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자를 위한 지혜, 그러나 ... (시편 72)

 

가난한자가 없는 가운데서의 새롭게 발생한 가난한자 예수와 지혜자 예수



(
72:1, 개역) [솔로몬의 시]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72:2, 개역)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72:3, 개역)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72:4, 개역)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72:5, 개역) 저희가 해가 있을 동안에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72:6, 개역)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임하리니

(72:7, 개역)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72:8, 개역)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72:9, 개역) 광야에 거하는 자는 저의 앞에 굽히며 그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72:10, 개역)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를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72:11, 개역) 만왕이 그 앞에 부복하며 열방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

(72:12, 개역)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72:13, 개역) 저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72:14, 개역) 저희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속하리니 저희 피가 그 목전에 귀하리로다

(72:15, 개역) 저희가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저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저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

(72:16, 개역) 산꼭대기의 땅에도 화곡이 풍성하고 그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로다

(72:17, 개역) 그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니 열방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72:18, 개역) 홀로 기사를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72:19, 개역)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

 

 

솔로몬의 시라고 합니다.

제왕 시로써

왕을 칭송하는 노래이다는 겁니다.

왕이 하는 일을 찬미하는 겁니다. 왕의 기능 말입니다.

 

그런데 솔로몬 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지혜 아닙니까?

 

그 지혜가 바로 누구에게 누구를 대상으로 쓰여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의사는 건강한 자에게 필요가 없습니다.

즉 환자에게만 필요한 기능으로써의 의사이다는 겁니다.


지혜는 그럼 누구에게는 필요가 없을까요?
부요한자 권력자 지식자에게는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신을 변호할수 없는, 그 어떤 도움을 못 받는 자에게만 해당 된다는 겁니다.

지혜를 가지셨나요? 그럼 주변으로부터 도움을 못 받고 있는 자에게 찾아가서

스스로를 변호치 못하는 자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시면 지혜의 기능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는 겁니다.

 

돈을 받아야 하거든요.

 

또 하나 추가를 할까요?

 

목자는 누구에게만 필요할까요? 목사 말고 목자!!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게만 필요한 목자인 겁니다.

 

그럼 누구에게는 필요 없을까요?

99마리 양에게는 필요가 없는 목자입니다.

 

제가 왜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고 하니

 

저런 기능을 하나로 묶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본입니다. 돈입니다.

이제는 지혜자도 필요도 없고, 목자도 필요없고, 의사도 필요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로지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것들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럼 불가능한게 아니라 가능한 것 아니냐?

돈만 있으면 다 되니까 가능한 거네!!!!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관계성을 맺을 수 있는 관계자가 없다는 겁니다.

 

즉 이제는 기계가 그런 기능을 수행하는 시대가 되어버렸기에

기계랑 관계를 맺을 수는 없잖아요?????

 

물론 기계랑도 결혼을 하는 자들이 막 생겨나지만 말이죠.

바이센테니얼맨 이라는 영화에서 그러잖아요.

얼마전에 서프라이즈 였나? 에펠탑과 결혼한 여성도 있던데

주로 여성이 그런 특이성을 보이는데

여자 잘못이 아니라 섬기는 남자가 없어서 그런 겁니다.

남자 잘못인 거지요. 즉 사회구조가 그렇다는 증상으로 돌출된 겁니다.

 

더 희한한 일은

역시나 마찬가지로

이제 가난한 자도 없다는 겁니다.

또 환자도 없다는 겁니다.

또 잃어버린 양 한 마리도 없다는 겁니다.

 

고로 지혜자도 없고

의사도 없고

목자도 없는 세대입니다.

 

상대적으로 맞물린 짝꿍 기능이 없는 거죠.

 

에이 아직까지는 안 그렇다 조금 남아 있다.

앞으로 미래에는 로봇세대가 되면 사람보다 로봇기계가 그런 기능을 담당할테니

그 말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멀었다.

너무 앞당겨서 미리 말하지 말아라 라고 하시겠지만

 

저는 미래나 현재를 말하는게 아니라

이미 2천년 전의 예수님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목자도 없고,

지혜자도 없고,

의사도 없는 세대를 보시고 말입니다.

 

(9:36, 개역)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6:34, 개역)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얼마나 많은 율법사나 랍비, 선생이지요. 아무리 많아도 섬기는 자들이 아니라

약탈자들 뿐이다는 겁니다. 완전히 무시해 버리시는 거죠.
오늘날도 역시나 마찬가지입니다.

고맙게도 있어도 안됩니다. 예수님 혼자면 되니까 말이죠.

남 섬길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으로부터만 섬김 받아라 라는 겁니다.

나를 섬기겠다고 하는 놈들 결국 다 이용해 먹을려고 다가올 뿐이니

아예 기대하지 말아라 라는 겁니다.)

 

 

로봇 세대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섬기는 자가 없다는 겁니다.

 

메시아가 없다는 겁니다.

구원자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시고 다 완성하심으로써

약속하신 성령을 주시사

 

죄인을 새롭게 만들어서 구원자를 말씀하시고

환자를 새삼스럽게 만들어서 의사를 말씀하시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의도적으로 만드셔서 목자를 말씀하시고

어리석고 미련하고 궁핍하고 가난한 아무도 도움주지 않는 자를 새로 만들어서

지혜자의 지혜를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전히 불가능입니다. 단절입니다.

왜냐하면 죄인 환자 세리 창녀 잃어버린 양 한 마리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 탕자 등등은

우연 아닌 우연으로 발생되는 자들이지 고정적인 자들이 아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원자. 의사. 이웃, 목자, 아버지가 우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포착불가이며. 기존의 사상으로도 어떤 연결점이 없는 되는 겁니다.
이 말도 이미 발언해 버린 이상 과거의 원인이 되어버리는 것이겠죠.

