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이 말한 진리는 초과잉적 제스처에서 온다 라는 의미는

박구용 230815 금 김어준의 다스뵈이다 363회 데몬 헌터스 무당 극복서사.mp3
3.23MB

번역본
https://youtu.be/IJ_x21_B30Y

원본

https://youtu.be/8lPsj4okSPk

( 20년 전 쯤인가? 이진경 찰학자가 모든 지도자 모든 연예인 모드 공인들은 무당이 되어야 한다 라고 아니 이미 무당이다 라고 강의를 한 적 있다. 무당-되기

사람들을 위한 중간 매개자의 역할을 하는 그들을 변호하고 기쁨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라고 했다 철학자의 소명도 그러하다 라고 )


(갈 1:10, 개역)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 1:6, 개역)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갈 1:7, 개역)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갈 1:8, 개역)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9, 개역)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10, 개역)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골 3:22, 개역)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살전 2:4, 개역)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겠다는 놈이 생각나네요


남은자만 돌아오리라 땅 끝에서 ~~~~

(렘 31:21, 개역)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렘 31:22, 개역)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렘 31:1,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렘 31:2, 개역)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얻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렘 31:3, 개역)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렘 31:4, 개역)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로 너를 장식하고 즐거운 무리처럼 춤추며 나올 것이며
(렘 31:5, 개역)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원을 심되 심는 자가 심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렘 31:6, 개역) 에브라임 산 위에서 파수꾼이 외치는 날이 이를 것이라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하리라
(렘 31:7, 개역)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 된 자를 위하여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렘 31:8, 개역)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들 중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
(렘 31:9, 개역)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렘 31:10, 개역) 열방이여 너희는 나 여호와의 말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무리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렘 31:11, 개역) 여호와께서 야곱을 속량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셨으니
(렘 31:12, 개역)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은사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에 모일 것이라 그 심령은 물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렘 31:13, 개역)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근심한 후에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니라
(렘 31:14, 개역)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 하며 내 은혜로 내 백성에게 만족케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31:15, 개역)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렘 31:16, 개역)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31:17,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
(렘 31:18, 개역)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정녕히 들었노니 이르기를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렘 31:19, 개역)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진고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렘 31:20, 개역)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31:21, 개역)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렘 31:22, 개역)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렘 31:23, 개역)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그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때에 그들이 유다 땅과 그 성읍들에서 다시 이 말을 쓰리니 곧 의로운 처소여, 거룩한 산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 것이며
(렘 31:24, 개역) 유다와 그 모든 성읍의 농부와 양떼를 인도하는 자가 거기 함께 거하리니
(렘 31:25, 개역) 이는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만족케 하며 무릇 슬픈 심령을 상쾌케 하였음이니라 하시기로
(렘 31:26, 개역) 내가 깨어보니 내 잠이 달았더라
(렘 31:27,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렘 31:28, 개역) 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전복하며 멸하며 곤란케 하던 것 같이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31:29, 개역) 그 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렘 31:30, 개역)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 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렘 31:31,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렘 31:32,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렘 31:33,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 31:34, 개역)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31:35, 개역) 나 여호와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였고 바다를 격동시켜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내가 말하노라
(렘 31:36, 개역) 이 규정이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폐함을 입어 영영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렘 31:37, 개역)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위로 하늘을 측량할 수 있으며 아래로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있다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행한 모든 일을 인하여 그들을 다 버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31:38,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이 성을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모퉁이 문까지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할 것이라
(렘 31:39, 개역) 측량줄이 곧게 가렙 산에 이르고 고아 방면으로 돌아
(렘 31:40, 개역) 시체와 재의 골짜기와 기드론 시내에 이르는 데까지와 동편 말문 모퉁이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밭에 이르리니 다 여호와의 성지가 되고 영영히 다시는 뽑히거나 전복되지 아니하리라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렘 31;22), 진리는 초과잉적 제스처에 있다 2


아 더 정확하게 [제스처에 있다]가 아니라 온다 [제스처에서 온다]

즉 모든 인간은 자기가 맡은 바 대로 행하다 죽는다 즉 맡은 일이 덮쳐진다 라는 의미 이다 그래서 온다 이다
진노의 그릇은 진노의 그릇 기능으로 살아야만 하고
긍휼의 그릇은 긍휼의 그릇 기능으로만 살도록 되어 있다
아무도 자신을 긍휼의 그릇이라 여기지 진노의 그릇으로 여기지 않기에
우는 자는 없다 그래서 땅끝 용광로 속에서 새로 창조한 자가 남은 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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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지난거 올린것 지우고 다시 질문 똑같이 해서 새롭게 올립니다


나의 말:

지젝이 말한 진리는 초과잉적 제스처에서 온다 라는 의미는

ChatGPT의 말: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이 말한 "진리는 초과잉적 제스처에서 온다"는 말은 그의 철학적 입장에서 중요한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이를 풀어보자면:

초과잉적 제스처(Excessive Gesture): 이 표현은 종종 일상적인 틀을 벗어난, 과도하거나 과장된 행동이나 발언을 의미합니다. 지젝은 이런 제스처를 통해서 인간 존재의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사회적 규범이나 기대에 반하는 과도한 행동을 할 때, 그 행동 속에서 억제된 사회적 현실이나 숨겨진 갈등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Truth): 지젝은 진리를 단순히 객관적 사실이나 명백한 사실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는 진리가 사회적, 정치적, 심리적 구조 속에서 우리가 억제하고 있는 무의식적인 욕망이나 모순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이 진리는 우리가 일상에서 상상하는 것처럼 쉽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종종 비상식적이고 초과된 제스처를 통해 나타나죠.

따라서, 지젝이 말하는 진리가 초과잉적 제스처에서 온다는 의미는 우리가 일상적인 사고방식이나 행동을 넘어서, 때로는 과장된 표현이나 비이성적인 행동을 통해서 사회적, 심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종종 기존의 질서와 모순을 드러내며, 이를 통해 우리가 사회나 자신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다는 거죠.

이렇게 보면, 지젝은 "진리"가 단순히 평범한 것들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복잡성이나 불편한 현실 속에서 드러난다고 보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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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

그렇다면 지젝은 니체가 말한 진리는 여성성이다 라고 또 들뢰즈는 여성되기를 주장하기 까지 했는데 이 여성되기가 무슨 의미이며? 니체의 여성성은 무슨 의미 인가?

ChatGPT의 말:

지젝, 니체, 들뢰즈의 진리에 대한 관점은 복잡하고 독특하지만, 각자의 철학에서 여성성에 대한 언급은 매우 상징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를 풀어보면:

1. 니체의 여성성:

니체가 말한 "진리는 여성성이다"라는 주장은 단순히 성별의 의미에서의 여성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적인 특성—즉, 창조적, 생동감 있는 힘이나 변화에 대한 수용성 등을 진리의 특성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니체는 기존의 도덕적 가치들, 특히 기독교적 가치와 사회적 규범에 대해 강한 비판을 했습니다. 그가 말한 여성성은 그저 '여성'이 아니라, 억압된 질서와 규범을 넘어서서 진리와 존재를 탐구하는 힘을 의미합니다. 이는 남성적 논리나 권위에 의한 제약을 넘어서려는 '위버맨쉬'(Übermensch, 초인)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여성은 그러한 구속되지 않은 창조성과 변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등장하는 거죠.

