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 예수님의 약하심의 확대와 vs 귀신 쫏는 권세

2010년 11월 18일 목요일 오후 3:14:38  김대식


(막 3:7, 개역)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좇으며』
(막 3:8, 개역)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허다한 무리가 그의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막 3:9, 개역) 『예수께서 무리의 에워싸 미는 것을 면키 위하여 작은 배를 등대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막 3:10, 개역)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에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핍근히 함이더라』
(막 3:11, 개역)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막 3:12, 개역)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시니라』
(막 3:13, 개역)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막 3:14, 개역)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막 3:15, 개역)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막 3:16, 개역)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막 3:17, 개역)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막 3:18, 개역)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막 3:19, 개역)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러라』
(막 3:20, 개역)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막 3:21, 개역)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수님의 안식은 인간의 완악함을 배경으로 깔고 그 차이성을 증거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완악함이란 무엇입니까?

놀랍게도 인간의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뭔가를 믿음으로써 그 믿음의 대상을 사수하겠다는 것입니다. 지키고 사수하고 보전하고 교육시켜 후손에게 물려주겠다는 마치 진리인냥 말이죠. 전통과 같은 생명줄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인간의 손에 좌우 될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진리란 인간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진리란 인간의 믿음의 대상을 요구하는 듯이 보이지만 정작 믿음의 대상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인간으로부터 축출 당한다는 것만을 드러내는 것이 진리입니다.

진리야 말로 인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그야말로 자유입니다.

오늘 진리 되신 예수님이 왜 자유인지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첫제사를 출애굽 이후에 실행하는 장면이 민수기 9장에 나옵니다.

유월절 제사입니다. 그리고 십계명 율법을 받은 입장입니다.
일종의 결혼식과 같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결혼식을 벌리는 언약식입니다.

피로 맺어진 결혼입니다.

문제는 이 피의 가치를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증거하시는고 하니
피와 반대 되는 것들을 붙이시는 방식으로

이것은 피와 분리 되어야 할 것으로써 밝혀 내십니다.

이것은 피와 연합 불가
이것도 피와 연결 안됨

이런 식으로 말이죠.

신부 되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 바로 바로 원망하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원망꺼리 사건들만을 퍼부어서 자꾸 자꾸 분리 시킵니다.

어 내 속에 이런 것도 있었군요 라고 분리시켜서 아 이래서 피를 흘리셨군요 라고 연결 시키는 겁니다.

그러니 죄 안 짖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도록 유도하고
그 유발로써 숨겨진 죄악을 발견하고 그 죄악이 이 피와 연결됨으로써
주의 주 되심을 곧 용서를 발견하는 겁니다.

오로지 피만을 드러내기 위한 주님 자신의 영광을 높이기 위함입니다.
그 피가 주님이 다 이루신 믿음 곧 완료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사건은 분리를 목적으로 합니다.

뭔가 자꾸 자꾸 바깥으로 분리되어서 빠져나와 들추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보이도록 축출시켜서 실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히 11:1, 개역)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곧 피입니다. 인간 피가 아닌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죠.
아브라함이 이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다고 하니
눈에 보이지도 않는 눈에 볼 수 조차도 없는 미래완료를 보는 것이 바로 분리 곧 거룩작업입니다. (아니 안 보이는 데 어떻게 증거가 됩니까? 약올리기 죠 약올리기)

이것이 예수님 곧 여호와 하나님의 믿음입니다. 제사입니다.(아벨 제사 더 나은 제사)

그러나 인간의 제사는 반대입니다. 인간의 믿음은 예수님의 믿음과 반대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자꾸 자꾸 눈에 보이지 않도록 숨기는 것이 가인의 제사의 특징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감추는 겁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감추어 버리고 자기의 행함인 인간의 믿음과 제사가 드러납니다.

즉 권력과 권세가 자기에 유리하거나 자신에게 불리하면 그것을 언제 써먹을 수 있든 아니면 영원히 잠재워 버릴수 있든

바로 그런식으로 숨기는 방식이 바로 인간의 육체입니다.