 

가능한 의미가 아예 없다는 겁니다.

차라리 가능성을 찾을려면 로봇세대처럼 그런 기능을 찾으세요.

모조리 예수님 자기 뜻에 달려있다는 겁니다.

주님 쪽에서 찾아오심이지 인간쪽에서의 찾아냄은 의미 없는 겁니다.

 

왜 제가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예수님이 복음을 선포하시기 전에 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는고 하니

 

메시아에 대해서 말씀하시고자 함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미 메시아가 인간들에게 특히 유대인들에게 있다는 겁니다.

기존의 메시아 사상입니다. 악마 사상인거죠. 유대인의 신앙이죠.

 

그 메시아의 특징은 마귀가 장악한 인간에게 심겨진 사상입니다.

메시아는 이런 일을 해야만 한다는 자격조건을 마귀는 예수님에게 요구합니다.


너는 이런 메시야 맞니?

 

첫 번째 돌을 떡 덩이 되게 하라!!!

가난한자 궁핍한 자를 도와 주라 라는 겁니다.

 

우와 시편 72편과 똑같죠? 왕의 조건 아닙니까!!!

이런 왕만이 통치 하게 해 달라는 내용이 시편 72편 아닙니까?

불교도 다 해석할 줄 아는
그런데 시편은 원수를 거치지 않으면 그런 해석 밖에 모릅니다.

마귀는 시편의 내용을 운운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말입니다.

 

두 번째 성전에서 떨어쳐도 다치치 않고 천사들이 두 손을 받도록 기적을 베풀어라 라는 겁니다.

 

(4:6, 개역)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91:9, 개역)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91:10, 개역)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91:11, 개역)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91:12, 개역)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피난처가 맞다면? 구원자가 맞다면 이렇게 하라 라는 겁니다. 기적

종교가 하는 일을 하라 라는 겁니다. 사람들을 구원하는 천국 보내기 운동을 하라는 거죠.

즉 사람을 사랑하라 라는 겁니다. 종교는 사랑을 말하니까 기적을 말하니까

 

세 번째 조건은 정치적인 모든 통치를 하는 권세를 쥐는 자가 되어라 라는 겁니다.

 

오늘 시편 72편의 왕의 조건과 같습니다.

이것을 세상에나 마귀가 요구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요구하는 방식입니다.

 

너는 이런 메시야 맞느냐 라고!!!

 

결과적으로 보면 나 예수는 그런 메시아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메시아의 조건을 갖출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귀가 구약의 사상을 종합해서 말한 겁니다.

이것은 곧 그 당시 유대인이나 오늘날까지 모든 인간이 외치는 메시아의 조건입니다.

 

그런데 이런 메시아의 조건 즉 구약에서 말했던 그 조건을

주님 스스로가 파기 하냐 말이죠. 구약이 엉터리가 되느냐 말이죠.

 

마귀가 괜히 걸고 넘어지는게 아니지요.

당신이 말한 메시아의 조건이다는 겁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왜 예수님은 이런 메시의 조건을 거부하시는 것일까요?

마귀가 괜히 마귀가 아닙니다. 예수 당신이 내걸었던 메시아의 조건 아니냐 라는 겁니다.

 

참 어렵죠

아니 불가능할 정도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해답을 찾으시겠습니까?

 

저는 최근에 여러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마귀가 단순히 저렇게 걸고 넘어지는게 아닙니다.

예수 당신은 모순덩어리 아니냐 라는 것을 걸고 넘어지는 겁니다.

마귀도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거죠.

 

오늘 시편 72편에 나오는 대로 예수님을 과연 메시아로 볼수 있는가 라고

얼마나 유대인들이 평가하고 점검하고 또 점검하고 수많은 테스트를 하지 않습니까?

 

과연 맞던가요? 근처도 못가죠.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인간들이 내거는 메시아의 조건을 거부하시는 이유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가난한 자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도움을 주는 지혜자도 필요가 없어요.

환자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의사가 필요없어요.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목자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자 이제 눈치 채셨습니까?

 

그러나 인간은 포기 하지 않습니다.

마귀 또한 포기하지 안습니다. 메시아를 말이죠.

 

우와 우리 보다 더 믿음 좋은거 아닌가요?

 

믿음 끝내주죠

 

마귀와 인간의 공통점은 기존의 것을 가지고서 메시아와 연관 시킨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조건에 맞지 않으니

차라리 그냥 죽여 버리는 겁니다.

가룟유다가 이스라엘의 해방 독립을 원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은 전혀 안맞다고 확인하고 확인하고 재차 확인해서

팔아버리는 겁니다.

 

당연하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니까 말이죠.

괜히 헛된 소망을 가진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나의 구원과 상관이 없습니다.

나의 구원이라는 헛된 소망을 품지 마세요.

 

예수님은 인간 구원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오신 겁니다.

 

자 그럼 인간과 마귀가 내세운 메시아의 조건은 틀린 겁니다.

 

아무리 시편이나 구약의 내용을 끌어와도 어차피 틀린 겁니다.

문자를 백날 끌어모아서 맞잖아 라고 성경 구절 하나 하나를 나열해도 틀렸어요.

 

꼭 그럴 때 보면 안식교를 그렇게 이단으로 몰아놓고서는

자신들도 안식교와 다를바 없는 문자를 내세우더라 말이죠.

성화론자들도 마찬가지로 안식교와 다를바가 없어요.