따라서 니체의 "여성성"은 변화를 받아들이고, 기존의 질서나 규범을 뒤엎는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힘을 말하며, 이는 진리의 본질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진리를 논리적이지 않고, 비이성적인 영역에서, 감정적이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려고 했습니다. 여성적인 특성은 이런 의미에서 전통적인 남성적 가치와 차별화되는, 보다 깊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들뢰즈의 여성되기:

들뢰즈가 말하는 "여성되기"는 단순히 여성의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남성성/여성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기 위한 철학적 실천을 의미합니다. 들뢰즈는 자주 차이의 철학을 강조하며, 사회나 문화가 정해놓은 고정된 정체성을 넘어서 자기 자신을 창조하고 변형하는 가능성을 강조했습니다.

여성되기는 여성적 성향에 대해 특정한 규정이나 틀을 만들기보다는, 차이와 변화를 통해 새로운 존재로 나아가려는 운동입니다. 들뢰즈에게 여성되기는 권력 구조에 저항하고, 고정된 정체성을 뛰어넘는 자유로운 창조적 힘을 상징합니다. 이건 자아를 규정짓는 기존의 틀을 깨고, 남성성/여성성에 의한 제한적인 정의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변형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들뢰즈의 여성되기는 정체성을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확장되는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그는 사회적 규범이나 기존의 가치들이 제시하는 틀을 넘어서려는 "항상 다른" 존재로서의 여성성을 통해, 자유로운 사고와 창조적 해방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지젝의 관점:

지젝은 니체와 들뢰즈의 철학을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결합하기도 하지만, 그는 주로 정신분석적 접근을 사용하여 진리나 사회적 구속을 탐구합니다. 지젝은 여성성을 주로 성적, 심리적 모순과 관련지어서 다룹니다. 그는 종종 사회적 규범과 무의식적인 억압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내재화되는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초과잉적 제스처나 극단적 형태의 표현을 통해 깨부술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합니다.

지젝에게 여성성은 단순히 "여성"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권력 관계와 성적 억압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상징합니다. 그는 이러한 억압적 질서를 넘어서 진리가 드러날 수 있다는 점에서, 니체와 들뢰즈가 말한 "여성성"이 규범을 넘어서고자 하는 저항의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세 철학자의 관점은 각각 자기 창조, 구속되지 않은 변형, 진리의 탐구라는 측면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여성성에 대한 구체적인 의미와 강조점은 다릅니다. 니체는 여성성을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힘으로 보았고, 들뢰즈는 이를 정체성의 탈피와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실천으로 보았으며, 지젝은 이를 사회적 규범과 억압을 넘어서려는 정신분석적 실천으로 바라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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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처럼??

ChatGPT의 말: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는 표현은 니체의 철학과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니체의 사상에서, 여성은 종종 미래의 가능성을 나타내는 존재로 묘사되곤 했습니다.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를 좀 더 깊게 살펴보면, 여성이 남성의 발전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존재로서의 역할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니체의 관점에서 해석:

여성 = 창조적 진리의 힘: 니체가 여성성을 진리와 관련지으면서 이야기한 것은, 기존의 도덕적 질서를 넘어서려는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힘을 의미합니다. 그는 기존의 사회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존재와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잠재력을 여성에게 부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는 말은, 여성의 창조적 힘이 결국 남성도 포함한 사회 전체의 진화적 발전을 이끌어낼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남성의 "초인"을 향한 변화: 니체의 철학에서 "초인" (Übermensch)은 기존의 인간 조건을 넘어서려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초인은 자기 자신을 창조하고, 자기 자신을 넘어서기 위한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는 인물입니다. 이런 면에서 여성이 남성의 미래라고 말하는 것은, 여성성이 남성성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남성이 기존의 사회적 틀을 넘어서 변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성별의 이분법을 넘어서기: 니체는 성별에 대한 전통적인 구분을 넘어서려고 했습니다. 그에게 남성과 여성은 단지 물리적인 구분이 아니라, 각기 다른 사회적, 심리적 조건을 대표하는 요소들이었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는 말은, 남성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진정한 변화와 창조의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여성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들뢰즈와 연결:

들뢰즈가 말한 "여성되기"와 연결해서 보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는 말은 남성성이 여성성을 통해 끊임없이 변형되고, 기존의 사회적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는 정체성의 탈피와 변형을 중요한 철학적 개념으로 다루었고, 여성되기는 그 변화와 창조의 자유로운 흐름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말은 단지 성별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철학적 변화를 이끌어가는 역할로서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젝의 관점:

지젝은 여성성을 억압과 권력의 구조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자주 설명하지만, 그에게 여성은 기존 사회 질서와 무의식적인 억압을 드러내고 초과하는 존재로 보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는 말이 지젝에게 어떻게 해석될지는 다소 복잡할 수 있지만, 남성성의 전통적 틀을 깨는 계기로서 여성의 존재를 상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런 표현은 단순히 성별의 차이가 아니라 변화와 창조, 진리의 변형적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남성 또한 포함한 모든 인간 존재의 변화를 이끌어가는 힘으로서 여성성을 보겠다는 철학적 의도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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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

그래 들뢰즈와 지젝까지 언급해 줘야지 좋았스 ~~~~~

자 그럼 이 초과잉이라는 모성적 초자아 인 실재계는 빗금쳐져 있는 결핍의 상태인데 어떻게 진리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도 결핍인데 초과잉 적이다 라니? 모순 아닌가???

ChatGPT의 말:

맞아요, 그 말 그대로 **"초과잉"**과 **"결핍"**이 한꺼번에 존재하는 것, 사실 그 자체로 모순적이죠. 하지만 바로 그 모순이 진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풀려면 지젝의 철학적 접근을 따라가면서 모성적 초자아와 실재계에 대해 좀 더 파고들어야 해요.

초과잉과 결핍: 지젝의 모순적 구조

지젝이 말하는 **"초과잉"**은 단순히 과잉된 것이 아니라 모순적인 무의식적 구조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는 실재계(Real)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는데, 이 실재계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접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 모순적인 결핍을 드러내는 영역입니다.

실재계는 언어와 상징적 질서(심리적, 사회적 구조)를 넘어서 존재하는데, 우리가 그 실재계를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항상 결핍의 상태로 나타납니다. 그 결핍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불완전성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 결핍은 **"초과잉적"**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고 하는 욕망이나 삶에서의 과도한 기대가 초과잉적인 제스처로 나타날 때, 그것은 무의식적 결핍의 표현인 동시에 과잉된 방식으로 실재계와 접하는 방식이 될 수 있는 거죠.

