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예수를 버렸기에 잡아 죽이자! 엘리야가 저를 구원하나 보자 (시편 71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원수들이 말하길 ; 하나님이 예수를 버리셨은즉 잡아 죽이자! 건질 자가 없다 (시 71:11)
(마 27:46, 개역)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 27:49, 개역)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시 71:11, 개역) 『이르기를 하나님이 저를 버리셨은즉 따라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 하오니』
(시 71:1, 개역)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
(시 71:2, 개역)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시 71:3, 개역) 『주는 나의 무시로 피하여 거할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산성이심이니이다』
(시 71:4, 개역)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하소서』
(시 71:5, 개역)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
(시 71:6, 개역)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 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 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71:7, 개역) 『나는 무리에게 이상함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
(시 71:8, 개역) 『주를 찬송함과 주를 존숭함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
(시 71:9, 개역)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
(시 71:10, 개역) 『나의 원수들이 내게 대하여 말하며 나의 영혼을 엿보는 자가 서로 꾀하여』
(시 71:11, 개역) 『이르기를 하나님이 저를 버리셨은즉 따라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 하오니』
(시 71:12, 개역)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 71:13, 개역) 『내 영혼을 대적하는 자로 수치와 멸망을 당케 하시며 나를 모해하려 하는 자에게는 욕과 수욕이 덮이게 하소서』
(시 71:14, 개역)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찬송하리이다』
(시 71:15, 개역)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시 71:16, 개역)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
(시 71:17, 개역)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
(시 71:18, 개역)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시 71:19, 개역) 『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대사를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시 71:20, 개역)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시 71:21, 개역)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
(시 71:22, 개역)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 71:23, 개역)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내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구속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시 71:24, 개역) 『내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말씀하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가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시 71:11, 공동) 『"하느님도 버린 자, 쫓아가서 붙들어라, 구해 줄 자 없으니 잡아다가 족치자."』
(시 71:11, 쉬운) 『그들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버렸다. 그를 쫓아가 잡자. 아무도 그를 구해 주지 않을 거야.”』
(시 71:11, 킹흠정)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으니 그를 핍박하고 사로잡으라. 그를 건질 자가 없도다, 하나이다.』
(시 71:11, 한글킹)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으니 그를 따라잡으라. 그를 구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하오니』
(시 71:11, 현대인) 『`하나님이 저를 버리셨다! 추격해서 잡아라. 이제는 저를 구할 자가 없다!'』
(시 71:11, 현대어) 『`하나님이 저자를 버렸으니 뒤쫓아가 잡아 버리세. 그렇게 해도 누구 하나 나서서 저자를 돕지 않을걸' 이렇게들 수군거립니다.』
(마 27:46, 개역)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 27:47, 개역)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마 27:48, 개역)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마 27:49, 개역)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마 27:50, 개역)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마 27:51, 개역)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마 27:52, 개역)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마 27:53, 개역)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막 15:36, 개역)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눅 23:34, 개역)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눅 23:35, 개역)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눅 23:36, 개역)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포도주를 주며』
(눅 23:37, 개역)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눅 23:38, 개역)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눅 23:39, 개역)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요 19:1, 개역)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요 19:2, 개역)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요 19:3, 개역)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7, 개역)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8, 개역)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사 53:9, 개역)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사 53:10, 개역)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사 53:11, 개역)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사 53:12, 개역)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우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케 하셨다고 합니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서
그 핑계로 우리의 죄악까지 다 뒤짚어 씌워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님의 더 나은 제사입니다.
인간이 드리는 제사는 정반대입니다. 죄악을 모을줄 모릅니다. 좋은 것만 모아서 드리는 가인의 제사입니다.
그런데 더 나은 예수님의 제사 곧 사랑의 제사 자비와 용서의 제사인
십자가의 제사는 우리의 이런 내막까지 다 들추어내시고 환자임을 드러내시고
고치시고자 하시는 제사인 인애와 자비의 제사입니다.
다른 제사 안 받습니다. 십자가만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주의 책에 기록되는 실상이거든요.
많의 사람의 죄를 짊어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다는 것이 실상이다고 합니다.
이거 거짓말 아닙니까? 솔직히 말해 봅시다.
이거 거짓말이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제발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
그 이유는 우리는 그렇게 할 정도로 나쁜놈이 아니다는 겁니다.
만약 성경의 주장대로 라면 나의 죄악이 개입이 되어서
그 죄악에 맞물린 죄사함의 피흘리심인 십자가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걸림돌입니다.
