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신앙 종교와 집단적인 묵시 단체 (판대기)

현대 교회가 배나 일곱귀신 씌여진 이유(포로된 이유)

구원과 천국과 신앙과 믿음과 사랑과 성경과 은사와 성령과 모든 의미들을 개인 챙기기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
또 그것을 교회라는 집단성을 앞장세워서 목사개인의 사적인 목회탐욕에 다 서로 서로를 이용하기 때문임(유유상종)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9-04-08 23:36:56,
신앙은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2009-04-08 23:40:17,
창세기 35장의 핵심은 나의 육을 매장하는것이고 정리하는것이다 그래야 새 생명이 태어난다 그것이 거듭남이다 부족해도 우리는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의 삶을 살아라


답변 :

구원(이스라엘 창조)을 말할때는 항상 집단적이지 개인이라는 의미 조차도 부여하지 않습니다. 개인이 뭐지 라고 개인의 관리 차원의 개념이 일체 없습니다. 즉 개인 구원이란 없습니다. 개인 약속도 없고요 개인 피도 없고 개인 그리스도의 몸도 없고 개인 천국 따위란 없습니다. (그렇기에 현대인에게는 피조물 개념이 없듯이 집단 개념도 없습니다. 집단 동아리도 어디까지나 자기개인의취사선택일 뿐인 하나의 선택사항이니 이스라엘의 집단 의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집단적인 의식입니다. 즉 그 집단성은 피로써만 묵여진 겁니다. 피 밖에서는 개인적인 것 뿐입니다.

그런데 이 집단을 앞장세워서 그 빌미로 개인적인 구원을 챙길려는 자들이 등장 합니다. 반드시 개인을 바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본심은 감춘채 집단을 항상 앞장세우면서 개인적인 구원욕망의 야심을 드러내지 않는 겁니다. 아간의 범죄나?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또는 광야 교회에서 애굽으로 돌아갈려는 자들이나? 또는 최근 글에 밝혔던 약속의 땅을 버리고 다른 양식을 찾아나서는 룻기에 나오는 엘리멜렉 가정 등 뿐만 아니라. 다름 아닌 이스라엘 내부에서 개인적인 삶을 따로 챙기는 바리새인이나? 특히 사두개인이 부활이 없다 라는 것을 볼 때 더더욱 그러합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멸망의 상황을 치닫고 있을때에 더더욱 개인적인 구원을 챙길려는 의식은 너무 강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수요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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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교회를 무엇으로 보느냐 하면 누락의 의미를 보여줘야 하는 묵시적인 집단단체이기 때문에 항상 타이타닉호가 생각 납니다.

서서히 바닷물의 죽음 속에 깔아앉는 밑에 구멍이 뻥 뚫혀버린 집단유람선입니다.
교회란 예수님의 죽음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누리는 자입니다.
누리는 방식은 자기부인 외에는 없습니다. 자기의 누락됨을 통해서 몸이 자기 것이 아님을 보게 되는 겁니다. (오늘 수요설교에서 자아가 몸을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듯 자꾸 개인적인 소유로 보고 있음 몸 즉 교회란 예수님의 것임 예수님의 싫어버린바 된 집단적인 이스라엘의 묵시성을 보여주는 것이지 자기의 뜻대로 싱싱한 젊은 모습을 보여줄려고 하는 개인적인 몸이 아님 그래서 엘리멜렉은 더 이상 약속의 땅이 자기 몸을 유익하게 만들어주지 않자 약속의 땅을 버리고 자기 몸을 따로 설정하지만 정작 이스라엘이라는 집단 속에 우상적인 개인의 삶 밖에 모르는 이방여자가 이스라엘 집단 속에 들어와서 아무도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다운 집단 의식이 없을 때에 새로운 이스라엘을 집단적 묵시단체로 -신약에서는 종말의 단체- 육의 후패 속에서 속사람은 날로 날로 새로 다시 새로출발하는 것이다. 이 새 출발에 이스라엘은 누락을 또 보여주게 된다. 즉 자기부정이고 집단이스라엘의 의식 곧 약속의 피만 남긴다.)

그래서 성화의 차원에서 바리새인들이 항상 집단성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때에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서 양보를 못하십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집 즉 무능자입니다. 잉여자입니다. 라고 고백해야 할 자들이 도리어 교회를 통해서 대중 인기를 업고 자기 구원의 정당성을 율법 하나님의 거룩을 이용해서 자기유익을 교묘하게 숨기는 외식으로 가득채울려고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구원 챙기기 위한 특히 약대는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내는 그 바리새인들의 집단을 앞장세운 개인구원 챙기기에 정면 도전하시는 겁니다. 바로 이런 어두움의 활동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악마의 집단 지옥 잉여들이 있어야 그것도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야 주님이 따로 세우시는 묵시적인 원인없는 결과의 룻기가 접붙임으로써 원가지를 탈락 시키시는 겁니다.

