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을 짜르러 오신 예수님

2010년 10월 21일 목요일 오전 8:30:20  김대식


(막 3:1, 개역)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막 3:2, 개역)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막 3:3, 개역)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막 3:4,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막 3:5, 개역)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막 3:6, 개역)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어떻게 보면 최근 공부한 마가복음은 단절성이 상당히 강하게 느껴집니다.
사도행전에서도 그랬고
요한복음에서도 처소 또는 성령의 의미가 더욱더 그랬는데오히려 마가복음은 더 심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타협의 여지가 일체 없습니다.

고자 라는 의미를 다루면서 할례 개념 곧 십자가 개념은
기여이 천국이라는 의미를 할례(십자가)와 연관 시키면서
기존의 천국관을 반드시 짤라버리겠다는 취지였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최근 설교에서 탕자란 결국 맏아들을 짤라버리겠다는 취지입니다.
탕자 라는 자체가 부정의 부정 의 모습으로 말이죠.

그렇다면 가인의 제사를 짤라버리는 것은 뭡니까?
아벨의 제사입니다. 죽음으로써 곧 십자가의 피로써
이런 가인의 제사는 천국에 절대로 발들여 놓지 않겠다는 취지입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발들여 놓겠다는 육의 제사, 행함의 제사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가인의 제사이며 왜 유대인과 모든 인간의 제사가 육의 행함의 제사인지
왜 그런 제사는 짤려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부정의 부정으로 바닥을 치는 십자가가 대비되는 겁니다.
오로지 예수님이 직접 드리는 제사입니다.

제가 이 부분을 지난 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어머니와 나누었고
이번주 월요일 동규씨를 만나서 나누었던 부분이 뭔고 하니

바로 아브라함이 아내 사래를 다른 족장에게 인신매매 하듯이 팔아 넘기는 내용입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아벨의 제사는, 아니 아벨 자체는 할례맨입니다. 짜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것도 거의 자살이나 자폭의 의미처럼 부정스럽게 보입니다.
곧 죽음입니다.
죽음으로써 상대방을 짜르는 할례맨입니다.
누구를? 가인을

그렇다면 가인은 짤려야 할 입장입니다.

왜 이렇게 부정적인 표현으로써 짜른다 짤린다 라는 표현을 쓰는고 하니
천국이 천국 스스로의 가치? 의미? 내용들이 그런 일을 천국 스스로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동규씨와 했던 대화 중에
왜 아브라함은 아내를 팔아 넘겼는가?

마치 하나님은 왜 가인에게 아벨을 죽도록 팔아 넘기우듯이 팔아넘겼는가?
왜 아바 아버지는 독생자 예수님을 원수들에게 팔아 넘기우듯이 팔아 넘기는가?

놀랍게도 팔아 넘긴게 아니라
도리어 저쪽이 다 짤릴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아내 사라(사래가 사라로 교체 당함)가 할례인간이 되어서
저쪽 여자들? 꼴에 여자라고 생산력이 있다고 우기는 태들을
마치 죽은자와 방불한 [없음의 태]가 저쪽 [생산력 있음의 태]를 다 짤라 버립니다.
(이것은 풍요로운 가나안민족이 짤리고 아무것도 없던 죽은자와 방불한 이스라엘이 짜르는 할례맨으로 등장하는 뒤의 사건들을 미리 예시 하는 겁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 마저 열국의 어머니 임을 그런식으로 증거하는 겁니다.

즉 약속을 담은 할례맨 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약속맨 인거죠.

복의 근원, 복의 기준이란(아브라함) 복이 가는 곳 마다 두패로 홍해 가르듯이 갈라지는 상황을 만듭니다.

두 패로 나누어지는 것을 보고 아? 복의 기준이 이렇게 했구나 라고 이 둘의 차이로 이 둘이 나누어지는 것으로 우리는 알게 됩니다.
(창 12:1, 개역)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2, 개역)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 12:3, 개역)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 12:4, 개역)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창 12:5, 개역)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창 12:6, 개역)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창 12:7, 개역)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창 12:8, 개역)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 12:9, 개역)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창 12:10, 개역)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창 12:11, 개역)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창 12:12, 개역)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창 12:13, 개역)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창 12:14, 개역)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창 12:15, 개역)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창 12:16, 개역)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창 12:17, 개역)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창 12:18, 개역)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창 12:19, 개역)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창 12:20, 개역)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가 둘로 나누어 졌다면

아 ! 하나님의 약속이 개입 했구나
또는 십자가의 피가 둘로 나누었구나

라고 보시면 됩니다.

