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강의 2009-05-04  피3강 (고후5:14) 하나님은 한 남자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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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090504피p015하나님은한남자를죽였다

피 3강 (고후 5: 14) 하나님은 한 남자를 죽였다

[09 대구강의 8] - [피 3] - 하나님은 한 남자를 죽였다
                                                                                
09,05,0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다 !!

이제 시작하겠는데, 먼저 교재 15페이지를 보자.

**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죽였다.

우리가 아는 상식에 의하면,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천지를 다 창조하셨는데,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 천지(天地)에, 즉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인데, 그래서 하나님이 다스린다고 하는 것이 우리네 상식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맞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이것이 중심이다 ??

그렇다고 한다면, 이렇게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건인데, 그런데 하나님의 그 수많은 다스림 가운데서 어떻게 유독 하나만 딱 떼어서 “이것이 중심이다” 라고 내세울 근거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온 우주를 다 하나님이 만드셨고 다스리고 계시는데, 그렇다고 하면 전부가 다 중요시되고 모든 것이 다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어느 특정한 하나만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이렇게 전부가 다 하나님께 나아가야, 그것이 진리이고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깨끗한 물이 담겨 있는데, 그런데 여기에 그만 잉크 방울이 하나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물이 모두 흐려지는데, 만약에 까만 잉크라고 하면 그 물이 까만색으로 변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든 것 자체를 좋게 여기는데, 마귀자식은 없고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여서, 하나님이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전부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래서 나중에 좋은 세상에 가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비록 이 땅에서는 실수를 하고 죄를 짓더라도 말이다. 그 정도는 하나님 정도의 배포라고 하면, 그 넓으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냥 넘어가 주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 어떻게 십자가 사건이 전체의 중심인가?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건들 중에서 유독 하나의 사건, 즉 십자가 사건이 전체의 중심이 된다고 하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즉 우리가 밥을 먹는 것은 중심사건이 아니고, 예수님이 2000년 전에 돌아가신 것은 중심사건이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십자가 사건 앞에서 “하나님, 제가 밥을 먹을까요? 말까요?” 라는 것도 무의미하게 되고 무시되고 말 때,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이다.

◈ ‘박쥐’의 진짜 감독은 예수님 ??

최근에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박쥐’ 라는 영화를 본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데, 한 마디로 말해서 구역질이 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토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들이 먹지 못하는 피를 먹고 있으니 그러한데, 하지만 그렇게 피를 먹는 것은 이미 성경에 있는데, 즉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 피를 먹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고 하면서 말이다.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아, 토하고 싶어 !!

그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토하고 싶었겠는가? 예수님이 바로 박찬욱 감독인데(?), 사람들이 싫어하고 토하고 싶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 라고 하니, 사람들을 다 흡혈귀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차마 토하고 싶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이 말씀은 어렵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어렵다고 말이다. 그렇게 어렵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세계 밖의 일이라는 말인데, 즉 자기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일단 수용을 해야 믿던지 말던지 할 것인데 말이다.

◈ 사람은 자기를 본떠서 세상을 창조한다 !!

이것을 “인간은 자기를 본떠서 세상을 창조한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자기 세계는 자기 적성에 맞는 것만 골라서 있는데, 자기를 본떠서 자기의 세계를 창조하니 말이다. 그것은 각자가 모두 그러한데, 그렇다면 자기가 보는 세계의 중심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나’ 라는 것이 중심이 되는데, 그리고 그 중심이 된 세계를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제가 처음에 강의를 했지만,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그 중에 ‘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나’를 본떠서 ‘나’ 중심의 세계를 만들어서, 그 만들어진 세계를 하나님께 바친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좋아할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도 아주 쉽고 부담이 없이, 즉 전혀 토악질이 나지 않게 말이다.

그렇게 부드럽고, 자연스럽고, 순하고, 스무스하게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면 이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나는 나의 세계를 내 취향에 맞게 구성한다. 그리고 그렇게 구성된 것을 하나님께서 만들었다고 인정하고, 나중에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은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라고 말이다.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으면 나와보라는 것이다.

◈ 그런데 검은 잉크가 한 방울 떨어지면 !!

이것이 인간에게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것인데, 그런데 거기에 검은 잉크가 한 방울 떨어진다고 하면, 즉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그것은 결코 자기가 원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세계에는 ‘내’가 원한 것만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자기를 본떠서 만든 그 세계에 십자가 사건을 집어넣겠는가? 전혀 넣어줄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십자가 사건은 ‘나’를 부인하는 사건이니 말이다. 그러니 ‘내’가 좋아서 ‘내’가 만든, 그런 ‘나’ 만의 세계에, 그 안에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린 피를 집어넣겠는가? 만약에 그런 것이 들어오면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구역질이 나고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분이 나쁘고 좋고 하는 그런 것에 상관이 없이, 이 세상 중심에 십자가를 만들어놓았는데, 그렇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그것은 예수님 당신만의 생각이고 당신의 세계이지, 나는 내 세계가 따로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그렇게 예수님을 인정하면서도 자기도 인정을 받기를 원하는데, 하지만 그 십자가가 잉크가 되어서 퍼져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결국은 이 십자가 사건이 포함이 되지 않은 그런 ‘나’ 만의 세계는 저주의 대상이고 되고, 죄악이 되고, 그러니 지옥의 유황불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부자와 나사로의 경우에 !!

부자와 나사로의 경우에, 사람들의 관심이 나사로에 집중하는데, 왜냐하면 그가 천국에 갔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이 나사로를 끌어당기는 분이 계시는데, 그가 바로 아브라함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그래서 아브라함이 “어이, 나사로야. 여기 내 곁에 오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아브라함 언약에 의한 세계인데, 물론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아브라함의 세계가 따로 있고, 나사로의 세계가 따로 있고, 또 부자의 세계가 각각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각자 서로의 세계를 존중해주고 인정해주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

하지만 나사로의 경우에 어떠한가? 나사로는 자기 세계는 그만 없어지고 천국에 와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품’에 말이다. 그러니 사실상 이 나사로는 처음부처 자기 세계는 없는 것이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내려오는 그 약속의 세계가 이 나사로의 전부를 다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나사로에게 일어났던 그 모든 사건은 무엇인가? 자기를 개가 와서 마구 핥고,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밥을 먹고 한 것들이 말이다. 그것은 도대체 어디서 유발된 것인가?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약속에 의해서 일으켜진 사건이라는 말이다.

(눅 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눅 16: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눅 16: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눅 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것이 어제 야외예배의 설교내용이기도 한데, 즉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있다” 라는 것이 그만 사건화가 되어버리면, 그것이 앞당겨져서 지금 살아가는 우리 앞에 펼쳐진다는 것이다. 20대, 30대, 40대에 줄줄이 현실화가 되고 구체화가 된다는 말이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아까도 말했지만, 아무튼 인간은 자기의 세계를 자기를 본떠서 만드는데, 그렇게 해서 자기를 긍정해주고, 자기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그렇게 해서 자기가 살아가는 의미와 보람을 주는 세계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세상을 이렇게 본다. 왜?”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인간 세계에는 나사로는 없어 !!

인간은 그렇게 자기 노동의 가치가 담겨있는 세계를 좋아하는데, 그런데 나사로처럼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 세계에는 “나는 거지가 되어도 좋아” 라는 것이 없으니, 당연히 거지 나사로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인간이 만든 세계에도 “나는 거지가 되어도 좋아” 라는 게 들어가는 인간은 없는데, 즉 거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설령 거지 왕 ‘김춘삼’ 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러니 인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예수라는 양반의 세계인데, 즉 그런 피를 흘리면서 자기 세계에게는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도 이야기도 하지 말고 말이다. 그냥 자기가 가끔 복을 달라고 하면 좀 베풀어주면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세계를 결코 무시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십자가를 진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참으로 위대하고 대단한 일을 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자기의 세계도 훌륭하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말이다.

