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올라가는 계단 피라미드

위 제목의 다큐 제목만을 보고 생각난 바를 적어 본다.

모든 인간들은 늘 성전짖기에 매진하고, 성전에 미쳐 있다.

우짜다가 우연히 목회의 길을 가게 되자
그 인간은 그저 먹고 살고자 다른 3디 업종의 직업보다
훨씬 손 쉽고 편하며 대우받고 온갖 교양수준을 저절로 갖출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 있다보면 저절로 귀티가 날 수 밖에 없는 그런
외부의 자극이 잔잔하게 몰려옴으로써 놀지도 않게 되고 적절히 성화를 이룰수 있는 그런
꿩먹고 가재잡고의 일석이조의 에덴동산과 같은 자리인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늘 꿈꾸던 그 소돔과 고모라 자리에
오늘날 목사들이 연연하고 있다.
그야말로 롯의 아내처럼 늘 그 뒤돌아 볼 수밖에 없는 여운이 깊은 자리이다.

그래서 자기자신을 아예 그 성전에 못 밖아 버린다. 여기는 내 자리 아무도 침범불가 !

나와 하나님과 이 교회는 삼위일체 절대 비난 불가 !

만약 비난하면 저주에 저주를 더하게 될 것이다 라고 무당의 저주 보다 더 못한 저주를 남발하는 곳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왜 그럴까?

성경을 보니 나와 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폭격을 통해서, 자신들의 죄악이 기정사실화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무지개가 떰으로써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되었건만

정작 그 은혜인 사랑이, 그 편애가 점점더 그들의 바벨탑 건립에 열심의 가차를 가해게 되는 그 빌미를 정당화 하면서 자기들만의 하늘의 통로 만들기에 집착하게 된다.
(내가 동생 아벨을 지키는 자 이니이까? 내가 홍수로 언제 심판 했습니까?)
주님의 살과 피를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격이 되는 것이다.

서로의 소욕을 못하도록 해서일까?

(갈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참 재미있게도 노아홍수 심판 과 바벨탑 건립의 사건의 반복이 역사 속에 계속 진행되고 있다.

바벨탑의 원조 가인 성이 건립되는 순간 노아홍수심판이라는 깨뜨림이 개시가 되고
무지개가 형성되는 은혜가 펼쳐지는 순간 바벨탑이라는 육의 소욕으로 은혜를 깨뜨림이 개시가 된다.

서로가 상대적인 양상으로써 펼쳐지는 것이다.

결국 그 때 그 순간 세워진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 그들에게 이미 완료된 지옥이 그들에게 계속 바벨탑 건립 이외에는 다른 일을 못하도록 덮쳐버렸다. 마치 죄의 소원처럼 말이다.
(그 이후에 바벨탑 허물어졌다고 멈춰졌는가? 아니다. 지금도 가상공간의 바벨탑까지 확장 확장 무한확장을 꿈꾸고 이유도 없이 영문도 모르는채 지옥의 확장을 위해 평생 종노릇하고 있다. 선악의 확장이다.)

애굽이 하늘과 자신들을 일치시킬려는 자기쪽에서의 출발인 신국을 건설하는 순간
모세라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굴러들어와서는 졸지에 주춧돌 행세를 한다.

그 굴러들어온 돌삐 하나 때문에
졸지에 애굽이라는 피라미드 중심의 모든 체제와 애굽 전체 한 덩어리가 붕괴되고 만다.

골리앗이 무너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 피라미드가 깨어지는 순간 그 틈으로 이스라엘이 형성 되게 된다.

이제 이 이스라엘은 바로 이런 피라미드 라는 신과의 접촉을 꿈꾸는 모든 성전과 신국과 신인들을 파괴함으로써 그 깨어지는 그 틈 속에서

새로 피어나는 새 이스라엘에, 그 잉여품에, 또 다시 기존 이스라엘은 그 잉여로 태어난 새 이스라엘에 뛰어들어야하고 동참해야 하며 그 십자가의 유동적인 사랑 앞에 늘 흐물 흐물하게 녹아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또 이스라엘 체제를 갖춘다는 핑계로 더더욱 딴딴한 요새가 됨으로써 도리어 십자가의 적이 됨으로써 이방을 통해서 이제 이스라엘을 침으로써 그 깨어진 틈 사이로 또 다시 남은자를 배태시키는 것이다. 남은자란 상대적인 타버린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불로써 다 태어버린 그 자리에서 그 남은 조각들을 통해서 다시 출발하는 것이 움직이는 사랑이다. 사랑은 고정 될 수가 없다.

