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 피 남편이냐 돈 남편이냐?

(오로지 피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는 무능한 피 남편)



성경을 사모해서 열심으로 한 신학이 도리어 성경을 삼킨다. (내 열심이 특심이오니(왕상 19:10))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시 69:6, 개역) 『만군의 주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로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로 나를 인하여 욕을 당케 마옵소서』
(시 69:7, 개역) 『내가 주를 위하여 훼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내 얼굴에 덮였나이다』
(시 69:8, 개역)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이 되었나이다』
(시 69:9, 개역)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시 69:10, 개역)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시 69:11, 개역)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저희의 말거리가 되었나이다』
(시 69:12, 개역)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말하며 취한 무리가 나를 가져 노래하나이다』
(시 69:13, 개역) 『여호와여 열납하시는 때에 나는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시 69:14, 개역)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시 69:15, 개역) 『큰 물이 나를 엄몰하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로 내 위에 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시 69:16, 개역)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시 69:17, 개역)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시 69:18, 개역)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 하소서』
(시 69:19, 개역)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시 69:20, 개역)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요 2:9, 개역)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요 2:10, 개역)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요 2:11, 개역)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 2:12, 개역)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요 2:13, 개역)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요 2:14, 개역)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요 2:15, 개역)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요 2:16, 개역)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8, 개역)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요 2:1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개역)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 2:21, 개역)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 2:22, 개역)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요 2:23, 개역)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요 2:24, 개역)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요 2:25, 개역)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룻기를 대하면 좀 낯설은 느낌이 든다. 마치 창세기에서 갑자기 불쑥 느닷없이 생뚱맞은 이야기인 다말이야기가 나타나듯이 룻기 또한 그런 느낌이다.

사사기에 들어가던가 아니면 여호수아서에 들어가든가? 그런데 룻기가 아주 미약한 분량임에도 그 흐름에 전혀 낯설게 붕 뜨듯이 증폭기처럼 한권의 내용으로 차지하고 있다.

왜 따로 해야만 할까?

또 룻기를 보면 욥기가 생각난다. 마치 엘로힘 하나님과 여호와 하나님의 대립같다.

또 룻기는 전남편 율법이냐? 아니면 새남편 율법 외에 한 의냐? 라는 느낌도 든다.

또 룻기를 통해서 작년부터 맴도는 것이 첫사랑 곧 처음자리의 그 잉여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자꾸 룻기가 자꾸 떠오른다.

왜냐하면 소위 효자 효녀 되자를 유발케 하는 아버지 어머니날에 늘 습관처럼 해오던 어버이 주일에 행해지는 설교들을 들어보면 대부분 유교인지 복음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구분이 없이 끝나는 것에 늘 법적으로 눌려버리는 것에 반하는

전혀 다른 정작 한 여자를 통해서 남자를 계통을 다 끊어버리는 이 여자의 하나님이 바로 괴롭히는 하나님을 몰고왔다는 점이다.

효도는커녕 집안 내력을 몰살시키는 폭력의 하나님을 그녀가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룻기를 첫사랑 처음자리 잉여자리 와 자꾸 연관 시킬려는 나의 이런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것일까? 계속 그것이 맴돌면서 떠나지 않는다.

즉 상대적인 나오미의 하나님은 곧 자신의 남편의 하나님과 동일한데 그 하나님에 대해서 다른 하나님의 개입이 바로 룻의 하나님으로 인해 차이가 드러나게 된다.

그 차이성을 고백하는 자가 바로 전능하심을 직접 경험한 나오미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다 라는 말은 곧 정반대의 의미이다.

어머니의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의 조작된 하나님으로 잘못 알고 계시군요 라고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하나님을 약속의 하나님으로 따랐지만 정작 당사자 나오미는 약속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엉터리 즉 남편과 남자계열 속에서 우상화 된 자기를 위한 하나님을 그 엉터리 그대로 맹목적으로 따라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시어머니를 따라간 효녀가 아니라 시어머니를 건지는 룻이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시어머니를 건지기 위해서 남자를 다 죽여버리시는 것이다.