문자주의 아니다고 하고서는 문자주의 못 벗어나요.
주일성수교 이거든요. 자기들도 안식교, 신천지, 안산홍과 똑같은 이단들입니다.
이단 아닌 한국교회가 없어요. 한국교회 모조리 다 이단 입니다.

 

그냥 우리는 못 벗어납니다. 라고 시인하면 그만인데

아니다고 하니 더욱더 얽매이는 겁니다.

 

인간은 문자나 언어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럼 무엇으로 소통할래요?

 

문자를 볼 줄 안다고 하니 소경인 셈이고

정작 문자를 못 보는 실로암 소경이 소경이라고 고쳐달라고 하니

비로소 제대로 보게 되는 겁니다.

 

자 여기서 이미 답이 다 나온 것이지요.

 

저는 문자나 언어에 갇혀버린 자입니다. 안식교와 다를바 없는 이단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시사 고쳐주세요 라고 하시면 됩니다.

 

자 여기서 새로운 메시아가 발생합니다.

그것도 우발적으로 말입니다.

 

저쪽의 메시아 조건은

기존에 가난한 자나 등등이 있잖아요? 거기에 딱맞는 자로써 짝꿍의 기능인 메시아가 조건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거부하시는 이유는

어디 어디 어디 가난한 자가 어디 있는데 라고 하시는 겁니다.

가난한 자가 없으니 메시아도 없는 거죠.

 

그럼 또 마귀가 가만히 안 있죠. 에이 그럼 메시아는 없는거네 라고 반드시 나오겠지요.

그것을 꼬투리 잡을테니까 말이죠.

물론 이미 구약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노골적으로 스스로 들통내듯이 나오지는 않겠지요.

율법을 끝까지 잡고 있어야 하는 역할이니 말입니다.

 

즉 마귀가 구약대로 봤다고

유대인들이 구약대로 메시아 조건을 따졌다고 하지만

 

참 쉽게도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구약을 볼 수 있는 눈을 준적이 없습니다.

다윗에게 줘서 시편을 적도록 했는데

다윗이 적은 시편을 봐도 모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백날 가난한 자 라는 조건을 백날 갖추어도

메시아는 없어요.

 

자 이렇게 보면 그들은 구약을 단 한번도 본적이 없는 거죠.

그러니 구약이 틀린게 아닙니다.

구약은 예수님만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백날 구약 찾아보세요 예수님 나오나?

그러니 유대인을 이해해 주자 말이죠.
본적이 없으니까 당연히 엉터리 메시아 조건을 요청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소경이니 말입니다.

구약은 분명 예수님만 증거했고
다윗은 시편에서 예수님만 말했고, 기록했는데

그들은 단 한번도 구약에서 예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봐도 예수님이 안 보입니다.

그러니 눈이 있어도 볼수 없는 소경임을 고백해야 할 판국인데

아무도 소경이다고 말하는 자가 없습니다. 어두운 눈이다고 말하는 자 말입니다.

소경이 없어요.

죄인이 없어요.

그러니 당연히 구원자도 없고, 메시아도 없는 겁니다.

그저 교리만 뽑아내어서 만들어낸 겁니다. 자기조직의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럼 유대인들은 반발하지요. 그래 없다 치자

가난한 자도 없으니 예수는 메시아 아니네 라고 말이죠.

어떻게해서든 예수님이 메시아 되는 꼴을 그들은 도저히 용납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가짜 예수를 만들어 자기구원만을 목적으로 하는 탐욕집단이 한국교회이거든요.
한국 기독교(개신교), 천주교, 불교는 뭐 두말할 것 없구요.

유대교가 괜히 있는게 아닙니다. 그들을 욕해놓고서는 그대로 따라할 뿐입니다.
한 발치도 못 벗어납니다.


그럼 가난한자도 없으니 메시아도 없는거네?

아니지요 가난한자를 새롭게 만드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 순간 순간 새로운 메시아로써 역동적으로 가난한자를 발생시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발적인 사건인 십자가입니다.

 

헤헤헤 십자가가 무슨 메시아와 연관되어 있느냐? 라고 비웃잖아요,

 

바로 그겁니다. 비웃어야 됩니다.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비웃으면서 그들은 팻말을 달았습니다.

그런데 진짜 유대인의 왕 이였습니다.

이 부분을 제가 어머니께 니체의 신은 죽었다 라는 예화를 들어서 설명했습니다.
그 동안 자주 이야기 해서 알아먹으셔서 제가 이 부분에 적용을 하니까
아주 기쁘게 웃으셨습니다.

비웃으면서 그래 니 말대로 유대인의 왕 이라고 하렴이라고 비웃었는데
거짓으로 몰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진짜 였던 겁니다. 실상입니다.
고로 도리어 허구로 밝혀진 것은 인간 쪽에서의 비웃음이 허구로 밝혀진 겁니다.

비웃음이 웃음이 되는 가로지르기, 전복, 채널돌리기, 웃음, 기쁜소식이 된 겁니다.

결국 유대인은 없었다는 겁니다. 유대인 아닌 자들이 유대인의 탈을 쓴 거죠.
유대인의 왕이라고 비아냥 거리면서 예수님을 죽였거든요.

유일한 유대인은 예수님 뿐이거든요.
진짜 유대인은 예수님 혼자 였습니다.

그 마지막 남은 남은자 유대인인 예수님을 죽여버려야
그 유대 라는 의미를 장악하는 식으로 가짜들이 활개를 친 겁니다.