우리는 나의 죄악이 개입된 제사가 아니라
나의 거룩한 행실, 올바른 행함,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심이라는
남들이 흠잡지 못하는, 꼬투리 잡지 못하는 것을
곧 나의 의를 개입해서 드리는 제사이어야 하는데
성경은 거꾸로 나의 꼬투리 잡힐 것만을 집어넣어서마니 십자가가 의미있도록 하기에
불편한 숭고의 거룩의 제사인 십자가이다는 겁니다. 거리끼죠 거리껴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이 거짓말이 아니라 실상일 정도로
너는 남을 7번 용서하기는커녕
7에 70번 용서 받아야 할 정도로 아주 아주 나쁜놈이다고
그 나쁜놈이 감추고자 숨기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다 들추어내는 더 나쁜놈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누구랑 대화를 하면서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한번보세요.
김대식
1월 9일 오후 12:35 ·
부조리 보다 더 심한 부조리 (영화 내부자들)
이끼, 미생, 등등 윤태호 작가가 부조리만을 자신의 색깔로 삼아서 작품을 펼친다고 하니 그렇겠죠
아무튼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엘리야가 850대 1로 싸워 갈멜산에서 승리한 부조리 타파를
도리어 엘리야의 부조리를 뽑아내겠다고
엘리야에게서 원망과 차라리 나를 죽이라는 나만 남았다는 자살시위를 하게 만듭니다.
부조리를 타파하는 본인 자체가 부조리였다는 것이죠
여기에 해학(채널돌리기,전복, 가로지르기)라는 역설은
7천명의 남은자를 남겨놨다 라는
엘리야 너도 부조리야 라는 죄인만들기입니다.
오히려 나만 남았나이다 라는 것 처럼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이 없는 거죠.
나는 매일 매일 가짜요 부조리 입니다 라는 속으로 숨겨주시고 감추어주시는
주님의 자살방지 프로그램
부메랑 피하면서 받기 프로그램인 십자가라는 불륜이지요.
니가 왜 죽니 내가 차라리 죽으마 라는 부조리 보다 더 옳은 부조리가 세상에 어디있겠습니까?(베드로는 그것을 말릴려다가 사탄아! 라는 욕을 먹었지만 결국 혜택을 받는 거죠. 꼬끼오 덕분에, 세상에 이런 말도 안되는 부조리가 세상에 어딧남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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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조리 덕분에 혜택을 입어 구원받는 거죠.
나쁜 나 보다, 더 나쁜 십자가가 나 보다 옳았습니다.(다말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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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에 있는 그 암덩어리를 거쳐서 예수님을 봐야 합니다.
나를 숙주 삼은 내 속의 마귀를 거쳐서 예수님을 봐야 진짜 예수님입니다.
지금 시편 최근의 내용들은 모조리 다 원수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원수를 거쳐서 예수님을 보는 겁니다.
원수를 거치지 않고서 예수님을 보면 또 나의 구원 내 구원 내 구원만 따집니다.
내 돈 내 돈 내 돈 ~~~~~~~~~ 이라고 외치는 개그맨 윤택처럼 내 구원만 외친다는 거죠.
나의 구원을 위한 예수 밖에 안되는 겁니다. 그것이 유대교입니다. 인간 종교의 한계입니다.
그렇게 마귀를 거쳐서, 원수를 거쳐서 보지 않게 되면
나무에 달린 불뱀을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돌리지 않고 보게 되면
다윗과 똑같은 고난을 당하는 자기자신을 시편을 통해 위로한답시고
괴롭히는 자를 가해자로 설정하고
자신을 피해자로 설정하고
그래서 원수에 대한 복수를 갚아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원수인 마귀를 제대로 거치지 못한 결과입니다.
도리어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보게되는 원수인 거죠.
우리는 원수 갚을 자격이 없습니다.
원수는 내 원수가 아니라 예수님의 원수입니다.
다윗의 원수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원수입니다.
지금 문자적으로 다윗의 원수로 보고 있는 자는 다 엉터리 해석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본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원수로 보고 있기 떄문에
예수님이 직접 해결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아니 왕으로써 쿠테타 반란을 재압할 능력이 없었을까요?
평생을 지긋 지긋하게 쫏겨다니고 피해다녔는데!!!
그런데 가만히 내버려 두랍니다.
내 원수가 아니다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원수가 없어요.
그런데 원수가 발생했다는 것은 이것 기적입니다.
내 원수가 아니라 예수님의 원수이기 떄문입니다.
그렇게 인식하지 못하면 원망하게 됩니다.
진짜로 울게 됩니다.
제가 말했지요 예레미야의 눈물은 연기 이다고
연기라고 하니까 부정적인 가짜라는 느낌이 들지요?
그럼 진짜 눈물을 흘려야 하나요?
저는 그 진짜 눈물이 바로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의 모습이다고 봅니다.
자신이 억울해서 슬퍼서 원통해서 우는 눈물 곧 진짜 눈물은 원한이요 한풀이가 됩니다.
원인에 따른 결과로써의 눈물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가 당한 어려움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 진짜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그것이 원인이 되면 원수 문제는 안풀립니다.
그런 진짜 눈물은 한풀이요 원망이 됩니다.
나만 남았나이다 내 열심히 특심이나 나만 남았나이다 라는
이렇게 된거 다 하나님 짖이지요? 하나님이 왜 안막았나요?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것 맞잖아요?
