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마을 2009 여름 수련회 : 다니엘 스가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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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속의 그대
다니엘· 스가랴 강의안
 
(2009년 십자가 마을 여름수련회 ) 2009년 8월 2일~4일
 
Ⅰ. 서 론
 
말씀이 없으면 사람은 죽게 된다. 그 이유는 말씀 안에 ‘종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즉 ‘종말’을 품고 살아가지 아니하면 ‘종말’ 이후의 혜택에서 제거된 자가 되어 버린다. ‘종말 이후의 혜택’이란 ‘심판 너머에 있는 구원의 혜택’을 의미한다. 이 구원의 혜택이 벌써 말씀 안에 들어 있어 이미 우리 앞에서 제공되어있다. 대자연은 안다. 모든 것이 말씀으로 지어진 것을!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 19:2-4)
 
하나님은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인간만은 이 사실을 모른다. 과학이란, 딴 살림 차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인식으로 가득 차 있다. 즉 ‘종말 없이 살겠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종말이 예비 되어 있기에 최종 가치와 의미는 이미 결정 난 상태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29-31)
 
새삼스럽게 인생의 가치나 의미를 논의할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 그 사람이 말씀에 지배를 받느냐 아니받느냐의 유무로 결정 난다. 말씀을 멀리하고, 말씀에 얼굴을 돌리면 이것은 현실에서 얼굴 돌려버리는 무모함이다.
 
사람들은 말씀 없는 곳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신이 있는 곳으로 향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결정 난 종말의 취지를 말씀에 담아 위에서부터 오히려 아래로 내려다 주신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4-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요 7:33-34)
 
예수님에게 담겨 있는 말씀의 최종 성취됨을 믿지 아니하면 죽는다. 누구나 죽는다. 예수님 자체가 종말을 만드신 분이요 그것이 이 지상에 펼치시는 분이시다.
 
그 전의 이야기다. 이스라엘은 멸망하면서 역사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비록 멸망은 해도 언약은 살아있다. 그 언약의 역사가 비언약의 역사와 만나 충돌하고 뒤엉킨다. 이렇게 되면 어느 것이 언약의 역사인지 비언약의 역사인지 구분이 안된다.
 
여기에 선지자를 통해 환상이 뜬다. 그 환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 어느 역사도 추적이 불가능하다. 이는 모두 땅에서 저주의 맛을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창세기 4:10-11)의 말씀의 취지가 여전히 살아 있다. 약속의 땅에서 저주받는 자들이 저주받을 자들이다.
 
말씀에 의해 ‘저주 생산’의 장(場)으로서 전쟁터가 형성된다. 지상에서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내는 문명과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내는 종말과의 대충돌이 일어난다.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내는 것이 ‘바벨론 문명’이며,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인자의 나라’, 곧 ‘하나님 나라’다.
 
예수님의 종말을 구성하는 파트너로서 바벨론이 세워지는 것을 허락하셨다. ‘아래로부터 시작해서 위로 향하는 속성들의 결정체’다. 크리스털(수정) 같이 지상에서 빛난다. 사람들이 환호하다. 그리고 부러워한다. 그리고 자진해서 경배한다. 지상의 모든 국가는 다 잔가지처럼 바벨론 제국의 줄기에서 삐져나와서 자라난 작은 수정(크리스털)들이다. 따라서 이 많은 국가들은 모두 바벨론 제국의 운명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데 이 바벨론 제국 초기부터 그 안에 무슨 꿈틀거림이 있었다. 거대한 세상 제국이 왜 종말에 당연히 무너져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물이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심어놓은 ‘핵’ 같은 것이다. 이 꿈틀거림을 포착하는 와중에서 그 안에 인자 되시는 분이 함께 계심이 발견될 것이다.
 
Ⅱ. 본 론
 
[ 다 니 엘 ]
 
1. 왜 재림(두 번 방문하심)이 필요한가?
 
