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암컷은 안 되고 수컷인가

레위기 8장의 제물에 대해서?  이름 : 구득영

2010-10-21 22:06:19 조회 : 74      
 
 
레위기 8장의 대제사장 위임식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마치려고 하는데, 어머님이 "왜 암컷은 안 되고 수컷인가?" 라고 질문을 하는 겁니다. 즉 암송아지나 암양는 왜 안 되느냐는 겁니다. 순간 분위기가 썰렁해지면서 마쳤는데, 아무튼 자식이 그래도 목회를 하는데 별로 도움이 안 되네요. ㅋㅋ

왜 하필이면 왜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사용하는 건가요?  이왕이면, 존재론적과 기능적으로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이근호  10-10-22 07:54  

암컷 제물은 추상적이고 포괄적으로 언약을 소개하면서 등장됩니다.(창 15:9) 그러나 그 언약이 보다 세밀화되는 경우에는 수컷이 대체로 대속물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것이 창세기 3:15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이라는 약속의 차원이 역사 속으로 흘러들어와서 어떤 식으로도 그 실체를 드러내는 현상으로 보여집니다. 즉 여자라는 여성 이미지의 후손이, 딸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남성 이미지와 결합되는 식으로 역사 속 언약의 실체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계 12:5) 숨겨진 하나님의 복음이 제사제도라는 율례 안에서 흔적을 어느 정도 드러내는 것이 약속의 일관성에 부합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구목사님 모친에게는 이렇게 답변해주세요. "엄마, 모든 말씀 속에는 뭔가 들어있는데 그것이 바로 여자 홀로 낳은 남자가 우리를 구원하신데. 그래서 그 남성을 있게 하는 분은 보이지 않게 '하늘의 어머니로 계신데" (갈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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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22일 금요일 오후 9:30:22  김대식

어제와 오늘 어머니랑 복음을 나누다가 이 질문과 연관 되는 내용이 나왔다.

며느리 다말이 왜 시아버지 유다를 괴롭히고
며느리 룻은 왜 시어머니 나오미를 괴롭히고
사라(사래)는 왜 남편 아브라함으로부터 인신매매 당하듯 팔려서
왜 애굽 족장과 그 아내를 괴롭히는지

한 두 시간 정도 나누다가 대뜸 어머니가 공교롭게도 예수님의 족보 에 대해서 질문 하셨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의 족보이다. 그래서 또 연관해서 한 두 시간 말씀을 나누었다.

제물이 왜 암컷이 아니고 수컷인가?

목사님의 답변은 암컷 제물은 추상적이다 라는 표현에

내가 어머니에게 답변한 것이 생각 났다.

다말이나
사래나
룻이나
또 나오미나
모세를 죽일려고 달려드는 천사에게 자식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 발에 던져
당신은 천상 피 남편이구나 라고 말하는 십보라나

예수님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제 글을 올렸듯이 예수님 자체가 할례맨이다.
모든 인간을 짤라버린다.
(할례 개념은 남자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추상적이다 라는 표현이 이해가 된다. 정작 남자만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할례가 남자의 신체만을 겨냥하기에 남자만이 할 수 있는데 정작 남자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의 할례는 의미가 없다. 도리어 여자가 한다. 여자만이 마음판의 할례의 의미를 보여준다. 물론 그 여성은 예수님의 족보에 해당되는 여자만 이다. 그러니 마음판의 할례 라는 말이 얼마나 추상적인가? 보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다말은 유다 속에 있는 약속에 자신의 목숨을 걸어 버린다. 유다 관심 없다. 유다를 쪼개버리고 짤라버려서라도 그 속에 있는 잃어버린 약속만을 되 찾을 뿐이다.)

예수님의 족보의 의도는 유대인의 족보 곧 혈통의 단절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제발 제발 아주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
인간의 구원이란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성경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구원이다.
예수님의 구원만이 마귀 곧 사망의 권세가 시기 하기 때문이다.

결국 성경 한 구절 한 구절 모든 말씀은 마귀 보란 듯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은 마귀 보란 듯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의 구원은 헛되다 라고 말씀하신다.

(시 60:11, 개역)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시 108:12, 개역)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다말의 관심사는 유다 구원이 아니다.
유다가 생기기도 전에 있던 약속이다.
그 잃어버렸던 보석 다시 찾기 이다.

그랬을때에 도리어 짤려야 함을 알게 된다. 할례다.