라는 원망이 됩니다.
그런 진짜 눈물이 아니라
그런 원인에 따른 눈물이 아니라
결과라는 [미래의 십자가]라는 감독이 스텐바이 큐 라고 싸인을 주자
주의 책에 기록된 대로, 시나리오 대본에 적힌대로 연기를 하는데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눈물을 주루룩 흘리는 겁니다.
원인 없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주의 책에 기록이 된 대로 연기를 한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여러분의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나는 주장을 하는고 하니
실상은 여호와께서 예수님에게 감당시킨 연기이다는 겁니다.
이 연기가 진짜요
예수님의 연기가 아닌
인간의 리얼은 다 가짜이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눈물은 아픈 원인 슬픈 원인 고통스러움의 원인에 따른 결과로써의
진짜 눈물은 오히려 주의 책에 기록되지도 않는 허구이다는 겁니다.
진짜 눈물이 허구이다는 겁니다. 허구
그리고 감독이 큐 싸인해서 감독이 시키는대로 눈물흘리는 연기는
실상이다는 겁니다.
즉 연기는 연기인데 죽는 것 까지 진짜 죽는 연기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진짜 눈물은 안 죽어요 절대로 안 죽어요
죽을수도 없습니다. 다시는 못 사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진짜 십자가에서 죽는 연기는 즉 진짜 죽음은 다시 살아나시는 연기 입니다.
다시 사시는 것 까지 연기를 해야해요
그런데 우리는 딱 거기까지 입니다. 다시 살아나는 연기는 도저히 못한다.
죽는것 까지는 연기 할수도 있다고 보겠지만
다시 사는 것은 연기 못한다 라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죽는것 까지도 못하는 연기인 겁니다.
왜? 사랑이 없으니까!!!
원수 문제입니다. 원수란 사랑이 없어요.
사랑이 없다면 저는 원수입니다 라고 자복해야 할 판국입니다. 시인하자 말이죠.
그런데 자꾸 진짜니 연기니 라고 따지겠다고 보겠다고 판단하겠다고 하니까
얼마나 웃깁니까? 판단 받아야할 존재인 주제에
도리어 판단해 보고 살펴보고 가부의 여부를 따지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무조건 반대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겁니다.
즉 우리는 진짜 눈물 흘릴 자격 조차도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 눈물 내 진짜 눈물에 신경쓰다보니
정작 예수님의 흘리시는 눈물에는 관심도 없다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심각한데 어떻게 예수님의 눈물을 쳐다보겠습니까?
어디까지나 남의 눈물이지
내 눈물이 주인공이어야 하니까 말이죠.
믿음 문제도 똑같습니다. 내가 믿어야 믿음이지
예수님의 믿음은 어디까지나 남의 믿음이요
나의 입장에서는
그저 보충물 이요 충전용 배터리일 뿐입니다.
어려울 때 잠시잠깐 방전되었을 때
성령을 배터리 충전용으로 취급해서 사용할 뿐이지
어디까지나 내 믿음은 내 숙제로 보는 겁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연기라메? 연기 눈물이 진짜 내 눈물보다 더 귀하니?
네 귀합니다.
왜냐하면 내 눈물은 백날 흘려도 주의 책에 기록이 되지 않습니다.
또 기록되기를 원치도 않습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의인의 믿음이요 연기 입니다.
우리는 다시 살지도 못하는 연기도 아닌 진짜이다는 겁니다.
진짜면 뭐합니까? 다시 살지도 못하는데
3일 만에 다시 죽었다가 살아날수 있는 연기 할수 있을까요?
거짓이라고 연기라고 욕만 할 뿐이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날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연기라고 가짜라고 욕하던 그 연기가
진짜 죽어서 진짜 3일 만에 사는 겁니다.
그 거짓된 다말이 다시 사는 겁니다.
남까지 살리면서 말입니다.
늦은 비 되신 마지막 아담 이신 죽은자 예수님께서
이른 비 된 첫 아담인 산자를 도리어 살리시는 영이다는 겁니다.
(고전 15:45, 개역)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6, 개역)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 15:47, 개역)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 15:48, 개역)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고전 15:49, 개역)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전 15:50, 개역)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고전 15:51, 개역)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고전 15:52, 개역)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3, 개역)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전 15:54, 개역)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전 15:55, 개역)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6, 개역)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 15:57,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8, 개역)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흘리는 눈물은 주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 눈물입니다.
그 눈물은 예수님이 흘리시면서 연기하십니다.
이것이 실상입니다.
연기라는 말에 반감을 가지는 자가 백프로 라서
왜 이 연기가 진짜인지를 제대로 설명한 이야기가 바로 다말사건입니다.
시아버지 유다는 심각합니다. 약속의 가문을 자신이 말아먹을까봐 심각합니다.
