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믿음의 완악함과 VS 예수님의 약하심

마가복음 9: 예수님 안식의 확장인 긍휼과 vs 그로인한 더욱더 완악해지는 인간신념(살인의지)

2010년 11월 11일 목요일 오후 10:00:02  김대식

(막 3:1, 개역)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막 3:2, 개역)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막 3:3, 개역)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막 3:4,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막 3:5, 개역)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막 3:6, 개역)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그 동안 인터넷이 끊겨져서 글을 올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지난 시간에 했던 것 반복하면서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즉 완료성입니다.
그렇다면 그 완료성은 그냥 완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완료의 확장을 보여줍니다.

그 차이로써 동원되는 것이 완료의 반대인 미완료입니다.

미완료는 이 완료성에 끝까지 미완료성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즉 완악합니다. 그 완악함이란 반드시 인간의 행함과 관련이 되어 있고 그 행함이란
종교라는 이름으로 신념화 되어 있습니다. 즉 교리입니다. 뭔가를 사수하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손에 사수 되는 것들은 모조리 다 거짓입니다.

그 거짓은 완악함으로 드러납니다. 완료라면 마침이라면 그 사수하고자 하는 것을 깨뜨려 보면 압니다. 버럭 화를 냅니다. 안색이 변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인간의 제사가 예수님의 제사와 차이나는 상대적인 배경으로써 깔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직접 안식을 이루시고자 직접 내려 오셨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안식 지키기는 단 한번도 제대로 된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행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행함에 대해서 손을 떼야 합니다.

문제는 그 손 때는 것 조차도 행함으로써 여운이 남겨질 정도로 인간은 자기 수고에 집착하는 그야 말로 병걸린 마약 중독 종교중독 선악중독자들입니다.

결국 신앙 즉 신념이란 자기중독으로써 가리운 것입니다.

신념에 대해서 저번에 영화를 보고 글을 올렸던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신념이란 애초부터 다 가짜입니다. 또 가짜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가짜 안될려는 제대로 된 신앙 추구하겠다고 해 본들 소용 없습니다. 신념이란 가인의 제사처럼 더욱더 딴딴해 져서 단 한 순간에 무녀져 버립니다.

오히려 그 무너뜨리는 것에 희망을 걸어야 합니다. 나를 무너뜨리는 것에 희망을 걸다니?

가인은 아벨의 제사에 희망을 걸어야 합니다. 죽는 제사 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안식 지키기는 무너져야 합니다. 오히려 인간의 안식 지키기를 무너뜨리는 예수님의 안식에 유일한 희망을 걸어야 합니다.

내 안식 지키기 부정해 버리고 예수님 안식 완성에 희망을 걸다니?
과연 가능할까요?

그래서 믿음이란 믿음의 조상이 했던 바 대로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믿음 제사 곧 자기 아들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그 사랑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제사장 되심과 아들 예수님이 제물 되시는 그 십자가 라는 특이한 창세전의 믿음을 봐 버리고서는 (완료) 이 완료가 자신에게 덮쳐진 것을 보고

예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믿음을 바라 본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추구한게 아니라 말이죠. 신념 믿음 카면 아브라함은 우상조각가로써 한 믿음 합니다만 그거 희망 일체 걸지 않게 된게 자기 믿음 무너뜨린 더 나은 믿음이 덮쳐버린 겁니다. 훨씬 더 완료적이고 확정적인 번성력 즉 잉여성이 강합니다.

마치 사도바울이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으로써 완벽한 흠이 없을 정도의 율법 지키기에
졸지에 다메섹에서 그거 다 깨지고 똥 중에 똥 으로 다 여기고
자기 목숨과도 바꿔버릴 정도로 더 나은 율법의 완성을 만나버렸습니다.

누구십니까?

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 다

남이 아닌 바울 자신이 율법완벽증 때문에 율법중독증 때문에 핍박해 버린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비로소 손 땝니다. 자신의 숙제에서 예수님의 숙제로 이양 됩니다.

전혀 지킬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전혀 지킬 것이 없다는 소리가 종교중독자 믿음중독자 들에게서는 전혀 믿겨질 수가 없는 겁니다. 자신의 신념이 무너질 테니

더 나은 것을 쳐다 볼려면 어줍짢은 자기 수고를 손 놓아야 할 테니까 말이죠.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안식일의 완료성이 얼마나 인간의 신념과 첨예할 정도로
촘촘히 대립의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단절이라고 표현 했습니다.

10월 두 번째 대구강의 그러니까 3째주 공부였던가요?