마치 며느리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를 건지기 위해서 유다의 아들들을 일부러 다 죽이시듯이 말이다. 계시가 중요하지 인간은 흙 즉 계시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그릇으로써 그 영광에 참예한 것으로 족하다.

자 그렇다면 나오미의 남편의 하나님은 왜 우상인가? 즉 왜 돈 남편인가?

약속의 땅이 가뭄이 들자 바로 약속의 땅을 버리고 취사선택으로 타국에 생존하고자 이민을 가게 된다.

그렇다면 정작 본인들은 약속을 마치 취사선택인냥 자기유익에 따라 해석을 하겠지만 전능자는 그 약속에 땅에 거하는 인간 즉 이스라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거하도록 하신 것이다.

어느 정도로 중요한고 하니 이스라엘을 버리시면서 까지 그 땅이 약속의 의미에 조금이하도 훼손되는 일에 일체 허용을 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나오미의 남편은 이 약속의 땅의 중요성을 부재성으로 즉 탈락 당함으로써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열매들은 나무와 같이 가지와 열매를 다 일방적으로 탈락 시켜버린다.

그리고 새롭게 진행되는 약속의 흐름에 의해 원가지를 짤라버리고 이미 말라 죽어버린 가지를 접붙임 한다. 그것이 바로 이방여자 룻이다. 왜 이 룻이라는 이방여자가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가 하는 점이 여기서 밝혀진다.

예수님 곧 전능자 괴롭히는자 여호와는 이 피의 의미 곧 약속에 대해서 일체 양보가 없다.
피를 보여줘야할 이스라엘이요 피를 드러내어야할 남편이 정작 피 외에 다른 것 결국 돈 이 피의 의미를 희석시키는 일에 일에서 가감하게 짤라버리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빈자리 티오 T.O. (turnover의 약자이다. 남은자리 여분)는 이방여자 룻에 의해서 약속의 의미를 명확하게 증거토록 하신다.

문제는 이것이다. 왜 룻이 나오미의 하나님에게 뛰어들었는가 이다. 분명히 다른 이방여자 며느리는 오르바는 자기 민족과 그 신에게 돌아갔는데 말이다.

(룻 1:1, 개역)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룻 1:2, 개역)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룻 1:3, 개역)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
(룻 1:4, 개역)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거기 거한지 십 년 즈음에』
(룻 1:5, 개역)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룻 1:8, 개역)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룻 1:9, 개역)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룻 1:10, 개역)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룻 1:11, 개역)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룻 1:12, 개역)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생산한다 하자』
(룻 1:13, 개역)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룻 1:14, 개역)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룻 1:15, 개역)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룻 1:16, 개역)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 1:17, 개역)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 1:18, 개역)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룻이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과의 차이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엘리멜렉처럼 먹을 양식 주면 믿고 먹을 양식 안 주면 언제든지 버리겠다는 조건부의 하나님인 원인 있는 결과로 따지겠다는 그 하나님의 세계를(엘레멜렉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이 그렇다 라는 것을 대표적으로 대변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살아남은 나오미 또한 마찬가지 이다.)

정작 이방나라 모압 여자인 룻은 먹을 양식이 다 떨어진 오로지 죽음 뿐인 그 상황에서 그 죽음에 뛰어들겠다고 약속의 하나님이 자기의 하나님이다 라고 나오미에게 전도하고 있다.

정작 약속의 백성은 조건부로 이제 배고프게 되었으니 하나님을 버려서라도 자신을 살리겠다고 자기를 위한 신을 찾는 우상을 찾는 반면에

정작 우상 나라의 여자는 죽음 뿐인 전혀 배고픔도 해결 못하는 그 여호와 약속의 하나님을 진짜 하나님이라고 우상을 버리고 죽음에 뛰어든다.

