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강의 2009-04-21  피 2강 (빌 3:10)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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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재 성 : [있음]과 [없음]의 차이성을 드러내는 무모한 어리석은 짓 

090422 김대식

악을 이용하여 자신의 선하심을 증거 (어두움을 동원하여 빛의 차이성을 드러내심)

바로 이런 선악에 대해서 예수님만 알아야 되어있도록 한 것을 인간이 알 필요 없고
괜히 알아서 선악도 못 넘어서면서 남을 구원하겠다는 구원자 자리 즉 신의 자리에 놓여지게 된 것이다.

율법아래 두시는 취지는 바로 이런 선악을 괜히 먹은 것에 대한 지적당함이다.

이런 발가벗김 당함으로써 누가 덮었는가를 보여주는 삶만 남아있다.

(과거 손무성과의 충돌 사건은 바로 죄인의 옷을 입고서의 증거인가? 아니면 의인된 모습으로써의 증거인가 라는 차이성이다. 누가 ? 건강한 자 중에 의사를 자랑하는자가 어디있는가? 환자만이 구원자를 외친다. 건강한 자에게서는 도리어 예수님을 이용해서 계명 지킨 자신을 내세울려고 할 뿐이다. 괜히 성경에 적힌 것이 아니다. 한 율법사가 그렇게 하다가 예수님에게 도리어 걸려들었다. 그 율법사를 철저하게 부재성으로써 이용하신다.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를 증거하는데 있어서 말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 비유이다. 십자가에서만이 밝혀지는 벌거벗김 당한 강도 만난 자를 뒷걸음질 쳐서 덮어주는 자는 예수님 뿐이다. 그러나 이런 십자가를 싫어하고 자신의 깨끗한 옷을 입은 그 기준으로써 노아를 송사한 그 자가 바로 믿음=예수님의 덮으심에 대한 적대행위이다. 이런 어두움을 이용해서 빛을 증거하신다.)

즉 구원의 증식이다.

공짜의 증식이요 잉여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로 여김을 받은 그 믿음)
의 증식 믿음의 증식이다. 믿음의 조상은 기업되신 여호와의 믿음으로 인해 집단 이스라엘만이 볼수 있는 예수님의 믿음만이 옳았음을 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이삭 희생 제사인 십자가 이다.

이 십자가 라는 어리석음과 걸림돌의 증식 확장 확대만이 성령의 일이다.

반드시 성령의 일이란 발가벗김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서 부재성으로써 주님의 거룩을 증거하신다.

어제 강의 피2강에서 말한 [없음] 이라는 상대적인 [있음]의 상대적인 부정이다.

이 부정을 부재성으로 증거한다.

과거 양무리 마을 권정희가 무식하게 없음은 없음이고 무는 무 일 뿐이다 라고 말귀를 못 알아먹고 자신들의 지식 아래에 들어가지 않음에 대해서 괜한 짜증과 안색의 변함의 투덜거림을 표출 했다. 오죽하면 이근호를 위해서 울었다고 과시를 할까? 그 만큼 남을 꺽고 싶어서 바알제사장들처럼 자학하는 모습으로 사기를 쳐 온 것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영혼의 치유자 영혼의 의사 영적인 아버지 따위를 소리를 남발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닐 것이다.

없음이라는 부재성을 가지고서 증거할 줄 모르기에 그들은 성령이 뭔지도 모르는 것이고
바르게 하면 바르게 된다는 그야말로 바리새인적인 모습으로써
도리어 부정스러운 이미지로 일하시는 예수님을 바알세불 걸렸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들에게서는 예수님이 악취가 날 뿐이고 예수님에게서는 그들의 아무리 선한 모습도 역경운 배설물 냄새일 뿐이다.

악한 세대가 깨끗한 기적을 원하고 있다. 깨끗한 교회론 깨끗한 성화론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줄 기적은 그들에게 있어서 오로지 부정적인 십자가 뿐이다.

왜? 그들은 부재성을 이용하는 성령의 일을 악마의 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요나의 표적은 바로 그런 부재성으로써 사건이 발생하고 충돌로써만 일하시기 때문이다.


서로의 소욕을 못하고록 하는 것이다.

(갈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결론적으로 주님 앞에서는 즉 언약의 완료 앞에서는
선이든 악이든 아무것도 아니다. 주님의 피 만이 옳았으면 그만 입니다. 그 차이성으로 다른 것은 다 틀렸습니다.

그래서 선이든 악이든 주님의 언약의 완료를 말하기 위해서는 즉 십자가를 말하기 위해서는
요나의 표적을 말하기 위해서든 악도 선도 부재성으로 이용하실줄 아는 분이 성령이고

육은 반대로 육의 유익으로만 선과 악을 이용한다. 우상이다. (선도 늘 미완료적인 이미와 아직의 긴장상태의 선이요, 악도 늘 미완료적인 이미와 아직의 긴장상태인 악이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것들이다. 의문의 증서에 걸려들었다.)

그래서 이런 부재성을 흉내낼수 없다.

어느정도로 자유롭게 이용하시는가?

저들에게 반드시 악하게 부정하게 비추이는 싫어버린바 된 이미지
외면하고픈 이미지 아름다움이 일체 없는 추한 이미지로써 다가올 정도로 자유롭다.

즉 자기 형상을 자기가 치심이다.

이런 부재성 자기 스스로 낮추심 앞에서

당사자가 아닌 인간이 스스로 낮추는 그 위선 앞에서 감히 뻔데기 앞에서 주름 잡아본들
더 나은 주름은 뻔데기를 따라 잡을 자 없다.

그래서 차라리 마리아처럼 더 좋은 더 나은 제사를 쳐다보면 될 것을 괜히 따라하고 흉내내는 놈이 더 나쁜 놈이 되는 것이다. 주는대로 받아 먹을려고 하지 않고 자기 일만 쳐다보고 분주하기에 (주님의 일하심을 안 쳐다보기에)
성경 명령어 지키는 놈들이 더 악한 놈들이다.


* 추신

만약 이 부재성을 흉내내거나 따라하게 되면

자신들의 선한 이미지는 악마의 이미지로 비춰져야 하기 때문에
자기를 쳐다보고 자아의 이미지를 쌓아온 사조직 집단에서

도리어 쫏겨남을 당해야하고 벌거벗기움을 당해야 할 처지인 부자청년에게 닥친 상황이 되기에

미리 계산적으로 처세술을 부리는 것이 흉내도 못 낼 정도로 주님이 앞서서 조치하신 바이다. 즉 악령을 집어 넣으신 것이다.

아니 집단 이스라엘 즉 약속의 종말단체 언약의 묵시집단을 무슨 수로 흉내낼수 있는가?

그런 하늘의 일도 쳐다 보지도 않는 놈들이 땅에 있는 이근호를 왜 쳐다보는가? 어차피 죽을 죄인인데? 이용 해 먹고 단물 빨아 다 먹으면 뱉어버리면 그만인 소모품을 왜?

뭔가 있어보이는 [있음]을 끌어당겨서 자기를 위하여 교회를 사조직하고자 했는데 도리어 들통당하게 되니까 낼름 빠져나가버리는 것이다. 즉 [없음]의 부재성을 흉내 낼수도 없는데 괜히 흉내내다가 이쪽도 저쪽도 어디에도 갈수 없는 박쥐가 되어버린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올무에 딱 걸려 든 것이다.

예로 이근호를 흉내내던 놈들이 결국은 이광호 쪽이나 양무리 쪽으로 가는 이유가
이근호 라는 죄인 쓰잘대기 없는 죄인을 흉내내었기 때문이다.

부재성으로 이용할 줄은 모르고 도리어 당한 꼴이 난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옮긴다. 이광호 쪽으로

그러나 그 쪽도 만만치 않은 놈들이라서 자기들이 이용 대상으로써의 가치가 될 때만 받아준다. 결국 서로 서로가 돈(유익) 되지 않는 입장에서는 정치적인 타협은 오래 가질 못한다.사실상 99마리 양이 절대로 흉내 낼수 없는 주님 쪽에서 벌리시는 이미지는 저들이 보기에는 악마의 이미지인 한 마리 양은 싫어버린바 된 잃어버림의 이미지다.

이 잃어버린 이미지를 자기 쪽에서 만들 수 없기에 악마의 이미지로만 해석할 수 밖에 없다.

그 잃어버림의 이미지가 바로 함의 눈에는 오로지 다른 모습으로는 절대로 비춰지지 않는

벌거벗은 모습이다. 저게 무슨 은혜 받은자 인가? 라고 비방받는 표적인 셈이다.

상대적으로 자신은 벌거벗은 이미지가 아니다는 반증 이다.

그래서 그 벌거벗음의 자유 앞에서 뒷 걸음질 쳐서 오시는 주님 자신의 치심으로 다가오는 십자가를 그들은 악취 로만 볼 수 밖에 없다.