◈ 하나님에게 중심은 몇 개인가?

그렇게 되면 중심이 몇 개인가? 두 개가 되는데, 그렇다면 과연 “그 두 개의 중심을 하나님께서 허용하시겠는가?” 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 각자의 세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전적으로 자기 아들인 예수의 세계에만, 즉 십자가 세계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 우리는 어떤 부담을 가지게 되는고 하니, 일단 자기 세계를 부수고, 즉 자기를 부인하고, 그 다음에는 뚜벅뚜벅 걸어서 어디로 가야만 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그분의 세계의 중심이 되는 사건인 십자가 사건에 가야 하는데, 그러니 그것이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라는 말이다. 자기 세계를 부인하고 가야하니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을 나보다 더 사랑한다면, 그것은 천국에 합당하지 않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즉 “나의 세계 따로, 주님의 세계 따로”, 그렇게 주님은 두 개의 세계를 인정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마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 우리교회가 아닌, 주님의 교회 !!

다시 말해서, 자기를 부인하면 모든 것이 다 예수님 중심이 되어야지, 거기에다가 예수님의 세계뿐만 아니라 자기 세계도 조금은 인정해달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도 당연히 우리교회라는 것은 없고 말이다. 그러니 교회라고 하면 주님의 교회이지, 우리교회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ㅋㅋ).

아무튼 이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얼굴을 돌리고 또한 등마저도 돌리고 마는데, 즉 미워하고 핍박하고 박해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사실 인간들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도 역시 그러했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의 태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는데, 아무튼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결코 예수를 믿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기는 하겠는데, 하지만 자기들의 세계도 좀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니 소위 서로 주고받자는 식인데, 요즘 교인들이 하는 식으로 하면, “제가 헌금을 할 테니 복을 좀 주세요” 라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 우연이 아닌 필연, 필연이 아닌 우연 !!

그런데 오늘 여기 교재 15페이지를 보면,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모든 우연과 필연은 그 구분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말이 조금 어려운데, 우연은 우발적인 것을 의미하고, 필연은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연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어야 하고, 필연은 사실 우연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을 철학자들은 도저히 수긍하지 못하는데, 즉 우리가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필연이고, 또 필연이라고 여기는 것은 우연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우연을 필연 속에다 집어넣어서 모든 것이 필연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주권사상’ 이라 하는데, 물론 이것도 엉터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슬람교나 유대교에 이미 다 있는 것이고, 그것을 칼빈이 다시 써먹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일어난 것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인데, 그렇다면 필연은 무엇인가? 그 우연을 발생시킨 한 지점만 필연이 된다는 것이다. 흔히들 자기 몸이 아프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마땅하다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이 당연한 필연이 아니라, 자기가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생긴 우연이라는 말이다. 즉 우연이든 필연이든 간에, 그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만 필연이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왜 한 남자를?

오늘 강의 제목이 “하나님은 한 남자를 죽였다” 라는 것인데, 제목이 심상치 않은데 말이다. 그런데 “한 남자는 죽였다” 라는 것 앞에 뭐라고 하는가? 바로 그 앞에 놀랍게도 ‘하나님’ 이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니 누가 죽였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하나님과는 다른데, 즉 우리 생각에는, 현재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를 만드셨으니, 우리가 이러한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그런데 이러한 상식이 완전히 깨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진짜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 그런 우리를 완전히 그만 비켜나서 “한 남자를 죽였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한 남자를 죽였다는 말이다. 전혀 우리가 예상이나 상상을 벗어나서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나님께서 죽였다고 하는 한 남자, 바로 그 한 남자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아무리 돌아다녀도 하나님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한 남자 바깥에 있는 하나님은 모두가 다 우상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한 남자를 죽였다고 한다면, 그렇게 한 남자를 죽은 사건 속에 뛰어들지 않으면, 그 한 남자도 보이지 않을뿐더러, 우리가 그렇게 생각했던 하나님 자체도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은 그렇게 알 수 없는 자리에 놓여있다는 말이다.

◈ 인간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자리를 알 수 없어 !!

그렇다면 이 자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한 자리를 만들었는데, 그 자리를 알기 위해서 먼저 율법을 살펴보겠는데, 이 율법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리를 인정하고, 그 자리를 저주하면서 쏘아대지만, 하지만 율법 이외의 자리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 말고 다른 자리를 하나 만들었는데, 그 자리가 곧 십자가의 자리인데,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자리라는 말이다.

◈ 퀴즈 - 두 개의 자리 중에서 본래 우리의 자리는?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퀴즈를 하나 내겠는데, “여기 있는 두 개의 자리 중에서 본래 우리의 자리는 어디인가?” 라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무슨 주장을 하는고 하니, 계시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자연계시(일반계시)이고, 또 다른 하나는 특별계시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칼바르트는 반대했는데, 왜 반대를 했는고 하니, 자연계시를 인정하게 되면, 그 자연계시 안에 모든 조직신학을 새롭게 다시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계시는 특별계시를 중심으로 새로 정립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의 계시내용이 서로 상충되고 모순이 되는 점이 있기에 말이다.

◈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

일반계시에서 나오는 조직신학이 따로 있기 마련인데, 예를 들어서, 일반계시에서 주장하기를 “우리 인간은 창조되었는데, 여기가 우리의 자리이다” 라고 하면, 그렇게 우리의 자리가 있다고 하면, 그러면 특별계시에서 말하는 우리 인간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아담의 자리이고, 죽음의 자리인데, 이 죽음은 무(無)이고 공백이고 없어짐인데 말이다. 그렇게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두 가지 자체가 서로 모순이 되기에 같이 끄집어낼 수가 없는데, 즉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사이에는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서로 포용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학교에서는 이것을 동전의 양면이라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동전의 양면은 서로 싸우지를 않고 같이 잘 붙어있는데,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서로 싸운다는 것이다.

◈ 여호와와 바알은 이명동인 ??

어떻게 이방인들이 믿는 우상과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 어떻게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낼 수가 있겠는가? 서로 싸워야만 여호와 전쟁이 성립이 되는데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에 가서 말하기를 “야, 너희들은 무엇을 믿지?” 라고 하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라고 하니, 다시 이스라엘이 말하기를 “뭐, 너희들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여호수아님, 저들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 같은 편인 것 같습니다” 라고 했는가? 그것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하는 짓이고, 불교에서 하는 짓이라는 말이다.

과연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는가? 그것이 아니라, “뭐라꼬? 너희들이 여호와를 안다고?” 라고 했는데, 그러니 저쪽에서 자존심이 상해서 하는 말이 “너희들이 바알을 안다고?”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만약 그럴 때에 양쪽 진영에 유명한 신학자가 있다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바알이나 여호와는 모두 같은 신인데, 다만 지엽적으로 민족적인 특성과 문화적인 차이에 따라 서로 사용하는 용어가 다를 뿐이다” 라고 하니, 정말이지 기가 찰 노릇이란 말이다.

이것을 좀 어렵게 표현하면, 즉 “모든 인간은 다 신을 내뿜게 되는데, 왜 그런고 하니, 그 바닥이 바로 일반계시에 의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바닥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 자리에 살면서 ‘누가 나를 만들었지? 죽으면 어디로 가지?’ 라고 하기 때문에, 또한 로마서에 보면 ‘저희들이 하나님을 알 되’ 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렇게 하나님을 알고 있는데, 다만 서로가 살아온 환경이 달라서, 즉 살아온 터전이 다르고, 그래서 외부에서 수입된 문화적 영향을 받아서, 그것을 혼합주의라고 하는데, 그렇게 섞여서 명칭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영향을 많이 받으면 바알이 된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올브라이트 - 모든 신은 ‘엘’ !!

