든요.

 

그래서 안다 라고 했을때에

문을 통과 할때에 비밀번호를 배울수가 알길이 없는데

이 삼일의 간극이 바로 문의 안과 밖을 자유롭게 왕래할수 있는 통로가 되는 유일한 길이다는 겁니다.

 

반대로 상대적으로 알지 못하는 자는 담을 타넘어서 강도짖으로 절도하는 도둑짖으로 안다 라는 관계성에 놓여지지 못했기에 얼마나 단절이 되었으면 그렇게 해서라도 단절성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단절

그래서 예수님이 직접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일일이 찾아가셔서

부르시지 않는 이상

제자들은 각기 제길로 가는 양같은 신세로 엠마오로 돌아가고

어부의 길로 다시 고기 잡으로 가고

뿔뿔히 흩어지는 겁니다.

모으는 자가 없고

자발적으로 모일려고 해도

저 로마 그리고 더하고 더한 유대인들의 살기에 맞설수가 없기에

각기 제길로 가는 양 같아서

목자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이상

양은 목자 없는 양 같아서 뿔뿔히 흩어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 정도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말이죠.

 

그리고 다시 살아나셔서 목자의 음성을 나타내심으로써

양을 모으시는 겁니다.

그 목자의 음성을 듣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에

목자도 양의 이름을 알아서 일일이 찾아가셔서 모으신다 말이죠.

이 관계성을 문 이라고 합니다.

통로 라고 합니다.

 

그런데 삯꾼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리가 있겠습니까?

늑대가 나타나면 자기가 제일 먼저 도망을 친다 말이죠.

 

그러니 문으로 통하지 않고 도둑놈과 강도처럼 담 타넘고 뒷문으로 온다는 겁니다.

 

왜 이 십자가라는 문을 통과하지 않을까요?

 

오늘날 거짓목자와 거짓백성의 특징입니다.

 

제가 어머니께 이 십자가라는 문 곧 예수님이라는 문을

시편에서는 주의 인자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유일한 것은 주의 인자하심 뿐이다 라고 말이죠.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으로 한때 두때 반때 지근 지근 밟아버리지만

아침에는 주의 인자하심으로 다시 살리시는 겁니다.

 

이것을 저 원수들은 통과하지 못하는 겁니다.

아침의 새벽을 맞이할 수가 없더라 말이죠.

만족함이 없이 그 허기진 배를 채우고자 하이에나처럼 배를 곪아서 이리저리 닥치는 대로 먹이를 찾아나서지만 먹어도 먹어도 더욱더 밑빠진 장독대에 물 붓기처럼 더욱 목마르고 잠을 잘수가 없는데

 

주의 인자하심으로 원수를 피해 주의 이름이라는 피난처로 도망친 다윗은

잠을 푹 자고 일어나 아침을 맞이하는 겁니다.

그 어두운 밤을 캄캄한 밤을 통과해 새벽을 맞이하는 겁니다.

간밤에 주님의 얼굴을 보고도 타죽지 않았다고 샬롬 샬롬 하는 겁니다.

내가 안식일을 지켜서가 아니라 안식의 주인이 봐줘서 날 태워죽이지 않아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살아났다는 겁니다.

무지 무지 참으시고 봐줘서 그 심판의 주께서 심판하셔도 상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긍휼히 여기셔서 살려주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안식의 주인을 만나는 자 그래서 찬양하는 자입니다.

얼마나 안식의 주인이 섬겼으면 770번 용서해줬으면 찬양을 하겠습니까?

일부러 저 안식일을 지키는 자 코 앞에서 성전앞에서 강도의 소굴 앞에서

보란 듯이 손마른자를 고치시니까 안식일을 지키시는게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는자 코 앞에서 안식을 다 이루어버려서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도록 하시니까

그 병고침 받은자는 얼마나 고래 고래 고함을 치면서 찬양하겠습니까?

예배드리는데 방해한다고, 안식일 지키는데 훼방된다고 
아무리 그 병고침받은자를 끌어내고 쫏아내어도

이 찬양을 막을 길이 없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피 용서를 막을 길이 없는 겁니다. 다른 길이 다른 문이 없어요.
이 십자가가 라는 문이 밝히 보이는데 어디 딴 문이 있다고 사기를 치냐 말이죠.