엘리야의 부활이 아니 승천이

인간의 천국 들어가는 모범 답안지처럼 하나의 가능성으로 비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단절로써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엘리야가 왔을때를 우리는 봐야 합니다.

곧 예수님입니다. 다시 왔을때의 예수님의 부활관은 바리새인의 부활관을 유발시키면서

오늘 본문처럼 인간들의 안식일 관을 유발시키면서 그 안식 짤라버리듯이

뭐 ~ 평화  평 ~~~~~~~~ 화
뭐 ~ 안식  안 ~~~~~~~~ 식
뭐 ~ 화평  화 ~~~~~~~~ 평

뭐 ~ 부활  부 ~~~~~~~~ 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도리어 다 단절입니다.

부활 꿈도 꾸지 말라는 겁니다.

거쳐서 오라는 겁니다. 십자가의 개죽음입니다.

그것도 그냥 개죽음이 아니라 내가 다름아닌 내가 예수님을 개죽음으로 몰아간 그 십자가를 그 개죽음인 십자가를 거쳐서 오라는 겁니다.

왜 그러시는고 하니

사랑이란 미움을 상대적으로 거부하는 철저한 질투입니다.

그 미움의 대상이 뭔고 하니 바로 선악과 의식 곧 법입니다.

이것을 이 미움을 거치지 않으면 사랑 마저도 선악의식으로써 법이 되고
그 법은 행함의식으로써 자신의 숙제로써 달성한 사랑으로 착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애초부터 짤라버리는 겁니다.

선악 의식은 수치를 눈 뜨게 했습니다.

그 수치를 가리우는데 사용 되는 것이 율법이요 행함이요 성전이요 믿음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홀라당 발가벗겨 버리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것이 바로 걸림돌인 십자가입니다.

영원한 수치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 문턱을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아벨처럼 죽여버렸기 때문에
예수님 보다 더 나은 의를 더 나은 사랑을
곧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의 문턱을 넘어설수가 없듯이

하나님은 멋진 가시를 유대인에게 박아 버렸습니다.

십자가에 도리어 박힌 것입니다.

요셉이 형제를 도둑놈으로 몰아서 뺑뺑이 돌리면서 끝까지 수셔서 들추어내고자 했던 것이 뭔고 하니

바로 죽었던 자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 죽었던 자 곧 특이성 곧 약속 곧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곧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경험을

끄집어 낼 때 까지는 계속 정신없이 뺑뺑이 돌립니다. 그런 볼모 작전에

이상하게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사건이 창세기 이야기 전개 속에 불쑥 들어가 자리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다말과 유다 사건입니다.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관계에서 낳은 자식을

유다는 비로소 볼모로써 내놓습니다.


그것은 유다의 수치요 유다의 발가벗겨짐이요 유다의 할례당한 짤려짐을 내놓는 겁니다.

요셉은 바로 그것 곧 자기부정을 자기부인을 통해서 죽었던 까맣게 잊어버렸던 잃어버렸던 요셉을 끄집어 냅니다.

마치 비틀기, 쥐어짜기, 뒤틀기, 교체하기, 가로지르기, 부정의 부정, 반대를 위한 반대, 종말의 종말, 가루만들기, 빗금긋기, 소급하기 등등의 부정적인 자리에서 약속이 옳았습니다 라는 성령의 소욕에 육의 완악함 강퍅함이 비틀려 쥐어짜진 그 고백이 나올 때 까지 계속 계속 뺑뺑이를 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들이 죽였던 요셉이
요셉을 죽였던 형제들을 살리는 요셉이라는 것입니다.

까맣게 잊고
자기 숙제 하기 바쁘고
자기 문제 풀기 바쁘고
자기 생존 하기 바쁜 와중에

누구 하나 자기 부인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자기 부인 조차도 자기 숙제로 여기니까요
회개의 달인되기 자기부정의 달인 되기처럼 말이죠.

그래서 무시 받는
반드시 무시 받는 남이 아닌 내가 부정해 버리고 저주하는

그 어리석고 더러운 개같은 이방여자가 투입 되는 겁니다.

딱 좋습니다. 누가 봐도 더러운 이방여자요
창녀 옷을 입어서 까지 시아버지를 꼬시는 여자인
그것도 며느리가 말이죠.

그 다말을

수치를 홀라당 발가벗겨 버리는 데 투입 되는 선지자로써 개입 합니다.