왜? 벌거벗기움을 당한 적인 없기에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이유는 십자가 라는 표적 즉 할례 세례로써 따로 구별, 차이, 분별, 차등 두시는 방식으로써 골라 뽑아 내심이다.

자기 자녀를 이런 부정한 방식으로만 찾으신다. 이 얼마나 악취 날 수 밖에 없는 폭력이미지인가?

그가 우리에게 폭력 당하신 그 증거로써 사랑을 확증 하셨다.

그 물증이 십자가 이다. (도장, 도장 끈, 지팡이 = 부정한 스캔들 증거물)

이것이 부재성이다.

이 부정한 스캔들 물증이 날 구원 할 줄이야?

이 창녀가 날 구원 할 줄이야?

이 하나님으로 부터 저주받은 인간에게서 조차 자기 백성에게서 조차 개죽음 당한 자가 바알세불 걸린 악마의 대왕으로써 처형당한 그 죄수가 도리어 날 구원할 줄이야?

누가 알았으리요? 아뿔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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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090421피p010그의죽으심을본받아

피 2강 (빌 3: 10)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09 대구강의 7] - [피 2] -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09,04,2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인간은, 그의 죽으심이 아니라, 바로 ‘나’ !!

이제 시작을 하겠습니다. 먼저 교재 11페이지에 보면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11절의 성경구절이 나오는데, 한번 살펴보자.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여기에 ‘내’가 이렇게 있는데, 즉 “나의 속성, 나의 재산, 나의 나이, 나의 건강상태” 등등이 있는데, 그런데 이런 것들이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고려하는가? 여기에 보면, 부활의 권능과 고난과 그의 죽으심이 나오는데, 물론 ‘나’의 죽음이 아니고 말이다. 바로 그것이 ‘나’ 라고 하는 주체와 한 세트로 묶어져서 빌립보서 3장에 10절과 11절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말씀을 그림으로 해체를 시켜보면 이해하기가 쉬운데, 그런데 지금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바이어를 만나서 사업을 상당하고, 또한 스파게티 식당을 오픈해서 손님을 끌려고 도우미를 불러서 쇼를 하고 있는데, 그러니 이러한 부활의 권능과 고난과 그의 죽으심이 눈에 보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학원강사라고 하면, 아이를 한 명이라도 더 끌어 모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있으니 보일 리가 없다는 말이다.

◈ 우리는 지금 어디를 쳐다보고 있는가?

그러니 세상 사람들은 무엇과 대비가 되는고 하니, 이렇게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는 성도라는 ‘A’ 라는 인간이 있고, 또한 ‘B’ 라는 인간, 즉 자기 자신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그런데 자기의 눈에는 자기가 기대하고 있는 자기의 재산이나 건강상태나 승진이나 명예나 자존심 등만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창회에 가면 출세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하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러 이러한 것을 가지고 있는데, 너는 무엇을 가지고 있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자기가 목사라고 한다면, “우리교회 교인은 몇 명인데, 당신 교회의 교인은 몇 명인가?” 라고 한다는 말이다. 오로지 그런 것만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헌금은 얼마이고, 신학교 출신은 어디이고,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게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성경말씀이 이야기하고 있는 위쪽 선은 전혀 바라보지를 않고,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도 머리카락이 빠지는가? 나도 지금 빠지고 있는데” 라는 이야기만 한다는 것이다.

◈ 첫째로, 인간은 자기 것을 찾는다 !!

그렇다면 인간이 왜 이렇게 살아가는가? 그것이 매우 중요하기에 다시금 적어보면, “첫째로, 사람은 자기 것을 찾는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두고 “자기 것을 만난다. 자기 것을 원한다. 자기 것을 만든다. 자기 것을 기대한다” 라고, 여러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하면서도 ‘자기 것’ 이라는 것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어떤 사람을 만난다고 했을 때, 상대방이 교회에 다니는지 절에 다니고 있는지, 그러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가 기대하는 것을 그 상대방이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것을 빼앗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상대방의 것을 말이다.

◈ 인간은, 상대방을 통해서 자기를 발견 !!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교회에 다니는지는 몰라도 굉장히 행복해 보인다고 했을 때, 자기는 돈이 제법 있어도 왜 사는지 몰랐는데, 그런데 자기에게 없는 행복을 상대방을 통해서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행복이 자기 것이 되었다고 했으면 좋겠다고 여겼을 때, 바로 그 상대방을 통해서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해서 자기를 만나고 자기를 찾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의외로 간단한데, 제가 방금 이야기한 그 법칙 외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친구는 괜찮은 친구이다” 라고 했을 때,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그 친구가 괜찮은 것이 아니라, 그 친구를 괜찮은 친구라도 여겼던 자기 안목이 괜찮다는 뜻이라는 말이다. 그런 사람을 자기 친구로 맺었다고 하는 그 선택이 괜찮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은 자기 것만 찾는데, 그래서 자기에게 모자라고 미흡하고 부족한 것을 누군가가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것을 찾아서 나서는데, 그래서 그것이 비록 그 사람의 것이라고 해도 일단은 만나게 되면 자기 것이 된다는 말이다. 즉 “아하, 저것은 내 거야” 라고 하면서 자기 것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부분집합으로 잡아당겨 버린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자기는 눈은 조금 작더라도 얼굴이 둥글고 입술이 도톰한 여자가 좋은데, 그런데 그렇게 마음에 드는 여자를 보았다고 하면, 그 사람은 그 여자를 자기의 부분집합으로 여겨서 그날 밤에 잠을 자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날에는 한번 만나보려고 애를 쓰고, 또한 찾아다닌다는 말이다. 

◈ 내가 욕망하는 것을 !!

그렇게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은 자기가 욕망하는 것을 자기가 찾아다니는 방식 외에는 다른 방식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이 무엇인가?” 라고 물으신다면, 그것은 자기 것을 찾아다니는 것, 그것이 곧 인간의 삶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라캉이라는 철학자가 발견을 했는데, 자기 것이라고 끌어다 모은 모든 것은 사실은 남의 것을 가져온 것인데, 이것을 ‘벤치마킹’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남의 것을 흉내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부잣집의 아이가 가난한 집 아이의 사정을 모르는 것과도 같은데, 그것은 자기가 처한 삶 속에 구성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 상황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런 것만 계속해서 추가해서 보탠다는 것이다.

◈ 전세버스를 탄 아가씨 ??

그것은 교회가 되어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웃교회가 전세버스를 도입해서 주일날에 돌린다고 하면, 자기들도 역시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즉 “기대한다, 그립다, 가지고 싶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그 교회에서는 다른 것은 제쳐놓고 그 전세버스를 이미 자기 것으로 여겨서, 그 이웃교회를 지나갈 때마다 전세버스를 떠올린다는 것이다. 즉 “야, 그 전세버스를 우리교회에 주면 참 좋을 텐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웃교회에 괜찮은 직장에 다니는 참한 아가씨가 하나 있는데, 주일학교도 봉사를 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 아가씨를 우리교회 총각과 중매를 써서 결혼을 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이다. 교인도 한 명이 더 늘어나고, 주일학교 교사가 생기면 주일학생들에게도 좋을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직장도 있으니 십일조도 할 것이고 말이다. 목사라면 대부분이 그런 생각이 들지 싶은데, 그렇지 않은가요?

그런데 이것은 성경말씀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십자가의 고난도 없고 부활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의 특징이 무엇인가?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삼층천을 보고 왔기 때문에, 또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주님을 만났기에 말이다. 즉 예수님과 동행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 친한 친구의 죽음보다도 더 충격적인 것은?

어제 그런 설교를 했는데, 자기의 제일 친한 친구의 죽음보다도 더 충격적인 것이 바로 자기가 지금 홀로 있지 않다는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살기 때문에,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있으면 귀찮은데, 하지만 사도바울은 주님과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이, 그것을 ‘예수 안’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바로 예수 안에 있다고 하는 충격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부러운 것이 없다는 말이다.

◈ 니들이 삼층천을 알어?

그것은 사도바울에게는 욕망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 그렇다면 어디에 대한 욕망인가? 그것은 말씀에 대한 욕망이지,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한 욕망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 세상이 부럽지?” 라고 하면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니들이 삼층천을 알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누군가가 스데반 집사님에게 “집사님, 제 친구는 백살이나 살았다고 하는데, 집사님은 그러한 사람이 부럽지 않나요?” 라고 하면, 스데반 집사님이 뭐라고 하겠는가? “예수님이 직접 영접하러 나온 것을 니가 본 적이 있어?” 라고 할 것이라는 말이다. 

◈ 사도바울의 욕망은?