 

지난 시간에 언급했지요 하하하 성전을 사흘만에 짖는자여? 꼴 좋다!!! 라고

 

즉 유대인이 없는데 새로운 유대인을 만들어내시는 유대인의 왕입니다.

십자가에서 잉태하여 해산의 수고로 낳은 자만이 유대인이 되는 겁니다.

다말이 십자가에서 시아버지 유다를 낳았거든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윗을 낳았거든요.

그러니 다윗은 예수님 외에는 말한적이 없는데

그 시편을 보면서도 유대인은 단 한번도 예수님을 본 적이 없는 겁니다.

 

결국 유대인이 아니였다는 거죠. 그러니 구약을 보고서도 구약을 못 본 겁니다.

물론 그들은 우기지요 구약을 보는 자는 유대인들 밖에 없거든요.

네 맞아요 다른 민족은 구약을 본적도 없어요.
진짜 이스라엘이라면 보일텐데 가짜 유대인, 가짜 이스라엘이였던 겁니다.
즉 유일한 이스라엘은 예수님 뿐입니다.

자 유대인과 마귀가 예수님께 내거는 메시아의 조건에
정작 예수님은 메시아 조건 내세울게 아니라
가난한자가 있으냐 라고 역의 조건을 내세우는 겁니다.

죄인 있냐?

환자 있냐?

포로된 자 있냐?

갇힌자 있냐?

억눌린자 있냐?

고아 있냐?

과부 있냐?

나그네 있냐?

마음이 가난한 자 있냐?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 있냐?


없잖아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 어쨌다고요,

구약성경을 보는 민족이 유대인 밖에 없으니

구약을 제대로 봤다 라고 우길수 있잖아요!
증거도 없이 말입니다.

아무도 안 보는 구약을

유일하게 봤다는 이유로 자동적으로 구약을 안다? 
유대인만이 봤으니까 구약을 안다?

구약을 아는 민족은 유대인 밖에 없다는 자동적인 공식이

바로 부조리이다는 겁니다.


이 부조리 방식을 예수님이 역으로 그대로 펼칩니다.

메시아 조건 따질게 아니라
너희들이 내세운 가난한자가 있으니까
가난한 자의 조건이 맞으니까 메시아의 조건을 따져보자 라고 할게 아니라

가난한자가 과연 메시아에 맞는 가난한자 맞냐 라는 겁니다.

의사에게 맞는 환자 맞냐 라는 겁니다.


안맞으니까 일부러 의도적으로
이방인에게만 찾아가셔서 유대인의 대표인 바리새인 코 앞에서 긍휼을 베푸시고
함께 먹고 마시면서 심지어 술까지 한잔 크 ~~~~~ 어울리고 함께 하니까
마귀 보란듯이 열 받도록 하시는 겁니ㅏ.

즉 유대인들의 그 말도 안되는 엉터리조건인 부조리에
더 더 더 심한 부조리가 등장하니까

그들이 다 걸려 넘어지는 겁니다.

 

이스라엘 잃어버린자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 유대인이 정작 예수님을 영접한 적은 없고
(아니 영접할 수가 없지요. 원수들의 친구인데, 세리와 죄인의 친구인데!! 
예수님을 영접했다간 졸지에 유대인들 자기종족으로 부터 공격받는 원수가 되는데?
도저히 용납 못하는 철천지 원수인 사마리아인과 어울리는데!!!)

 

오히려 개같은 이방여자 그것도 귀신들린 딸의 어미가

네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래기로 살지 않습니까?

 

졸지에 새로운 유대인이 생겨버린 겁니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잃어버린 양 한마리가 졸지에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겁니다.


유대인이 없는 가운데

우발적으로 말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졸지에
예수님 기준으로 새로 발생합니다. 
우연히 말입니다. 즉 우연 없는 우연으로써 더 필연화된 유동적 고정(동결)성으로 말입니다.

 

우연 없는 우연으로 말입니다.


즉 십자가로 확정되었다는 겁니다.
더 이상 이것보다 또렷하고 명료한 것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다들 유구무언 입니다.
 

오늘 시편 72편 식으로 하면 우발적으로 새로운 메시아로 등극하십니다.

그리고서는 메시아에 걸맞는, 신랑에 걸맞는, 신부와 같은 존재

 

왕에 걸맞는 나그네(백성이 아닌 나그네 이방인)

남편에 걸맞는 과부(초혼이 아닌 전남편 율법이 죽은 자유케 된 과부=전남편이 죽은)

아버지에 걸맞는 고아(기업도 없도, 아버지도 없는, 어떤 누구도 보호자로 나설수 없는 고아)

구원자에게 걸맞는 포로된 자

지혜자에게 걸맞는 가난한 자 궁핍한 자를 새롭게 만드시는 겁니다.

 

마음이 가난한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새롭게 만드시는 겁니다.

(마 5:1, 개역)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 5:2, 개역)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 5:3, 개역)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4, 개역)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5, 개역)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6, 개역)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 5:7, 개역)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8, 개역)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9, 개역)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10, 개역)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5:11, 개역)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개역)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그런데 모든 인간들이 달려듭니다. 저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자가 아닌데요 라고 반발합니다.

어찌 죄인의 집에 거하면서 먹고 마시느냐 라고 오히려 따지는 식입니다.

마귀가 거부하는 마음이 가난한자인 세리와 함께 먹고 마시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가난한자가 아닌데
탕자를 마음이 가난한자라고 일방적으로 편애 편파 해석을 하니까

그 해석에 다들 반발하거나, 실족하여 걸려 넘어지는 겁니다.

저 사람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아닙니다 라고 하는 바로 그런 자와 함께 먹고 마시는 겁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가 어떻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이냐 라는 거죠.