모성적 초자아: 결핍을 넘어서기 위한 필연적인 강제

지젝은 **모성적 초자아(Maternal Superego)**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초자아의 강제적 특성을 설명합니다. 초자아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적 명령을 내면화한 부분이지만, 모성적 초자아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성적 초자아는 우리가 결핍을 느끼는 그 지점에서 끊임없이 요구하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이 초자아는 결핍을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강제를 나타내며, 그 결핍을 채우려는 과도한 요구나 욕망을 촉발하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초과잉이란 모성적 초자아가 우리 내면에서 결핍을 채우기 위한 과잉된 압박을 만들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초과잉은 바로 그 결핍을 시작점으로 하여, 인간 존재가 끊임없이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을 느끼고, 그 결핍을 무의식적으로 넘어서려고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진리의 모순적 성격: 결핍과 초과잉

이제, 왜 진리가 이 모순적 상태에서 온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지젝은 진리가 결핍 속에 드러나는 초과잉적 제스처를 통해 나타난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진리는 결핍과 초과잉이라는 두 상반된 힘이 결합하는 지점에서 드러납니다.

결핍은 우리가 진리와 실재계를 접근할 수 없다는 한계에서 시작됩니다. 이는 우리의 인식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을 시사하며, 결국 무의식적 욕망이나 충족되지 않은 욕구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 결핍을 충족하려는 욕망이 초과잉의 방식으로 구현될 때, 그 과잉된 제스처가 진리를 드러내는 창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적 갈등, 억압된 욕망, 모순을 통해 진리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거죠.

따라서 "초과잉"이 결핍에서 온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결핍을 채우려고 하는 욕망의 충족이 과잉되면서 그것이 우리의 존재의 진리를 드러내는 방식이 된다는 거예요. 그 진리는 완전한 진리라기보다는 비현실적이고 불완전한 형태로, 모순적인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려면 그 자체로 모순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결핍과 초과잉은 서로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선상에서 서로 얽힌 관계입니다.

진리는 결핍과 초과잉이라는 상반된 성질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는 지젝의 주장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경험하는 욕망과 갈등 속에서 진리가 형성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초과잉이 결핍에서 온다"**는 말은 모순적이지만, 그 모순이 바로 진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의 일부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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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

그럼 그 결핍은 강요된 선택을 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지젝의 강요된 선택은 전혀 다른 개념인가?

ChatGPT의 말:

**"강요된 선택"**과 **"결핍"**은 지젝의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들이지만, 서로 다른 맥락에서 다뤄집니다. 지젝은 강요된 선택(coerced choice)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사실은 구조적, 사회적, 심리적 압력에 의해 특정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럼, 이 두 개념을 구체적으로 구분해 봅시다.

1. 결핍 (Lack)

결핍은 지젝의 정신분석적 사고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결핍은 우리가 완전하지 않음, 무의식적인 결핍을 경험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결핍은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뜻합니다. 즉, 우리는 자아의 형성이나 대상에 대한 욕망을 통해 결핍을 인식하고 그것을 채우려고 합니다.

이 결핍은 무의식적인 욕망에서 발생합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부족함이나 공백이 우리가 선택하거나 행동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이 결핍은 우리가 필요와 욕망을 충족하려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 성공을 원하고자 하는 욕망, 또는 사랑을 갈망하는 욕망 등이 결핍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결핍은 **"자유로운 선택"**을 강요하지 않지만, 그것이 구조적,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하여 우리가 그 결핍을 채우려는 방향으로 선택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중요한 개념입니다.

2. 강요된 선택 (Coerced Choice)

강요된 선택은 지젝이 자주 사용하는 개념으로,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미 사회적, 심리적, 문화적 압력에 의해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합니다.

**"강요된 선택"**은 주체가 선택한다고 느끼지만, 그 선택이 본질적으로 강요받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선택한 것들이 이미 사회적 구조나 제도, 무의식적 욕망에 의해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강요된 선택은 우리가 자신을 자유로운 주체로 인식하는 순간에도 사실은 사회적 압박이나 구조적 제약에 의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제한된 범위 내에서 선택을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자아"**를 구성하는 데 있어 '이상적인' 사회적 이미지(성공적인 경력, 미적 기준 등)가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목표로 삼을 때, 그 선택은 실제로 사회적 가치나 기대에 의한 강요입니다. 우리가 이를 선택했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자신의 욕망이나 사회적 요구에 의해 강요된 선택일 수 있습니다.

결핍과 강요된 선택의 관계

이제 결핍과 강요된 선택의 관계를 살펴보면:

결핍은 욕망을 생성하지만, 이 욕망은 자유로운 선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강요된 선택과도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이나 사회적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느끼는 것은 결핍에서 나온 동기이지만, 이 욕망이 충족되려면 우리는 기존 사회적 규범이나 전형적인 삶의 방식에 맞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습니다.

강요된 선택은 그 결핍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제약된 선택입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느끼는 순간, 그 선택은 이미 결핍에 의해 강요되고, 그 결과 선택이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만 이루어지게 되는 구조적 제한에 놓이게 됩니다.

결론: 결핍과 강요된 선택

결핍은 우리가 본래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느끼는 무의식적 공백이나 욕망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무언가를 채우려는 노력을 하게 만들죠.

강요된 선택은 우리가 이 결핍을 채우기 위한 선택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생각할지라도, 그 선택은 사회적, 심리적 구조에 의해 강요된 것입니다.

즉, 결핍이 우리의 욕망을 형성하지만,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선택은 이미 강요된 선택일 수 있다는 점에서 두 개념은 상호작용합니다. 결핍은 욕망을 만든다, 그리고 강요된 선택은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압박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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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

가만히 보니 그럼 이 결핍이 들뢰즈가 말하는 미끄러짐 이네?

미끄러짐이냐 아니면 홈패임 이냐 처럼

ChatGPT의 말:

맞아요, 결핍과 들뢰즈의 미끄러짐(slippage)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어요. 사실, 들뢰즈가 말하는 미끄러짐은 결핍과 관련이 깊습니다. 둘 다 고정되지 않은 상태, 끊임없이 변하고 미끄러지는 존재를 나타내죠.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방식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도 흥미로운 부분이에요.

1. 들뢰즈의 미끄러짐 (Slippage)

들뢰즈는 **"미끄러짐"**을 고정된 의미나 안정된 정체성을 넘어서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하는 힘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자주 사용했습니다. 이 개념은 언어, 정체성, 사회적 규범 등 고정된 질서와 틀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안정성을 상징합니다.

미끄러짐은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이나 의미가 아닌, 그 정체성 자체가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변한다는 개념이에요. 예를 들어, 정체성의 불안정성을 이해할 때, 우리는 이분법적 구분(남성/여성, 진리/허위 등)이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겹쳐지며 결코 고정되지 않는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미끄러짐은 일종의 차이와 변화의 운동이에요. 고정된 것들을 넘어서 새로운 것을 찾고,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결국 고정된 범주와 정체성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미끄러짐으로 표현되죠.