그래서 ‘올브라이트’ 라는 유명한 구약 신학자는 뭐라고 주장했는고 하니, “바알이든 여호와이든 합쳐보면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이 곧 ‘엘’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엘’에서 어떻게 ‘여호와’가 되었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엘’을 보고 너무나도 놀라서, 그낭 ‘으악(?)’ 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여호와, 즉 ‘야웨’ 라고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한 신학논문이 또 수천 개나 되고 말이다.

◈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 !!

하지만 진짜 하나님은 이름을 갖다 부치기 이전에 어떤 사건부터 터트리는데, 그런 중심사건이 있고 난 다음에, 그 사건이 인간을 마구 조지는 사건인데 말이다. 차후에 이름을 붙이게 되는데, 즉 “나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여호와다. 그리고 나는 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서 ‘약속’ 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약속을 가지고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가? 인간은 백지상태가 아니라 기존 창조의 자리에 있는 것을 가지고 신이라고 버티고 있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나 이삭도 그렇고, 모든 인간은 다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약속이 인간에게 덮침으로서 !!

바로 여기에 약속을 공격하는 식으로 쳐들어오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들은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말로서도 표현할 수 없는, 다만 그 약속만을 받아들이는, 아니 그 약속이 자기를 덮쳐서, 그래서 이제는 하지 않으려고 해도 약속이 일을 시키는, 그렇게 약속에게 일을 시킴을 당하는 입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안다는 말이다. 즉 약속의 하나님을 말이다.

그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인데,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오셨는데,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시키는 데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구원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구원하면 안 되고, 오직 사렙다의 과부 한 사람에게만 구원이 허락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성령이 인도하시는 데로만 하시는데, 즉 예수님이 하신 것을 일일이 다 적었다고 해서 계시가 아니라, 요한복음 21장 25절에 보면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에 기록된 것 말고 다른 것은 계시가 아니라는 것인데, 예수님이 하신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요 21: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 성경말씀은 영으로 되었기에 !!

그래서 이렇게 “성경말씀은 영으로 되었다” 라고 하니, 학자들이 뭐라고 하는가? 그들은 여기서 ‘영’을 그만 빼버리고 성경을 인간문화의 산물로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을 잘 분석해서 그 당시의 문화적 상황으로 돌아가자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에도 오류가 있다고 하는데, 성경은 하나의 영이 되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영을 빼고, 성경은 인간이 썼다고 하면서, 그것을 소위 성경의 ‘전승사’ 라고 해서, 성경이 쓰여지게 된 각종 사본들을 수집해서 살펴보자는 것이다. 아니, 사본들을 그렇게 살피고 공부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자기들도 성경을 쓰려고 하는가?

◈ 그런데 성경말씀에서 ‘영’을 빼버리면?

그러니 이렇게 ‘영’을 빼버린다고 하는 것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하신 일을 다 한번 제대로 파악을 해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찾더라도,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이 다 성경말씀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 가운데 성경말씀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도들이 했다고 해도 역시 다 계시가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 인간이 하지 못하는 것을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곧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나타나실 때, 그 전제가 되는 것이 반드시 인간으로서는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렇게 ‘하지 못한다’ 라는 표현이 어폐가 있는데, 인간이 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하나님은 하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숙제를 주었는데 못하겠다는 것과, 아예 숙제 자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전혀 다른데, 바로 그렇게 될 때 모든 공로는 다 여호와께 돌아간다는 것이다. 자기가 짐작했던 예상문제를 풀지 못한다고 했을 때, 그것과 당나귀가 말한 것과 같은가? 발람의 당나귀가 말을 한다는 것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아니 상상치도 못한 것이라는 말이다. 평생동안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한 당나귀인데 말이다. 그 뒤에 그 당나귀는 입을 다물었다는 것이다.

◈ 아하, 나는 지금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은혜를 !!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일은, 즉 세미한 음성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전혀 우리가 미리 예상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받았지? 받았지? 받았네” 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예상조차도 피해서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죄를 지어서 “아하, 이번에 벌을 받을 거야. 화요일 정도 되지 싶은데” 라고 해서 화요일에 벌을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마귀가 준 벌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벌을 주고 말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벌이 되던 축복이 되던 간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지금 너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은혜를 누리고 있다. 그것을 너는 아는가?” 라는 것이다. 그렇게 순간순간마다 새로운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말이다.

◈ 설교는, 인간의 불가능함을 !!

설교자의 딜레마가 바로 그것인데, 동일한 본문을 가지고 열 번을 설교해도 전혀 다른, 즉 교인들이 예상하지도 못한 설교를 해야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이미 교인들이 알고 있고 예상했던 설교를 하게 되면, 그것은 인간의 가능성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설교에서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불가능함 가운데서 나타나는데 말이다. 

심지어 한참 설교를 하는데, 그리고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와서 그만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고 하면, “엄마, 으아앙” 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교인들이 관심사가 그만 그 아이에게 집중될 때, 그 목사의 설교는 그야말로 김빠진 맥주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목사는 설교할 마음도 전혀 생기지 않는데, 그런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이다. 물론 저는 그런 경험이 없는데(?), 목사가 그런 일을 당하고 나면 화가 나서 엉뚱한데 가서 화풀이를 하고 말이다. 차마 술은 마시지 못하고 사모나 자식들에게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전혀 우리가 예상치도 못하게 일을 하시는데, 그래서 이사야 53장 1절에 보면,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라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주어진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다.

(사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 십자가 사건의 반복은 예상이 되는가?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문제를 하나 내겠는데, 이러한 십자가 사건이 반복될 때, 그것이 과연 예상이 되겠는가? 역시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 사건 자체가 전혀 인간들이 예상치 못한 것이라고 하면, 그 십자가를 적용시키는 것도 역시 인간들이 전혀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번에 대구성일교회에서 교회설립 50주년 기념행사를 벌렸는데, ‘커밍홈’ 인가 뭔가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과연 무엇을 기대하면서, 무엇을 남기려고 그런 행사를 했겠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 교회의 영원함을, 즉 “성일교회는 영원하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누구든지 예상한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 성일교회의 지붕에 하나님의 불심판이 떨어진다는 것을 그들이 예상하겠는가?

물론 50주년 행사를 할 수 있고, 우리교회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하지만 무엇을 부정하면서 해야하는가? 교회 50주년을 부정하면서 그런 행사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된다는 말이다. 물론 그런 행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괜찮은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개혁주의 주일(?)도 지킬 수 있는데, 하지만 거기서 무엇을 해야하는가? 거기서 개혁주의가 이단임을 설교하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제까지 알았던 하나님의 일이 내일이 되면 장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를 인도할지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기를 죽일지 살릴지, 또한 교회가 공중에서 분해가 될지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렇게 복음을 좋아하던 자가 갑자기 반대를 할지, 아니면 그렇게 반대하던 사람이 다시 돌아올지 말이다. 그런 것을 아무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스데반 집사가 그야말로 안심을 푹 놓고 돌에 마구 맞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어디 그가 교회를 걱정하면서 “야, 내가 돌에 맞으면 교회가 정말 힘들고 곤란해지는데” 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맞을 때는 맞고, 또한 죽을 때는 죽고 말이다.

◈ 결코 중심은 사라지지 않아 !!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어디로 모아지는가? 즉 “한 남자가 십자가에서 죽었다” 라는 것이 중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 중심이 사라지고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면, 그 어떤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구원을 시키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단 한 군데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에게 돌을 던진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한 남자를 죽였다고 하는 것이 여전히 유효한 이상, 하나님의 구원에는 전혀 이상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주 배뿔랑하고 자신만만해 하신다는 것이다. 

