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망상 (말장난, 속임수)

2011년 7월 2일 토요일 오전 8:01:02 김대식


해석망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의 소원을 넘어서야 하는 압박감을 가지고서 태어납니다. 주님께서 죄 아래 다 가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란 성공이냐 실패냐 라는 것에 집착하며 요즘 어린아이들처럼 학원에 가야하고 피아노 영어 웅변 그야말로 만능인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되는 겁니다. 그것이 현실이니까 말이죠.

그래서 습득한 것들은 바로 자신에게 닥친 문제들에 대한 해석으로 좌우가 되는 겁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가니까 교회에서도 숙제를 내는데 성경에 대한 해석을 주더라 말이죠. 그래서 그 해석이 자신이랑 일치하면 그 교회에 남게되고 자신이랑 안맞는 해석을 나불거리면 그 간격은 멀어지게 되는 겁니다.

교회에 가면서 까지 해석망상은 떨쳐지지 않습니다. 뭘 그렇게 까지 하느냐고 하지만 이미 성경도 그렇고 목사도 그렇도 모두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로 공갈협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렇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자들이 예수님께서 가장 좋은 예들로 우뚝세웠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조상들이 왜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았는지에 대한 철저한 반성으로 출발해서 성경해석을 추구했습니다. 단순히 철저한 반성이 아닌 반성에 반성 또 반성에 반성 회개에 회개를 겹거듭해서 말이죠.

그래서 바리새인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입니다 만은 그 대표성으로써 바리새인의 노말한 장난이 천국장난 부활장난 성전장난 말씀장난 하나님장난 구원장난 계속 계속 그 장난이 벌어지는 겁니다. 만약 그들이(해석의 달인, 해석의 대가들, 자칭 참선지자, 자칭 남은자) 그것이 장난인줄 알았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겁니다.

어제 언어경합담 이라는 말에 갑자기 궁금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수수께끼의 비슷한 말이더군요. 한문식표현이라고나 할까? 괜히 어렵게 보았는데 덤으로 답변을 보면서 아 이거구나 했습니다.

뭐가 이거구나? 이냐하면, 인간이란 성경말씀마저도 장난으로 취급합니다. 그 장난이 바로 막살지 않겠다 라는 장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장난을 까발리기 위해서 막살기 장난을 치십니다. 즉 언어경합담을 펼치십니다. 즉 수수께끼를 펼치십니다. 하나님 나라 비유가 그러합니다. 바리새인과의 공방이 그러합니다. 정통해석이 예수님의 해석에 웃쓰깨소리가 됩니다.( 어찌 다윗의 자손에게 다윗은 주 라고 하더냐? 유구무언입니다. 속수무책)
(부활없다는 사두개인 장난질, 부활있다는 바리새인 장난질, 둘 다 깨버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아무도 못 믿습니다. 나의 부활을 깨어야 하니까 말이죠. 안식일 장난, 큰계명 장난. 이웃사랑실천 장난, 다 바리새인의 장점의 무기장난감이 예수님 앞에서는 그야말로 장난질 일 뿐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 용서 몇번할까요 장난, 귀신쫏아내기 장난 기타 등등 성경전체가 다 그러합니다.)

언어로 장난치면서 노아방주를 비웃어서 노아홍수심판을 당하는 바람에 꼴에 노아방주를 해석하는 망상을, 장난을 펼치니 바벨탑이라는 답을 수수께끼 풀이랍시고 해석해 놓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또 그들의 언어를 흩어버려서 그런 장난을 수평적으로 펼쳐버리십니다. 그래서 펼쳐지는 말장난이 함 땅에서의 애굽 즉 피라미드 건설입니다. 말이 피라미드이지 인간을 건설하는 겁니다. 태양의 아들, 불멸의 존재, 인간 건설입니다. 영생불멸 말입니다.

그런 장난을 진지하게 치고 있는 가운데 모세가 장난을 칩니다.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내 놔라 한다.

이게 어디서 굴러들어온 뼈다귀야? 장난하냐?
여호와가 누구관데 내가 내 놓느냐? 말도 안되는 장난 치지 마라.

결국 자기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이 장난인줄 모르는 진지한 사명인줄 아는 겁니다.
도리어 여호와가 누군데? 난 그 사람 모른다.

드디어 공격의 빌미를 확보한 겁니다.

나발이 다윗이 누구관데? 난 그 사람 모른다.

(삼상 25:10, 개역)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삼상 25:14, 개역) 『소년 중 하나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사자들을 보내었거늘 주인이 그들을 수욕하였나이다』

애굽왕 바로처럼 똑같이 행동합니다.
그것은 믿는 구석이 있어서입니다.
자기 재산이듯이 바로왕도 영생불멸의 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거 건설중이였습니다.