 

저들을 저울에 달아서 측량 미달에 해당되는, 의문의 해당되는, 안식일을 지키는자 코 앞에서

저들 666 짐승의 표를 받은자 코 앞에서

끄집어내어서 144000명에 해당되는 어린양에 속한 자

곧 새노래를 부르는 안식의 주인으로부터 건짐을 받은자 섬김을 받아서

고침을 받았을때에 새노래를 부르니

우리가 못 부르는 새노래를 왜 니가 뭔데 부르냐고 달려들어서 쫏아내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과 다시 3일만에 다시 사시는 부활이라는 간극을 통해서

저들이 지옥간 부자처럼 이 간극을 무시하는 모습이고

이쪽은 아브라함 품에 안긴 거지나사로처럼 아브라함이 다 알아서 변호하듯이

예수님이 다 알아서 변호하시고자 이 간극을

부자와 거지나사로의 간극 건널수 없는 이 큰 구덩이를 강조하는 겁니다.

이것이 문입니다.

통로입니다.

이 통로를 무시하고 담을 타넘는 자들이 바로

되도않는 미흡한 의문의 것을 반복하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그런다고 이 문을 무시하지 않는 것일까요?

 

뭘 해도 통과 못합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해야할 판국에

어쩌면 강도짖을 자랑하듯이

담 타 넘는 방법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다른 문이 없는데도 말이죠.

 

안다 라는 것은

바로 이 문을 통하는 관계

그래서 목자는 양의 음성을 알고 양의 이름을 알고

그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아는 관계

 

주께서 내 죄 대신해서 십자가 지셨지요? 라고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는 너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은 것은 너를 미워함이 아니라

나를 미워해서 그런 것인데 내가 세상이 악하다 라고 증거했기에

내 원수로부터 미움 당했다고 양의 이름을 안다고 하는 겁니다.

 

이 둘의 관계가 바로 십자가로 맺어진 관계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참선지자는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자꾸 비오지 않기를 삼년반 동안 비오지 않도록 기도하는 겁니다.

왜 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 거는 것일까요?

왜 이 간극을 만들려고 목숨걸까요?

 

다들 무시하는 헬라인은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피하고

유대인은 거리끼는 걸림돌이라고 넘어진다고 실족한다고 피하는

이 간극을 왜 구지 사람들이 싫어하는 부딧히는 돌을

박아버릴까요?

 

이 얼룩을 아무리 빼낼려고 해도 빼낼수가 없는 겁니다.

 

그 아름다운 그림이 새까만 얼룩이 그만 모든 시선을 다 빼앗아서

그 아름다운 그림을 감상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상 그 얼룩이 가장 아름다운 숭고함이다 말이죠.

새빨간 김칫물자국이 그 새빨간 핏자국이 말이죠.

 

그 아름다운 안식일 지키는 그림을 다 망치는 겁니다.

그런데 더더욱 아름다운 것은 안식의 주인이 안식일날 손마른자를 고치시는 그 주의 인자하심

이 간극 이 보이지도 않는 얼룩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름다운 그림을 못 보게 하는

그 작은 얼룩이 가장 선명하게 크게 확대확장 되면서 빙빙빙 도는 회오리처럼

히치콕 영화 현기증처럼 빙빙 돌아서 그 작은 구멍이 전체그림을 넘어서 초과잉적으로 더 크게 보이는것처럼 이 거지나사로가 더더욱 크게 보이고

안식일날 고치시는 손마른자의 병을 고치시는 그 주의 인자하심이

비이지도 않던 얼룩이 점점커져서 우주에까지 확장되는 그림액자 테투리를 넘어서버려서

우주에까지 주의 인자하심 곧 안식의 주인이 섬기시는 그 행함이 있는 믿음이

더더욱 크게 보이도록 하시는

이 간극을 노래하는 자가 바로 오늘 다윗의 시편 139편입니다.

 

내 이름 아시지요 주님???

 

마치 베드로가 마귀에게 잡혀와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죄로 이제 더 이상 마귀에게 빼도박도 못하게

밀까부듯이 초정밀조사해서 그 어떤 이유로도 빠져나올수 없는 명백한 증거로

잡혀와서 더 이상의 반박 더 이상의 변호도 소용없는 완벽한 죄인 됨 앞에서

 

주님은 베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너 나 알지

나 너의 목자야 베드로 너 내 음성 알지? 너 나 사랑하지 라고 먼저 물어주심 앞에서

 

어딜 감히 마귀가 이 주의 사랑에서 끊겠냐 말이죠.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아십니다 라고

 

마귀가 도저히 통과 할수 없는 문

그 문을 노래하는 겁니다.