양탈늑대무리의 권씨가 끝까지 더 이상 죄 짖지 말라고 하셨다고 히스테리를 팍 부리는 이유도
다른게 안보이는 겁니다. 그것만 보이는 겁니다.
끝까지 행함을 주장합니다. 마치 메시아의 조건을 따지는 것과 같은 식입니다.
가난한자가 없는데 무슨 메시아냐 말이죠.

번제와 제사가 아닌 자비와 용서인데
끝까지 글자를 얼마나 크게 확대해서 그 정도로 자기 속의 악마성이 들키다 보니
그렇게 안색이 변하듯이 화를 내는 겁니다.

하다 하다 안되니까 막 울어요.

때려죽어도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아니다는

예수님이 새롭게 만드시는 궁핍한 자에 대한 극구 반발인 겁니다.

그들은 죄를 짖지 않아야 그 조건에 따른
그 원인에 따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된다는 식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자는 없어요, 불교도 마찬가지이고

유대인도 마찬가지이고

성화론도 마찬가지

모든 종교 모든 인간이 이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날수가 없는 겁니다.
 

자 이런 식으로

저들이 반발하는 

가난한자도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상대적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마귀가 변호하듯이 말하는 그 가난한자는 사실상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가난한자와 짝을 이루는 그런 메시아가 없기 떄문입니다.

그러니 우상이지요. 탐욕이지요.

탐욕을 유대인에게 심은 겁니다.

마귀가 괜히 마귀가 아니지요???
가장 거룩하게 보이는 믿음이 사실상 탐욕이였습니다.

가장 거룩하게 보였던 행함이 사실상 살인의지였습니다.

 

기존에 우리가 해석하는 저 사람은 가난한 자야 라고 다들 누구나 보아왔던 그 가난한자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난한자와 연결을 시킬수가 없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메시아 인데
그들은 돼도 않는 엉뚱한 자를 가난한자로 설정해서
그 원인에 따른 메시아를 요구하는 겁니다.

 

인간들 자기들 끼리 설정한 가난한자요. 거기에 걸맞는 메시아를 주장하는 겁니다.

 

결국은 비로소 따로 국밥이였다는 것이 밝혀지는 거지요.

 

인간들이 설정한 가난한자와

예수님이 새롭게 만들어내는 가난한자가 따로 따로 국밥처럼

전혀 그 어떤 연결점이 없이 공통점이 없이 각자가 따로 설정해서

 

둘의 차이의 간극을 벌리더라 말이죠.

철저한 단절입니다. 그 어떤 연결점이 없으니까 말이죠.

불가능성인데 가능성으로 개방으로 사기를 친게 들통난 겁니다.
갈라지는 거죠.

 

그럼 인간들이 설정한 가난한자는 어떤자입니까?

 

일단 예수님 당시를 살펴보면

 

인간들이 설정한 가난한자는 일단 하나님 여호와를 믿는 자이어야 합니다.

절대로 이방인은 될수 없다는 조건이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거지요? 
일단 제일 먼저 탈락, 이방인은 무조건 탈락!!

그리고 로마 앞잡이 일본앞잡이 같은 매국노 세리는 탈락입니다.

이래 저래 탈락 시키다 보면 자기들이 가장 유리한 쪽으로 자기 마음대로의 설정에 따른 자가 남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우하하하하 참 기가막히게 속이죠.
그런데 이 방법 안 써먹는 종교 어디있나요? 기독교는 더 심해요!!!

결국은 자기 생각에 자기와 가까운 자로 남는 겁니다. 곧 자기자신이지요. 

그것을 고정화 하는 겁니다. 필연화!!

자기자신을 예정하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예정론 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참 기가찬다고 웃는 거지요.

그 예정에 십자가를 예정해 버리면

감히 자기들 예정이 건방지게 되어버리니까 십자가를 취소 시킬려고 달려들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는 그래서 거리끼는 걸림돌입니다. 자기들 손으로 죽여버렸는데
도리어 그것이 진짜 유대인의 왕이였다는 증거가 되어버리니까 말입니다.

 

예수님이 새롭게 설정한 가난한자는 우와 비밀이 되어버려서 감추어졌습니다.

즉 고정적인 의미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때 그때 달라요

그래서 십자가의 사건의 충돌에서만 비로소 등장합니다.
이단 예수를 몰아낼려고 했던 사울이 졸지에 
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 이다 라고 말하는 인물을 만나버리게 되자
졸지에 가난한자가 태어납니다. 그 순간 말입니다.

분명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 맞는데
갑자기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로 태어납니다.

고정적인 동결은 예수님 뿐입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죽었거든요.
그런데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3일만에 다시 살리시사 주가 되게 하셨다는 겁니다.
주가 되어버린 고정적인 동결에
이제 가난한자는 유동적이게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처럼 저런 엉터리 자기들 설정인 가난한자 설정을 내세우는 순간

그 순간에 상대적인 존재들을 없는데서 갑자기 우발적으로 일으켜세우는 겁니다.
누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필이면 예수님을 시험하고 싶은 순간에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가

우발적으로 기가막히게 발생하는 겁니다. 싱대적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거꾸로 본 겁니다. 자기들을 들추어낼려고 우발적으로 발생시킨것을
오히려 자기유익이 되는 기회로 본 겁니다.
미끼를 제대로 물어서 드디어 말려드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있나요?

아무리 몸을 뜯어 말려도 달려들도록 되어 있습니다.

굶주린 배를 채울 길이 없거든요. 마귀인데?????

