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7 에브라임에게 치욕 당한 여호와, 그 수치를 되갚는 모욕적인 구원 (호 12, 7-14).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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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7 에브라임에게 치욕 당한 여호와, 그 수치를 되갚는 모욕적인 구원 (부정의 부정) (호 12, 7-14)
2024.12. 1. 

에브라임(이스라엘)의 수치보다 더 수치를 당하신 절대수치를 짊어지신 예수님의 십자가 완료(부정의 부정)

야곱을 쳐서 울게 만든 여호와 기념 칭호 (호 12, 1- 6)
호세아 2023 2024. 11. 9. 16:52
23-26 야곱을 쳐서 울게 만든 여호와 기념칭호 (호 12, 1- 6)

〈호세아 12, 7-14, 개역한글 구약성경 1267쪽, 찬송가 510장 새 457 겟세마네 동산의, 찬송가 338장 새 280 천부여 의지 없어서〉 

〈찬송가 510장 겟세마네 동산의, 새찬송가 457장〉 

1. 겟세마네 동산의 주를 생강할 때에 
   근심이나 걱정을 사양할 수 있을까 
   나를 항상 버리고 주를 따라 가겠네

2. 빌라도의 뜰에선 주를 생각할 때에 
   수치됨과 아픈 것 못견딜 수 있을까 
   길이 참고 묵묵히 주를 따라 가겠네

3. 갈보리산 올라간 주를 생각할 때에 
   나의 받는 괴롬을 비교할 수 없으리 
   십자가를 짐으로 주를 따라 가겠네

4. 무덤에서 부활한 주를 생각할 때에 
   환난이나 죽음도 두려울 것 없으리 
   승전가를 부르며 주를 따라 가겠네


〈가스펠; 그 때 그 무리들이 No.902 찬미예수 2000〉

그 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
망치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주님 눈물로 기도했네
귀중한 그 보배 피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비웃는 그 무리들 주의 옷 벗긴후에 주님 몸 깊이 찔렀네
귀중한 그 보배 피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주여 나의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그 때 구원을 이루셨네
마지막 피 한방울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찬송가 338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 새찬송가 280장〉 

1.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2. 전부터 계신 주께서 영 죽을 영혼을 보혈로 구해 주시니 그 사랑 한 없네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3. 나 예수 의지하므로 큰 권능 받아서 주 앞에 구한 모든것 늘 얻겠습니다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아멘


〈호세아 12, 7-14, 개역한글 구약성경 1267쪽〉 

(호 12:7, 개역) 저는 상고여늘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취하기를 좋아하는도다
(호 12:8, 개역)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호 12:9, 개역) 내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하게 하기를 명절일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
(호 12:10, 개역) 내가 여러 선지자에게 말하였고 이상을 많이 보였으며 선지자들을 빙자하여 비유를 베풀었노라
(호 12:11, 개역) 길르앗은 불의한 것이냐 저희는 과연 거짓되도다 길갈에서는 무리가 수송아지로 제사를 드리며 그 제단은 밭이랑에 쌓인 돌무더기 같도다
(호 12:12, 개역) 옛적에 야곱이 아람 들로 도망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아내 얻기 위하여 사람을 섬기며 아내 얻기 위하여 양을 쳤고
(호 12:13, 개역) 여호와께서는 선지자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선지자로 저를 보호하셨거늘
(호 12:14, 개역) 에브라임이 격노케 함이 극심하였으니 그 주께서 그 피로 그 위에 머물러 있게 하시며 저의 수치를 저에게 돌리시리라

(호 12:7, 현대어) [가나안에서 장사꾼 정신을 배웠다] 내 백성이 가나안의 베니게 상인들처럼 저마다 손에 거짓 저울을 들고 다니며, 남의 눈을 속이기를 좋아하고 있다.
(호 12:8, 현대어) 그러면서도 에브라임은 '나는 남부러울 게 없는 부자가 되었다. 내가 떳떳이 일해서 벌어 모았으니 누가 나를 이득이나 챙기는 자라고 손가락질하랴' 하고 큰소리친다
(호 12:9, 현대어) [광야 시대로 되돌아가라] 내가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던 너희를 구해 준 바로 그날부터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이제 나는 너희를 다시 천막에서 살게 하되, 우리가 광야시대에 만나서 축제를 벌이던 것처럼 살게 하겠다.
(호 12:10, 현대어) 내가 일찍이 선지자들을 보내어 너희에게 많은 환상과 꿈과 비유로 내 뜻을 알려 준 대로 하겠다.'
(호 12:11, 현대어) [농경 문화가 타락하였기 때문이다] 길르앗에서는 끔찍한 죄악이 저질러지고 있다. 어찌 그 백성들이 멸절되지 않으랴! 길갈에서는 농경신들에게 수송아지를 제물로 바치고 있다. 어찌 그 제단들이 밭고랑의 돌더미들처럼 무너지지 않으랴!
(호 12:12, 현대어) [죄는 해방자에 대한 반역이다] 야곱은 아람 들녘으로 도망가 여자 한 사람 때문에 머슴을 살았고, 아내 한 사람을 얻으려고 양 떼를 지켜 주었으나
(호 12:13, 현대어) 여호와께서는 한 예언자를 시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고, 그 예언자를 시켜서 그들을 지켜 주셨다.
(호 12:14, 현대어) 그런데도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마음을 몹시도 괴롭혀 드렸다. 그들이 지은 피의 죄값을 이제 주께서 그들에게 되돌려 갚으시고, 그들에게 받은 수치를 그들에게 되돌려 주실 것이다.


먼저 소제목이 달린 다른 번역서를 보겠습니다
현대어와 현대인의 성경은 같은 소제목을 4개 달았네요

(호 12:7, 현대어) [가나안에서 장사꾼 정신을 배웠다] 내 백성이 가나안의 베니게 상인들처럼 저마다 손에 거짓 저울을 들고 다니며, 남의 눈을 속이기를 좋아하고 있다.
(호 12:9, 현대어) [광야 시대로 되돌아가라] 내가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던 너희를 구해 준 바로 그날부터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이제 나는 너희를 다시 천막에서 살게 하되, 우리가 광야시대에 만나서 축제를 벌이던 것처럼 살게 하겠다.
(호 12:11, 현대어) [농경 문화가 타락하였기 때문이다] 길르앗에서는 끔찍한 죄악이 저질러지고 있다. 어찌 그 백성들이 멸절되지 않으랴! 길갈에서는 농경신들에게 수송아지를 제물로 바치고 있다. 어찌 그 제단들이 밭고랑의 돌더미들처럼 무너지지 않으랴!
(호 12:12, 현대어) [죄는 해방자에 대한 반역이다] 야곱은 아람 들녘으로 도망가 여자 한 사람 때문에 머슴을 살았고, 아내 한 사람을 얻으려고 양 떼를 지켜 주었으나


표준 새번역과 표준 새번역 개정은 같은 제목으로 두 개를 달았구요

표준 새번역 개정

호 11:12 [이스라엘과 유다가 규탄을 받다] 에브라임은\거짓말로 나를 에워싸며,\이스라엘 가문은\온갖 음모로 나를 옥죄고 있다.\유다 족속도\신실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거역하고 있다.\
호 12:7 [에브라임의 사회 경제적인 범죄] "에브라임은,\거짓 저울을 손에 든\장사꾼이 되어서,\사람 속이기를 좋아한다.\


마침 오늘 본문은 현대어 소제목처럼 네 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호 12:7, 현대어) [가나안에서 장사꾼 정신을 배웠다] 
(호 12:9, 현대어) [광야 시대로 되돌아가라] 
(호 12:11, 현대어) [농경 문화가 타락하였기 때문이다] 
(호 12:12, 현대어) [죄는 해방자에 대한 반역이다] 

첫 번째의 주제는 이스라엘 곧 에브라힘이 돈을 너무 밝힌다 라는 겁니다
상고 여늘 상고 이거늘 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낯선 표현입니다만
상인 곧 장삿꾼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돈 맛을 봐 버렸으니까
장삿꾼이다 보니 거짓을 기본으로 장착할 수 밖에 없고
또 거짓 저울으로 이윤을 남기는 그 재미에 빠져 돈 중독의 부자가 졸지에 인생의 목적이 되어버렸다 라는 겁니다

사취 라는 용어도 좀 자주 안 쓰는데 비슷한 의미로 이런 용어를 자주 쓰지요

갈취 =강도 =공갈(겁을 주어)남의물건을 빼앗는 것
절취 =절도 =남의물건을 몰래 뺏어가는 것
편취 =사기 =남을 속여 재물이나 이익을 빼앗는것
강취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는 것

사취는 위의 세 번째 편취 사기쳐서 빼앗는 것에 해당됩니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마귀의 세가지 시험애 의해
마귀에게 장악된 포로된 모습이다 라는 것이지요

경제적으로 부자가 목적이다 보니 사기를 칠수 밖에요
이것은 다른 이방나라 사람들의 목적이지 이스라엘의 목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처음부터 처음자리인 이스라엘로 되돌리고자
부자 잔칫집 궁궐에 반대되는 광야에서 외치는 선지자의 외침에서 다시 시작하시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광야에서 빈손이 되게 처음자리인 공백이 되게 탈탈탈 털어버리시겠다 라고 말이죠

이것은 곧 약속의 땅에 안 맞는 인간이 되었기에 약속의 땅이 뱉어버리는 식입니다

사람은 떡으로 사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라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 자들이
출애굽 한 자들인데 그것이 아들 인데
그 반대로 애굽 속의 장자처럼 되었기에
졸지에 심지도 거두지도 않았던 그 약속의 땅이 척박한 땅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아들 만들고자 다시 출애굽을 실시 하시겠다 라고 선지자와 이상 그리고 비유가 동원이 되었듯이 동원하시겠다 라는 겁니다

이상 환상 등등은 보이는 것들을 소망치 못하도록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케 함이기에
이런 부자 되는 것 자체를 단절 시키는 겁니다 무효화 시키는 거죠
그리고 인간에게서는 보편적 진리인 속담이 있다 말이죠 명언 격언 가훈과 같은 교훈이 있다 말이죠 교휸이 교육 아닙니까 무엇을 선 도덕과 윤리 사회규범과 법 말이지요
이런 모세언약으로 충분한데 왜 다윗언약이라는 새 언약이 필요하냐 말이죠
바로 이런 것들과 단절이 된 구체적 보편적 진리 즉 구체적이라는 말은
저런 보편적 진리 즉 다수가 수용하는 그런 진리가 아닌
또 그렇다고 소수만이 누리는 진리인가도 아닌
인간의 진리인 선악 도덕 윤리로는 구원할 수 없기에 그것을 단절 시키고서 나오는
구체적보편적 진리 오로지 이스라엘 집단에게만 베푸시는 언약으로써만 진리를 이루시겟다 라는 겁니다 저런 것을 무효화 의문화 거짓으로 규정시키면서 말이지요
아니 약속의 땅에 소위 미리 누리는 천국에 무슨 놈의 부자가 필요하겠습니까
평준화 된 높은 산도 깍도 움푹 파인 웅덩이도 매꾸어서 평평하게 평준화 되었는데
거기에 무슨 놈의 선과 악이 있냐 말이죠 따로 국밥처럼 부자를 선으로 구성하겠다 라는 것 자체가 약속의 정신과 안 맞기에 이 경제 문제를 아작 내시겠다 라는 겁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주제는 길갈 이라는 장소과 연관 된 겁니다

(호 12:11, 현대어) [농경 문화가 타락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소제목은 농경문화가 타락했다 라고 보고 있는데 아닙니다
농경 문화 자체가 우상적일 수밖에 없기에 아무리 선할려고 해도
정착문화이기 때문에 비 안오면 기우제를 드릴 수밖에 없다 말이죠
대만 보세요 반도체 1위 국가 답게 반도체 열을 씻길수 있는 또 순수 액이 필요하기에
마실 물도 모자르니까 심심하면 무당 불러서 기우제를 드린다 말이죠 사면이 바다인 섬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우리나라도 반도체 국가라서 언제 그런짓 안하고는 못 배기겠지요
다행히 바이든에게 반도체 다 빼앗길 판국에다가
트럼프 이 장삿꾼에게 변호사에게서 안 지는 법을 배우다 보니
이제 반도체 분야 뿐만 아니라 조선업 까지 다 빼앗길 판국이다 말이죠
날 도둑놈들이 따로 없지요 다 선진국에게서 배운 기술이니 말이죠
배운 그대로 당하는 겁니다 말이 자유경쟁자본주의이지
무한 자유 경쟁이라는 말은 결국 이 의문의 반복 헛 배
지난 번에 호세아 12장 첫 절 바람을 먹는다 라고 했잖아요
다 허사를 경영하는 겁니다

(호 12:1, 개역)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더하며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지혜서인 전도서에서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김뱀용이라고 하네요 ㅋㅋㅋ

(전 1:14, 새번역)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을 보니 그 모두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 ㉥히, '해 아래' ㉦또는 '바람을 먹고 사는 것과 같다'(호 12:1을 볼 것)
(전 2:11, 새번역) 그러나 내 손으로 성취한 모든 일과 이루려고 애쓴 나의 수고를 돌이켜보니, 참으로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고, 아무런 보람도 없는 것이었다. / ㉠히, '해 아래' ㉡또는 '바람을 먹고 사는 것과 같다'(호 12:1을 볼 것)
(전 2:17, 새번역) 그러니 산다는 것이 다 덧없는 것이다. ㉢인생살이에 얽힌 일들이 나에게는 괴로움일 뿐이다. 모든 것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될 뿐이다. / ㉢히, '해 아래' ㉣또는 '바람을 먹고 사는 것과 같다'(호 12:1을 볼 것)
(전 2:26, 새번역) 하나님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슬기와 지식과 기쁨을 주시고, 눈 밖에 난 죄인에게는 모아서 쌓는 수고를 시켜서, 그 모은 재산을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주시니, 죄인의 수고도 헛되어서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 ㉩또는 '바람을 먹고 사는 것과 같다'(호 12:1을 볼 것)
(전 4:4, 새번역) 온갖 노력과 성취는 바로 사람끼리 갖는 경쟁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그러나 이 수고도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 ㉢또는 '바람을 먹고 사는 것과 같다'(호 12:1을 볼 것)
(전 4:6, 새번역) 적게 가지고 편안한 것이, 많이 가지려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낫다. / ㉣또는 '바람을 먹고 사는 것과 같다'(호 12:1을 볼 것)
(전 4:16, 새번역) 한 왕이 다스리는 백성의 수가 셀 수 없이 많다 하여도, 그가 물러나면 어느 누구도 그의 업적을 찬양하지 않으니, 왕으로서 통치하는 것도 헛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또는 '바람을 먹고 사는 것과 같다'(호 12:1을 볼 것)
(전 6:9, 새번역) 이것 또한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욕심에 사로잡혀서 헤매는 것보다 낫다. / ㉡또는 '바람을 먹고 사는 것과 같다'(호 12:1을 볼 것)


자 이렇듯 농경문화 자체가 정착민 자체가 허사를 경영할 수 밖에 없기에
길갈과 상관없는 농경문화의 타락으로 잘 못 본 겁니다
너무 좁게 본 겁니다
그럼 유목 문화는 그럼 괜찮은가?
그건 더 좁게 보는 거죠
농경문화든 유목문화든 심지어 아바타 2 처럼 어촌 문화이든
뭘 해도 다 범죄로 보시는 시선이 있다 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가죽옷 사건인데
이 네가지 주제를 하나로 꼬치처럼 꼿아서 뚫어버리는 겁니다
소세지 떡가래 소떡 소떡을 꼬치로 꼿듯이 말이죠

길르앗에서 길갈로 들어가잖아요
여호수아가 모세를 대신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드디어 길르앗에서 출발해서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첫 발을 딛은 곳이 길갈입니다
그래서 열두 돌을 기념비로 길갈에 세우잖아요