결국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형상인 불의 형상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는데 목적이 있지
자신들의 형상을 보여주는데 목적이 있는게 아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불태움으로써 이스라엘이 누구의 형상을 누구의 불을 봐야하는가를 제시해 준다. 그러나 그 선지자들이 싫어버린바 되고 만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피라미드 라는 시스템체제를 갖출 때 마다, (마치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듯이)
피라미드, 바벨탑, 헤롯성전, 예루살렘성전 등등이 깨어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인간은 완벽한 시스템을 원한다. 그것이 불안하지 않는 자아를 보호해주는 유일한 버팀목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마표를 원했고 그 이마표로 완벽요새와 그 보호아래 영웅과 천재들이 양산되는 인간을 보호하고 수호하는 슈퍼맨의 용사들이 탄생하는 국가체제가 갖추어지게 된다. 위기의 순간이 다가올때마다 이마표가 있다. 대공황땐 슈퍼맨, 2차대전의 암울한 현실엔 배트맨

한결같이 에덴의 동쪽 편에 자리잡고서 늘 날마다 구원을 꿈꾸면서 하늘과의 일치된 하나됨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 순간 갖추어지기 전까지는 가만히 있다가 꼭 힘들게 다 세우고서 아 이만 하면 되었다 하는 순간, 모든 성벽, 모든 장막은 거두어진다.

돌맹이 하나가 떼구르르 굴러 온다.

어디서 놀던 놈이 굴러들어와서 소동을 일으키는가?

바로 그런 밉상을 조건들이란 조건들을 다 갖춘 세례요한과 같은 거름뱅이 들이

완벽하게 또는 완벽한 시스템의 이스라엘을 하나 하나 허물기 시작한다.

별거 아니다 싶어 한 놈 죽였더니만
그 그 다음 놈이 등장한다.

그 놈도 별거 아니다 싶어 다시는 이런 반란과 소동을 주동하면 가차없이 개죽음 당할 줄로 알아라는 시범으로 잔인하게 갈기갈기 찢어 죽인다.

그런데 웬걸 아랑곳 없이 불쑥 하고 또 그 다음 놈이 등장한다.

뭐야 이거 또야? 그래 누가 이기나 보자 !

그래서 두더지 게임이 시작 되듯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순간마다,
재미를 붙인냥 가차없이 망치를 날리면서 개패듯이 흠씬 두들겨 팬다.

그들이 들고 있는 망치로 자기 스스로 갖춘 성전 시스템 하나 하나를 깨부수고
최종적인 자기자신이라는 자아 라는 자신에게 그 망치를 가할 때 까지

절대로 멈출 수가 없고, 절대로 쓰러지지도 넘어지지도 낙심하지도 않도록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나고 다시 일어나고 다시 일어나야만 한다.

마치 애굽 왕 파라오 왕처럼 모든 것이 허물어 지는 그 순간까지도
인간이라는 자아의 분신 신의 축복받은 아들인 자신만의 이삭이 허물어지는 순간까지도
절대로 넘어지거나 낙심할 수 없다.

끝까지 추적해서 말씀의 운동력을 막아야 한다. 굴러들어온 그 돌삐를 깨뜨려야 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은 그 애굽왕과 애굽 군사를 통해서 영광을 받는다.

서로가 양보 없는 그야말로 극과 극의 상황을 치달으면 치달을수록 복음의 진가는 더더욱 빛난다.

이런 양상이 이스라엘 내부 속으로 들어가게 되니
이제는 이스라엘이 강퍅한 애굽과 애굽군사처럼 굴러들어온 돌삐 하나 하나를 깨뜨린다.

그러면 그럴수록 종말을 치닫는다. 주님 손해 보는 것 하나 없다.

이제 아들을 보내셨다. 왜 보내셧는가? 종말의 결정판인 것이다.

