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7. 가짜 안식(거짓평안)과 안식 주인

마가복음 7 : 중풍병자의 자리와 안식의 자리

(막 2:13, 개역)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막 2:14, 개역)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막 2:15, 개역)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막 2:16, 개역)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막 2:17,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8, 개역)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니까』
(막 2:19,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막 2:20, 개역)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막 2:21, 개역)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막 2:22, 개역)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막 2:23, 개역)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막 2:24, 개역)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막 2:25,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막 2:26, 개역)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막 2:27, 개역)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막 2:28, 개역)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지난 시간의 내용을 잠시 복습 겸 새롭게 파악해 보면

마가복음 5번째 공부 제목이 바로 새지옥 만들기입니다.

지옥이라는 배경을 깔고 새천국을 증거한다는 취지이겠지요.

결국 기존에 인간들이 알고 있던 천국은 모조리 지옥이였다는 것이
새천국 때문에 드러납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특히 개혁주의나 성화론자들이 증거하는
그것도 아주 아주 강력하게 증거하는 하나님 나라 개념은 모조리 다 지옥 개념입니다.
지옥을 천국이라고 증거하고 놀랍게도 그 하나님 나라 증거로 돈을 뜯어먹는다는 자체가 드러납니다. 그때나 오늘날이나 인간이라는 육은 변할 수가 없습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낯선 천국입니다. 기존의 천국과 정반대이지
연장선 상의 천국 개념은 없습니다. 오히려 철저한 단절 개념입니다.
그래야 인간이 신학으로 고안하고, 믿음이라는 신념과 오기로 창안해 내는 천국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예수님만이 몰고 온 새천국으로 발칵 뒤집어 지는 겁니다.

그 다음 공부 6번째 제목이 바로 미끄러운 몸입니다. 실족케 하는 미끄러운 몸

결국 인자 되신 예수님만이 새천국을 증거하기 위해서
기존의 천국을 지옥으로 새로 맹글어서 그 지옥을 깔고
지옥을 배경으로 천국의 차이성을 증거합니다.

맏아들과 같은 의식으로 굴던 이스라엘은 졸지에 이 새천국에 짤려 나갈 판국입니다.

그냥 안 짤려 나갑니다.

고맙게도 우리에게 교훈을 남겨주고 짤려나갑니다.

가짜 천국이란 이런 이런 것이다 라고
빛의 조명빧로 비로소 어두움의 실체를 새록 새록 보여주면서
예수님이 몰고온 천국과 인간이 조작해 낸 육의 천국의 차이를 드러냅니다.

그럼 우리는 묻죠 !
구지 일반인으로 그 가짜 천국을 들추어내면 되는데
왜 구지 구차한 방식과 또 어리석게 보이는 방식인
예수님과 같은 유대인을 통해서 가짜 천국을 드러내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율법 때문입니다.

율법을 쥐어야 손할례가 설명이 되고
그 손할례의 배경을 깔고 마음판의 할례가 설명이 되듯이

가인의 제사가 설명이 되어야
그 차이의 아벨의 제사가 설명이 되는 겁니다.
더 나은 제사란 그냥 육의 제사를 배경으로 깔고 그 차이를 드러내듯이 말이죠.

자 그렇다면 반드시 율법이라는 문자를 획득하고 먼저 선점해 버린
유대인 곧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 그림자에 충실한지

그 그림자 직분에 충분히 충실해야
멜기세덱의 반차가 그 차이로 드러나는 겁니다.

어미도 없고 아비도 없는 행함의 루트 계통이 아닌
마일리지 쌓기의 공적 루트가 아닌

도리어 그것이 철저하게 단절된

혈통으로나 육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은 방식이 설명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미끄러운 인자의 몸입니다.

결국 인자를 설명할려면

지옥을 배경으로 깔아야 합니다.

새지옥입니다.
알고보니 인간들이 믿어대기 좋은 천국이였습니다. 조작된 천국
그것도 유대인이 믿는 하나님을 따르는 이스라엘 계열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이 인자와의 차이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육에 혈통에 사람의 뜻에 충실해 줘야 합니다.

그러니 자신들의 믿음에 껌뻑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바울 보십시오.

스데반 까지 죽일 정도로 열심에 충실해야 합니다.
직접 예수님을 독대 하기 까지는 충실해야 합니다.

그냥 예수가 아닙니다.

바울이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를 독대 하기 까지는
때려죽어도 알길이 없어야 합니다.