(수 4:20, 개역)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수 4:7, 개역)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하라
(수 4:7, 현대인) 여러분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여호와의 법궤가 요단강을 건널 때 흐르던 강물이 갑자기 멈추었단다. 그래서 이 돌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놀라운 기적을 영원히 상기시켜 주는 기념비와도 같은 것이란다.‘

언약궤를 앞장 세우니까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다 보니 강물이 세다 말이죠
그런데 언약궤가 막상 그 물 요단강을 건너니까 그 흐르던 물이 끊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목 까지 차오를 정도로 개헤엄을 쳐야하는데 갑자기 물이 빠지니
밑바닥이 다 드러나는 거죠 그래서 열 두 돌을 취할 수 있었던 겁니다

길르잇 요단강 동편이고요
길갈은 요단강 서편입니다

그러니 더러운 속된 곳에서 약속의 땅으로 드디어 들어감에 있어서
거룩 속에 말이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죽음을 건너서 천국에 입성했다 라는 겁니다

길갈의 뜻이 굴러가다 곧 수치가 굴러갔다 라는 뜻입니다
12 돌 기념비를 세우고 할례까정 하면서 수치를 굴러가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꼬추를 그렇게 짤랐는데
언약정신을 무시하니까 가죽옷을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라는 피 옷을 무시하니까
도로 짜른 꼬추를 붙이게 되니
그 꼬추가 살아서 굴러가게 한 수치가 도로 활동하듯이
자기 자식을 불 위로 걷게 하는 우상숭배의 장소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농경문화랑 아무 상관이 없구요
유목문화는 아무리 떠돌이 나그네로써 본향을 향하는 모습이다 라고 해도
정착해버린 이상 유목민 저 몽골 보세요 본향이 있던가요? 
말이 유목민 노마디즘이지
정착민이기는 맹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자체가 선악을 아는 하나님과 같이 됨에 꽃혀서 정착이 되었는데 말이죠
아무리 노마드 노마드(유목민) 이라고 우겨도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주님이 만드신 환자 죄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노마드를 자랑꺼리로 삼을 뿐인 육의 자랑이 된 거죠
그것도 이제는 몽골초원이 먹을 풀 하나 나지 않는 이상고온 기후 때문에
유목민들이 전부 도시로 이주하다 보니
그들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라고
그런 건강했던 유목문화도 다 사라질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사실은 야생동물이 노마드이지 방임형으로 방목형으로 말이죠 진정한 막살기인 거죠
농경은 일일이 사료를 사야 하니까 저들 노마드 입잡에서는 비경제적인 것으로 보이지요
방목하면 지들이 알아서 뜯어먹잖아요 그래서 자꾸 옮겨다니는 거지요
결국 진정한 노마드는 없는 겁니다 아무리 객끼가 있어서 한 군데 못 붙어 있어서
역마살이 끼여있다고 해도 결국은 무덤에 정착하는 거지요

무덤이 없는 자가 진정한 노마드 인데
뭐 대단한 것인냥 용어 단어로 또 속이다 보니
광고에까지 속임수를 펼쳐보지만 정작 결과는 우상숭배요 육의 자랑일 뿐이더라 말이죠
인간이 손 대면 다 그래요

아무리 역마살이 끼여도 비로소 정착을 해야 저축이 가능하고 부자가 창고를 늘릴수 있고
자식을 낳아서 불 위로 걷는 구원자 답제 라고 육을 자랑할 수 있으니
자본주의가 탄생하는 거지요 막살면 아무것도 한 것이 없게 된다 말이죠

자 그래서 길갈은 첫 문인 셈입니다 천국의 문처럼 말이지요
그 길갈에 열두 비석을 세운다 라는 것은
약속이 벌리는 사건 곧 언약궤가 물을 끊어버린 사건처럼
약속이 벌리는 사건 사건 마다 열두지파 이스라엘은 그 사건을 기억하고
그 사건의 증인으로 세워진 자들입니다 라는 고백의 차원에서
이스라엘에게 벌리신 사건 하나 하나는 길갈에 기념비 세우듯이 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교회 오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라고
이 새언약의 정신을 노래하는 겁니다

마침 누구랑 복음을 나누면서 갑자기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 하게 되었습니다
개역한글 번역서에는 행복이 딱 한 군데 나옵니다

마침 행복이라는 단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라는 의미와 함께 말이지요

어 막상 찾아보니 두 군데 이네요 ㅋㅋㅋ 그 동안 신약만 검색하다 보니


(신 10:13, 개역)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 33:29, 개역)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신명기와 로마서 두 군데 나옵니다

아무튼 같은 의미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말이죠

그런데 행복을 나누면서 말이 행복이지
정작 다윗은 하나도 안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바랬던 행복이 따로 있었는데
그 행복이 정작 박살이 나니까 진짜 행복이 쳐들어 와서 강제 행복이 된 거다 라고
결국 누가 행복하냐 다윗이 아니라 다윗의 행복을 박살낸 주님의 행복을 로마서는 기록한 것이다 라고 말이죠 정작 다윗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된 거지요 아주 지근 지근 밟혔다 라고

주님 혼자 신났지요
인간이 바라는 행복은 결핍 채우기 용인 여전히 미완료이고 의문의 반복이지만
주님이 주시는 행복은 완료를 누리기 밖에 없기에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종말을 즐기는 겁니다
뭐든지 다 뿌쑤는 겁니다 인간의 행복은 반대로 세우기인데 말이죠
세워봤자 길갈처럼 수치를 물러가게 굴러가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수치를 더덕 더덕
그 의문의 반복을 완악한 수건을 안 벗을려고 더덕 더덕 더 붙이기만 할 뿐입니다
주님은 반대로 수치를 짤라내시는데 말이죠 이것이 진정한 수치를 가리우심 인 겁니다
근본적인 것은 안 짜르고 자꾸 자기 의로움을 세울려고 하니 반대의 반대에
부정의 부정에 딱 걸려든 거죠
뭣이 중헌디 미끼를 물어버린 것이여 인거죠

아따 오랜만에 이사야 이오팔

(사 25:7, 개역)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그 가리워진 면박과 열방의 그 덮인 휘장을 제하시며
(사 25:8, 개역)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 25:9, 개역)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휘장을 제거 한다 말이죠 막힌 담 경계선을 허문다 말이죠
반대로 유대인들은 저 우상숭배 더러운 이방인과 함께 할수 없다 라고
도리어 막힌 담을 그 경계선을 더더욱 높이 세우지요
그래서 완악한 수건을 제거하는게 아니라 도리어 안 벗을려고 발악을 하지요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고 사망의 권세가 살인의지가 더더욱 가득 가득 높이 세워지는 겁니다
마음판의 할례로 수치를 굴러가게 하는게 아니라
나는 할례하는 의인 너는 할례 할 수 없는 죄인 이라고 더더욱 경계선을 긋고 막힌 담을 세우는
둘로 나누는 원수지간을 유지할려고 완악함을 펼치지요
행복을 자기 스스로 갖추고자 수치를 자기 스스로 가리울려고 하니까
도리어 다윗은 박살이 나야 하는 겁니다
주님 혼자 신났죠 죄악을 제거하는 수술로 자신의 의사됨을 펼치시니
이 처음자리가 아니면 첫사랑을 알길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도 그렇다 라고 했습니다 기쁜소식 곧 복음은
우리가 하나도 안 기뻐요
오히려 우리게에는 나쁜소식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쩨쩨하게 복수하고 되갚겠다 라고 하잖아요
맞아요 나쁜 하나님이 진짜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가짜 좋으신 하나님만 인간들이 자기 수치를 자기 스스로 가리울려고
우상화 한 겁니다 성경에도 없는 언약이 아닌
언약과 아무런 상관 없는 믿고픈 것만 믿고 보고픈 것만 보고 듣고픈 것만 듣는
그런 가짜 하나님을 세워 놓고서는 말이죠

즉 누구만 기쁘다? 주님 혼자 신났어
그 주님의 신남이 졸지에 쳐들어와서 내 마음 중심 가운데 빵구멍 뚫고서 자리 잡아 앉아버리니까
저절로 기뻐하심을 입은 자가 되어버린 겁니다

길갈의 의미도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천국 들어갈 마음
약속의 땅에 들어갈 마음 추호도 없는 자들에게
졸지에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이 되어야 하듯이
기쁨이 복음이 말씀이 쳐들어와서 이제 내가 주인공이 되는 인생은 끝
말씀이 주인공이 되다 보니
내가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 것 모조리 다 박살내는 복음 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게 수치를 굴러가게 하시는 겁니다
약속하심을 입은 자들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입은 자 인간이 주인공이 되는 것은 끝났고
약속이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라는 거죠
아무리 그 길갈을 우상숭배로 터로 다시 바꿔놓아도
아이구 그랬었었어요 오냐 다시 출애굽
다시 요단강 도하 다시 12돌 기념비 안세우고는 못 배기도록
아주 아주 박살을 내시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두려움과 떨림으로 모욕적인 구원을 당하는 겁니다
안 그러면 짤라낸 수치 도로 붙이고 난리인 저런 성화론자들의 의문의 반복만 할 테니까요

그것도 그냥 천국 안 들어가는게 아니라 
약속의 땅 안 들어가는게 아니라
아예 여호와로부터 멀리 떨어지겠다 라고 결심에 결심까지 하면서 말이죠
꼭 자기의 죽음은 저는 이미 물 속에 가라앉은 열두 돌과 같습니다
이 죽음이라는 수치 발가벗었다 라는 수치
아무리 서로 서로 가려줄려고 무화과 나뭇잎을 만들어 가려줘도
그저 일회용 요실금 기저귀 밖에 안되는 겁니다

그랬던 그 수치 속에 그 죽음이라는 사망 권세
우상숭배 속에 있던 불 위를 건너는 자들에게
그런 물 속에 있는 자를 언약이 세워주심으로 인해
죽은 자가 산 자가 된 것은 바로 이 언약궤 덕분입니다 라고
더러운 수치에서 거룩한 신부로 옮기는
길르앗에서 길갈로 말이죠
요단강의 죽음이 가로막았는데 그 죽음을 그 수치를 끊어 굴러가게 했다 말이죠
첫 가나안 입성으로 그 첫 문에 열 두 비석 기념비를 세우는 겁니다
여기에 딱 하나의 지파도 빠지면 안됩니다
유대인은 다른 지파 빠져도 상관 없다 라고 지금까지도 우기지만 말이지요
팔레스타인 속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막 죽여요
결국 자기 얼굴에 누워서 침 뱉는 겁니다
그 다음 차례 자기인줄도 모르고 말이죠

그런 길갈이 졸지에 우상을 깨뜨리는 장소 곧 자기자신을 깨뜨려서 들어가는
더러운 죄악 더러운 속된 것을 거룩으로 옮기는 첫 장소 였는데
이제는 도로 자기자신인 우상을 세우게 되었으니
우상을 깨뜨린 약속의 의미가 무효화가 되어버린 길르앗 우상의 장소와 다를바 없게 된 겁니다
아마 이것을 농경문화의 타락으로 본 것 같은데 근원적인 죄악은
농경이든 유목이든 약속이 아니면 이 죄악을 이 우상을 건드리지 못하는 겁니다
그 약속의 정신을 무시하니까 
약속을 모욕한 그 죄를 자기 스스로 자기 눈을 찌르게 되는 겁니다

그 카이 출애굽을 다시 해야 하고
또 다시 요단강을 다시 건너게 되는 이 번거로운 일들을 또 해야 하는데
주님은 또 신났다 말이죠 주님 혼자 신났어요
아예 작살낼 생각을 하시니까 좋으신 것인지
아니지요 죄 악의 깊이가 그 동안 애굽 당시와 달라졌을꺼 아닙니까
더 깊어졌으니까 이런 깊어진 죄악까지 박살을 내심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이 광경을 목격하는 증인으로 삼으셨다 라는 것에 신나신 거지요
이미 다 이룬 완료를 이제 누리기를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영화보듯이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체험으로써
본인들이 짖밟히는 과정을 격는 겁니다


자 그다음 세 번째 주제가 뭔고 하니
야곱이 아내를 얻고자 사람에게 충성했다 라는 겁니다
외삼촌 라반에게 40년 동안 충성했다 곧 평생을 말이죠

자기가 그 야곱 이라는 그대로 사기를 치다 보니
도로 사기를 당하는데 있어서 평생을 당하는 겁니다
그렇게 얻은 사랑인데 그 사랑 다움을 자기 힘으로 유지하고자 
얼마나 진심을 부을려고 하지 않겠느냐 말이죠
그러나 그 진심 조차도 정직한 영이 없이
중심 없이 가운데 중앙에 화목제물이 없이
자기가 자기를 끌어올려서 사랑한 헛된
그림자 사랑이다 라는 겁니다
실상의 사랑이 인간에게서 나올수 없다 라는 거지요
창녀 음녀 고멜의 남자버전인 야곱의 사랑인 겁니다
도로 용서 받아야 할 판국인 가죽옷의 기능을 거부하고서 말이죠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라는 사도바울의 외침이 생각납니다

(갈 1:10, 개역)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이것을 또 번역서 소제목은 어떻게 했는고 하니

(호 12:12, 현대어) [죄는 해방자에 대한 반역이다] 야곱은 아람 들녘으로 도망가 여자 한 사람 때문에 머슴을 살았고, 아내 한 사람을 얻으려고 양 떼를 지켜 주었으나

배배배배 배신이야 배신

배신이 바로 죄다 라고 했다 말이죠
그럼 아내 사랑만 밝히는 것이 죄가 되면
죄 아닌 것이 없게 되겠지요
맞습니다 죄 맞아요
뭐? 인간의 인격을 너무 무시한다
아내 사랑도 죄로 보고 있으니 말이죠
죄란 죄를 지어서 죄가 아니라
죄가 인간을 다스리고 있다 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자 그러니 물에 빠진 놈 건져주면 뭐합니까
자기 쪽에서 사랑을 펼치고 그것을 받아주는 것 있으면
그것을 구원으로 보니까 말이죠
이것은 음녀의 남자 버전인 셈인거죠
사실은 이것은 원천적으로 자기의 수치를 스스로 가리우고자 하는 행위인 겁니다

마귀의 두 번째 시험 거룩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그러면 두 발이 상치 않게 천사를 보내어서 두 손으로 받쳐 줄 것이다
이것이 유대인이 마귀에게 장악된 모습이다 라고
모든 인간의 대표성으로써 마귀에게 장악된 인간임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즉 두 번째 시험은 종교 곧 사랑에 대한 겁니다
기적을 통해서 자기의 수치를 스스로 가리우고자 하는
이런 인정욕구 사랑받고픈 욕구
내가 너를 사랑했고 인정했으니 너도 나를 인정해 달라 라는 조건을 갖추는
결국 사랑을 추구한다 라는 것이 사실은 사랑이 없는 겁니다
매일 매일 새로운 사랑이 없기에
암논 왕자는 다말 공주를 사랑을 나누고 난 뒤에 바로 버려버리는 겁니다
결핍을 채우고 난 뒤에 바로 버리는
이 지옥의 몸을 감추고자 자기 스스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고자 하는
모든 인간의 행동은 사랑받고파 그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행동 뿐이지
완료에서 진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말이죠
아내를 책임지지 않고 아내에게 모든 핑계를 뒤짚어 씌운 첫아담보다 나은 것 아니냐
아닙니다 맹 첫아담의 속성인 첫아담의 형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이 반대되는 행동이지 오히려 두 겹으로 더더욱 감추인 자기 스스로 수치를 가리우고자 한 겁니다

특히 네 번째 주제인 아들을 불 위로 걷도록 하는 우상숭배의 행위는
너가 사랑받는 자 라는 것을 보여줘 라고
부모는 자식 사랑을 위해서 뭐든지 한다 라고 하지만
그래서 너의 자식에게 노아 욥 다니엘을 가정교사로 붙여서 신앙의 선행학습을 시키겠다 라고
자식 구원을 위해서라면 부모 자기 목숨을 걸겠다 라고 하지만
이 정치적인 보편성 곧 부활 열매는 열매는 자식 아닙니까

마귀의 세 번째 시험인 온천하를 줄테니 절하라 라는
인간 구원을 목적으로 한 정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겁니다
정치란 선택 곧 간택의 문제인 구원문제이거든요
섬기는 왕 하나만 있으면 다 된다 라는 겁니다
그 왕 그 정치를 마귀가 주겠다
그러면 너는 왕 답다 메시아 답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부모 왕 메시아는
부활을 이루는 것이다 정치적인 열매를 구성하라 라는 거죠

이것이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 곧 사랑이다 말이죠
아내사랑에만 몰두함에 있어서 40년 평생을 사람에게 충성했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사망의 몸 곧 주검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있듯이
지옥의 몸인 증거이다 라는 겁니다
인정투쟁인 거죠 예수님의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 라는 이 정치싸움 다툼
누가 누가 더 사랑받냐 사랑받을 자격 조건을 갖추냐
목사가 이런 싸움을 교인들에게 붙이면 뒤에서 흐뭇해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충성하는 모습은
가죽옷 곧 십자가의 피 흘리심과 안 맞는
서로가 서로의 소욕을 거부하는 식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의 죄악을 수치를 가리우고자 하는 행위인 거죠
건강한 자 의인은 자기 의를 쌓는 이유인 겁니다
그럼 의사가 필요가 없고
구원자 곧 화목제물 즉 하나님이 손수 직접 마련하신 화목제물이 필요가 없으니
이런 자들에게는 사랑이 필요가 없는 거죠 지가 알아서 사랑을 하고 있으니 말이죠
이런 배 불러 터진 모습을 빵구멍 배 자기 배를 위하여 우상숭배하는 것을 빵구멍 내시는 분이 진짜 예수님인데 예수도 자기 배를 위하여 임금삼고자 우상화 하는 찌끼를 혼합 시키는 겁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 5:12, 개역)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사 5:12, 새번역)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거문고와 소구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주님께서 손수 이루시는 일도 거들떠보지를 않는다.

