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 예수와 천국비유

완료는 미래에서 소급 (비유와 천국)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되는 나라

(마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인간이 세우는 나라는 결국 자아의 결집성의 축소판이다.

인간이 자아를 형성하고 세우는 방식을 보면
역사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국가를 형성하고 세우는가를 보면 알수 있다.

그래서 먼저 인간의 나라가 어떻게 형성되는 가를 보면
나중에 세워지는 나라가 어떻게 증거되는지 알수가 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나 인간은 이 먼저 라는 것에
항상 손대는 원리가 나중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방식이 완전정반대 이다.

아니 이 말씀 자체가 그렇게 유발케 한다.
왜냐하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모르기에
자기의 방식대로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결국 먼저가 아니라 가장 나중이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먼저 무엇이 나올까?
놀랍게도 인간이 손댄 먼저 란 자아의 나라와 자아의 의 이다.

이 자아의 나라와 자아의 의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유발케 한다는 것이다.

마치 이 말씀을 인간이 듣고 보고 실천하겠다고 달려드는 순간부터
이 말씀 자체가 그 사람의 먼저를 다루는 그 솜씨들이
먼저가 예수님나라와 예수님의 의가 아니라.

먼저 그 사람을 장악한 그 사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딴 나라와 딴 의가 드러나고 들추어낼 것을 염두하고 그 속성들을 유발케 하는 방식으로 말씀 스스로가 운동력있게
그 마음과 그 혼과 생각을 찔러 쪼개는 방식이다는 것이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그렇기에 인간들이 말씀을 대하는데 있어서 운동력을 인간에게 주체를 둘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은 무능한 모습으로써 인간들의 운동력에 다루어지는 것처럼 잠잠하다. 그런 활동력이 없으면 없을수록 그 없음을 인간들이 아무리 주체를 말씀에 둘려고 하고 운동력이 있다고 말하고파도 정작 아무런 움직임 조차도 없을 시에 비로소 인간이 그 결핍성을 채우는 운동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그 말씀을 운동력 있게 만들려고 애를 쓰게 된다. 바로 이런 인간의 운동력이 등장함으로써 비로서 말씀의 운동력의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다.
(예로 사울왕이 제사를 드릴려고 아무리 사무엘을 기다려도 오지 않을때에
기다리다 못해 제사를 드렸을때에 마치 사울의 운동력이 나타날때까지
숨어서 숨어서 기다린냥  쨘 하고 나타나는 사무엘처럼
비로소 제사 보다 순종이 낫다는 뭐뭐 보다 뭐가 낫다는
그 순종의 운동력을 제사의 운동력과 대비시키는 것과 같다.
또 선악과를 따먹자 말자 부랴 부랴 생명나무 치워버리는 것도 일관되고,
또 베드로의 사단의 일 사람의 일이 드러남으로써 하나님의 일이 뭔가를
베드로의 사탄아 너는 나를 넘어뜨리는 자이다 라고 그 악마성을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의 일이 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베드로는 남들이 지적 받지 못하는 일을 우리들을 대표해서
악마성이 들통나야 하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먼저 장악한 그 나라와 그 의는 무엇일까?
먼저 인간을 장악한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드러냄으로써
먼저 된 인간의 나라와 의가 나중이 되고
가장 나중된 예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의가 먼저 되는 뒤에서 소급되는 그 취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항상 천국 비유를 말씀하실때에
예외없이 인간들에게 심겨진 가짜천국과 그 가짜천국운동을 목숨걸고 펼치는 자를
항상 대비시키는데 있어서 빠뜨리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빛의 나라인 천국을 말하는데 있어서
어두움의 나라인 바리새인의 천국관이야 말로 가장 대조적인 성향을 드러내는데
가장 알맞은 극과 극을 드러내기 때문 이다.