자 그래서 인자란 지옥을 새롭게 깔고
그 지옥의 차이로써 천국을 증거하는데
놀랍게도 지옥에서 미끄러지는 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모든 육체는 졸지에 지옥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입니다.
심판 받아 마땅하다는 몸입니다.

결국 두 몸의 차이가 생겨버린 겁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치심으로써

인자 라는 몸과 인간들이 믿어대기 좋아하는 인간 자신들의 육체와 대비 시킵니다.


그리고 인자는 죄를 깔고서 인자를 증거하고
인자의 나라도 증거하고
인자의 아버지 곧 인자의 하나님을 증거 함으로써

모든 인간의 나라와 곧 신 특히 유대인의 하나님이 가짜임이 들통나게 됩니다.

참 여기서 또 오해하지 말 것은 유대인의 하나님이 가짜 라고 하니
구약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라
구약은 맞는데 구약을 선점 했다고 우기는 인간 곧 유대인은 모조리 틀렸다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12제자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는 위에서 말한 바 대로
육에, 혈통에, 사람의 뜻에 충실해 줘야 합니다.
각기 제 갈 길로 가는 양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다 이루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처소 곧 새 영, 예수님의 영을 부으시기 까지는
그들 12제자 스스로가 알아서 또는 자기 믿음으로 또는 자력으로
각기 제 갈 길로 안가고 예수님이 가신 길로만 따라 가면 안되는 겁니다.

성령도 마련하지 않았는데 우찌 갑니까?

육의 단절이다는 뜻입니다.

성령을 부음 받은 몸은 인자 되신 예수님의 몸처럼 미끄러운 몸입니다.

누가 봐도 육체일 뿐인데 그 육체에 성령 곧 십자가의 영을 부었기에
지나개나 다 무시하는 육체임에도 불구하고 그 육체를 건드려서
미끄러져 실족케 됨을 당하는 그런 특이한 몸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부으시기 까지는 즉 창세전의 예정 된 대로
말씀을 응하기 까지는

인간 스스로 특히 아무리 예수님의 12제자 라고 해도
성령 부으시기 까지는 그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왜 따를 수가 없는지
성령을 부음 받기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기 전에

자기 따나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방식들이 다 들통나야 합니다.

그런 육체에서 나올수 있는 믿음들이 다 드러나야 합니다.
얼마나 그 믿음들이 허세로 가득한 우상인줄 어느누구보다 제자들로 인해서 들통 내는 겁니다.

그래서 약속 대로 성령 부음 받은 후에 비로소 가능한 겁니다.
결국 제자란 그 차이를 아는 겁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아무리 자기 쪽에서 믿음을 갖출려고 약속을 인간의 열심으로
육에서 나올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 쏟도록 해야
약속에서 나온 공짜의 긍휼 방식의 차이를 알게 됩니다.

아 안되는 구나

약속의 영역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구나 인간의 믿음의 영역도 아니구나
예수님의 믿음 영역이구나 라고

이삭 때문에(육의 단절로 얻게된 할례인간) 미래의 예수님을 쳐다보게 됩니다.

희생 제물 때문에 비로소 보게 된 약속을 쳐다 보는 겁니다.
인자를 보게 됩니다. 미끄러운 몸을 쳐다 봅니다.
나무 위에 높이 달린 장대에 달린 몸입니다.
십자가 라는 저주에 달린 몸을 쳐다보고 비로소 알게 된 약속의 세계입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연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를 거치지도 않고
이 실족케 하는 미끄러운 몸을 쳐다 보지도 않고
인간은 연합을 시도합니다.

자기 따나 십자가의 영을 받을 필요 없이
지숨 지숨 가지고 있는 열정, 신념, 신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서 다가옵니다.

그거 다 짤려야 합니다. 그래서 할례입니다. 그거 다 죽여버립니다.
그래서 그런거 물에 참수 시키는 침례입니다. 
광야라는 사막에, 지옥에 쳐박아 버리는 겁니다.
그거 짤리지 않고서는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 12제자는 충실하게 왜 안 되는지
왜 짤려야 하는지

충실하게 10가지 이상의 원망꺼리를 법궤에 언약궤에 증거궤에 담겨짐을 당했듯이

12제자 또한 각기 제 갈길로 가는 양같은 모습을 충실히 보여 줘야만 하는 겁니다.
(마치 어제 수요설교처럼 선지자란 죄인의 모습을 충실히 보여줘야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것은 인자를 높이기 위함이지
12제자나
유대인의 믿음이나
인간의 믿음을 조금도 썩지 않겠다는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로 돌진하시는 죽음만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자 이렇게 전제를 하고 오늘 본문을 살펴 보면

안식일 논쟁이 벌어지는데

자 안식을 제대로 증거할려면 무엇을 배경으로 깔아야 합니까?
반드시 인간의 손에 장악된 가짜 안식일 배경이 깔려야 합니다.