이번에 대구서문교회에서 20명이나 치리를 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상대방은 억울해서 맞고소를 하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나를 본떠서 만든 나의 세계” 라는 것인데, 그것은 서문교회나 성일교회를 없애라는 말이 아니라, 그런 교회가 얼마든지 있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을 듣지 못한 교회 바깥에 있는 자들은 자기 세계밖에 없으니, 그런데 그들이 교회에 왔다고 하면, 답답해서 왔던지, 성령의 인도함으로 왔던지 말이다. 일단 그렇게 해서 오게 되면, 교회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하겠는가? “이 교회를 믿으면 안 됩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반드시 해주어야 하는데, 그래서 오직 십자가만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한 남자를 죽였다” 라고 하는 소식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다. 타락된 더러운 교회라고 해서 불도저를 가지고 와서 밀고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더럽지 않은 교회가 어디 있는가?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오직 복음만 전하면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모든 말씀을 한 남자에게 집중을 !!

그렇다면 여기서 이렇게 “하나님은 한 남자를 죽였다” 라고 하는데, 지금부터는 조금 어려워지니 정신을 차리고 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분명히 ‘한 남자’ 인데, 우리의 상식에 의하면, 만약 남자가 두 명이라고 하면, 한 남자의 속성이 따로 있고, 자기의 속성이 따로 있고, 그렇게 각각의 속성이 다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두 명이 아니라, 한 남자를 죽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기존의 다른 남자는 어떠한가?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전혀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보여주고자 하신 것은 한 남자이지, 다른 남자를 보여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언제 이근호를 보여주려고 했는가?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지금 한 남자를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한 남자를 누가 죽였는가? 하나님께서 죽이신 바로 그 한 남자라는 말이다.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말이다.

여기서 제가 특별한 의미라고 했는데, 그것을 성경에 보면 “모든 말씀을 집중을 시킨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신구약의 모든 말씀을, 즉 율법이고 뭐고 전부를 다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게 말씀을 모으고 모아서 한 남자에게 집중을 시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율법 외에 한 의가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한 남자가 순종함으로서 주어진 의가 무슨 역할을 하는가? 다른 남자들이 지키려고 했던 그 율법적인 의는 다 무시를 당하고, 오직 한 남자가 순종한 의만을 하나님이 유일하게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여자의 경우는, 남자에게 복속이 되니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고 말이다. 아무튼 바로 그 한 남자의 의가 없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 하필이면 왜 ‘한 남자’ 인가?

그렇다면 이렇게 ‘한 남자’ 라고 할 때, 여기서 우리에게 어려운 과제가 주어지는데, 기존의 여러 남자들의 속성과 한 남자의 속성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차이점을 알아서, 기존의 남자들의 속성은 왜 안 되는지, 오직 한 남자에게 일어난 그 사건의 속성만이 인정을 받는지, 물론 그 내막 밝혀졌는데 말이다.

그렇게 되려고 하면, 이 한 남자의 속성만 알아서는 안 되고, 기존의 모든 남자의 속성도 다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게 기존의 모든 남자의 속성이라고 하면, 그것을 다른 말로 ‘아담의 속성’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이 아담의 속성을 알려고 하면, 이 아담이 싸질러놓은 것을 다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질질 흘려놓은 대소변처럼 싸질러놓은 것을, 물론 역한 냄새가 나도 말이다. 

그렇게 아담의 속성이 질러놓은 모든 경제, 사회, 문화, 군사, 행정, 역사 등등, 그 모든 것을 다 알아야만 하는데, 물론 종교를 포함해서 말이다. 인간들의 나름대로의 구원 노력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드라마도 열심히 보아야 하고, 그리고 돈이 좀 들어도 영화도 열심히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쓰러져야 될 아담의 속성임을 말할 수 있는 증거를, 거기에서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찾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성경말씀인데, 이 성경말씀은 왜 인간이 한 모든 것이 다 육일 수밖에 없는지, 그것을 제대로 밝혀놓고 있다는 것이다.

◈ 예수를 믿지 않는 목사 ??

제가 오늘 아침에 십자가 마을에 글을 하나 올려놓았는데, ‘육과 영의 다양한 의견들’ 이라고 말이다. 지난주에 대구의 대우서적에서 약속시간에 좀 빨리 도착을 해서 책을 보다가, 어떤 책이 눈에 들어왔는고 하니, 독일에서 조직신학을 공부한 양반인데 말이다. 그 책제목이 ‘예수를 믿지 않는 목사’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양반은 칼바르트에 매료가 되어서 그의 신학을 연구해서 박사가 된 사람인데, 그런데 공부를 하고 한국에 돌아오니,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어야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뭉텅거려서 한다는 소리가 ‘예수를 믿지 않는 목사’ 라는 것이다. 즉 예수를 믿지 않는 목사에게 교인들이 간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느냐는 말이다.

제가 보기에는 “구원이 없어도 좋습니다” 라고, 그 양반이 주장하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즉 이제 한국교회 교인들은 자기가 무사히 눈을 뜨기만 하면 무엇이 되어도 좋다고 여긴다고 하는, 그런 말투라는 것이다. 그러니 교인들이 이제 배짱이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구원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말이다.

물론 목사도 마찬가지인데, 자기 영혼을 마귀에게 팔아먹었으니 오죽하겠느냐는 말이다. 자기는 이제 천당에 가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교회에서 밥만 먹고 살아가게 해달라는 것이다. 물론 신앙이 없으니 천국도 없겠지만 말이다. 그야말로 지금 한국교회는 막장 드라마라는 것이다. 

◈ 인간의 어떤 속성 때문에 한 남자가 죽었는가?

아무튼 여기서 말하는 ‘한 남자’ 라고 하는 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속성 중에서, 예수님도 인간이니 말이다. 그런 인간의 속성 중에서, 어떤 속성이 하나님의 한 남자인 예수님을 죽어야만 되는 속성인지,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데,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죽었는가? 주일학생도 다 아는 것인데 말이다.

물론 죄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아무튼 그 죄 때문에 죽었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죄는 어디에 있었는가? 분명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이 처리하려고 했던 그 죄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마치 음식 쓰레기처럼 처리를 하려고 했던 말이다. 그것은 인간에게서 왔는데, 그렇지요?

◈ 그 죄의 공급처가 바로 ‘나’ 자신 !!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예수님이 죽어야만 했던 바로 그 죄의 공급처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인데, 즉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본다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러면 그 다음 질문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의 어떤 행동이 예수님을 죽게 했던 것인지, 즉 자기가 왜 그런 죄의 원천이 되는지를 반드시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는 여기까지 진도를 나간 사람의 거의 보지 못했는데, 사람들은 여기까지도 진도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피’ 라고 하면 비린내가 난다고 하면서 피하기나 하지 말이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고서 “내 피와 살을 먹지 않으면 생명은 없어” 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무엇으로 본다는 말인가?

◈ 남는 것은 오로지 ‘죄’ !!

우리가 자기 자신을 통해서 바라보는 세계의 그 모든 껍데기를 홀라당 벗겨버리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그 전체가 바로 단 한 글자로 ‘죄’ 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죄만 남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아예 드롭포스 포장지로 사탕을 감싸는 것처럼, 우리는 죄를 감싸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것보다 훨씬 어설프기 짝이 없게 가리고 있는데, 마치 아담이 나뭇잎으로 자기를 가린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웃기게도 지금 한국교회 목사들이 바로 그 껍질을 벗긴다고 난리를 피우는데, 그래서 교인들을 치는 설교를 한다는 것이다. 비겁하게 자기는 빠지고 말이다. 그러니 사실은 그 반대인데, 자기가 껍질을 벗지 않으려고 그런 생쇼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인들도 벗지 말라는 것이다. 서로가 벗지 말고 한번 사이좋게 지내보자는 말이다.