더군다나 미래의 시선에서도 그랬듯이 모세의 유언처럼
그 앞서 과거의 예언 유언이 있습니다.
(창 49:9, 개역)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개인에 대한 운명이 아닙니다. 지파에게도 해당됩니다.
곧 집단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에게로 향하는 겁니다.
유다만 그래요 유다만
그럼 유다는 죄인 중의 괴수로써 자신의 죄악을 이 다말에게 잡혀야 합니다.
어차피 시아버지 유다는 마귀에게 잡혀 전리품 노릇을 하고 있는데
며느리 다말이 그것을 다시 빼앗아 오는 것이 관건입니다.
마귀에게 사로잡힌 베드로를 예수님이 다시 빼앗는 것이 사랑이다는 겁니다.
(마 12:29, 개역)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그 빼앗는 연기가 바로 실상이다는 겁니다.
부정하지요 부정
맞습니다. 다말의 부정이 아니면 유다는 건짐받을길이 없습니다.
실상은 범죄자를 위하여 흘리는 눈물이다는 겁니다.
우리의 진짜 눈물은 절대로 범죄자를 위해 흘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범죄자들로부터 당했다고 울고
그 범죄자와 다르다 라는 의식에서 우는 겁니다.
즉 많은 사람의 죄악을 짊어지는 눈물이 아니다는 겁니다.
주의 책에 기록되지도 않는 눈물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흘리는 눈물을 우리는 다시 봐야 합니다.
내가 흘리는 눈물처럼 해석하면 안됩니다.
정반대입니다. 주의 병에 담고자 가득채우고자 흘리는 눈물을
그 어떤 인간도 눈물 흘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상합니다.
이상하자 이상하자 ~~~~
(시 71:7, 개역) 『나는 무리에게 이상함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
피난처가 큐 싸인을 내리니까 흘리는 눈물이라서
다윗은 눈물을 흘려 주의 병에 담고 주의 책에 기록이 된 대로 흘리는 겁니다.
이것이 과연 우리가, 진짜 눈물을 흘리는 자로써 우리가 이해가 될까요?
가짜 눈물의 연기를 해야하는 판국에 우리는 내 진짜 눈물을 안알아준다고,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시위를 하잖아요. 엘리야처럼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남을 7번 용서하는 것은 주님은 가짜로 취급해 버리고
넌 7에 70번 용서 받아야 해 라는 붕떠버리는 실감나지 않는 것은 진짜 곧 실상으로 보시는 겁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7에 70번 용서 받아야 할 정도로 제가 나쁜놈입니까? 라는 것이
오히려 오히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라고 거짓말로 취급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속에서 부글 부글 끓는 미친 듯이 반발하는 것이, 무지 무지 싫어버린바 되는
십자가가 밝히 보여주는 실상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또렷한 명료함이다는 겁니다. 완료입니다.
오히려 그 앞에서 나의 남을 7번 용서하고 나의 진짜 눈물을 흘리는 것은
모호하고 의문의 짖이다는 겁니다. 이미와 아직이라는 둥 흐릿한 소리만 하는 겁니다.
실상이 저쪽 예수님 쪽, 다말 쪽에 떠버렸는데 어딜 감히 속이려 드냐 말이죠.
빨리 빨리 퍼뜩 퍼뜩 철수해 버리고 내 진짜 눈물을 거짓으로 취급해 버리고 포기해 버리고
예수님의 눈물연기를 보자 말이죠.
다말이 왜 불 속에 들어가는지 그 연기를 제대로 보자 말이죠.
우리가 취급한 거짓이 나의 진짜 보다 더 실상인 진짜이기에
그가 나 보다 옳다 라는
이 얽히고 설킨 내가 맞물리지 않고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닌
오히려 그런 나를 겨냥해서 반드시 맞물려서 이 십자가 라는 불편한 사건에 말려들어서
드디어 들통나는 그가, 다말의 연기가, 나의 진짜 눈물 보다 더 낫다 라고
비로소 자기부인할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사건의 의미에서의 자기부인 곧 회개이지
사건이 아닌 회개는 회개의 달인 바리새인의 의문일 뿐이다는 겁니다.
왜 그런 회개의 달인이 십자가를 걸림돌로 여길까요?
회개는 진짜 눈물 아닙니까?
왜 그런데 십자가는 거부할까요?
그 진짜 눈물을 거짓으로 만들어 버리는 예수님의 거짓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거짓이 진짜 보다 더 진짜인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마귀를 물리쳤습니다.
(마 7:22, 개역)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23, 개역)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눅 10:17, 개역)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0:1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눅 10:1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눅 10:20, 개역)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성령을 받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쫏아낼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성경에 기록이 된 구절이 맞고 그런 구절이 많으니까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될 수 있다고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구라를 칩니까?
그런데 왜 그 목사들은 왜 마귀를 못 쫏아내는 것일까요? 정작!
