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다

2010년 10월 23일 토요일 오전 10:04:48  김대식


(고전 14:34, 개역)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사사들을 보면 모두다 남자이다. 거기에 딱 한명의 드보라가 여자 사사이다.
그리고 모든 제사장은 남자 이다.
또 선지자도 다 남자이다. 거기서 여자 선지자가 있는데 거짓선지자 속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사도들도 다 남자다.
12제자들도 다 남자다.


이 말을 하면 여자들도 이제는 버럭 거리며 화를 내는 시대가 되었다.

꼭 패미니스트(여성권리주장자)들만이 아니라 남자들도 그런 불평등권리 시대는 끝났다는 의식이다. 남녀동등권리 시대이니 일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인간의 일 곧 사람의 일에 관심 없다.

위에서 언급한 대부분의 일이 남자라고 해서 남자가 좋은 일을 하는 의미로 여긴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 없고 사람의 일에만 관심 두기 때문이다.

드보라 여자 사사를 보면 알 수 있다.
결국 남자를 고발하는 차원에서 동원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사이다.

어제 질문에도 그렇게 나왔지만

제물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일에 해당된다. 곧 제사다.
그냥 제사가 아니다. 가인의 제사를 짤라버리는 더 나은 제사이어야만 한다.

왜 암컷을 하지 않고 수컷을 할까?

부정성 곧 더러운 죄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 보다 더러운 경제 속에 들어가서 더러운 돈을 벌어서 더러운 죄를 알아야 한다.

남자는 여자 보다 더러운 정치 속에 들어가서 더러운 정치적인 힘의 세계를 보고 그 더러운 정치의 힘이 왜 짤려야 하는 지를 죄를 통해서 알아야 한다.

남자는 여자 보다 더러운 제물이 가득한 종교 속으로 들어가서 더러운 제물로 인한 죄가 어떻게 짤려야 하고 용서함을 받는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곧 죄에 대한 예민성이다.

그러나 여자는 몸 자체가 남자 보다 부정한 몸으로써 그 자체로써 긍휼을 바라는 존재로
바로 바로 신체 자체가 이미 할례 당한 거세 당한 존재로써 생명을 품는 몸으로 태어났다.

바울이 패미니스트들이(남자도 여성권리주장하는 자 많음) 가장 싫어하는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하고 말을 하는 것 자체도 허락함이 없는 이유는 말씀에 복종하라는 취지이다.

남자는 태어나면서 전쟁의 구조 속에 놓이게 된다.
싸워야만 하는 존재이다.

죄와 싸워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죄의 소원에서 끌려가는 지옥갈자들이다.

그러나 여자는 싸울 필요가 없다.

오로지 죄와 싸워 승리한 그 남자의 전리품을 도리어 누리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 5장에 남편 아니니아와 아내 삽비라 부부를 보면
바친 소유를 얼마를 감추는 남편의 잘못에 아내는 묵인하고 잠잠했다.

남자가 죽게 되자 그것도 모르고 뒤에 온 아내 삽비라는 감추었던 것을 실토하지 못하고 남편처럼 죽게 된다.

(행 5:6, 개역)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행 5:7, 개역)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행 5:8,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행 5:9,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행 5:10, 개역)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행 5:11, 개역)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헌금 뜯어 낼려는 삯꾼들의 설교를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세시간 쯤 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성경은 그만큼 죄에 대해서 예민하다.

왜 직분을 세울까?
선지자는 사람이 아니라 죄인일까?


죄에 대해서 예민한 말씀 때문이다.
마귀에 대해서 예민하다.
마귀만을 겨냥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직분 곧 은사도 그러하기에
제물 또한 제사 또한 그런 취지이다.

죄 라는 것 때문에 오죽하면 하나님이 직접 내려왔고
직접 하나님이 죽어버리신다.

그것도 대제사장으로써 선지자로써 왕으로써

이 직분들 자체가 계급이 아니다.

죄 때문에 형성 된 것이다.

그 죄로 인해 주의 주 되심을 드러내신다.


아니 생각해 보라

환자가 없다면 의사가 무슨 소용있나?
죄인이 없다면 구원자가 무슨 의미가 있나?

존재론적 개념이 아니다. 기능 개념이다.

돌들을 통해서라도 아브라함 자손을 만드신다고 했다.

결국 남자의 기능 여자의 기능이란
죄 때문에 있는 것이다.

결국 그 죄 때문에 있는 은사와 직분이라면
그 죄를 승리한 주의 주 되심에 여전히 남자와 여자의 기능이 활용이 된다.

더러운 경제 죄악된 경제
더러운 종교 죄악된 종교
더러운 정치 죄악된 정치에

마귀가 배후에 있다.

그 속에 남자가 먼저 뛰어들고 더러운 것을 옷에 묻혀 가면서
그 똥물 바닥 세계에서 죄를 알게 되면

아 이런 죄도 예수님의 피가 이미 승리완료를 했군요 라는 죄악에 대한 예민함을 먼저 격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남자가 도리어 이런 기능이 아닌

깨끗한 경제, 선하고 정의로운 경제
깨끗한 종교, 거룩한 종교
깨끗한 정치, 강한 힘의 평등하고 공정한 분배인 정의사회 구현의 자유 민주주의 정치

로써 포장해 버리면

그 껍데기를 쪼개려고 여자를 투입 시킬 수 밖에 없다.