어제 양 장로님이 목사님에게 묻는 것을 옆에서 듣게 되었는데
왜 아브라함 사건에서 여호와의 불이 제물 고기 갈라진 그 틈 사이로 횃불이 오락가락 하느냐?
그것으로 엉터리 해석하는 자들이 많더라 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주의 주 되심)
마치 세겜에서 좌우 산 곧 그리심산 에발산 에서 서로 상대방산을 향하여
축복과 저주를 날릴때에
그 중간에 세겜에서 율법 곧 말씀을 선포하는 겁니다.

(신 11:29, 개역)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신 11:30, 개역) 『이 두 산은 요단강 저편 곧 해 지는 편으로 가는 길 뒤 길갈 맞은편 모레 상수리나무 곁의 아라바에 거하는 가나안 족속의 땅에 있지 아니하냐』
(결국 가나안을 치는 민족이 바로 할례맨 이스라엘입니다. 약속맨이다 라는 겁니다.)

(수 8:33, 개역)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이왕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한 대로 함이라』
(수 8:34, 개역) 『그 후에 여호수아가 무릇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수 8:35, 개역) 『모세의 명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인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거하는 객들 앞에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왜 제가 이 세겜에서 말씀 선포와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횃불 사건을 연관 시키는 고 하니

(창 15:1, 개역)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 15:2, 개역)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창 15:3, 개역)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창 15:4, 개역)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창 15:5, 개역)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6, 개역)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7, 개역)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창 15:8, 개역)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창 15:9, 개역)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창 15:10, 개역)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창 15:11, 개역)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창 15:12, 개역)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창 15:13, 개역)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창 15:14, 개역)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창 15:15, 개역)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창 15:16, 개역)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창 15:17, 개역)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창 15:18, 개역)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창 15:19, 개역)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창 15:20, 개역)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창 15:21, 개역)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약속이란 짜르는 목적이 있다 라는 겁니다.
그것을 어떻게 미리 알려 주는 고 하니
쪼갠 고깃을 서로 마주 대하게 하고 왼편 우편으로 나누고 10
그 사이로 횃불이 지나는 겁니다. 17

이것이 실제로 여호수아서 후반에서 이 상황을 다시금 재현하고 (세겜 율법 선포, 두 산을 마주 보게 하고, 그리심산 에발산)가나안 땅의 민족들을 다 짤라버리는 여호와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오늘날로 치면 성령의 영적 전쟁입니다. 십자가 영이 벌리는 전쟁입니다.

일단 좌 우 편으로 두 패로 나눈 뒤에
부정한 죽은자와 방불한 저주 받은 자와 방불한 헐벗은 산 에발산에
축복이 상대방 으로부터 선포 되어 집니다.
상대방산 곧 가인이 왜 축복을 선포 하는고 하니
죄의 소원이 덮쳐져서 축복을 싫어하니까 저절로 축복이 날라오는 겁니다.

저들이 싫어하는 축복을 그냥 받을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딱 이 짝입니다.

복을 싫어하니까 저절로 지옥가는 양성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유대인도 그러했습니다.

모조리 다 그리심산 풍요로운 산에 다 올라갑니다.
그렇게 되니까 상대방 산에 축복을 외치고
정작 자신은 저주를 받아버리는 겁니다.

저주 받기 싫어서 축복을 외쳤는데
정작 축복을 싫어하더라 라는 겁니다. 결국 저주를 좋아한 거죠.

여기서 그럼 복이 뭔가 라는 겁니다.

마침 동규씨랑 헤어질려고 버스 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동규씨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종말이 뭐냐 라는 겁니다. 요즘 하도 종말 종말을 외치고 이제는 과학계 환경계가 종말을 치닫는 상황으로 보이고 종교꾼들도 그 틈새시장을 노려서 종말장사를 하는 상황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이 뭔가 라는 질문을 한 겁니다.

대뜸 저는 엉뚱하게 답변을 했습니다.