사도바울도 자기에게 욕망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와 함께 거하는 것, 그것이 자기의 욕망이라면 욕망이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자기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교회인데, 그러니 교회는 무지무지 무섭다는 말이다. 세상에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는데,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통로임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즉 복음이 있는 교회는 천국과 내통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방금 제가 그림을 아주 멋있게(?) 그려놓았는데, 이것을 간단하게 방정식으로 표현하면, 인간에게는 ‘있음’이 이렇게 있는데,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개입하니 그것이 ‘없음’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즉 “있는데, 없다” 라는 말이다.

◈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가 분명히 있잖아 ??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를 가지고 3000명을 먹여 살리고도 12광주리나 남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러니 처음에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가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언뜻 보면,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본다는 말이다. 즉 없는데서 있는 것으로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있는데서 있는 것으로 보는데, 즉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가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있음이 아니라, 없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있음을 최소화한 것이란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는데,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의 죽은 태(胎)에서 이삭이 나오듯이 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래도 사라는 있지 않는가? 태는 없어도 몸은 살아있는데, 그러니 있는 것은 있다고 해야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전혀 성경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라의 태를 죽인 것은,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어서, 그렇게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올 때에 바로 그때에 있음을 두고 ‘산 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죽음에서 살았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살아있는 것을 죽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

지금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라는 부분을 설명하고 있는데,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라고 했는데, 그러니 사도바울은 바로 그 과정을 그대로 밟고 있는데, 즉 현재 자기는 살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죽으심의 코스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없음’에서 ‘있음’으로 가야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이 아니라 없음에서, 이것을 점선으로 그려보면, 있음으로 해서, 이것이 기독교 신학인데 말이다. 즉 “나는 있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덕분에” 라고 한다는 말이다. 아무튼 자기는 살았다고 하는데, 누구(?)와 비슷한데 말이다.

◈ 있음에서 없음으로 가는 것이 곧 십자가 !!

하지만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주님이 말씀하시는 ‘있음’은 노선이 다른데, 즉 주님은 하늘의 노선이라는 것이다. 인간들은 아래쪽 노선이지만 말이다. 바로 여기에 부활의 권능이 해당되는데, 즉 사도바울은 분명히 자기 몸도 있고 손톱도 있고 발톱도 다 있는데, 그런데 그런 있음을 위에서 없음으로 바꾸어버린다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있음에서 없음으로 가는 것이 십자가이고, 십자가 다음에 나오는 것이 부활의 권능인데, 다른 말로 하면 이것도 역시 십자가의 권능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죽으심과 다시 살으심의 양쪽 면을 모두 다 보여주니 말이다.

◈ 자꾸만 없음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

그러니까 이렇게 있음에서 없음으로 가고, 성도의 생명은 어디에 있는고 하니, 물론 여기 이 땅에서는 죽어있지만, 그러나 엄연히 하늘에서 살아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여기에 이렇게 있으니, 바로 그것을 하나님은 가만히 두지 않고 없음으로 바꾸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있음을 없음으로 바꿀 때 사도바울은 그것을 뭐라고 말하는가? 자기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죽기 전에는 코와 귀가 붙어있고 눈이 있고 숨을 쉬고 있는데, 그러니 밥을 먹어야 하는데, 운동도 좀 해야하고, 물론 잠도 자야 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어디에 사용하는가? 그분의 죽으심에 소비하는 용도로 사용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있음에서 없음으로 보내서 끝을 내어버리는데, 그리고 없음에서 있게 하는 것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 능력이고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디에 신경을 쓰는가? 없음이 아니라, 자기 있음에 관심을 집중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신경을 쓰는 것은 인간이면 습관적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 예수 안에서 이미 살았기 때문에, ‘넌 죽었어’ !!

그러나 주님께서 지금도 살아 계셔서 그 있음을 없음으로, 즉 죽은 자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 관계성이 무엇인고 하니, 이미 ‘산 자’ 라는 것이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성도는 예수 안에서 이미 살았기 때문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양쪽으로 갈라지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안에는 주님이 살고 있다고 한다는 말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믿음이란, 곧 주님의 행하심 !!

바로 그러한 관계가 무엇인고 하니까, 보통 사람이 그렇게 있음을 이야기하면 행함이 나오게 되는데, 하지만 그런 행함으로 자기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자기가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런 믿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죽어가고 있는 자기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행하심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바로 그러한 예수님의 행하심, 그것을 두고서 ‘믿음’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허전하고 뭔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가득 가득히 차고 넘쳐흐르는 예수님의 행하심이라는 말이다. 

◈ 집사님, 왜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제가 심방을 하는데, 그래서 “왜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니까, “바빠서 못 나갔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쁘지 않으면 나갈 수가 있다는 말인데, 그러니 행함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믿음은 주님의 행함인데, 그러니 행함의 주체는 바로 주님인데, 하지만 그냥 행하면 그 주체는 예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가 회사 일로 바빠서 교회에 나가지 못했는데, 그러니 바쁘지 않으면 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되면, 자기가 교회에 나가서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 즉 자기가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교회에 나간 것이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든지 그의 죽으심으로 본받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도에게 있어서 믿음은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고자 하는 것인데, 하지만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교회라는 취미생활을 통해서 살려고 한다는 것이다.

방금 제가 강의를 하면서 그린 이 그림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데(궁금하신 분은 동영상을 참고, ㅋㅋ), 아무튼 모든 복잡한 신학이 이것 하나로서 모두 정리가 된다는 것이다. 즉 ‘그의 죽으심으로 본받아’ 라는 것으로 말이다.

◈ 왜 성화론이 문제인가?

그렇다면 왜 성화론이 문제인가? 성화론은 위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밑을 본다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행함의 주체가 예수님이 아니라 인간인데, 즉 이렇게 인간이 있는데 없게 했다고 하면, 그것조차도 자기 자신이 믿는다는 말이다. 자기의 행함 중의 하나에 믿는 것도 포함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믿어서 “야, 살았다” 라고 해서, 그렇게 자기의 행함으로 서서히 거룩에 접근하고 접촉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저히 엉터리라고 이야기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기독교 역사에 왜 이것이 득세를 하는고 하니, 교회라는 권력단체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성경대로 하면 사도바울과 같이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데, 그렇게 되면 성령이고 뭐고 간에 자기가 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되는데, 그래서 교회를 크게 키운다는 말이다. 
 
단지 교회를 키우기 위해서 성령을 받았는지는 관심도 없고, “당신이 신이 되고 싶으면 연락해”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들을 마구 끌어 모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신이 되고 싶어하는가? 인간의 욕망 속에는, 인간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당연히 신이 되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과 같이 믿음이 좋은 사람이 있으니까, 그런 믿음을 자기가 가지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말씀의 위력이 아니라, 자기가 믿음이 좋은 사람을 모방해서, 그렇게 자기의 행함으로 믿음이 좋아지려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포섭하기 위해서 교회가 성화론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에 매진을 했다는 말이다.

◈ 잠시, 에피소드 몇 개를 !!

그래서 제가 그러한 성화론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례를 통해서 거부하고, 그것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을까 해서, 일부러 지어낸 아주 짧은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교재 11페이지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일단 교재를 11페이지를 살펴보자.

** 옛날 어느 마을에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병마에 보내고 자식은 가출해서 사고를 치고 지금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복음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 에피소드 1 !!

이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당해서 그만 사업체가 파산을 당했는데, 그런데 그런 파산을 통해서 복음이 자기 사업체보다 더 귀하고 소중함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살아버린 성도의 모습인데, 하지만 살아버린 성도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 시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즉 “부도야 오너라. 내 믿음이 얼마나 좋은지 보여주마” 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뭔가 희미하게 알았던 복음의 귀함을, 그런 부도남의 사태를 통해서 “야, 정말 예수님이 최고야” 라는 것을 알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미친 인간이라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가? 이렇게 부도를 당하면, 십 여명은 족히 빠지고 서너 명이 남게 되는데, 과연 얼마나 남는지 한번 보자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옛날 어느 마을에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개척교회를 하면서 가산을 다 탕진하도록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교인들이 하나 둘씩 줄어들기 시작해서 급기야 자기 가족 외에는 단 한 명의 교인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 에피소드 2 !!

여기서 무엇이 깨어지는가? 욥에게 악마가 한 첫 번째 유혹과 두 번째 유혹이 있었는데, 그 유혹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첫 번째 유혹은 제 아무리 시험을 해도 욥의 개인적 신체에 대해서는 결코 손을 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욥에게 있어서 첫 번째 시험은 항상 외부적인 문제인데, 자식도 남인데(?). 그래서 자식이 죽고 재산이 날아가도 다시 자식을 낳고 돈을 벌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마귀가 자기 몸만 빼고 나머지를 와장창 건드릴 때 욥이 하나님께 뭐라고 했는가?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니 거두어 갈 때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라고 했는데, 이것이 신명기 32장과 사무엘상 2장에도 나오는데, 즉 하나님은 살리시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신다는 것이다.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 하시고 말이다.