기가막힌 미끼를 주님이 던지신겁니다.

 

그러니 다시는 죄를 짖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닌 겁니다.
너는 아무도 정죄 못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이다 라는 일방적인 편파 편애 해석입니다.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성화론자들의 특징이 불안하기 떄문에 행할려고 합니다.
그 결핍을 직접 본인이 채우는 식입니다.
그래도 배고파요
의문의 증서로만 보고 있기 떄문이지요.

전남편이 죽은 줄도 몰라요!!!
 

그때 고순간 그 순간이 아닌 고 순간 우발적으로 발생시키는
상대적인 따로 국밥의 설정(미끼)이다는 겁니다.

고정적이지 않아요. 우발적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마귀의 정체가 드러날 것 아니겠습니까?

유대인은 예수님의 정체를 들통내겠다고 달려들다가

자신들이 마귀인 것이 드러나도록 말려드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들의 가난한자 설정과 반대되는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을 안 믿어요!!!!!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죄 지을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혼자 지을수 없거든요.

진짜 죄는 율법 뒤로 숨어버린 머슴아 들이 아닙니까?
돌삐를 들었던 머슴아들

이혼증서를 요구하는 머슴아 들

 

그리고 이방인 중에 또 다시 분절이 됩니다.

이방인 여러 과부 중에 한 과부

이방인 여러 문둥병자 중에 한 문둥병자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가난한 자가 고정적인게 아니라 계속 변이와 이동을 반복한다는 겁니다.

차이의 반복이니 아 이사람은 영원한 가난한 자 이다 라고 고정화 될 수 없는 겁니다.

순간 순간 발생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불안하겠네? 아니지요 고정적인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만 있으면 된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말이죠????

내가 죽을 필요가 없어요.
내가 행할 필요가 없어요.
어차피 흐릿하거든요. 모호해요.

이웃사랑 하지 마세요 라고 제가 누누히 주장하는 이유는
이웃설정도 엉터리이지만

그거 해 버리면 모호한것을 붙잡고 평생을 잊지 못하는 겁니다.
허구인데
또렷한 사랑이 아닌데
흐릿한 사랑인데
우상숭배하는 겁니다. 이웃사랑을 실천한 나를 말입니다.
유대인들 전체가 여기에 빠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들이 설정한 가난한자는 엉터리이다는 거죠

이웃사랑을 네 몸 같이 하라 라고 했을때에

이웃에 대한 설정을 인간들은 그야말로 성경말씀을 대 놓고 어길려고 작정한듯이

자기들 멋대로 이웃이라고 설정하는 겁니다.
물론 그들은 때려죽어도 그렇게 안여깁니다. 왜냐하면 다른 민족에게 없는 구약이 있거든요.
괜히 붙잡은 거에요
구약이 유대인을 붙잡으면 다윗과 같이 예수님만을 볼 것인데
자기가 구약을 붙잡고 있으니 못 보는 겁니다.
말씀이 나를 읽어야지
내가 말씀을 읽으니까 
그 어떤 민족도 읽지 않는 말씀을 자기민족만 읽으니까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진 겁니다.

원수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자가 세상에 어디있습니까
?

세상에 단 한 사람도 그런 자는 없습니다.

 

그러니 원수 설정도 엉터리요

이웃 설정도 엉터리요

그러니 거기에 따른 메시아도 엉터리

사랑도 엉터리이다는 거죠.

 

돈이 없거나

재산 재물이 없는 자가 가난한자가 아니라

아프리카 난민

최근의 시리아 난민

백날 도와 줘 보세요!! 감당할 수가 있는가?

가난한 자는 나랏님도 해결못한다 라고 하는 이유는

임금이 가난한자를 해결하기 위해 세워진 기능임에도 불구하고 

해결안되는 불가능성이다는 겁니다.

정작 딴 짖만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럼 진짜 임금은 자기가 임금이 아니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짜 임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임금 본인이 가난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남 가난한자를 도울 생각 말고

임금 본인이 가난한자이다는 겁니다. 솔로몬이 그래서 지혜를 얻은 겁니다.

지혜를 달라고 한 겁니다. 
자기에게 없으니까
자기 아버지도 똑같죠.
아무리 봐도 자기에게 정직한 영이 없다고 비로소 본 겁니다.
그래서 달라고 한 겁니다. 성령 없으면 나 죽어요 라고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아침마다 부르짖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졸지에 발생한 겁니다.

임금임을 포기 하지 않는 임금은
성도임을 포기 하지 않는 성도는 

곧 우리는 딴 짖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웃사랑 포기하세요
도리어 예수님에게 제발나의 이웃이 되어달라고 하세요

내가 임금이 아니라 내가 남을 도와주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도움 받아야 할
내가 예수님으로 부터 용서 받아야 할
탕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웃설정 가난한자 설정은 기가막힙니다.

괜히 소유물이 많이 않고 너무 적어서 가난한자가 아니라

우리 마음을 찔러 쪼개는 입장에서의 가난한자이다는 겁니다.

오히려 남의 돈을 착취하는 세리를 가난한자로 설정해 버리니까

이건 뭐 인간들이 도저히 용납을 못하는 선을 넘어서는

아예 자유자재로 넘어서서 널뛰기하듯이 뛰어넘어버리는 겁니다.

(히 4:12,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내가 말씀을 읽은 적은 없습니다. 말씀이 나를 읽어서 찔러 쪼개는 겁니다.
나는 단 한번도 나를 찔러 쪼갠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고정적으로 가난한자라고 설정한자가

괜히 헛된 것을 설정하는 바람에 더욱더 분노케 된다는 겁니다.