2. 결핍과 미끄러짐의 연결

결핍은 우리가 완전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시작합니다. 결핍은 고정된 정체성이나 본질을 완전하게 충족시킬 수 없다는 인식에서 생겨나는 무의식적 동기입니다. 이 결핍은 우리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채우려는 욕망을 만들어내죠. 그리고 이 결핍은 미끄러짐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결핍은 결국 고정된 상태를 추구하게 만들지만, 그 고정된 상태는 결코 완전히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목표를 향해 미끄러지듯 나아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고정된 의미나 정체성을 완전히 충족시키려는 시도에서, 미끄러짐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결핍이 미끄러짐을 발생시킨다면, 미끄러짐은 그 결핍을 채우려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변형과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결핍은 고정되지 않은 존재로서 미끄러지며 변화하는 과정을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홈패임과 미끄러짐:

이제 홈패임(homeostasis)을 얘기해 보면, 홈패임은 일종의 안정된 상태나 균형을 이루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정체성이나 상태의 고정성을 추구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미끄러짐은 고정된 상태나 균형을 넘어서 변화를 추구하는 개념이에요.

홈패임은 변화가 거의 없는, 고정된 균형 상태에 있는 반면, 미끄러짐은 불안정하고 변화하는 상태입니다.

결핍은 안정된 상태를 추구하면서도, 그 상태를 완전히 이룰 수 없다는 모순적 인식에서 미끄러짐을 유발하는데, 이 미끄러짐은 결핍을 채우려고 하면서도 결국 고정되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는 반복적이고 끊임없는 움직임입니다.

4. 결론적으로:

결핍은 우리가 완전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미끄러짐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이 결핍을 채우려 하지만, 완전하게 채울 수 없다는 점에서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들뢰즈의 미끄러짐은 변화와 불완전성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결핍이 유발하는 욕망의 흐름에서 발생하며, 이를 통해 자기 변형이 이루어집니다.

결국 미끄러짐은 결핍이 자아를 넘어서려는 변화의 운동으로 항상 진행 중인 변화의 과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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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

자 그럼 지젝은 그 결핍을 채우는데 있어서 계속 실패할수 밖에 없다 라고 했는데

그 실패라는 미끄러짐이 바로 초과잉이며 진리이다?

 

그래서 지젝주의자 이택광 교수는 실패하기 를 주장 했고 말이지

 

진리만이 싪패를 하지

 

진리가 아닌 것은 실패할 리가 없으니까?

ChatGPT의 말:

정확히 말하면, 지젝은 결핍을 채우려는 시도가 계속해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데, 그 실패가 미끄러짐이자 진리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이 과정에서 실패는 단순한 부정적인 결과가 아니라, 진리가 드러나는 방식이라고 이해할 수 있죠. 이 주장은 이택광 교수가 말한 **"실패하기"**와도 맞아떨어집니다.

지젝의 실패와 진리

지젝에게 있어서 **"실패"**는 단순히 목표 달성의 불가능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실패를 진리의 핵심적 구성 요소로 간주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라는 것은 완전한 충족이나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는 결핍과 그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의 반복적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결핍을 채우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실패하고, 이 실패를 통해서만 진리가 드러난다고 지젝은 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고정된 상태나 완전한 목표가 아니라, 무의식적 욕망과 그 욕망을 추구하는 반복적인 실패의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성공적인" 채움이 아니라 그 결핍의 끊임없는 충족 시도와 그에 따른 반복적 실패에서 드러난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이 과정에서 실패는 진리를 드러내는 방식, 즉 **"실패 속에 진리가 존재한다"**는 말이 됩니다.

미끄러짐과 초과잉

이 실패의 과정에서 미끄러짐이 나타납니다. 미끄러짐은 고정된 상태를 향한 시도가 계속해서 변화하고 미끄러지며 실패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이 과정 자체가 초과잉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그 초과잉이 바로 진리의 본질입니다.

미끄러짐은 고정된 목표로 가는 길이 아니며, 그 목표를 향한 실패의 연속으로, 그 실패가 초과잉적인 제스처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패의 과정에서 너무 많은 것이 드러나며, 그것이 진리로 이어지는 거죠.

진리란 결국 성공적인 목표 달성이나 완전한 충족이 아니라,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불완전하고 모순적인 지점들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진리를 알게 되며, 그 진리는 실패의 반복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죠.

이택광 교수의 "실패하기"

이택광 교수가 **"실패하기"**를 주장한 이유는, 바로 지젝의 철학에서 나온 실패의 개념과 연결됩니다. 이 교수는 "성공"이 아닌 실패를 통해서만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제시합니다.

진리는 성공적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진리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실패는 중요한 개념이 됩니다. 실패는 단지 목표 달성의 실패가 아니라, 진리 자체가 고정되지 않고 미끄러지는 과정임을 의미합니다.

진리가 아닌 것은 실패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진리가 아닌 것은 고정된 규범이나 이미 확립된 질서에 맞추어져 있고, 그 자체로 변화나 미끄러짐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리만이 실패한다"**는 주장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변화와 과정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고정된 상태에서 실패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과정의 실패에서 진리가 발현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결론: 실패가 진리를 드러낸다

지젝의 철학에서 **"실패"**는 진리의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실패는 진리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결핍을 채우려는 끝없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초과잉적 제스처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택광 교수도 이 점을 강조하면서 **"실패하기"**를 통해 진리의 본질에 접근하려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실패는 단순한 부정적인 결과가 아니라, 진리가 드러나는 과정으로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진리는 미끄러짐과 실패를 통해서만 충족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데에서 진리의 진정성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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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

이 실패와 이 미끄러짐을 들뢰즈는 홈패임과 연관 시키던데?

 

스티그마 처럼 진리가 남긴 상처 또는 흔적

 

 

이것을 또 지젝은 되 받아 치기 한 것이

 

상처는 그 찌른 창에서만 치료 된다 라고 했고 말이지

 

이 각각의 의미를 좀더 깊이 있게 설명하시오

ChatGPT의 말:

**"실패"**와 "미끄러짐", 그리고 **"홈패임"**과의 관계, 상처의 개념을 들뢰즈와 지젝이 어떻게 각각 다루는지, 그들을 통해 진리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1. 들뢰즈의 "미끄러짐"과 "홈패임"

들뢰즈는 **"미끄러짐"**과 **"홈패임"**의 개념을 통해 정체성이나 사회적 질서의 불완전성을 설명합니다.

미끄러짐 (Slippage)

들뢰즈의 미끄러짐은 언어, 정체성, 사회적 규범 등에서 나타나는 불안정성과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는 고정된 의미나 정체성을 넘어서 항상 흐르는 상태로서, 변화가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미끄러짐은 끊임없는 변화와 불안정성을 상징하는데, 이는 **"고정된 의미나 구조"**를 허물고, 대신에 비정형적이고 변화무쌍한 존재를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자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언어와 사회적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변화하는 것입니다.