다 이루심 이다.

모든 육체 라는 시스템을 허물기 위한 확정을 십자가로 그 기준을 세우신 것이다.

곧 버리심 이다.

그 버리심 속에서 피어난 잉여가 바로 열매다. 은사다.

능력을 성령을 통해서 갖추자 라는 한국교회의 구호와는 정반대로

성령의 은사는 도리어 무능의 자리였던 처음자리로 되돌려 놓기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의로 여기는 이는 내 기쁨이라고 갓난아기의 그 핏덩어리를 안은채
덩실 덩실 춤추는 희열이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는 일방적인 편애다.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결국 모든 인간들은 아브람처럼 자기쪽에서 출발한 생명인 이스마엘을 생명이라고 우기는 것이 자기들 손으로 지은 성전이다.

그러나 따로 주님 쪽에서 주님이 낳은 생명이 있다 그것이 바로 이삭이다.

인간들이 생산해 낸 성화라고 우기는 그 이삭이라는 열매도 알고보니 이스마엘이였다.

과연 이삭인지 아닌지는 갈라보면 안다. 그 이삭을 바쳐보면 안다.

잘 되었다 꼴 좋다 잘 죽었다 라고 외치는 쪽이 십자가에서 드러났다.
이것이 솔로몬에게 주어진 지혜이다.

죽음이 아니면 그 진위를 가려낼 수 없다.

갈라 보자 짜개어 보자 아작 아작 찔러 보고 수셔보고 긁어보자
도금인지 순금인지 찔러 보면 안다.

손해 볼 것 없다. 주님이 손해 볼 것 없으면 없는 것이다.

주님이 현 정, 정,정,정,정, 정 화다 라면 현정화다.
임춘애 아니다.

이런 억지와 모순과 폭력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놀랍게도 저들이 들고오는 선악이라는 합리적인 법 보다 더 폭력적인게 없다.

우리는 인간들이 세우는 가인성, 에녹성, 바벨탑, 피라미드, 솔로몬황금성전, 헤롯성전, 예루살렘성전, 국가시스템, 자본주의들이 세워지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의 다수를 위한 이익을 위한 미명아래에 소수에 행해진 잔인한 폭력은 다들 눈감아 버렸다. 모르는척 했다.

그런데 그 소수가 누구인가? 이스라엘 아닌가? 가장 미약한 민족 가장 나약한 적은 자들이 이제는 또 다른 약자인 고아 과부 나그네를 향해서 폭력자로 행사하고 있지 않는가?

거룩한 성전 시스템 갖추기와 유지 보수 라는 미명아래에 모든 폭력의 정당성과 그것을 또 법이라는 것으로 내세우고 눌러버렸다.

폭력의 대상이 도리어 폭력의 주체자가 되어버렸다.

긍휼의 대상이 도리어 긍휼의 주체자로 나서고 법으로 정당화 해 버렸다.

무능자가 도리어 성령의 은사로 능력자가 되었다고 폭력의 정당성을 우기기 시작한다.

처음자리로 돌아가야 할 자들이 도리어 처음자리를 철폐시키는 성령의 일을 훼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모든 활동상활을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 피라미드 즉 교회에 집중케 한다. 이것이 기독교 역사라고 우기는 이단 기독교의 만행이다.

과거에는 왕을 세워달라는 백성의 요구로 그 우상성과 악마성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듯이

이제는 목사라는 직분의 자리로 그 만행들이 일어난다. 그 목사와 끄나플 들이 온갖 육의 욕망의 배설물을 자기영역표시하듯이 온 교회 안 밖으로 똥을 쳐발라 놓고서 통과세를 내라고 부추긴다. 다들 똥이 무서버서 피하나? 더러버서 피한다고 하지만 정작 똥을 피할길이 없게 되었다. 면죄부를 파는 짖을 더럽게 여겨도 어쩔수 없이 체념했듯이 이제는 목사와 그 끄나플 들의 꼬장들을 아무런 반발없이 받아들어야할 입장에 놓인 것이다.

그래서 울부짖게 하신다. 그 고통이 가중이 될수록 주님은 그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신다.