인간들은 인간의 손으로 자기 교회 건설중입니다. 영생불멸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 장난 예수님의 장난으로 깨버립니다.

그 장난이 뭔고 하니 성전을 헐라 내가 3일 만에 짖겠다. 라는 겁니다.
다들 장난치지 말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움찔합니다. 들켜버렸습니다. 평생을 걸어온 장난이 들켜버린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막살기 라는 장난에 자신의 막사는 장난이 들켜버린 겁니다.

얼마나 엉터리로 장난으로 해석해 놓고서는 그것으로 사람들을 가르쳤다고 선생질을 하고 있는 장난에 더 잘가르치는 장난치는 예수님이 등장하니까 비로소 속내가 드러나는 겁니다.

자 그래서 장난이라는 표현을 제가 쓰는 겁니다. 방종이라고 표현하고 막살기 라는 표현을 쓰는 겁니다. 마치 이 부정적인 표현 때문에 갑자기 대따 의식을 하면서 사람들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한결같이 장난칠래? 까불면 다친다 라는 식입니다.

뭔가를 건드렸다는 거죠.

인간들이 천국장난을 칩니다. 어차피 천국이 내려올 리가 없으니 마음껏 장난을 칩니다. 사기를 치든 말든 진짜 천국은 내려올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 그런데 천국이 진짜로 내려옵니다. 알바간 천국이 말고요 진짜 천국 말이죠.

그런데 천국이가 이 땅에서 사람들이 천국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침략하듯이 다가오니까 장난하는 줄 아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장난했다는 증거로써 속내를 감추듯이 작용하는 결과입니다.

에이 우리는 천국이 한테 좋은 이미지로 좋게 좋게 대해줬는데 왜 너 천국이는 횡포를 부리면서 우리를 심하게 닦달내느냐 살살해라 천국아 좋은게 좋은거잖니

이런 식으로 막살자 라는 말에 심한 반응을 비로소 확 터트리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스라엘 하나님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동일합니다. 어차피 하나님은 안 내려옵니다. 그래서 메시아 장난을 치는 겁니다. 장난인줄 알았더면 절대로 장난 안치죠 장난인줄 모르기 때문에 장난치는 겁니다. 절대로 마귀 한테 장악 당하지 않았다는 장난을 말입니다.

그래서 직접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오니까 다들 장난인줄 아는 겁니다. 이것이 쌍둥이권법입니다.

인간의 장난에 장난으로 쳐야 자신이 장난친 것인줄 비로소 알게 됨으로써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왜? 주님 앞에서 장난 쳤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또 장난칩니다. 하라 하지말라 라는 용어를 여전히 사용합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인지, 후인지 또 헷갈리도록 말이죠.
아니 자기가 그것 때문에 스데반 집사님을 죽여놓고서는 입 싹 딱고
예수님만 증거하지 왜 또 헷갈리게 자기가 실수한 그것을 또 격으라는 식으로 장난치냐 말이죠?

그래야 바울 자신이 친 장난을 발각 당하는 예수님의 장난 앞에서 마귀의 장난을 보라는 겁니다. 그것이 율법을 먼저 알았던 유대인에게 주어진 기회였잖습니까?

예수님의 이런 장난 앞에서
오죽 인간들이 장난 빡에 없었으면 이런 장난을 치실까요?

또 이런 사람 나타날껍니다. 주님은 절대로 장난 같은 짖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라면 몰라도. 마귀면 또 몰라도

바로 그 말 조차도 인간이 하고 있잖습니까? 이쁜 장난감 예수를 가지고 노는 것 아닙니까?

인간들이 진지하게 자기 손으로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을 짖고 있는 그 건축물에

에라이 돌맹이 하나 떼구르르 장난치듯이 굴러들어옵니다.

억수로 견고한 그 여리고성이
밑에서 장난치고 있는 하나님의 군대가
칼도 없죠. 이상합니다. 장난치고 있습니다.
하루에 한 바퀴씩 떼구르르 돌고 있습니다.
뭐 하자는 것인지? 해석불가입니다.
어깨에 뭔가를 매고서 주여 저는 이런 식으로 주님을 원망했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라고 빙빙 돌고
또 그 다음날 또 돌고

완전히 미친놈들입니다.

어 그런데 저거들 멋대로 마지막날이라고 설정한 일곱째 날에
한번씩 빙빙 도는 장난을 치더니

이제는 6번 장난을 치는 겁니다. 6배로 미쳤습니다.

어랍쇼 칼과 화살을 쏠줄 알고 괜히 쫄았죠.