결국 인간의 믿음의 원천지는 육이라는 몸입니다. 이 몸 속에 내장해 버리는 숨기는 것입니다.

인간은 제사에 미쳐 있습니다. 제사 드리고 싶어서 안달해 있습니다.
그 인간의 제사란 바로 감추기입니다. 좋은 것은 남을 꺽을 수 있는 수단으로써 최후의 보루로 감추었다가 비장의 무기로 활용하고, 도저히 불가능한 것은 영원히 감추어버리는 수단으로써 작용하는 것이 몸입니다.

그래서 저는 빨리 빨리 인간의 과학 기술이 발전을 해서 바닥을 쳐서 그 뒤에 뭐가 있는가 보기 위해 빨리 빨리 과학기술이 발달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인간의 과학기술을 예로 들면 곧 가인의 제사란

커다란 덩치의 컴퓨터를 점점점 축소시키는 기술로써 지금은 핸드폰이 컴퓨터화 되어서 이것 조차도 점점 작아져서 눈에 보이던 가시화에서 불가시화 되는
인체 속에 감추어지는 기능으로 이제 몸 속에서 아니 몸이 컴퓨터의 만능 기능을 하는 시대가 온다는 겁니다.

결국 영웅이란 또는 신이란 눈에 보이던 것을 기여이 기여이 불가시화 하여서
매직 마술처럼 감추는 능력을 인간들은 부러워 하고 그것만 쫏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제사입니다.

왜 이런 모세광야를 끄집어 내어서 이런 이야기를 서두로 꺼내는고 하니

오늘 12제자를 예수님 자신이 원하는 자를 마음대로 세워서 곧 자유대로 세워서
귀신 쫏는 권세를 주십니다.

이유는 앞 절 마가복음 3장 10-12절에 보면 안식일을 무너뜨리는 장본인이 진짜 안식을 베푸는데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고침을 받고 또 귀신도 쫏겨나는데 엄청난 무리들이 몰렸다는 점입니다.

(막 3:10, 개역)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에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핍근히 함이더라』

핍 들이닥치다. 밀려오다 근 가까이

핍근 매우 가까이 들이 닥쳐 밀려들다

즉 이것은 주님께서 보이지 않던 것의 내막을 홀라당 다 까발려서 들추어 낸 것입니다. 이것이 안식입니다. 즉 거룩이요 사건이요 특이성이요 분리요. 매끈한 표면이요 가로 지르기 뒤틀기 분별 곧 거룩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안식은 아무리 해도 그 반대입니다. 오히려 덮어씌우기입니다. 안 보이도록

그래서 기껏 안식일에 하는 것이 나 귀신 안 들렸고 이렇게 안식일 지킬줄 아는 거룩한 자입니다. 라는 것으로 귀신들림을 감추는 것이 바로 인간의 안식 지키기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완전히 우리 모습과 너무 너무 똑같습니다.

주님은 인간이 귀신이 들려서 들추어 바깥으로 빼낼려고 하는데
정작 인간은 율법을 쥐고서 감출려고 합니다.

그 율법이 증거입니다. 딱 걸려든 겁니다. 올무에 말이죠.


그래서 많이 사람들이 자신이 귀신들렸다고 고쳐달라고 많이 사람들이 너무 한꺼번에 들이닥치자, 또 가장 중요한 귀신이 나가면서 수시로 어느때든 엎드려 져서 더러운 귀신이 부르짖는 것이 바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외칠때에 입다물라고 많이 경계를 하시고서는 제자들은 세우십니다. 12입니다.

마치 저는 이 부분이 그동안 의문시 되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공표 하니까 바로 바로 법을 잘 준수하여서 법대로 사는게 아니라
도리어 법이 있으니까 다들 법적인 소송을 걸어서 누구든지 법적으로 따지자 라는 식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소송을 걸어 모세 혼자서 판결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출 18장

그래서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권유로 인해 세워진 제도가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입니다. 