종말의 상황을 피할려는 그런 상황이 중요한게 아니라

종말을 몰고온 그 당사자 예수님의 취지가 뭔가에 답변을 했습니다.

동문서답을 한 셈이지요.

결국 예수님의 취지는 두 패로 나누는 겁니다.
그 두 패로 나누심에 나누임을 당하는 것이 복입니다.

그 두 패 중에 좌 편 우 편에 놓여짐을 당하는 것이 종말이다 라고
마태복음 25의 종말의 3가지 비유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물론 어제 설교에 성도는 우 편에 계신 예수님이 함께 하는 자 라는 의미로
선지자 라고 했습니다. 곧 복의 사람입니다. 곧 선지자 종말인간이요 할례인간입니다.
곧 선지자는 죄인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죄인
이것이 바로 이윤자 권사님이 물었던 왜 사람이 아니냐 라는 겁니다.
죄인이어야 종말인간입니다. 복의 사람입니다. 선지자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걸음 이다는 겁니다.
땅에서 복 받은 자는 하늘의 소식을 전하는데
그 하늘의 일이 바로 땅에서는 십자가에 죽으러 오신 예수님의 일이 바로 하늘의 일입니다.

이것이 땅에서 벌어질 일인데 니고데모는 이 땅의 일도 모르면서 어떻게 하늘의 일을 알수 있냐 라고 복 받는 것이 아닌 이미 죄의 소원이 덮쳐진 모습으로 하나님의 일에 관심 없고
그저 사람의 일 곧 유대인의 선생들로써 거짓선지자의 관심인 사람의 일인 구원챙기기만 신경 쓰는 겁니다.

마25장의 종말 비유에서 두 패로 나누어 지는데

분명 한 쪽은 그리심산처럼 나무가 풍성한 상황이고
또 다른 한 쪽은 에발산처럼 나무가 일체 없는 헐벗은 상황인데

종말이 주체가 되어서 그 종말이 하나는 좌편 또 하나는 우편에 세워서
자신의 종말을 외친다 라는 겁니다.

거기에 나누심이 마땅함을 아는 자가 우 편에 선 자고(문제는 위치가 아니다. 주님이 어디에 서시냐 이다. 주님이 서시는 방향에 따라 달라짐 즉 기준이 종말 예수님이심 할례 인자 십자가 인자)

왜 나누느냐고 따지는 것이 좌 편에 선 자입니다.

즉 심판 받아 마땅함을 아는 자가 긍휼을 바라보는 인자가 높이 달린 이유를 아는 자 이고
왜 심판 받아야 하는가를 모르는 자는 긍휼을 쳐다볼수 없고 인자가 왜 달려야 하는지는 모르는 자입니다.

곧 종말 곧 심판 자체가 옳았습니다 라는 것을 아는 자가 종말인간이요
그 나누이심에 나누임을 당하는 심판 받은 자가 바로 완료를 쳐다보게 됨을 당한
죄인이다는 겁니다. 선지자 이다는 겁니다. 에발산 이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만난 자입니다.

완료를 만났뿟으니
종말을 아니 외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복의 근원 즉 기준이 되니까

그 성도가 가는 곳 마다 종말로 인해 두 패가 나누어지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전쟁을 반드시 할례를 통해서 합니다.
두 패로 나누이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 본인들이 그 전쟁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알아도 소용없습니다. 내일 되면 오늘 안 것 다 싹 다 지워버리고 삭제 시켜버리기 때문입니다.)

한 쪽은 좌편 한 쪽은 우편으로 나누어서
말씀을 선포하는 제사장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들 당사자가 제사장 기능인 말씀을 싫어하고 약속을 거부하게 됩니다.

이유는 짤린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이제는 알았다 알았다 그래 짜르께 짜르께 짜르면 되잖아 라고
손할례를 하고 손할례의 달인이 되니까
제사장 기능이 마치 정죄의 기능이 된 냥
본인들은 정작 짤린적 없이
두 패로 나누는 기능만 딸랑 취해 버립니다.

마음판의 할례를 여전히 모르는 겁니다.

결국 인간이란 높냐 낮냐 우편이냐 좌편이냐 복이냐 저주이냐 만 의식할 뿐이지
그 중간에 횃불 지나가듯 말씀이 왜 중간에 위치해 있는지를 모릅니다.