(겔 14:14, 개역)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14:20, 개역)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오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제가 어떤 여성분과 대화를 하는데
기도원에서 살다 싶이 하는데
자기는 혼자 살꺼다 라며 사도바울이 그렇게 했다 라고 하던데
저 보다 한 참 많은 10년 이상의 사람이였는데 
그렇게 남을 용서하면서 사는 삶이 좋다고 하길래
제가 그럼 당신이 남을 용서할려는 삶을 살고자 함 때문에
당신에게 억지로 용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의 삶은 얼마나 망가져야 하는지 아느냐 라고
그 다음부터 다시는 상종치 않게 되었다 말이죠

이것이 오히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고
이것이 오히려 농촌문화처럼 정착민 같이 남 7번 용서하는 삶으로 정착하겠다 라는
이거 우상숭배 아니냐 말이죠

뭘 그것 가지고 우상숭배까지 확대해석을 하느냐
인간의 모든 행동은 결국 우상사랑과 연관이 되었고
이 말은 반드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살인의지에 까지 연관되어 있다 라는 겁니다
안 그러면 너는 죽은 자 시체야 라는 주님의 시선을 거부하고
또 자기 스스로 수치를 가리우고자 인정투쟁을 하도록 되어 있거든요

아까 말한 아무것도 한 것이 용서받은 것을 믿는 그 행복과 완전 정반대 이다 말이죠

신약에 딱 한 군데 구약에 딱 한 군데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받음

그런데 도로 용서하면서 살겠데요 글쎄
그런 자들한테서 쫓겨난 거나 마찬가지인 거부당한 십자가에 달림 당한 예수님은
왜 성화론자들은 
죄인 아닌 의인들은
환자 아닌 건강한자 곧 남 7번 용서하는 자는 왜 용서치 않고 십자가에 매 달았을까요
오히려 선을 갖춘 것이 악이 되는
이 모순된 간극을 인간 쪽에서 좁힐수 있다 라는
그 수치를 죄악을 가리우고자 하는 행동 그 자체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 곧 가죽옷과 반대의 기능을 하도록 되어 있음을
십자가가 아니면 또렷히 밝혀 낼 수가 없는 겁니다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 라고 그렇게 주장하면서 말이지요
아 그냥 이단 사상을 배격해야 자기조직이 물들지 않는다 라고
성경은 한 쪽으로만 치우쳐져서 이야기 하지 않는다 
양면성을 다 갖추고 있다 라고 핑계 대지만
그게 선악 아닙니까
하라 하지말라

모든 성경은 가죽옷 언어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라는 사랑의 언어로 되어 있는데
선악의 언어인 하라 하지말라 라는 법 언어로 해석을 하게 되니까
나도 언어를 해석할 줄 안다 라고 말이죠
그 카이 모든 것을 수치를 스스로 가리우는 언어로 본 겁니다
그냥 고쳐달라고 하면 되는데
왜? 소경 곧 환자이니까 말이죠
나도 볼 줄 안다 라고 소경 아니다 라고 하니까
이 사랑 문제 자기가 해결하는 숙제로 아내사랑에 몰두하는 겁니다
그 아내는 자식사랑 곧 모성적초자아는 아들을 불 위로 걷도록 하는데 까지 몰아가는 겁니다
착한아이 콤플렉스로 가스라이팅 하는 거죠
그게 자식 잡아먹는 거죠

아무리 양면성을 균형있게 올바르게 골고루 갖추어도
맹 사람에게 충성하는 것은 죄 아래 갇힌 사망의 몸인데
그런 사망의 몸에서 나오는 사랑이라고 해 봐야
구원은커녕 지도 천국 안가고 남도 천국 못 가게 가로막아서 삥이나 뜯어내는
인정투쟁으로 바리새인은 나 봐라 구원받은 자 답지 라고 
구원받은 자로 인정해 다오 라고 징징거리는 겁니다

진짜 사랑은 거부하고 그냥 거부도 아닌 악을 쓰고 거부하고
가짜 사랑인 우상숭배는 눈을 그려서 봐달라 하고
손을 그려서 날 만져달라 하고
팔을 그려서 넘어진 나를 일으켜 달라고 하는 겁니다
정작 하나님을 멀리 하기로 결심하면서 자기 믿는 구석을 표출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럼 진짜 사랑은 그렇게 도망간다고 놔주는 하나님이냐?
오늘 본문 내용은 가만히 두질 않겠다 라는 진짜 사랑의 매 징계 아닙니까
주님이 손수 이스라엘의 기능을 만들어내시지 창조하시지
인간이 알아서 이스라엘의 기능은 아무리 해도 안된다 라는 거죠
환자가 자기 병을 스스로 배 째고 수술해서 암 덩어리 제거하겠다굽쇼?????
아무리 의사 교육 받아서 평생을 의사 명의 라는 명성을 얻어도
자기 병은 못 고치는 겁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 말이지요

다윗도 그랬어요
마치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회개 눈물 금식 기도로 아이를 살려 보겠다 라고
지 병도 못 고치면서 남의 병 고치겠데요
지가 뭐 의사인줄 알아요
죄인인 주제에 환자 주제에 ~~~~~

나 봐라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렇단다 라고
나 수고한 것 인정해 달라 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그것 조차도 헛 수고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정작 그 아이를 살려내는 능력은 없으면서
살려내는 척 하는 경건의 모양만 갖추는 겁니다

살려내지 못하면 아무리 회개 눈물 금식 기도하는 몸이라고 우겨도
맹 지옥의 몸
사망의 몸입니다

지금 누가 누구를 살려달라고 해야 하느냐 말이죠
누가 누구를 사랑하느냐 해야 하느냐 말이죠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겠다 라고 끝까지 따라가겠다는 둥
절대로 세 번 부인하지 않겠다 장 지지겟다는 둥
정 그렇게 못 믿겠으면 같이 따라 십자가에 함께 죽겠다 라는 둥 백날 혀도

사람에게 충성하듯이 하는 그거 음녀가 자기 쪽애서 사랑하겠다 라고
신랑을 찾아서 골라 골라 결혼하겠다 라는 심뽀다 말이죠

너가 사랑할 생각 말고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이 화목제 예수를 아끼지 않고 목숨 내어주었다 라는
이 사랑을 받기나 혀 라는 겁니다

너희가 날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 라는 겁니다

그래야 누구든지 주를 사랑치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라는 그 저주를 피할수 있다 말이죠

내가 준 사랑으로만 사랑하라
너가 나를 사랑하지 말고
왜? 새로움이 없거든요
자기 한계가 부딧히면 언제든지 또 의문의 반복으로 나 애굽으로 나 돌아갈래 박하사탕이 되는 겁니다

만약 회개 눈물 금식 기도로 다윗이 그 아기를 살려냈다~~~
그렇게 되면 또 그 다음날 또 아기를 또 살려내어야 한다 말이죠
그 의문의 반복 무슨 수로 멈춥니까

또 이렇게 말 하니까 그럼 회개 눈물 금식 기도 다시는 안할끼다 
대식이가 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라고 또 저를 핑계 대는 사람들이 많았다 말이죠
안하겠다 라고 다짐한다고 안 할 인간이 있던가요?

아내 사랑 안하고 사람을 안 기쁘게 하며 살끼다 그것 조차도 위선입니다
아내 사랑하세요
제발 지금까지 막 살아와 놓고서 새삼스럼게 이제부터는 막 살지 않겠다 라고 결심해도
3초 뒤엔 무너집니다

이 말은 주님은 우리는 상대하시는게 아니라
마귀만을 상대로 하시고 죄악만을 상대로 하신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이 네가지를 언급하시는 이유는
마귀에게 장악당한 유대인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인간이 죄 짓는게 아니라 죄악이 인간을 다루는데 있어서
이 포로가 된 이스라엘을

이 죄악에서 빼내시는 이 기념 칭호의 기능을 말하고자 함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네 번째 주제를 그럼 말해야 겠지요

길갈이라는 첫 발 딛인 약속의 땅 입성의 기념비를
그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천국에 입성한 그 기념이름을
졸지에 이제 스스로 더럽혀서 우상의 장소로 만들어 버리는

(호 12:11, 개역) 길르앗은 불의한 것이냐 저희는 과연 거짓되도다 길갈에서는 무리가 수송아지로 제사를 드리며 그 제단은 밭이랑에 쌓인 돌무더기 같도다

수송아지를 우상에게 제물로 바치는 우상숭배의 제단을 세우더라 말이죠

마귀는 결국 하나님이 세운 것을 엎어버리고
결국 자기를 세우고자 인간들을 유혹했던 겁니다

(겔 16:20, 개역) 또 네가 나를 위하여 낳은 네 자녀를 가져 그들에게 드려 제물을 삼아 불살랐느니라 네가 너의 음행을 작은 일로 여겨서
(겔 16:21, 개역) 나의 자녀들을 죽여 우상에게 붙여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느냐

주님이 주신 선물 곧 기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받았기에 선물인데
그런 선물 하나 하나를 모조리 우상에게 바치더라 말이죠 인신제사죠

(렘 19:5, 개역) 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
(렘 19:5, 새번역) 그리고 그들은 제 자식들을 바알에게 번제물로 불살라 바치려고, 바알의 산당들을 세움으로써, 내가 그들에게 명한 적도 없고, 말한 적도 없는, 내가 상상조차도 하여 본 적이 없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렘 19:5, 공동) 바알에게 제단을 쌓고 저희 자식들을 불에 살라 번제로 바친 죄벌이다. 이런 일은 내가 시키지도 않은 일이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일이 없다. 그런 일을 내가 생각인들 하여보았겠느냐?

아 남유다 아하스 왕도 자기 아들을 불 위로 걸어가게 했군요
뭐 어떤 이들은 성인식과 똑같은 것이다 라고 우길수도 있겠네요잉

아 이때 다메섹의 우상을 보고 제사장 우리야에게 그대로 예루살렘이 지으라고 명했군요

(왕하 16:3, 개역)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왕하 16:1, 개역) 르말랴의 아들 베가 십칠년에 유다 왕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되니
(왕하 16:2, 개역) 아하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을 치리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치 아니하고
(왕하 16:3, 개역)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왕하 16:4, 개역)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왕하 16:5, 개역) 이 때에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싸우려 하여 아하스를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하니라
(왕하 16:6, 개역) 당시에 아람 왕 르신이 엘랏을 회복하여 아람에 돌리고 유다 사람을 엘랏에서 쫓아내었고 아람 사람이 엘랏에 이르러 거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더라
(왕하 16:7, 개역)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컨대 올라와서 나를 그 손에서 구원하소서 하고
(왕하 16:8, 개역)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취하여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내었더니
(왕하 16:9, 개역) 앗수르 왕이 그 청을 듣고 곧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취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아 길로 옮기고 또 르신을 죽였더라
(왕하 16:10, 개역) 아하스 왕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단을 보고 드디어 그 구조와 제도의 식양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었더니
(왕하 16:11, 개역)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모든 것대로 단을 만든지라
(왕하 16:12, 개역)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와서 단을 보고 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
(왕하 16:13, 개역) 자기의 번제와 소제를 불사르고 또 전제를 붓고 수은제 짐승의 피를 단에 뿌리고
(왕하 16:14, 개역) 또 여호와의 앞 곧 전 앞에 있던 놋단을 옮기되 새 단과 여호와의 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단 북편에 두니라
(왕하 16:15, 개역) 아하스 왕이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하여 가로되 아침 번제와 저녁 소제와 왕의 번제와 그 소제와 모든 국민의 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를 다 이 큰 단 위에 불사르고 또 번제물의 피와 다른 제물의 피를 다 그 위에 뿌리고 오직 놋단은 나의 물을 일에 쓰게 하라 하매
(왕하 16:16, 개역)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의 모든 명대로 행하였더라


제가 제목을 되갚는다 라고 하니까 다들 부정적으로 보겠지만
이미 성경에 수차례 나옴에 있어서 그때는 또 당연히 받아들인다 말이죠
뉘앙스의 차이인줄 모르겠지만 당연히 받아들이는 그런 긍정적인 태도야 말로
자신을 속이는 거죠

뭐 되갚아? 우와 뒤 끝 작렬이네 무슨 쫌생이도 아니고 복수를 하다니
치사하다 치사해 라고 강한 부정이 나와야
이 말씀이 제대로 들어간 겁니다
반발하지 않는다면 내 속의 죄가 또 나를 속이는데 있어서
다른데 이미 관심이 눈이 돌아간 상태인 거죠
그 카이 찔림이 될 리가 없는 겁니다
왜? 나는 소중하니까 자기자신은 소중하다는 겁니다

찌르기는커녕 밭을 기경 뒤엎어버리기는커녕
사생아처럼 매를 단 하나도 허용치 않는 거죠

그런데 우짭니까 바로 이렇게
이 네가지 주제를 하나로 꼬치 꼬챙이처럼 찔러서 하나로 묶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창세가 3장에 나오는 가죽옷입니다
신약에서는 십자가라는 꼬챙이 인거죠

이들 네가지는 약속의 땅 마저도 더립히니
뭐 여호와 이름도 더럽히는 마당에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닌거지요
그카이 아껴둔 내 기념 이름을 아껴둠으로써 이제 마음껏
행한대로 갚는다 라고 하시듯이

니가 니 스스로 행함의 법칙 곧 선악의 법칙
행위의 책 대로 원했듯이 그래 행한대로 갚으마 라고 하신다 말이죠

행위를 따라서는 그 어떤 누구도 의에 거룩에 이르지 못해요
성화론자들이 이거 하나 믿다가 다 지옥가는 겁니다
의를 많이 행하면 의를 행한대로 갚으신다 라고 했으니까 많이 많이 쌓아야지