결국 선지자란 유다의 죄를 정작 유다는 못 보는데
유다의 죄를 다말이라는 선지자가 대신 뒤짚어 쓰고서

자기 죄에 자기가 꾀이는

반대를 위한 반대

빗금긋기 가로지르기 비틀기 방식인 부정의 부정, 바닥의 바닥,
이 보다 더 더러울 수 없다 라고 스스로 수치스러워 부끄러워 얼굴 가리우는
그 부끄러움을 대신 짊어지고서 등장 하는 겁니다.

유다를 살리는 길은 그 어리석은 길 밖에 없습니다.

창세전의 예정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뿐입니다.

미련한 지혜 뿐입니다.

그 어리석은 걸림돌 밖에 없기에

대신 죄를 뒤짚어 쓰고서 유다를 갈리는 겁니다.

유다가 도리어 쪼개어 지니까 비틀려 쥐어짜내어지니까 교체당하는 겁니다.

요셉은 원망 곧 원수성을 유다를 통해서 받고서 그 위에 자신의 버림받음을 피흘림을 뿌립니다.

그냥 용서 없습니다. 반드시 죄가 나오고 (수치, 원망, 원수성) 그 위에 피 뿌려짐이 덮쳐지는 겁니다.

약속의 땅 그냥 들어가는 법 없습니다.

반드시 원망을 받아냅니다. 원수성을 받아냅니다. 죄성을 받아냅니다.
애굽나라 바로 왕의 강퍅함으로써 10가지 재앙을 내렸듯이
10가지 원망을 받아내시고 그 위에 피를 뿌리는

예수님의 숙제로만 약속의 땅을 들어가는 겁니다.

이것 모르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도 소용 없습니다.

계속 탈락 당하는 예수님의 숙제에 걸려들테니까요

이 어리석은 십자가를 자랑 못하면 약속의 땅 자체가 껌뱉듯이 침뱉듯이 퉤 퉤 뱉어버립니다.

어차피 견디지도 못하고 갈수도 없는 것을 미리 짤라버리는 겁니다.

신들이 사는 곳에 왜 인간이 낑겨 살려고 합니까? 무슨 수로 견딜려구?


그래서 유대인이 바라는 기적같은 천국생활에 기적을 바라는 것에
유일하게 걸림돌이 되는 십자가 앞에서 모조리 턱 하고 걸려 넘어져 버리니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룬 성화에 더러운 십자가라는 걸림돌을 넘어설 재간이 없는 겁니다.

부정하니까 거룩을 추구한 자들이 부정을 추구할 리가 없잖아요?

그 부정이 자신을 살리는 유일한 생명인데

아무리 봐도 부정한데?

어리석은데?

미련한데?

저주인데?


무슨 수로? 자기 수고를 포기하고 그 부정한 십자가 똥물에 몸을 담그고
자기 목숨을 그 귀한 목숨을 더럽기 짝이 없는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에 풍덩 빠뜨리겠습니까?

여전히 자신의 가능성 자신의 신념 자신의 믿음에 차라리 기대거는 것이 낫지

미쳤다고 나아만 장군처럼 똥물에 물 담그나요?


오늘 본문이 바로 이 생생한 대립을 보여줍니다.

대세를 이룬 안식 지키기 곧 다수가 이미 권력과 힘으로써 대중화 된 안식절기에
생뚱맞은 예수님의 안식이 돌맹이처럼 굴러 들어 왔습니다.

안식일 거룩하게 지키기를 완수하고자 하는 자들에게서
예수님의 안식은 전혀 자신들의 안식건축에 이질적인 맞지 않는 돌입니다.

그래서 버려야만 하는 겁니다.

맞지 않으니까요

만약 맞다고 시인해 버리면
자신들이 그동안 그렇게 수고하고 수십년 수천년 동안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방식을
폐기처분해 버린다면

아예 그런 일은 잊을 수 없는 일이지요. 왜냐하면 몸과 관련 되어버리기 때문에
결국 생존과 결부 됩니다. 왜? 안식일 지키나요? 몸의 천국행 아닙니까?
그것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데?
구원을 포기하면 곧 심판인데?

심판을 자인하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는 이 표현을 제발 좀 이해를 합시다 충분히 공감하고 공감합시다
뭔고 하니

완악함입니다.

완악이라는 것은 법과 결부 되지 않으면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법은 힘이요 힘은 곧 대중화입니다. 그 다수의 대중성이 전통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통이란 법이죠 법. 난공요새처럼 사수하고 사수했다는 뜻입니다.
어떤 공격과 어떤 철폐의 시도 속에서도 끄떡없이 지켜내었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자랑스러웠으면 대대손손 자손에게 까지 자랑이 되니 내려왔겠습니까?

그것을 아니 하루 아침에 무너뜨려요?
말도 안되는 소리죠.