차라리 안했으면 되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그야 말로 치명적입니다.

이런 치명적인 가난한자를 설정하는 인간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가난한 자가 결국 예수님 본인이다는 겁니다.

다들 고개를 돌려버릴 정도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자야 라고 설정해 버리면

예수님은 그렇게 말하는 너의 시선에서 도저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를

구원하시는 방식으로 가난한자를 설정하심에 있어서

나의 가난한자 설정이 엉터리임을 지적하신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던 것이 도리어 올무가 되어

내가 싫어했던 자를 구원하심으로써 거봐 거봐 너는 버림받아 마땅하잖아 라는

알리바이를 만들어서 맞물리게 말려들게 만들어 버리는 거죠.

 

자 이런식이니

 

누가 감히 가난한자를 자기 멋대로 설정하냐 말이죠!!!

기존의 많은 사람들이 저 사람은 가난한자가 맞다고 아무리 규정을 해도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전혀 전혀 전혀 가난한 자가 아니다면 어떻게 하실래요?

 

그런데 인간과 마귀는 희한하게 합작이 되어서 끝까지 가난한자라고 우긴다는 점에서

예수님이 메시아 되심 곧 가난한 자를 위한 메시아 되심을 거부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우리 속에 심겨진 엉터리 메시아의 조건을 의도적으로 거부하시는 겁니다.

 

따로 만드시는데 전혀 우리가 설정한 의미와는 단 한 개도 맞는게 없을 정도로 만들어 버리니

비로소 인간이 헛된 것을 구하게 되는 것을 밝히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것이 지혜자의 섬김입니다. 우리 속의 악마적 속성까지 다 들추어내시는 지혜입니다.

 

어떻게 하실래요?

섬김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거부하시갰습니까?

 

백이면 백 거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마귀에게 갇힌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밝히시는 겁니다.

 

우와 우리는 지혜도 모르고

가난한자가 뭔지도 모르고

궁핍한자가 뭔지도 모르고

 

이웃도 자기 마음대로 설정해 버리고

말씀도 자기 멋대로 지켰다고 우기고

하여튼 우리는 뭘 해도 죄 밖에 없는데

어떻게 말씀을 한 개 정도는 지켰다고 우길수가 있냐 말이죠.

 

도대체 아는 게 뭐가 있느냐 라고 한탄을 해야 하는 입장 뿐이다는 겁니다.

 

없으니까 지혜자가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필요 없다고 죽인 겁니다.

 

딱 맞아 떨어지죠 !!!!

 

우리는 지혜를 구한 적이 없어요.

가난한 자만이 지혜를 지혜라는 인물 곧 지혜자를 구하거든요.

? 상대적으로 우리는 도움받아야할 정도로 갇혀버린 상황이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성전에 두 사람 중 한 사람인 세리는 머리를 못 들고

성전 구석에서 그저 불쌍히 여겨달라고만 할 뿐이다는 겁니다.

뭘 잘했다고 성전 중앙에서 이레에 두 번 금식, 십의 이조 드렸다고 우기나요>

과연 그런 사기가 먹혀들까요?

여지껏 먹혀 들다가

예수님에게 딱 걸려 넘어지는 겁니다.

그 동안 아무에게도 걸려들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사기를 쳐도 존경받았는데

예수님에게 딱 걸린 겁니다.

 

과연 세리처럼 긍휼을 바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희한한 말씀을 하십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졸지에 세리가 되신 겁니다.

 

이것이 실상이요 명료한 또렷한 것인데

 

이상하게 모호하고 흐릿한 허구를 쫏는 모든 인간에게는

가난한자도 없을 뿐더러
갇힌자가 없어요.

포로된 자도 없어요.

눈먼 자도 없어요.

 

없는데도 불구하고 문자가 구약에 적혀 있으니까

말만 하는 겁니다.

 

주문 외우듯이 중언부언하듯이

남들에게 보일려고 말입니다.

 

거기에 예수님이 왜 속아 넘어가야 합니까?

 

가난한 자는 이제 없지롱 예수 너는 엉터리 맞지롱 이라고 저들이 비로소 외칠때에

 

짜잔 하고 새롭게 포로된자 갇힌자 눈먼자를 새롭게 만드시는 겁니다.

거기에 맞는 메시아 기능 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윗이 노래했듯이

솔로몬이 예수님을 보고 외치는 겁니다.

즉 다윗도 솔로몬도 자기 자신이

가난한자이지

지혜자가 아니다는 겁니다.

 

분명 문자적으로 시편 72편은 솔로몬이 이런 지혜의 왕

곧 가난하고 궁핍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베푸는 지혜자 라고

우리는 이 시편 72편을 통해서 보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는 시편 72편에 백날 들따 봐도 없는 예수님을 쳐다보고서 노래한다는 거죠.

 

그 예수님 앞에서 솔로몬 자신이 가난한 자요 궁핍한 자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다윗 본인이 원수이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자 백날 분석해 보세요 그런 내용이 나오는가? 없잖아요.

 

그런 내용은 문자로 안되어 있고 빈공백화 되어 있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것은 성령의 몫으로 보여주시지

우리는 볼 자격도 없고

알려고도 안하고

그저 육의 탐욕대로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지키겠다는 탐욕으로써만 말씀을 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눈이 어두운 소경이라고 고쳐달라고 해야 할 판국인데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이레에 세 번 시편 읽고 쓰기를 하기 바쁜 판국에

그러니 우리 눈이 소경이라고 외칠수가 있나요?

 

성경쓰기 하는 것도 오래전에 전국적으로 유행하던데!! 완전히 미친놈들이지요.