정작 약속의 백성은 약속을 버리고 우상(돈)을 쫏고, 정작 우상(돈)을 쫏던 우상백성은 우상을 버리고 약속을 쫏게 된다.

(마 21:12, 개역)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마 21:13,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 21:14, 개역)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마 21:15,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마 21:16, 개역)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마 21:17, 개역)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마 21:18, 개역)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마 21:19, 개역)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마 21:20, 개역)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마 21:2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마 21:22, 개역)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마 21:23, 개역)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마 21: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마 21:25, 개역)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마 21:26, 개역)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마 21:27, 개역)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마 21:28, 개역)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마 21:29,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마 21:30, 개역)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마 21:31, 개역)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마 21:32, 개역)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즉 둘째아들(이방)은 싫소이다 했지만 그 후에 뉘우치고 가서 아버지 뜻대로 했고
맏아들(이스라엘)은 가겠소이다 했지만 가지 않았던 것이다.

과연 누가 처소인가? 누가 하나님의 집인가?

정작 무화과 나무의 저주를 보고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다 라고 그 저주에 뛰어들고

정작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은 이방나라의 신을 쫏고자 저주를 피해서 도망쳤고 약속의 땅과 약속의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이다.

이 무슨 아이러니한 모순인가?

처음사랑에 빠진 초신자는 예수님만 쳐다보면서 교회라는 강도의 굴혈에서 희생당하겠다고 오고(스데반 집사)

정작 강도의 굴혈에서 돈에 미쳐있는 교회꾼들은 그 초신자를 삼겨먹을려고 입맛을 다시는 하이에나였다는 것을 예수님은 자신의 신체를 허무심을 통해서 밝혀내신다.

즉 예수님의 신체에가 쪼개지는 그 틈 사이로 참교회와 우상교회의 차이성이 드러난다.

처음사랑이란 긍휼의 자리이다. 긍휼의 자리란 곧 저주의 자리이다.
아무리 봐도 저주 뿐이다. 심판 받아 마땅함 뿐임을 보는 자리이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눅 5:8, 개역)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나는 마땅히 버림받아 심판받아 저주 받아 죽어야할 죄인 즉 원수의 자리에 있어야 할 자이다 라는 것이다.

주님이 찾으시는 유일한 자기 백성 곧 자기 피를 발리울자가 바로 99마리 양 버리고 한 마리 잃어버린양

(마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눅 19:10, 개역)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 자신의 처소가 곧 부스레기 자리 찌끄레기 자리 빈자리 티오 공석인 자리 남은자의 자리 처음사랑의 자리가 예수님이 직접 마련하신 성령의 자리인 것이다.

그래서 광야 교회다 인간이 도저히 만들어낼수 없고 인간의 손으로 지을수 없는
예수님의 살과 피로써만 지어진 한 몸 광야 라는 긍휼의 자리인 광야교회다.

(마 15:27,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막 7:28, 개역)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님은 가짜 이스라엘의 상을 엎어버리시고 가짜 교회를 자신의 신체와 함께 자폭테러로써 허물어 뜨리면서 그 허물어지심으로써 흘려지는 그 피로써 세워진 교회가 바로 광야교회 부스러기 교회 남은자 교회인 것이다.

그러나 이 무가치한 찌끄레기의 의미, 잃어버림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의 교회는 항상 자기의 가치성에 예민해져 있다. 그것을 대변해 주는 것이 바로 엘리멜렉의 하나님이요, 엘로힘 하나님이다.

이 피 흘림이 없는 하나님을 깨뜨리는 분이 바로 괴롭히는 전능자 여호와 이시다.

저주의 하나님이다. 지옥의 하나님이시다.

이 십자가의 저주를 해석 못하는 자는 다 지옥이다.

오로지 잃어버림의 의미를 예수님으로부터 심겨진 자에게만 이 의미를 알게 된다.