(
왜 요셉이 볼모작전으로 계속 뺑뺑이 돌리는 가?
짜를 것 짜르고 제거하고 다 불순물을 다 빼버리고 오로지 보석만 찾아낸다.
너희들이 새까맣게 잊어버린 땅속에 파묻어버려서 죽음의 권세로 이쁘게 포장해 버린 그 회칠한 무덤 속에 가두어 버린 그 약속을 끄집어 낼려고 요셉은 뺑뺑이 돌린다.

불의한 청지기가 불의한 재물이 충성했듯이 요셉은 그 죽어버림 취급 받은 약속을 들고 올 때 까지 계속 뺑뺑이 돌리면서 잃어버렸던 것을 되 찾는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찾아서
그 걸림돌을 이스라엘이라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영적존재의 모퉁이 돌 주춧돌 머릿돌로 삼아서 이스라엘을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요셉은 그거 나올 때 까지 버린돌을 찾아낸다.
저번에 언급한 것 중에 과부가 마음씨 좋은 변호사 안 찾고 하나님도 두려워 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가서 자신의 한을 풀어 달라고 하는 이야기를 기도에 대해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 하셨다.

이 기도는 다말과 유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해하면 쉽다.
다말은 약속에 뛰어든다. 그러나 유다는 약속의 껍데기를 쥐고서는 정작 약속에 관심없고
그 약속으로 자신의 죄를 감추는데 이용한다. 마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면서 벌리는 악마적인 사고방식을 미리 앞당겨서 유다가 보여준다. 그 원수성에 예수님은 다말처럼 뛰어든다. 하나님도 안 믿으면서도 요셉을 죽여 놓고도 약속을 죽여놓고도 새까맣게 잊어버려놓고서도 정작 약속을 아는 자들은 자신들 뿐이다 라는 선민의식을 보여주는 그 모습이 어쩜 육은 별수 없는데 그것이 다말 때문에 짤려야 하고 요셉 때문에 되찾아야 한다.
이것이 기도다
기도란 중언부언 말을 많이 하고 시간을 채우는 것도 아닌
그렇다고 양이 아니라 질적으로 해야 한다는 수준 높이기가 아닌

기도란 비록 모양새가 부정적인 모양일지라도 약속 때문에 창녀가 되어서라도
부정한 시아버지 유다가 하나님의 법으로 다말을 죽일려고 할지라도
오로지 다말은 약속에게만 뛰어든다. 이것은 예수님을 겨냥한 것이다. 믿음이다.

유다는 비로소 요셉에게 그 잃어버렸다가 되 찾은 것을 주게 된다.
요셉은 이스라엘의 자리를 바로 그것이 처음자리임을
마치 제사인냥 가르고 분리하고 짜르고 제거하고 세밀하게 하나 하나 제사하듯이
약속이 나올 때 까지 뺑뺑이 돌리고 제거하고 거부하고 단절하고 차단하고 짤라내듯이
그렇게 그 사건 자체를 제사로 한다.

그렇다면 바로 다말이 나오지 유다가 나올 필요가 없지 않은가?

아니다 유다가 짤려야 할 자신의 신체의 부정성을 고백해야 하기 때문에 그 유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이 유다 계열에 비록 남성의 생식기 계열을 타는 듯이 보이지만 정작 전혀 그런 것이 없는 다윗이 나온다.

또 다윗 자체도 밧세바 로부터 짤려야 한다.

처음자리를 다윗이 생각한 힘의 자리가 아닌
상한심령의 성령자리 처음자리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자리로 앉히기 위해
여자에게서 짤려야 한다.

그 여자가 밧세바가 아니라
우리야의 아내 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에 5명의 여자 중에 밧세바의 이름은 언급을 하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로 표현한다.

다윗을 짤라버리는 할례인간으로써 우리야를 언급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냥 여자로서의 밧세바 계열로 오신게 아니라
밧세바 단독자가 아닌
우리야의 아내 계열로써 오신 것이다. 그러니 이 표현들이 얼마나 추상적인가?
여자의 후손이라고 해서 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남자를 단절 시키는 의미이니 말이다.
마음판의 할례를 이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인간숙제가 아니다.

)


탕자는 잃어버렸다가 되 찾은 경험이 있다.
아버지의 관심사는 이 특이성에 약속의 의미를 부여한다.
죽었다가 살아난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맏아들은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죽었다가 다시 산 경험이 없다.

죄를 모른다. 그래서 긍휼도 모른다. 용서도 모른다. 사랑을 쳐다볼수가 없다.
사랑이 없다.