구약 선지자들의 글에 의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두 민족을 대상으로 다 이루어진다. 하나는 자기 민족에 대한 심판이요 다른 하나는 이방민족에 대한 심판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게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를 구분 지으면서 이루어진다. 같은 질(質)의 심판이 아니다.
 
메시아의 두 번 왕림의 필요성이 선지서 안에 지속적으로 뻗어오고 있었다. 자기 백성이나 이방민족이나 모두 자신들이 벌려놓은 일에만 정신 팔려있고 몰두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결코 ‘자신의 일’은 없다. 모두 하나님의 일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자신의 ‘근본’을 알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도 바벨론 제국을 닮아있었다. 이미 바벨론 제국 안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방제국의 대표자격인 바벨론 제국의 등장과 그 처참한 최후를 알려주심으로서 이스라엘 나라의 근본을 돌아보게 하신다. “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와서 티끌에 앉으라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 네가 다시는 곱고 아리땁다 일컬음을 받지 못할 것임이라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여주인이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들의 종말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도다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 사 4:1, 7, 10-11)
 
바로 이런 운명을 지닌 제국 속으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조차 을 밀어 넣으시면서 ‘심판’이 어떤 차원에서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신다. 즉 왜 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아 마땅하지를 알려주시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그것을 둘러싼 바벨론 제국과 같은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제국들의 운명을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것이다.
 
“나는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가 바벨론 제국과 그 후속 제국들의 존재를 지탱해주는 정신적, 종교적 원리가 되었다.
 
이점은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보시고 미워하셨으니 그 자녀가 그를 격노하게 한 까닭이로다 …그들은 모략이 없는 민족이라 그들 중에 분별력이 없도다 만일 그들이 지혜가 있어 이것을 깨닫고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였으면-” (신 32:15, 18-19, 28-29)
 
모세는 자기 민족의 운명을 종말에 입각해서 볼 줄 알았다. 즉 누구든지 메시아가 벌리시는 그 심판 한복판에 들어서지 않고서는 구원될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심판 후에 구원’이다. ‘심판 없는 구원’은 인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방민족이나 자가 백성들에게나 다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 이 땅을 두 번 오신 것은, 바로 이 ‘심판 후에 구원’을 실시하시기 위함이다. 심판도 메시아가 하시고 구원도 메시아가 하신다. 어느 누구도 자기 의로 구원될 자는 없다. 인간은 근본도 모른다. 그저 바벨론 제국만 찬미하고 염원한다. 이 바벨론 제국과 다른 나라를 가지고 오신 분에 의해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근본을 알게 된다.
 
예수님이 이 ‘두 번 왕림하심’의 정신이 선지서 전체에 타일처럼 바닥에 다져 있다. 다함께 심판받아야 될 처지에 놓여 있는 이방민족이나 자기 백성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중에서 빈틈없이 자기 백성들에게만 구원이 돌아가도록 조치하신다, 그 조치의 환경이 바로 역사다. 묵시 밑에서 움직이는 역사다. 이 역사는 곧 묵시세계의 자취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자, 독수리 곰, 표범 같은 동물 명칭을 사용하여 땅의 정황을 묘사하는 것이다.
 
땅의 세계는 결코 하늘의 세계가 아니며 짐승들의 세계라고!
 
 
2. 역사적인 진척
 
(1) 심판의 힘들 (짐승의 힘)
피고들은 잠잠하지 않고 반발하고 있다. 힘들을 가지고 시위한다. 어차피 세상이란 힘이 그때그때마다 판을 짜는 현장이라는 것이다. 곧 힘없는 자만이 피고가 되고 죄인으로 몰린다. 이것이 짐승의 나라의 원리다. 도박판에서의 웃음소리는 진리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다. 자기에게 쏠린 힘 때문에 웃는 것이다. 힘이 흐름이 자기에게로 쏠리는 것을 사람들은 진리라고 말한다.
 