죽으라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그런 정의로움 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죄를 다 가리운채로 그것을 강조할 때

예수님은 반대로 그 가리운 숨어있는 것을 끄집어 냅니다.

즉 법과 법 사이의 틈 사이로 법의 한계점을 노려서 인간의 죄악이 그 법을 방패막이로 삼아서 모여 집결해 있듯이

예수님은 바로 그 방식대로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

애매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일부러 연출하십니다.

그래야 완악함이 튀어나올 것 아닙니까

바로 일부러 안식일날 손이 말라버린자를 고쳐 버립니다.

이것은 마치 유다가 약속 약속 하면서 전혀 약속에는 관심없고 껍데기는 약속이지만
그저 육의 잇기에만 정신팔려 있는 그 죄악성에
언약을 빙자한 약속을 빙자한 육잇기 죄잇기에

다말이 유다의 죄를 유다의 허물 수치 부끄러움을 뒤짚어 쓰고
그 부끄러움을 홀라당 발가벗겨져서
유다를 비틀기 쪼개기 해서 유다의 껍질 속에 있는 약속을 끄집어 내는 방식입니다.

다말은 약속이 중요하지 유다 껍데기는 관심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정성 곧 창녀 옷을 입고 화장을 해서 속이는 방식인 부정적인 집단적 일 곧 성령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의 반대인 성령의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도리어 긍정과 거룩의 포장으로 자기가리우기에 정신팔려 있으니
수치가 드러날 리가 없지요.

그 부정성에 충실해서 유다를 쪼개고 약속을 끄집어 내어서
요셉의 볼모시험에 미흡함이 아닌 완료를 답으로 제시하는 겁니다.

그 부끄러움과 피와 결합이 되는 것이
바로 죄인을 찾으러 오신 구원자 인 겁니다.

그렇다면 안식은 과연 누구를 찾을까요?
빙고
정답입니다.
이제야 눈치 채셨네요

손이 마른 자와 안식이 결합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완료 곧 주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주인인 것을 주장하고 또 감출려고 안식을 빙자한 멋진 가면
멋진 가리개
멋진 무화과나뭇잎을 다 저마다 하나씩 하나씩 소유하고 있는 겁니다.
가리개 로써 하나님
가리개 로써 예수님
가리개 로써 성전 교회

그러니 누가 자신을 홀라당 발가벗겨낼 자가 없는 겁니다.

왜 그렇게 가릴려고 할까요?

또 왜 그렇게 홀라당 발가벗겨 버릴려고 목숨까지 버릴려고 편안한 하늘에 안 있고 땅에 내려왔을까요? 구차히 번거롭게 말이죠.

참 쉽습니다.

할례의 의미를 생각하면 안식의 의미도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사실상 가리울게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상하게도 가릴려고 합니다.


아니 생각을 해 보십시오

동물 중에 자신의 생식기를 가리우고 다니는 동물 봤습니까?

없잖아요

다른 말로 하면 동물 중에 안식일 지키는 동물 봤습니까?

못 봤죠.

그렇다면 안식일을 지키면 지킬수록 더더욱 의식을 해서
더더욱 가리울려고 하지

아 안식으로 인해 안가려도 되는 구나 라고
안식일 지키기로 더더욱 발가벗길려고 하는자 있을까요?
수치를 내놓을려는 자 있을까요?

이것이 집단화 다수화 되면 더 웃깁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공간이 설정 되면 즉 집단이 형성이 되면 자동적으로 탈락 당하는 자들이 생깁니다.

안식일이라는 거룩함에 꼭 부정한 것들이 주변에 한 둘이씩 깔리면 다수들은 그 부정한 자들을 색출해서 가려냅니다. 또 사실 일부러 구약에서 그렇게 가르쳤으니 그 응용한 내용들은 더더욱 살이 붙고 정당성이 붙어서 즉 법이 되어서 더욱더 철두철미하게 분리 단절이 되는 겁니다.

자신을 단절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노력에 실패한 자들을 단절 시키는데 열중하듯이 말이죠.

괜히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돌삐 던질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수 집단을 보호할려는 차원인 겁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거룩에 진짜 열성적이고
진짜 거룩에 자기목숨 걸어서 까지 타인의 부정을 제거할려고
안식 곧 언약이라는 약속에 관심 있을까요?

열성의 강도가 세지면 세질수록 가면의 두께는 점점더 두꺼워 지는데?
그것이 완악함인데

그래서 본인들도 모르는 그 죄를 누가 지적해 줘야 하는 겁니다.