즉 자신들이 세운 왕에 의해 자신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는
마치 선악을 괜히 알게 되어서 그 선악이 자아를 형성하고 그 자아가 왕노릇하게 되니
자기 욕심이 자기가 치여서 고통받게 되는 원리와 똑같이
거룩과 왕과 성전과 율법을 그런식으로 소유하게 되고
도리어 그것에 의해서 압제 고통 받게 된다.

바로 이런 육의 속성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영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왕의 속성이 그대로 성전의 속성 속에 다 들어가게 됨으로써
이제 교회는 육을 괴롭하게 하는 가해자로써 자리잡게 되고
동시에 그 피해자인 교회는 그 고정화된 교회라는 틀을 깨뜨림으로써
새이스라엘이 남은자로써 잉여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 유동성을 서로가 서로를 맞물리도록 하는
먼저 된자 나중되고 나중 된자 먼저되는 방식으로써
오로지 주님 자신만의 사랑만을 부각시키고 있지
인간이 사랑을 행한다는 그 고정성을 일체 허용치 않는 방식으로 진행이 된다.
인간의 사랑의 실천이 고정이 되는 순간, 그렇지 못한 자들에 대한 핍박이 형성이 되어버린다. 마치 브닌나가 아이를 낳는 순간 잉태치 못한 자가 졸지에 이스라엘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니 다시 출애굽의 바로 강퍅 부르짖음 출애굽 등의 양상이 더 골이 깊게 진행이 되는 것이다.

나는 복음증거자 이다 라고 고정하는 순간
복음이라는 사랑이 동시에 가해자로써 자리잡게 된다.
설사 그 폭력이라는 가해성으로 계속적으로 자기자신을 스스로 치는 가운데에서 나오는 약함을 무능함을 은사로 열매로 나누어지게 되면 몰라도
인간의 한계성은 항상 보상을 노리는데 있어서
그 댓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을때에 일어나는 폭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하나님 마저 죽이는 식으로만 이상스럽게 일관한다. 이것이 가인의 제사이다. 보상이 충족되지 못한 억누르고 억눌러서 참고 참고 참고 견디는 그 참을성에서 폭파한 것이다. 그리고 살인이다.

자기자신에게 향해야할 살인이 (자기부인)
정작 타인에게 행해진다. (이것이 죄의 소원이다.)

이유 없이 자기자신을 세우기 위해서 타인은 허물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소원은 남을 세우기 위해서 자신을 허물어버리신다.

그리고 아버지의 소원을 세우기 위해서 모든 가짜를 허물어 버리신다.

논개다. 적장과 함께 껴안고 자폭한다.

이런 예수님의 소원이 아니였다면

누가 저 인간의 종교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목사의 탐욕에서 교회의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으랴?

그들에게 노예로 종노릇하면서 그들의 피라미드 쌓기에 소모품으로 쓰여져서
단물 다 빨아먹은 다음에는 뺕어버림 당할 입장이 아닌가?

차라리 어차피 양 쪽 다 소모품으로 이용할려고 나올 거라면
하나님만 법이고 나머지는 법이 아님을 알자
법이다 라고 우기는 것에 거짓임을 알자
교회법 마저도 법이라고 우기는 놈들에게 하늘나라에서도 통할 법이냐 라고 콧방귀를 뀌자

예수님만 진리이면 그것으로 족하자
예수님 아닌 다른 놈들? 목사나? 장로나? 진리라고 우기면 이미 가짜인줄 알자
이제 잔머리 굴려서 예수님을 앞세워 운운하면서 자기 말이 진리라고 우기면 그 내막을 홀라당 벗겨버리자.

십자가란 인간의 그 모든 한계성을 낱낱이 다 까발린다.
미흡하고 미완료적이면서도 불구하고 기여이 완벽하고 완료적이다고 우기는 그 모든 내막들을 하나 하나 가면을 벗겨야 한다.

피라미드인 바벨탑이 세워졌다는 것은
깨라고 주신 은혜로 알고 마음껏 깨뜨리자

만약 교회를 마음껏 깨뜨릴 의향이 없는 자라면
그 사람은 다른 교회를 세우는 허망한 꿈을 꾼 것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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