그래서 언제든지 버림받아도 상관 없는 찌그레기 부스러기 남은 티오의 빈자리인 광야교회를 외치지만

정작 가짜 교회는 아직도 광야냐 라고 비아냥 거리면서 자신들은 약속의 땅에 왔다고 사기를 친다. 그러나 그 약속의 땅 자체가 그들을 거부하고 내 뱉어버린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다시 잃어버림의 의미를 아는 광야교회로 채운다.

욥기에서 욥을 향한 세친구의 공방은 결국은 이 싸움이다. 욥은 알수 없는 그 고난과 광야가 왜 닥치는가에 대해서 원치 않는 저주에 동참하게 되지만

정작 욥의 세친구는 엉터리 하나님관으로써 욥을 저주 받았다고 회개하라고 다구친다. 이 얼마나 진심어린 친구다운 모습이여 욥은 진정한 친구로써 대우하는 모습인가? 바로 그것이 거짓이다 라는 것이다.

나오미는 괴롭히는 하나님을 만나고 기쁨이 아닌 마라 괴롭다 라고 이름을 교체시켜 달라고 요청한다.

약속 앞에서 긍휼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즉 저주와 심판과 죽음을 당연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정작 약속을 자기유익으로써 챙겨버렸기에 구원의 정당성을 추구한 것에 대해서,

여호와 전능자(괴롭히는) 하나님은 이 두 차이를 명백히 보여주기 위해서 멀리 멀리 떨어뜨려 놓는 것이 아니라. 바로 두 눈 앞에서 가장 잘 대비가 되도록 그 차이를 드러내신다.

나오미는 이제 룻의 하나님을 믿어야 할 판국이다. 마치 사도행전의 결론인 사도바울이 자신의 전도여행의 행함의 결과를 믿어야 할 판국이 아니라, 도리어 성령의 일방적인 행방에 자신을 끌려다녔을 뿐이고 이 모든 것이 예언대로 말씀대로 기록된 대로 되었다고 이사야의 말씀을 새록 새록 몸에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믿어야 할 판국에 놓여졌지 그것을 지식으로 챙길 입장이 못됨을 도리어 빼앗기고 광야교회처럼 다 삭제 당할 판국에 놓였음을 직시하게 된다. 아무리 봐도 자신은 무익한 종이요 찌끄레기요 부스러기요 빈자리일 뿐인 죄인 중의 괴수 이다 라는 것을 말이다.

나오미는 몇 백년 이스라엘 혈통으로 믿어오던 전통을 다 버리거나 빼앗길 판국이 바로 이 제사 보다 더 나은 순종으로 다가오는 룻의 하나님 앞에서 몽땅 빼앗겨야 할 판국이다.

새로 믿어야 할 판국이다. 마치 수십년 그것도 정통신학이고 보수 중의 보수요 개혁 중의 개혁인 전통사수 목사가 몽땅 이 초신자 이제 처음사랑으로 처음자리로써 아무것도 없는 빈자리처럼 텅빈 공터인 이 룻의 하나님에 의해서 완벽하게 허물어 뜨림을 당해야 하는 것을 말이다.

그 당하는 것이 긍휼인데
허물어 뜨림을 당하기는커녕 더욱더 그 초신자 룻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시험 하는 것이 지금의 교회들의 작태 이다.

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개같은 이방여자 보다 나은 신앙이 자신들이다 라고 말이다.

차라리 창기에 세리가 먼저 천국에 간다 라는 이 새언약의 의미를 그들은 해석할 길이 없다.


이 잃어버림의 의미 처음자리 긍휼의 자리를 성령은 늘 발생시키는데 있어서 눈에 보이는 교회는 늘 허물어 져야 한다. 그리고 다시 새롭게 그 잃어버림의 의미를 드러내고 증거하고 고백하기 위해서 다시 세워지고 모이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인간의 머리의 계산 속에 깔아버리는(지식 습득) 무리들이 항상 발생하고 일부러 붙여주시는 이유는

(요 1:13, 개역)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않음을 알도록

그래서 늘 무화가 나무의 저주 곧 심판 속으로 광야 속으로 십자가의 죽음 속에서

피의 의미의 진가를 보여주기 위한 비밀인 것이다.

