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시편 69편)
괜찮다고 전해라 ~~~~~~~~
(요 2:13, 개역)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요 2:14, 개역)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요 2:15, 개역)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요 2:16, 개역)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7, 공동)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의 머리에는 '㉠하느님이시여,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내 열정이 나를 불사르리이다.' 하신 성서의 말씀이 떠올랐다. / ㉠시편 69:9.』
(요 2:17, 쉬운) 『이 때, 제자들은 성경에 “주님의 집에 대한 나의 열심이 불처럼 나를 삼켜 버렸다” 라고 기록된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요 2:17, 킹흠정) 『그분의 제자들이 기록된바, 주의 집에 대한 열심이 나를 삼켰나이다,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7, 한글킹) 『그때 제자들이 "주의 집을 위한 열성이 나를 삼켰나이다."라고 기록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7, 현대인) 『그러자 제자들은 `주의 성전을 위하는 열심이 내 속에 불타오릅니다.'라고 쓰인 성경 말씀이 생각났다.』
(요 2:17, 현대어) 『그때 제자들에게는 ㄴ) `하나님의 집을 아끼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라고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이 떠올랐다. (ㄴ. 시69:9)』
(요 2:17, 가톨릭)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하고 성서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시 69:9, 공동) 『당신 집을 향한 내 열정이 나를 불사릅니다. 당신 향한 욕설이 이 몸 위에 쏟아져,』
(시 69:9, 쉬운) 『이는 주의 집을 사랑하는 열정이 온통 나를 태우기 때문이며, 주를 향한 모욕이 내게도 쏟아지기 때문입니다.』
(시 69:9, 킹흠정) 『주의 집에 대한 열심이 나를 삼켰고 주를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나를 덮쳤나이다.』
(시 69:9, 한글킹) 『주의 전을 위한 열성이 나를 삼켰으며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떨어졌나이다.』
(시 69:9, 현대인) 『주의 성전을 위하는 열심이 내 속에 불타오르므로 주께 던지는 모욕이 나에게 돌아옵니다.』
(시 69:9, 현대어) 『주님의 집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같이 타올라 열성을 보이자 주께 퍼붓던 그 비방이 이제 이것에게 쏟아졌습니다.』
(시 69:9, 가톨릭)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불태우고 당신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제 위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시 69: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소산님에 맞춘 노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시 69:2, 개역)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시 69:3, 개역)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시 69:4, 개역)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 무리히 내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취치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시 69:5, 개역) 『하나님이여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내 죄가 주의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시 69:6, 개역) 『만군의 주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로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로 나를 인하여 욕을 당케 마옵소서』
(시 69:7, 개역) 『내가 주를 위하여 훼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내 얼굴에 덮였나이다』
(시 69:8, 개역)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이 되었나이다』
(시 69:9, 개역)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시 69:10, 개역)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시 69:11, 개역)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저희의 말거리가 되었나이다』
(시 69:12, 개역)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말하며 취한 무리가 나를 가져 노래하나이다』
(시 69:13, 개역) 『여호와여 열납하시는 때에 나는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시 69:14, 개역)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시 69:15, 개역) 『큰 물이 나를 엄몰하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로 내 위에 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시 69:16, 개역)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시 69:17, 개역)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시 69:18, 개역)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 하소서』
(시 69:19, 개역)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시 69:20, 개역)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시 69:21, 개역)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시 69:22, 개역)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시 69:23, 개역)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시 69:24, 개역)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시 69:25, 개역)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시 69:26, 개역)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시 69:27, 개역)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시 69:28, 개역)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시 69:29, 개역)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시 69:30, 개역)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시 69:31, 개역)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시 69:32, 개역) 『온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지어다』
(시 69:33, 개역) 『여호와는 궁핍한 자를 들으시며 자기를 인하여 수금된 자를 멸시치 아니하시나니』
(시 69:34, 개역)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동물도 그리할지로다』
(시 69:35, 개역)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 거하여 소유를 삼으리로다』
(시 69:36, 개역) 『그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거하리로다』
지난 시간에 아기예수님의 탄생과 원수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아기 예수님으로 오시고
구름타고 오시지 않는 이유는
모든 인간의 믿음을 비켜가시면서
아기를 통해서만 숨어있는 원수들을 들추어내신다는 겁니다.
즉 이말은 인간의 믿음은 자기 구원만 생각할 뿐이지
원수 문제는 해결할 생각 조차도 없고 아예 원수 문제를 언급하기 조차도 싫어한다는 거죠,
그래놓고 믿는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인간의 믿음이란 거짓일 뿐입니다.
