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기 2009년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동영상파일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5aa.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5ab.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5ac.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5ad.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5ba.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5bb.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5bc.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5bd.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5ca.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5cb.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5cc.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5cd.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da.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db.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dc.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dd.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ea.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eb.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ec.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ed.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fa.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fb.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fc.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fd.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ga.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gb.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gc.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gd.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ha.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hb.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hc.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hd.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ia.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ib.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ic.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id.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7ja.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7jb.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7jc.wmv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7jd.wmv


역대기 2009년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음성파일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5a.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5b.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5c.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d.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e.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f.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g.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h.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i.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7j.mp3

역대기 2009년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문서파일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5a.hwp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5b.hwp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5c.hwp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d.hwp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e.hwp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f.hwp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g.hwp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h.hwp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6i.hwp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cross090107j.hwp



역대기 강의 교재

2009년 1월 5일-8일

Ⅰ서론

‘산다’의 의미는 과거 사람이나 지금의 사람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산다’라는 것은 항상 ‘자신이 산다’ 혹은 ‘자신 만이 산다’ 혹은 ‘자신의 것이 산다’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곧 ‘죽음’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 ‘산다’라는 것은 ‘살만 한 자가 산다’이다. 문제는 이 ‘살만 한 자’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이 없는 존재를 하나님께서는 집단적으로 이끌어내신다. 이로서 역대기는 개인으로서의 산다는 거부하고 ‘집단으로서의 산다’를 성사시키시는 하나님의 창조 작업을 기술한 책이다.

개인 중심으로 보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집단 이해가, ‘이스라엘’이라는 집단 중심의 개인 이해로 바뀌게 하심으로서 왜 개인의 운명이나 죽음이란 것이 무의미하게 취급받아 마땅한가를 아울러 밝혀주신다.  

즉 모든 개인과 이스라엘은 다윗에게 (심지어 다윗 자신마저 다윗이라는 이름에) 흡수되어야 하고 다윗이라는 이름만 산 자가 되고 이스라엘은 이 ‘다윗’을 위하여 죽은 자들이 되어야만 하느냐 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죽은 개인들임이 드러나지 아니하면 ‘다윗’ 개인의 의의는 없다. 이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진정한 ‘나’라는 명칭에 합당한 분은 오로지 다윗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나타난 하나님뿐임을 드러내시려 한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계에 전쟁을 유도해 오셨다.  

Ⅱ 본론

1. 전쟁의 양상

이스라엘에게 있어 전쟁이란 이스라엘 창조에 있다. 이 창조는 구원함을 통해서 성사된다. 그리고 구원은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행된다. 이처럼 이스라엘 자체는 전쟁에 의해서 발생되고 유지되는 특수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려주신 그 언약의 관계에서 자신들을 수혜자로 간주했다. 즉 자신들이 언약을 제대로 지탱한다고 본 이유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해낸 창조적 업적이 이 지상에서 사라지기에 하나님께서도 필히 자신들을 보호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들은 언약을 이런 식으로 이해했다. 이것이 인간으로서의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인식의 한계였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지닌 내막을 다 알 길이 없었던 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자신의 이름의 존재성에 자신들은 붙잡고 매달리면서 살기를 원한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국가로 정착되기 이전에 있어 주위 국가들과 전쟁에서 정형적인 양상으로 정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예가 사사기 3:7-13에 나온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을 섬겼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그 땅이 태평한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케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경우는 이 후에도 지속된다. 열왕기하 13:1-7에 보면, “유다 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의 이십삼 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칠 년을 치리하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좇고 떠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노를 발하사 늘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 아들 벤하닷의 손에 붙이셨더니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므로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니 이는 저희의 학대 받음을 보셨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에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였으나 저희가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좇아 행하며 또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저 두었더라 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진멸하여 타작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과 병거 십 승과 보병 일만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두지 아니하였더라“고 되어 있다.

2, 전쟁 양상에 있어 전복이 일어남

전쟁 양상이 거꾸로 뒤집혀서 이스라엘이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의 역할을 담당해야만 하는 계기가 그들 내부에 왕을 구했을 때부터이다. 적은 어디에도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 속에서 꿈틀거렸다. 이점을 하나님께서 모를 리가 없었다. 단지 인간들이 모를 뿐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편이 아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부터 ‘하나님의 이름’의 구출 및 구원이 일어나야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을 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포기했다는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다.(삼상 8:7)

하나님께서 대적하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구출시킬 것인가? 전복의 방식은 언약궤를 도로 회수하시는 것이다, 즉 주신 은혜를 회수하는 것이다. 이는 언약궤 스스로 인간의 손에서 탈출을 시도하시는 것이다. 이 탈출과정을 통해 그동안 미처 밝혀지지 아니한 ‘하나님의 이름’의 본질이 속속 드러난다. 이 과정은 언약궤의 이동 및 정착을 통해서 진행된다. 즉 언약궤가 스스로 이스라엘을 떠나 누구의 집에 고정되느냐가 관권이다.