그러니 내세울 것은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기지 않았다는 행함만을 주장할 수 밖에 없다. 법을 쥔 것 그것이 내세울 수 있는 전부인 것이다. 부자청년이 내세운 것은 그것이 전부다. 선악이 전부이다. 이 선악이 짤려버림을 당하는 경험이 없다. 알려줘도 모른다. 땅의 일인 할례(십자가)를 말해도 모르는데 어찌 하늘의 일을 알겠는가? 바로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는 그 의식(선악법)을 짤라버리는 일인데, 반대로 찾아왔으니, 행했으니, 행한 댓가를 달라는 것이다.

그러니 탕자 자체가 할례맨이 되어서 그 행함을 단절시키는 상황이 된다.
시편에 언급한 저 두 구절은 사건 속에서 나온 찬양이다. 단절을 외친 것이다.

여기서 나는 강이아빠에게 수요설교에 있었던 탕자는 맏아들을 짜르기 위한 아버지의 약속 관심사 뿐임을 언급했을때에 놀랍게도 강이아빠가 놀라운 표현을 했다.

우와 그것을 누가 믿겠는가? 말도 안된다.

결국 탕자는 예수님이다는 말이네요

우와 우와 이 말에 난 뿅 갔다.

그래서 추석 떡값 받은 것 강이아빠에게 한 턱 쏘았다.

탕자는 결국 예수님이였다.

그래서 어제 글의 제목을 저렇게 한 것이다. 모든 인간의 육을 짜르는 예수님


어머니는 그럼 어떻게 기생라합은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갔냐 라고 물으셨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온 여자를 다 언급하셨다.

기생라합은

(히 11:31, 개역)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랬다.

(히 11:1, 개역)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즉 기도했다는 말이다.
기도를 행한 것이 아니라 기도의 사람으로 처음부터 태어난 것이다.
그럼 그 기도 곧 믿음 곧 바라는 바램은 언제 나타났는가?

자신이 속한 민족 친족 신들 속에 있으면서
정작 여호와께서 애굽나라를 쳤다는 그 소식을 접하고
자신이 짤려나간것처럼 간담이 써늘한 말씀을 듣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랬다.

정작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왜 할례인가? 왜 너희들은 짤려야할 사람의 구원을 헛됨을 알아야 하는가? 라는 육체에 전혀 맞지 않은 영의 몸에만 맞는 만나라는 양식을 먹고
육이 짤리고 영의 몸 곧 그리스도의 몸, 곧 주의 살과 피를 먹는데 있어서

정작 당사자들은 싫어하는데
그것 조차도 더디게 옮에도 불구하고 40년 간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렸다.

오로지 약속에만 관심 가졌다.

오죽하면 그 약속에 뛰어드는 모습은 항상 법적인 모습의 반대이다.

그래서 거짓말로 감춘다.

다말도 창녀의 모습이였고
사래도 인신매매로 들어갔고
다윗도 회개 금식 해놓고도 거부하고 먹고 마심으로써 약속을 주장한다.
오죽하면 신하가 미쳤는가? 너무 과해서 실성했는가? 왜 갑자기 행동이 이중적인가?
왜 일관성이 없는가에 대해서 법적인 모습에
약속은 그 법 보란 듯이 더욱더 부정한 모습을 갖춘다.

죄수복을 입고서 용서를 외친다.
죄인 중에 괴수의 모습으로써 예수님을 외친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가 말하는 의미에 시근없고 눈치도 없이
융통성이라고는 일체 없이

어무이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다 라고 하니(잃어버렸는데 되 찾겠다고 뛰어든다 누가? 룻이? 아니다. 예수님이다.)

간따나 열받는데 더 석유 때려붓는다.

이제는 너도 날 무시하나? 농담 아니다. 농담할 힘도 없다.
제잘 날 더 이상 괴롭히지 말고 떠나가거라
니 살 길로 가라

너가 뭘 보고 여기에 뛰어드노? 내 하나님 날 괴롭히는 하나님이다. 모조리 다 빼앗아 간다.

전능자란 날 괴롭히는 여호와 다 너 시근있나?

그러나 룻은 나오미 말에 아랑곳 없다. 미래의 예수님을 봤다.
봐 버리면 못 말린다.

나오미 말이 더 현실적이지 않은가?

어 그런데 룻이 아이를 낳고 나오미에게 준다.

다들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라고 한다.

여기서 아들은 이전것의 남편 자식들이 아니라
그 이전것들은 짤렸고 새 것인 약속에 근거한다.