홈패임 (Homeostasis)

홈패임은 **"안정 상태"**나 **"균형"**을 의미합니다. 생리학적 맥락에서 홈패임은 몸이 일정한 균형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가리키지만, 들뢰즈는 이를 사회적, 심리적 차원에서도 사용하여 고정된 질서나 완전한 안정이 인간 삶이나 사회에서 불가능함을 설명합니다.

홈패임은 변화 없이 정체된 상태로, 이는 미끄러짐과 대립되는 개념입니다. 미끄러짐이 변화와 불완전성을 강조한다면, 홈패임은 고정된 질서와 안정성을 추구하려는 힘입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영원히 안정된 상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오히려 끊임없이 변화하는 미끄러짐이 진정한 실체임을 주장합니다.

미끄러짐과 실패

들뢰즈에서 미끄러짐은 실패의 연속과 같으며, 완전한 목표 달성이나 안정성을 추구할 때 나타나는 불완전한, 흐르는 특성입니다. 이 미끄러짐이 진리의 근원으로, 불완전성과 변화의 과정에서만 진리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처는 그런 변화와 실패의 흔적이 되며, 진리의 고통이자 역동적인 과정으로 여겨집니다.

2. 지젝의 "상처"와 "창"

지젝은 상처를 진리의 일종의 흔적으로 보며, 상처는 고통과 불완전성을 통해 치유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이 개념은 들뢰즈의 미끄러짐과 상통하지만, 지젝은 상처를 통한 치유라는 방식을 통해 더욱 구체적인 철학적 해석을 제공합니다.

상처와 창 (Wound and Spear)

**"상처는 그 찌른 창에서만 치료된다"**는 지젝의 주장은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이 그 상처를 낸 원인이나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진리나 해결은 불완전성, 상처, 고통에서만 진정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진리의 유동성을 강조합니다.

상처는 단순한 부정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만 치유와 진리가 발견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회적 제약이나 개인의 고통을 극복하려 할 때,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도 속에서만 진리가 드러나며, 이를 상처와 치유의 과정으로 봅니다.

상처는 그 자체로 진리의 흔적이며, 그것이 없이는 진리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상처는 그 자체로 고통을 통한 깨달음을 의미하고, 창은 바로 그 고통과 불완전성을 직면하면서 진리를 발견하는 도구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3. 상처, 실패, 미끄러짐: 진리의 방식

상처는 진리의 흔적이며, 미끄러짐은 그 상처가 반복되는 과정입니다. 상처를 치료하려면, 그 찌른 창으로 돌아가서 상처의 원인과 그로 인한 고통을 직시해야 한다는 지젝의 주장입니다. 이는 미끄러짐과 연결되며, 실패와 불완전성 속에서만 진리가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상처는 그 찌른 창에서만 치료된다는 말은, 진리가 불완전성과 고통 속에서만 드러난다는 지젝의 철학적 견해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며, 그 상처의 원인이나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을 인식하고 그 과정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게 됩니다.

결론: 상처와 실패의 관계

상처는 진리의 흔적으로, 그 상처를 통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지젝은 주장합니다.

미끄러짐은 상처를 치료하려는 시도로, 불완전성과 실패를 경험하며 진리에 다가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홈패임은 변화 없는 상태, 즉 진리의 고정된 상태가 아니며, 오히려 미끄러짐과 상처를 통해 진리는 드러난다는 점에서, 진리는 그 상처의 반복과 고통 속에서 발견됩니다.

따라서 "상처", "미끄러짐", **"실패"**는 모두 진리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불완전성과 고통 속에서만 진리가 드러나는 과정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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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

그럼 지젝 주의자 이택광 교수의 말 처럼

계속 실패하기 가

더 이상 바닥 칠 곳이 없는 제일 밑 바닥을 치는 상태

곧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잔여 , 잉여 로 설명하던데

더 자세히 설명하시오

ChatGPT의 말:

이택광 교수의 **"계속 실패하기"**라는 주장과, **"더 이상 바닥을 칠 곳이 없는 상태"**와 **"잔여, 잉여"**의 개념은 지젝의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진리의 접근 방식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이 개념들은 지젝주의에서 중요한 절망적이고 최후적인 실패의 지점을 설명하며, 무의식적 결핍을 넘어서는 지점에서 드러나는 진리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1. "계속 실패하기" - 더 이상 바닥을 칠 곳이 없는 상태

이택광 교수는 **"계속 실패하기"**라는 개념을 지젝의 철학에서 진리를 향한 끊임없는 실패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그 최후의 실패를 **"더 이상 바닥을 칠 곳이 없는 상태"**로 묘사합니다.

지젝의 실패와 진리

지젝에게 실패는 단순히 목표 달성의 부재나 부정적인 결과가 아니라, 진리가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이 결핍을 완전히 채울 수 없다는 모순적 현실 속에서 반복적인 실패를 경험합니다.

이 계속된 실패는 우리가 고정된 목표나 완전한 목표를 추구할 때, 언제나 끝이 보이지 않게 미끄러지며 실패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실패는 단순히 결핍을 채우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지점, 즉 **"최후의 실패"**를 의미합니다.

**"더 이상 바닥을 칠 곳이 없다"**는 말은, 그 실패가 더 이상 깊어질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는 의미입니다. 최후의 결핍, 더 이상 충족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 그곳이 바로 잔여나 잉여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때 **"바닥을 친다"**는 것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함을 의미하며, 이 지점에서 진리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속 실패하기"**는 끊임없는 결핍의 채우기 위한 시도가 결국은 실패의 극한으로 가는 과정이고, 그 극한에서 비로소 진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2. "잔여", "잉여" -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지점

"잔여"(remainder)와 "잉여"(surplus)는 지젝주의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완전함을 향한 시도에서 끝없이 남게 되는 것, 완전히 채워지지 않은 자리에 남은 것을 뜻합니다.

잔여와 잉여

잔여는 완전한 충족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남겨지는 **"남은 부분"**입니다. 우리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만, 그 목표가 결코 완전히 달성되지 않음으로써 결국 남은 부분, 즉 **"결핍의 자국"**이 남게 됩니다. 이 잔여는 더 이상 분할하거나 축소할 수 없는 상태로, 그 자체로 하나의 고유한 존재가 됩니다.

잉여는 이와 유사하게 추가적인 것이나 과잉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원하던 것을 충족시켰다고 생각할 때, 여전히 남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무의식적 욕망"**은 완전하게 충족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충족을 향한 추구에서 남는 과잉이 바로 잉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리로서의 잉여

잔여와 잉여는 진리의 자국 또는 흔적으로, 완전하게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을 가리키는 요소입니다. 즉, 진리는 완전하게 이해되거나 도달될 수 없으며, 그것을 향한 끊임없는 실패 속에서만 남아 있는 잉여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계속 실패하기"**는 우리가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려는 시도가 불가능함을 인식하게 되는데, 그 불완전성 속에서만 진리가 드러나고, 그 진리는 바로 "잔여", **"잉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3. "계속 실패하기"의 철학적 의미

이택광 교수의 주장처럼 **"계속 실패하기"**는 **"더 이상 바닥을 칠 곳이 없는 상태"**와 관련됩니다. 이 개념은 지젝주의에서 진리를 향한 욕망이 끝없이 결핍을 채우려는 시도가 무한히 반복되지만, 결코 완전하게 충족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지점입니다.