(욥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신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삼상 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 하나님도 귀찮고, 예수님도 귀찮아 ??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기 신앙이 난파되었다고 느꼈을 때, 즉 갑자기 교회에도 가기가 싫고, 만사가 다 귀찮아질 때, 하나님도 귀찮고, 예수님도 귀찮고 말이다. 그냥 매사에 모든 것이 다 짜증이 나고 귀찮고 화가 난다는 것이다. 그때 이러한 말씀들을 생각하면, 그런 우리의 모습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바로 타인이 가지고 있는 욕망, 즉 남의 재산, 남의 인기, 남의 성공이 부러워지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바로 그때에 한나가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시기도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저지레한 것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신혼여행을 가서 파도가 일어서 미래가 창창한 신랑신부가 죽었다면 그때 그 부모들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자기 몸에 일어난 일이 아니기에, 이것이 욥에게 주어진 첫째 시험인데, 그래도 이것은 물론 힘들지만 이길 수가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이 깨어지는 순간인고 하니까, 자기 자존심이 와장창 박살이 나는데, 앞의 경우는 자기의 소유가 박살이 나는데, 물질이나 재산과 같은 것이 말이다. 두 번째로는 가족관계가 깨어지는 것이고, 그리고 세 번째로는 자기 자존심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 즉 자기 체면과 위신이 그만 다 깨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목사가 개척교회를 하면서 교인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은, 자기가 스스로 생각해도 “내가 주의 종이 맞는가? 아니, 신자가 맞기는 맞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지 모르는데, 마치 노아처럼 말이다. 평생을 전도해도 단 한 사람도 구원을 못하고, 자기 식구만 방주에 태운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안 될 줄을 뻔히 아시면서 전도는 왜 시켰는지 말이다. 어차피 아무도 오지도 않는데 말이다.

◈ 왜 전도를 해야 하는가?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저의 강의를 듣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그렇게 예정이 모두 되어있는데, 왜 전도를 하느냐고 말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전도를 시키는가? 그것은 너무나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도나 봉사와 같은 것을 시키는 이유는, 바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있음에서 없음으로 가는데, 그런데 이 없음 속에는 우리 혼자 있음이 아니라, 그와 함께 있음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바로 천국으로 데리고 가지 않고 이 세상에 더 살게 하시는고 하니,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어떤 고난을 받았고, 어떻게 체면을 구겼고, 어떻게 창피함을 당했는지를, 그것도 그분이 구원하고자 하는 바로 그 인간 때문에 말이다.

성도는 바로 그것을 앎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공로를 찬양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이미 죽은 자이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그림으로는 그리면, 실선이 아니라 점선으로(…) 표현이 된다는 말이다. 

◈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

우리는 왜 전도를 해야 하는가? 그렇게 전도를 함으로서, 예수님이 전도하실 때 고생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즉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도록 한다는 말이다. “내가 이렇게 전도해도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참 더러워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무시를 당했는데, 떡과 고기까지 그렇게 제공을 했는데(?), 그런데도 아무도 주님과 함께 하는 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제자들도 모두 도망을 가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 마을도 당연히 깨어져야 하는데, 지금 그렇게 눈에 보이고 화면에 나타나고 있다고 해서 결코 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

그리고 하나님께서 전도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전도를 시키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사야 6장의 말씀처럼, 인간들의 완악함을 더욱 더 노출시키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즉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소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말이다. 소경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을 소경으로 만들고 말이다.

(사 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사 6: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2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이것을 누가 감당하리요?”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너무나도 이 일이 비참하고 난감하기에 말이다. 그러니 전도자 개인이 자기 자존심을 챙기려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전도를 전도하는 자기 자신이 방해하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고후 2: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후 2: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 역시,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

열왕기상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는데, 어떤 선지자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북쪽 이스라엘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선지자에게 “니가 어디를 가든지 아무 것도 얻어먹지 말고 그냥 빠져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쪽의 어느 늙은 선지자가 와서 “우리 같은 목사끼리 너무 그렇게 모나게 하지 말자. 좋은 게 좋다고, 잘 한번 지내보자” 라고 하면서 꼬드기는 바람에, 그만 대접을 받는 바람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데, 그런데 엉뚱하게 자기 위신이나 체면을 생각하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전도자에게는 그러한 체면이나 위신과 같은 것이 전혀 필요 없는데, 즉 자기 소유가 문제가 아니라 오직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라는 것이다. “이것을 하면 실적이 어떻고, 목회 3년에 이 정도밖에는 안 되는가?” 라는 식으로, 그런 것을 계산하게 되면, 자기가 곧 주님의 복음에 방해자로 나서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옛날 어느 마을에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빈민들을 위해서 산을 개간하다가 다쳐서 평생 불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 에피소드 3 !!

이러한 경우는 욥의 두 번째 시험에 해당이 된다고 볼 수가 있는데, 그만 자기 몸이 불구자가 되는, 즉 직접적으로 자기 몸에 가해가 가해졌기에 말이다. 기도를 한다고 해서 이미 불구가 된 몸이 전혀 원상복구가 되지 않는데, 그냥 불구자로서 산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옛날에 어느 마을에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졸음운전을 하다가 막 신혼여행을 다녀온 신혼부부를 즉사케 했습니다. 합의금이 없어서 여태껏 교도소에 있습니다. 그래도 그는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 에피소드 4 !!

그래도 앞의 경우까지는 어떻게 해서든지 버틴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물론 그것도 사실은 불가능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나오는 내용은 무엇인고 하니, 이제는 자기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그만 남의 인생을 조져놓는다는 것이다.

◈ 영화 ‘밀양’에서 !!

이것이 바로 영화 ‘밀양’의 내용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전도연이 큰마음을 먹고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한다고 하면서 교도소에 면회를 가는데, 거기에서 자기 아들을 유괴해서 죽인 살인범을 만나서 용서해주려고 말이다. 그런데 그 범인이 뭐라고 하는가? “나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용서를 받았어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 다음부터 어떻게 하는가? 살인범이 하는 말을 듣고 나서는 엄청나게 화가 나서는, 즉 교도소에 다녀온 그 다음부터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녀는 예수님을 오해하고 천국도 오해하고 있었는데, 즉 교도소에 있는 자기 아들을 죽인 그 살인범을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 이웃을 타인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 !!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핵심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어떻게 타인과 자기가 한 몸이 될 수 있는가?” 라는 것인데, 즉 타인과 자기가 과연 차이가 나느냐는 말이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는데,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만난 자를 돌보아주었다는 것이다. 

(눅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 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눅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눅 10: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 10: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 10: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 예수님과 내가 과연 하나인가?

이 비유의 핵심은 “과연 타인과 내가 차이가 나는가?” 라는 것인데,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과 내가 과연 하나인가? 아니면 구별된 존재인가?” 라는 것인데,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난 자와 자기를 하나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율법의 제 2계명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해서, 이렇게 이웃과 ‘내’ 몸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구별됨이 없이 말이다.

(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렇게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예수님이 굳이 대속해서 죽을 이유가 없는데, 또 어렵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이 되어서 죄인과 한 통속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죄는 우리가 짓고 저주는 예수님이 받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가 되었기에 말이다.

그러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말씀은 오직 예수님만이 지킬 수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면 결코 이 말씀은 이루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우리 인간들 중에 과연 누가 십자가를 진 사람이 있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이다.
 
◈ 과연 예수님처럼 행동했는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심판 때에 행위책이 등장하는데, 그 행위책에 기준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는 잘 했습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 “니가 과연 예수님처럼 했는가?” 라는 말이다. “니가 기도를 했다고 하는데, 과연 예수님처럼 기도했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니가 구제를 했다고 하는데, 과연 예수님처럼 구제했는가?” 라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는 전혀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니가 남을 사랑했다고 하는데, 과연 죄인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 A : 저는 기도를 했습니다.
* B :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처럼 기도했는가?
* A : 저는 전도를 했습니다.
* B :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처럼 전도했는가?
* A : 저는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 B :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처럼 사랑했는가?

그렇게 되니, 그 어떤 인간의 행위도 유구무언(有口無言)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과연 누가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를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예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서 인간은 말씀 앞에서 저주를 받아야 마땅함이 그만 사건화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니는 이웃을 사랑하나? 못하지? 나는 한다 !!

그러므로 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타인과 자기가 하나가 됨으로서, 누가 강도를 만났는가? 바로 자기 자신이 강도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내가 강도를 만났으면 어떻게 해주는 것을 가장 좋아할까?” 라고, 그렇게 상대방을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는데, 그래서 주막에 데려다가 치료를 해주고, 더 필요한 부대비용까지 부담하게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남이 아닌 자기가 다쳤으니 말이다.