또 민수기 11장에 보면 70인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워서 모세 혼자 짐을지지 않고자 하나님의 신을 임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언을 하게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민 11:25, 26

그리고 모세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모든 자들이 다 선지자 되기를 원한다 라고 고백합니다.

(민 11:29, 개역)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마 여호수아는 이 예언을 하는 사람들이 확대 되는 것을 걱정해서 멈추게 해달라고 하니까 모세는 도리어 확장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표현 했다고 생각 합니다.


자 오늘 본문을 보면서 저는 이 구약의 내용이 생각이 나서 연관을 시켜 보았습니다.

즉 제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귀신 쫏아내는 권세를 주시는 이유는
즉 성령을 주시고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보이지 않은 숨겨진 것을 들추어내고 또 동시에 보이는 것을 감출려고 하는 그 악마성을 지적 받으라 라는 차원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은사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양쪽을 다 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란 남들이 들키지 않는 죄를 먼저 지적 받는 겁니다.
그래서 선지자란 죄에 대해 예민합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 하는 죄가 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생각 한 죄가 죄입니다.

그 죄를 지적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 죄가 뭔지도 모르니
일단 맞아야 합니다.

맞으면 매맞으면 아 이것이 죄 이군요 라고 알게 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랑 영 딴판입니다.
종교인들이 생각하는 죄랑 영 반대입니다.
기독교가 생각하는 죄랑 완전 반대입니다.

그것을 사생아가 아니기 때문에 매맞으면서 죄를 지적 받는 겁니다.

그리고 그 죄를 지적 받고서
뚱딴지 같게 남들에게 그 죄를 지적해 버립니다.

아무리 봐도 그 지적 받는 사람이 죄도 아닌데 죄라고 지적해 버리는 그 상황에서
죄라고 하니 화가 안 날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죄가 되어버립니다.

얼마나 황당한지 미래완료를 안 쳐다 봤다는 것이 죄입니다.
물론 죄라는 조건성립 조차도 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누가 죄 다 라고 하면 이유도 조건도 없이 맞습니다 죄입니다
저를 심판해 주십시오 라고 나오는 자 없습니다.

그렇다면 죄가 될려면 조건과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원인이 있어야 죄라는 결과가 나오니까요

그러니 죄 지음의 원인으로 죄라는 결과가 나오는데

원인 조차도 없는데 죄 다 라고 한다면 어떤 누가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겠습니다.

자신이 인정하는 죄가 아니기 때문에 선지자는 무조건 죄 다 라고 지적해 버립니다.

즉 원인의 결과로써 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완료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거짓이다 라고 지적하는 겁니다.

현재를 미래가 덮쳐서 결정해 버리는 선언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것을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이 덮치면 이것 조차도 왜 죄가 되는 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이유는 죄다 라고 지적하니, 미래완료로 지적을 하니까
그 순간부터 뭔가를 감추는 행동이 자신도 모르게 비로소 나오는 겁니다.
무엇을 감추는고 하니

죄 지적 받는 것을 감출려고 합니다. 즉 아벨의 더 나은 제사를 원치 않음을 감추기 시작 합니다.

자 자 자 제가 지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지요

제가 이런 내용들을 복음으로 나누면 다들 싫어합니다.
너무 깊숙이 이야기 하면 너무 너무 거부하는 모습이 력력하기에 참 힘든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죄 지적 않받는 것을 내세울려고 합니다. 그것이 나도 제사 했잖아 라는 가인의 제사의 사고방식입니다.