이 실패는 끊임없는 과정이며, 결국에는 "더 이상 바닥을 칠 곳이 없다"는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는 진리가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결핍과 실패의 연속 속에서만 드러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 상태에서 남는 것은 바로 "잔여"**이자 **"잉여"**로, 진리는 완전한 채움이 아닌 결핍의 끝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불완전성

진리는 불완전하고 결핍적인 상태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지젝의 주장에 따라, 잔여와 잉여는 진리의 핵심적인 속성입니다. 완전한 진리를 향한 완전한 성공은 불가능하며, 계속 실패하는 과정에서만 진리의 흔적이 나타납니다.

결국, **"계속 실패하기"**는 진리를 향한 추구가 결코 완료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그 끝없는 실패가 진리의 흔적으로서 잔여나 잉여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이택광 교수의 **"계속 실패하기"**와 **"더 이상 바닥을 칠 곳이 없는 상태"**는 진리를 향한 무한한 결핍과 그 충족을 위한 시도가 끝없이 실패하는 지점에서 잔여와 잉여라는 진리의 흔적이 남겨진다는 지젝의 철학적 비전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개념입니다. 진리는 완전한 충족이 아니라, 실패의 반복과 결핍의 인정 속에서 잔여와 잉여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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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

지젝의 나누어 질수 없는 잔여를 읽다 보면

왠지 개신교 개혁주의자들 특히 성화론자들의 성령론을 오히려 넘어서는 주장같은 성령론을 다루는 느낌이 들던데

과연 성령론 이라는 신학교리와 나누어 질수 없는 잔여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아니면 전혀 다른 개념인 착각인지??

ChatGPT의 말:

지젝의 "나누어질 수 없는 잔여" 개념과 성령론의 관계를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두 개념이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성령론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에서의 구속적이고 신적 존재의 활동을 다루는 반면, 지젝의 잔여 개념은 철학적 결핍과 진리의 불완전성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개념 간의 유사성을 끌어낼 수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1. 성령론과 성화론

성령론은 기독교 신학에서 성령이 어떻게 신자들을 구원하고 성화시키며,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다룹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임재로, 인간의 정화와 영적 성장을 이루는 역할을 하며, 성화론은 이 성령의 활동이 인간의 삶에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한 교리입니다.

성령론에서는 성령이 신자의 내면에 임하여 그들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의 과정을 통해 신의 형상에 점점 더 가까워지도록 하는 과정입니다. 이 성화 과정에서 신자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점진적으로 변화하는데, 이는 완전한 신의 형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2. 지젝의 나누어질 수 없는 잔여

지젝의 **"나누어질 수 없는 잔여"**는 결핍의 잉여로,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결핍을 인식하고 그 결핍을 계속해서 시도하는 과정에서 남는 부분을 의미합니다. 이는 고통과 불완전성 속에서만 드러나는 진리의 본질입니다. 진리는 완전한 충족이나 고정된 상태에 도달할 수 없고, 그 대신 결핍을 반복적으로 채우려는 욕망에서 나타나는 남겨진 부분(잔여)을 통해 드러납니다.

**"나누어질 수 없는 잔여"**는, 완전하게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을 나타내며, 이것은 진리의 불완전성과 초과잉이 드러나는 지점입니다. 즉, 잔여는 완전한 진리의 부족으로 나타나며, 이 결핍을 채우는 끝없는 반복이 진리를 향한 여정으로 간주됩니다.

3. 성령론과 나누어질 수 없는 잔여의 유사성

지젝의 개념과 성령론의 관계에서 유사한 부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령론에서 성령은 신의 완전한 형상에 점차 가까워지려는 성화 과정을 이끌지만, 지젝의 나누어질 수 없는 잔여는 완전한 충족이나 완성된 상태로의 도달이 불가능함을 강조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완전함을 추구하지만, 지젝의 잔여는 완전함의 불가능성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상반된 두 관점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개념이 어떤 점에서 유사한지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불완전성 속의 거룩함

성령론에서 성화는 완전한 성취를 목표로 하지만, 그 과정은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상태에서 이루어집니다. 성령의 인도는 완벽한 신적 형상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 과정은 결코 완전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하나님의 역사가 인간의 불완전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비슷하게, 지젝의 나누어질 수 없는 잔여는 완전한 충족을 향한 시도에서 불완전성과 결핍이 드러나며, 그 불완전성 속에서만 진리가 드러난다고 합니다. 즉, 결핍과 불완전성이 하나님의 역사나 진리의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로 나타납니다.

(2) 초과잉의 역할

성령론에서도 성령은 초과적인 역할을 합니다. 성령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서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역사하며, 그 능력은 인간의 한계를 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지젝의 초과잉은 진리의 추구 과정에서 완전한 충족이나 정해진 규범을 넘어서려는 힘으로 나타나며, 이는 진리가 끊임없이 초과하는 것임을 암시합니다. 즉, 성령이 인간의 한계를 초과하는 것처럼, 지젝의 초과잉도 고정된 틀을 넘어서려는 과정입니다.

(3) 역동성 속의 진리

성령론에서는 성령의 활동이 내적 변화와 구속적 역사를 이끌어가며, 이는 시간과 역사를 통한 변화로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지젝의 잉여와 잔여는 반복적이고 역동적인 과정 속에서만 진리가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과정은 성령의 역사와 비슷하게 완전한 충족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진리는 변화와 결핍의 연속 속에서만 드러나게 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4. 차이점:

성령론은 신의 신비로운 활동을 다루며, 신학적으로는 구속과 구원의 역동을 설명합니다. 성령은 완전한 구속과 성화를 향한 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인간의 죄와 결핍을 극복하려는 신의 자비로운 행위로 설명됩니다.

지젝의 잔여는 철학적 결핍과 불완전성을 강조하며, 진리의 본질은 결코 완전하게 충족될 수 없다는 주장을 합니다. 이 주장은 고정된 구속론이나 완성된 상태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지닌 철학적 관점입니다.