니캉 내캉 단 둘이만 알자 라고 은밀만 비밀 그래서 아무도 알 수 없도록 하신 것이다.


자 결론적으로 왜 일부러 우상적인 하나님을 거쳐서 약속의 하나님의 차이를 드러내시는가?
여기에 모든 인간을 두 패로 나누어서 한 쪽은 아무리 이스라엘 속에 있어도 우상의 하나님을 믿도록 하여서 약속의 하나님을 아무리 이스라엘 밖에 있어도 믿는 약속에 뛰어드는 그 무가치하고 불의한 것에 충성하는 그 어리석은 지혜와의 대비를 보여주시는지?

오직 예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이 두 차이를 두 그릇으로써 증거하신다.

십자가만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은 두 그릇 종류 속에서 예수님만을 증거하도록 되어 있다.

그럼 구원은 도대체 우찌 되는가? 남은자만 구원하신다. 즉 빈공터 찌끄레기 부스러기만 구원하신다.

그런즉 우리는 유구무언 할 말이 없다.

의를 쫏지 않던 이방은 믿음(의)을 얻었고
의의 법을 쫏던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해서 믿음(피)을 쫏지 않고 행함을 의지 했으니거치는 돌(십자가 불륜, 불의함)에 부딧힌 것이다.

즉 정작 저주와 심판과 죽음에 이방여자 룻은 뛰어들었고
도리어 저주와 심판과 죽음에 뛰어들어야 할 이스라엘은 약속을 버리고 광야를 버리고 도망치다가 걸려 넘어져 다 죽어버린 것이다. 나 애굽으로 에덴동산으로 돌아갈래

그래서 예수님은 이 거치는 반석(십자가)을 동산 중앙에 두노니 걸러낼 자 걸러내고 하나님이 심지 않는 자는 다 뽑아버리는 일을 이 십자가를 기준으로 해서 펼치시겠다는 것이다.

돈의 가치 노동의 가치 그 댓가 그 행함의 의미와 상반되는

피의 가치 죽음의 가치 심판의 가치 버림받음의 가치 빈자리 남은자리 찌끄레기 부스러기의 가치를 높이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룻의 하나님은 피 남편이요 괴롭히는 전능자요
그 전능자 괴롭히는 자가 정작 나의 구원자이고

인간들이 믿고파 취사선택이 되는 우상의 하나님은 돌이 떡 되게,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안 다치는 기적을 베푸시는 나를 인정해주는 자, 그리고 나를 높여주는 자의 하나님이 바로 마귀가 심은 하나님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나 참 하나님은 먹을 것 날려버리시고 그 죽음 속에서 약속만을 크게 보이도록 하시고
악한세대가 요청하는 자기구원챙기고 자기를 인정해 주는 기적적은 구원이 아닌 정작 버림받고 심판받고 하나도 기적같아 보이지 않는 싫어버린바 된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만 고집하시고 피만 드러내시고. 나를 높이시기는커녕 철저하게 짖밟아서 낮추어서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주님의 살과 피만을 먹이시겠다는 그 불가능을

정작 이스라엘은 못하는데 이방여자를 통해서 죽은자를 살리듯이 일하시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의 피만을 가치 두기 위해서

아무리 봐도 무능한 피 일 뿐인데 그 무능한 피가 싫어버린바 된 십자가의 피가 전 인류의 죄를 흰 눈 같이 희게 넘치도록 덮고도 남을 정도로 이 걸림돌을 만방에 심어버리겠다는 것이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 9:19, 개역)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롬 9:20, 개역)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1, 개역)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개역)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개역)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 9:24, 개역)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롬 9:25, 개역)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롬 9:26, 개역)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9:27, 개역)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 9:28, 개역)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롬 9:29, 개역)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 9:30,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롬 9:31, 개역)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롬 9:32, 개역)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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