네 맞아요 자기 따나 자기 의 이랍시고 열심일 수 밖에 없어요
부자가 괜히 부자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의를 행한만큼이나 뒤로 몰래 악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라는 것을 인간들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모른다 라는 사실 조차도 새까맣게 잊어버리도록 마귀가 죄가 만드니까 말이죠
안그러면 죄책감에 단 하루도 살수 없어요
잠을 못 자요 잠을
그래서 거짓 저울로 속이는 그 맛에 빠지도록 해야
그 재미로 더더욱 살고요 그것으로 부자가 안 될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이게 자기 열심에 자기 의로움에 중독된 자들입니다
그 만큼 뒤로는 몰래 그에 상당한 죄도 짖기 마련이거든요

안 지으면 될 꺼 아니가
문제는 도적질 하지 말라 라고 가르치는 내 양심이 도로 도둑질 안하고는 못 배기도록
양심이 부추기는 겁니다 이 간극을 인간 쪽에서는 좁힐 방법이 없어요

이미 고장난 하나님의 형상인 첫아담의 형상이거든요
그래서 깨어진 밑바닥 깨진 장독대를 아예 강물에 빠뜨리면
채우는 자기 수고 없이
자기 의로움 하나 없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쳐 나는 겁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형상이 보이지 않게 만들어졌고요
이 반대로 인간은 성화가 된 멋들어진 자기의 형상을 성화된 형상을 보이도록 만들고파 하는데
그런 방식인 이미 철거 당한 겁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 이미 완료 되었다 말이죠
바로 생명의 강입니다
그 속에 빠져버림을 당하게 되면
깨어진 장독대를 찾을수가 없어요
꼬로록 생명수에 잠겨서 자아는 상실 된채로 흘러 흘러 넘쳐나는 겁니다
자아가 없어요

결국 자기 의를 쌓는 열심히 주를 삼키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고

기여이 하나님의 의 이라는 생명수 강물에 끝까지 나 라는 밑바닥 깨아진 장독대에
내가 내 스스로 이룬 의로 장독대 채우겠다 라는 식인
여전히 행함의 책을 주장한다 말이죠

행함의 법칙이 아닌
생명수의 법칙은 그 반대의 법칙이 작동 되는 겁니다
아무리 죽어도 생명수가 계속해서 생명수에 꼬로록 잠겨진 그 장독대 사이 사이 구석 구석 사이로
생명수가 흐르도록 하시는 겁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예수 께서 산 것이다 말이죠

(갈 2:20, 공동)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 행함의 법칙이 들어갈 틈이 어디있습니까
모조리 믿음의 법칙 뿐인 선물인데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말이죠
괜히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라고 주장하는게 아닙니다
반드시 믿음은 이 행함과 한 세트가 되는 두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념 선물인 보이지 않는 믿음이 상실 되면
눈에 보이는 소망으로써 행함을 꽉꽉 채울 수밖에 없다 말이죠
그게 성화론자들의 주장입니다
남들에게 납득이 되게 할려고 주장하고프니까
보이지 않는 소망인 믿음을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 카이 보이는 것을 던져줘야 상대방을 납득 시키는 겁니다
말이 납득이지 가스라이팅으로 자기 밑으로 굴복 시키는 이기기 위한 복수심인 거지요
그래야 결핍을 채우니까요 백날 채워보세요 밑 빠진 장독대 라니깐 ~~~

그들이 또 괜히 야고보서를 운운하면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외치는게 아닙니다
꼭 저 다락방 이단이나 신천지 이단 같아요 그럴 때 보면 말이죠
지들도 저들의 행함에 못 따라가면서 말이지요

행함이 있는 믿음과 행함이 없는 믿음을 두 언약으로 한 세트를 구성했는데
그냥 행함이 있는 믿음의 행함이 아니라

부정적인 행함 즉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행함이다 라는 겁니다
즉 남들 다 알아먹는
남의 눈을 의식해서 하는 행함이 아니라
그 반대죠 비유로 말하는 자야 또 너냐 라고
비아냥 거림을 받는 행동들

심지어 본인 자신도 비아냥 거리는 행동이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써의 행함이다 말이죠

자기가 자신의 그런 행동을 비아냥 거릴 것인데
과연 하겠느냐 말이지요

그게 바로 아브라함이 비웃었던 그 읏음을 제물로 바치는 겁니다

또 기생 라합의 속임수 곧 거짓말이 참말로써 나오는 행함이 있는 믿음인데
정작 이스라엘은 에이 거짓말 이라고 비아냥 거린
가나안 정탐이였다 라는 거지요
정작 아이러니 하게도 역설적이게 가나안 여자 라합은 정작 믿었는데
다들 거짓말이라고 10명의 정탐꾼이 갈렙과 여호수아 그리고 모세까지 다 죽일려고 했던
그 비아냥을 담고서 나오는 기생 라합의 거짓말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름붙이기를 부정적인 행함이라고 해야
인간들이 반발하는 믿음이지
인 그러면 다들 수긍하는 척 또 연기를 해야 한다 말이죠

아니 하도 목사가 교인들이 교회 청소 조차도 안할려고 하니까
협박하는 차원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라고 우기는 식이니 말이죠
그럴려고 행함이 있는 믿음을 기록한게 아니거든오
그런데 알고보면 성화론자들의 주장이 바로 저런 내막의 확대인 겁니다
목사가 왜 답답해 할까요
자기를 목사 자기를 안 기쁘게 해 주니까 답답해 하는 겁니다

그런 목사를 보고 답답해 해야 한다 말이죠
제발 복음 외에는 관심 두지 말라꼬 왜 쓸데 없이 교회를 신경 쓰느냐 라고
백날 바른 교회 만들어 봐라 다 바람 같다 말이죠

결국 그게 우상숭배요 자기 자녀를 불 위로 걸어가게 하는
눈에 보이는 어떤 자극을 주겠다 라는 심뽀이다 말이죠

복에 복을 더하사 라는 이 단어로 가스펠 노레까정 지어가면서
사기를 사취 치면 뜯어내는 겁니다
독사의 자식 너희 아비는 마귀다 라는 바리새인 뺨 치는 거죠
바리새인 저리 가라 할 정도인 겁니다
백 배나 지옥자식이 아닌 천 배나 지옥자식을 만들고 있어요
가버나움은 소돔 고모라 저리가라인 겁니다
아주 평범하기 짝이 없는 동네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동성연애 하나 없고 지극히 평범한 이 사람 보통 사람 보통의 동네 도시인데 말이죠

서울의 유명 강사들이 대구에 오면 심심하면 하는 거짓말이 있어요
대구는 제 2의 예루살렘 이다 라고
서울은 제 1의 예루살렘 인 셈인거죠
아닌데 들을 때 마다 제 2의 소돔과 고모라 예요
서울은 제 1의 소돔과 고모라 곧 강도의 소굴이구요

왜 그렇게 삐딱하냐 라고 하는데
아니 유명 찬양 집회 목사가 젊은 아이들에게 하는 그 사탕발린 소리를
나이든 부흥강사 역시나 똑같은 멘트를 하길래
한 치 오차도 없이 그대로 하는지 하도 신기해서 말이죠
새것이 안 나오면 목사를 그 만 두던가
작년에도 같은 말
그 전전에도 같은 말
올해도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중언부언이 따로 없다 말이죠
그저 목사인 자기를 알아달라고 또 징징 거리는 것 뿐이다 말이죠

또 다들 기우제를 드리듯 무당을 안 찾는 대신
목사를 찾아서 기도 부탁하잖아요
그런데 엘리야는 그 반대로 물 붓고 하듯이
비오지 않기를 그것도 3년 반 동안 비오지 않게 기도하면
과연 추구감사절에 수확물도 없는데 무슨 수로 헌금을 내겠으며
헌금을 안 내면 무슨 수로 교회를 유지 할 수 있겠냐 라며
아예 목사 옷 벗어던지고 무당 옷을 입을 지언정
반드시 기우제를 드리고자 할 꺼다 말이죠

그럴줄 알고 일부러 반대로 기도하는 겁니다
교회야 사라지든 말든 오늘 본문 네 가지 주제를 하나로 꼬치 꼬챙이 꼿아서
하나로 묶어서 나오는 이 가죽옷과 같은
이 십자가의 피 옷과 같은 이 피 옷만
이 복음 주님 혼자 기쁜소식인
우리에게는 하나도 안 기쁜 
삼년 반의 비오지 않음을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써 추구 할 수 있겠냐 말이죠
다들 죽일려고 달려들 것인데 말이죠
아마 교회가 제일 먼저 엘리야를 죽일려고 할꺼다 말이죠
북이스라엘 이세벨처럼 말이지요

엘리야는 말만 하고 자기는 배부름 속에 있는 겁니까?
아니지요 1260일 동안 광야 속으로 보이지 않는 소망 속으로 도망가지요

1000일이 넘어요 묵시의 세계에 들어간 겁니다

천은 단절을 말하는 겁니다 육의 차단인 겁니다
이 육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전쟁이 벌어졌다 라는 겁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자가 선지자 아닙니까

교회 청소 안한다고 운운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아닌 겁니다
교회 헌금 내라고 운운하는 행함이 아니예요
그 반대이지요 과부의 두 렙돈 6원 6원 12원으로 성전의 아름다운 벽돌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가루로 만드는 과부의 헌금인 종말의 헌금으로써의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라는 겁니다
어딜 보이는 교회를 소망하느냐 말이죠

뿌쌌뿌야지

신땡지 이 놈들 뭐 지신밟기 라고 불상 목을 치던데
똑가은 식으로 자기들 교회도 불 태워 버려야 한다 말이죠

곧 자기자신의 모가지도 짤라야 한다 말이죠

둘다 우상인데 

자꾸 보이는 것을 실현함으로써 보이는 자기 육의 자랑
자기는 행했다 너는 왜 안 행하니 라는 그 따위
바람 같은 것 세울려고
우상을 세울려고

보이고자 불 위로 걸어가게 하는 그 따위 기적
지성이면 감천을 왜 하느냐 말이죠
지성이면 감천은 모든 이방의 우상제사인데

그 반대를 보여줘야지요
보여주면 맞아 죽거든요
예수님이 괜히 금식 회개 눈물 기도하는 자들 옆에

라마단 기간처럼 금식 지키고 있는데
옆에서 치킨 맥주를 배달 시켜서 선풍기까지 틀고
냄새를 날릴때에
미워 죽을꺼 아닙니까

바로 그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반드시 먹보에 술꾼에 세리외 죄인의 친구로다 라는 별명 까지 얻어내시는 것까지
이게 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라는 겁니다

저들의 교리를 박살 내는 거죠
저런 별명을 붙임으로써 왕따 시키겠다는데 뭐 같이 어울리겠다 라고
그러면 너도 같은 별명에 같은 왕따 시키겠다 라고
사회적으로 매장 시키겠다 라는 암묵적인 사형 선고 경고인 거죠

우리 무리 속에 들어올수 없다 라고 경계선 긋는 겁니다

그 경계선을 주님은 깨뜨리시고자
막힌 담을 허무시는데
인간은 다시 주어 담아서 경계선을 긋고 막힌 담을
가자지구 담 벼락을 높이 높이 세우는 겁니다

그렇게 땅굴 지하 속에 살게 해 놓고서
자기들은 지하에 안 살고 뭍에서 산다 라고 우기는 거죠
누가 과연 지하에 사는 것일까요
누가 눈 어두운 소경인 겁니까?
소경 아니다 볼 줄 안다 라는 자들이 소경인 겁니다

자 이렇게 가죽 옷이 먼저 떳기에
십자가의 피 옷이 먼저 떳기에

거기에 걸맞은 죄악들이 꼬치 꼬챙이에 꽃히고자 드러나야 하는 겁니다

나는 저런 죄악 안 저지를 거야?

택도 없습니다
신명기 율법은 너희들은 뭘 해도 자식 잡아먹고 불에 지나가게 하고

즉 내 아들 고아 안 만들겠다 왕의 DNA를 가진 아들이다 라고 하지만
출애굽 하지 않은 아들이기에
이미 죽은 시체를 왕 만들겠다 라고

이게 바알을 숭배하는 여자들의 공통된 목적이다 말이죠

신명기 율법은 이미 너희들은 그렇게 자식 잡아먹고 부모 잡아먹는
부모란 성경에서 홍해를 건넌 출애굽한 자를 부모라고 했지요
그게 선지자 이다 말이죠 그냥 부모가 아닙니다
어버이 주일에 카네이션 달고 효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건 유교와 혼합된 기독교 이고요

홍해를 건넌 선지자로써의 부모이다 말이죠
죽음을 건넌 자인 거죠

그러니 그런 선지자 부모는 자식들에게 잡아먹힐 소리만 할 뿐인 겁니다
이상 곧 환상을 말하고요 곧 언약이지요
그리고 비유로 말하지요 못 알아먹는
3년 반 동안 비오지 않기는 기도하는 그런 엘리야 선지자처럼 부모란 그런 선지자의 기능을 하는데 있어서
자식들은 그런 부모인 선지자릉 반드시 안 죽이고는 못 배기는
듣기 싫은 소리만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하고 비유로 말하는 자야 또 너냐
보기는 보아도 알수 없는 보이지 않는 소망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만을 외치는 겁니다


결국 남들은 다 안 들어도 나는 반드시 들을꼬야
남들은 다 못 보아도 나는 반드시 보고야 말꼬야 가 아니라

그런 조건 이나 원인이나 문제 의식을 가지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정답이 떳기에
선지자들을 죽이시기로 작정 되었기에
너희 입 속에 먹히기로 되어 있기에

이런 죄악들을 들추시는 이 사랑만이 옳았음을
너희들을 그 정답에 맞는 문제아로써

원인 없는 결과의 증상물로써 반드시 내 너에게 장가 들고야 말겠다 라는

이 화목제
이 가죽옷의 가치를

저 무화과 나뭇잎으로 대충 대충 평강이다 라고
자기 스스로 올라오는 그 지옥의 스멀 스멀 죄악들을 가리우는
그 짓꺼리는 손 땍지 라고

가죽옷이 가려주셔야 제대로 가리움을 받는
이 모욕적인 십자가가 나 보다 옳았다 라는 증인으로 삼으시겠다 라는 겁니다

달음박질 함도 아니요 원함도 아닌
오로지 이 십자가의 피에 걸맞는 환자로써

세 번 원망항 자로써
그 원망 안하는 자가 아닌
원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세 번 부인 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끈히 다 용서하시는 모든 허물을 다 덮는

이 피에 걸맞는 피신부로써의
피 신랑이 찾아낸 주께만 범죄한 피 신부 곧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주님은 반드시 세우시겠다 라고 다 이루신 그 결과물을 우리는 누리는 겁니다

우리는 저런 네 가지 일을 실수한 고때만 튀어나온게 아니라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기에
날 때부터 늘 수시로 해 왔던 죄악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죽옷에 걸맞게 무화과 나뭇잎으로 되도않게 가린
일회용 기저귀는 한 번 요실금으로 인해 다시는 사용할 수 없는 일회용이라는
자기 한계가 있지만

주님의 가죽옷 곧 십자가의 피 옷은
7에 70번 용서 490번의 다회용 기저귀 라는 뜻이 아니라
무한대로 싸도 요실금으로 줄줄 세는 오줌을 다 막아주면서 동시에
심지어 뽀송 뽀송 까지 한 늘 새로움을 준다 라는 사실을 누리도록 하는 겁니다

어디 오줌 뿐이겠습니까? 지옥의 썩은 내가 스멀 스멀 올라오는 똥도 배고픔도
땀에 젖은 암내도 모조리 다 생명수 강물에 빠뜨려

뚜껍아 뚜겁아 헌집 줄게 새 집 아들의 형상 으로 새로 지어달라고 우는 자에게
새로 주신다 라는 이 약속에 의해서 새로 찍혀 나오는 겁니다

간음죄 살인죄 인구조사죄를 지어 놓고도
그 죄를 씻을 수 있는 의로움을 단 하나도 행한 적도 없는
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다윗에게

모든 허물을 다 덮어서 가리워 주는
이 주님 홀로 당하신 이 수치 앞에서

내가 내 자신의 수치를 가리우는 행동들이야 말로
주님의 십자가의 피 용서를 모독하고 있다 라는 사실

도리어 도리어 감사하면서 울면서 뺑뺑이 도는 것이
나를 제대로 허물어 버리는
여리고성 허물기 나 자신 허물이 라는

오로지 주님의 피 용서의 사랑의 가리움 만이
나 라는 우상을 허물지
내가 남을 7번 용서하겠다는 둥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 라는 둥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는 둥 

이런 땅의 계집종 하갈과 그 소생 이스마엘의 언약이
바로 땅에서 출발한 보이는 소망들이고

하늘에서 출발한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난
하늘에서 출발한 보이지 않는 소망 곧 아들의 형상만이
나 라는 우상을 제대로 심판 하시는

주님의 언약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그 죄를 제대로 심판하시는
이 모욕적인 구원인 이 십자가의 피 옷만이

새신부에게 입히실 그리스도의 옷임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형상
출애굽하신 아들의 형상임을

우리는 늘 날마다 새롭게 새롭게 아들의 형상으로 지으셨음을 마음껏 누리도록
제발 내가 내 수치를 가리우는 그 헛짓 그 의문의 반복으로
세월 허송 하지 않도록 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탄식을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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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 누가 정죄하리요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자기아들을 아끼지 읺으심) (롬 8,31-34)
2024.12. 8.