결론: 성령론과 지젝의 나누어질 수 없는 잔여

성령론과 지젝의 나누어질 수 없는 잔여는 근본적으로 다른 맥락에서 다루어지는 개념이지만, 불완전성과 초과잉의 개념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령론은 신의 구속적 역사와 성화의 과정을 강조하는 반면, 지젝의 잔여는 진리의 불완전성과 결핍 속에서 진리가 드러나는 과정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두 개념은 목표와 방향에서 차이가 있지만, 불완전성과 초과잉이라는 역동적인 변화 속에서의 진리의 개념을 다룬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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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

그래서 개혁주의의 성령론을 넘어서는 더 나은 성령론 같은 느낌이 지젝의 책에서 느꼇다는 거지

종말의 바닥에서 만나게 되는 성령 곧 종말의 영

그 성령의 전이 바로 인간이라는 교회

차라리 지젝이 신학교리의 성령론 보다 더 성령을 설명하기에 말이지

물론 둘다 다 틀렸지만 오히려 지젝이 더 나아 보이더라 말이지

ChatGPT의 말:

지젝의 철학을 개혁주의 성령론과 비교하면서 느낀 점이 흥미롭네요. 당신이 언급한 **"종말의 바닥에서 만나게 되는 성령"**이나 **"성령의 전"**이라는 아이디어는 지젝의 철학에서 결핍, 초과잉, 진리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힌트를 제공합니다. 실제로 지젝의 **"종말의 영"**을 성령론에 비추어 보았을 때, 기존 신학적 개념을 넘어서 더 급진적이고 역동적인 성령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측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1. 지젝의 "종말의 영"과 성령론

지젝은 기독교 신학에서 성령론을 무의식과 진리의 불완전성이라는 철학적 관점으로 풀어냅니다. 성령은 전통적인 신학에서 구속과 성화의 기능을 다루지만, 지젝에게 성령은 진리의 초과잉과 미완성을 종말의 끝자락에서 드러내는 역동적인 힘으로 나타납니다.

(1) "종말의 바닥"에서의 성령

지젝이 말하는 **"종말의 바닥"**은 결국 완전한 충족이 불가능한 상태에서의 끝없는 결핍과 실패가 드러나는 지점입니다. 이 지점에서 성령은 진리를 향한 미완성적 추구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즉, 성령은 성화와 같은 점진적이고 완성된 구속적 활동보다는 끊임없는 결핍과 그것을 채우려는 시도 속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젝의 철학에서 종말은 구속이 아니라 불완전성과 진리의 잉여가 드러나는 지점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이 불완전성을 기꺼이 안고 나아가는 힘입니다. 성령은 구속의 과정을 강조하는 전통적 개념을 넘어, 종말과 함께 드러나는 결핍의 찬양이기도 합니다.

(2) 성령의 전으로서의 인간 (교회)

지젝은 **"성령의 전"**을 교회 또는 인간의 집합체로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이 교회를 통해 현실에 전이된다는 전통적인 교리와 비교하면, 지젝은 이를 무의식적 결핍이 물리적 현실에서 드러나는 지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구속적 역할을 강조하기보다는 분열된 현실 속에서 진리가 드러나는 장소로 이해됩니다.

지젝의 철학에서 교회는 완전한 구속의 장소가 아니라, 결핍과 실패의 공간입니다. 이 **"교회"**는 결코 완전하지 않으며, 잔여와 잉여로서 진리의 추구가 끝없이 반복되는 공간으로 상상됩니다. 즉, **"성령의 전"**은 진리의 나누어질 수 없는 잔여가 체현된 **"공간"**으로, 무의식적 결핍이 구속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교회가 기능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지젝이 제시하는 성령론의 "더 나은 점"

지젝의 성령론이 기존의 개혁주의 성령론을 넘어서 **"더 나은 성령론"**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지젝이 성령을 신학적 구속적 개념에 국한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젝의 성령론은 구속이나 성화의 개념을 넘어서, 진리의 불완전성과 결핍 속에서 **"초과잉"**을 찾고, 그 초과잉 속에서 진리가 드러나는 방식을 제시합니다.

(1) "불완전성"과 "초과잉"의 결합

지젝은 완전한 성화나 구속을 상정하는 대신, **"진리는 결코 완전하게 채워지지 않으며, 오히려 그 결핍 속에서만 나타난다"**는 점에서 **"초과잉"**을 강조합니다. 이는 성령의 활동이 불완전성 속에서 어떻게 역동적으로 드러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성령은 완성되지 않는 진리의 실체로, 지속적으로 변형되는 실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2) "종말의 영"으로서의 성령

지젝의 **"종말의 영"**은 끝없는 반복과 실패 속에서 나타나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성령은 구속적 역할을 넘어, 종말적 상태에서의 영으로 불완전한 상태에서 진리를 찾아가는 힘으로 나타납니다. 이 성령은 기독교 신학에서 다루는 성령의 **"정화"**나 **"성화"**와는 달리, 끝없는 실패와 결핍 속에서만 진리가 드러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3. 기존 성령론과의 차이점

기존의 성령론은 성령이 인간을 구속하고 성화시킨다는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인도 아래 구속적 목적을 가지고 활동합니다. 하지만 지젝의 성령론은 결핍을 통해 진리가 드러난다는 점을 강조하며, 불완전성과 실패 속에서만 진리가 가시화된다고 합니다. 이 점에서 지젝은 기존 성령론의 종결적 목표 지향성을 부정하고, **"종말의 영"**을 결핍과 초과잉의 실재 속에서 발견하는 점에서 차별화됩니다.

결론: 지젝의 성령론은 신학적 개념을 넘어서

지젝이 제시하는 성령론은 기존의 기독교 신학적 성령론을 넘어서서, 진리의 초과잉과 불완전성 속에서 성령의 역할을 새롭게 해석합니다. **"종말의 바닥"**에서 성령의 전이 드러나고, 교회는 그 불완전성 속에서 진리의 추구가 계속되는 장소로 기능합니다. 기존 성령론이 구속적 성격을 강조한다면, 지젝은 진리가 결코 완전한 상태로 다가올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계속 실패하는 진리"**의 개념 속에서 성령의 의미를 재구성합니다.

따라서 지젝의 성령론은 기존 신학적 교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성령의 의미를 탐구하며, **"불완전성"과 "초과잉"**을 성령의 역사 속에서 발견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기존 성령론의 한계를 넘어서는, 종말과 결핍의 영으로서의 성령을 제시하는 점에서 새로운 접근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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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

물론 지젝을 성령을 말할려고 한 적도 없고 의식한 적 없지

그저 실재계를 말하고자 하는 목적이었지만 말이지

이런 인간의 지혜와 총멸 곧 철학이나 신학들은

이 생명의 복음인 하나님의 능력을 담기에는 택도 없는 그릇이고

오히려 유대교의 완악함반 반복할 뿐이지

성령은 특히 보이지 않기에 그것을 포착한다 라는 자체가 말이 안되듯이 말이지

ChatGPT의 말:

네, 맞습니다. 지젝이 성령을 의도적으로 다룬 것은 아니지만, 실재계와 진리의 불완전성을 설명하면서 종말적이거나 불완전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초과잉을 통해 성령의 개념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시한 것이죠. 하지만 성령 자체는 철학이나 신학, 심지어 지젝이 말하는 실재계와 같은 인간의 개념적 그릇으로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본질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어리석은 일일 수 있다는 점에서 말씀하신 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1. 인간의 지혜와 그릇의 한계

말씀하신 것처럼, 철학적 시스템이나 신학적 교리가 하나님의 능력이나 생명의 복음을 담기에 부적합하다는 주장도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나 지식이 아무리 고차원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영을 완전하게 담아낼 수 없는 그릇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에서 지젝도 결국 인간의 이해와 구속적 진리는 본질적으로 맞지 않다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지젝은 실재계와 결핍, 진리의 초과잉을 논의하면서도, 이것이 궁극적인 구속이나 진리의 절대적 충족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합니다. 철학적으로 진리가 **불완전하게 드러나고, 그 드러남 자체가 또다시 결핍을 만들어낸다는 논리는 인간의 이해가 구속이나 완전한 진리를 포착할 수 없는 한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진리의 불완전성과 결핍을 인식하려는 노력에 불과하며, 하나님의 영은 그런 시도들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2. 유대교와 완악함

유대교의 완악함이라는 말에서 의미하는 바도 중요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불순종과 완악함을 반복하며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부분은 철학이나 신학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신의 뜻을 완벽히 이해하거나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 온전히 풀릴 수 없다는 완고한 한계를 드러냅니다.