인간의 믿음 안 받습니다.
십자가가 그래서 원수의 내막을 들추어내는데 있어서
어떻게 해서든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죽일려고 들썩 들썩하듯이
아기 예수님 즉 아무 힘도 없는 갓난아기 하나 죽일려고 온 세계가 들썩 들썩 거린다는 것을 들추어내는 겁니다.
평상시 멀쩡하던 인간이 갑자기 아기 예수님의 탄생 시점에
예언까지 다 맞춰 풀이하면서 까지
어떻게 해서든 아기를 죽일려고 들썩 들썩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귀한 사랑의 열매로 여러분의 자녀인 아기가 태어났을때에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그 아기를 죽일려고 온 동네가 온 사회가 온 종교가 온 국가 민족이 들썩 들썩 거린다면 어쩌겠습니까?
과연 이 세상을 보는 시선이 어떨까요?
결국 교회 다니는 사람들 조차도 다 마귀로 볼 것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로 까지 보는 시선일 정도로
이 세상은 이 아기 하나 죽일려고 달려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피하고 피하고 피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아기를 낳을때에 피하고 피하고 피하는 상황이라면
무슨 말인지를 아주 아주 조금이나마 3초 동안 이해할 것입니다만
어차피 부모 조차도 이 아기 예수님에 대한 거부감
원치 않음을 표출했기 때문에
어두운 눈이라서 모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성령으로만 일하시지
인간을 이해 시켜서 일하는 방식은 성경에 없습니다.
마침 어머니께서 며칠 전에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이사야를 읽고 그 다음으로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읽으셨던 모양입니다.
식사 중에 예레미야는 그렇게 눈물을 흘리데?
예레미야 애가 도 있을 정도로
눈물의 선지자 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뭐 늘 삐딱한 소리를 하니까 새삼스럽지도 않지요.
제가 그거 연기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야 교회 사람들 이거 들으면 돌삐 던지겠지요.
예레미야의 눈물은 연기이다. 라고 말입니다.
즉 슬퍼서 그 슬픈 원인을 가지고 눈물이 나오는 결과를 파악하겠지만
그게 아니라
거꾸로
이미 눈물이라는 결과 때문에
아니 이미 기쁨이라는 결과 때문에
일부러 의도적으로 눈물을 흘린다고 했습니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마침 어제 시편 56편의 말씀을 나누면서
다윗이 이런 표현을 합니다. 시편 56편 8절입니다.
(시 56:8, 개역)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시 56:8, 공동) 『나의 한탄을 기록해 두소서. 이 눈물을 당신 부대에 담아두소서.』
(시 56:8, 쉬운) 『나의 탄식과 고통을 적어 두소서. 내 눈물을 주의 책에 기록해 두소서. 그것들이 주의 책에 없습니까?』
(시 56:8, 킹흠정) 『내가 떠도는 것을 주께서 세시오니 내 눈물들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그것들이 주의 책에 있지 아니하나이까?』
(시 56:8, 한글킹) 『주께서 나의 방황함을 말씀하시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그것들이 주의 책에 있지 아니하나이까?』
(시 56:8, 현대인) 『주는 나의 슬픔을 아십니다. 내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내 눈물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않았습니까?』
(시 56:8, 현대어) 『이것이 이렇게 헤매고 있는 것 주께서는 다 헤아리고 계시오니 나의 눈물을 주님의 항아리에 담으소서. 주님의 책에 기록해 주소서.』
(시 56:8, 가톨릭) 『저는 뜨내기, 당신께서 적어 두셨습니다. 제 눈물을 당신 부대에 담으소서. 당신 책에 적혀 있지 않습니까?』
유리라는 말을 어려워 하시길래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광야에 유리 라는 말은 아셔서
떠돌고 쫏겨나고 피하고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치는 그 횟수를 계수 곧 셈하고 있다고
너 몇 번 쫏겨났니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너 몇 번 도망쳤니
그리고 다윗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 놓는다고 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누가 눈물을 흘릴때에 병에 담을려고 눈물 흘리는 자는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도망치는 횟수와 눈물을 담은 그 량을 기록하고자 하는 자도 없습니다.
무슨 메조키즘 환자도 아니고 말이죠.
메조키즘은 폭력을 당하는 것을 쾌락으로 삼는 병이구요.
반대로 사디즘은 폭력을 가하는 것으로 쾌락을 삼는 병입니다.