(요일 4:9, 개역)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롬 8,28-30)
로마서 2022 2024. 11. 15. 21:13
22-049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 (롬 8,28-30)

〈롬 8,31-34, 개역한글, 신약성경 250쪽, 찬송가 356장 새 216장 성자의 귀한 몸  , 찬송가 426 장 날 위하여 날 위하여〉

내 죄 사함 받고서 (찬 210) 새찬송가 421장
찬미예수 2000 - No.1224 예수 안에 있는
찬미예수 2000 - No.1094 주 예수 사랑 기쁨
새찬송가 27장(통27) 빛나고 높은 보좌와
새찬송가 197장(통178)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새찬송가 196장(통174) 성령의 은사를
새찬송가 216장(통356) 성자의 귀한 몸
날 위하여 날 위하여 (찬 426)
찬미예수 2000 - No.1243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찬송가 349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새찬송가 214장〉

찬미예수 2000 - No.1094 주 예수 사랑 기쁨

1. 주예수 사랑기쁨 내마음속에 내마음속에 내마음속에
주예수 사랑기쁨 내마음속에 내마음속에 있네

2. 이제는 정죄없네 예수안에서 예수안에서 예수안에서
이제는 정죄없네 예수안에서 예수안에서 없네

3. 이제는 해방됐네 예수안에서 예수안에서 예수안에서
이제는 해방됐네 예수안에서 예수안에서 해방

(후렴)
나는 기뻐요 정말기뻐요 주예수 사랑 기쁨 내맘에
나는 기뻐요 정말기뻐요 주예수 사랑 기쁨 내맘에


찬미예수 2000 - No.1224 예수 안에 있는

예수안에 있는 나에게 결코 정죄함없네
생명의 성령의 법이 해방하였네
예수안에 있는 나에게 결코 정죄함없네
생명의 성령의 법이 해방하였네
예수 예수 오직 예수 예수 예수 오직 예수
죄와 사망에서 나를 구원했네
죄와 사망에서 나를 구원했네
해방되었네 해방되었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네 해방되었네 죄와 사망의 법에서


〈가스펠;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No.1243 찬미예수 2000〉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나의 삶의 문이 열렸네 (우리가 고침 받았네, 나음 입었네, 수치가 가려졌네)
저 어둠의 권세는 힘이 없네 주 보혈의 능력으로
원수가 날 정죄할 때도 난 의롭게 설 수 있네 (우리를 의롭게 했네)
난(우린) 더 이상 정죄함 없네 난(우린) 주 보혈 아래 있네 
(나 라는 것이 비로소 삭제 되었기에 우리로 다 수정)

난 주 보혈 아래 있네 그 피로 내 죄 사했네
하나님의 긍휼 날 거룩케 하시었네
난 주 보혈 아래 있네 난 원수의 어떠한 공격에도
더 이상 넘어지지 않네 난 주 보혈 아래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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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다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네
저 어둠의 권세는 힘이 없네  주 보혈의 능력으로
원수가 날 정죄할 때도  우릴 벌써 의롭게 하셨네
우린 더 이상 정죄함 없네  우린 주 보혈 아래 있네 

우린 주 보혈 아래 있네 그 피로 우리 죄 사했네
하나님의 긍휼 날 거룩케 하시었네
우린 주 보혈 아래 있네 우린 원수의 어떠한 공격에도
더 이상 넘어지지 않네 우린 주 보혈 아래 있네

(요즘 풍의 노래라 따라 하기 힘들지만 뭐 반복하니 그리 어렵지도 않네요
어르신 분들은 너무 어렵겠지만 말이지요
오늘 말씀과 너무 딱 맞게 연관 되었기에 가사를 올렸지만 
출애굽 12장 13절을 기준으로 해서 작사한 외국 곡이던데
가사를 좀 수정하자면 [나의 삶의 문이 열렸네] 
내 삶이 이제야 비로소 없어지는 속 시원함을 
거꾸로 답답한 내 삶 속에 들어가 다시 출발하겠다 라는 것이 좀 영 아닌 듯 싶네요

나는 죽고 예수님이 내 안에 산다 라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네 라고 그 반대로 해야죠 

그리고 [난 의롭게 설 수 있네] 라고 마치 미완료인냥 느낌이 강한데
[이미 섰다] 라는 [완료]이니까 내 삶의 문이 굳이 열릴 필요가 없는 거죠
가능성을 주는 것이 복음이 아니지요 그것은 여전히 미완료인 결핍이니 또 내 숙제에 대한 미련을 두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식의 동기부여가 미국의 복음주의인듯
[이미 다 이루었는데] 내 삶이라는 그 수에 칠 가치도 없는 의문의 반복을 왜 또 만복하느냐 말이죠 마치 미완료인 결핍을 또 채울려고 하듯이 말이죠 결국
완료를 보면서도 여전히 결핍을 채우겠다 라는 식으로 자기 수치를 자기가 가리우겠다 라는 발상이 섞여 있는 모습이니 새노래인 헌노래의 한계인 겁니다 
나를 빼 버리면 간단한데 내 구원을 자꾸 굳이 집어 넣을려고 하니 이런 무리수의 노래들 뿐인 거지요 내 행함을 왜 집어넣을려고 하는지 여전히 정답을 맞추겠다 라는 
원인을 갖추는 내 숙제를 기여이 개입시킬려는 모습 
그래서 손 떼게하시는 예수님의 숙제가 없으면 이미 벌써 소돔과 고모라일 뿐인 겁니다
남겨둔 한 씨 덕분의 섬기심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그가 찔림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겁니다)

(롬 9:29, 개역)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사 1:9, 개역)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출 12:13, 개역)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마 26:2, 새번역) "너희가 아는 대로,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인데, 인자가 넘겨져서 십자가에 달릴 것이다." / ㉠출 12:13; 21-28을 볼 것
(막 14:1, 새번역) ㉠유월절과 ㉡무교절 이틀 전이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속임수를 써서 예수를 붙잡아 죽일까' 하고 궁리하고 있었다. / ㉠출 12:13; 21-28을 볼 것 ㉡출 12:15-20을 볼 것
(눅 22:15,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참으로 간절히 바랐다. / ㉦출 12:13; 21-28을 볼 것
(눅 22:16, 새번역)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다시는 유월절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 / ㉧출 12:13; 21-28을 볼 것
(요 2:23, 새번역) 예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에, 많은 사람이 그가 행하시는 표징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 / ㉤출 12:13; 21-28을 볼 것
(요 11:55, 새번역) 유대 사람들의 ㉦유월절이 가까이 다가오니, 많은 사람이 자기의 몸을 성결하게 하려고,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 / ㉦출 12:13; 21-28을 볼 것
(요 12:1, 새번역)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가셨다. 그 곳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에 살리신 나사로가 사는 곳이다. / ㉠출 12:13; 21-28을 볼 것
(고전 5:7, 새번역) 여러분은 새 반죽이 되기 위해서,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사실 여러분은 누룩이 들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습니다. / ㉡출 12:13; 21-28을 볼 것


〈롬 8,31-34, 개역한글, 신약성경 250쪽〉

(롬 8:31, 개역)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3, 개역)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1, 새번역) 그렇다면, 이런 일을 두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롬 8:32, 새번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롬 8:33, 새번역)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발하겠습니까? 의롭다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롬 8:34, 새번역) 누가 감히 그들을 정죄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는 죽으셨지만 오히려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여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가지 서로 상대적은 의미가 마치 두 언약이 한 세트인냥 나옵니다

로마서 8장 31절에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에서 대적 적대가 나옵니다 
여기에 상대적인 의미가 

32절에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에서 은사가 그 상대적인 의미로 나옵니다


그 다음 두 번째는 

(롬 8:33, 개역)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송사 하리요] 라고 송사 곧 고소가 나옵니다
여기에 상대적인 의미가 같은 절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라고 의로움이 나옵니다


그 다음 세 번째 서로 상대적인 의미로써 한 세트를 구성하는 두 언약이 뭔고 하니

(롬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4절에 [누가 정죄 하리요] 라고 정죄가 나옵니다
여기에 상대적인 의미가 바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예수]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 자]로써 새언약의 말씀이 나오는 겁니다


자 이 세가지를 다시 설명하면

대적 VS 은사 주심
송사 VS 의롭다 하심
정죄 VS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가 친히 간구하심

(롬 8:26, 개역)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귀 곧 사망이 쏘는 이 대적 송사 정죄는
과거 창세 때부터 미래 곧 주의 나라가 임한 마지막 때 종말까지 계속
계속해서 두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계속 나타나는 겁니다
이 수천년 동안 퍼부어 지는 것을 뭐 성화론자들말처럼 이겨내어야 한다굽쇼?
겨우 100년 도 못 사는 주제에 무슨 수로 육이 육의 생각인 하나님의 원수된
이 대적 송사 정죄를 이겨낼수가 있겠습니까
마귀의 주장은 바로 이런 육의 숙제
곧 나의 숙제가 도리어 나 스스로를 하나님의 은사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고 [송사]하고
하나님의 간구하심을 [정죄]하고 있다 라는 겁니다
내 숙제를 하면 할수록 말이지요

특히 송사는 법적 용어입니다
그 법에 상대적인 의로움은 법적용어가 아닌 율법 외에 한 의 라고
자기 숙제로서의 법 지켰는냐 안 지켰느냐 라는 법칙 바깥의
율법 외에 한 의로 따지시겠다 라고 법이 아닌 인애와 자비를 언급하십니다

그카이 또 인간은 나도 한 의 합니다 라고 남 7번 용서를 운운할때에
그럼 나는 7에 70번 용서 라는 일곱이라는 절대성을
인간이 쥐는 율법이 아닌
사랑의 절대성으로써 법 외부에서 벌어진다 라고
니가 지키는 법 아닌
니가 도저히 못 지키는 의
그 7에 70번의 의로움을 도로 받아야 할 입장이 진짜 의로움이다 라는 겁니다
안그러면 자기 남 용서 7번 용서 한 것 안 알아주는 것에 송사 고소하는
그런 정직한 영이 없는 자 라는 것을 들통날 방법이 없거든요
남 7번 용서도 사랑이 아니라 의로움이 아니라 거룩이 아니라
자기 수치를 스스로 가리고자 하는 태도에서 나온 행위이니까 말이죠
그런데 왜 8번은 못 하는가? 행위는 자기 한계에 언제든지 부딧힐 수밖에 없는
잠재성이 있으니까 말이죠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닌 이상은 의로움이 아닌 겁니다
즉 하나님은 이 의로움에 집착하시는 이유는
더 이상 처음에 만들었던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거든요
죄가 들어와서 선악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발가벗은 것을 자기 스스로 가리고자 해 버린
더 이상 주님이 필요치도 않은 창조주를 모르는
오로지 자기자신만이 우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의가 없기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에
인간을 더 이상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기에
시체요 죽은 껍데기이기 때문에
중심을 주지 않는 이상은 인간이 아닌 거죠
그러니 인애와 자비 곧 긍휼이 아니면 살아있지 않은 겁니다 
그저 좀비일 뿐인 거죠

그런다고 가만히 있을 인간이 아니지요
늘 수치를 가리고자 죄의 소원대로 문턱을 넘을려고 합니다

(창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7, 새번역)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창 4:7, 공동) 네가 잘했다면 왜 얼굴을 쳐들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잘못 먹었다면,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죄에 굴레를 씌워야 한다."
(창 4:7, 쉬운) 네가 좋은 마음을 품고 있다면 어찌 얼굴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좋은 마음을 품지 않으면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할 것이다. 죄는 너를 다스리고 싶어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즉 죄가 인간의 주인이 되어서 다스리고 있는데
이미 시체인 사망의 몸인데
인간은 반대로 자기가 살아있다 라고 우기니까
죄를 다스려 보겠다 라고 나서는 겁니다

(고전 15:54, 개역)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전 15:55, 개역)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6, 개역)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 15:57,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4, 새번역)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 ㉤사 25:8
(고전 15:55, 새번역)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 ㉥호 13:14(칠십인역)
(고전 15:56, 새번역)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
(고전 15:57, 새번역)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 ㉤사 25:8

이사야 이오팔 여기에도 나오네요

영원히가 아닌 단기적인 일회용 기저귀처럼 임시방편으로 수치를 가리우는 그 무화과나뭇잎은 언젠가는 썩습니다 그 썩을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우고자 하는 그 몸 뚱아리도
동일하게 썩고 있다 라는 증거죠 이미 썩은 겁니다 과학자들 말처럼 세포는 왜 태어나는가? 죽기 위해서 태어나듯이 말이죠 왜? 그건 몰라
율법이 알려줍니다 넌 이미 시체야 라고 사망의 몸이요 썩은 자야 즉 의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래사 율법은 율법 외에 한 의를 소개하는 몽학선생으로써 우리를 아니 먼저된 이스라엘을 선행학습 시켰습니다 그 이스라엘이 행위로는 의에 이룰수 없는 것을
예수님의 죽음으로 출발한 믿음으로 이룬 것에 감사함이 아닌 도리어
나는 못하는데 왜 니가 해 라고 송사 고소해서 법적으로 죽여버렸다 말이죠
모세 율법만으로 충분한데 왜 다윗언약이 필요하냐 라고

헹함을 요구하는 율법으로는 의에 못 이르고요
도리어 율법은 죄 아래 가두는 넌 시체야 라고 규정지음을 당하는데
나 있음으로 출발하는 인간의 믿음에서는 도저히 안 믿겨지는
그래서 믿고픈 것만 믿겠다 라고
법 법 법을 따지는 겁니다 