어린아이도 알수 있는 가장 쉬운 천국이란 이런 의미이다.
마치 아이에게 왜 나쁜것과 좋은 것을 눈에 뻔하게 알려주고서는
어떤 선택권을 아이에게 주지도 않고
그런 판단의 어려움없이 그저 그저 묻어갈 수 밖에 없도록
선생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도록 아이에게 알려주는 교육보다
더 쉬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선생도 아이에게 편애 뿐이고 아이도 그 받은 편애대로 선생님의 말이 옳은가 틀린가를 유무 판단할 필요성이 없이 그저 받은 그대로의 편애로만 선생을 대하기 때문이다.

바로 예수님이 바로 이런 식이다.

선악의 판단 유무를 일체 허용치 않는 방식의 비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이 천국 비유를 대하는 태도는 지극히 선악적이다.

그렇다면 그 선악적인 것 마저도 다 들추어내는 편애를
당하는 입장이 못된다면
여전히 법적인 선악의 판단 유무 외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는 식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에게 먼저 심겨진 그의 나라와 그의 의 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지금까지 순차적으로 역사적인 틀에서 벗어난적 없는 형태로써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해 왔다.

그것이 국가 건설에서도 예외 없이 그러해 왔고
심지어 구약에서 살펴봤듯이 이스라엘도 예외가 없었으며
더 놀라운 것은 지금의 교회들이 추구하는 나라와 의도 예외가 없었다.

아니 이미 그런 결과로 흐른다는 것을 심어버리듯이 증거한 것이
운동력이 있는 말씀에 규정되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에게 그런 사고방식을 모조리 다 들추어내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하나님 나라의 의가 무엇인가를 다 들추어내는 방식은
곧 오늘날도 예외없이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는 나라와 의의 모습이다 라는 것이다.
기독교 라고 해서 예외도 아니였고, 교회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바벨탑의 건설로 통한 인간 나라와 의의 추구는
한마디로 말해서 노아홍수심판으로 인한 등떠밀린 행동일 것이다.

그 바벨탑 의식이 지금의 자본주의 까지 배태해 냈다.

바벨탑의 나라와 의가 무엇인가?
노아홍수심판이 준 힌트가 무엇이길래 그들은 바벨탑 세울 의식을 일체 가지지 않다가
왜 갑자기 그런 의식으로 통일이 되었고
그 통일성이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데 동원이 되었는가?

그것은 구원에 대한 결핍이다.

사실 바벨탑 의식은 가인이 에덴동산에서 축출된 아담 부모로부터의 전수된 약속을 보여줄 운동력 때문에 약속으로 인한 생명과 죽음을 보여주어야할 입장에서 나타난 최초의 살인으로 인해 나타난 의식이다.

가인이야 말로 인간 최초의 생산물이자 동시에 인간 최초의 소멸자이다.

정녕 죽으리라를 최초로 죽음을 실행하였고
최초로 인간이 창조한 탄생품이다.

인간의 생명과 죽음이 이 가인이라는 최초의 인간 생산물에서 모두다 결정이 나타나듯이
지금까지도 인간은 생명과 죽음을 자신들의 손에서 결정하였고
자신들의 손에서 이룰려고 하고 있다.

자 그렇다면 이런 생명과 죽음을 깨뜨리는 분이 이런 인간들의 나라와 의를 허무는 방식으로써 자신의 나라를 세운다면

가인의 나라와 의란 결국 에녹성을 쌓는 최초의 국가형성의 배경과
그 나라와 결탁된 의를 영웅 탄생을 통해서 보아왔고

주님은 따로 여호와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아벨 대신에 주신 셋으로 인해
아벨의 족보를 통해서
노아홍수심판을 준비하셨던 것이다.

결국 두 나라와 두 의의 대립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인의 나라와 의를 노아홍수로써 휩쓸어 버린다.