안식을 다른 말로 쉼 평화 뭐 이런 표현들을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자 그럼 그것 조차도 배경으로 깔아 봅시다.

거짓 평안 거짓 쉼을 배경으로 깔고서

예수님은 평화를 외칩니다. 쉼을 외칩니다. 샬롬을 외칩니다.

결국 예수님의 평화란 전쟁입니다.

죄를 때려죽어도 가만히 내버려 둘수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평화란 죄는 대충 대충 고치고 평화라는 포장을 그 위에 깔아버립니다.

이 짖을 하는데 도사들이 바로 기독교요 유대교입니다.

죄를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죄를 건드려 버리면 죄를 건드린 자신이 그 죄를 뒤짚어 써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율법 정신입니다.

그러나 껍데기 율법만을 갖추면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는 해결이 됩니다.
그러나 구지 죄를 건드릴 필요도 없고
또 더 신비로운 것은 죄를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죄 덩어리 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죄를 건드려 버리면
자신이 회칠한 무덤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니 악마가 악마성을 건드릴 수가 없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누가 이 죄를 건드려야 합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믿음으로 하면 됩니다 라고 나오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건드리십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나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때 그때 성령 받은 자 만이 자신도 모르게 죄를 건드려서
그 죄악의 구조를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 성령 받음이 시간적으로 계속 지속적이냐? 아닙니다.
사건 위주요 사건 주체이지 사건이 우리를 도구로 삼기에 우리는 도구일 뿐이지
주체가 될 수가 없습니다. 2초 3초 라는 말이 그런 의미입니다.

자 그런데 죄악의 구조를 보게 되면 깜짝 놀라게 됩니다.

상대적으로 가장 거룩하다고 여겨지고 대중들에게 인정 받는 자들이
죄악의 구조에 중심에 서 있습니다.

또 깜짝 놀라는 것은 그 속에서 그들을 위해서 본인 자신도 부러워 하거나
돕거나 충성 봉사 하거나 했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아무리 그것을 눈치 채고 했다고 해서 그것을 끊고
죄악의 구조가 아닌 그 반대인 구조에 충실할려고 해도
우리 쪽에서 이미 떠난 문제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 구나 라는 말씀이 실감케 됩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짜자잔 하고 외부의 개입을 보게 됩니다.

그 곤고함과 망하게 되었다는 한탄? 감탄? 상한신음?

그것이 바로 미끈함인데

그 미끄러운 자리에 외부의 개입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입니다.

자 그러면 이 예수님은 우리가 비로소 보게된 곤고함
곧 죄 문제를 비로소 건드릴수 있는 유일한 단독자로써의 등장을 보게 되는 겁니다.

유일하게 죄를 건드리는 분입니다.
(저주를 건드립니다. 육체를 건드립니다. 할례를 예수님이 직접 하시겠다는 겁니다. 껍데기를 벗기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6번째 공부 본문의 중풍병자가 인자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 반대편인 자리에서 동원되는 겁니다.

의사를 증거할려면 환자가 되어야지
이 의사가 절 고쳤습니다 라고 외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시는 겁니다.

주님의 증거이지 인간 구원에는 하등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를 부르심은
어제 수요설교에서 언급 하셨는데요

항상 나단 선지자도 그렇고 다른 선지자(나를 치라 라고 했던 왕상 20장)도 그런 것이 바로
어떤 이야기를 하면서 그 상황을 반대로 말합니다.

나단 선지자가 어떤 사람에게 손님이 왔는데 주인이 자기 살진 양을 안 잡고
가난한자의 하나밖에 없는 딸처럼 여기는 양을 잡아서 대접했다 라고 말이죠.

이 예화를 든 것 자체가 올무입니다.

어제 말했던가요? 율법을 쥐었다고 지킬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지키기는커녕 쥐었다는 그 이유로 법의 자리에서 횡포를 부릴때에
예수님의 긍휼은 곧 사랑은 그 반대의 자리에서 올무로 다가온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
무조건 반대 할려고 무조건 다리 걸어서 실족케 할려고 도통 이해할수 없는
미끄러운 몸으로 선지자는 다가오는 겁니다.
율법 쥔 자들이
선악을 아는 인간들이 정죄하기 딱 좋은 몸으로
부정적인 신체로 다가오는 겁니다.