법을 못 지키면 다행인데 지키게 되니
도적질 하지 말라를 지키게 되니 그 다음날에는 더 도적질 할 수밖에 없는 죄의 소원이
문턱에서 노리고 쏘고 있는 겁니다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더더욱 말이지요
주님을 쳐다보겠끔 화살표 방향을 제시하는 몽학선생을 무시하고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넌 시체야 의가 없어 의는 저분만 있어 라고 해도
율법을 무시하고 자기는 살아있다 라고 우기니
비로소 살인이라는 죽음을 죽음이 펼쳐서
유일하게 산 자 되신 분을 
산 자의 하나님 살아게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데 성공하는
그 마귀가 바랬던 바를 이룹니다
그러나 그것이 도리어 미끼를 물고 올무에 걸려든 겁니다
모세언약만이 최종이면 다시 살수 없겠지요
그러나 다윗언약이 와야 이 죽은 자도 살리시기 때문에
왜 죽은 자인지를 또렷하게 만드시고 밝히시고
죽은 자 이기 때문에 생명을 시기하고 죽일 수 밖에 없으나
그 생명이 죽음이 죽은다고 죽어서 끝나버리면
죽음이 도리어 승리한 생명이 되니 애초부터 그런 헛된 허구가 우상이 처음부터 신이였겠지요
그러나 생명은 죽어도 다시 삽니다

의인은 죽어도 다시 살기에
즉 이 말은 상대적인 두 언약이 한세트가 되는
죽음은 아무리 산 척을 해도 아무리 죽여도 죽음이 죽이는 것은 바람을 먹는 것과 같다 말이죠
의인은 죽어도 사는 이 믿음으로 인해 심지어 예수님의 죽음으로 출발한 믿음이기에
예수님의 죽음이 나 보다 옳았다 라는 말은
결국 나는 허구였고 시체였고 바람이였구 안개 먼지 수에 칠 가치가 없고
주님의 죽음이 도리어 우리의 어두운 눈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산 자요 산 소망이였다 라는 겁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소망 곧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진짜 현실 생방송 라이브 리얼
진짜야 사실이야 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말이죠

여기에 인간의 나 있음에서 출발한 그 허구 허상 헛바람은
남을 7번 용서하겠다 이라는 발상을 법적조건으로 갖추고자 실시하는 겁니다
이것이 살인의지로 나타날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특히 종교라는 이 음녀는 더더욱 이런 복수심에 가득차 있는 겁니다
모세언약만으로 충분하다 다윗언약 필요 없다 라고 임마누엘을 구하지 않겠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 라는 것이 도리어 대적 송사 정죄하고 있다 라는 겁니다
누구를? 임마누엘 아기를 무시하고 모독하고 정죄하는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고
다들 고개를 돌리는 겁니다 나의 거울로써 비춰주고 있는데도 말이지요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다 멋들어진 모습이 아닌 난 절대로 저 모욕적인
부끄러운 십자가의 모습이 될 수 없다 라고 죄 아래 갇힐 수가 없다 라고 말이죠

이런 둘로 나누어진 마음인 원수를 [은사]로 성령 곧 정직한 영이 없는 자를
그 중심 한 가운데를 여호와의 팔로 여호와의 뿔로 빵구멍 내시고
주의 [의롭다 하심]으로 앞뒤 모순된 찢으셨다가 다시 싸매어 주시는 공백 빈터 광야로 만드시고
주의 [간구하심]으로 믿음 떨어지지 말라 라고 주님의 죽음으로 출발한 믿음을 꽉꽉 채우시겠다 라는
둘로 나누어진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시고 즉 의문의 증서인 율법을 다 이루었다 라고 책걸이 찢으시고 막힌담을 헐어서 둘로 나누어진 경계선을 허무시니까 이제
경계선이 없는 하나가 된 겁니다
바로 이런 완료를 율법 외에 한 의가 이루시는 겁니다
이 주님의 숙제를 완성하시는 겁니다


정죄를 하는 자들은 주로 법적인 위치에 있는 자들입니다
저 사람은 유죄입니다 라고 판결 내릴수 있고
그 죄악에 형벌을 가할수 있는 법과 연관된 자들
죄인을 잡는 형사 경찰부터 시작해서 교육가 곧 윤리 도덕을 가르치는 선생까지 말이죠

그래서 율법을 쥔 자들은 돌을 던질수 있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은 죄 아래 갇혀버렸기에 돌 안 맞을 자는 단 한명도 없습니다
그때만 간음죄 살인죄 인구조사죄를 저지르는게 아니라
모친의 죄 충에 태어났기에 언제든지 돌삐 맞아 죽어도 할 말 없습니다
문제는 누가 돌삐를 던져 죽일수 있느냐 라는 겁니다
그것 또한 아무도 없습니다 오로지 죄의 권능은 율법으로써
율법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고자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고자 율법을 쥐는 겁니다
그 역시나 죽기를 무서워서 모세가 수건을 안 벗은 것인데
즉 사랑이 없다 라는 증거죠
의가 없다 라는 거지요
의가 없는 자가 의를 쥘려고 하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의가 도리어 의를 쥔 자를 고소 합니다
마치 법궤가 법궤 뒤에 숨은 홈니와 비느하스를 고발하고자
블레셋 군사들아 홈니와 비느하스가 법궤인 내 뒤에 숨었단다 어서 죽여라 라고
동네 이장님 방송송출기에 마이크 대로 다 떠들어서 고자질 하듯이 말이죠

그러나 의가 없다고 우는 자
정직한 영이 없다 라고 우는 자에게는
죄인에게 딱 맞는 환자에게 딱 맞는 의사가 등장하듯이
주께만 범죄한 자에게는 구원자가 나타나는 겁니다
문제는 그 어떤 인간 치고 자기를 건강하다 지금 잠깐 몸이 아파도 언제든지 건강해지고자
약도 먹고 운동도 하고 병원에 부지런히 다녀서 치료하면 언제든지 건강해질수 있다 라고 여기지
누가 아예 자신은 죽어마땅한 지옥의 몸이요 가망없는 자 라고 여기겠냐 말이죠
누가 천벌을 받을 죄인으로 여기겠습니까 그래도 완벽한 의인은 못 되어도
그러나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며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선한 방향을 추구하면서 산다 라고
자신을 자부하고 있지 누가 지금 당장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 여기겠느냐 말이죠
심지어 예수님을 죽인 살인을 벌려도
성령이 40일 만에 주어지기 그 하루 전까지 39일째가 되어도
인간은 자기가 괜찮을 인간이요 하나님을 잘 믿는다 라고 자부하면서 살았는데
어떻게 하루 만에 성령으로 인해 우찌할꼬 가슴을 치면서
왜 자신이 살인자인지 비로소 통지서가 날라오고난 다음부터 우는 것일까요
그 전에는 왜 안되는 겁니까?
이 앞뒤 모순된 간극의 갭을 누가 과연 제대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이렇게 아무도 없는 가운데서
여기에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가 등장 합니다
위에서 언급하기를 아들 이라고 했습니다
즉 출애굽한 자는 아들 밖에 없고
또 아들이란 아버지와의 관계성에 놓인 자입니다
그렇기에 유업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들 아버지와의 관계성 즉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서 난 자 이다는 거죠

그 아들이 세상에 율법 외에 한 의로 나타나서 의롭다 라고 하십니다
그 아들의 영이 이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곧 아따 끊어진 둘로 나눈 관계를
모세언약 지켜서 끊어버린 경계선 긋고 막힌 담을 높이 크게 넓게 길게 세운 것을 허물고 쳐들어 와서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고
그리고 유업 곧 아버지로써 아들에게 주는 유업 기업 고엘을 고아인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시겠다 라고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이 세가지 유업 재산을 물려주십니다
은사 의롭게 하심 친히 간구하심

여기에 인간의 회개 눈물 금식 기도는 안 통하는 겁니다
도리어 이 꺽으신 뼈로 주님 쪽에서 손수 직접 마련하신 화목제로
씹고 뜯고 머고 마시는 겁니다

이 꺽으신 뼈 곧 아들 즉 유일하게 사망권세애서 출애굽한 아들
광야 속에 들어가도 죽지 않는 음부의 권세가 아기지 못하는 아들
이 꺽으신 뼈의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은사요
의롭다 하심이요
간구하심 곧 성령의 놀라운 탄식을 말이죠

이것이 아들의 소원입니다
상대적인 죄의 소원에 차이나는

아들이 지닌 의미입니다 이것을 다 합쳐 보면
바로 의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 곧 거룩입니다
즉 거룩한 자는 아들 밖에 없다 말이죠

그런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고 했거든요 그리고 모든 인간이 암묵적으로 이것에 동의를 해 버렸다 말이죠
그런 판국에 정죄를 하는 자들이 졸지에 생기는 겁니다

죄의 소원이 덮쳤기에 이 아벨의 피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안 흘리고는 못 배기는 자들이 말이지요
예수님의 피 까지 흘리는 십자가의 죽음이 안 벌어지고는 못 배기는 거죠
그렇게 들통나고도 그저 자기 구원받기 라는 우상숭배에
이게 종교죠 모든 종교 심지어 기독교 조차도 말이죠
그렇게 국가 라는 짐승의 등에 올라탈려는 탐심에서 벗어날수가 없는 겁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 곧 아들이자 의인이신 분이 떳기에
그에 상대적인 마귀의 팔이 나타나듯이 말이죠
그레서 이 의인된 아들이 친히 간구하십니다
이 간구에 맞겠끔 베드로를 의인이 아닌 죄인 만들어서
마귀가 정죄 안하고는 못배기도록 만드심에
주님은 그 베드로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베드로야 내 너 믿음 떨어지지 말라고 기도했다 라고 말이죠

결국 세 번째 한세트는 바로 죄인을 부르러 오신 구원자
결국 구원자를 말하기 위해서 죄인으로 만드시고

반대로 마귀는 그 죄인 베드로를 정죄하는 일을 반드시 하도록 만드심으로써
이 두 언약을 한 세트로 형성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육이 도저히 동의를 할 수 없는 의의 일 이다는 겁니다

결국 이렇게 법을 쥔 자들의 특징은 바로
땅의 계집종 하갈의 자녀들처럼
가정부 같이 행했냐 안행했냐 라고 그것으로 월급이 깍이느냐 보상을 받느냐 라는 
행함을 주장하도록 되어 있고요 ~~~ 하라 ~~~ 하지말라 를 따지도록 되어 있고요

반대로 하늘의 예루살렘 자유하는 여자는
사랑을 받느냐 곧 용서를 받느냐 못받느냐 결국 이것은 인간 쪽에서 출발하는
행했느냐 안행했느냐로 따지는게 아니라
인간 쪽의 출발이 배제가 된
하늘 쪽에서의 출발인 주님의 숙제로 용서해 주시느냐 안용서해 주시느냐로 갈라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가지가 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겁니다
욥기서처럼 마귀와 예수님의 두 고래 싸움에 욥이라는 새우 등 터지는
중간에 낑긴 미끼가 된 겁니다 외부의 두 세력
사망의 권세와 수치를 가려주시는 싸움인 거죠
지난 주의 이 사망의 권세인 앗수르의 영광 과 즉 스스로 수치를 가리는 것과
주님이 손수 화목제물 되신 수치를 가려주시는 은혜냐
행함이냐 은혜냐 라는 전쟁인 겁니다
이 둘의 깊이 곧 사탄의 깊이와 하나님의 깊이 라는 두 언약을 우리는 보는 거죠

(롬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3, 개역) ~~~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개역) ~~~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사 25:8, 개역)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 25:8, 새번역) 주님께서 죽음을 영원히 멸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말끔히 닦아 주신다. 그의 백성이 온 세상에서 당한 수치를 없애 주신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고전 15:54, 새번역)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 ㉤사 25:8
(계 7:17, 새번역)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 ㉡시 23:2; 사 49:10 ㉢사 25:8


[내어주신 이가] [은사로 주지]
[의롭다 하신 이가] 
[죽으심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간구하시는 자] 라고

아니 법 앞에서 
법을 어긴 당사자를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자꾸 남 이야기 합니다
남을 이야기 한다 라는 말은 그 남이
죄인인 정죄받는 나를 대신 해서 무슨 일을 벌렸다 라고
그래서 너 빠져 내가 그 형벌 받을께 라고 나섰다 라는 의미에서
(아니 죄 없으신 분이 말이지요
오냐 오늘밤 너와 내가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그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이죠
여기에 상대적인 다른 십자가의 강도는 죽어가면서도 정죄하기 바쁘고
대적하기 바쁘고 송사하기 바쁩입니다 왜? 나 보다 더 나쁜 범법자 잡아야 자기 수치를 자기 스스로 가리우는 그 의문의 반복을 죽어가면서도 멈출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이 십자가의 사랑 곧 사랑이 없기에 아무것도 아닌 허공 바람을 끝까지 먹어버리겠다 라고 말이죠 그것이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하나님과 같이 된 선악의 법을 쥐고서 절대로 손 놓지 않겠다 라는 무거운 짐 그 의문의 반복을 손 놓을 수 없는 모습입니다 영원히 지옥에 가서도 이를 갈면서 [대적] [송사] [정죄] 뿐인 거죠 이것이 수에 칠 가치도 없는 인간의 숙제랍시고 죽어서도 멈출수 없는 죄의 소원 입니다)

나 내부의 일이 아니라 졸지에 외부의 일이 되어버렸다 라는 겁니다

법은 나 내부의 일이요 내 숙제로 벌어진 일을 따지는데
그게 가정부가 땅의 계집종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임에 반해

하늘의 자유하는 여자가 낳은 약속의 자녀는
졸지에 사랑의 관계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졸지에 우리를 양자 삼아서
졸지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 집어넣어버리는 이 사랑의 관계에서는
마치 신부에게 법을 따지고 요구하는게 아니라 사랑을 자꾸 언급하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는 자꾸 법적인 용어로 죄인 다루듯이 죄 지은자에게 형벌을 운운하는
고소 고발 송사 정죄 대적을 운운하는데

정작 주님은 자유하는 하늘의 여자 다루듯이
내가 그 죄값 대신 치루는 원수를 사랑하는
남을 용서하는 율법의 완성을 보여주시고자
외부에서 이미 다 해결했음을 완료 했다
내가 이미 벌금을 내었는데

마귀 형사가 따로 벌금내라 라고 사적으로 삥을 뜯는
그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오늘날 목사들이나
그저 돈돈돈 벌금 내라 라고 말이죠

그럼 지들는 그럼 벌금을 내던가 아니면 벤하닷을 뇌물받아 풀어줘서
그 목숨값을 대신 갚던가 아니면 너가 죽던가 해야 하는데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는데
정작 사형수 주제에 남을 사형시키겠다 라고 정죄하고 대적하고 송사하더라 라는 겁니다

맞아요 의인이 아니면 다 정죄받아 죽어마땅한 것 맞아요
그런데 문제는 정작 그 심판주가 정죄를 하지 않겠다 라고 하니까
마귀들이 그러면 개판됩니다 주님 이라고 
정죄해야 한다 라고 하더라 말이죠

그럼 진짜로 마귀가 의를 추구하고파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인정받을려고 하는 것일까요
자기 일 잘한다 라고 말이죠

정신과 의사 한테 들은 이야기 인데
어떤 정신병자는 자기 보다 약한 자를 기가막히게 잘 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약자들을 삥 뜯어가면서 그렇게 괴롭히는 거죠

그런데 갑자기 의사가 나타나서 회진 돌아가면서 진단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는데
그 환자가 방금전까지 그렇게 괴롭히더니
막상 의사가 나타나니까 새삼 걱정해 주는척 의사 선생님 이 친구 좀 어떻습니까
몸이 많이 좋아져야 할텐데 라고 자꾸 나서면서 보호자 행세를 하더라 말이죠

그럼 진정한 의사 곧 구원자 라면
바로 이렇게 보호자 행세 하는 자들로부터 건져내야 할 것이다 말이죠
오늘날 목사로부터 주님의 오른팔이 건져내시고 간구하시는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아들이다 라는 거지요

결국 성도는 바로 이런 대적자들 송사하는 자들 그리고 정죄하는 자들로부터
핍박받는 자들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도와주심이 뭔고 하니 대적 적대 전쟁을 노골적으로 할때에
은사를 주시고
준다 라는 말은 우리는 받는 입장이지
내 쪽에서 저 대적 적대 전쟁을 해결 할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 라는 겁니다
저들의 저런 모습이 내 내부의 숙제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그것 또한 외부에서 벌어진 핍박이니 아무리 아부를 떤다 라고 해도
저들은 이 은사가 먼저 떳기에 은혜가 먼저 떳기에
이 은사에 맞겠끔 상대적인 땅의 짓 육의 짓을 하도록 되어 있으니
이 은사가 도대체 뭐냐 곧 은혜가 도대체 뭐냐 라는 것이
저들의 대적인 핍박 보다 더 중요하다 라는 겁니다

은사를 사도바울은 매 맞는 것으로 표현하면서 그것이 사도됨의 증거이다 라고 했듯이

사도됨과 매 맞는 것이 믄 상관이며
아 그럼 매 맞으면 다 은사 받은자이고 사도이냐 말이죠
아니지요 그리스도의 능욕에 동참하는 거지
내가 잘못해서 매 맞는 것은 그냥 개고생일 뿐이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케 하시는 이 성령의 은사 이다 라는 겁니다

또 한 예로 우리가 노아가 은혜 받았더라 라는 장면에서 창세기 6장이였지요

드디어 인간들이 그래 그래 하나님 명령대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라를 지키겠다 라고 나서는 모습이

(창 1:28, 개역)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6:1, 개역)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창 6:2, 개역)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창 6:3,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창 6:4, 개역)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창 6:5, 개역)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6:6, 개역)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 6:7, 개역)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 6:8, 개역)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졸지에 음란이 된 겁니다 말씀을 음란이라는 우상숭배 곧 자기를 위한 도구로
생육했잖아 번성했잖아 충만하고 정복했잖아 라고 나올때에

이게 정치화 된 거죠 영웅이 나올 정도면

(창 6:4, 개역)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즉 여자 있고 자식 있고 용사 속 고대의 유명한 사람
다른 번역은 뭐라고 했는지 보죠

(창 6:4, 현대인) 그 당시에는 물론 그 후에도 땅에 네피림이라는 거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난 자녀들로 고대에 명성을 떨친 영웅적인 존재들이었다.