다윗을 기준으로 거짓선지자와 참선지자가 발생 됩니다.
우리는 참선지자를 좋아할려고 하지 거짓선지자를 싫어할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은 그 다윗의 자리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 다윗의 자리가 발생 시키는 것이지
참과 거짓은 의미 없습니다.

제가 이윤자 권사님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참선지자 젊은 선지자가 옳느냐?
거짓선지자 늙은 선지자가 틀렸느냐?

라는 것이 의미 없다고

정작 젊은 참선지자는 늙은 거짓선지자의 꾀임에 빠져서
하나님이 갈기 갈기 찢어 죽여버립니다.

그럼 늙은 선지자가 옳냐? 아뇨
젊은 참선지자는 틀렸느냐? 아뇨

젊은 참선지자의 역할은 말씀 앞에 서다가 찢겨죽는 기능 역할을 한 겁니다.
늙은 거짓선지자는 말씀으로 젊은 선지자를 꾀는 역할을 하다가 본인도 깜짝 놀래버리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둘 다 말씀 때문에 말씀이 이런 일을 벌린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등장해야만 했던 두 패로서의 두 배치물이였던 겁니다.

결국 두 쪽 다 소모품입니다. 말씀만 남기도록 하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이윤자 권사님에게 답하길
누가 틀렸고 잘못했고 누가 옳았고 선했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역할로써

말씀 앞에 서면 이렇게 당한다 라는 것은 젊은 선지자가 우리에게 말해 주고
말씀을 쥐고 장악해서 상대방을 속였다 하더라도 말씀의 취지는 전혀 인간들의 행동에 의해 좌우되는 손상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도리어 참선지자는 사람이 아닌 죄인으로써
맞습니다 맞습니다 그렇게 하신 말씀만 옳았고 우리는 그 말씀이 펼치시는 일에 소모품입니다 라고

인정하는 심판을 담은 자가 에발산 헐벗은산 죄인 저주받은자 짤린자 할례맨 심판맨 종말맨
등등이 선지자 다 라는 겁니다. 남들이 들키지 않은 죄를 미리 앞당겨 빨리 들켜 빨리 심판 받는 것입니다.

그 역할을 선지자가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아니라 죄인입니다.

그런데 거짓선지자든 거짓백성이든 마귀든 마귀자식이든
바로 그 두패로 나눈다는 그 자체를 싫어하고 거부한다는 겁니다.

또 두 패로 나누어도 좋은 쪽에 서서 상대방을 자신의 구원받기 용도로 활용한다는 점입니다. 더욱더 자신을 가리우는 무화과나뭇잎으로 활용한다는 점입니다.

주님이 붙이신 모든 타인은 나를 심판하고 죄인만들기 위한 할례의 의미 곧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그들이 거짓선지자이든 참선지자이든 상관없이 나를 심판하고 발가벗기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써 십자가를 쳐다보도록 하는 긍정과 부정의 기능으로써 두패의 상황인 겁니다.

남을 가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도리어 내가 갈려져야 한다는 목적이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될게 아니라
그 복의 근원 때문에 내가 두 패로 갈려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니고데모에게 중생해야 한다 라고 하니
그것을 또 행함의 문제 곧 사람의 일로 취급해 버립니다.

두 패로 가르면 두 패로 갈라진 자신을 또 중생했다고 육의 자랑 행함의 자랑을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갈려진 나를 자랑하는게 아니라(니고데모의 관심사는 끝까지 사람의 일 뿐임)
가르러 오신 예수님이 복의 근원임을 나를 가르니까 비로소 눈떠 그 예수님을 복의 근원이라고 외치는 겁니다. 선지자가 나타났다 종말이 나타났다 난 종말에게 당했다 와 신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 땅에서 벌어진 십자가에 못박힌 자입니다.(우물가의 여인)

참 신기하죠 대화중에도 보면 알수 있듯이
정작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성경박사는 니고데모입니다.