이미 법이란
이미 선악이란
이미 율법이란

모세가 자신이 구원하고자 하는 이스라엘 형제 끼리의 싸움에

(출 2:13, 개역)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그른 자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출 2:14, 개역)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 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가로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출 2:15, 개역)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정의의 이름으로, 구원의 이름으로 펼치는 인간 육의 사람의 일에
이미 살인이 깔린 겁니다.

법 속에 이미 살인이 깔려 있다니깐요

법 속에 선악이 이미 깔려 있다니깐요

그러니 그 수치를 넘어설 수가 없기에
낯을 피해서 도망쳐야 하는 겁니다.

모세는 왜 그때 안 도와 줬냐고 따질수 밖에요

사람의 일을 왜 도와줍니까? 도리어 사람의 일을 까발려 들추어 내시는 거죠.

진짜 구원할려면 넘어섰어야지요.
진짜 사랑했다면 죄의 소원을 넘어섰어야지요.

그러나 가짜 구원 가짜 사랑이기에 넘어설수가 없습니다. 선악으로는 법으로는 못넘어섭니다. 죽음을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 쪽에서 사랑하셔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아예 넘지 말라고 바리새인 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바리케이트를 쳐 주시는 겁니다. 고맙게도 말이죠. 내가 너희 쪽으로 가마, 가겠다 입니다. 예수님 숙제입니다.

그것이 바로 떨기나무 에 불꽃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결국 모세는 법의 한계인 바닥에 부딧힘과 동시에 그 뒤에 있는 불꽃을 만남 당해 버립니다.

모세의 제자 라고 우기는 유대인들은 법의 한계의 바닥에 부딧히는 예수님과의 충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걸림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라는 어리석은 지혜에 늘 부딧혀 가루가 되고
비틀려 쥐어짜셔서 피를 봐야지만

패쓰 하고 넘어가는 주님의 심판을 봐야 긍휼을 사랑을 용서를 보는 겁니다.

심판도 거치지 않고 무슨 수로 긍휼을 바라보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손 마른 자는 이 안식의 의미를 정작 안식지키기의 달인 한테서는 왕따 당하듯 외면 당했는데

안식의 주인 한테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 때문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고침을 받았지만

바로 이 고치는 행위 때문에 안식일을 어겼다고
거룩을 범해 버린 자로서 힘과 권력과 법에 고소 당하는
안식일의 완악자들을 끄집어 내시는 겁니다.

마치 천국 문 앞에서 자기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들어가게 하는 그 자들의 실상들을 실체들을 끄집어 내듯이 말이죠.

이것이 우리가 선악을 아는 병든 모습입니다.

그 모습에 병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두운 눈이라서 모르는 그 속에

예수님이 더더욱 병든 모습처럼 질고를 지고
흠모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기적을 바라는 결핍에 빠져있는 자들 속에
더더욱 풍채는커녕 아름다움은커녕

우리와 같이 우리 보다 더 심한 결핍으로써

저주 받고 매 맞고 고난 받는 종으로써  섬긴다고 하니

기가 막힌 겁니다.

결국 아무도 못 믿도록 만들겠다는 철저한 단절이요 그야말로 완벽하게 짤려 버린 할례의 모습인 고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으로 부터도 버림 받았으니 말이죠.


이게 안식입니까?


진정한 안식의 의미는 결국 대신 짊어지심입니다.

쓰잘데 없는 수치 부끄러움 원망 살인의지 원수성

예수님이 하나의 언약상자가 되어서 우리의 그런 병든것들을 다 담아서 그 위에 피 뿌려

모든 허물을 덮겠다는 취지입니다.

결국 우리는 담겨져야 합니다.
우리 자체가 말이죠.


십자가야 말로 유일한 우리의 안식이 됩니다.

밑도 끝도 없는 수고로움의 마침이 됩니다.
완료가 됩니다.

멈추지도 않는 미완료를 멈추는 마침의 정점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아니면
예수님의 죄인 되심이 아니면
예수님의 대신 뒤짚어 쓰심이 아니면 우리는 멈출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뻔뻔스럽게도

우리의 정과 욕심을 못 박아 주시는 끝점을 만나 기뻐하는 겁니다. 비로소 안식이니까요.

(갈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이끄시는 자는 안식이라는 쉼을 비로소 누립니다.

밑도 끝도 없는 의문의 법을, 완료도 없는 선악을, 비로소 못 박는,
육의 소욕에서 끊겨져 성령의 소욕에 이제는 시달리게 되는 행복한 자입니다.

(마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6, 개역)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8, 개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개역)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개역)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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