대부분 용사 그리고 장사 천하장사 라는 거죠 그리고 명성 이라고 킹제임스 번역이 그렇구
영웅은 현대인 현대언 번역이 그렇게 했구요

결국 왕제도의 시초가 이미 여기 있었네요
국가의 원조가 바벨탑이고 바벨탑 자체가 계급제도를 암시하지요 봉준호 영화 설국열차처럼

자 이렇게 생육 번성 자체가 경제문제가 해결되니까 배부르니까
그들에게서 난 딸 즉 배고프면 자식을 낳을 수 없잖아요 거기에다가 아름답기 까지
꼭 호세아처럼 에스겔에서 다루었듯이
다 죽어가던 핏덩어리야 제발 살라 라고

너거 엄마는 헷사람 너거 아빠는 아모리 사람 둘다 가나안 잡족
창녀와 포주 사이에서 돈도 없고 귀찮고 바로 버리는 거죠 미우니까

그 핏덩어리야 제발 살라 라고
그래서 물돼지 가죽신까지 입힐정도로 무럭 무럭 자라니까 아름다워지는 겁니다

경제문제 해결되니까 배불러서 이제는 종교 문제 누가 누가 더 사랑받냐
이 사랑문제 해결 되니까 이제는 자식까지 나아서 
내 자식은 왕의 유전자 DNA 사실은 RNA 인데 말이죠 
누구 자식이 어떤 여자의 자식이 유업을 받느냐
하갈이냐? 사라냐? 누가 열국의 어미냐

누가 왕이 될 상인가???? 라는 정치 문제가 되는 겁니다

즉 애굽에서 빠져나와서 사막 곧 초상집인 광야 속으로 들어가서
언약과 결혼을 하는 자가 되느냐 라는 거죠

단순히 그냥 광야의 들 백합화가 되는게 아니라

저들 경제 종교 정치를 다 무너뜨리는
애굽의 팔을 꺽어서 말이지요

그 자 만이 아들이다 곧 복의 근원 유업을 기업을 이어받을 자 이다 라는 겁니다

인간의 정치에 상대적인 십자가의 정치 곧 그리스도의 고난 능욕에 참예된 자 곧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간구하심 기도하심 덕분에 믿는 자 곧 성도가
십자가의 정치로 인해서 미끼로 작동이 되더라 말이죠

서로의 소욕을 못다록 철저하게 저들의 경제 종교 정치를 밟아서 팔을 뿌라버리고 꺽어버려서
광야로 도망치도록 하시는 그것이 바로 은사 이다 라는 겁니다

(고후 11:19, 개역)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고후 11:20, 개역)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고후 11:21, 개역) 우리가 약한 것 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고후 11:22, 개역)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고후 11:23, 개역)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후 11:24, 개역)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고후 11:25, 개역)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고후 11:26, 개역)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 11:27, 개역)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8, 개역)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 11:29, 개역)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고후 11:30, 개역)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약한 것을 은사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도됨이 40에 하나 감하는 매를 다섯 번이나

신명기에 40 이상 때리지 말라 했는데
하나를 빼서 39대를 다섯번이나
더 다섯배나 맞은 것이 되니 이것은 곁으로는 율법 지키는 척 하면서
오히려 모욕에 모욕을 더하면서 신명기법 조차도 함께 모욕하는
그 적개심으로 말씀을 실천하는 그 대적에 상대적인 은사로써의
사도됨이라는 기능이다 라는 거죠
그야말로 광야 속에 내일 던져질 아궁이에 던질 풀과 같이 된 입장이다 말이죠

(신 25:1, 개역)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신 25:2, 개역)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거든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죄의 경중대로 여수이 자기 앞에서 때리게 하라
(신 25:3, 개역)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과다히 때리면 네가 네 형제로 천히 여김을 받게 할까 하노라

(신 25:3, 쉬운) 그러나 사십 대 이상은 때리지 마시오. 왜냐하면 사십 대 이상 때리면 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오.
(신 25:3, 현대어)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40대 이상을 때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비록 죄인이지만 여러분의 동족이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까지 손상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마 6:30,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눅 12:28,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치 현장애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돌삐 쳐죽일려고 하는 남정네 율법 쥔 자들이
예수님까지 죽이고자 적대 할때에
정작 예수님은 그녀를 정죄치 않았듯이 말이지요

과연 누가 율법의 취지로써 율법을 지키는 자 입니까
남을 용서하는 자 입니까
정죄하는 자 입니까

아니 이 여자가 범죄 안한 것이 아닙니다
죄 지은 것 맞아요
그럼 죄 안 지은 놈이 그녀를 잡아야 하는데
모두다 죄 지은 자들인데 의인이 없는데
똥 묻은 놈이 똥 묻은 놈을 정죄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웃끼냐 말이죠
그래 그래 그렇게 정죄해서 죄악을 막아 보라니깐요
과연 의문의 반복인지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다 이루었다 인지
행함에서는 이 십자가가 비아냥꺼리일 뿐입니다
뭐 사랑으로 죄악을 없앨수 있다고?

요즘
요즘도 아니다 유럽에서 오래전부터 범죄자를 강압적으로 다루지 않고
오히려 깜빵까지 호텔급으로 자유도 주고 농사도 짓도록 해서
유화? 개화? 교화 되겠끔 각족 복지혜택과 스포츠시설 취미생활까지 장려하고
여러 교양프로그램까정 ㅋㅋㅋㅋ
그런데 그것도 중동 난민 오기 전의 나라가 부유할 때 이지
이제는 뭐 난민까지 국민 세금으로 교화 시킬 이유가 없다 말이죠

그런데 요즘 미국의 마약은 아무 심각해서 어떤 주는 경찰이 잡지를 않는다 라고
유럽에서 실패한 교화 시설에 원하는 사람 집어넣어서 각종 프로그램으로 교육시킨다 라고
너무 너무 많으니까 다 잡아넣을수가 없는 거죠

위에서 주님이 용서하신다 사랑이다 라고 하니까
또 마귀들이 유럽의 복지감옥소처럼 교화시키겠다 라고
또 그 의문의 반복이나
또 광명한 천사 노릇을 하는데
아까 고후 11장에서 언급되었죠 광명한 천사

(고후 11:13, 개역)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 11:14, 개역)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 11:15, 개역)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무턱대고 용서해 준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되면 누가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겠습니까?
용서를 이용해서 더더더 사기를 치고 더 자기 배를 위하여 우상숭배 하겠지요
십자가의 저주가 모욕이 사자처럼 두렵고 벌벌벌 떠는게 아니라
아까 그 정신병자처럼 가지고 노는 것이 되는 거죠

이런 이유로 방종하지 말라 라고 또 인간의 숙제가 스멀 스멀 그 지옥의 몸 답게 올라오는 겁니다
하여튼 인간에게서는 답이 없으니 이 의문의 반복을 하는 거지요

고맙게도 은사란 우리를 광야의 죽음 속으로 그 모욕적인 십자가로 집어넣는다는 사실
내일 아궁이에 던진다 라는 사실이다는 거죠
그게 은사입니다
저들의 [대적]에 상대적인 [은사]
왜?

지난 번에 나누었던 말씀 아들의 형상 곧 의의 형상 때문에

(롬 8:29, 개역)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개역)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아신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했기에
광야 속에 집어 넣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능욕에 말이지요
이것이 아들의 형상 이라는 붕어빵 주틀에 찍어내시는 거죠

결국 나의 의 내 의 자기자신의 의를 쳐다보라는게 아니라
주님의 찢겨지심과 다시 싸매어지신 다시 사심을 보라 라고
광야 광야 3일길 유월절 어린양의 피 흘림을 보라 라고 광야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주님은 이 의 곧 거룩에 집착하신다 말이죠
왜냐하면 의가 없는 자는 아들이 아니거든요
그럼 그 의는 저들 에덴동산 같았더라인 애굽이라는 잔칫집을 추구하겠습니까?
아니면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기념하는 광야 초상집을 추구하겠습니까?

지혜로운 자는 잔칫집에 가는 자가 아니라 초상집에 간다 라고 했어요

(전 7:2, 개역)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그런다고 인간이 잔칫집을 마다하고 인구소멸이 되는 초상집에 가겠습니까?
결국 지혜로운 자는 없다 라는 겁니다
전도서는 결국 이 율법인 전도서 마저도 이루는 자는 예수님 뿐임을
그 분만이 의인이지 
그 나머지는 어리석을 뿐이지 지혜로운 자는 없다 라는 겁니다

아까 말한 보호자 행세 구원자 행세 하는 자들로부터
구원을 구원하시는 자는 예수님 뿐이다 말이죠
지헤로운자 행세 하는 자들로부터 지혜를 탈출 시켜주는 자는 아들 곧 유일한 아들 되신 
예수님 뿐이다 말이죠

그렇기에 이 의에 하나님은 집착하시면서
이 의가 없는 자는 인간이 아니무이다 저주받아 마땅하다 말이죠
그래서 자기 죄로 우는 자를 찾는데
놀랍게도 이제는 의인이 없는게 아니라
의인이 너무 많아요
죄인이 없어요 죄인이
의인들 밖에 없으니
다들 의인이레 글쎄

이 지혜자가
이 구원자가 이 구원이라는 기능을 은사를 펼칠수가 없어요
의사가 의술을 펼쳐야 하는데 아무도 환자가 없다 라고 다들 건강한 자라고 하니
그래서 은사 라는 의사의 의료기능은
환자로 죄인으로 새롭게 의사에 맞는 한자
구원자에 맞는 주께만 범죄한 자로 새롭게 만드시는 겁니다
그게 은사입니다

은사가 먼저 떳기에
강퍅하게 만든 애굽왕의 적개심 대적으로 인해
안 부르짖고는 못 배기는 부르짖도록 만드는 이 믿음 떨어지지 말라 라고 간구하시는
기도하시는 분에 맞도록 마귀로부터 고발 당하고 송사 당하고
대적 곧 붙잡혀 정죄 당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거룩이 없는 자로 잡혀 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 쪽에서 대신 그 죄 값을 치르는 의가 비로소 나타나는 겁니다

인간의 의는 남을 위한 의가 이런 남을 용서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인 그 의는 하나도 없고요
그저 자기 구원의 탐욕 구원의 우상숭배를 위한 자기 의 쌓기로써
남 다 줘버리면 부자청년은 무슨 수로 구원받냐 말이죠
내 죽을께 너 살아라 라는 그런 의를 쌓을 수가 없어요
그카이 오히려 하나님의 의에 복종을 못 하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의가 탕자를 용서해 버리니까
자기 의 쌓은 것이 똥 되어버니까 그 동안 쌓은 공든탑이 하루 아침에
앗수르 영광처럼 다 무너져서
이제는 그 사모했던 그 우상 앗수르의 영광이
솔로몬의 영광이 도로 나를 치는 몽둥이가 되어서
자기 꾀에 자기가 누워서 침뱉게 되더라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을 아는 자식인 사랑이 없이
자기 의를 쌓고 하니까

이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의로써
복종하는게 아니라
졸지에 이 십자가가 이 사랑을
사랑의 하나님을 모르니까 
받은 적이 없으니까 
이 십자가에 대적하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는
그저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만을 구원만을 바라는 우상숭배로써
이 요나의 표적을 대적하고 송사하고 정죄하더라 말이죠
백날 정죄해 봐라 말이죠

십자가가 다 이루었는데
백날 죽여봐라 말이죠
사망이 누굴 쏘느냐
아무리 죽여도 다시 사는데

그카이 의문의 반복 뿐인거죠
말씀 지켜서 자기 의를 쌓은 것이
사실은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이요 송사요 정죄였다 라는 사실

그렇다면 내 구원이 아닌
주님의 구원만을 바래야 한다 말이죠
왜? 내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까 말이죠
내가 꺽으신 뼈롤 꺽었으니까

그것을 감출려고 아무리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고 
스멀 스멀 올라오는 죽음을 아무리 회개 눈물 금식 기도로 백날 가려도
택도 없는 겁니다

내 쪽에서 살릴려는 것이 다 허사이고
도리어 그 꺽으신 뼈가 내가 수치를 내 스스로 가리고자 하는 무화과 나뭇잎이 아니라
주님 쪽에서 꺽으신 뼈 쪽에서 제대로 나의 죄악을 이 또렷하게 들통난 제대로 된 수치를
가리우시고자 주님이 대신 수치를 당하신
이제 내 수치는 이 십자가의 수치에 비하면 수치 축에도 들지 않는
저 다윗에게 죽임을 당한 그 모욕 그 수치 그 부끄러운 십자가로써


제대로 또렷히 내가 죽이고자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도로 십자가라는 저주가 나를 도로 살리고자
나를 또렷히 죽이고 그 죽인 나를 도로 다시 싸매어 주실때에

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
맞습니다 내가 살인자 맞습니다 원수 맞습니다
그런 원수를 왜 용서하십니까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말도 안됩니다

나는 말이 되는 구원을 이룰려고 했는데
나는 말이 되는 의를 이룰려고 했는데
그거 다 배설물 똥덩어리 였군요
이 말이 안되는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십자가 만이 또렷한 밝히 보이는 완료
다 이루심이군요
이 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군요 라고