나발 불고 있는거예요 ~~~~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그죠

참나 얘들아 활 좀 쏘고 칼 좀 쥐어라 전쟁 다운 전쟁 좀 하자.
인간들은 전쟁 다운 전쟁을 하자 라고 장난을 칠 때

밑에서는 뿌뿌뿌 나발이나 불고 앉았습니다. 그래서 비웃습니다. 뭐라구요 나는 너랑 전쟁할 마음 없거든요. 칼을 쥐던가? 활을 쏘던가? 남자답게 하라는 겁니다.

밑에서는 또 뿌뿌뿌 합니다.  아이고 내가 잘못 들었나? 엘레레 그러네, 꼴레레 그러네
야야 좀 그만 나발 불어라. 앞으로 저런 장난치는 것들은 고추를 다 짤라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

어 그런데 실제적으로 다 짤려진 자로써 전쟁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전쟁이냐 장난이지

말장난 좀 하지 말아라 막살아 라꼬?

이스라엘은 그릇으로써 행패를 부립니다.
그것이 거룩한 전쟁 이라는 만행입니다.

막살았다 라는 것을 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비로소 발악합니다.

야 ~~~~~~~~~ 우리 인간들의 안막살기 정신을 매도하지 마 ~~~~~~~~~~


인간들의 믿는구석이 얼마나 장난질인지
예수님의 장난이 아니고서는 그 장난이 장난으로써 벗겨지질 않습니다.

(요 2:14, 개역)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요 2:15, 개역)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요 2:16, 개역)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8, 개역)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요 2:1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개역)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

ps

어!!! 글을 올릴려고 하니 이미 목사님이 올렸네요?

http://www.crossvillage.org/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board01&wr_id=7925

눈뜨자 마자 생각난 것 빨리 적어서 올려야겠다고 했는데
주님의 장난이 나의 장난 보다 더 장난이십니다. 주님은 장난 꾸러기

제가 지금까지 신앙생활해 오던 것이 얼마나 장난질이였는지를 얼마전에 알았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또 또 또 알아야 하구요.

철학이 덮쳐져서 철학에 눈 뜨고, 보기도 싫은 철학책을 보게 되니
우와 우와 했습니다.

그 동안 제가 알고 있던 것이 이미 여기에 다 나와 있었던 겁니다.

67년에 쓴 책을 봤는데, 뭐여 이미 이전에 지금 내가 용쓰고 있었던 내용들이 다 나오고 있었던 겁니다.

지금 인간들이 개혁주의 장난치고 있던 내용들이 더 높은 수준으로 철학책에 다 나오고 있던 겁니다. 저들은 니체때부터는 철학을 안본다고 장난치고 있지만 말입니다. 철학이야 말로 장난아닙니까?(인간의 지혜에 어리석음의 십자가), 신학은 더 장난질 뿐이고요?(표적을 구하는 자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

그렇다고 저도 이 장난질을 내 스스로 멈출수가 없습니다.
죽이시는 방법 외에는 없다고 봅니다.
빨리 그 날이 오기를

(나만 열심히 특심이고 나만 혼자 남았나이다. 장난하냐? 칠천명 남겨 놓았찌롱? 소쿠리 소핫이  장난하냐?  나봐 얼마나 순수해!!  미쁘잖아!!
역시 주님은 나 보다 순수 하십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사 화목제물인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습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인간들의 장난이 어느정도로 심각한지 나올때까지 쭉쭉 짜내시는 전능자의 장난  괴롬힘이 바닥을 칠때까지 계속 계속 계속 됩니다. 여디디야x3 꼬끼오x3

내가 진지한 장난으로 예수님을 죽였듯이
주님도 마음껏 나를 죽이시는 그 날이 와야 하듯이 말이죠. 종말(장난)이 오기를

이미 죽었는데 뭘? 이미 종말이가 왔는데? 천국이도 왔고, 종말이도 왔는데?

(요 2:1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미 허물어진 성전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사흘만에 짖는 성전이 귀합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장난치냐? 사흘만에 성전을 짖는다꼬? 에라이 죽어라 퍽 퍽 퍽

예수님의 장난을 도저히 눈뜨고 못보겠다는 이 장난은 그야말로 불치병입니다.


주여 고쳐주소서 (주여 저들의 불쌍히 여겨주소서 다 이루었도다)


(마 27:40, 개역)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마 27:41, 개역)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마 27:42, 개역)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 27:43, 개역)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댓글
 
김대식  11-07-02 10:53    

엥 댓글 지우셨넹? 왕뻘쭘 !!