광야교회에서 애굽으로 다시 되돌아 빠져나가는 그들이 정작 애굽에서 탈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피의 공로를 무시한채 피의 희생당함을 거부하고 다시 애굽으로 포로될때에
7배(묵시적인 의미)나 더한 귀신을 집어넣어서 지옥자식 만들어 버리시는 겁니다.

(마 12:40, 개역)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마 12:41, 개역)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마 12:42, 개역)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마 12:43, 개역)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마 12:44, 개역)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마 12:45, 개역)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요나의 사흘 동안의 큰물로기 뱃속에 있는 잃어버림의 경험)을 거부하고 악한세대(기적을 요구하는)는 멸망당한 애굽나라보다 7의 귀신을 집어넣어서 그 저주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딱 이 일곱귀신 들어간 모습들입니다.

피의 의미를 개인적은 유익으로 챙겨버리게 되니까(종교마약이란 유익챙기기-우상) 개인적인 신앙에 관심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루시는가에는 관심이 없는 겁니다. 이스라엘 조차도 피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 소모품으로써 사용하시는 겁니다. 사도들 직분자들 성령의 은사들이 다 여기에 집중이 되어 있습니다.

거짓선지자와 참선지자의 차이점을 보면 알수 있듯이 거짓선지자가 주창하는 것은 개인적인 삶을 돌아보라는 겁니다. 그러나 참선지자는 이미 이스라엘의 미래를 다 봐버렸고 그 미래를 자신의 신체에 담고 증거합니다. 누락 되어서 상관없는 미래가 완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거짓선지자의 주장처럼 개인적인 삶을 관리하게 되어버리면 이스라엘 전체가 멸망으로 흘러가도 자신 개인만큼은 구원을 챙기는 알리바이 형성에 매진하는 모습만 갖추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의식이 아니라 선악의 의식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해도 그것이 사생자가 아니기에 매를 대시는 것을 매 맞는 것 자체에 안 맞는 개인적인 삶을 갖추어서 안맞으면 된다고 보는 겁니다. 이미 결정된 계시로써의 매와 징계를 통해서 예수님의 희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로움만 제대로 갖추면 된다는 이런 개인적인 의식이 바로 거짓선지자가 심는 겁니다.

그러니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를 해석할 길이 없는 겁니다. 버림받을 짖도 하지 않았는데 왜 버림받냐 라는 겁니다.

자신들은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개인적인 삶을 철저하게 갖추었는데 말이죠.

바로 그런 너희들의 외식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버림받는다는 겁니다.

엘리야가 850 대 1로 싸워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적들이 오니까 차라리 죽여달라고 합니다. 자기 이미지가 개인적인 공적으로 850대 1로 싸운 것이 고정화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일부러 그렇게 큰 공적의 개인적 이미지 경험을 지워버리는 세미한 음성 무능한 소리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열심히 특심인 엘리야를 벌써 죽이고도 남았지만 꺼져갔어야 하는 등불임에도 불구했지만 그 꺼져가는 등불이 마땅함을 끝까지 보여줘야 하기에 일부러 세미한 음성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으로 다가오시는 겁니다.

개인적인 큰 성화 큰 행적 큰 믿음 큰 신앙의 생활의 열심에 도리어 물 뿌리는 팍 식혀 버리고 등불을 꺼버리는 일이 바로 집단적 이스라엘의 묵시역할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너가 지금 희생의 피의 의미를 드러내어야 할 자가
자기 개인 신앙생활 챙기겠다고?

그것이 바로 아간의 범죄요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죽음이요 일곱 귀신 집어넣는 방식이고
바리새인의 모습이요 개인적인 삶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 개인적인 삶으로 빠져 버렸다는 것을 보여주고서 새집단 새이스라엘을 세우니까 가짜 개인화 된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이스라엘이라고 우기면서 정작 예수님의 새언약의 새이스라엘 백성을 세울려고 할때에 가장 악마짖만 골라서 하는 애굽이 되어버리는 모습인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출예루살렘 하시면서 광야교회(사도행전)으로 새집단을 출발 시키시고 희생의 피 발라서 본향을 향해 떠나는 나그네집단 잉여집단으로 새창조 하신 겁니다.

구약의 상황과 똑같습니다.

이제 새이스라엘은 집단적으로 수많은 원치 않는 전쟁을 붙임당하게 됩니다. 이미 완료된 승리의 전쟁을 말입니다. 넉넉히 이긴 전쟁입니다. 피의 의미를 모르면 도리어 일곱귀신 씌여서 이 새이스라엘 집단을 무너뜨릴려는 집단으로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새이스라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되어서 가는곳마다 복과 저주의 두패로 나누는 갈라뜨리는 거룩의 일을 하시는 성령의 흐름에 졸졸졸 따라다니는 집단으로 된 겁니다. 가는 곳 마다 소동이 일어나며 두 패로 나누는 겁니다.

바로 이 두패로 나누는 그래서 졸지에 미움받는 그 일을 할 줄 모르는 현대교회와 그 교인들과 그런 개인에게 신앙생활 말이 신앙이지 종교생활을 강요하는 실적남기기 천국갈수 있는 행위 마일리지 쌓기하는 자들에게서는 지옥의 잉여성과의 차이성을 드러내지를 못하는 겁니다.