성경에 기록된 대로 마귀를 쫏아내는 권능을 성령을 통해서 받으라 라고
목사들이 외치는데 왜 정작 그 일로 목사들은 돈 챙기는 그 마귀는 못 쫏아낼까요?
이것은 아주 아주 특이한 역설입니다.
마귀를 쫏아내는 자가 곧 마귀이다는 겁니다. 마귀자식이지요.
사도행전에서도 살펴봤듯이
아주 아주 재미난 장면이
귀신을 쫏아내는 무당이나 점쟁이들을 사실상 그 뒤에서 조종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장사꾼들이였습니다.
그런데 졸지에 이 무당이 이 점쟁이가 사도바울에게 걸려들어서
정작 귀신이 나가버리니까? 무당 곧 귀신 쫏아내는 일이 무당 아닙니까?
그럼 사도바울이 무당을 고쳐버리니까 귀신을 못 쫏아내니
그만 장사를 못하게 되니까
그 무당의 스폰서인 장사꾼들이 사도바울을 고소하고 죽이려 한다는 거죠.
사도바울은 왜 이런 나쁜짓 ㅋㅋㅋㅋ을 할까요?
귀신 쫏아내는 무당을 고쳐버리면
누가 귀신 쫏아냅니까?
그러니 매니저들이 발끈하죠.
이 말은 그들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는 단절의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그들의 돈 순환을 막아버린 거지요.
예수님이 귀신들린 무덤가의 청년을 고치시는 원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귀신들인 청년이 귀신들린게 아니라
진짜 내막은 멀쩡한 동네사람들이 진짜 귀신들린 놈들이다는 겁니다.
귀신 쫏아내었다고 그 귀신을 돼지 떼 속에 집어 넣었다고
졸지에 동네 축산업이 쫄딱 망하게 되었으니
예수님을 안 쫏아내고 배기겠습니까?
진짜 귀신 들린 자의 내막이 그렇게 드러나는 겁니다.
주님이 눈물 흘리시는 눈물은 그런 내막으로
인간이 진짜로 흘리는 눈물이 왜 거짓인가를
거짓의 연기로써 가짜의 눈물로써 밝혀 버립니다.
그래야 달려들죠 너 가짜 맞지 내가 분명히 봤어 너 연기 하는거 맞잖아 라고 달려듬으로써
십자가에 말려드는 겁니다.
그렇기 떄문에 이런 구라치는 목사들을 많이 퍼트리시는 겁니다.
그래야 지옥이 꽉 꽉 찰 것 아니겠습니까?
목사들이 대부분 귀신들린자들 아닙니까? 특히 성화론자들, 개혁주의자들
성화 개혁 이라는 말 자체로 이미 사기를 치는 식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가능성을 부여해 줄려고 환장한 자들 아닙니까?
그리고서는 돈을 받으니 원
이것은 주의 책에 기록이 되지 않습니다.
실상이 아닙니다.
진짜 실상은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감당하셨다는 것만이 실상입니다.
어떻게? 맞물리게 말려들겠끔 달려들도록 해서 말입니다.
시아버지 유다가 자신이 옳고 옳으면 더더욱 며느리 다말에게 말려드는 겁니다.
이것이 실상인 십자가입니다.
내가 옳고 옳으면 옳을수록 십자가에 말려드는 겁니다.
자기를 옳게 안 여기는 놈이 어디있겠습니까?
모든 인간이 다 십자가에 말려들 수 밖에 없지요.
온 몸에 거룩 거룩 거룩으로 도배를 한
온 몸에 거룩으로 포장을 한 유대인이 바로 우리의 이런 속성을
대표성으로써 십자가에 말려드는 겁니다.
그래서 사단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네 이름이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더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정작 내가 개입된 것은 진짜 기쁨이 아니다는 겁니다.
이것보다 실감나는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진짜 기쁨 맞잖아요? 그런데 아니데요!
왜냐하면 실상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진짜 기쁨이요 실감이 맞는데
주의 책에 기록된 실상이 나타나니까
비로소 주의 책에 기록도 되지 않을 것으로 기뻐하고 실감나게 좋아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실상이 아니다는 겁니다.
주의 책에도 기록 되지도 않을 것이다는 겁니다.
그럼 뭐가 실상이냐
창세전에 나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더 기뻐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감이 안 납니다.
아무리 나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연결해보아서
억지로 라도 실감해 볼려고 아무리 아무리 노력해 봐도
실감이 전혀 안 나는 겁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니까 내가 개입하고 느끼고 감각할수 있는
촉감으로 느끼는 그 어떤 짜릿한 희열과 그 어떤 것도 없는
붕떠있는 전혀 실감할수 없는 것만이
진짜 실상이다는 겁니다.
하나도 안 기쁜데 그것을 더 기뻐하라는 겁니다.
실상이니까
눈물의 연기는 실감이 안 납니다.
내가 흘리는 눈물이어야 실감이 납니다.
이상하죠.