그러나 일명 우물가의 여인인 사마리아 여자는 신학도 엉터리 성경지식도 엉터리 다 엉터리입니다. 맞습니다. 엉터리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성경지식 박사인 니고데모에게 땅의 일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 땅의 일이란 하늘의 일이 펼쳐진 카페트로써 깔려야 하는데
니고데모 노선으로는 안 깔겠다는 겁니다.
당연하지요 너무 너무 성경 잘 알고 있으니 그 노선으로 올 필요가 없지요.
축복 구원 받겠다고, 살겠다고, 안죽겠다고, 천국 영생 부활하겠다고 우기는 노선이니까요.

오히려 하늘의 일은 헐벗은산 저주산 에발산이 딱입니다.
그래서 누가 봐도 저주인 산에 축복이 덮쳐지면 아 그 산이 축복 받을 만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이 대단하면 저런 죽은 자도 살리시는가 라고
마귀를 염두하고 마귀도 할 말 없도록 만들겠끔 하시는 일이기에
더 이상 송사 할 수 없는 , 두 손 두 발 손 때게끔 힐문 못하도록 하는 조치가

바로

에발산이 제격인 겁니다. 그것을 우 편에 섯 따 라고 합니다.

즉 우 편이란 주의 주 되심을 말하지

인간의 구원 따위에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왜 인간의 구원 따위에 관심이 없는 고 하니

그것은 마귀를 전혀 시기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은 마귀를 겨냥한 겁니다.

마귀, 죽음, 사망의 권세, 지옥, 음부의 권세 등등,
육의 소욕이 시기하는 일만 하는 것이 성령의 일이요 소욕입니다.

그래서 그냥 교회가 아닙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 미쳐버린 종교마약꾼들은 특히 개혁주의, 성화론자들은
교회 하나는 결속력과 정통신학, 건전한 신학으로 사람들을 잘 꼬셨는지는 몰라도
정작 음부의 권세가 시기하고 이기지 못하는 교회는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놀랍게도 성화론을 펼치는 겁니다.

껍데기를 더욱더 화려하게 감추는 겁니다.

참 동규씨랑 강이아빠랑 영화를 봤는데
정말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는데 딱 하나의 장면만이 제 머리를 스쳐지나갔습니다.
마피아 조직간의 다툼인데 주인공 오른 팔이 죽었는데 그 장례를 그 나라 그 민족의
제사장이 장례를 펼치는데 딱 생각 난 것이 바로 회칠한 무덤입니다.

회칠한 무덤이란 서로 서로가 좋아라 하는 겁니다.
죽음을 위로해 주고
죽음을 아름답게 포장해 주면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에브리바디 다 좋은
좋고 좋은 거다.

이것을 보고 우와 오늘날 기독교가 이 짖을 하는 구나
성화론 개혁주의 다 이 짖 뿐이구나 회칠한 무덤

죽음 마저도 시기하는 것은 못하는 구나
음부의 권세 마저도 시기하는 짖은 못하는 구나
마귀 마저도 시기하는 짖은 못하는 구나
마귀 마저도 송사 못하는 짖은 못하는 구나

그럼 못한다고 가만히 있는가? 천만의 말씀이지요.

도리어 마귀짓만 골라서 합니다.
포장하기
아름답게 죽음 포장해 주기
죽은 육, 구원에 대한 탐욕 그 자체가 죽은 겁니다. 그 죽음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래서 아름 다운 우월자와 연결시키는 촉매 중매쟁이 역할을 해서
그 죽어 썩어질 육체를 자꾸 자꾸 아름답게 포장하는 겁니다.

이것이 회칠한 무덤입니다.

그래서 성도란 선지자란 바로 그것을 대비되는 십자가 곧 할례 곧 그 회칠한 무덤 아름답게 무덤을 포장한 그거 짤렸다 라고 외치는 자가 등장 되는 겁니다.

그런데 몰골이 정작 그 당사자가 짤린 모습으로 다가 옵니다. 저주 받은 모습으로 다가 옵니다.

그러니 비웃죠

어리석다 라고 무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선지자는 사람이 아닌 죄인으로써 오는 이유는
너가 이렇게 짤렸다 라고
자신의 신체에 심판을 담고 오는 겁니다.