전에 이스라엘을 위하여 주어졌던 여호와 전쟁의 양상은 이제 미지의 안식처를 마련하기 위한 전쟁 양상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전쟁 성사를 위하여 새로운 인물이 간택된다. 그는 왕이 되지만 이 왕은 백성의 죄로 인하여 등장되지 말아야 할 시점에 등장된 왕이요 기존의 왕과 전쟁을 벌려야 하는 왕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두 가지 방식으로 일을 해나가신다. 하나는 언약에 준해서 이스라엘을 가차 없이 공격하시는 하나님이시오, 그 와중에서 오직 ‘다윗 언약’에 준해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공격 무기는 이방나라들이었다. 역대하 24:25에 보면, “ 아람 군대가 적은 무리로 왔으나 여호와께서 심히 큰 군대를 그 손에 붙이셨으니 이는 유다 사람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이와 같이 아람 사람이 요아스를 징벌하였더라”고 되어 있다. (대하 25:20/12:5)

다윗언약에 준해서 보면, 이미 하나님은 인간의 보호요청을 맞추어 일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된다. ‘다윗 프로젝트’에 하등의 차질이 없게 일하신다. 이로서 ‘이스라엘 역사’는 새롭게 이해되고 해석된다. 즉 이스라엘이 패망하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어야 하는 이유는, 다윗 언약의 구출이 그 패망을 통해서 진면목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다윗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집념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면 나도 하나님 버린다”는 인간들의 근원적 죄악된 본성을 동반시켜 발췌해 내게 된다. 다윗 언약을 제대로 이해하자면, “하나님이 나를 버려도 나는 하나님을 버릴 수 없다”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이 너그러움에 있어 하나님보다 한 수 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피조물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희생되어야 마땅함에 대한 고백이다.

3. 하나님의 희망과 이스라엘의 희망

하나님의 희망은 곧 이스라엘의 희망이 아니다. 유다는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희망은 유다이며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의 희망은 화끈한 절망으로 이어져야 한다. 옛 이스라엘은 천국과 엄연한 단절이 성립되어야 하고 오직 다윗 언약에 의한 유다 나라의 연속만이 언약을 살려낸다. 유다와 이스라엘을 명백하게 구분 되어야 한다. 그래서 다윗 언약은 솔로몬 노선을 비켜가서 그 완성의 상태를 보게 된다. 시간이 거꾸로 가는 것이다. ‘다윗→솔로몬’이 아니라 ‘솔로몬→다윗’이 된다. 시간의 전복은 인간의 인식과 단절시키려는 의도이다.

인간의 계속 희망을 품고, 그 희망은 계속 깨어져야 한다. 그래서 막판에는(종말에는=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오직 절망한 자들로서 구원이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희망은 묵살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망과 소망만이 세상에 넘쳐난다. 역대기 이후에 나오는 에스라, 느헤미야의 내용은 성전의 존속에 관한 내용이다. 즉 인간이란 성전의 영원함을 위하여 존재해야 하는데 그 성전이란 다름 아닌 다윗에게 약속한 그 성전이라는 것이다.

4. 역대기와 신약

하나님은 선지자들의 말씀을 통해서 역대기의 약속을 신약까지 이끌게 하셨다. 선지자는 세상을 긍정하는 자들이 아니라 부정하는 자들이다. 열왕기상 20:37에 나오는 ‘얻어터진 선지자’의 등장이 이 사실을 제대로 보여준다. 동료 선지자에게 의도적으로 얻어 터져 얼굴에 붕대를 감은 선지자가 왕을 만난다. 그리고 말한다. “네 목숨이 저의 목숨을 대신할 것이다”

즉 종말에는 의로운 자의 희생을 통해 생명 교체 현상이 일어나는 식으로만 구원이 되어진다 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십자가 달려 (얻어 터져) 죽으신 분에 대해서 자신이 가해자로 인정하는 자에게만 희생이 전달되고 그 희생에 담긴 ‘생명 대체 효과’에 의해서 구원이 성사된다. 

다윗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희망이 이를 성사시키는데 그 희망으로 오신 분이 성령님이시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

시간의 전복이 공간의 해체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시간이란 원래 공간의 질서 있는 반복성을 대변해 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창 1:14) 공간과 시간이 사라지고 나면 다윗의 나라가 본격화된다. 다윗의 나라란, 하나님만이 왕이 되시는 나라다. 모든 피조물들은 오직 그 나라만을 위하여 복무한다.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그러하다.

이러한 집중 현상은 마치 역대상 1장부터 9장까지 나오는 다윗을 향해 달려온 족보와 그 명단의 나열과 같다. 이처럼 과거나 미래나 모두 오직 다윗 언약에 의해서만 해석해야 함을 보이는 것이 역대기의 주제다.  

Ⅲ  결 론

육과 영의 싸움이다. 육과 육의 갈등과 투쟁은 영과 영의 갈등과 투쟁의 그림자들이다. 영을 알기 위해 처절하고 치열한 육과 육의 다툼을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 안 죽고 살아남겠다는 악을 쓰는 육의 본성으로 인해 항상 영은 핍박을 받지만 영은 오히려 이런 육의 폭거 속에서 터 잡아왔다. 아담부터 다윗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는 모두 다윗을 향하여 거꾸로 소급되는 시간 열차가 준비되어 있다. 이로서 지상에서 천상으로가 가능하다. 엘리야의 불수레처럼. 

살고자 하는 육의 세계 속에서 영의 집단적 비명소리가 들린다. 개인은 없다. 단지 다윗에게 속한 집단만 있을 뿐이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다.”(요 12;25)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