그것까지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가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데, 그러니 결론적으로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예수님이 아니면 도저히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예수님 자기 자신만이 이룰 수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약올리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고발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말이다.

여기 마지막 4번째로 나온 예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래도 3번째까지는 자기 팔자가 그렇다고 하면서 넘어갈 수도 있는데, 자기만 참으면 되지 말이다. 하지만 이 4번째 경우에는 자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을 그만 작살을 내고 말았는데, 졸음운전을 한 자기 때문에 말이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면 회개하고 자기 문제는 그래도 자기가 참으면 되지만, 하지만 자기가 피해를 입힌 상대방에게 대한 양심의 가책은 어떻게 해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평소에 아무리 큰소리를 치더라도 그런 경우에 처하게 되면 “음매, 기죽어”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 주님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살자 !!

그래서 저는 성도의 삶을 한 마디로 이렇게 설명하고 싶은데, 즉 “주님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살자” 라고 말이다. 평소에는 고개를 쳐들고 살지라도, 주님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서 살아가자는 것이다. 왜 그런가? 자기가 해결하지 못한 죄를 주님이 대신해서 해결해주셨는데, 그것도 죄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의인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의인으로 만들어버린 공로에 대해서 우리는 유구무언일 수밖에는 없는데,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면류관을 모두 벗어서 주님의 발 앞에 반납한다는 것이다. 면류관뿐만 아니라 자기가 입고 옷을 다 벗어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다는 말이다.

◈ 성도는, 없음의 연장선에서 인생을 !!

앞에서 살펴본 이러한 사례들이 바로 아까 그림을 그린 것처럼 있음에서 없음으로 와버리면, 이제는 없음에서 나오는, 즉 그 없음의 연장선에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즉 하늘에서 비가 내리듯이 그렇게 주님에게 벌어진 일들이 우리에게 쏟아지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즉 그렇게 쏟아지는 사례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아하, 주께서 이런 나를 구원하셨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니 그런 사건들을 통해서 더욱 더 선명하게 주님의 공로가 찬양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

그래서 사도바울이 내린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로마서 11장 36절에 보면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시편에 있는 것을 전체로 다 묶어서 이렇게 로마서에서 한 절로 요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찬양밖에 없는데, 심지어 위의 4가지 사태가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찬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이제 계속해서 교재 12페이지 보자.

** 과연 이러한 이야기가 공감이 되고 즐거움이 되고 행복이 되는 이유는, 동일한 복음 속에 들어와 있는 자만의 특권이다. 십자가 복음이 자아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복음이 자아를 삼키게 되고, 자아는 그 복음의 소중함을 위하여 이용당하는 인생을 살게 된다. 

** 앞에 나왔던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라고 시작해서 뒷부분에 그 어떤 종류의 인생역경을 덧붙이더라도 앞의 구절, 즉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의 가치가 손상되거나 변질됨이 없어야 참된 성도이다.

◈ 성도가 이 땅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니 성도가 이 땅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복음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의 가치가 손상되거나 변질됨이 없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령 이것보다 더 심한 경우라고 해도, 그렇게 되어도 복음의 가치가 전혀 손상되지 않음을 말이다. 바로 그것을 대외적으로 알려주기 위해서 성도는 사용되고 이용당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자유’ 인데, 그래서 요한복음 8장 32절에 보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안식교에서는 입만 벌리면 진리를 이야기하는데, 하지만 그들에게 진리는 무엇인가? “안식일은 지키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말씀을 정확하게 제대로 보자” 라고 하는데, 하지만 참된 복음에서의 진리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자유함’에 있다는 것이다.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함’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도바울이 “너희들이 삼층천을 보았는가?” 라는 것과도 같은 의미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자유함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마치 깜박깜박하고 졸음운전을 하듯이 진리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것이다. 아무튼 ‘있음’에서 ‘없음’ 이라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허구적 있음과 또 다른 하나는 진짜 있음이 있다는 말이다. 즉 생명이 하늘나라에 있다는 말이다.

◈ 허구적 있음과 진짜 있음이 !!

아무튼 ‘있음’에는 이렇게 두 가지가 있는데, 이렇게 잘 가다가 그만 차를 이렇게 몰아가지고, “주여, 저들은 저렇게 있는데 저는 없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다가 차를 또 이렇게 밑으로 몰아버리고 말이다. 그렇게 되니, 그 다음부터는 “이제 말씀도 귀찮고, 교회고 귀찮고, 모든 것이 다 귀찮으니 그만 좀 가주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 4가지 사례 중에서 중간에 뭔가 하나 더 집어넣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단에 빠진 아내’ 이야기인데, 그것은 그냥 이단이 아니고 아주 독한 이단에 말이다. 아니라면 이단에 빠진 자식 이야기라든지 말이다. 여호와의 증인에 빠져서 군대도 거부하고 감옥에 간 말이다.

그렇게 보니 하나님은 참 못된(?) 분인데, 우리 생각은 손톱만큼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도 역시 우리 생각을 하나님처럼 전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인데,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를 편하게 해주려고,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들여주려고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러한 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복음’과 ‘자기 목숨’ 사이의 경중(어느 것이 가볍고, 어느 것이 무거운지)을 논해야 한다. 또한 왜 복음이 ‘나의 목숨’, ‘나의 인생’에는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는지를 알아야 한다. 즉 무용지물의 복음이 아니라면 엉뚱한 가짜 복음을 믿고 있는 것이다. 나를 위하여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그 복음을 사랑해야 진정 ‘자기 목숨’ 위주로 살지 않는 성도임이 드러난다.

◈ 복음은 무용지물 ??

여기서 말하는 복음이 무용지물이라는 표현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즉 지금 우리가 육을 가지고 있으니 당연히 있는 본능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조건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생존지상주의’ 라고 하는데, 즉 살아남는 것이 승자라는 것이다. 승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것이 마귀가 있는 이 세상의 법칙인데, 그런데 복음은 무엇인가? 마지막에 웃는 자가 승리자라는 것이다. 스데반 집사님이 마지막에 어떠했는가? 천사의 얼굴과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는 것이다. 백제의 미소(?)가 아니고 말이다.

마치 복음은 자기를 파쇄시키는 파쇄기와도 같은데, 그러한 복음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거운 쇳덩이를 지고 살아가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서, 이 복음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를 위해서 살아가도록 한다고 했다는 말이다.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데 그러한 복음이 우리 머리 속에만 들어있는지, 아니면 가슴에까지 들어있는지를 알리기 위해서 주님은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무용지물임을 점점 더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전혀 복음에서는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복음이란 예수님의 생명이고, 자기 목숨은 ‘나’ 라는 인간의 목숨이다. 그런데 어째서 예수님이란 타인의 목숨이 ‘나’ 라는 본인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지, 그 내막을 성경을 통해서 풀어본다. 

◈ 어떻게 타인의 목숨이 본인의 목숨보다 소중한가?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남겼는데, “타인의 목숨이 어떻게 본인의 목숨보다 더욱 더 소중한가?” 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타인의 목숨이 어떻게 나의 목숨과 연결이 되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어있는지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주님의 목숨과 자기의 목숨이 어떤 연결점을 가지고 서로 소통하는지, 어떻게 서로 주고받고 하는지 말이다. 서로 남인데 어떻게 그렇게 되느냐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지금 자기 옆에 마누라가 잠을 잔다고 했을 때, 제 아무리 부부라고 해도 마누라의 꿈과 자기의 꿈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마누라가 개꿈을 꾼다고 해서 남편도 개꿈을 꾸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부부가 아무리 한 몸이 되어서 붙어서 잔다고 해도, 마누라의 꿈이 남편에게 전달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 마누라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신하라고 여기고, 남편을 느부갓네살 왕으로 보았을 때, 왕이 신하를 보고 뭐라고 했는가? “내 꿈을 좀 알아내 봐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제가 창세기를 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내 꿈을 알아내라”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억지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어떻게 다른 사람이 꾼 꿈을 알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신하들이 뭐라고 하는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지 사람은 하지 못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남인데 그렇게 할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꿈을 알지 못한다면 진짜 남남인데,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을 믿으려고 존경을 하고 뭘 해도, 그것은 그냥 존경하고 우러러보는 것이지 결단코 한 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이순신 장군을 너무나 좋아하는데, 하지만 아무리 좋아해도 한 몸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밥을 먹으면 자기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가?