이래 따지면 오히려 다윗에게 폭력을 가하는 이 이스라엘 전체가
수천년 역사 속에서 늘 떠돌아 다니는 이방인 같습니다. 더 마조히즘(메조키즘) 환자 같아요.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 50년 동안 압제 당한 그거 하나로 평생을 원수로 삼지만
(전쟁에서 졌기 때문입니다. 이기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당나라와 저 백두산 위의 족속들과 싸워서 이긴 적은 많은데
유독 일본과의 전쟁에서는 패한 경우가 근대에 많아서
그것을 잊지를 못하는 겁니다. 사실상 내분의 분열을 틈타서 벌어진 전쟁 패배이기에 더욱 더 그러합니다. 이기면 아무것도 아닌데 패배 하다 보니 평생을 원수로 짊어지는 겁니다.)
유대인은 전세계인을 원수로 삼아야 할 판국으로 어디를 가도 어떤 나라에 있어도
호모사케르 즉 죽은 시체로 취급받는 얼룩 그 자체이다는 거죠.
그런데 그런 유대인이 지금 현재에도 모든 분야에서 전세계인을 먹여 살리고자 힘을 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유대인에게서 마저도 떠돌이로 쫏겨나는 자가 있으니 바로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의 활동이 미리 다윗에게 덮쳐니 이스라엘 전체로부터 쫏겨나는 겁니다.
그것을 앗싸 좋아라 라고 주의 책에 기록되었잖아 라고 좋아라 하는 겁니다.
즉 감독이 큐 하고 컷 아주 좋았어 대본 대로 연기를 아주 잘 했구나 라는 감독의 ok 싸인을 받았다는 식입니다.
저거들끼리만 그렇지
다윗을 겨냥한 사울왕이나 가드사람이나
재네들 뭐하노
뭐하는 짓꺼리고
왜 눈물을 병에 담고
왜 쫏겨나는 숫자를 계수하는 거지?
이유를 모르는 겁니다.
마치 십자가 상의 강도와 예수님의 대화를 다른 강도가 쳐다보는 시선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런 이상한 행동을 한다는 겁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냥
저들의 행동에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 말입니다.
았싸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았지롱
았싸!! 쫏겨나니 주의 책에 기록했지롱 이라고 아주 아주 좋아라 합니다.
이것을 이어 받은 자가 바로 예레미야 이다는 겁니다.
참선지자는 이 다윗의 노선을 따르는 겁니다.
선지자들의 특이한 행동들이 사실상 주의 책에 기록이 되었기에 그런다는 겁니다.
예레미야의 행동 하나 하나는
지난글에 이사야의 돼지고기와 제사상의 부정한 음식 문제도 마찬가지
참선지자의 행동 하나 하나는 다윗과 연관이 됩니다.
그 다윗은 예수님의 행동 하나 하나와 연관이 됩니다.
그래서 글을 하나 따로 적을까 했는데 그냥 여기에 다 적어 보면
예레미야의 눈물과 다윗의 눈물 그리고 예수님의 눈물이라고 제목을 정해보면서
시편 56편을 나누었는데
요한복음 11장에 예수님의 눈물이 나옵니다. 세 번의 눈물 중에
죽은 나사로 사건, 겟세마네 기도의 피 눈물, 그리고 호산나 찬양 속에 예루살렘 입성때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심 중에 첫 번째 눈물인
가장 특이한 이해불가의 눈물입니다.
(요 11:21, 개역)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 11:22, 개역)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요 11:23,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요 11:24, 개역)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 11:25,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개역)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7, 개역)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요 11:28, 개역)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요 11:29, 개역)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요 11:30, 개역)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요 11:31, 개역)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요 11:32, 개역)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요 11:33, 개역)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요 11:34, 개역)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요 11:35, 개역)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 11:36, 개역)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요 11:37, 개역)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요 11:38, 개역)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요 11:39,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요 11:40,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요 11:41, 개역)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요 11:42, 개역)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1:43, 개역)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요 11:44, 개역)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요 11:45, 개역)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요 11:46, 개역)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요 11:47, 개역)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요 11:48, 개역)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요 11:49, 개역)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요 11:50, 개역)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요 11:51, 개역)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요 11:52, 개역)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요 11:53, 개역)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요 11:54, 개역)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리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즉 나사로의 동네 사람들이 예수가 진짜 나사로를 사랑했다면 이렇게 늦게 올 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사랑한 거냐 라고 따지면서
자신들이야 말로 이웃을 위해 곡하고 눈물 흘려주는 이웃이다고 눈물을 흘릴때에
예수님이 너무 너무 쪽팔려서 민망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겁니다.
