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미리암 (죄인) 만들어 긍휼(용서)만 바라보기

(눅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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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암 (죄인) 만들어 긍휼(용서)만 바라보기 (학부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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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5:1)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출 15:19)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함께 바다에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바닷물로 그들 위에 돌이켜 흐르게 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육지로 행한지라』
(출 15:20)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출 15:21)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


(민 12: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민 12:11) 『아론이 이에 모세에게 이르되 슬프다 내 주여 우리가 우매한 일을 하여 죄를 얻었으나 청컨대 그 허물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민 12:12) 『그로 살이 반이나 썩고 죽어서 모태에서 나온 자 같이 되게 마옵소서』
(민 12:13)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하나님이여 원컨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
(민 12: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의 아비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았을지라도 그가 칠 일간 부끄러워 하지 않겠느냐 그런즉 그를 진 밖에 칠 일을 가두고 그 후에 들어오게 할지니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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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인물 요한 (눅 1: 1-17)

누가 복음 1공부 . p16-17
교재 : 어린이 매일성경 2008년 1-2월 (고학년 4-6학년) 성서유니온  www.su.or.kr

오늘부터 우리가 공부할 성경내용은 누가복음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전혀 모른다고 생각하고 처음으로 성경을 대한다고 여기고
교회도 처음 왔고 예수님에 대해서 처음 듣는다고 여기고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방인 곧 유대인 외의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씌여진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그리고 오늘 공부할 세례요한으로부터 누가복음이 시작하는 이유는
예수님에게로 바로 출발하지 않고 반드시 세례요한을 거쳐서
예수님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말은 세례요한의 역할을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례요한은 세례를 베푸는 자기이게 세례요한이라고 부릅니다.

자 쉽게 말해서 세례요한의 역할은 세례입니다.

이 세례가 무엇인가가 오늘공부의 핵심입니다.

여러분 세례가 무엇인지 혹시 세례 받아본 친구가 있나요?

세례란 물에 빠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약식(축약,축소 시켜서 간단하게)으로 물만 찍어 발라서 세례 베푸는 방법이 있고
정식으로 물에 푹 담구었다가 다시 건지는 방식이 침례 라는 표현으로써 행하고 있습니다.

자 결국 세례요한은 이 침례를 하는 자를 두고 말합니다.

왜 예수님에게 바로 인도하지 않고 반드시 세례를 하는 것일까요?
바로 이것이 예수님에게 바로 인도하는 방법입니다. 세례가 말이지요.

즉 모든 이방인을 물에 빠뜨려서 누가 건지는가를 보라는 겁니다.
만약 이런 세례를 진짜로 제대로 실제로 지금도 한다면 아마 돌에 맞아 죽게 될 겁니다.

그래서 오해 하지 않도록 서로가 충분히 이해케 하여서 실행합니다만
대부분 형식적인 의미로만 끝나버립니다.

세례요한은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반드시 사람을 물에 빠뜨리는 세례를 함으로써
누가 물에 빠진 너를 건지시는 가를 보라는 겁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불뱀에게 물리게 해놓고서는
구리놋뱀을 장대 높이 달아놓고 쳐다보는 자는 고침을 받게 된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그 사람들의 반응은 웃끼지 마라 쳐다보고 나을 것 같으면 누가 못하랴?
지금 불뱀의 독을 제거할 약품이나 기적이 필요하지
그런 어리석어 빠진 짓이 무슨 소용이냐 지금 장난하는가

그 때의 그 사람들의 반응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교회 사람들의 반응이 대부분 이러함을 지금도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보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물에 빠지지 않고 예수님을 만나고픈게
예수님은 반드시 세례요한을 보내어서 우리를 물에 빠뜨려서 예수님을 만나게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물에 빠질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례 곧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픈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누가복음 초반부터 세례요한을 통해서 증거합니다.

이것만 아니라 예수님 또한 세례요한이 한 일을 이어서 합니다.
자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아무도 예수님을 좋아하거나 하나가 되고 싶어하는 마음이
일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런 우리의 속마음을 이런 죄성을 들추어 내는 것이 세례요한의 목적입니다.

자 그럼 우리가 처음부터 이런 어려운 내용을 접하면서
의문이 안 생길수가 없습니다.

이것 하나만 오늘 풀어보도록 합시다. 왜 빠뜨리냐?

왜 반드시 물에 빠뜨려야만 하나요? 안 빠지면 안 되나요?
이것이 의문의 중심이 되기에 이 의문만 해결 되면 좀 이해가 쉬울겁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나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예수님만 주인공입니다.
즉 내가 주인공이 아니기에 빠뜨리는 겁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내가 주인공 아닙니다.
답은 쉬운데 이것을 풀어서 해석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유대인은 출애굽한 경험이 있습니다.
즉 종 되었고 노예 되었던 모습에서 건짐을 받은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할때에 모세를 통해서 홍해를 가르고 통과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 말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경험이 있다는 겁니다.
죽음을 통과 한 자만이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고 만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은 이런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벌어진 출애굽의 경험이 없는 자입니다.
포로된 적도 없고 소경 된 적도 없고 사로잡힌 적도 없고 눌린적도 없습니다.

(눅 4: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그런 이방인에게 자유케 함과 은혜를 알려줄려면
의도적으로 포로 눈먼자 눌린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맞습니다. 눈치를 채셨군요.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신 겁니다. 그것을 새롭게 반복하는 것이 바로 세례요한의 역할입니다.

빠뜨리는 목적은 바로 포로되어 봐야 자유케 하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비로소 봅니다.
눈 먼 소경이 되어봐야 눈 뜨게 하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비로소 봅니다.
눌리고 갇히고 병들어 봐야 그것을 대신 감당하신 분이 누구인가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이 분을 소개하고자 의도적으로 세례를 통해 우리를 다 지우는 겁니다.

그리고 이분만이 주인공이다 라고 소개하는데
전혀 주인공 답지 않는 분이 주인공이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주인공을 사람들이 얼마나 주인공 취급하지 않고
전혀 주인공 일수가 절대 없다 라고 못알아본다는 것을
요한은 알기에 이렇게 주인공을 목터지라 외칩니다.

보라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라고 소개 합니다.

(요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얼마나 못 알아보면 이렇게 외칠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내가 주인공 됨을 절대 포기 못하고
예수님이 주인공 됨을 절대 인정할수 없고
만약 인정해 버리면 내가 주인공 됨을 인정하게 되니까
그렇게 되면 온갖 간섭을 받고 주인의 종이 되고 노예가 되기 때문에
왕의 자리를 절대로 포기 못합니다. 나를 다스리는 왕은 누가 뭐해도 내가 왕입니다.

그렇기에 인정을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 나를 포로되게 눈먼자 되게 눌린자 만드시는 이유는
내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거짓이고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나를 예수님께 인도할려고 물에 빠뜨리는 것이
곧 사랑입니다.

자 이제부터 어떻게 누가복음에서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공인지
우리가 공부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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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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