바벨론에서 흘러나온 힘이 바사 제국이라는 계곡을 낳았고, 바사라는 힘의 계곡이 비틀려서 헬라 제국이 짜여졌고, 헬라 제국이라는 힘의 계곡이 로마의 힘이라는 물줄기를 계곡 안으로 끌어들었다. 이 모든 힘이 바벨론 제국의 수평으로 저셔진 결과이다.
 
그런데 각 제국들은 바벨론과 마찬가지로 대표되는 인물에 의해서 주도된다.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과 같은 역할을 해야만 하는 자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힘의 구조가 그들을 좌표로 사용하는 것이다. 묵시적인 힘인 짐승의 힘이 그들을 앞장 세워 자신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다. 역사적 바벨론인 제국이 묵시적인 구조로 반복적으로 지상에 끝장을 볼 때까지 펼쳐져야 하는 것이다.
 
이 힘의 좌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소개한다.
 
(2) 권력의 구조 및 힘의 좌표들
 
느부갓네살, 벨사살, 고레스, 아하수에르, 다리오, 남방왕, 북방왕, 두 뿔 가진 수양 (메대와 바사왕들)과 털이 많은 숫염소(헬라 왕), 독수리 날개 가진 사자, 곰, 새의 날개 넷을 가지고 머리가 네 개를 가진 표범, 큰 철 이를 가지고 열 뿔을 가진 짐승, 이들에 의해서 바벨론의 묵시적 구조가 짜여진다. 이들이 구조의 좌표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힘의 구조가 골을 만든다. 그 만들어진 골로 인해 힘의 이동과 분산과 재배치가 일어난다. 골을 만드는 이들의 역할이 주목된다.
 
역사적으로 봐서 과거를 항상 현재로부터 발길질 당하지만 묵시란 과거를 소멸시키지 않고 되풀이 시킨다. 그래서 그것으로 현재와 미래를 만든다. 같은 구조 안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전체가 같은 힘으로 출렁거린다. 마치 물이 가득 찬 욕조를 흔들면 어느 지점에 있든지 간에 물결이 같이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짐승의 힘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즉 역사상에 등장한 왕들은 무엇에 의하여, 무엇에 도전하라고 힘을 부여받았느냐 하는 것이다. 그 힘의 방향이 어디인가? 그것은 바로 지상에서 힘의 원천을 찾아가는데 있다. 보다 강한 힘이 작용하는데서 바로 힘의 원천지라고 여기는 것이다. 힘을 소비해서라도 더 큰 힘을 얻고자 한다.
 
짐승의 모양새는 달라도 속성은 동일하다. 그들의 몸체 자체가 무기다. 무기란 힘을 얻기 위한 도구다. 마치 밭을 갈려면 쟁기가 필요한 것처럼 힘을 얻기 위해 제국 자체가 무기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힘을 한 곳에 집결시키는데 그 힘이 집결되는 지점에 ‘왕’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왕은 전사(戰士)며 그 자체가 병기다. 힘을 더 얻기 위한 병기다. 그 왕으로부터 아래로 힘이 분배되면서 국가의 질서는 통째로 무기화된다. 싸우기 싫은 자는 지상의 제국의 적이 된다. 즉 세상 힘을 싫어하는 자는 지상에서 원수가 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바다의 짐승’을 지상까지 끌어오신 것은 싸우기 위함이다. 지상에서의 싸움을 하늘의 싸움까지 연계시키기 위함이다. 바벨론→메대·바사→헬라→로마로 이어지는 권력체의 변신로를 따라 하늘의 카메라가 같이 이동한다. 그 짐승의 권력들이 어디를 향하는지, 어디로 진격하는지 빠짐없이 촬영하고 있다.
 