아마 67년 맞지 싶네요 [의미의 논리] 들뢰즈 책입니다. 머리 빠개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 책의 확장이 [천의 고원] 이구요. (수정 69년 임, 68년에 그 유명한 차이와 반복이 출판됨)

흐름의 논리, 감각의 논리, 직감의 논리, 센스의 논리, 우발성의 논리, 삑사리 논리, 잉여 논리, 방언 논리, 영의 논리 등등으로 표현할수도 있겠죠. 논리를 흐름으로도 고쳐도 되구요. 흐름의 흐름, 감각의 감각, 직감의 직감, 징후의 징후, 잉여의 잉여 또는 잉여의 흐름 등등으로 / 또는 욕망 욕구로 해도 됨, 욕망의 흐름, 흐름의 욕망. 잉여의 욕망., 욕망의 잉여. 욕망의 욕구 등등으로

철학책을 처음 접한 저로서는 충격이였습니다. 소위 성령론이 아닌가 했을 정도로 착각이 들었습니다.
지젝 책은 성화론자들 저리가라 할 정도입니다. 성화론자들은 지젝 뒤 꽁무니만 따른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이런 철학자들의 해석 망상 조차도 장난 입니다. 십자가의 조명 아래에서 다 께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 십자가 장난(부정성)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처음자리는 십자가 뿐입니다.
그 빈터에서 매일 매일 쭐꾸덕 미끄러지면서
미끄러뜨리시는(해학:가로지르기) 그 사랑에 감사하면서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주님이 사랑하셔서 죽으셨도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최양순  11-07-02 10:54 
 
아, 착각한 부분이 67년에 읽은 게 아니고 1980년 대에 읽어서요..그 부분 수정한다는게 그만...아이고 민망해라 ㅋ

다시 쓰면

목욕하고 나면 걸레도 손에 들기 싫은..회개하고 나면 몇초라도 의인이 된양 착각 결벽증에 빠지는..
청소차 지나가면 문 휙닫아버리는..미화원아저씨들은 물커덩한 쓰레기덩어리 만지는데 방수복에도 방취는 안되어서 싸우나 몇시간 땀빼도 안빠지는 냄새라던데..

온세상 더러운 것 뒤집어쓰신 주님 십자가 냄새난다고 향수뿌려대는 외식하는 무리들..

제가 아는 김대규작가맞나요? 20대시절(이부분을 처음올린 글에서는 67년으로 표현했는데 오류였음,읽기는 80년대시절에 읽었거든요)에 시집과 에세이를 읽었는데 '신은 인간의 머리수만큼이다.하셨던 기억이 나요

ㅎㅎ 다시 올립니다
 
 
최양순  11-07-02 10:59  

아고...김대규 김대식 헷갈리는데 이 참에 님의 책을 도서관에서라도 다시 찾아 읽어볼까해요 출판사좀 일러주세요~
 

김대식  11-07-02 11:21  
 
전 책 낸 적 없습니다. 낼 일도 없구요.

아 ~~~ 제가 읽은 책요? 제가 사오정이라서 ㅋㅋㅋ
현재 읽는 중에 있구요. 아마 몇십년 더 걸리지 싶으네요.


들뢰즈 책만 나열해 보면

[의미의 논리](한길그레이트북스 038) 질 들뢰즈 지음 | 이정우|AU00351272*(0) 옮김 | 한길사 | 1999.09.15

나머지는 이근호목사님이 서평한 들뢰즈 책입니다.

[감각의 논리] 질 들뢰즈 출판사 : 민음사

http://www.crossvillage.org/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sinhak03&page=5&page=5&wr_id=47

[앙띠 오이디푸스] :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 들뢰즈, 가따리 출판사 : 민음사

http://www.crossvillage.org/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sinhak03&page=4&page=4&wr_id=65

[주름] :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 질 들뢰즈 출판사 : 문학과 지성사 (서울 : 2004)

http://www.crossvillage.org/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sinhak03&page=2&page=2&wr_id=103

[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Gilles Deleuze) 출판사 : 민음사 (서울 : 2005)

http://www.crossvillage.org/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sinhak03&page=1&page=1&wr_id=112

[천개의 고원] : 자본주의와 분열증 2 / 질 들뢰즈(Gilles Deleuze),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 출판사 : 새물결 (서울 : 2001)

http://www.crossvillage.org/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sinhak03&page=2&page=2&wr_id=99

최근 특강에 목사님이 들뢰즈와 라캉(지젝)을 다루었고

개혁주의 신학과 들뢰즈와 라캉 철학의 관계  이근호 (강의교재)

http://www.crossvillage.org/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sinhak03&wr_id=332

봄특강 강의녹음

http://www.crossvillage.org/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lecture08&page=1&wr_id=495


위의 책 서평 글은 십자가마을 홈페이지 http://www.crossvillage.org  첫 화면에 신학과 철학 이라는 메뉴가 있습니다. 클릭하시면 이런 글들이 게시물 속에 있습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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