사실상 성경 전체는 남자는 그 기능에 다 실패 한다.
여자를 투입시킨 것이 예수님의 족보이다.

시아버지 유다는 약속을 엉터리로 포장한다.
자신의 가문을 그것도 거룩한 약속의 가문을 저 여자 하나 때문에 망칠수 없다는 것이다.

정작 유다가 원수인데 말이다.

그래서 다말이 약속에 뛰어든다.

말씀(약속)이란 남자가 옳고 여자가 틀렸다 라는 것에 관심 없다.
거짓선지자가 틀렸고 참선지자가 옳다에 관심이 없다.
마치 어제 말한 것처럼 인간의 구원에 관심이 없다면 저런 것들도 다 무용지물인데
그 무용지물에 관심을 왜 두나?

말씀은 오로지 약속에만 관심 뿐이다. 그 약속은 그 창세전의 예정은
예수님의 구원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주의 주 되심이다

그래서 죄를 깔아놓고 주의 주 되심을 이루신다.

여기에 남자의 기능 여자의 기능들이 마치 직분처럼 은사처럼 동원이 된다.

말씀만을 앞장세우고 말씀 앞에 뒤에 서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를
하나의 예로써 소모품처럼 보여주는 식이다. 기능이다.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지옥에 갔다는 것은 성경에 관심 없다.
이것으로 사기 치는 목사들이 수두룩 하다.

말씀 앞에 서게 되면 이렇게 된다는 먼저 매 맞는 모습이다.

그만큼 말씀 자체가 죄에 대해서 예민하다는 뜻이다.
이렇게 말씀 하시는 말씀에 관심 두라는 뜻인데

사람을 쳐다 보게 되면 저 사람처럼 안되어야 할텐데 라고 또 자신에게 법처럼 작용하면
똑같이 속이러 오는 사람에게 똑같이 속아 넘어갈 수 밖에 없다.

젊은 선지자 늙은 선지자 이야기는 누가 옳고 누가 틀렸다가 아니라
말씀(약속) 자체는 어떤 인간의 도움으로 순종했다고 더 잘 되고
또 어떤 인간의 방해에도 멈칫 멈칫하지 않았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래서
그래서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아나니아 삽비라 이야기로 반드시 사기치는 자들이 등장 할 수 밖에 없다 라는 것을 우리는 말씀을 보며 알 수 있다.

남자가 모든 기능을 발휘 하는 듯이 또 죄에 대해서 남자만 예민하는 듯이 보이지만
정작 때려죽어도 할례처럼 절대로 짤려지지 않는 것임을

도리어 유다처럼 손할례인냥 약속을 쥐고서
율법으로 예수님을 죽인 것만 하는 것이 남자들의 속성이다.

이것을 고발하는 다말에 의해 진짜로 짤려야 할 마음판의 할례기능을

다말이 약속에만 뛰어들어서 예수님의 주의 주 되심을 드러낸다.


왜 천국에도 없는 여자 남자라는 기능이 있는가? 천국에는 죄가 없다.
왜 선지자 왕 제사장이 있는가?
왜 제자 곧 사도 집사 라는 직분들이 있는가?

싸움이라는 전쟁의 구조에 놓여진 군사기능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성경은 죄에 대해서 예민하다.

그 말씀만이 예민한 그 전쟁 구조에 남자의 기능이 부합되는냥 참여하지만 그저 남자는 허세 뿐이다. 그래서 그 허세를 짤라버리는 일을(허세를 짤라버리라고 주어진 남자의 기능인데 남자 구실을 못하니, 여성이 대신 투입 된다. 무시 당하는 줄 뻔히 알면서 말이다. 그래서 젖먹이 전쟁이다.) 예수님이 직접 하러 오셨다.

그 허세란 바로 우상이다. 비약속, 약속도 못 지키면서 허세로만 약속 지키겠다고 꾄다.


그래서 예언이라는 약속의 일에

사람의 일이 가미 되지 못하도록

사도로써 바울은 죄에 예민하기에 이런 표현을 쓴 것이다.

여자는 잠잠 하라고

곧 동일한 의미로

부정한 십자가를 외치지 못하는 남자(십자가의 사랑을 모르는 남자)는 다 짤렸다 라는 말과 동일하다.

창녀같이 부정하고
거짓말하는 기생처럼 거짓되고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는 것처럼 불의하듯이

[죄에 대해 예민]할 정도로 복종하는 그 순종,
오로지 십자가에 죽으시러 오신 예수님의 일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는 그 불합리적인 어리석음이

모든 사람의 지혜 보다 더 뛰어난 것이다.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6, 개역)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개역)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개역)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개역)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13:4, 개역)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고후 13:5, 개역)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후 13:6, 개역)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고후 13:7, 개역)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리운 자 같을지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고후 13:8, 개역)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고후 13:9, 개역)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약함을 구하라 라는 말씀이 무슨 말인가?
강함을 쫏는 전쟁에서 더더욱 이길려는 강한 무기를 찾는 그 강함이 이미 짤렸다는 것이다.

온전함은 그리스도의 약하심으로 이룬 것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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