◈ 야야, 엄마는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

엄마들이 자기 자식에게 그런 이야기를 종종 하는데, “야야, 너만 있으면 나는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은 아이들도 다 아는데, 엄마가 혼자 있을 때 밥을 미리 다 챙겨서 먹는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이 어떻게 밥을 먹지 않고 배가 부를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영적인 세계에서는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데, 예수님과 자기가 서로 한 몸이 되어서, 예수님이 자기를 알고 자기가 예수님을 안다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려고 하니 환장을 하겠는데,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일을 어떻게 설명을 하느냐는 것이다. 차라리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말이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는 사람을 보면 심히 수상히 여기는데, 도저히 안 되는데 어떻게 알고 믿느냐는 것이다. 지식으로 아는 것도 아닌데, 그것은 사기이고 말이다. 성도는 기적을 받아야 성도인데, 그러니 원천적으로 막혀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부모라고 해도 자식의 꿈을 대신해서 꿀 수 없고, 자식이 먹는다고 해서 배가 부른 것이 아닌 것처럼, 어디까지나 인간은 개별자이고, 또한 개체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이 ‘피’ 라는 책을 쓰면서 ‘개체’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 !!

제가 그렇게 이 ‘피’ 라는 책에 대한 독후감을 부탁했는데, 아직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데, 뱀파이어나 드라큐라에게 부탁을 좀 해야 하는가? 아무튼 인간은 개체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도저히 불가능한데, 그래서 믿음으로 그냥 넘어가자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으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 따져야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왜 그렇게 따져야 하는가? 하나님이 너무나 황당한 이야기를 하신다는 말이다. 성경에 보면 당나귀가 말을 하니, 도대체 그게 말이 되는가? 믿을 만한 것만 믿고, 다른 것은 슬쩍 빼버리면, 그것은 비겁한 반칙이라는 것이다. 믿으려고 하면 다 믿든지, 믿지 않으려고 하면 하나도 믿지를 말든지 말이다.

제가 여기서 계시를 하나 만들어내겠는데, 즉 “모든 성경말씀을 다 믿어도 단 하나만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도 믿지 않는 것이다” 라고 말이다. 여러분 중에서 아무도 ‘아멘’ 이라는 멘트를 날리지 않는데, 전부가 다 자신이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마음속으로만 한 것인가?

◈ 예수님과 우리는 그야말로 남남 !!

제가 해답을 말씀드리면, 예수님과 우리는 어디까지나 남남인데, 우리에게 예수님을 1592년 임진왜란 때의 이순신 장군과 똑같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2000년 전의 고대인물이니 우리들과 도저히 같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이순신 장군이 훨씬 더 가깝지 말이다. 그러니 전혀 우리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우리 인간은 접근하면 할수록 ‘나’ 라는 것이 퍼져서, 즉 자아 영역이 퍼지고 확대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어떤 여자를 사랑하면, 사실은 그것은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여자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말이 좀 어려운가요? 즉 그 여자를, 자기가 좋아하는 부분까지 정정하도록 해서, 자기 뱃살이 늘어나듯이 그렇게 자기 몸이, 즉 자아의 영역이 늘어나고 퍼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결코 자기가 자기 자신을 뛰어넘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 전체가 어떻게 부분집합에 포함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은 현대 수학자들이 아무리 연구를 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인데, 부분 집합에 있는 것이 어떻게 전체를, 즉 전체가 어떻게 부분집합에 포함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말을 하고 보니 상당히 어렵게 되었는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대한민국에서 모든 남자들은 군대에 간다” 라고 했을 때, 지금 하려고 하니 어려워서 그냥 넘어가겠는데, 나중에 다시 나오니 그때 하자는 말이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 예수님과 우리는 집합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그런데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이다. 즉 “내가 예수님을 믿고, 그래서 예수님 안에 내가,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실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에 있어서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과 우리는 도저히 되지 않는데, 그런데 성부와 성자 사이는 그것이 가능하더라는 것이다. 

◈ 이스라엘은, 성부와 성자 관계의 긴 그림자 !!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에이, 안 되는데요? 제가 친구하고 해보니 안 되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됩니까?” 라고, 그것을 비난할(?) 때, 예수님은 먼저 자기와 아버지와의 관계를 긴 그림자로 보여주시는데, 그런 긴다란 달 그림자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말이다. 즉 구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구약성경을 통해서 “안 되는데, 되더라” 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놀랍게도 이스라엘과 동행을 하더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동행을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끝까지 “안 된다, 안 된다” 라고 하면서 거부를 하는데, 왜 그런가? 안 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니 말이다. 그러니 인간으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된다, 안 된다, 된다, 안 된다 !!

그렇게 그들은 항상 안 된다는 것인데,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내가 동행하면 된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 갈렙과 여호수아는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데 갈렙과 여호수아는 정작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설명이라는 것은 상대방이 알고 있는 것과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공통점이 들어있을 때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소통이, 즉 커뮤니케이션이 되어서 납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방은 없고 자기에게만 있다고 하면, 그만 더욱 더 상대방을 소경으로 만들어서 오히려 더 화를 내게 한다는 말이다.

성경에 보면 당나귀가 말을 하는데, 그런데 당나귀는 말을 하지 못한다고 여기는 동네에 사는 사람과, 당나귀가 말을 하는 동네에 사는 사람이 어떻게 대화가 되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말한 당나귀가 다른 동네에 가서 말을 하는가? 전혀 하지 않는데, 즉 당나귀가 말하는 하는 것도 그 순간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성경에서 기적은 단 한번뿐인데, 홍해도 한번만 갈라졌고, 또한 여리고 성도 두 번씩이나 무너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하나가 되었는데, 그렇게 하나가 된 것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주 유명한 용어인데, 그것이 바로 ‘언약’ 이라는 말이다.

◈ 우상이란, ‘언약이 없다’ !!

저는 이 언약을 ‘본드’로 보고 싶은데, 제임스 본드는 말고, 돼지표 본드(?)라고 할 때 그 본드 말이다. 그런데 그 본드가 이스라엘에게는 먹혀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본드로 그렇게 붙인다는 것이 본인들의 인생관에 의하면 들어올 자리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언약이 어떤 역할을 하는고 하니, 공격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언약이 분명히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이 목적인데, 그런데 이스라엘을 말고, 암몬과 모압과 에돔과 불레셋과 바벨론 같은 나라들을 먼저 작살낸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참 그들이 불쌍한데 말이다.

◈ 예수님이 하나님을 친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이방 민족들을 칠 때 그 구실로 대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너희들에게는 언약이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 글자로 ‘우상’ 이라고 하는데, 물론 언약적으로는 우상이 맞지만, 그러나 자기들에는 그들이 믿고 따르는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되니, 하나님은 누구를 치는고 하니, 하나님을 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을 친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는 신은 왜 우상인고 하니, 인간은 인간 속에서 끄집어내기에 언약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이 언약은 전혀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 내지를 못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 언약은 언약의 하나님이 사건을 유발시킬 때, 그때 비로소 개입이 된다는 말이다. 이 사건은 간호사가 찌르는 주사기와 같은데, 그러니 ‘따금’ 한다는 것이다.

제가 아까 사건을 몇 가지 소개를 했는데, 조금 전에 그린 그림을 다시 그려보면, 즉 ‘있음’에서 ‘없음’으로 갔는데, 이것이 사도바울에게는 무슨 사건인고 하니, 다메섹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이 사건을 사도행전에만 두 번씩이나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도바울은 ‘있음’에서 ‘없음’으로 가는데, 다메섹 사건이후에 사도바울이 살아있어도, 그것은 있음이 아니라 없음이라는 것이다.

◈ ‘있음’에서 ‘없음’으로 !!

예수님이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는데, 즉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가 있음인가? 없음인가? 분명히 있는데, 그런데 없음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없는데서 3천명을 먹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경우도, 자기 아내인 사라의 태가 죽은 것을 없음으로 본다는 말이다.

또한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때도 사실은 다윗은 없었는데, 즉 다윗의 있음이 아니라 다윗의 없음이 골리앗이라는 있음을 이겼다는 것이다. 젖먹이 아이의 경우에도, 사실은 젖먹이 아이는 없는 것이고, 그 배후에 하나님의 이름이 적들을 이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가른 것이 아니라, 모세의 지팡이는 없음을 이야기하는데, 즉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홍해를 가를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지팡이로 이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없는 분이 있음의 세계에 개입해서, 있음의 세계를 없음으로 완전히 박살내는 전쟁이 바로 여호와 전쟁이라는 것이다. 

신약에 가면 그 ‘없음’이 구체적으로 나오는데, 즉 도대체 무엇이 없는지 말이다. 무엇이 없는가? 거룩함이 없고, 하나님의 의가 없고, 언약이 없고, 생명이 없고, 사랑이 없고, 자비가 없고, 용서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니 있는 것이 없는데 말이다. 그러니 있음에서 없음이 될 때, 그것은 분명히 하나의 사건이라는 말이다.

◈ 사도바울의 배짱은 어디에서?