그래야 긍정이다고 우기는 몸들이 걸려드는 겁니다.
가짜 몸들이
지옥의 몸들이
우상의 몸들이

곧 고자(부정한 신체)를 정죄 할 줄 아는 진짜 지옥인간들이 걸려드는 겁니다.

다윗이 걸려들어야 그 우상성을 짤라 버릴 수가 있는 겁니다.

성령을 붓는다는 것은
그 이전에 정직한 영 새영이 없다 라는 부재성을 확실하게 하는 겁니다.

그것이 처음자리입니다.

결국 다윗은 처음자리를 회복하는 겁니다.

율법자리 라는 왕 자리를 차지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 왕들이 지적 받지도 않는 죄를 지적 받음으로써
처음 자리를 보게 되는 겁니다.

너는 미끄러운 몸인데
왜 쓸데 없는 선악의 몸이 될려고 법의 자리에 앉는가 라고 지적 받는 겁니다.

그럴때에 그 지적이 바로 사랑입니다.
죄를 건드려 주는 것이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물론 아픕니다. 육이 후패할 정도로 아픕니다.

그러나 여인이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도 아기를 안았을때에 그 고통 싹 다 잊어버리듯이 비록 육은 후패 하나 영을 받았을 때 날로 새로움에 그 기쁨의 감격이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쁩니다.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곧 징계입니다.
짤릴 것은 짜르자 라는 겁니다.
할례 라는 십자가를 우리에게 빼지 않겠다는 겁니다.
반드시 실행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할례 전과 할례 후의 차이를 알게 됩니다.
이전 몸 과 다른 몸을 말입니다.

이전 몸은 법을 쥔 몸이요 이후의 몸은 미끄러운 몸입니다.

법이 아무리 다가와도 쭐꾸덩 미끄러지는 기름 빠다 발린 리마리오 몸입니다.
법에 저촉 받지 않는 몸입니다.

피 몸입니다.


자 그렇다면 안식은 가짜 안식을 배경으로 깔고 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짜 안식은 유대사회나 모든 인간을 장악하고 있는
법적 요소로 모든 것을 장악하고 거기에 어떤 반론의 이의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자리 잡아야 합니다.

어떤 누구도 그 가짜 안식을 깰 자 없습니다.

안식법으로 걸어버리고 송사하면 누구든지 다 법에 걸려 버리는 그런 가짜 안식이어야 합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등장 합니다.

안식법으로 정작 남의 죄를 지적하는데는 완벽했지만
자신의 죄를 지적 할 수 없는 그 한계점의 안식을

가짜 안식이라고 규정하면서
그 가짜 안식을 건드리는 안식일의 주인이 등장 합니다.

안식 자체를 실제로 만드신 분입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안식을 만드신 그 당사자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안식을 만든적도 없는 인간들이
안식의 껍데기를 쥐고서

안식의 주인을 안식으로 고소 합니다.

안식 법 위반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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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안식의 주인이 오지 않는 이상 그 안식의 내막은 드러나지 않고
또 그 안식의 내막은 안식을 만든 그 당사자 오기 까지는

엉뚱한 놈들이 그 안식을 점령, 선점하고 있어야 하는 겁니다.

어두움이 모든 하나님의 법을 선점하고 있어야
모든 인간을 장악하고
모든 인간을 죄 아래 가두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를 왜곡케 만들어야
그 의문의 문자에 얽매이도록 만드는 겁니다.

결국 말씀 자체가 오셔야 그 내막이 풀리는 겁니다.
그리고 죄 아래 법 아래 갇혀버린 인간의 오해, 의문, 어리석음, 살인의지가
담겨짐으로써 참된 안식의 취지를 구성하는 요건이 되는 겁니다.

안식을 안식의 주인이 오기까지 쓸데 없이 마귀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은 아니 따먹힌 이유로 인해
쥐고 있어야
왜 쓸데없이 쥘 필요가 없었던 안식을
참안식의 주인, 안식을 만든 그 당사자를 만남으로써

자신이 쥔 안식의 바닥을 침으로써 지혜를 보게 됩니다.

내가 안식이 아니요 주님이 안식입니다.

오히려 내가 쥔 안식은 안식이 아니라 불안 자체였습니다.
병듬 자체였습니다.
중풍병 자체였습니다.