뭘 해도 죄이기에 그냥 혼자 하면 될 것을 이것을 이벤트화 프로그램화 할 정도이다는 겁니다.

타인의 욕망이 전이가 되어 타인의 욕망을 쫏게 된 겁니다.

 

지금 솔로몬이나 다윗은 자신이 소경이요 벙어리라고 노래하고 있거든요.

역설적이지요. 벙어리인에 어떻게 노래 합니까?

소경인데 어떻게 글을 적어서 시편 72편으로 적을수 있나요????

 

그래서 성령으로 기록된

아무도 해석 못하는 시편 72편이다는 겁니다.

아니 문맹자가 아닌 이상 시편 72편 왜 못봅니까?

다들 읽을줄 알고 무슨 의미인줄 아는데!!!

 

아닙니다. 모릅니다.

쥐뿔도 아는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진짜 아신다면

가난한 자가 누구입니까?

그럼 지혜는 누구입니까?

대답해 보세요

 

성령으로 기록된 비밀 기록입니다.

 

주의 책에 기록된 가난한자가 누구인지 말입니다.

주의 책에 기록되지도 않은 가난한자 말고요!

 

시편에서 말하는 원수가 누구인지를 오늘날까지도 해석 못하는, 모르는 판국인데

 

시편 72편에 나오는 궁핍한 자를 억압하는 자는 과연 누구이냐 라는 겁니다.

 

억압자가 있기 때문에 궁핍한 자가 발생하는 것 아닙니까?

다들 자기 자신을 개입해서 감정이입을 하듯 주체이입을 해서 보도록 되어 있는데

그것도 기존에 있던 자기를 개입하다보니

자신을 억압하는 자로 넣을 이유가 없잖아요.

자기는 어디까지나 궁핍한자로 설정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가난한자도 결국 다 엉터리 설정이다는 겁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웃 개념을 다 자기 나름대로 설정한 이웃 설정을

예수님이 그게 무슨 이웃이냐 라고 지적 하시잖아요.

그런 이웃설정은 너희들이 욕하는 이방인도 다 할줄 아는 이웃설정 아니냐 라고 하십니다.

 

(5:43, 개역)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5:44, 개역)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5:45, 개역)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5:46, 개역)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5:47, 개역)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자기가 설정한 이웃이 무슨 이웃이냐 말이죠.

 

그러니 네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의미를 우리는 순 엉터리로 지키고 있는 겁니다.

지키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지킬려고 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이다는 겁니다.

 

어느정도로 불가능한가 하면

불가능한 단서가 붙었습니다, 네 몸과 같이 ~~~~

 

그러니 헛된 허구 곧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겁니다.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했으니

자기 욕심에 따라 이웃을 설정한 것에 대한 지적입니다.

 

그냥 주여 저는 여지껏 살면서 이웃을 생각해 본적이 없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시면 됩니다.

 

자 그래서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예수 믿지 마세요.

다시 한번더 강조 합니다. 예수 믿지 마세요.

인간이 믿는 예수는 모조리 다 마귀입니다.

 

자기가 설정한 예수일 뿐이다는 겁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자기가 설정한 메시아인 것처럼

 

자기들이 설정한 하나님이였다는 것이

 

예수님 때문에 들통난 겁니다.

 

마귀를 믿어놓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우기다가

예수님에게 딱 걸린 겁니다.

 

아니 누구 들통내겠습니까? 이것이 진정한 지혜 아닙니까?

 

결국 진정한 지혜가 등장하니 비로소 죽여버리는 겁니다.

? 안 죽이면 안되거든요.

자신들이 요구하는 지혜가 엉터리가 되기 때문에

엉터리가 아니다 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도 죽여야 합니다.

안그러면 자신들의 메시아 관이 다 깨지는 겁니다.
성전관, 율법관, 유대인의 신앙관이 다 무너지기 때문에
그것을 보호하고 사수하기 위해서라도 죽여야 합니다.

 

이런 숨어있는 내막까지 낱낱이 들통낼줄 모르는 지혜는 가짜입니다.
우리가 쉽게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만만한 지혜가 아니였던 거죠.
제대로 걸려든 겁니다. 지혜에게 말입니다. 인간의 믿음은 곧 인간의 꾀요 트릭이였습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을 장악한 원수 마귀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이유입니다.

 

인간은 마귀를 못 거친다는 점에서 무조건 엉터리일 수 밖에 없습니다.

뭘해도 다 가짜입니다.

믿음도 가짜

행함도 가짜

모조리 다 가짜입니다.

 

자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참 지혜는 우리 속의 악마성을 들추어내시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의미에서 궁핍한 자이거든요.

마귀 때문에 말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내 구원에 대한 탐심만 챙길려고

억지로 가난한자를 내 마음대로 설정하고

거기에 맞는 메시아도 마음애도 설정한 불법을 행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지적하는 지혜이다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이것 모두다 이미 계획된 시나리오입니다.

주의 책에 기록된 바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십자가와 안 맞물린적이 없습니다.

얼마나 고맙습니까?

십자가에 달리려 오셨다는 것이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는

마치 하나님이 버리고 저주하는 자에 대해

손가락질하면서

같은 하나님의 편에 섰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악마의 모습이였다는 것을

 

지혜는 역설적으로 지적해 주시는 섬김을 펼치시는 겁니다.

참 무능한 섬김이지요?

그런데 이 섬김이 비로소 가난하고 궁핍한자를 돕는 유일한 도움입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나?

나의 죄를 대신해서 지신

십자가 지신 주 예수님께로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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