◈ 이 놈아, 껍데기 벗어 ??

예를 들어서, 아이들에게 목욕을 시키려고 하면 먼저 옷을 벗겨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옷을 벗지 않으려고 버티는데, 그래도 엄마는 마구 때려가면서 옷을 벗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이태리 타울을 가지고 빡빡 밀고 말이다. 사실 그렇게 때를 밀면 안 되는데 말이다.

아무튼 교인들은 자기 옷은 홀라당 벗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한다는 말이 “목사님, 저도 십자가를 압니다. 또한 복음도 압니다” 라고 하는데, 물론 목사들도 뭐라고 하는가? “저도 총신에서 제대로 잘 배웠습니다” 라고 하고 말이다. 그야말로 웃기는 짬뽕이라는 것이다. 

◈ 인간은 자기 세계만을 고집해 !!

그러다가 이제 복음을 아는 목사나 교인에게 제대로 걸리면 껍질을 홀라당 다 벗기게 되는데, 사실은 주님의 은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데 말이다. 그렇게 껍질을 홀랑 벗겨서 그 안을 들여다보면 무엇이 들어있는가? 평소에 자기가 기대하고 희망했던, 바로 그러한 자기 세계만이 가득 가득 들어있다는 것이다. 자기 세계만이 말이다.

제가 대전에 강의를 하러가서 신직수 전도사님과 이야기를 해보면, 자기 동기들이 이제는 노골적으로 말을 한다고 하는데, “신 전도사, 나는 진리에는 관심이 없다. 그냥 사람만 모으면 된다. 그러니 너무 몰아 부치지를 마라” 라고 말이다. 물론 교인들에게는 그런 소리를 할 수 없는데, 같은 동기니까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는 복음도 전하고 십자가도 전하고 다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복음이, 그런 십자가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무슨 십자가의 능력인가? 일종의 부적이지 말이다.

그러니 현재 한국교회 교인들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구원이 되지 않는, 즉 구원의 능력이 없는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다닌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어서, 자기를 그렇게 열심히 섬기고 있다는 말이다.

◈ 한 남자가 죽었기에, 모든 인간도 이미 죽었어 !!

그러나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보면, 분명히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께서 분명히 한 남자를 죽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한 남자가 죽었는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는데, 그러니 이미 모든 사람도 죽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렇게 모든 인간은 이미 죽었는데, 그러니 이미 그렇게 죽은 자들이 살겠다고 하는 것은 전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죽은 자는 그냥 죽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도 한번 살아보겠다고 하는 몸부림 자체가 잘못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이 어떻게 구원을 받고 말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소관이 전혀 아니기에, 우리가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즉 살려주고 말고 하는 것은 이미 우리 손을 떠났다는 것이다. 주님의 소관이니 말이다.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마태복음 9장 6절인데, 다같이 한번 읽어보자.

(마 9: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 죽은 자를 살리는 권세는 ‘인자’에게만 !!

여기에 보면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죄를 용서해주는 것이 전혀 우리 소관이 아닌데, 우리는 그냥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 뿐인데, 그런 것은 권세가 아니라 타협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권세라는 것은 일방적으로 “너, 나를 따라나와” 라고 하면서, 그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는 것인데, 그러니 진짜 자기 죄를 용서받은 사람만이 “야, 이제는 정말 내가 주님에게 빼도 박도 못하게 그야말로 찍혔구나” 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렇게 본인만 고백하게 되고, 본인만 주님을 찬양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에게 어떤 조치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신학을 하든지 그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자기의 그러한 신학공부가 죄를 사하는 권세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오히려 그것조차도 죄의 일부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이 또 하나의 껍질을 형성한다는 말이다. 마치 돼지고기의 비계처럼, 그렇게 장식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자기가 자기를 본떠서 만든 세계가 또 거기에 형성되어있다는 말이다.

◈ 죄 사함의 권세는 비계를 뚫고 들어와 !!

이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러한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만히 두실 리가 있는가? 그렇게 두꺼운 비계가 있으면, 죄 사함의 권세가 말로만 그렇게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비계를 뚫고서 마구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총신을 나오고 목사가 되고 어떻고 하는 그 모든 것이 다 뚫려지면서 박살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님, 이제 한번 다같이 뚫어볼까요?” 라고 하면, “나도 복음을 안다. 또 총신을 졸업했어” 라고 하는데, 하지만 권세는 그런 모든 것을 다 뚫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자에게만 말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그런 비계가 없을 수는 없지만, 그렇게 있다고 하는 것을, 그것이 죄임을 항상 고백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그런 비계 덩어리로는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말이다.

◈ 다시 정리를 하면 !!

다시 정리를 하면, “하나님은 한 남자를 죽였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고 하니, 한 남자를 죽은 그 사건 안에 계시는데, 다른 곳에는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남자를 죽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한 남자를 죽인 사건이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졸지에 우리 모두는 죄로 인해서 죽은 자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우리 지금 이렇게 비록 움직이고 있어도, 우리는 이미 죽은 자라는 말이다. 그냥 가만히 있는 자만이 죽은 것이 아니라, 이미 죄가 나왔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죽음’ 이라는 것은, 죄가 나올 때, 그것을 죽음이라고 하는데, 움직이지 않는 것을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 죄가 있기에 죽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곧 저주인데 말이다.

이제 교재 15페이지를 살펴보자.

**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죽였다.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구상한 모든 계획들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 마치 번데기를 담은 고깔봉투처럼 !!

옛날에 길거리 구루마(?)에 보면 번데기를 팔았는데, 물론 불량식품인데 말이다(요즘은 번데기가 고급식품인데?). 그런데 그 맛있는 번데기를 어디에 담는고 하니, 신문지를 끝을 뾰족하게 해서 돌돌 말아서 만든 봉투에 담아넣어서 판다는 말이다. 물론 요즘은 칠성시장이나 가야지 겨우 구경이라도 하지만 말이다. 그 담백한 번데기를 말이다.

그처럼 주님은 모든 말씀을 어디에 담는가? 마치 고깔처럼 생긴 끝이 뾰족한 봉투에다 모두 담는데, 그 뾰족한 끝이 바로 십자가라는 말이다. 바로 그 십자가에서 한 남자가 죽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번데기가 봉투에 담기듯이, 그렇게 해서 결국은 한 남자가 죽은 그 동일한 지점으로 간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로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한 남자가 죽은 지점에 가게 되면 누구 생각이 나지 않게 되는고 하니, 자기 생각이 전혀 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자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언제 제일 편안한고 하니, 자기 생각을 하지 않을 때인데, 마치 백수 9단의 경우처럼 말이다(ㅋㅋ).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 세상의 모든 개인적 견해와 집단적 지혜는 십자가 앞에서 쓰레기 치우듯이 그만 사라져주어야 한다. 십자가만이 진리이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성도가 최종적으로 모이는 곳이 곧 ‘십자가’ !!

그러니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모이는 곳이 바로 꼬깔콘, 즉 십자가인데, 이 십자가를 지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일이 바로 이 십자가의 죽으심에서 끝난다는 것이다. 물론 부활이라는 것은,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확정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개인적으로 사업을 하다가 낭패를 본다든지, 부도를 맞는다든지, 교도소에 가게 되든지, 불구자가 되든지, 가정이 파탄이 나든지, 그리고 교회가 문을 닫든지 간에, 그런 것과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오직 십자가만이 사실이다” 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내가 중요하지 않다. 사실이 중요하다. 사실이 나보다 더욱 더 중요하고, 나에게 일어나는 일보다 예수님을 보여주는 일이 더 중요하다.

◈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닌, ‘사실’ !!