이 눈물을 제가 어머니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인간들은 원인을 찾아내어서 거기에 부합된 눈물이어야 하는 식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반대로 거꾸로 주의 책에 또는 생명책에 또는 주의 책에 기록이 되었기에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슬퍼서가 아니라 말이죠.
그런데 저들은 주의 책에 기록되지도 않을뿐더러
병에 담을려고 하지 않고
그저 자기들끼리 우리 끼리 다 알제 맞게 이게 옳은거제 라고
그러고 마는 겁니다.
그리고 눈물 흘립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마치 감독이 시나리오 대본에 이미 적혀 있는 기록이 되어 있는 상황을
연기자에게 연기 큐 하고 싸인을 보내면
연기자는 감독의 스텐바이 큐 라는 사인이 떨어짐으로 인해서 눈물 연기를 한다는 겁니다.
왜?
대본에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말이죠.
결국 예레미야나 에스겔이나 이사야나 심지어 다윗이나
감독이 시키는대로 대본에 기록이 된 대로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언약대로 약속대로 한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저들의 비아냥과 함께 저들이 흘리는 눈물은
주의 병에 담겨지지도 않을뿐더러
기록이 되어 있지도 않은 겁니다.
시편 56편의 사건은 사무엘상 21장에 그 유명한 다윗이 미친척하는 행동이 나오는 사건입니다.
그 때 적은 시라고 합니다. 그 때의 사건 곧 미래의 사건 주의 책에 기록이 된 사건이다는 겁니다.
(삼상 21:10, 개역)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삼상 21:11, 개역)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삼상 21:12, 개역)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삼상 21:13, 개역)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삼상 21:14, 개역) 『아기스가 그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삼상 21:15, 개역)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가드 사람들이
이 유명한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을 죽였다는 소문이 노래가 될 정도로
아주 아주 위험한 적군인 다윗을 드디어 잡아왔습니다 라고 할때에
보통 같으면 그래 내가 다윗이다. 그 만만을 죽였다는 그 주인공이다 라고 할 것인데
그게 아니라 정반대로 미친적하면서 침을 질질 흘리니까
그렇게 힘들게 잡아 와서 위험한 적 장수를 잡은 공로가 될 줄 알았는데
다윗의 미친 모습을 보고 아기스 왕은
아니 여기 미친놈이 모잘라서 더 데리고 왔느냐? 라고 오히려 짜증을 내더라 말이죠.
이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께서 마치 데제사장 여호수아가 마귀에게 잡혀 왔는데
그렇게 힘들게 마귀가 잡았고
그렇게 수제자 베드로를 드디어 잡았는데
그것이 단 하나도 주의 책에 기록이 되지 않으니까
하등 저들의 밀까부듯이 초정밀 조사를 해서
나의 뒷조사를 해서 어릴적부터 모든 죄악을 다 들추어내어도
주의 책에 기록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정작 주의 책에 기록이 되는 것은
바로 다윗이 미친척하면서 즉 연기죠
침을 질질 흘린 그 침을 주의 병에 담는 겁니다.
유리 즉
(요 11:54, 개역)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리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피하고 피하고 피하였다 라는 피한 횟수
도망친 횟수
유리 한 횟수
떠도는 횟수
사울왕으로부터 도망친 횟수를 계수하여서
주의 책에 기록한다는 겁니다.
우와 이거 우리가 얕잡아 본 믿음의 개념과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한 믿음은 믿음 축에도 안드는 겁니다.
여러분이 쫏겨다니고 도망치는 것을
우와 신난다 또 한번 도망치네 라고
주의 책에 기록되는 기쁨으로 도망치는자 있나요?
오히려 정반대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얻어 하늘에서 마귀가 떨어지는 그것으로 기뻐하지
누가 자기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는 자가 어디있냐? 말이죠.
(눅 10:17, 개역)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0:1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눅 10:1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눅 10:20, 개역)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자기가 믿은 믿음으로 인한 원인으로 인해 사단이 떨어지는 그 결과를 기뻐하지
원인도 없고
내가 행하거나 믿은 것도 없는
원인도 없는 그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니
왠 말이냐 말도 안되는 소리다~~~~~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알았더라면
내가 믿음 생활 왜 했겠냐
새벽기도 새벽기도
철야기도 철야기도
합기도라도 시켜줘라 ~~~~~
원인 없는 결과 라는 말은
결국 나 없는 결과 이다는 겁니다.
모든 원인을 인간은 자기자신에게 두어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야 원인이 되죠.