(3) 성전 차지하기
 
그곳은 바로 성전 모독인 동시에 성전 건축이다. 곧 인간을 위한, 아니 힘 자체를 모시기 위한 성전 건립이다. 힘은 힘으로만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것이 아니라 종교화 되는 식으로 모아진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살후 2:3-4)
 
이로서 바벨론에서 시작한 힘이 바벨론으로 되돌아왔다. 이것은 처음 바벨론이 다니엘이 지닌 꿈의 해석과 마주치는 지점이다. 곧 땅이 유일하게 하늘과 만나게 되는 그 지점이다. 바벨론은 야곱의 집과 필히 만나야 한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을 폈나니 내가 그들을 부르면 그것들이 일제히 서느니라 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나의 기뻐하는 뜻을 바벨론에 행하리니 그의 팔이 갈대아인에게 임할 것이라 그들 중에 누가 이 일들을 알게 하였느냐“(사 48:9-14)
 
궁극적인 절대의 자리를 유다 나라가 세상에 제공했고, 세상 나라는 힘으로 그곳을 접수하여 자신의 절대성을 빛내고 있을 뿐이고, 바로 그 지점에 ‘인자’ 되시는 메시아가 세상 심을 당연시 하기 위하여 창세전부터 점찍은 놓은 장소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세상을 정죄하기 위해 미끼로 사용하신 것이다.
 
“그 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사 24:23)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
[ 스 가 랴 ]
 
Ⅰ. 서 론
 
하나님이 방문하시는 날, 하나님의 횡포가 일어나는 날이다. 이것이 묵시다. 적이 있었다. 그 적은 하나님의 적이었다. 하나님의 적이 비로소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무산되는 시점에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메시아가 제 때에 등장하는 시기가 이 시기다. 메시아란 몸에 기름으로 칠을 한 자를 말한다. 그 기름으로 인하여 난관이 돌파하고 그 뒤쪽에서는 추종자들은 메시아를 따라서 그들이 도저히 건너갈 수 없었던 세계에 진입을 시도하는 방식이 ‘메시아를 동원한 방식’이다.
 
이것은 곧 현재가 도달될 수 없는 ‘낯선 미래’로의 접선을 의미한다. 즉 내가 다가가는 미래가 아니라 ‘다가오는’ 미래가 메시아로 인하여 현재에 덮쳐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미래를 끌어당길 만한 ‘낯선 현재 인물’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미래를 부를 만한 현재를 만들고 있는 위인은 모두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유다 나라로 하여금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괴력을 지닌 이방민족들을 등원시켜서 현재의 유다의 힘으로 미래를 건설하려는 모든 시도를 무산시키신 처지다. 성전의 망가짐과 불실함이 이를 증명해준다.
 
하지만 지지부진한 유대 나라의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적을 끌어당기는데 쓸모 있다. 여호와와 함께 한다는 나라를 업신여기게 만드는데 있어 유대나라가 제격이다. 초라한 성전 이외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나라다. 강력한 제국의 밥이 되고 치욕스럽게 유린되는 유대의 처지가 바로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 만들어진 환경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했던 바가 현실화되는 지점에서 스가랴 선지자가 등장한다. 인간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허수아비 뿐!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사 51:12)
 
단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믿는 자가 있다면 모든 유다 나라의 승리로 간주되는 전쟁이 개시되는데 그 단 한 사람이 ‘순’이 되어 유다나라에서 돋아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단 한 사람’을 부각하기 위해서 그 외의 사람들은 강력한 악의 세력 밑에서 속수무책임이 공개되어야 한다. 그 공개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된다.
 
 
Ⅱ. 본론
 
1. 질문과 답변
 
환상 1) 말 탄 사람들(1:8-17)
가. 도입구: “내가 이 날 밤에 환상을 보니”
나. 상징적인 대상: 홍마, 화석류나무, 자마, 백마
다. 질문: “내 주여 이것이 무엇입니까?”
라: 해석자: 천사
마: 답변: 세상에 보낸 순찰자, 하나님 말씀의 선포자
 
환상 2) 4 뿔, 4 대장장이
가. 도입구: “내가 눈을 들어보니
나. 상징적인 대상: 4 뿔, 4 대장장이
다. 질문: “이것이 무엇입니까?
라. 해석자: 천사
마. 답변: 유다와 예루살렘을 흩어지게 만든 뿔, 그 뿔을 자르러 온 기술자
 
환상 3) 척량 줄 잡은 사람 (2;1-13)
가. 도입구 : “내가 눈을 들어보니”
나. 상징적인 대상: 측량 줄
다. 질문: “그는 어디로 가는 길이냐?”
라. 해석자: 천사
마. 답변: 유다와 예루살렘의 폭과 길이를 측량한다.
 