사도바울의 경우에, 그가 다메섹 사건이 일어나고 금방 죽은 것이 아닌데, 그 이후에도 분명히 살아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을 만물의 찌끼로 보았는데, 그래서 “우리는 죽고, 너희는 살아라” 라고 나오는데, 왜냐하면 사도바울의 목숨은 따로 챙겨놓았기에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바울은 얍삽한데(?), 자기는 자기 목숨을 이제 챙겨놓았다고 배뿔랑하게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유인의 특징인데, 즉 자기는 이제 죽어도 살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에서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비록 자기가 궁핍에 처하든, 비천에 처하든, 풍부에 처하든 간에 말이다.

(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 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자기가 실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고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사건화가 되니까, 지금 분위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데(ㅋㅋ), 그렇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건화를 시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주님이 남기신 실적이라는 것이다.

◈ 사건과 사건의 ‘잇달음’으로 !!

지금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있음에서 없음이 될 때, 그 다음에 있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존재로 보지 말고 사건의 이음으로, 즉 ‘사건의 잇달음’으로 보자는 것이다. 사건과 사건의 연결로서 말이다. 그렇게 해야 일용할 양식이 된다는 것이다.

또 어려운데,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집에 쌀이 두 가마니가 있어도 자기는 지금 일용할 양식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어제의 일용할 양식은 어제로 끝이 나고 말이다. 그러니 오늘은 오늘의 사건이 필요하고,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 순간에 이렇게 은행잔고에 돈이 있으면, 내일도 살아갈 수 있다는 여기지만, 그러나 주님은 전혀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 이놈아, 지금 죽어라 ??

그래서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라고 말이다. 그것은 “이놈아, 지금 죽어라” 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렇게 계속해서 사건과 사건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증인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눅 12: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눅 12: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눅 12: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눅 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 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 인간이란 존재는, 곧 과거뭉치 !!

여러분이 이해를 하든 말든 진도를 나가야 하는데, 아무튼 우리가 구약을 공부하면서 신약으로 자꾸 넘어가려고 하지만 말고, 먼저 구약부터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있어서, 이스라엘은 자꾸만 자기들의 존재를 주장하는데, 그러나 인간의 존재는 일종의 ‘과거뭉치(?)’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거가 계속해서 이스라엘에게 없어지지 않는데, 물론 우리들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렇게 인간에게 있어서 항상 “나도 과거에는 예뻤는데, 부자였는데” 라고 하는데, 즉 그렇게 과거가 없어지지 않고 끈질게 따라붙는다는 것이다. 목사의 경우에는 “옛날에 나도 한 설교를 했는데” 라고 하고 말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그렇게 과거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 ‘성경신학의 세계2’를 보면서 !!

이번에 ‘성경신학의 세계2’를 책으로 내었는데, 참으로 기가 찬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제가 과거 10년 전에 쓴 글들인데, 그것을 보면서 “야, 이런 많은 글들을 어떻게 다 썼지?” 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동시에 “목사님, 앞으로 그렇게 글을 좀 써주세요” 라고 하면 그것은 죽으라는 소리와도 같다는 생각지 들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글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제가 너무 너무 힘든 노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아마 젊어서 정신없이 글을 쓴 것 같은데, 그 내용도 정신이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물론 지금도 기운만은 아직까지 펄펄한데, 특히 해가 떨어지면 말이다. 의심이 든다 싶으면 제 아내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고 말이다. (사모님, 정말 맞나요? ㅋㅋ)

◈ 인간은 자기 자신을 벤치마킹 !!

이렇게 인간은 과거가 없이는 미래가 형성되지 않는데, 아까 제가 “인간은 자기를 벤치마킹한다” 라고 했는데, 그저 모방을 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나’를 찾는 작업인데, 즉 자기가 기대하고 자기가 예측한 것을 찾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의 미래는 무엇과 관련되어있는고 하니, 자기가 과거에 실수한 것, 그런 자기의 과거를 반성하면서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데, 즉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이라고 말이다.
 
◈ 인간의 소망은, 자기 존재의 퍼짐 !!

인간에게는 과거가 없는 미래는 없는데, 그래서 인간의 존재는 과거, 현재, 미래의 덩어리가 곧 존재라는 것이다. 즉 ‘나’ 라는 것을 깨어보면, 자기의 과거가 있는데, 그 과거의 바탕 위에서 그 과거를 반성하면서 현재를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둑놈도 반성을 하는데, 즉 “아하, 가스관을 타고 올라가면 저렇게 쉽게 갈 수 있구나” 라고 말이다. 그렇게 반성을 해서, 더 낫고 더 효율적인 것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과학인데, 이러한 과학은 과거가 없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다음에는 거기에다 자기 소망을 거는데, 그런데 그것이 엉터리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존재의 퍼짐이기에 말이다.

◈ 똥배야 물러가라 ??

요즘 저의 소망은 뱃살을 빼는 것인데, 겉으로는 살이 없어 보이는데, 똥배가 얼마나 볼록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저희 집에 가면 중요한 메모지가 하나 있는데, 아내가 사용하는 것인데 말이다. 거기에다 무엇을 적어놓았는고 하니, 과거에 가야산에 등산을 가서 들었던 이야기를 낱낱이 깨알같이 기록을 해놓았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 신랑을 의식해서 적어놓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최복기 간사님도 집에 와서는 보고 그대로 시도를 했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뱃살이 전혀 빠지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왜 뱃살이 빠지지 않는가? 그것은 바로 그런 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나야만 하는데, 그런데 일주일에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빠질 리가 있느냐는 말이다(ㅋㅋ).

아무튼 인간은 그렇게 자기가 소망한 대로 되지 않으니, 그 다음에는 그만 짜증만 나게 되고, 그래서 결국에는 우울증에 걸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다 어디에서 나오는고 하니, 바로 이 존재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자기 존재에서 말이다.

◈ 구약역사는, 인간의 존재를 무시하는 주님의 사건 !!

그렇다면 주님은 무엇인가? 주님은 그런 인간의 존재를 극도로 무시하는 사건을 주시는데, 즉 타인의 사건을 주신다는 말이다. 그 타인의 사건이 곧 주님의 사건인데, 또한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구약역사라는 것이다.

구약의 사울과 다윗의 경우에 있어서, 이 사울이 얼마나 자기 권세에 집착하는지를 모르는데, 그것이 전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철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이 사울과 다윗을 설교하면서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르는데, 백성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 라고 찬양했을 때, 과연 어느 부교역자가 이런 대목을 설교하겠느냐는 것이다.

아무튼 제가 왜 웃었는고 하니, 저도 그 대목을 가지고 설교를 분명히 하기는 했는데, 부교역자 시절에 말이다. 그때 당회장을 아주 작살을 내었는데, 즉 “백성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했는데, 대목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단입니다” 라고 말이다. 만약에 다윗에 선배라고 한다면 사울이 화를 내지 않는데, 그런데 사울이 선배이고 다윗이 후배라는 것이다.

◈ 과연 과거가 깊은 사람이 더 미래가 밝아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시간적인 요소인데, 제가 아까 인간의 존재에는 무엇이 들어있다고 했는고 하니, ‘과거, 현재, 미래’가 들어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즉 과거가 깊은 사람이 더욱 더 미래가 밝아야 한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마치 높은 탑이 그림자가 더욱 길 듯이 말이다.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과거가 긴 사람이 과거가 짧은 사람보다 더욱 더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존재와 존재를 비교해서 결정이 된다는 말이다. 즉 “아니, 어디서 날아온 돌이 감히 박힌 돌을 빼?” 라는 식으로 말이다.

만약에 사울이 후배이고 다윗이 선배라면 사울이 그렇게 화를 내지 않는데, 오히려 사울이 다윗에게 “선배님, 축하합니다. 최고예요” 라고 하면, 다윗은 “이것들이, 나를 만난 것을 영광으로 알아” 라고 할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후배가 만만이고 선배가 천천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은 요리왕 ??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인데, 즉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모두 뒤집어 엎어버렸다는 것이다. “이 놈들아, 정신을 차려!” 라고 하면서 말이다. 모든 존재를 그야말로 사시미 칼로 회를 뜨듯이 그렇게 우리의 존재를 그만 칼로 난도질을 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잘려진 한 토막 한 토막이 모두가 다 사건이 되는데, 사실은 깨는 것 자체가 사건인데 말이다. 그렇게 사시미 칼로 우리를 자를 때, 자르고 또 자르는 순간의 공백에 누가 개입하는고 하니, “내가 잘랐다. 왜?” 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이 그만 개입을 한다는 것이다. 즉 “너희들이 언약을 왜 잊었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언약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 존재를 깨부수는 하나님 !!