부정한 신체를 가지고서 거룩에 손댈려는
우상적인 육을 가지고서 거룩을 탐하는
썩어져야할 문둥병의 신체로 감히 천국의 구원을 바라는 말도 안되는 완악함을

도리어 예수님이 , 안식의 주인이 부정한 신체인 죄인으로 오셨고
모든 인간의 되도 않는 선악의식인 우상성 법적 정당성의 껍데기를 다 벗겨버리시고
(엉터리 말씀 해석을 제대로 참 취지의 말씀해석을 하셨고 - 산상수훈)
자신이 친히 저주받은 문둥병자 신체인냥 그 당연한 저주성 심판성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친히 버림받는 십자가를 이루심으로써

그 어떤 육도 예수님의 나라, 십자가의 나라를 넘볼수 없도록
완료, 미흡한 일점일획도 없는 완벽한 완료로써 다 이루셨습니다.
 
이제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서는 안식을 논할수 없도록 하신 겁니다.

결국 십자가를 거친
예수님의 피흘리심을 거친 안식은

도리어 우리에게 찔림이 되는 안식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찔림이 되는 안식을 원하는 자는 아무도 없지만
찔리지 않으면 그 안식의 취지

인간들이 어줍잖게 손으로 쥐고 지켰다고 자부하는 그런 가짜 안식이 아닌
안식의 주인이 직접 몰고온 그 안식을 통해서

내가 안식을 지켰다고 자부했지만
정작 가장 안식을 거부해 왔던 자임을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고

참안식 주인에게 그 안식을 깨뜨린 심판을 받아 마땅함을 요청하는

그 마음이야 말로 안식을 제대로 보고 만난자입니다.

정작 안식을 보고 심판 받아야 하는 부정한 자

쉼과 안식은커녕

저주와 심판에 마땅히 죽어야 함을
안식을 통해서 알아야 했건만

도리어 안식을 손에 쥐어버렸으니
안식을 통해서 저주 심판 받기는커녕

도리어 안식을 통해 정죄하는 위치에 서버리는 겁니다.

좋습니다. 정죄 하고 정죄 하고
그러다 결국 안식을 만든 안식의 주인까지 정죄 하고 말았으니

딱 걸려버린 올무에 갇혀버린 꼴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참으로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게도
예수님, 안식의 주인을 안식을 쥐고 넘어뜨릴려고 하니
누가 봐도 바리새인(모든 인간의 대표성)은 악마임을
너희 아비는 마귀임을 스스로 밝혀버린 꼴입니다.
(꼭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과 같은 꼴로써 자기꾀에 자기가 걸려드는 겁니다.
지키지도 못하는 우상성을 때려죽어도 부인 못하는 괜히 법 쥐고 지옥가는 꼴입니다.
안식을 놓으면 구원인데 말이죠. 인간의 선악(법:우상) 의식이야 말로 진짜 바보입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이 안식을 쥐지 않으면
그 우상성이 까발려지지 않으니 참으로 고마운 겁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 또한 같은 지적을 바리새인을 통해서 받는 겁니다.

그들과 다를바 없지만
한 사람은 맷돌 갈다가 구원받고 또 한사람은 맷돌 갈다가 심판 받는 겁니다.

이유 없습니다.
그저 그 차이를 보고서

주의 주 되심을 안식을 통해서 증거하심으로써
주의 주 되심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주님 자신의 숙제인 십자가가 옳았고
어떤 인간도 다 틀렸음 만을 보게 되는 겁니다.

결국 인자라는 의미는
쌍둥이로써
같은 인간 꼴이요
지나 나나 별 다른 인간도 아닌 쌍둥이 모습으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중요합니다.
다른 안식을 쥐고서 기존에 인간들이 쥐고 있는 안식을 쳐 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인자입니다.

만약 신이 이 땅에 내려와서
기존의 안식을 쥐고 있는 인간
그 인간들의 안식을 쳐 버린다면
다 알아먹습니다.

그래서 부랴 부랴 쳐 버림을 당한 안식을 버리고
새로운 안식을 부랴 부랴 잡겠지요.

그러나 인자로 왔다 라는 말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로 왔다는 겁니다.