내 믿음이 원인이 되어야 하는데
붕떠 버리면
내가 생기지도 않았던
태어나지도 않았던 그 때를 원인 없이 결과로 둬 버리면
내가 그 동안 믿어왔고 행했던 그 모든 것들이 안개와 다를바 없는 헛짓이다는 겁니다.
그래 헛짓 맞잖아요
이것을 못견디니까 가인이 아벨을 죽여버리는 겁니다.
사실상 아벨에 대한 살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죽이고 싶은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대신 아벨을 죽인 겁니다.
주님은 신났죠
드디어 기록하시는 겁니다.
아벨의 피를 담는 겁니다. 주의 병에 말입니다.
자 이제 왜 다윗이 눈물을 주의 병에 담고서 주의 책에 기록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기록도 되지도 않을 것을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가인의 제사는 기록 안됩니다. 주의 책에 말입니다.
제사 곧 행함은 다른 말로 역사 곧 시간은 공간이 없이는 의미가 없거든요.
시공간은 결국 짝꿍이다는 거죠,
그런데 그 공간이 결국 인간의 신체 이다는 겁니다.
몸뚱아리죠.
이것 곧 몸이라는 박스 공간에 담는 것이 시간이요 역사요 행함인데
이런 것들은 주의 책에 기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은 오로지 주의 책에 기록되는 것만 신경쓰는데 바로
쫏겨나고 도망치고 피하고 광야로 유리하는 것을 계수하고
눈물을 흘려서 주의 병에 모아 주의 책에 기록되는 것만 더 신경쓰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다윗 개인이 아닌 하나의 영인 성령으로 인해서 말이죠.
그러니 다윗을 따라할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성령과 무관한
주의 책에 기록됨과 무관한 기록되지도 않을 것을 지키고자 하는 문자를 소유할려는 것 밖에 안되는 겁니다.
그러니 예레미야의 눈물이나
에스겔의 옆으로 몇 년 또 반대편으로 몇 년 눕는 그런 행동들이
사실상 주의 책에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감독이 큐 싸인이 떨어져서 시키는대로
각본 대로
기록된 대로 하는 겁니다.
감독이 오케이 컷 하고 주의 책에 기록된대로 되어서 기뻐하는 겁니다.
감사제가 완성되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눈물 흘리던 예레미야가 정작 드디어 바벨론으로 포로 당할때에
신나게 지루박을 춥니다. 춤 추죠
방금전 까지만 해도 눈물 흘리시더니만
이제는 먹고 마시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요 노래를
너무 너무 기쁘거든요.
그런데 백성들은 기쁜가요? 눈물 흘리나요?
눈물 흘리죠.
아니 망하지 않을때는 그렇게 눈물 흘리던 자가
이제 쫄딱 망하니까 그렇게 신나게 춤 추는 겁니다.
이 세대가 이런 겁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애곡하여도 울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 11:6, 개역)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 11:7, 개역)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마 11:8, 개역)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마 11:9, 개역)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마 11:10,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마 11:11,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마 11:12, 개역)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 11:13, 개역)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마 11:14, 개역)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 11:15, 개역)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마 11:16, 개역)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마 11:17, 개역)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마 11:18, 개역)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마 11:19,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눅 7:32, 개역)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청개구리 라는 거죠,
그런데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지만
지금 누가 더 청개구리처럼 보입니까?
참 기가막히고 코가 막히죠.
다수는 다수로 안정화되고 고정화 됩니다.
그런데 딸랑 한명이 다수 아니 전부에게 청개구리 이다 라고 하면
그 청개구리 입장에서는 도대체 누가 더 청개구리 답냐 말이죠.
바로 이런 역설, 패러독스를 예수님은 펼치시는데
그것이 바로 눈물이다 라는 겁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 말이죠.
결국 인간의 눈물 즉 나사로를 애도하는 그 눈물은 결국 주의 병에 담겨지지도 않을 것을 자기들끼리 우리 이래 이래 우리끼리 위로하제 저 예수의 사랑은 결국 거짓임을 우리가 밝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이렇게 흘리는 눈물이다 라는 식으로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바로 그런 눈물을 보시고 눈물흘리시는 겁니다.
사실상 성경 전체가 이런 식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바리새인에게 일부러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어기면서 밀을 먹는 제자들을 바리새인에게 노출 시켜서
왜 당신의 제자는 안식일이라는 거룩한 날을 더럽히느냐 라고 했을때에
예수님이 그 안식의 주인으로써 오셨다 라는 겁니다.
저들의 안식을 보시고 안식을 흘리시는 겁니다. 순엉터리라고 들통내는 식입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 사건도 그렇고
실로암 소경을 통해서 누가 진짜 소경인가를 들추어내심도 그렇고
이런 방식이 아니면 원수 문제를 밝혀 내시지 않는 겁니다.