그 삭제된 상태를 안식으로써 선포하시고 무지개를 보여줌으로써
이제는 물이 아닌 불로써 그 거룩한 전쟁의 내막들이 더 깊게 복잡하게
더 캄캄한 어두움 속을 깊이 파고 들어가서 그 내막들을 속속히 낱낱이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미끼로써 동원된 교회란
처음부터 누락성을 보여주기 위해 동원되었건만

교회 자체가 그 먼저 된 바벨 나라와 바벨 의를 드러내는데 동원되었건만
바벨의 나라와 바벨의 의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서
도리어 드러낸다고 안색을 붉힘으로써 인해
예수님에게 바알세불 걸렸다고 다 뒤짚어 씌움으로써
자신의 나라와 의를 은폐시켰다.

은폐시킨다고 은폐될 나라와 의가 아니다.

인간이란 죽음나무(선악과=정녕죽으리라)와 생명나무를 드러내는데 평생을 소진해야만 한다.

창조되고 태어나고 죽는 순간과 그 죽음 조차도
모조리 이 두 나무를 충실히 드러내는데 모두 소진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을 허용한 적이 없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신 속에 왜 죽음 나무가 왕노릇을 했는지 그 내막을 톡톡히 보여주었고 그 왕노릇에서 벗어날 수 없음 또한 톡톡히 보여주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에서 주어진 약속으로 인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두 세계의 모든 내막들을 다 보여주었다.

그 믿음의 출발로 인해

그 뒤의 모든 구약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 동일하게 원치 않는 자신의 죄악들을 다 들추임 당해서 보여져 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조건없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생명으로 옮겨지는 여호와의 대신 질고를 짊어지심의 열심을 보여 줬다.

그것을 다윗은 자신 속에 있던 사망이 어떻게 왕 노릇을 했는지와 또 의가 왕노릇했는지를 다 보여줌으로써 예수님의 때를 바라본 아브라함을 비로소 다윗 자신에게도 그 미래가 다윗을 소급해서 지적함으로써

자신에게 먼저 있던 나라와 의가 뒤에서 나타난 나중된 미래의 완료된 예수님 나라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가 소급되어 덮침으로써

자신의 왕 됨이 놀랍게도 예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의를 보여주고픈 마음이 먼저 아무리 가진다 하더라도
정작 먼저된 것은 인간의 나라와 의를 드러냄으로써 그 차이로 나중에 나라와 의를 드러내는 식으로 주님은 다윗을 다루었다.

결국 다윗은 왕 자리에서 사울 보다 더 악날한 더 큰 죄 마저도 원치 않지만 보여줌으로써
그 뒤에 나중된 의가 있음을 드러내는 완료가 뒤에서 미래에서 소급되는 식으로 증거 된다.

어떻게 보면 사울보다 더 처참하다.

그러나 사울 왕의 과거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과거이지 더 이상의 미래가 없다.

미래를 보여줄려면 과거와 대비된 미래로써 다윗이 제격인 것이다.

마치 사도바울이 율법의 완벽함이 왜 의가 될 수 없는 그 차이를 드러내는 데 있어서
미래가 드러내는 과거와의 차이로써 바울이 제격인 것이다.

그 바울 외에 다른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유대인 중의 유대인 이라는 다른 몇몇의 바리새인도 미래에서 소급되어 덮친 바울을 눈멀게 한 의를 보여줄수 없다.

결국 바울이야 말로 주체가 아니였다 라는 것이다.

다윗이야 말로 왕이 아니였다 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야 말로 믿음의 조상이 아니였다 라는 것이다.

유다 이야 말로 선민이 아니였다 라는 것이다.

바울에게 임한 율법의 완벽은 바울이 아닌 예수님이였고
다윗에게 임한 왕은 다윗이 아닌 섬기는 왕은 예수님 뿐이였고
아브라함에게 임한 믿음은 아브라함이 믿음이 아니라 조상도 아니라 예수님만이 믿음이였고 조상이였음을 마태복음 1장이 아브라함을 앞세워 그 차이로써 증거한다.
또 유다야 말로 선택자 구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전혀 구원과 무관자 무능자인 고아 과부 나그네인 유대인이란 예수님 혼자 뿐이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심겨진 그 나라와 그 의라 속속히 낱낱이 들추어지지 않는 이상
예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의는 그 대비된 차이로써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교회란 이유 없이 그 대비된 차이로써의 긍휼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가짜 의와 가짜 나라 운동을 펼치는
바리새인의 하나님 나라와 의의 운동을
똑같은 방식으로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가인의 나라 가인의 의를 추구하듯이

미래에서 완료된 나라를
여전히 자신들의 운동을 통해서 완료될 수 있는냥
늘 미완료로 남겨둔다.