주님은 주의 책에 기록된 것만이 실상이니까
그것을 실감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전혀 전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즉 리얼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우리 쪽에 뭔가 큰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방금 사단을 하늘에서 떨어뜨렸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쪽에 뭔가 큰 문제가 있다라는 겁니다.
이거 실감할까요?
내가 큰 문제 꺼리가 있데!!!
아니 방금 사단을 주의 이름으로 떨어뜨렸는데
귀신들을 쫏아내었는데
내가 문제가 있데.
방금 850 대 1 로 하나님이 시킨대로 해서 갈멜산에서 싸워 이겼는데
왜 나만 남았는가? 왜 내 열심히 특심인데 왜 나만 남았는가?
이거 하나님이 뭔가 잘못 하신거 아닌가?
주님 일 제대로 하신 것 맞기는 맞나요?
또 요나 선지자는 내가 이스라엘을 회개케 하기 위한 선지자로써 목숨 걸었지
왜 저깟 니느웨 백성 개같은 이방 백성을 위한 선지자 입니까?
왜 저를 저런 쓸데 없는 자들을 위해 일하게 하십니까?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 더 급한 판국에
에잇 알았어요 알았어
퍼뜩 돌께요
하루에 한 바퀴 3일 동안 세바퀴 돌아라
그냥 한꺼번에 세바퀴 다 돌고
퍼득 망해라 망해라 망해라 궁민 니느웨 라고 했는데
어라 망하기는커녕 회개를 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뿌네?
차라리 날 죽이세요
이게 뭡니까?
하나님이 나를 속이고
나를 배신하고 이게 뭡니까?
이스라엘은 돌이키지 않으시고
엉뚱한 이방인 니느웨는 돌이키고
주님이 하실줄 알면서 왜 이스라엘은 왜 안돌이키시냐 말이죠.
차라리 날 죽이세요.
다윗은 밧세바 사건 이후에 연기를 참 잘하게 되었는데
물론 그 이전에는 무지 무지 못했지만 말이죠.
엘리야와 요나선지자는 무지 무지 연기를 못하는 겁니다.
그것을 잘 아시고 주님께서 연기못하는 것을 역으로 이용해서 기여이 연기를 하게 만드십니다.
즉 다른 말로 주의 책게 기록된 대로 시행케 하신다는 겁니다.
온갖 CG를 넣고 온갖 악마의 편집으로 발연기를 기여이 기가막히게 만들어 내신 겁니다.
엘리야나 요나선지자나 주의 책에 기록도 되지 않을 것으로 자꾸 여호와 하나님께 시비를 걸다 보니 그 장면을 역으로 이용해서 가로지르기 전복으로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즉 내가 주님으로부터 속임을 당해 봐야 비로소 실감이 납니다.
그렇게 그렇게 실감이 안 나던 것이
주님의 배신 때문에 실감이 팍팍 나는 겁니다.
그런식으로 불뱀에게 물렸는데 불뱀 쳐다 보라고 하니 말이 되냐? 약 발라야지 라고
고개를 안 돌리던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속임을 당하고 배신을 당하는
예수님의 배신 연기에 비로소 실감이 나는 겁니다.
알고보니 내가 배신하였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지요.
아뿔사!!! 그렇게 죽일 듯이 잡아죽이고자 했던 그 며느리 개같은 이방여자 더러운 여자
나쁜 며느리가 나의 구원자라니
비로소 기쁜 소식인 겁니다. 즉 하나도 안 기뻣는데
원인 없이 갑자기 졸지에 기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이번주 어머니와 나누었습니다. 연기라는 의미가그 정도로 중요했거든요,
오늘 시편 71편도
이렇게 힘들다 힘들다! 원수들이 나를 왕따시킨다! 온갖 어려움 속에 있다!
땅을 파서 그 구더기 속으로 떠밀어서 죽일려고 한다! 라고
그렇게 온갖 어려운 상황을 외치고 있는데
이상하게 그런 원인과 다르게 결과는 감사와 기쁨입니다. 노래요 찬미입니다.
즉 원인에 따른 결과가 아니다는 겁니다.
이것을 연기라고 제가 말하는 겁니다.
고마워 원수들아 나를 등떠밀어서 나를 눈물흘리게 해서 나를 쫏아내어서 피하도록 해서
앗싸 눈물을 담았지롱 매맞은 것 기록했지롱 오히려 놀려 먹는듯한 느낌입니다.
앗싸! 백만 스물 하나, 백만 스물 둘, 칠에 육십 팔, 7에 69 았싸~~~
나의 진짜 눈물은 원인에 따른 결과인데
원인에 따른 결과는 주의 책에 기록이 되지 않습니다.(남을 7번 용서)
이상하게 원인이 없는 결과가 주의 책에 기록이 됩니다. (7에 70번 용서 받기)
그럼 미래에서 십자가 라는 감독이 큐 하는 싸인에 의해
다윗은 눈물 연기를 하고
고난 연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야 다윗 자신의 눈물이 아닌
예수님의 눈물을 미리 연기해서
주의 책에 기록된 바를 나타내는 겁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이 다윗의 눈물로만 봤지
다윗이 눈물로 연기한 예수님의 눈물을
그들은 보고도 모르는 겁니다.