왜 치는 지도 모르고
왜 짤려야 하는 지도 모르고

그 차이를 드러내는 인자의 활동이 도대체 뭔데
지는 무슨 통뼈인가 라는 식으로

그 행동 행동 하나 하나가
납득이 되고 쉽게 알아먹을 정도로 눈치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깊게
점점점 더 알수 없는 행동만 골라 골라하고
인간의 그 어떤 접촉점도 일체 허용치 않는 식으로

더욱더 모르는 행동으로만 일관 합니다.
누구 하나 뒤 늦게 접촉점을 시도한다 손 치면
그것 조차도 피해 가버립니다.
베드로가 우리의 그런 접촉점 시도의 욕망을 대표적으로 보여줬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접촉점도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어리석습니다.

안식의 주인인 안식 되신 인자
안식 그 자체이신 인자는
전혀 안식 스럽지 않습니다.
평화는커녕
쉼은커녕
부랴부랴 십자가 라는 심판과 저주로 돌진합니다.

그 돌진함에 있어서 쉼과 평화로움은 일체 보이지 않고
도리어 정신없이 전쟁 중입니다.
쉼도 없습니다.

졸지도 않습니다.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놀지도 않습니다.

(시 121:4, 개역)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맹렬하게 싸우십니다.
안식을 가지고서
가짜 안식을 치시고 있습니다.

왜 쓸데없는 것을 쥐었냐고
가짜 안식으로부터 빼내시고자 부지런히 부지런히 녹초가 되실 작정을 하시고
죽을 작정 아예 처음부터 맘 잡수시고 오신 겁니다.
그 썩어 버린 마음이 참 안식입니다.
전혀 전혀 네버 네버 안식 스럽지 않은 그 썩어서 상해버린 비린내나는 마음이 안식이라니?

아뿔싸

맞습니다. 진짜 안식을 만나면

우리는 아뿔싸 외 에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상해버린 썩어 시체가 된 그 악취를 우리는 맡아야 합니다.

그 악취가 바로 하나님이 기뻐 흠향하시는 향기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우리는 그 냄새 맡으면 죽습니다. 꽥 꽥 가래침 뱉고 난리 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우상성과 법적 안식, 선악의식이 홀라당 다 타버린 냄새를 맡으심으로써

비로소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십니다.
기뻐 흠향 하시고 코를 킁킁 거리면서 냄새 좋다
와이리 향기 기가막히게 좋노 라고 좋아라 하십니다.

모조리 태우기 까지는
평화란 없습니다.

(마 10:34,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5, 개역)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개역)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 10:37, 개역)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8, 개역)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 10:39, 개역)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0:40, 개역)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마 10:41, 개역)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마 10:42, 개역)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인간의 믿음으로 믿을수 없는
믿음 불가능한

인자가 몰고온 안식입니다.

안식이든 율법이든 말씀이든 성전이든 믿음이든 뭐든지
인간이 쥐고 있는 것을

인자는 얄밉게도
싫은 짖만 골라서 해서

그 어떤 것을 쥐어도

악마성을 들추어내는데는
한치 오차 없는 십자가의 거리낌만을 내세우십니다.

그 어리석은 지혜에 걸려들고
빨리 발가벗겨짐을 당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서 안식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목숨을 사랑해서 안식을 지켰음을 예수님 때문에 발가벗겨졌을 때
그는 구원받은 자입니다. 자기목숨을 안식과 맛바꾼 예수님을 쳐다보고 자기목숨과 가짜안식과는 다시는 맛바꾸지 않을 테니까요.)

빨리 쉬는 참안식에 쉼을 얻는 겁니다.

(마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8, 개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개역)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개역)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거 뭐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병주고 약주는 듯한 느낌입니다만
우리 속에 내장된 가짜 안식을 둘추임 당하지 않고서는

안식이 없기 때문에

인자는 못때빠졌게도 그 가짜 안식을 우리 깊숙한 육 속에서 빼내는

대수술(십자가)을 하는 겁니다.

간따나 아픈데 그 아픈 곳만 골라 골라서 더 수셔 댑니다.

그러나 그 아픔 보다 죽음의 심각성, 병의 심각성, 죄의 심각성을 아는 자만이

자신의 아픔 보다 죄, 악마, 우상, 선악의식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에 강퍅함을 드러낸다는 것에
비록 그 이전에는 자신도 그러했지만 이제는 그 내부속에서 내부고발자처럼
폭로하여서 브로큰애로우를 외치는 겁니다. 자폭입니다. 자폭.

이것이 기도 입니다.(불의한 재판관에게 원한을 갚아달라는 과부의 기도 말입니다.)

주여 빨리 고쳐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런 자만이 안식의 주인 곧 의사를 만난 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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