여기에 보면 “내가 중요하지 않다. 사실이 중요하다” 라고 하는데, 여기서 ‘나’는 어디에 포함이 되지 않는가? ‘사실’에 포함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자아가 허구이기 때문인데,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말인데, 여기서 ‘사실’ 이란 것은, 예수님이 사실이라고 해야 비로소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이 신학에서 해석하기가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이것이 나중에 나오는데 말이다.

◈ 목사님, 가인을 죽이려고 한 사람은 아담의 후손입니까?

어떤 사람이 저에게 이메일로 질문하기를 “가인을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담의 후손입니까? 아닙니까?” 라고 했다는 말이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뭐라고 하는가? 자기가 고향을 떠나 남의 땅에 가면 죽게 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때 가인을 죽이려고 한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그 사람의 주장은, 그때 가인을 죽이려고 한 자들은 아담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인데, 즉 아담은 신앙적인 측면에서 인류의 최초 조상이고, 이 땅에는 이미 기존의 다른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아담은 구원받은 자들의 최초라는 말이다.

◈ 그러면, 당신은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이 그 사람의 주장인데, 그래서 제가 뭐라고 답변을 했는고 하니, “예,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죄입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궁금증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한번 따져보자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진짜 사실이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거기에 대해서 알려주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얘들아, 십자가를 믿어서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인류가 아담이 아니다” 라고 말이다. 그것이 정말로 중요한 문제였다면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자기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했는데, 즉 죽어도 산다고 말이다. 그러니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을 죽인 사람이 누구의 후손인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양반은 그것을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안목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죄가 아니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시선과 다르니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답장이 뭐라고 왔는고 하니, “목사님은 성경해석을 하는데 기가 상당히 세네요” 라고 말이다(ㅋㅋ). ‘신학교 교수의 10가지 무지한 점’ 이란 글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는데, 즉 자기가 열심히 한 것도 죄에 해당된다는 점을 알려고 하면, 미친 듯이 십자가 앞에 모여서, 하나님이 한 남자를 죽여서, 이미 자기는 죽은 놈임을 알려주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사실이 나보다 더욱 더 중요하고, 나에게 일어나는 일보다 예수님을 보여주는 일이 더 중요하다.

◈ 나의 우연이 예수님의 필연 !!

여기서 ‘나’에게 일어난 일과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이 서로 구분되어 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나중에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일어난 일도 역시 주님이 일으키신 일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구분이 될 때는 어떠한가?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필연과 자기 우연이 정립이 되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치게 되면, 자기에게 일어난 일은 우연에 불과하고, 왜냐하면 자기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 우연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에게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 된다는 것이다. 즉 자기에게 우연이 되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필연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성도가 살아있다면, 그것이 예수님에게는 산 자가 되고, 자기에게는 죽은 자가 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나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이미 죽었는데, 하지만 내 안에 예수님과 함께 산다” 라고 했는데, 즉 자기에게는 죽었지만 예수님에 대해서는 살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자기에 대해서 살았다고 우기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동안 인간은 속아왔다. 거짓말을 악마로부터 들어야 했다.

◈ 거짓말은 참말이 되고, 참말은 거짓말이 !!

악마의 주특기가 무엇인가? 물론 거짓말인데, 그런 악마에게서부터 거짓말만을 들어왔던 우리 인간들에게, 만약에 예수님으로부터 참말을 듣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거짓말이 되는데, 그러니 거짓말은 참말이 되고, 참말은 거짓말이 된다는 것이다. 마귀가 하는 소리는 참말이 된다는 말이다. 지금 제가 말장난을 하는 것이 아닌데, 정말로 그렇다는 말이다.

참과 오류가 20세기 분석철학의 핵심이 되었는데, 즉 무엇이 참인지, 무엇이 오류인지 말이다. 그런데 그 자체가 그만 다 깨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그렇게 참이고 오류라고 결정하는 ‘주체’ 라는 것, 그 자체에 대해서 그야말로 난감하기가 짝이 없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참이다. 아니다” 라는 것이 말이다.

◈ 철학자들의 고민 - 아, 주체가 괴롭히는구나 !!

예를 들어서, “모든 백조는 희다” 라고 했을 때, 그런데 한 마리의 검은 백조가 나타나게 되면, 그것이 다 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에 있어서, 그렇게 진리를 찾고자 하는 ‘나’ 라고 하는 주체의 의도자체가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그들은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철학의 문제라는 말이다.

여기서 철학이 나오니 조금은 집고 넘어가야 하겠는데, “하나님은 한 남자를 죽였다” 라고 했을 때, 한 남자가 따로 있고, 또한 여러 남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한 남자가 죄 때문에 죽었다고 하면, 그 죄에 대해서 우리가 다 알아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들이 싸질러놓은 죄에 대해서,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다” 라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 것이 다 죄가 되니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인간은 마귀로부터 거짓말을 들어야만 했는데, 그러니 예수님이 참말을 했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워할 수밖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미워함으로서 자기들은 마귀새끼임을 그만 폭로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않았으면 죄가 없었겠지만, 그러니 이제 내가 왔기에 드러나게 되었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요 15:22)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그것은 오늘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인데, 껍질을 벗겨보니 그 안에 죄가 가득히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경인 자를 보게 하시고, 소경이 아니라고 하는 자들의 눈을 멀게 하시는데, 그러니 이런 모든 것이 다 거꾸로 되어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 성도는, 복음으로 인해서 날마다 죽어가 !!

그런데 그렇게 전하는 자들은 자기 자존심을 버려야 하는데, 즉 “나도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서 전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복음전파가 얼마나 불가능하냐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존심 하나로 버티고 살아가는데 말이다. 그것은 반드시 예수님의 가신 길을 따라가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이제 그만 죽자” 라는 경우만 말이다. 그래서 어제 “성도는 복음으로 인해서 날마다 죽어갑니다” 라고 설교를 했는데, 날마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교재를 16페이지를 계속해서 보자.

** 그동안 인간은 속아왔다. 거짓말을 악마로부터 들어야 했다. 독자적으로 살아도 별 탈이 없을 것이라고. 그래서 인간은 그 거짓말 위에서 살게 되었고, 죄를 짓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삶의 바탕이 악마의 거짓말 위에 전개되기 때문이다. 

악마는 도대체 무슨 거짓말을 하는가? 악마의 거짓말은, 우리가 독자적으로 살아도 별 탈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실험을 해보라고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별 탈이 없고, 또한 말씀을 보지 않아도 별 탈이 없는지를 말이다.

◈ 악마 - 별 탈이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봐 ??

인간은 그렇게 자기에게 별 탈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가지고 자기가 예수님을 잘 믿는지 아닌지를 측정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측정하려는 마음가짐 자체가 이미 악마로부터 받은 거짓 덩어리이기 때문에, 그러한 측정 자체도 사실은 엉터리 통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악마가 가르쳐준 거짓말 위에서 살게 되었고, 그러므로 죄를 짓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서 인간의 삶은, 그 삶의 바탕이 그야말로 악마의 거짓말 위에 전개되는데, 물론 ‘거짓말’ 이란 영화도 있고 노래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거짓말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참말을 알 경우에만, 그것과 대비해서 거짓말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기에 말이다. 그러니 참말을 아예 모른다고 하면, 그것을 두고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하나의 ‘의견’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흔히들 하는 이야기인데 말이다. 이렇게 높은 산이 있다고 하면 “이 산의 정상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나 성경에서 사도바울은 결코 여러 가지 길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한 길’ 만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 가지 길을 주장하는 인간들에게 사도바울은 핍박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신학자들은, 지옥에 가는데 별 탈이 없어 !!