얼마전에 말한 일만달란트 탕감 비유도 그런 식입니다.
그래서 저들의 눈물을 보시고 너무 너무 민망해서 우시는 겁니다.
눈물을 거부하는 눈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겠다는 것을
훼방하고 방해하고 피 흥 칫 비아냥 거리는
훼방으로써의 눈물을 저들이 흘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들의 진짜 눈물은 주의 병에 주의 책에 기록도 되지 않는 것을 흘리고
주의 책에 기록되는 예수님의 눈물은 연기로 거짓으로 취급하면서 거부하는 의미로써 흘린다는 거죠.
그래서 우시는 겁니다.
주의 병에 담고자 말이죠.
오호 땡큐 너희들 나를 거부했겠다. 그래 눈물 담아야지 라고 말이죠.
마치 기다렸다는 냥
왜 빨리 나를 안 쫏아내지? 나를 안 거부하지? 라는 식으로 무지 무지 기다렸는데 드디어 훼방이 벌어지니까
신나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참 이상하죠. 우리로써는 상상도 못했던 생명책에 기록된 내용이다는 겁니다.
성경말씀에 기록 되어 있듯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감사제가 미래완료로써 이미 완성 되어 있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시 56:8, 개역)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시 56:9, 개역)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가 물러가리니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 줄 아나이다』
(시 56:10, 개역)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시 56:11, 개역)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이까』
(시 56:12, 개역)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시 56:13, 개역)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그러니 항상 결과는 무조건 예 라는 겁니다.
아니오 함이 아예 없는 식입니다.
다 이루었다 라는 겁니다.
결과는 항상 감사 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감사제 감사가 미래에서 덮쳐왔기 때문에
주의 병에 담고 계수를 하고
주의 책에 기록된 것만 의미를 둔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원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먼저 감사제가 먼저 있었고 얼마나 또렷하고 명료하게 밝히 보입니까?
그 다음에 예수님의 눈물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선지자 눈물 그 다음에 다윗의 눈물
그리고 제일 끝에 저들의 훼방이 제일 나중에 있는 겁니다.
시간의 역순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이 아기 예수님으로 오셔야 하는지 이제 아실 겁니다.
이미 기록된 대로 아기 예수님은 피하고 피하고 피하고 그 도망치는 횟수를 계수 하듯이
주의 책에 기록된 것만 의미를 두었기에
비로소 멀쩡하던 인간들이 숨어있던 악마의 모습으로 들썩 들썩 거리면서
원수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30세 때에 예수님이 복음을 증거하기 앞서
먼저 마귀의 정체를 들추어내시고 시험에 다 이기신 후에 그 이후에 복음을 증거하십니다.
아기때의 예수님은 가만히 있어도 원수들이 들썩들썩 였지만
이제는 그랬던 원수들이 안그런척 가만히 있는 것을
이제 3년의 공생에 동안 그들을 수시고 돌아다니시는 겁니다.
그러니 저들의 눈물 흘리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눈물이 먼저 있었고 이 사건이 기록된
주의 책에 기록이 먼저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또 주님이 흘리시는 눈물 과 피 흘리심만이 주의 책에 기록이 되었기에
그 십자가 사건만이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에 의미를 두지 않는 베드로를 사단아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고 욕먹는데
그 욕먹은 베드로를 마귀가 잡아 오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거 마귀가 밀까부듯 초정밀하여서 조사한 그 죄악의 기록들이
주의 책에 기록된 것이냐 라고 물으니까
아뇨
그럼 말라꼬 신경쓰냐?
내가 너를 위해 흘린 그 피가 주의 책에 기록 되어있냐?
네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왜냐하면 죽은지 삼일 만에 살아난 것은 예수님 밖에 없고
죽은지 삼일 만에 살아나지 않은 것은
주의 책에 기록 되지도 않는 것이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주의 책에 기록되는 것만
주께서 죽은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난 그 십자가 가 밝히 보이는 또렷한 것만 신경 쓰면 된다는 겁니다.
기록 되지도 않을 흐릿하고 모호한 의문의 것은 신경 끊으라 말이죠.
(요 21:14, 개역)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요 21:15, 개역)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6, 개역)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 21:17, 개역)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자 이렇게 되면 원수 문제는 해결이 되는 겁니다.
즉 죄 문제는 해결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에게 잡혀 와야 합니다.
베드로 처럼 말입니다.