도로 살리시고자 한 십자가인데
우리는 내가 죽인 그 살인의지 죄악을 그 수치를 내 스스로 가리우고자
회개 눈물 금식 기도로 가리우고자 했던 것을

진짜 수치는 그게 아니야
이미 벌써 미리 아신 자를 정한 자를 아무리 먹보다 검은 죄가 있어도
그 모든 허물을 다 덮는
흰 눈 같이 희게 하시는 이 변론자 신원자 너의 신원 뭐 회개 눈물 금식 기도로
백날 아이를 살려봐라 택도 있나 없나
그 의문의 반복 때려치우고
주님이 마귀만을 상대로하신 그 수치 그 절대수치
이 십자가의 사랑에 적대하고 송사하고 정죄하는 
이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이 십자가를 무시할려는
이 마귀만을 상대로하신 이 수치 앞에서
그 딴 죄악은 죄악 축에 안드는
마귀가 속인 것을 마귀의 정죄 앞에 왜 무너지느냐
내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데

그래서 이 마귀의 깊이를 거쳐서 하나님의 길이를 보여주시고자

오늘 본문처럼 이 대적 이 송사 이 정죄에
이 사탄의 깊이 대조된
하나님의 깊이로써
은사
의롭게 하심 ? 꺽으신 뼈로 안 기쁘고는 못배기도록 기뻐하심을 입듯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심으로써 비로소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서
이 성령의 은사로 의롭게 만들어 버리니

씹고 뜯고 먹고 마시고 안 하고 배기냐 말이죠

오죽하면 신하가 말이 안된다 라고
다윗 왕이시여 어찌하여 조금 전 까지만해도 우시더니 왜 지금은 기뻐 노래하십니까

베드로 너 조금까지만 해도 그 사람 알면 장지진다 라고 해놓고
닭이 우니까 따라서 울더니 왜 지금은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아십니다 라고 하느냐

맞다 내 기뻐 노래하고 춤춘거 맞다
내 회개 눈물 금식 기도 백날 해도 아이 못 살린다
이 꺽으신 뼈가 나를 도로 이 사탄의 깊이에서 건져냈다
안 기쁘고 배기랴

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을소냐
이 하나님의 의에 두러워 벌벌 떨지 않고 배기랴?
이 사랑의 매가 이 징계의 몽둥이가 내 수치는 수치 축에도 못 든다 라고
가르쳐 주지 않더냐 보아라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보도 더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이 다 이루심을 보아라

심판 주도 용서의 주도 주님의 손에 달린 문제인데
왜 마귀 니가 하느냐 라는 겁니다

정작 모든 인간은 정죄 받아 마땅한데
누가 누구를 잡느냐 라는 겁니다

그래 그래 정 그러고 싶으면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말이죠
당당하게 치 보라 말이죠

그런데 왜 그때는 또 남의 눈치를 왜 보느냐 말이죠
말씀 지키고 율법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면
제대로 정죄하고 제대로 심판해서
더 이상 죄악이 퍼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 아니냐
왜 그런데 갑자기 돌삐 놓고 왜 도망치느냐 말이죠
지금 도망 친다고 다시 돌삐 안 들고 다시 죽이지 않을꺼냐 말이죠
어차피 예수님을 죽일려고 할껀데 말이죠


(고전 15:21, 개역)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 15:22, 개역)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3, 개역)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고전 15:24, 개역)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고전 15:25, 개역)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고전 15:26, 개역)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전 15:27, 개역)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고전 15:28, 개역)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고전 15:29, 개역)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고전 15:30, 개역)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고전 15:31, 개역)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2, 개역)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고전 15:33, 개역)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고전 15:34, 개역)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고전 15:35, 개역)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고전 15:36, 개역)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고전 15:37, 개역)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고전 15:38, 개역)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고전 15:39, 개역)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고전 15:40, 개역)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고전 15:41, 개역)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고전 15:42, 개역)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 15:43, 개역)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 15:44, 개역)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 15:45, 개역)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6, 개역)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 15:47, 개역)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 15:48, 개역)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고전 15:49, 개역)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전 15:50, 개역)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고전 15:51, 개역)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고전 15:52, 개역)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3, 개역)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전 15:54, 개역)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전 15:55, 개역)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6, 개역)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 15:57,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8, 개역)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결국은 인간에게는 끝까지 따라가겠습니다 백날 다짐을 해도
언제든지 세 번 부인할 수 밖에 없는 자기 한계에 부딧히는
자기가 자기에게 걸려 넘어지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쓸데없이 자신에 대한 높은 기대치를 가지거 있으니 말이지요

외부에서 늘 새롭게 주어지는 사랑이 매일 매일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는 이상
언제든지 암논은 다말은 헌신짝처럼 버리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주어지는 능력이 바로 은사입니다
은사가 주어지지 않으면 즉 선물이지요
언제든지 한계에 부딧혀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무슨 수로 건너냐 말이죠
그 동안 자기의 힘으로 건너왔다고 착각했겠지요
그러나 백날 지어도 46년동안 지어도 완공을 못 하기는 맹 마찬가지인
의문의 반복일 뿐입니다 결핍이요 미완료이다 말이죠

그래서 아예 기대 안하시고 주시는 은사로만 인도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사랑할 능력이 없기에
경건의 껍데기 모양만 갖출 뿐이지 경건의 능력을 늘 부인하기에
새롭게 주시지 않으면

주를 사랑할 수도 없는 겁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하다 옆길로 빠질 수밖에 없는
고때만 옆길로 빠진 것이 아니라
날 때부터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기에 말이지요

(사 5:12, 개역)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사 5:10, 개역) 열흘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지기에는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
(사 5:11, 개역)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사 5:12, 개역)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사 5:13, 개역) 이러므로 나의 백성이 무지함을 인하여 사로잡힐 것이요 그 귀한 자는 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며
(사 5:14, 개역) 음부가 그 욕망을 크게 내어 한량 없이 그 입을 벌린즉 그들의 호화로움과 그들의 많은 무리와 그들의 떠드는 것과 그 중에서 연락하는 자가 거기 빠질 것이라
(사 5:15, 개역) 천한 자는 굴복되고 귀한 자는 낮아지고 오만한 자의 눈도 낮아질 것이로되
(사 5:16, 개역)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공평하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함을 받으시리니

이 주님이 손수 직접 마련하신 화목제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혼자 다 하신
이 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그래서 인간은 헛된 것을 갖추고자 종교성의 믿음으로 행함으로
대적하고
송사하고
정죄할 뿐입니다

군대 있을때에 사과 배급을 하다가 배식담당하던 상병들끼리 싸우다가
하나가 결국은 죽었습니다

그 사고 사례를 행정병이였던 제가 방송으로 마이크 대고 전파했으니까 기억이 나는데요
이 경제 문제 떡 문제는 바로 마귀가 예수님을 대적하는데 처음으로 사용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종교는 송사를 하는 법과 윤리 도덕의 문제로 가시화 시킵니다 이슈화 시켜요
그렇게 국가 라는 실게적인 법집행 기관에서 고소함으로써
자기들의 손에는 절대로 피를 묻히지 않을려고 온갖 속임수를 펼치는 것이 종교입니다
거기에 놀아난 자가 바로 가룟유다 아닙니까
아 속았다 라고
속아 넘어간 자인 거지요 종교에게 음녀에게 넘어간 겁니다
그리고 국가 라는 정치 곧 빌라도는 그 종교의 속임수를 간파하고도
최종적인 법의 실행자로써 정죄 곧 사형을 선포합니다

사회 국가 질서를 위해서 반란을 잠재우고자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거지요

자 이러니 예수님은 이 나라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이 새가지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요

대적 안 당할려면 대적해야만 하고
송사 안 당할려면 먼저 송사해야만 하고
정죄 곧 사형 안 당할려면 먼저 죽여야 만 하는

그렇다고 쉴 수 있나요 또 그 다음날 마귀의 정죄가 또 기다리고 있는데
또 죄의 소원이 또 기다리고 있어요

의문의 반복입니다

고때만 예수님 세 번 부인하지 않고 넘어갔다 칩시다 그 다음날 마귀가 가만히 있겠나요
언제 쉬며
언제 잠을 잘 수가 있겠습니까
죽고 싶어도 편히 죽을 수 없는
되물림 되는 죄일 뿐이지
백날 자기 의를 쌓아 본들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는 그 완악함을 되물려 줄 뿐이다 말이죠
그게 오늘날 이스라엘의 모습 아닙니까
주변 이방나라 우상나라는 또 언제든지 속일려고 달려들고요

백날 돈을 퍼주어도 소용없구요
백날 자유를 줘도 소용 없구요
백날 함께 손잡자 라고 평화를 줘도 소용이 없어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죄의 소원의 잠재성으로 인해
언제든지 대적 송사 정죄 가 튀어나오니까
늘 긴장이 되어 있으니
잠은 언제 자냐 말이죠
밤마다 미사일 날라오고요

100% 요격했다 라고 그 장면을 보고자 관광객 구경꺼리로 돈 벌어도
그 돈이 결국 또 자기가족을 인질로 삼아 죽이는
돌고 도는 다람쥐 챗 바퀴처럼 돌고 있으니
이 의문의 반복 언제 멈출수 있겠냐 말이죠

밤마다 피요 피용 미사일 폭탄이 떨어지는데
지금 북한군 참전으로 우리까지 대리 전쟁에 참여하라꼬
어떻게 해서든 제사장은 가룟유다를 꾀어서
자기들 손에 피 안 묻힐려고 하는

이 자체가 죄 아래 갇힌 모든 인간이 아니고 뭐냐 말이죠
부유하고 자유로우면 그 부요함을 나눌수가 있겠습니까?
자유를 함께 할 수가 있겠습니까?
줘도 못 먹어요

그것이 은사가 없기 때문이거든요
너무 가난해서 무기력하고 무지하고 이미 습관에 쩔어있으니
모든 사고방식부터 처음부터 다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안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은사입니다 하나 하나 다 뜯어고치는 겁니다
완전 개조하는 거죠
딴 사람으로 만들어 버려요
미련 둘 수 밖에 없는 것을 하나 하나 매일 매일 뜯어고쳐요

그러니 내 좋으라고 주어지는 은사는 없어요
뭐 김영철 노래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처럼
힘을 내요 슈퍼파워 라는 그런 영웅 히어로 어벤져스 그런 은사는 없어요
그 반대입니다
하도 은사를 과거 순복음처럼 슈퍼파워로 주장하다 보니
요즘은 모르겠는데
요즘은 거꾸로 장로교들이 다 슈퍼파워로 도로 거꾸로 주장할 정도로
귀신들이 씌였다 말이죠 강도의 소굴이 따로 없어요
앗수르의 영광이 나타나주어서 수치를 스스로 가릴려고 투자하는
이미 다 거짓으로  판명난 미국 기독교 프로그램 비젼운동을
아직도 요즘도 사기를 치고 있으니
솔로몬의 영광을 추구하겠다고 말이죠
그런 은사 운동을 해요 글쎄
그 반대죠
잔칫집 궁궐의 솔로몬의 영광이 아닌
그 반대인 초상집 광야의 들 백합화로 만드시는 것이 은사 이거든요

곧 그리스도의 능욕에 참예케 하는 은사이다 말이죠

아니 각기 다 제 길로 가는 양 같은 자 인거 우리가 다 아는데
아무도 초상집 광야 사막인 죽음의 골짜기를 건널려는 마음이 추호도 없는 판국에

은사 혼자만 신나게 우리를 몰아 붙이는데 말이죠
아예 기대도 안 합니다
절대로 안 간다 라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밭갈고 기경해서 몰아붙이십니다
그럴 능력도 없다 라는 것을 아시기에
주님은 은사를 주셔서 들에 핀 백합화로 만드시는 거죠

(시 1:5, 개역)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 1:1, 개역)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2, 개역)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3, 개역)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 1:4, 개역)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 1:5, 개역)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 1:6, 개역)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거든요
수치를 가려주는 가죽옷 이 필요 없기에
자기가 알아서 자기 수치를 가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욕이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이 찢으셨다가 다시 싸매어 주시는 허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고

자기 의를 쌓고자 하니까 말이죠
한계치에 부딧히면 하루 아침에 앗수르의 영광처럼 일장춘몽이 되는 거죠

여기서 복있는 자는 결국 은사 의롭게 하심 간구하심을 받은 자이고
그 반대로 악인은 이 그리스도의 능욕에 동참이 되지 않았기에
한 몸이 아닌 여전히 둘로 나누어졌기에
심판을 견디지 못하는
죄의 소원으로 결국은 대적하고 송사하고 정죄할 뿐이지요



이 세상은 이미 망했습니다 망한 결과를 우리는 하루 하루 목격하게 될 뿐입니다
오로지 아들이 있는 자에게만
복이 주어지고
아들이 있는 자에게만 은사와 의롭게 하심과 간구하심이 매일 매일 주어짐을 당하도록
땅땅땅 결정나 버렸습니다

우리는 그 결정을 매일 매일 누리고요
이 둘을 보면서 이 두 언약을 보면서
이 사탄의 깊이와 하나님의 깊이를 보면서

아 아들이 없는 자는 이미 망한 자 이구나
율법이 없어서 망하는 이방인 우상숭배자들과 똑같았듯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곧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독생자를 몰라서 화목제를 몰라서 십자가를 몰라서 망하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아서
자기가 자기 스스로 수치를 가리우고자
대적하고
송사하고
정죄함 밖에 없음을

그러나 우리에게는 누가 대적하리요
누가 송사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그런 짓들은 다 이전 것 모세언약 때 이고

다윗언약 필요 없다 곧 아들이 필요가 없다 일 때이고

이런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
곧 아들이 왔다 말이죠

이 아들의 형상으로 새로 창조함을 받지 않으면 이미 소돔과 고모라일 뿐이다 라는 겁니다

이 소돔과 고모라 라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아들의 혼인잔치 곧 종말을 땡기지 않으면
주의 오른편 곧 구원자가 필요없는 건강한자 의인이다 환자 아니다 죄인 아니다고만 우길 뿐입니다

환자한테만 구원자 오른팔이 필요한데
아니 포로된 적도 없고 환자 된 적도 없고 죄인 된적도 없는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인데
니가 뭔데 뭐 탈출 시켜주겠다는 둥 고쳐준다는 둥 죄사해준다는 둥
뭐 나를 위해 기도해준다 라고? 나 구원받는 선민인데? 니가 뭔데 니가 뭔데

나는 주의 이름 필요 없다 임마누엘 안 구할란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 라고


누구 누구의 아들 그 비유의 인자를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안 쳐다보겠다
내가 달려 죽어야 할 그 십자가 위의 인자를
내가 뭐 환자가? 죄인이가? 쳐다보게????
다들 싫어버린바 고개를 돌려버렸다 말이죠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고 모욕하는 그 꺽으신 뼈를

하나님은 구세주로 삼으셨다 말이죠
너희가 죽은 예수를 주가 되게 하셨다 말이죠

아들이 주가 되셨다 말이죠

이 아들의 일방적으로 쳐들어온 십자가로 곧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 없다 말이죠

이 아들 되신 자기 아들을 아까지 않고 내어주신 이 사랑이 아니였으면

저런 대적 송사 정죄에서 이 죄의 소원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겁니다

내가 당하는 심판은 수치는 모욕은 모욕 축에도 안 듭니다

진짜 제대로 된 절대저주 절대심판 절대죽음인 십자가의 수치 앞에서는

뻔데기 앞에 주름일 뿐입니다

이 십자가가 유대인에게서는 걸림돌 다 넘어뜨려 자빠뜨리게 하고
헬라인 지혜를 추구하는 이방인에게서는 어리석고 미련하나

우리에게는 이 예수님의 죽음인 그리스도의 능욕에 동참 안하고는 못 배기는
은사로 등떠밀려서

이 하늘의 영광을 입게 되고
기뻐하심을 입게 되는 겁니다

모조리 다 외부의 작업인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남으로써 말이죠ㅗ

아들 곧 누구 누구의 아들 인자가 나타남으로써
이 남겨둔 한 씨가 나타남으로써
소돔과 고모라에서 벗어난 겁니다

이 보다 더 좋을 수가 없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어서 오소서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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