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6. 예수님이 직접 마련한 자리


처소 : 주의 자리 (마 20:17-34)


섬기는 종(노예)의 자리 뿐인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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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0:26, 개역)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 20:27, 개역)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 20:28, 개역)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9, 개역)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마 20:30, 개역)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마 20:31, 개역)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마 20:32, 개역)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마 20:33, 개역)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마 20:34, 개역)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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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진동하는 나라

2008년 12월 10일                           본문 말씀: 이사야 64:1-7

(사 64:1)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
(사 64:2)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사 64:3)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주의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사 64:4)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사 64:5)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사 64: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사 64:7)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신앙인의 고백은 참으로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눈 앞에는 그저 주님의 강림하심만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 비해 오늘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저 소박한 자기 행복에 전념합니다. 아파트마다 저녁 8시만 되면 불들이 켜이면서 온 가족들이 모여 단란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함박 웃음이 수시로 터져나오고 어떨 때는 행복에 겨운 어쩔 줄을 모릅니다. 하지만 갑자기 현관문이 열어젖혀지면 잠시 웃음도 멈추고 긴장된 순간에 돌입합니다. 그러다가 밖에 아무 일이 없음이 확인되면 다시 문은 굳게 닫히고 그 안의 폐쇄된 공간에서 웃음 소리가 만발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신앙인은 결코 폐쇄적이 아닙니다. 마치 천문대에 종사하는 사람처럼 늘 밖을 보고 있는 사람이요 하늘을 보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을 의식할 의사가 없다는 겁니다. 빌립보서 3:10-12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사도 바울은 개방되어 있습니다. 밤 하늘의 별 빛이 쏟아지는 것처럼 쏟아지는 하나님의 계시를 온 몸으로 반기는 데 있어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여느 사람처럼 폐쇄적으로 자기 만의 세상을 꾸미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계시를 마음껏 받아들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가 받은 계시한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강람하실 때 산들이 진동하고 땅이 진동한다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곱게 오시지 않고 산천초목을 떨게 하시면서 오시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의 자리’를 훼파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인간들은 이 산천초목에 묶여서 사는 존재입니다.

어릴 때는 그가 보고 듣고 사는 영역이 좁습니다. 그 좁은 범위 안에서 사람은 행복과 불행을 따지고, 두려움과 자신만만을 단정짓습니다. 논합니다. 하지만 점차 성인이 되면 보다 넓은 영역과 넓은 관계를 맺어나가면 결국에는 좁은 영역에서 통하던 생각들이 전혀 부합되지 않음을 압니다.

이처럼 사람은 쉴새없이 자꾸만 자기 영역을 넓히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넓혀가는 자리도 결국은 지상에서 지상으로 확대될 뿐입니다. 아무리 세상을 넓게 생각해도 결국 세상에서 착안한 희망이요 포부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는 처음 올 때와 사정이 다릅니다. 처음 올 때는 땅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고 사람의 종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때는 그 분에게서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고 거부당한 증거를 지니시고 오십니다. 요한계시록 1:7에 보면,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피해자의 신분으로서 들이닥치십니다. 그 어떤 인간도 주님을 반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모두다 주님을 외면해버리신 겁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은 아무리해도 이 땅에서 마련한 자신의 자리를 떨치고 나갈 의향이 없는 겁니다. 더욱더 넓히려고 시도할 뿐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이것 저것 많이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진리란 나를 망하는 자로 규정하는 힘으로 작용할 때만 느껴지게 되어 있습니다. 즉 “나는 이것 안다”는 식으로 진리가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죽었구나. 나는 전혀 쓸모없구나”를 자백케 하는 능력으로만 진리가 주어집니다.

성경대로 말하면,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식입니다. 바로 이런 현상이 일어나면 외부의 진동이 이제 우리 내부의 진동까지 이어진 셈이 됩니다. 경건치 못한 자들과 지구가 멸망하는 것과 관련 있다는 것이 베드로후서 3장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인간이 딛고 있는 땅을 뒤흔들므로 말미암아 ‘인간의 자리’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인간의 자리’가 생길 여지를 뿌리채 뽑아버리십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리'가 어떻게 해서 ‘주님의 자리’를 공격하게 만든 겁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먼저 오셔서 그 ‘인간의 자리’라는 것을 탐색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거부했고, 공격하는 성향을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사람들이 우러나서 예수님을 배척한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땅은 더 깊은 근원과 역사를 깔고 왔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었고 그 전쟁에서 패배한 악마가 지상에 내려온 것입니다.

그 뒤로부터 인간이 땅에서 획득하려는 ‘자신의 자리’는 실은 그 전쟁의 연속으로서 관여된 자리입니다. 악마가 깔아놓은 자리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의 자리를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내성 있게 그동안 이 시간과 공간을 유지시켜 왔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자리를 이 더러운 세상 안에서 엉글어 놓기 위해서입니다.

주의 자리란 곧 한 알의 밀알이 죽는 자리입니다. 죽은 자리가 되어야지만 생명이 그 죽음 속에서 피어납니다. 살았다고 나서면 그것은 주의 자리가 아닙니다. 죽어버린 자리가 곧 주님의 자리가 됩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부활의 자리란 이 세상에서 볼 때 십자가 죽음 속으로 사라지는 자리였습니다.

내 자리가 따로 있게 되면 그것은 주님이 보실 때 폐쇄적인 자리가 되고 그것으로 인해 주님이 밀침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아무런 칸막이가 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으로부터 늘 죽어지는 그 자리가 곧 하늘과 통하는 영적 자리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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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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