다윗처럼 늘 쫏겨다니고 유리하고 도망치고 피하고 피하듯이 말입니다.
마귀를 거치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눈물을 이해 할수가 없습니다.
마귀가 죄인 잡았다고 베드로를 잡았던 그런 죄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의 책에 기록이 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오로지 십자가의 피 흘리심만이 기록이 되는 겁니다.
창세전에 예정된 것을 이 십자가 사건 뿐이며
이 십자가가 성경 전체를 피로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 책에 기록도 되지도 않은 것을
뭐 대단한 것인냥 의미를 두는 그 자체가 바로 원수가 하는 일이다는 겁니다.
마귀의 특징입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주의 책에 기록된 것을 의미 둘 수가 없도록 하는 것이 마귀가 담당한 일이 거든요.
그렇기에 문자를 집요하게 집착해서
몸에 성경 문자를 아예 세길 정도로 안식일 지키기에 달인들이고
율법의 달인일 정도로 문자를 꽉 잡은 자들인 겁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을 할 때 두 번째 시험에서
시편에 기록된 대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듯이 이 기록 됨의 의미를 마귀가 중요하게 여길 정도 입니다만
그저 문자만을 따를 뿐이지
십자가의 의미는 아니였던 겁니다.
껍데기만 가면만 쓰지
내용에는 관심이 없다는 거죠.
결국 이 싸움입니다.
거짓 선지자도 문자로 기록된 것을 가지고 유혹하겠지요,
오늘날 거짓 영을 받은자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무나 거짓 영을 받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나 성령을 받는게 아닙니다.
그런데 주의 책은 문자가 아닌 사건 곧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마귀가 좋아할리가 없지요.
물론 요즘 거짓영을 받은자는 십자가 라는 껍데기를 말하지 않으면
교회 장사를 못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내용이 결국 다른 거죠.
그 문자가 십자가 사건과 이상하게도 안 맞습니다.
그 문자만을 제대로 따랐던 자들이 유대인 아닙니까.
인간의 대표성으로써 유대인이기에 우리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유대인이 이렇게 고마운 행동을 통해서 아 이게 아니구나 잘못된 모습을 미리 선행학습을 하게 되는 겁니다.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것만 어쩌면 그렇게 골라 골라서 콕 찝어서 행동하는지
덕분에 우리는 차이나는 주의 행동, 다윗의 행동, 참선지자의 행동, 사도들의 행동,
믿음의 선배들의 행동을 비교하면서 보게 됩니다.
그 차이를 본다는 겁니다.
정말이지 극과 극의 차이 이지 않습니까?
비유가 그야말로 정수입니다. 즉 사건에 대한 은유? 복선? 수수께끼?
어쩌면 그렇게 물과 기름으로 제대로 갈라놓습니다.
맏아들과 탕자
에서와 야곱
사울왕과 다윗
실로암 소경과 그의 소경된 원인인 죄가 자기죄인지 부모죄인지를 공론화 할려는 눈 뜬 소경인 성경박사들
우리가 보면 별 차이 없는 죄인들 뿐인데
주의 책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완전히 극과 극의 간극으로 갈라진
차이를 제대로 보게 됩니다.
주의 책이 저들을 극과 극으로 갈라버리는 겁니다.
거기에 다윗은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 앗싸 완료 라고 외치는 겁니다.
아주 신났어요 신났어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바리새인
즉 유대인의 간극벌리기로써의 성화는
아예 주의 책에 기록도 되지도 않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들에게는 목숨을 걸 정도로 중요한 겁니다.
얼마나 저 더러운 세리와 같지 않을려고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일주일에 두번 금심하고
토색 즉 경건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얼마나 노력했는지 눈물겨울 정도 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자부심이 대단하고 자신만만했으면 하나님까지 동원해 가면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딴 짖이 주의 책에 하나도 기록 될 꺼리가 아니다는 겁니다.
정작 세리가 주의 책에 기록된 주님의 긍휼 곧 십자가의 피흘리심만을 의미두는 겁니다.
제대로 극과 극으로 갈리는 거죠,
그러니 그 딴거에 신경쓰지 말고
오로지 세리는 불쌍히 여겨 달라는 주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만 주의 책에 기록되었다고 의미를 두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리함을 계수하고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 주의 책에 기록하는 겁니다.
감사제가 이미 완성되었기에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겁니다. 주의 병에 주의 책에 기록이 되니까 말입니다.
다른 것은 의미 두지 말라는 겁니다. 주의 책에 기록이 되지 않으니까 말이죠.
자 이제 본문에 들어갑니다.