시편을 외워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따라했습니다.
따라하니까
나 보다 더 연기를 잘하는 예수님의 눈물을 보고 비로소 죽이고자 하는 겁니다.
더 미운 겁니다.
이것이 졸지에 원한이 되고 복수심이 되고 한풀이가 되다 보니
아벨 죽이듯이 하나님을 죽이고자
오 드디어 내 눈에 드디어 보였구나 너 한번 죽어봐라
내 눈에 눈물 흘리게 만들었겠다??? 한 번 니가 한번 피눈물 흘려 봐라!! 라고
숙주의 티를 팍팍 내는 겁니다.
유대인을 장악한 마귀를 거치지 않아서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전파 바로 전에 마귀의 정체를 들추어내시고 복음을 개시합니다.
마귀라는 주인을 들추어내지 않으면
마귀자식들이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알길이 없습니다.
먼저 그 열매의 그 나무를 들추어냄으로써 그 열매들의 출처가 그 나무에서 나오는 이유이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복음은 바로 그런 배경 그런 마귀의 정체를 카페트를 깔고서 전파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활동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제대로 된 대조 때문입니다.
제대로 된 간극이요 차이니까 말이죠.
천국과 지옥의 차이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마귀의 활동은 주의 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마귀 또한 감독이 시키는대로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두움이기에 빛되신 예수님을 돋보이도록 하기 위한 깡패 악당역할로써
오로지 주인공 되신 예수님을 영광 돌리도록 말입니다.
강퍅케 하신 애굽왕 파라오 왕과 애굽군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신다고 하시듯이 말입니다.
그들은 철처한 보충물입니다.
그 중간에 낑긴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의미입니다.
마귀들은 이 이스라엘을 잡아먹다가 목에 탁 하고 걸려버렸습니다.
얼마든지 삼켜버려서 뜯어먹을줄 알았는데
삼키기는커녕 목에 걸려버려서 죽을 맛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에라이 뱉어 버리자 했는데
어라 뱉을수도 없습니다.
가래를 카아아악 끌어모아서 시원하게 뱉어버리면 얼마나 좋냐 말이죠.
그런데 뱉을수도 없을 정도로 목에 낑겨 버렸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의미를 다윗이 연기를 하고
참선지자들이 연기를 하고
예수님이 연기를 함으로써
자칭 이스라엘이라고 했던 자들이 다 떨어져 나가버리는 겁니다.
아니 사자들이 삼켰는데 오히려 새끼를 쳐서 더 뿔어나겠끔
더 확장 시키는 결과가 된 겁니다.
두꺼비가 뱀에게 잡혀 먹히면 독으로 인해 뱀은 죽고 두꺼비 새끼들이 영양분으로 삼아 자란다고 합니다. 일종의 탁란이죠. 애굽 속에 이스라엘을 탁란 시키듯이 말입니다.
원인요?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의미는 [없다] 라는 의미입니다. 없음에서 생겨난 자들입니다.
원인이 없어요
이런 의미를 이스라엘 스스로가 박차버리고
바보같이 사자 역할을 하겠다고
나는 사자 연기 할래 라고
더 힘쎄고 더 강하고 더 크고
그게 좋아 보여서 사자 연기를 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역할을 개같은 이방인이 역을 따내게 되는 겁니다.
(마 15:22, 개역)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마 15:23, 개역)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마 15:25, 개역)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마 15:26,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마 15:27,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마 15:28, 개역)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이스라엘 자기 백성에게 왔는데
이스라엘이 없어요!!!
아무리 찾아도 이스라엘이 없어요.
그런데 개같은 이방인 여자 곧 가나안 여자가
이스라엘만이 말하는 대본 시나리오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 이스라엘이 없을까요?
다들 마귀역할을 하겠다고 애굽왕 역할을 하겠다고
다들 버린 겁니다.
얼마나 쉽나요? 힘으로 조져버리는데!
왜 억지로 얻어맞냐 말이죠.
두들겨 패는 역할이 낮지
얻어 맞는 역할은 싫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연기자가 없는데
그 연기자가 글쎄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자들이 다 맞는 겁니다.
주여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긍휼을 먹고 살지 않습니까?
이렇게 이스라엘의 의미는 계속해서 빠져나오는 겁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새이스라엘이 빠져나오고
다시 새정치민주연합당에서 다시 새새정치민주연합당으로 또 빠져나오는 겁니다. ㅋㅋㅋ
새 라는 말이 새롭다는 의미로 이미 이중반복성이니까 구지 새새 라고 할 필요가 없이
그 속에 다 담겨져 있는 겁니다.
결국 인간들이 원하는 이스라엘이라는 단체는 처음부터 없었다니깐요
없음입니다.