남자 족보를 짜르는 아들이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고 참으로 특이하고 특이한 찬양이 퍼진다.
찬양 곧 기도란 사건을 담은 것이다.

묵시적인 사건을 담는다. 곧 약속이다. 곧 십자가다.

그 나오미가 다윗의 족보의 근원을 보여준다.
다윗의 증조모가 룻이니가 그 룻의 시어머니?? 아 뭐 어떻게 불러야 할지 족보에는 약해서
하여튼 그렇다

즉 이스라엘 제사장나라 속에서 멜기세덱 계열이 따로 숨어있는 것이다.

참 책을 읽다가 인간은 가시화 되는 것을 비가시화 하는 짓을 잉여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복음은 그 반대다 비가시화를 가시화 시킨다.

스마트 폰을 보면 알 수 있다. 처음에는 그렇게 커다란 컴퓨터가 점점점 작아져서 신체 속에 들어간다. 안 보인다는 말은 이 말이다. 신체 속에 들어가버리기 때문에 신체가 그것을 은폐시키고 가리우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 스마트 폰과 같은 컴 기능의 기술집약의 잉여성이 인간을 가리우는 식이 된다.

대뜸 가인의 제사가 생각났다. 그리고 왜 이마표를 달라고 했고 또 줘버리는 이유를 알았다.

아무리 감추고 감추어도 그 수치를 가릴 수가 없다.

반대로 아벨의 제사는 비가시성을 가시화 시킨다. 그 가시성은 오로지 믿음 뿐이다.
즉 죽음이다.

이것을 실상 이라고 했다.

수치를 가리우는 가인의 제사와 반대 되는
물질과 믿음과 영웅성과 이마표와 또 선악과 또 율법을

아무리 신체에 꼬깃꼬깃 비가시화로 작게 만들고 작게 만들어서 신체 속에 은폐시켜
그것으로?(게임 용어인데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요? 아이템? 일종의 무기죠)
그런 무기들을 더덕 더덕 신체에 숨기고서
오로지 예수님을 죽이는데 사용하는 겁니다.
왜 유일하게 다말처럼 귀찮게 하고 간섭하고 방해하니까요?
그러나 다말은 유다를 괴롭혀서라도 그 약속을 끄집어 냅니다.
유다가 이뻐서가 아니라 말이죠. 불의한 재판관이 이뻐서 괴롭히는게 아닙니다.
관심사는 약속입니다.

가인의 제사는 숨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수치가 늘 발각당함으로써 힘빼기에 더욱더 그 힘빠진 모습이 적을 보란 듯이 더 힘빠진 모습으로 놓이게 됩니다.

결국 그 부정성, 곧 저주 받은 모습이, 그 힘 빠진 모습이

저들이 마음 껏 밟을 수 있도록 하는 숨어있던 살인의지를 도출하는 미끼로서 작용하는 거죠.

그리고서는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인자가 들려야 한다는 그 땅의 일을 쳐다보라고 하니

그 자체가 싫은 겁니다. 전혀 사랑이나 긍휼로 보이질 않는 겁니다.

왜 수컷이고 암컷이 아닐까요?

수컷은 짤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정작 암컷이 진짜 제물은 이 분이다 라고 보여줍니다.

여기에 가인의 제사처럼 남자의 족보를 우기는 행함을 주장하는 자들은 아벨의 제사를 거부하게 됩니다. 그리고 죽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아벨의 제사로부터 가인의 제사가 짤렸다는 의미입니다.

제사 곧 제물의 의미는 이런 인간의 죄 성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서 들추어 냅니다.
그러나 남자의 제물성 곧 뱀의 자손의 제사와 제물 의식은 죄를 가리우는데 제사와 제물을 활용합니다. 그것에 유일하게 방해꾼이 바로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이 제물 되심입니다.

예수님이 제물 자체가 되어버리면

자신들이 지금까지 정성껏 드린
자기를 위하여
자기 구원을 위한 제사 행위들이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귀란 예수님이 제물 되신 의미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목적 뿐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 죽음 조차도 자기구원과 연관시키도록 마귀는 유혹합니다.
끝까지 뱀의 후손의 의식을 못 버리도록 말이죠.

이런 남자든 여자든 뱀이라는 육의 혈통의 사고방식을 단절 시키는 의식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만이 홀로 이루신 완료한 제사요 넉넉한 승리입니다.


곧 십자가입니다.

(창 3:15, 개역)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누가 알았겠습니까?

나의 죄성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활짝 공개해버린 고마운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나 보다 더 강했음을?
나 보다 더 옳았음을?


(롬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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