자 그럼 눈치 채실 것이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는 그 당사자의 행동 여부 즉 제사 드림으로써 결정이 난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써 결정난
미래에서 덮쳐진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벨을 주님은 감춰 버리니까 알길이 없고
가인은 죄의 소원이 덮쳐져서 즉 미래완료인 십자가의 피 용서가 안 덮쳐져서
끝까지 가인 자기자신 제사 드림의 행위에서 벗어날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내어버려 두사 (가인 마음대로)
이마표 달라고 해서 줘 버리고 자신이 자신을 보호하고 감추고 사수하는 일에 매진 하도록 가인을 퍼트리는 겁니다. 마치 바벨탑을 수평적으로 퍼트리듯이 말이죠. 그래서 국가와 도시가 발생하는 겁니다.

반대로 아벨은 간섭해 버리고 예수님 마음대로 감추어 버립니다.
비밀을 풀수 없도록 말이죠. 아벨의 제사를 따라할 재간이 인간에게 없습니다.

다윗도 아벨의 제사 못 드렸습니다. 가인의 제사 뿐입니다. 그런 다윗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가 덮치니까 비로소 율법이 아닌 사랑, 제사가 아닌 인애, 제물이 아닌 상한심령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차이를 알기 위해서 율법 속에 놓여져서 그 바닥을 보라는 겁니다.
하라 하지말라 속에 집어넣임을 당해서 왜 하라 하지말라로는 용서가 되지 않는지를
그 속에 놓여서 직접 당해 보라는 겁니다.

미래에서 결정난 사항을 그것도 그냥 미래가 아닌 십자가의 피로 이룬 행함이 아닌 예수님의 믿음을, 그 사랑을

현재의 인간이 아무리 무효화 시키는 율법 지킴으로써도 방해가 되질 않는다는 취지에서
율법 속에 집어 넣는 겁니다. 죄 아래 가두는 겁니다.

죄 안 짖겠다는 의식이 도리어 죄 짖겠다는 의식 뿐임을 알아라 라는 겁니다.

결국 원래자리 부터가 근원 뿌리가 처음부터 틀려버렸고 병들었고 바이러스 걸렸기에
뭘 해도 죄 라는 것을 지적 받는 것이 바로 은사 라는 겁니다.

얼마나 고마운가요? 처음부터 우리의 뿌리는 죄 라는 것을 지적 받음이 말이죠.

그래서 12제자를 세우고 마귀 쫏는 권세를 주심은

마귀를 쫏아 내라는 취지가 아니라

비로소 마귀 한테 들통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겁니다.

마귀가 비로소 괴롭히고 마귀들이 의식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로써
죄 아래 가두는 율법의 취지처럼

은사로 인해 마귀가 경계하는 존재로, 마귀들이 의식하는 비로소 마귀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존재로 부각 시켜 버린 겁니다.

좋은 의미입니까?

인간의 생각으로써는 전혀 좋은 의미가 아닙니다.

은사 주시면 다시는 지적 받지 않는 죄를 안 짖도록 될까요?
천만의 말씀

완전 그 반대입니다.

오히려 자신도 짖지 않은 남들이 지은 죄 까지 대신 지적 받는
먼저 죄 지적 받는 존재가 바로 은사 받은 자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약하게 된다 라는 겁니다.

즉 약하게 되어서 약한게 아니라, 약하게 될 것이라서 약한게 아니라

미래완료로써 이미 약한채로 태어나도록 된 겁니다.

남의 허물까지 대신 뒤짚어 씌움 당해서
얻어 터지는 것이 무슨 약한 겁니까?

이유 없습니다. 조건 없습니다. 약한 겁니다.
왜 미래완료 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마귀 쫏는 권세 즉 기적을 베푸는 권세를 받으면
사람은 강해집니다. 강해 졌다고 착각합니다. 강한척 합니다.
유대인들이 그 대표성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입니다.

마귀를 쫏아내면 낼수록 이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마귀인데 마귀를 쫏아내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을 부으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마다
도리어 내가 작아지고 주님이 크고 강하게 느껴지게 되는 겁니다.

말도 안되는 불가능성이 덮쳐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알게 된
제사가 아닌 상한심령임을 알고 비로소 회개 금식 기도로 우는것 다 멈춰버리고
춤추고 먹고 마시고 웃는 겁니다.

