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왕

2009년 11월 22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5;1-3

(삼하 5:1, 개정)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삼하 5:2, 개정) 『전에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하신 분은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삼하 5:3, 개정)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
 

예수님을 흔히 ‘사랑의 구세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 하시는 일 속에 전혀 사랑을 베풀지 않고 도리어 심하고 철저하게 저주하시는 속성을 들어있다는 것을 어떻게 우리는 남들에게 소개할 수 있겠습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를 사랑하는 그 구세주의 사랑을 지옥가 있는 사람에게도 나누어 줄 수가 없느냐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미워하는 자가 지옥간다면 우리는 속으로 얼시구나 좋아하겠지만, 그게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자식이 예수님을 안 믿는다고 한다면,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틀어질 수가 있습니다. 나는 죽도록 내 자식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은 내가 사랑하는 내 자식을 사랑해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진심이 아닐 수 있다는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기서 우리는 혈육적인 사랑에서 나온 왕과 영적인 세계의 왕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백성들이 다윗의 대해서 단단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윗의 혈육이라는 것을 근거로 자신의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을 주장하느냐 하며는 ‘이스라엘’을 내세웁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뭔지도 모릅니다. 단지 그들은 혈육적인 이스라엘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이란 혈육적인 왕입니다. 쉽게 말해서 같은 가족일 경우에만 그 가족의 왕이 될 권한이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혈육적으로 연결점이 성립되어야 왕 값을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혈육이라는 것도 하나의 ‘구조’를 이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란 자기 신체만 ‘나’가 아니라 혈육적으로 가까운 사람은 모두다 다 ‘나’의 구조 속에, 집어넣고 생각합니다. 왕이란 바로 그 속에서 돌출되는 겁니다. 같이 집안 사람을 특출한 분으로 삼아서 그분을 구심점으로 하여 자신들의 ‘나’를 확대시켜 나가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혈육 중심이 되어버리면 하나님은 완전히 제켜 놓는 셈이 됩니다. 하나님은 있으나 마나하는 셈이 됩니다.

예수님은 다른 혈육을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2:46-50에 보면,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는 몇 촌 관계입니까? 사도 바울과 예수님은 촌수가 어떻게 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를 한 가족으로 보십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13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물론 혈육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스마엘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약속의 자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조가 틀리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가족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라는 구조와 다른 구조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 구조를 이루는 기준에 대해서 잠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13:4-7의 말씀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크고, 아무리 대가족을 이루는 집안이라고 할지라도 이 천국의 기준, 즉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자’라는 기준을 내세우면 결국에는 그 혈육적인 구조도 산산조각납니다. 오로지 성도만이 따로 분류될 수 밖에 없습니다.

출애굽기 33:19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혈육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따로 실시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의 구조가 우리의 행함과 무관하게 진행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우리의 의도와는 빗나가는 식으로 이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유익을 구하지 않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그것이 섬김입니다. 세상의 왕과 예수님의 왕심과의 차이는, 폭력과 그리고 희생의 차이입니다.

세상사람들의 질서잡기란 지배하는 힘, 곧 폭력이 수반되는 힘입니다. 하지만 하늘 나라의 왕은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희생으로 제공하는데 있습니다. 빌립보서 2:5-8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제 길 밖에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모르고 안다 할지라도 갈 의사가 전혀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멋대로 간 우리의 죄를 그분에게 대신 댐터기를 씌어서 모든 저주를 그분에게 돌리고 말았습니다. 어떤 백부장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쳐다보면서, “진정 이스라엘의 왕이시다”고 했습니다.

이로서 자신의 가족이 되고 말고는 그야말로‘ 은혜줄 자에게만 은혜를 주시는’ 그 원칙에 따라서 일방적인 호출이 이루어지는데 이 호명과 호출의 관계가 곧 왕과 참 백성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다윗의 자리’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보여줄 다윗의 자리란,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는 자리가 아니라 죄인됨의 기능을 보여주는 자리입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왕의 용서하심을 무효로 돌릴 수 있는 죄는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요 이스라엘 왕의 능력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혈육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말게 하시고, 예수님의 왕되심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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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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