그런데 악령에 사로잡힌 신학자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사도바울은 분명히 십자가 외에 다른 길은, 즉 다른 복음은 없다고 했는데, 그런데 마귀의 종인 그들은 해석을 어떻게 하는가? 마치 사도바울이 한 가지 길이 아니라 여러 가지 길이 있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그렇게 사도바울의 복음음 엉터리로 해석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고 인기를 누리는데,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바울은 어떠했는가? 호응은커녕 말할 수 없는 멸시와 모욕을 당했는데 말이다. 그래서 저는 감히 주장하지만, 그렇게 하면 지옥에 가는데 아무런 별 탈이 없이, 즉 그야말로 제대로 갈 수 있다고 장담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넓은 길이니 말이다.

◈ 다양성이 아닌 오직 ‘하나’ !!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 ‘하나’를 제일 싫어하는데, 그래서 단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이라는 말이다. 물론 오늘날 해체주의 철학자들도 이 ‘하나’를 너무 싫어하는데, 물론 악마의 하수인이니 그렇다는 말이다. 무엇이든지 하나를 주장하면 교주가 되고 독설이 된다고 말이다. 즉 “예수님은 한 분이지만, 우리의 해석은 다양하다” 라고 말이다.

그러나 제가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결코 성경말씀은 다양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 앞에서는, 다양함을 끄집어내는 것조차 죄가 된다는 점에서 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표현이 좀 어려운가요? (아닙니다. 예리합니다. ㅋㅋ)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로 집중된다. 그것은 한 남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시는 일이다.

◈ 하나님은 오직 한 남자에 집중 !!

그렇게 하나에 집중이 되기 때문에, 남자도 두 남자도 세 남자도 아닌, 오직 한 남자라는 것이다. 즉 마호메트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을 죽였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라고 해서 구세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죽였기 때문에 구세주가 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자기가 “나는 예수다” 라고 하면서 돌아다니는 인간들이 많은데, 하지만 하나님이 죽여서 사흘만이 부활시킨 분은 오직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믿는 분은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죽여서 사흘만이 부활시킨 분은 오직 한 분인데, 바로 그분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는 자기 자신을 믿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령 당장에 암에 걸려서 내일아침에 죽는다고 해도 예수님만 믿으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이 어떻게 두 가지 이상의 다양한 견해인가?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말이다. 만약에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라고 한다면 다양한 것이 되지만, 그러나 자기 생각이 아니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하는데, 거기에 무슨 다양함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밖에 없는 복음인데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즉 “인간은 죄인이다” 라는 뜻이다. 또한 “인간은 무엇을 해도 죄가 된다” 라는 뜻이다.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하지 않든지 상관없이 인간은 죄인이다.
 
◈ 인간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죄인이다 !!

여기서 “인간은 죄인이다” 라는 것을 조금 길게 늘이게 되면, “인간은 무엇을 해도 죄가 된다” 라고 되는데, 그것을 조금 더 늘여보면,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하지 않든지, 상관없이 인간은 죄인이다” 라고 된다는 것이다.

제가 이렇게 열심히 복음을 이야기하는데 ‘방종한다’ 라고 욕도 얻어먹고 하는데, 무엇을 하지 않아도 역시 죄인이라는 것이다. 전혀 의인이 아니고 말이다. 즉 부활절을 지키지 않고, 성탄절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사람은 매일같이 거울을 본다. 그러나 거울을 보고 자신을 아무리 살펴도 죄가 나오지는 않는다. 자기변명뿐이다.

◈ 거울은 전혀 변화가 없어 !!

여기 거울이 나오는데, 이 거울의 약점(?)이 무엇인고 하니, 전혀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거울은 자기 자신을 그만 고정화시키고 마는데, 거울은 사람이 아니기에 재롱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고정된 자기를 확정시킬 때 거울을 본다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전혀 거울이 아닌데, 이 성경말씀에서는 무엇인가가 나온다는 것이다. 즉 주님의 손이 나오고, 능력이 나와서 우리의 목을 졸라서 죽인다는 말이다. 성경에서는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는데, 우리의 골수를 찔러 쪼갠다는 것이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그런데 이 성경말씀을 거울처럼 바라보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루에 석 장이 아니라 열 장이라도 얼마든지 읽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그냥 문자이니, 아니 그런 문자라고 하면 열 장이 아니라 백 장이든지 읽지를 못하겠느냐는 말이다.

◈ 아니, 하루에 성경을 완독했다고요 ??

저는 개인적으로 하루에 성경 한 권을 모두 다 읽은 적도 있는데, 저의 자랑 같아서 그동안 이야기를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그것도 그냥 읽은 것이 아니라 일일이 다 주제를 정해가면서 읽었다는 말이다. 물론 그것은 성경에서 나온 능력이 아니라 저의 능력을 집어넣어서 읽었다고 볼 수 있는데 말이다. (전에도 들은 것 같은데, ㅋㅋ)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성경말씀을 단 한 구절을 봐도 그만 박살이 나서 더 이상 읽지를 못한 경우도 있는데, 성경말씀이 읽는 사람을 마구 친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무사히 잘 읽었고, 뻔히 아는 구절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말씀이 그만 치게 되면, “아하, 그렇구나. 그런데 이전에는 왜 몰랐을까?”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하나를 개인적인 간증 비슷하게 이야기를 해보면, 고린도전서 14장 25절 말씀인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성령이 주어지면 죄를 알게 되고, 그렇게 죄를 알면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 교인들은 하나님께 경배할 마음이 없는데, 오로지 자기가 구원받을 생각에만 빠져있지 말이다. 즉 누구에게 엎드릴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고전 14:25)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다시 말해서, 이 ‘엎드림’을 빼버리고 경배를 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몸이 아픕니다, 돈이 없습니다, 자식이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군지렁 군지렁거릴 생각만 하지, 전혀 엎드릴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냥 엎드리면 되는데, 자꾸만 자기를 바라보니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엎드림’을 빼버리고 경배를 하겠는가?

그것은 바로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 멀리하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하지만 말씀이 다가오게 되면 그 말씀이 엎드리게 만들게 되고, 그렇게 해서 엎드리게 된 자는 전혀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 죽은 놈이 무슨 할 말이 그리 많겠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고린도전서 14장이 방언장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설교하는 목사의 경우에도, 비록 자기 설교라고 해도 자기 설교에 은혜를 받는 맛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가르치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먼저 이 능력의 말씀에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 왜 거울을 보아도 자기 죄가 나오지 않는가?

다시 교재로 돌아가서, 이렇게 아무리 거울을 보아도 자기 죄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 거울에 담긴 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를 바라보면서 “야, 자랑스럽다. 대견하구나” 라고 하는데, 거기에서 무슨 죄가 나오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죄가 나오려고 하면, 자기 말고 다른 타인이 있어서, 그 타인이 죄를 지적해주어야 자기 죄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매일같이 아침마다 거울을 보면서, “어, 여기에 흰 머리카락이 있네. 뽑을까? 말까?” 라고 하고 있는데, 도대체 거기서 무슨 죄가 나오느냐는 것이다. 흰 머리카락을 뽑으면 더 위대해지는데, 아니 더 예뻐지는데 말이다. 즉 더 발전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양심과 사색을 통해서는 아무리 해도 죄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 이 ‘피’ 라는 책의 1부 내용은?

바로 그렇게 양심과 사색을 통해서는 죄가 나오지 않는 그 내력을, 그 뒤에 복잡하게 온갖 철학적인 사상을 동원해서 이 ‘피’ 라는 책의 1부를 장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어떻게 인간이 자기를 분석했기에, 아무리 철학을 공부하고 과학을 공부해도 무엇이 나오지 않는가? 결코 죄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인데, 왜 그렇게 죄가 나오지 않느냐는 말이다. 죄가 말이다.