즉 특이성이 비로소 덮친겁니다. 즉 약함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외부에서 온 믿음이(율법 외에 한 의가) 다 이룬 것을
그저 천진난만한 연약한 어린아이처럼 고지곳대로 수긍하는 겁니다.

만약 지킬려고 하면 피곤하고 딱딱하고 온갖구차한 것들을 다 동원해서 또 율법을 지킬려고 할 겁니다.

특이성은 약하기에 다 들추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특이성이 없는 강한자는 보이는 것들인 강한 것을 자꾸 자신의 신체에 가득 가득 내장하여서 감추는 겁니다.

청소년들이 하는 게임이였던가요? 아이템을 좀 더 강한 것으로 자꾸 자꾸 바꿔가면서 자신의 주머니 속에 내장하고 감추는 겁니다. 강한 놈 만났을 때 꺼내어서 강한무기로 꺽어보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율법 지키기 곧 신앙하기 신념갖기 믿기 라는 완악함입니다.

마귀를 쫏아내면 쫏아낼수록 인간이 약해질까요?

모세가 원했던 모든 사람이 선지자 되기를 바랬던 그 선지자가 되면 약해질까요?

우리 또한 유대인처럼 기적을 바라고 삽니다.
그 기적이라는 것이 일종의 강함을 추구하픈 겁니다.
그 강함이 곧 구원이라고 본 것이고 하나님 나라라고 본 겁니다.

그러나 진짜 현실은 더더욱 냉정하게도 약하디 약한 쪽으로만 흘러가니
복수의 칼날만 갈고 갈다가

결국 예수님으로 인해서 터져 나오는 겁니다.

마귀는 유대인이였던 거죠.

오늘날 우리가, 교회 다닌다고 하는 우리가 마귀였던 겁니다.
그것을 감추고자 교회 다닌 겁니다.

자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그리고 칠십인과 장로들
이런 은사들은 우리를 편리하게 하기 위해 동원이 되는 제도가 아닙니다.

죄를 더욱더 죄 되게 동원이 되는 은사입니다.

남들이 지적 받지 않는 죄를 세세히 이스라엘은 지적 받습니다.

발가벗겨지듯이 부끄러운 수치를 완전 까발려짐을 당합니다.

마치 할례처럼 말이죠.


이것은 상대적으로 저쪽을 더욱더 껴입도록 가리우도록 첩첩이 겹겹이 덧때워 입히도록 만듭니다.

맞습니다. 상대방의 행동을 일부러 유발코자 하기 위함입니다.

그럼 우리는 그 상대방과 분리되고 차이난 존재일까요?

아닙니다. 이유 가 없습니다. 특이성이란 아무리 봐도 특이한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주님 쪽에서 특이하게 본다는 주님의 시선이니

이것을 그야 말로 죽을 맛입니다.

내가 아무리 봐도 특이한 것이 없으니 신념이라고는 신앙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생길수 없는 그런 길로만 인도하는 겁니다.

오히려 너야 말로 마귀임을, 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임을 철저하게 만드는 것이

은사입니다.

그렇게 약하게 만드심으로써 주의 주 되심을 드러냅니다.

주의 주 되심이란 주님 자신이 주님 자신을 치셔서 그 피로써

원수인 우리에게 피 발려
그 어떤 죄책감도 그 어떤 피로 인한 넉넉한 사랑도
방해 꺼리가 될 수 없음을

이미 미래 완료로써 덮쳐서

원인 없는 결과로 선포 되어 지는 겁니다.

마귀 쫏는 권세가 아닌 결국 피를 드러내기 위한 주의 주 되심을 증식하고자
우리를 더욱더 약하게 약하게 만드는 은사를 주시는 겁니다.
(괜히 가룟 유다가 걸려든 겁니다.)

피만 영광 되고자 말이죠.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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