없음이 부각이 되는 이스라엘을
자꾸 있음 이라는 가능성의 소통으로 봐버렸으니
단절을 소통으로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자꾸 바꿔 버리는 겁니다.
그래야 믿음이 가요 믿음이
누가 단절인데 누가 믿겠습니까?
누가 불가능성인데 누가 믿겠냐 말이죠.
얼른 바꿔버려야 하는 겁니다.
걸림돌을 치워 버려야 한다는 거죠.
불편함을 편리함으로 바꾸어버리는 겁니다.
주의 책에 기록된 것은 불편해요
그러나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않는 것은 편리해요
왜일까요?
원수 문제가 걸려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원수 한테 잡혀 와야 합니다.
지금 다윗은 원수 한테 잡혔습니다.
죽이자 죽이자
아무도 안 도와 줄꺼다
하나님도 저를 버렸잖아
다윗은 속으로 웃습니다.
앗싸 성공
비록 몸은 죽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예수님이 앞으로 이렇게 당한다는 것을
미리 앞당겨 연기를 하는 겁니다.
자신이 어려움을 당해 흘리는 눈물은 연기가 아니지요.
그런데 다윗은 그것을 보는게 아니라
장대 높이 달린 구리놋뱀을 쳐다보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예수님의 때를 보고
자기에게 덮쳐진 상황을
십자가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고 연기를 하는 겁니다.
그럼 연기를 했으니 나는 옳잖아? 라고 하는 겁니까?
아니지요.
이것이 더 나은 제사로써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였다면
난 진짜 죽을뻔 했구나
이렇게 예수님이 지옥에 까지 따라와서 나를 건지시구나 라고 보는 겁니다.
개인 구원이 아닌 십자가가 해산의 고통으로 낳은 열매가 있다는 겁니다.
그 나물에 그 밥
그 나무에 그 열매 말입니다.
그러니 안 기쁘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존재가 아닌 당위로써 말입니다.
존재 때문에 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존재하기도 전에 주의 책에 기록된 당위이기에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주의 책에 기록된 실상이기에
우리는 당해도 쌉니다.
그런데 아픔은커녕 오히려 기쁨이 더 큽니다.
이것이 사랑이엿어 라고 말이죠.
예수님이 나를 배신하고 나를 속이고 한 것이 오히려 사랑이였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배신한게 아니라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는데 한 15년 전부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영화로 인해
연기자 배우까지 좋아하게 되었는데
물론 이름도 관심 없고 감독도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이죠.
그런데 배우가 눈에 들어오고 슬슬 눈에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런 초창기 쯤에 눈에 들어온 배우가 바로 로버트 드 니로인데
이 사람이 눈에 들어온 영화가 바로 택시 드라이버인데
도시 속의 쓰레기 같은 존재를 다 쓸어버리겠다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쓰레기는 인간이지 물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청소를 하나 하나 하면서
암흑가 사창가 속에 들어가 여자를 구원하는 메시아로 흉내를 내었는데
정작 최종적인 쓰레기는 자기자신임을 알고 뭐 청소 한번 해 본것도 없이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청소하더라 말이죠. 자살 말입니다.
결국은 인간이 인지하는 적이란 결국 자기자신이였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자신을 쓰레기 취급하여 그렇게 열심히 청소 할려고 처음부터 그렇게 할까요?
천만의 말씀이지요. 전혀 그렇게 안보는 겁니다.
그 어떤 사상도 나 자신을 귀하게 만들려고 하지
누가 나를 내 스스로 쓰레기 취급해서 쓰레기 통에 버릴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이 세상의 모호한 의문의 사상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복음은 정작 유일하게 나를 쓰레기 취급해서 청소할려고 달려드는 겁니다.
왜? 그것이 바로 나를 진짜로 귀히 여기는 십자가의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쓰레기 같은 세상에 미련을 두느냐?
니가 니 스스로 쓰레기를 만드는 이런 세상에 말입니다.
진짜 사랑을 우리는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이용해 먹는 가운데서 쓰레기 장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하루라도 더 버텨볼려고 하는 거죠,
그렇다고 자살하라는 말이 아니라
십자가가 들추어내는 실상에 말려들어라 라는 겁니다.
니가 니 스스로를 죽이고자 하는 이 세상에서
남을 위해 죽는 자
그것도 남의 이런 죄악을 다 담당하시고자 죽는 사랑 본적 있냐? 말이죠.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자라고 쓰레기 라고 쓰레기 청소 할려고 달려들다가
도리어 말려들어서 우리가 진짜 쓰레기 였다는 것을 밝히 보여주는 십자가가
너무 너무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정작 내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그런 마귀에게 사로잡힌자를 빼내시는
십자가의 죽음이였다는 겁니다.
이 사랑만이 또렷한 실상이고 나머지는 다 허구이다고 말입니다.
(사 53:12, 개역)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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