그리고 본인은 그럼 그럼 그렇고 말고 난 짤려도 백부당만부당 하지
맞어 맞어 나야 원래 짤려야 해

오로지 그 분만이 높여져야 해 나는 그 분의 신들매 풀기도 감당못하는
후패 받고 저주 받고 망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오로지 그 분만이 흥해야 해

라는 소리를 뻔뻔 스럽게 외칠수 있지만

정작 저들은 그 분만이 흥해야 한다는 소리에 그럼 난 망해야 한다는 거냐? 라는 것에
화가 나고 강퍅함이 씌여지는 겁니다.

그러니 선지자란 자신이 심판성을 자신의 신체에 담고 저주 받은 모습으로서
저주를 외치니

철저하게 걸려들놈들은 걸려들어라 라는 올무요 걸림돌 역할일 수 밖에 없는 미끼입니다.

이게 바로 율법의 취지인 사랑 곧 이웃사랑입니다.

너의 그 원수 성 때문에 나는 신나게 십자가의 길 저주의 길로 갈란다입니다.

문제는 예수님도 나도 그 선지자의 길로 간다는 겁니다.

그것이 유일한 아름다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전혀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데 말이죠?

남들은 다 예루살렘 길로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반대의 길 로 갑니다.

문제는 누가 봐도 예루살렘 길 보다 더 아름답고 거룩하고 깨끗한 길이라면
인간들은 반대의 길이든 말든 당장 돌아섭니다.

문제는 전혀 아름답지 않고
전혀 지혜롭지 않고
전혀 깨끗하지 않은

더럽고 추잡하고 역겹고 악취나고 썩은내가 나며
어리석고 멍청하고 민망하고 빨가벗겨지는 불륜의 길이기 때문에

절대로 절대로 네버 네버 돌아설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짤린거죠.

할례 맨 에게 말이죠.

누가 전쟁을 하는데 자신의 신체를 짤라버리고 전쟁을 하는 자가 어디있습니까?
자신의 신체를 저주 하고 전쟁을 하는 자가 어디있겠습니까?

그 꼴은 적군에게 날 짜르기 쉽도록 도리어 편리성을 제공해 주는 어리석은 짖이지요.

그런데 그 짤린 모습이
그 저주 받은 모습이
그 빨가벗겨진 모습이
그 어리석고 멸망받고 심판받은 모습이

저들을 잡는 미끼인줄 저들을 제대로 심판하는 심판(할례)인줄

저들도 모르고 이스라엘도 몰랐던 겁니다.

결국 말씀 스스로만이 말씀을 이루는 겁니다.

이것을 주의 주 되심

주가 세우시고 주가 허물어서 더 이상 허물어지지 않는 최종갱신으로써

다른 몸을 증거하시는 겁니다.

마귀도 시기하는 몸입니다.

그것이 바로 미리 앞당겨서 선지자가 보여줍니다.

사람의 몸이 아닌
죄인의 몸입니다.

이것을 아벨이 미리 보여줬습니다.
가인의 제사 잘 드리는 몸이 아닌
아벨 자체가 제사 몸이 되어서 믿음으로 다시 사는 몸 곧 그리스도의 몸을 증거한 겁니다.

더 나은 제사는 더 나은 몸을 증거하는데

인간의 손으로 기껏 드리는 제사는 인간 자신의 몸으로 회귀해 버립니다.
그래서 오로지 관심사가 자기 몸 자기 신체 그래서 자기 몸이 구원 받는 것에 몰두 합니다.

그래서 하늘의 일로써 땅의 일이 펼쳐질 때 그 몸을 짤라버리고
더 이상 짤려버리지 않는
죽음도 못 짜르고
음부의 권세도 이기지 못하고
사망의 권세도 무용지물은 몸을 최종갱신으로써 세우십니다.

이 몸은 할례 몸으로써 자신을 짜르고 다시 자신을 세우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특이한 속성의 특이한 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몸 사상은 기껏 자신의 신체의 연장으로써의 확대를 꿈꿉니다.

그것을 미리 알고 미리 짤라버리고 다른 몸을 세우시고자

복의 근원 곧 기준인 다른 몸이 등장 합니다.

그 다른 몸을 만나거든 우리는 선지자가 나타났다 라고 물동이 던져 버려야 합니다.

왜냐 하면 내 몸을 유일하게 짤라버릴수 있는 유일한 몸이기에

우리는 짜르러 온 몸을 만나는 길은 그 다른 몸으로부터 짤렸음을 당했을 때 비로소 아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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