지금의 성화론 운동과 새생명의 삶 운동과 개혁주의 운동이 그러하다
늘 미완료요 미흡하다.

그렇다고 다윗이나 아브라함처럼 먼저 심겨진 그 나라와 의가 가짜로써 들통남을 당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들통이 난다면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자기부인의 성령이 덮침으로써 인해
그 가짜 나라와 가짜 의가 망함으로 통해서
새로운 시작의 완료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망함이 없기에
여전히 자신의 의를 계속 추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착한 에서가 자신에게 미래의 완료가 덮친 것이 없기에
그저 착함으로써 계속 끌고갈 수밖에 없듯이

그러나 그렇게 못된 야곱은 자신에게 미래의 완료가 덮침으로써 인해
못됨과 착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선하심으로 완료가 되었고
예수님의 선하심을 드러낼 수밖에 없기에
샬롬의 세계로 초청받는 것이다.
착하든 못땐인간이든 상관없이 여호와의 얼굴을 보고도 안 타죽는
그 영광이 따로 다른 영광으로써 덮치는 것이다.

도리어 자신의 착함으로 인해 그 영광이 별 의미가 없다. 환한 대낮의 빛 속에
아무리 빛이 나타나본들 의미가 없듯이

결국 바리새인의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의 운동들은 에서의 운동과 가인의 이마표로 인한 운동과 바벨탑을 세우는 운동과 같은 마귀의 나라와 마귀의 의를 드러내는데 전념했듯이
바리새인이 그 일에 목숨 걸었다.

그리고 오늘날도 그런 교회가 이런 일을 하는데 동원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속에서도 자신의 나라와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교회를 따로 남겨두었다.
곧 남은자 이다.

교회가 두 계열로써 하나는 가인의 교회의 모습으로
또 하나는 아벨의 교회 모습으로 증거 된다.

두 나무의 모습을 예외 없이 보여줘야만 하기에
역사속에서는 이 두 나무의 모습처럼 두 계열의 교회와
두 나라와 두 의를 보여주는 두 계통의 교회가 드러나는 것이다.

자 이제 천국이 왜 비유로써 증거 되어야만 하는 가를 알수 있을 것이다.
비유란 그 당시의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와 대중적인 이야기요
다들 알아먹는 인간의 의와 인간의 나라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이야기를

가장 무슨 소리인지 모르게 막힌 이야기로써 도통 무슨소리인지 이해불가로 은폐시키는 이야기로써 지금까지 들어본적 없는 천국을
가장 대중적인 천국과 의를 공격하면서 가짜천국을 드러내면서 증거되는 비유이다.

즉 먼저 된 이야기를 나중되게 하는 이야기 다.
먼저 된 나라를 나중된 나라가 뒤에서 삼키는 나라를 말하는 이야기가 비유다.
먼저된 인간의 나라와 인간의 의 곧 먼저된 마귀의 나라와 마귀의 의를 뒤에서 삼켜버리는 나라를 말하는 묵시이다.