시편 69편이 36절까지 있는데 조금 긴데
요점은 결국 원수 문제인데
이 원수 문제를 들추어내는 것으로써
(시 69:8, 개역)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이 되었나이다』
(시 69:9, 개역)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객이 되고 외인이 되고
주의 전을 향한 열심히 주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나에게 미치는 것 등등은
결국 주의 책에 기록 된 것만 의미를 두시는 주의 활동이다는 겁니다.
다윗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경험이다는 겁니다. 왜? 주의 책에 기록된 것이니까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안에서 하나 되었기에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말입니다.
다윗 개인이 아니라
오직 죽었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남는 것만 기록되고(그 머리로 인한 그의 몸도)
그렇지 않은 것은 기록 되지도 않을 것들이기에 신경쓸 필요가 없는데
그런 기록되지 않을 것들은 반드시 기록될 일들을 오히려 훼방하는 것으로 작용하니까
서로가 서로의 소욕을 못하도록 하는 셈이다는 겁니다.
즉 저들의 훼방이 도리어 주의 책에 기록될수 있도록
즉 다윗이 아닌 예수님이 말이죠.
예수님이 기록될 수 있도록 보충역할만 하는 겁니다.
실컷 남 좋은 짖만 했다는 거죠,
예수님이 영광 받도록 말입니다.
애굽왕과 애굽 군사가 여호와의 영광을 위해 움직이어야만 했고
애굽왕 바로가 강퍅케 되는 것도 주의 영광을 위해 씌여지는 보충물로써 작용하듯이 말입니다.
실컷 베드로를 힘들게 잡아 왔더니만
베드로에세 사랑의 십자가의 피 옷을 입혀 버리니까
오히려 베드로를 좋게 만드는 식입니다.
다윗을 눈물 흘리게 한 괴롭힘이 오히려 주의 병에 담도록 만든 꼴이다는 겁니다. 주의 책에 기록이 되게 하는
원수 짖으로써의 보충물이였다는 거죠.
그런데 놀랍게도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지만
다윗은 결국 그렇게 쫏겨다니고
도망치고
피하고 피하고 또 피하고
눈물 흘리고
그렇게 해도
결과적으로는 그런 것이 주의 책에 기록된다는 것에서
기쁨과 즐거움과 노래와 춤이 넘치는 겁니다.
미래완료를 봐버렸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것이 다 감사제 다 이루었다는 완료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감사함이 넘치는데 있어서
정작 저들은 아무리 권력을 쥐고서
쫏아내고 추격하고
하하하 웃어도
결국은 주의 책에 기록되지도 않는 헛된 허구로
우상으로 배를 채울려고 하니
먹어도 먹어도 늘 굶주인 배로 잠을 못자는 겁니다.
그러니 아침을 맞이 할 수가 없습니다.
밤새도록 굶주림에 배가 고파 잠을 못자고 잠 한 숨도 못 자고
그 기나긴 밤을 통과도 못한채로
모호하게 그 어두움에서 헤메고 헤메고 헤메는 겁니다.
결국 저들 원수의 모습을
원수들이 다윗에게 참선지자에게 예수님에게 퍼부었지만
오히려 무사히 통과하고
저들은 정작 그 어두움을 통과도 못하고 그 어두움에 갇혀서
문자만을 지켰다고 기록되지도 않은 것을 우길 뿐이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원수 갚는 원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평화가 오듯이
평화가 이미 완료 되었기에
원수들로부터
유리 당함을 계수하고
눈물 흘린 것을 주의 병에 담아서
주의 책에 기록 된 것을 기뻐하는 겁니다.
이것이 원수 문제를 해결한
평화의 완성이기에
그 화평을 이미 넉넉히 누리는 겁니다.
어떻게? 유리함을 계수하고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서
주의 책에 기록된 것만 의미 두는 것을 누리기 때문에 말입니다.
주의 집을 향한 열심이 주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주에게 미쳤을때에
다윗에게 닥쳤을때에
오히려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된 것이라고
았싸 따봉
감독도 컷 아주 좋아라 대본대로 되었다고 즐거워 합니다.
이미 완료된 감사제가 있기에
대본이 있기에
주의 책에 기록된 것이 있기에 대본대로 되었다고 즐거워 하는 겁니다.
시편 69편은 그런 의미에서 원수가 여전히 활개를 치는 가운데 속에서도
그 한 가운데서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다윗은 찬송을 부르며 넉넉히 화평을 누리고 있다는 겁니다.
넉넉히 이겼다고 전해라 ~~~~~~~~
(롬 8:31, 개역)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3, 개역)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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