주님의 자녀는 양으로 취급받는 곳에서 늑대를 유발케 하고
또 역으로 모함당해서 늑대로 취급받는 곳에서 가짜 양들을 유발케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바알세불 걸린 악마 대장으로 취급 받는 곳에서
거짓 목자들을 들추어내시듯이

하여튼 무조건 상극으로 서로의 소욕을 들추어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런 성령의 일에 집단적으로 소유화된 교회가
지금은 개인적인 취미생활로 헬스클럽다니듯이 신앙클럽을 취미로 인간들의 정(쵸코파이)을 그리워 하면서 외로움을 달래는 마약에 몰입하는 이유인 겁니다.

피라는 약속에는 아예 관심 없이 그저 선한 인간이 되어서 남 해꼬지 안하면 천국 무난하게 갈수 있다는 취미만을 즐길 뿐인 겁니다. 일곱 귀신 들렸으니 별수 없지요. 

(요 7:7,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요 15:18,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 15:23, 개역)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요 15:24, 개역)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요 15:25, 개역)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참으로 놀랍게도 율법대로 아무 이유도 없이 원인도 없이 예수님을 그저 미워해서 죽입니다. 그래놓고 그들은 개인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개인이 모여서 집단화 시킵니다. 주관이 모여서 객관이 됩니까? 마찬가지 주관이지?

또 자기들 말대로 사가랴 제사장의 피나 참선지자의 피를 그때 자신들이 있었다면 안 흘렸을 것이다 라고 자기 개인을 챙겨버리니까? 도리어 그 참선지자들을 죽인 자의 자손이라고 자기 입으로 실토하는 식인 겁니다.

이것은 마치 부자와 거지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여전히 개인밖에 모르기에 묵시적인 해석불가인 아브라함의 품인 이스라엘 곧 나사로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 개인의 가능성으로 보고 선지자를 사적으로 이용할려고 합니다.

자기 개인가정의 개인역사적으로 구원해 달라는 겁니다. 이게 모든 종교죠 오늘날 기독교도 이거죠 뭐

선지자란 오로지 이스라엘을 위해서 있습니다. 개인을 위한 선지자 없습니다.

모세도 율법도 다 이스라엘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그 참 이스라엘은 예수님 혼자 뿐이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을 건지지 구원하지 않는 이유가 자기구원챙기기를 예수님을 통해서 한 겁니다. 마치 옳타구나 주인의 아들 상속자가 오면 그 상속자만 죽이면 이 땅은 자기것이 된다는 이 구원은 내 구원이 된다는 악한농부들과 다름이 없다는 겁니다. 그 악한 농부가 다름아닌 교회요 구약의 육적 혈통적 이스라엘이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바리새인이요 오늘날 기독교요 현대교회들입니다.

예수님을 건지고 픈 마음 추호도 없고 너 죽고 내 살자 라고 개인구원챙기기에 급급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예수님을 구원하시고 나머지 모든 인간들은 일곱귀신을 그 개인 하나 하나에게 다 심어버리신 겁니다.

개인 신앙 생활 따위 할 생각 마세요

이스라엘 자체가 이미 피 만을 드러내도록 이 보다 더 완료는 없다는 피만을 증거하기 위해서 소모품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거짓선지자와 거짓백성은 그 피를 거부하고 여전히 애굽에 다시 포로가 되어서 일곱귀신에게 포로가 되어 죽어도 끝까지 자기개인 구원 자기 구원 자기 구원 만 외치다가 지옥의 잉여적 존재였음을 톡톡히 보여주고서 진노의 그릇을 노릇을 하도록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피라는 성령이 벌리시는 사건 속에서 이스라엘은 항상 두 패로 나누어지면서 그 쪼개어진 틈 사이로 환도뼈 허물어진 그 틈사이로 날로 새롭게 다시 출발하는 이스라엘(남은자, 잉여)이 우발적으로 발생되는 겁니다. 새창조되는 겁니다.

개인이스라엘 따위란 없습니다. 성령이 전체 판대기로 규정해서 성령의 흐름만 타도록 되어 있지 자기 개인적인 신앙 흐름 따위에 이용할 수 없습니다.

신앙 다룰 생각 말고 도리어 성령의 흐름에 의해 다루심을 당하도록만 되어 있습니다. 겉사람이 후패하는 신앙을 하는 자는 없습니다. 동시에 속사람이 날로 새록 새록 새로운 다시출발 매일 새로 출발하는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직접 일하시니까 목사의 개인 사적인 종교성에 놀아날리가 없지요

성령은 항상 우리를 예수님의 죽음인 피와 연결시키는 사건만을 매일 매일 터트리십니다.

당하는 일 누리는 일 밖에 없습니다. 사생아가 아니기에 매를 대시는 이유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고후 4:7, 개역)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8, 개역)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 개역)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10, 개역)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1, 개역)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4:12, 개역)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 4:13, 개역)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고후 4:14, 개역)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고후 4:15, 개역)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 4:17, 개역)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 4:18, 개역)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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