그것은 마치 바리새인이 자신을 옳겨 여김으로써 또 자신들을 선에 둘여는데 있어서
또는 바벨탑처럼 구원의 결핍을 심판을 안 당하고자 하는 결집을 통해서

도리어 그 모습 때문에
버림받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구원의 조건을 갖추는데 있어서 쓸모없겠구나 라고 여겨져 버린 것)의 그 무가치한 모습, 바알세불 걸린 모습, 불뱀의 모습으로 온 인자의 모습이

도리어 옳게여겼던 모든 것들의 내막을 악하다 라고 규정하면서
그 내막을 다 들추어내는 그의 나라와 의를 이루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극히 믿음이 전혀 가질 것이며
인간의 나라와 의는 믿음이 너무 너무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먼저 된 것이 드러나야
나중된 것이 그 대비로써 완료성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 완료됨 마저도 인간의 나라와 의로써는 도저히 완료처럼 보일수 없도록 완료 되었다

그 완료됨이 어느정도로 완료답냐 라는 것이

창녀와 세리와 강도가 먼저 간다 라고
롯과 같은 인간들로만 채워져 있다고 하니

차라리 그런 완료라면 근처도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고 걸림이 되게 하신다.

마치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상관이 없다는 말에
그렇게 많은 기적을 보고 밤낮으로 따라다니고 목숨걸겠다고 수많은 시간과 거리와 자기인생을 포기하고 가까이 다가왔던 자들에게
결정타처럼 모두다 스스로 발을 돌리겠금 할 정도로
모든 자발적 선택이 실족함을 당한냥 턱 하니
문턱을 못 넘어서듯이
죄의 소원을 비로소 드러낸다.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가 문에 엎드려 자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의 나라와 의가 예수님의 살과 피 앞에
턱 하고 문턱에 걸려 넘어져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는 모습이다.
그렇다 죄의 소원들을 가지고서 예수님께 왔다.
예수님의 소원 앞에서는 다들 넘어지고 말았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결국 인간의 나라와 인간의 의가
예수님의 비유로 인해서 다 들통하는
죄의 소원으로 가득찬 천국과 그 의를 펼쳐왔음을
어떤 누구에게도 들킨 적이 없건만 예수님 앞에서는 비로소 들통나고 말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이 사랑이건만
들통난 그 자체로
사랑이 아니라
비로소 등을 돌림으로써
이제야 마귀와 손잡아왔음을 비로소 드러내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살인의지였다.

아무리 교회 다녀도
죄의 소원으로 다닌 인간들은 결국 예수님을 죽이고픈 마음만으로 다닌 셈이다.

그러나 아들의 소원이 덮친 자는 아무리 교회 단 한번도 다닌적이 없어도
성경 단 한번도 본적이 없어도
어떤 성경 지식도 안 적이 없어도
아들의 소원 그 자체로써
말씀의 운동력의 진가를 톡톡히 드러내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소모품으로써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드러내는데 동원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주체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가짜 나라와 가짜 의를 증거하는 자들의 일관성있는 태도는
결국 자기 부인이라는 것조차도 자기 의로 포장한다는 점에서
너무 너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지만

그런 커다란 힌트도

우리 눈 자체가 어둡기에

그들에 대한 판단 보다.

정작 우리 눈이 소경이였음을 주님께 아뢰는 그 긍휼을 구하는 모습이
도리어 저들을 시기케 한다는 점에 있어서

주님의 나라와 의는 이유도 없이 저들을 거리끼게 한다는 점에서
주님 자신의 약속의 전쟁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약속은 약속 스스로가 그 진가를 드러내고 있지
인간은 하등 도움이나 보탬이 된적도 없고
도리어 다윗처럼 당해야함으로써 자기부인케 함으로써
그 나라와 그 의 다움을 드러낸다.

천국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왜 인간들에게 먼저 심겨진 가짜 천국과
그 가짜 천국의 의가 어떻게 인간을 사로잡았는지
또 그 주인 노릇하는 가짜천국의 의를 결박하고
어떻게 가짜주인의 물건을 늑탈하는지를

천국비유를 통해서 그 전쟁담을 쓰릴있는 실감성으로 우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그 도둑에게 감사와 고마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마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마 12:22)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마 12:23)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마 12:24)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마 12:25)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마 12:26)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 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마 12:27)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 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마 12: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마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마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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