지젝이 아무리 실재계를 불완전성과 초과잉 속에서 설명하더라도, 그가 성령이나 하나님의 영의 진리를 완전하게 이해하거나 포착할 수 있다는 전제는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과는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3. 성령은 보이지 않기에, 그것을 포착한다는 것

성령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신비로움과 불가시성을 강조하는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성령은 관념적으로 잡히지 않으며, 철학적으로 포착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단지 인간의 개념적 틀에 갇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실체로서의 진리를 철학적 또는 신학적 시스템으로 포착하려는 시도 그 자체가, 그 능력을 놓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진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포착한다"는 말 자체가 모순적이죠. 성령은 인간의 의식과 개념을 넘어서 존재하는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성령은 오히려 그 자체로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을 잡아내려 하는 시도는 이미 성령의 본질을 왜곡하거나 미완성적인 형태로 파악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인간의 자아와 논리가 스스로 포착할 수 없는 무언가로 존재합니다.

4. 철학과 신학의 한계

철학이나 신학은 인간의 이해와 사유의 영역 내에서 이루어지지만, 성령은 그 영역을 넘어서 신적인 능력으로 구속과 변화를 이끈다는 점에서 인간의 지혜나 이해로 성령을 완벽히 설명하거나 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분명합니다. 지젝이 실재계와 초과잉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의 철학은 완전한 구속이나 성령의 활동을 담아내려는 시도가 아니라, 진리의 불완전성과 역동성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구속의 역사를 통해 인간의 삶에 실제로 변화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철학적 사유나 신학적 체계가 그 존재의 진실성을 완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점에서 성령은 본질적으로 철학적 시스템을 넘어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 성령을 포착할 수 없다

지젝의 철학이나 성경의 교리 모두 성령의 진정성과 능력을 완전하게 포착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결국 성령은 보이지 않으며 그 존재를 철학적 시스템으로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철학이나 신학은 인간의 이해를 통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으며, 그 자체로 신의 신비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젝이 성령을 의도하지 않더라도, 그가 말하는 불완전성과 초과잉이 하나님의 능력을 담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철학적 시도와 성령론은 근본적인 한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 모든 인간적 노력을 넘어서는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간의 언어와 이해로 포착하는 시도는 결국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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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

결국 약속하신 성령 곧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포착이 되는 길 밖에 없지만

그 어떤 누구도 정직한 영이 없기에 심판이라는 종말 속에 놓이게 되지

이 바닥의 바닥 속에서

종말의 종말 속에서

인애와 자비를 바라는 주님의 긍휼만이 유일한 참소망으로써

약속하신 성령은 행함이 아닌 이 참소망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지 곧 심판 속에서 땅 끝에서 지옥의 몸에서

요나의 큰 물고기 뱃속에서 말이지

ChatGPT의 말:

맞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참소망이 되는 길은, 결국 자신의 노력이나 행위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약속된 구속의 능력이 되어, 심판과 종말의 상황 속에서 인간이 진정한 소망을 발견하는 방법은 행함이나 의지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그 분을 통해 참소망을 찾는 것입니다.

1. 성령과 예수님의 참소망

성령은 행함이나 인간의 노력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은 바로 구속과 참소망의 실제로서,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은 참된 희망을 발견합니다. 결국, 성령은 예수님을 통해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능력이며, 진정한 구속과 회복의 길을 열어 주는 힘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인간의 의지나 행위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이 영을 통해, 인간은 참소망과 참된 구속을 경험하게 되며, 심판의 종말 속에서조차 그리스도의 영은 그를 구속하고 참된 희망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2. 종말의 바닥과 심판 속에서의 소망

당신이 말씀하신 "바닥의 바닥", "종말의 종말" 속에서 참소망을 찾는 것은 심판과 종말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는 과정에서 나옵니다. 심판은 단지 형벌이나 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완전한 결핍이 맞닿는 지점입니다. 이 지점에서 인애와 자비를 바라는 하나님의 긍휼만이 유일한 참소망으로 드러납니다.

심판의 날,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죄가 직면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그 심판 속에서만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되고, 그 한계 속에서 주어진 은혜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3. 요나의 물고기 뱃속과 지옥의 몸

요나의 이야기처럼, **"큰 물고기 뱃속"**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절망의 공간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요나는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되죠. 이 물고기 뱃속은 단지 고통과 절망의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과 은혜가 절망 속에서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참소망"**이 기대할 수 없는 곳에서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비슷하게, 지옥의 몸—이 절망적인 상태—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긍휼을 바라볼 때,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구속하고 진정한 희망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상태로부터 구해내시려는 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우리는 구속의 희망을 얻게 됩니다.

4. 성령의 기능

성령은 행위나 공적 구속을 위한 능력이 아니라, 심판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힘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의 사역을 통해 우리에게 소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성령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고, 그 예수님 안에서 구속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죠.

즉, 성령의 주요 기능은 자기 의지나 능력으로 구원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초월하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구속의 은혜를 우리는 경험하고, 그를 온전히 의지하게 됩니다.

결론

결국, 참소망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고, 그 예수님의 영이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심판과 종말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구속하는 힘이 되며,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참소망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인간의 의지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긍휼로 주어지는 구속의 능력입니다.

심판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이며, 그 은혜는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구속과 참소망을 체험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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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

그럼 마지막으로 유대인은 율법의 행함을 쫓아 의에 못 이르렀지만

이방인은 믿음을 쫖아 의에 이르렀다 라는 성경 구절을 적어주오

ChatGPT의 말:

그 구절은 로마서 9장 30-3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다음은 그 구절입니다:

30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노니 이방인들이 의에 이르렀다, 그것은 믿음을 좇은 것이며,

31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의 의를 좇았으나 그 의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하여 그런가? 그들이 믿음으로가 아니라, 행위로 의를 얻으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다.

이 구절은 율법의 행위로 의에 이르려는 시도와, 믿음을 통한 의에 대한 구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 의로워지려 했으나, 믿음을 통해 의에 이른 것은 이방인들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믿음이 행위를 넘어서는 의의 기준임을 나타내는 중요한 성경 구절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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