환상 4) 등대와 두 감람나무 (4:1-14)
가. 도입구: “나를 깨우다”
나. 상징적인 대상: 순금, 등대, 7 등장, 7 관, 2 감람나무
다. 질문: 천사 “ 무엇이 보이느냐?” “내 주여, 이것이 무엇입니까?”
라. 해석자: 천사
마. 답변: 하나님의 눈, 기름발린 두 사람
 
환상 5) 날아가는 두루마리 (5:1-4)
가. 도입구: “내가 다시 눈을 들어보니”
나. 상징적인 대상: 날아가는 두루마리
다. 질문: 천사 “무엇이 보이느냐?”
라. 해석자: 천사
마. 답변: 온 지면에 두루 행해지는 저주
 
환상 6) 에바(됫박) 안의 여인 (5:5-11)
가. 도입구: “내가 다시 눈을 들어보니”
나. 상징적인 대상: 에바(됫박-곡물을 재는 단위), 2 여인, 시날
다. 질문, “이것이 무엇입니까?”
라. 해석자: 천사
마. 답변: 땅에 가득 찬 죄악, 여인의 악
 
환상 7) 4 병거 (6:1-8)
가. 도입구: “내가 다시 눈을 들어보니”
나. 상징적인 대상: 놋 산, 홍마, 흑마, 백마, 건장한 말
다. 질문: “내 주여 이것이 무엇입니까?”
라. 해석자: 천사
마. 답변: 네(4) 바람이 온 세상으로 나아가다.
 
2. 없었던 나라의 발생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4-5,8-9,11)
 
지상에 없었던 속성을 발생을 앞두고 유다 나라는 금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금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인간적인 한계에서 나온 것이다. (7:1-14) 평화롭고 기이한 나라가 예루살렘의 이름으로 등장 한다.(8:4-6) 문제는 기초다. 기이한 기초가 등장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신다. (9:1-8) 기이한 왕이 오시는데 상상도 못했던 왕이다. 겸손한 왕이시다.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9:9) 그런데 이 평화로운 겸손의 힘으로 원수를 이기기에 그 후에 등장하는 나라도 역시 겸손의 힘으로 평화가 지탱되어야 한다. (9:10) 겸손이 아닌 것은 의가 못된다. 겸손한 목사의 성격 따라 새로이 조정되는 이스라엘로 바뀐다. (10:1-12)
 
목자의 성격으로 된 결과는 은총과 연결이다. 여기서 거짓 목자들은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제거되어야 하는데 (11:5) 그들은 거짓 예언으로 인하여 양들을 삼키는 데 몰두했다. 그리고 참된 목자에 대한 값어치를 헐하게 쳐 주었다.( 은 30량 11:12) 이로서 이스라엘의 은총과 연결은 두 동강났다.
 
예루살렘을 통해서 새로운 나라가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 생겨나다. 그 방식은 하나님의 적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공격하도록 유도하시고, 그로 인하여 그들의 죄악에 대해 징벌 근를 확보하시려는 것이다.(12:9) 이 와중에서 참된 목자께서 옛 예루살렘의 성질로 인해 찔림을 당하시고 살해된다. (12:10) 이 분을 위하여 통곡하는 자들이 새로운 예루살렘의 주인공들이다.
 
참된 목자를 공격했던 자들이 거짓 목자임을 하나님께서 폭로시키시고(13:1-9), 소위 예루살렘의 장자라고 여기는 자들은 저주받는다.(주민의 3분지 2) 나머지 3분지 1 주민들은 시련 속에서 연단 받는 신앙으로 살게 된다.
 