이스라엘은 분명히 하나의 존재인데, 그런데 갑자기 블레셋이 쳐들어왔다는 것이다. 분명 이스라엘도 하나의 존재이니 블레셋이라는 존재와 부딪치게 되는데, 그런데 그만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불리하니 그들은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잘못했으니, 제발 이 이스라엘이라는 존재를 살려달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블레셋’ 이라는 존재로 인해서 자기들의 존재가 그만 깨어졌으니,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를 보내는고 하니, 사사를 보내게 되는데, 그런데 그 사사의 개입이 바로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나님이 보내신 사사는 그냥 오는 게 아니라 무슨 메시지를 가지고 오는데, 즉 “이번에 블레셋이 너희들을 깨부수었는데, 그런데 그렇게 부순 당사자가 사실은 블레셋이 아니라 하나님인데, 그것도 언약의 하나님이다” 라고 하면서 온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이 다시 언약을 기억하도록 !!

그러면 언약의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언약을 다시 한번 더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언약은 하나의 사건인데, 바로 그 사건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 존재를 깬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런 존재에서 올라오는 소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도 역시 깨어지고 난도질을 당해야 하는데, 회를 뜨는 사시미 칼로 말이다.

그렇게 언약으로 인해서 존재가 깨어지는 것이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인해서 깨어진다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때로는 불로서, 또한 이방나라들도 인해서 깨어지고 말이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피로서 우리의 존재에서 나온 소망은 가차없이 깨어지는데,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사도바울은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이 소망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이것을 다시 살펴보면, 여기에 이렇게 먼저 있음에서 없음으로, 또한 그 없음에서 한 쪽에는 있음이 나오고, 다른 쪽의 있음은 하늘나라에 있고 말이다. 이렇게 둘로 갈라짐으로 소망도 두 가지가 되는데, 즉 눈에 보이는 소망과 보이지 않는 소망으로 말이다. 믿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사람을 믿는 믿음과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이다. 사랑도 역시나 사람을 향한 사랑과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나누어진다는 말이다.

◈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거짓말, 그런데 ‘언약’의 개입으로 !!

이제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많이 한다고 해서 좋은 것만은 아니니 말이다. 다시 정리를 해보면, 인간을 결코 자기를 떠나지 않는데, 오히려 자기를 고무줄처럼 늘어뜨려서 자기 인식의 능력만이 더 확장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삼켜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거짓말인데,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를 극복하지 못하기에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구약의 이스라엘은 되더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니 말이다. 하지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우리나 모두가 다 같은 인간인데, 우리는 안 되는데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언약’이 개입되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고 나서 주제파악도 하지 못하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르는데, 즉 “여호와는 우리의 용사시니, 찬양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모세의 누나인 미리암은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찬양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줌마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가? 그만 문둥병자가 되고 말았다는 말이다.

그 아줌마가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그녀가 모세의 누나이니, 그렇게 모세의 소유한 것을 가지고 자기 존재로 보아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존재의 소유로 여겨서, 즉 “모세는 내 가족이다” 라고 자기 존재에 포함시켜서 보았기에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 세상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말이다.

아무튼 처음에는 그렇게 하나님 좋아하고 모세를 좋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중에 어떻게 하는가? 애굽인들 못지 않게 자기와 함께 해주고 사랑해준 하나님을 그만 공격하고 또한 원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을 공격하면 어떻게 되는가?

◈ 존재와 언약사건이 맞지 않으니, 돌판이 와장창 !!

여기서 다시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야 되겠는데, 존재에서 나오는 것은 존재의 힘밖에 없는데, 그래서 자기 존재를 확장시킨다는 것이다. 그러한 존재의 힘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시는가? 시내산에 올라간 자가 누구인가? 바로 모세인데, 단 모세 한 사람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세는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는 존재가 아니라 ‘언약사건’으로서 내려왔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존재와 언약사건이 서로 맞지를 않으니, 그래서 도중에 언약을, 즉 돌판을 깨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그 깨어진 돌판을 대신해서, 존재의 죄가 담겨있는 돌판을 만들어서 시내산에 가지고 올라가는데, 그래서 그 돌판에다가 다시 십계명을 새겨서 내려온다는 것이다. 깨어진 돌판은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주신 돌판이고 말이다. 

◈ 모세는 억울해 ??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존재를 확장함에 있어서 누구를 공격하는고 하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공격하는 대신에 그만 눈에 보이는 모세를 공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화를 내는데,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모세가 화를 내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성질을 내어서 말이다.

다시 말해서, 모세의 입장에서는 “하나님, 제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얼마나 저들을 위해서 고생을 많이 하는데, 왜 저들이 저를 공격하고 원망합니까?” 라는 것이다. 그렇게 화가 나니,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물을 낼 때 모세에게 반석을 향해서 명령을 하라고 했는데, 그런데 모세는 그만 지팡이로 반석을 그만 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말이다.

◈ 사건은 철저하게 사건에 종속되어야 !!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사건은 철저하게 사건에 종속되어야 한다” 라는 것인데, 쉽게 말해서, “지시에 따라야 한다” 라는 것이다. 즉 한번 사용한 것을 두 번씩이나 써먹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목사는 설교를 재탕하면 안 되는데, 즉 과거에 그 설교로서 교인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또 다시 받으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칼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설교도 하나의 사건이니 말이다. 즉 설교는 계시사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 사연은?

왜 모세가 그렇게 하였는가? 사실은 과거에 지팡이로 치니 일이 해결이 되었는데, 홍해를 건널 때도 그렇고, 또 출애굽기 17장에서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반석을 쳐서 물을 낸 적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가지고 치라고 한 것이 아닌데, 그런데 그만 두 번씩이나 내리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 물은 나왔지만, 그러나 그 일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니, 왜 성질을 내노?” 라고 해서 말이다.

(민 20:1) 정월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서 백성이 가데스에 거하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 장사하니라
(민 20:2)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니라 …
(민 20: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민 20:8)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
(민 20:9) 모세가 그 명대로 여호와의 앞에서 지팡이를 취하니라
(민 20:10)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민 20:11)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민 20: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 사건은 주님이 주셔야 !!

그러므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대하기 이전에 무엇을 먼저 의식해야 하는고 하니까, 그것이 바로 자기가 사건 속에 있다는 것인데, 그런데 그 사건은 주님이 주셔야만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이렇게 사건 속에 있다는 말은, 자기 것을 끄집어내어서 설교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주셔야 되고, 동행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자기가 십 년 동안을 목회를 잘했다고 해서 그 다음에 또 하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사건이 허락되지 않으면, 즉 설교가 되지 않으면 그만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도 구원을 받으면 되니 말이다. 그렇게 일용할 양식을 주듯이 늘 주셔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만나가 이틀 분이나 삼 일분은 전혀 허락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그날 먹을 일용할 양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구약의 만나가 왜 말씀인고 하니까, 존재가 양 사방에 ‘좍’ 깔려있는 이 세상 바닥에 사건이 그야말로 ‘두둑둑’ 하고 떨어지는데, 그것도 아침마다 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존재로 있으면서 사건을 사건으로 이해를 해야 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나를 욕심을 내어서 이틀 분씩을 거두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만나는 하루가 지나면 그냥 썩어버린다는 것이다.

◈ 설교준비는 지우기 위해서 !!

저의 경우에는 이미 5월분 설교를 이미 준비를 다 해놓았는데, 하지만 그렇게 해놓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왜냐하면 제가 그렇게 미리 준비한 것은 지워버리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실제로 설교를 해보면 준비한 내용과는 전혀 다를 때가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물론 준비는 제대로 철저하게 해야 하고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제대로 설교준비를 했다고 해도 강단에서 설교를 하면서 거기에 얽매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설교원고를 다 준비하고도 찢어버리는데, 그렇게 미리 준비를 해놓아야만 찢을 것이 있지 않느냐는 말이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런 차원에서 설교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참된 이스라엘은 교재이고, 소모품 !!

마지막으로 정리를 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언약’ 이라는 본드가 있는데, 그런데 이 언약은 반드시 사건으로만 작용을 하는데,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자기 존재로 이해를 하더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그렇게 서로 맞지를 않으니, 모세와 같은 피해자를 통해서, 그런데 이런 피해자가 하나님 편에도 서지만, 자기 존재밖에 모르는 죄 많은 인간들 편에 서서, 피가 흥건한 제사를 통해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인도하셔서, 이러한 모든 그림자인, 즉 모델 하우스가 지향하는 참된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까지 이스라엘을 이끌고 간다는 것이다. 그들을 하나의 교재로서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무엇을 안다고 해서 써먹는 것으로,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일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매일같이 주님의 지시를 받고 응답을 받아서, 그 응답 속에서 저희들이 얼마나 자기 자신의 영광과 체면과 자존심밖에 모르는, 전혀 주님이 일으키시는 사건에 소모품이 되고 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인간인지 깨닫게 하시고, 그러한 가운데서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자유인으로서 복음을 증거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05,17 새벽 1시 30분에 마침.

요즘 제 몸무게가 66인데, 그리고 제 아내는 44, 그러면 100인가?
말씀대로 살면 감히 어떻게 똥배가, ㅋㅋ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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