예를 들어서, 물리학자가 레이저를 발견했다고 해서 거기서 무슨 죄가 나오는가? 그 사람은 노벨상을 탈 일만 남았는데, 실제로 레이저를 연구한 사람은 노벨상을 탔고 말이다. 그리고 어떤 의사가 피부를 연구해서 피부암 치료약을 개발했다고 하면, 거기서 죄가 나오는가? 이제는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을 일만 남았지 말이다.

◈ 왜 남자들에게서 죄가 나오지 않는가?

그래서 이 책에서는 ‘인간’ 이라고 하는 여러 남자들을 통해서, 그런 여러 남자들을 구체적으로 두루두루 살펴보면서, 도대체 어떻게 된 남자들이기에 죄가 나오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들에게서는 오로지 긍정만이 나오는데, 바로 그것을 연구해놓았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심리학 수준은 아니고, 오히려 심리학보다 더 밑바닥을 파고 들어간다는 것이다. 심리학의 밑바닥은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철학의 밑바닥을 파고 또 다시 들어간다는 것이다. 더, 더, 더 깊숙이 말이다. 바로 그 자리를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지적했는데, 그러한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인간 내부에서 죄인이 되기 싫어하는 악한 성품만 꿈틀댄다. 절대선(善)에 비해서 모자라고 부족한 것은 인정하지만, 죄인은 아니라고 극구 우긴다. 어떻게 하든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해서 다루어지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

◈ 왜 인간들은 죄인이 되기를 싫어하는가?

왜 인간들은 죄인이 되기를 싫어하는가? 그것은 죄가 싫어서가 아니라,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어디를 가든지 간에 저주와 형벌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만 자기가 죄인이, 즉 나쁜 놈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당연히 벌을 받을 각오를 해야하는데, 그렇게 되면 지금 당장에 너무 불편하다는 것이다. 벌을 받아야하니 말이다.

그런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있는 죄의식을 지적하는 영화가 있는데, 박찬욱 감독의 ‘박쥐’ 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다 역겨워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정말로 인간이 그렇게 추악하다고 하면, 이제 남은 것을 벌받을 일만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끝까지 보지 않고 나온 사람들도 제법 있다는 것이다. 물론 ‘터미네이트의4’를 보면서 나올 사람들은 거의 없지 싶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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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쥐(2009) 감독 : 박찬욱, 주연 : 송강호(신부,상현), 김옥빈(태주)  - 뱀파이어가 된 신부, 친구의 아내를 탐하다! - 병원에서 근무하는 신부 ??상현??은 죽어가는 환자들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자신의 무기력함에 괴로워 하다가 해외에서 비밀리에 진행되는 백신개발 실험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실험 도중 바이러스 감염으로 죽음에 이르고, 정체불명의 피를 수혈 받아 기적적으로 소생한다. 하지만 그 피는 상현을 뱀파이어로 만들어버렸다. 피를 원하는 육체적 욕구와 살인을 원치 않는 신앙심의 충돌은 상현을 짓누르지만 피를 먹지 않고 그는 살 수가 없다. 하지만 살인하지 않고 사람의 피를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기적적으로 생명을 건진 상현은 그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고 기도를 청하는 신봉자들 사이에서 어린 시절 친구 ??강우??와 그의 아내 ??태주??를 만나게 된다. 뱀파이어가 된 상현은 태주의 묘한 매력에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을 느낀다. 태주 또한 히스테리컬한 시어머니와 무능력한 남편에게 억눌렸던 욕망을 일깨워준 상현에게 집착하고 위험한 사랑에 빠져든다.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태주를 사랑하게 된 상현은 끝내 신부의 옷을 벗고 그녀의 세계로 들어 간다. 인간적 욕망의 기쁨이 이런 것이었던가. 이제 모든 쾌락을 갈구하게 된 상현은 신부라는 굴레를 벗어 던진다. 점점 더 대담해져만 가는 상현과 태주의 사랑. 상현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태주는 두려움에 거리를 두지만 그것도 잠시, 상현의 가공할 힘을 이용해 남편을 죽이자고 유혹한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더욱 그를 조여오는 태주. 살인만은 피하고자 했던 상현은 결국 태주를 위해 강우를 죽이기 위한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는데…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이들의 사랑, 과연 그 끝은 어떻게 될까. - 출처(까먹었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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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죄는 있지만 죄인은 아니야 !!

아무튼 인간은 죄인이 되기 싫어하기 때문에 무엇만 남겨두는고 하니까, 자기가 의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의 자리를 만들게 되는데, 이렇게 비록 악이 있다고 해도 다른 나머지는 선의 자리로서,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립지대도 있는데,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말이다. 즉 행동을 잘하면 선의 자리로 가고, 잘못하게 되면 악의 자리로 끌려가게 되는, 유동적이고 미확정적인 자리가 있다는 말이다. 즉 그런 자리가 있는 이상, 인간은 얼마든지 선을 행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죄인은 아니라는 말이다. 즉 죄가 있지만 죄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삐아제의 심리학에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오는데, 이 양반은 지금까지 심리학자 중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인데 말이다.

다시 교재를 살펴보자.

** 절대선(善)에 비해서 모자라고 부족한 것은 인정하지만, 죄인은 아니라고 극구 우긴다. 즉 어떻게 하든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해서 다루어지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을 두고서 자꾸만 죄인이라고 하면 그만 참지를 못하는데, 그렇게 계속해서 강조를 하게 되면, 결국 그 사람은 상대방을 마치 개가 물 듯이 그만 물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다른 것은 몰라도 자기가 죄인임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 죄를 대신할 한 분을 보내셨다.

그러므로 이렇게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분이 오셨다는 것은, 기존의 방식으로는 우리의 죄가 처리가 된다는 것인가? 안 된다는 것인가? 전혀 안 된다는 말이다. 처리가 불가능하기에 대신해서 오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부족하다고 스스로 자책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자책을 하지 말라고 대신해서 보내주셨는데, 그런데 우리는 대신해서 오신 분은 생각하지 않고 “아, 나는 너무 부족해” 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오버액션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도대체 무슨 짓이냐는 말이다. 흔히 목사들이 “저는 부족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것도 목소리를 저음으로 깔면서 말이다.

◈ 나는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금식기도를 할 때, 예수님은 일부러 보라는 듯이 주막에서 세리들과 함께 한 잔을 걸치고 계셨다는 것이다. 지금 바리새인들과 온 나라가 금식기간을 선포하고 들어갔는데 말이다. 그때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어디 약간 의인이 아니라 약간 죄인을 부르려고 오셨는가? 전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냥 의인은 의인이고, 죄인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는데, 죄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전적으로 죄인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갓 태어난 아기도 죄인인데, 그러면 갓난아이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 부모 죄가 곧 그 아이의 죄라는 것이다.

◈ 죄는, 오직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의 저주에서만 !!

그러므로 이 죄라는 것은 자기만 보이는 그런 거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야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에 의해서 그 죄가 드러나는데, 즉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를 가지고 설 때, 바로 그때 우리 인간의 모든 죄가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죄로 인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저주를 받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의 본질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아하, 내가 죄인이 맞구나. 그래서 구원을 받았구나” 라는, 그 두 가지만 알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자기 문제에 대해서 간섭하려고 하지 말고 손을 떼면 되는데, 그렇게 자기 구원문제에 대해서 손을 떼는 것을 두고서 두 글자로 ‘믿음’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을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십자가가 무엇인지 다시금 깨닫도록 모임을 만들어주시고, 또 생명을 허락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이 오늘밤에 낙원에 가더라도, 십자가를 깨달은 이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가게 하시고, 또한 남은 인생도 정말이지 주님만을 찬양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09,06 오후 10시 40분에 마침.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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