새 예루살렘의 등장은 감람산이 쪼개지면서 시작이 된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산에 납신 것이다. (14:4) 메시아 자체가 종말의 징조다. 모든 일이 그 분을 겨냥하여 일어나고 있었다. 예루살렘은 옛 에덴동산과 같이 생수가 솟아나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른다.(14:8) 이제 예루살렘을 넘보고, 침략했던 자들이 벌 받을 차례다. 그들 가운데서도 회개하여 자기를 치신 여호와께 경배할 남은 자들이 생겨난다.(14:16)
 
그렇게 연합해서 드리는 절기가 초막절이다. 이럴 경우에는 모든 게 정결해진다. (14:20) 진정한 거룩이란 이러한 전쟁을 거쳐야 가능하다.
 
Ⅲ. 결 론
 
환상 아닌 것이 없다. 모든 것이 환상이며 그 표징들이다.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사 55:13) 그러나 징조는 넘치는데 길은 없다. 바늘 구멍 통과하기에 낙타는 덩치가 너무 크다. 아는 것도 많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쌓여서 종말을 이룬다. 철저하고 답답하게 막혀있어야 종말답기 때문이다.
 
아직도 내가 주인공인가? 우리 자신의 종말론은 늘 재편성되어야 한다. 종말은 나 보다 더 크다.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종말을 실어 나르고 계시고 그 결과가 ‘메시아의 피’였다. 이 피가 진짜 종말론이요 우리 위주의 일방적 종말론이 깬다. 나를 안 건드리는 하나님의 종말은 없다. 나 자신이 옛 사람이요 예수님 자신이 새 사람이다. 종말이란 ‘끝의 실시’를 뜻한다. 끝내기 위한 모든 조치가 종말이다. 따라서 왜 끝이 나야하며 끝장내는 방식이 무엇이냐를 알아야 한다.
 
역사란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다. 창조 시에, 인간이 없는 시절에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만 있었을 뿐이다. (요 1:1/잠 8:22-31/골 1:16-17) 없던 것을 없는 것으로 돌려 정리할 뿐이다. 없던 것이 있음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지 않겠다는 처사다. 그리고 진정한 있음을 유일한 있음으로 대두되게 하는 작업이 종말이 작업이다.
 
따라서 역사 속에서 ‘있음’은 ‘없음’으로 돌리고, ‘없음’은 ‘있음’으로 나타나는 작업을 실시하게 된다. 역사에서 ‘없는 존재’로 간주되는 천사와 하나님과 메시아와 악마가 ‘있는 존재’으로 활동의 주인공들이 된다. 그 대신 그동안 ‘있음’에 해당된다고 여겼던 인간들은 ‘없는 존재’로 취급받는다. 그들의 활동도 주체성을 잃는다. 다만 영적 존재로부터 부림을 당할 뿐이며 그 일을 통해서 정리되는 ‘정리 대상’이다. 이 정리를 통해서 새로운 의미가 주어지는데 그 의미란 유일하게 ‘있음’에 해당되는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조치로서의 의미다.
 
이처럼 다니엘이나 스가랴는 ‘인간의 존재성’을 ‘예수님의 존재성’으로 바꾸는 계획을 통보한 책이다. 바꾸는 방식을 ‘심판’이라고 한다. 천사들이 편대를 이루면서 전 세계 방방곡곡을 장악한다. 심판 할 만하다는 것을 정당화 할 만한 악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천국 백성을 끄집어내는 작업과 병행하는 이유는, 바로 언약백성을 학대하고 무시하고, 그들에게 임한 성령의 기적을 얕보는 것이 진정한 죄가 되기 때문이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셨다. 이로서 다니엘과 스가랴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의 인간화로 집약이 된다. 그 분의 이름이 바로 ‘인자(人子)’다. 곧 ‘언약에 의해서 고난당하는 유일한 분’이시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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