바로 십자가의 사랑으로 만든 그 3일이라는 간극의 문을

노래하는 겁니다.

 

그 심판의 불 속에 들어가서 주를 노래하는 겁니다.

그 광야라는 죽음 속에서

십자가 속에서 주를 노래하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마귀에게 잡혀 오라는 겁니다.

이 십자가를 노래하라고

자랑하라고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마귀 너가 뭐 날 잡아와?

마귀 니는 나 베드로 미끼를 확 물어버린 것이여!!!

 

주여 주님께서 미워하시는 원수 잡아왔습더

 

마귀는 아니 내가 베드로를 잡아왔는데

왜 베드로를 마귀 보는 앞에서 찬양의 옷을 입히시고

거룩한 옷으로 신부 꽃단장을 시키고

그 신부는 신나게 주님의 피를 노래하는지

마귀는 기가막히고 코가 막혀 적반하장으로 내가 잡아왔다고만 외칠뿐이지

말을 못해요 말을

 

그럼 새노래를 불러 보던가?

알아야 부르지!!!!

 

오늘 시편 139편을 다윗이 신나게 노래 부르는 겁니다.

나를 아시는 주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냥 아는게 아니라

목자는 양의 음성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아는데

이 둘의 관계가

바로 문 통과하는 문으로써

가짜 목자와 가짜 양과의 차이성으로

가짜들은 이 문을 왔다갔다 열고 다니지를 못하고

엉뚱하고 멀쩡한 문 놔두고 담을 타넘고 다닌다는 겁니다.

이 문을 통과하지를 못하더라 라는 겁니다.

 

이 문이 바로 십자가라는 주님의 용서 곧 피로

피가 발린자

인 맞은자

 

(7:4, 개역)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7:5, 개역)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6, 개역)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7, 개역)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8, 개역) 스블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즉 인간이 도저히 세울수 없는 새이스라엘을

예수님께서 찬양자로 삼아서 도장쾅쾅 찍어서

저들 666에서 빼내었다는 겁니다.

이들이 저 지옥에서 건짐을 받았으니

얼마나 많이 주님을 사랑할까요?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베드로가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아십니다 라고

얼마나 신나게

안식일 지키는 자들 앞에서 손마른 자가 안식의 주인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으니

얼마나 호산나 노래 부르겠습니까?

입을 막을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말이죠.

우주까지 들썩 들썩 얼쑤 하고 추임새는 넣는 판국에

같이 춤을 춰야지? 뭐 안식일 지켜? 웃끼고 있네

이 안식의 주인의 섬기심을 노래하지 않겠냐 말이죠.

돌들도 노래부르는 판국인데

 

그래서 다윗은 막 춤추고 막 먹고 막마시고 막 노래 부르는 겁니다.

 

삼일의 간극에서 태어난 찬양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곧 주의 인자하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회개 눈물 금식 기도는 다시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문의 것으로는 아이를 살릴수가 없습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나를 꾀냐 말이죠

제대로 명료하게 보이는 손마른 자를 고치신 안식의 주인의 섬기심이 밝히 보이는데

어딜 감히 안식일 지키기 라는 의문의 반복 따위로 속이려고 하냐 말이죠.

왜 제대로 된 문을 통과하지 않고 담을 타넘고 오려고 하냐 말이죠.

 

주님은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는데

 

우상을 들이대냐 말이죠.

 

여호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의 음성을 아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우상 곧 탐심을 나타내더라 라는 겁니다.

그게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결국 주님께서 이 삼일의 간극을 만드시지 않았다면

나를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들지 않았다면

환자로써 의사의 기능을 외치는 찬양자로 삼지 않았다면

저들 666 짐승의 수에서 벗어날수가 없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만드신 예수라는 문입니다.

이 문을 통하지 않는 자는 강도요 삯꾼입니다.

 

머리되신 예수님과 그의 몸 된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가 아닌 겁니다.

 

 




내 이름 아시죠 (시편 139편).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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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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