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되고 헛되니 헛되도다

2011년 7월 3일 일요일 오전 9:08:34  김대식


(전 1:2, 개역)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2:8, 개역)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말이 얼마나 배부른 소리인지
우리도 솔로몬처럼 그런 자리에 올라서 저런 소리를 외치면 또 몰라도
밑의 사람들이 듣기에는 완전히 장난치는 소리일 뿐이다.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천상회의에서 미혹하는 영을 보내고자 누굴 보낼꼬 한다.

거짓선지자의 활동은 결국 주님이 보내신 것이다.

마귀가 활동하지 않으면 언약이 안된다 언약이 안돼

그 거짓선지자는 미혹한 영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거짓선지자인줄 꿈에도 모른다.
선지자는 해석망상이라고 했다. 장난을 쳐야 한다는 소리다. 미혹한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이 그 장난을 배경으로 깔아 놓는 역할을 한다.

메시아 신앙을 마귀가 유대인에게 심어버렸다. 마귀에게 장악당한 그 유대인을 배경으로, 바리새인의 해석망상이 기정사실이 된 입장에서 그 배경을 깔고

예수님 또한 해석망상이라는 선지자 노선을 따른다.

참선지자들이 그런 거짓선지자의 평강이라는 장난, 성전장난. 이스라엘 장난을 마음껏 치는 가운데서

참선지자는 그런 해석망상을 배경으로 깔고 다시 해석망상을 펼친다.

평강이라는 장난에 삐딱함이라는 장난을 치고
멸망치 않는다는 장난에 필히 이스라엘은 멸망한다고 장난 친다.
뭐가 아쉬워서 인간들 듣기 좋은 소리를 할 이유가 뭐가 있는가?
이미 완료된 판국에, 도리어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조리 불안 부정 속으로 다 몰아가는 것이다.

(갈 1:8, 개역)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9, 개역)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10, 개역)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자 이렇게 되면 백성들은 그 말따먹기의 두 장난에 선택의 여지가 자신들에게 있는줄 착각한다. 아담한 선택을 한다고 착각하듯이 말이다. 본인이 선택하는 장난에 도리어 선택당하는 장난이 덮친다. 즉 선택의 여지가 없도록 만들어버린다.

그 어떤 이도 거짓선지자의 미혹에 다 갇히도록 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자신의 아담한 선택이니 더더욱 믿음이 가도록 만든다. 장난에 말려든 것이다. 그런 신념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장난에 결국 쭐꾸덕 미끄러진다.

제일 믿음직 스러운 것은 미쁜 것은 딱 하나 뿐이다. 미끄러짐 뿐이다. 차라리 그 미끄러짐을 즐기는 것이 낫다. 바로 딱 하나 십자가다.

결국 그 어떤 신념도 십자가 앞에서는 더더욱 잘 미끄러진다.

신념은 무너지기 쉽다. 숭고라는 이데올로기나. 그 어떤 곤고하게 보이는 시스템,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꺼야 라고 믿음을 팍팍주는 그 어떤 절대성도 무너지기 쉽다.

괜히 장난 쳤구만. 차라리 장난의 장난을 믿을걸? 껄 껄 껄

그래서 여기 십자가마을에서는 그 상황을 이단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본인들이 자기 스스로 이단이라고 떠벌리면서 다른집단(복음을 이용하는)에게 이단이라고 말하니

마치 헛되고 헛되니 다 헛되도다 라고 장난치는 것으로 보인다.

솔로몬 지야 배불러서 하지만 남들은 다 배를 쫄쫄 굶는 상황에서 헛되다 해 버리면
그거 돌삐 맞아 죽어야 할 소리 아닐까?

누구는 천 살 조금 못 미치는 인생을 사는데 뻐뜩 죽었고 삶도 의미 없다 라고 했다면
금방 태어나서 죽어야할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에서는 참으로 섭섭한 소리다.

위로 받기를 거절할 것이다.

그런 공평하게 즉 장난스럽게 그런 엄마도 죽으면 도대체 위로받아야 한다는 그 마음은 어디로 가버린 것이 되는가?

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강의를 들었는데
어떤 세균이 자기가 살려고 개미에게 먹혀준다. 개미는 자기가 먹은줄 착각할 것이다.
그래서 그 세균이 개미를 감염시켜서 개미가 이상행동을 하도록 만들어서
잡아먹히기 쉽도록 풀잎 제일 끝에 오르도록 만든다.

소가 풀잎을 맛있게 뜯고자 먹었는데 개미도 딸려 먹힌다. 그리고서는 세균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먹이를 소의 위장? 하여튼 내장에 있는 것을 먹을려고 이렇게 철저한 계산 속에서 프로그램을 짠 것이다.

자 누가 누구를 먹는 것인가?

예수님이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시자
비로소 기적을 보고 쫏았던 많은 무리들이
우리는 그런 식인종이 아닙니다 라는 식으로 다 물러간다.

예수님 약올리듯이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까지도 장난 치신다.
너희도 가려느냐?

사람은 떡으로 살지 않는다.
도리어 떡에 먹혀 산다. 떡은 철저한 계산 속에서 인간들을 먹고 있다.

즉 말씀으로 산다.

열심히 먹혀 주면 된다.

지금 비가 내린다. 빗방울 하나 하나가 저 딱딱한 콘크리트 바위위에 떨어진다.
과연 비가 강할까? 바위가 강할까?

시간과 공간은 늘 장난꾸러기와 같은 배경을 만든다. 즉 지금 배치가 고정된 배치로 착각토록 만들어 놓고서는 나중에는 딴소리하듯이 배치가 달라진다. 개미가 먹는 것이 아니라 먹히듯이 말이다.
빗방울은 소멸 되고 바위는 결국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수 십년 지난 후에 보니 바위는 사라지고
빗방울은 또 떨어지더라 라고 말이다.

인간이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제사가 인간을 바치고 있다.

말씀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의 차이다. 장난이 개입한 것이다.
물론 가인의 제사 장난을 상대적으로 향하면서 말이다.

제사 자체가 막살기를 한다. 즉 장난을 한다. 왜? 가인이 막살고 있다는 것을 들추어낼려고
그러나 인간은 제사를 본인이 드린다고 하니 제사가 비웃는다. 그래 죄의 소원 함 넘어보시지 그래? 라고 제사가 못지킬 것을 어깨에 평생 짐 지운다. 약올리듯이 말이다. 평생 제사나 바쳐다 죽어라 라는 식으로 말이다.

제사 바깥에서 제사를 드리는 주체가 되는 것이 가인의 제사이지만
제사 속에서 정작 아벨은 제물로써 바쳐지는 것이다. 그것이 이중분절인 기름과 피를 나누는 것이다. 창조성 은혜성이다. 즉 십자가의 개입이다. 십자가 속이다.

똑같이 불 속에서 불 바깥을 보니 다 죽어버린 좀비들 뿐이다.
그런데 불 바깥에서 불 속을 보니 타죽어야 되는 저주로 보인다.

그러나 말씀안에서는 그것이 전도된다. 뒤바꿔치기가 된다. 불 속이 생명이고 불 바깥이 죽음 뿐이다. 누구의 개입으로써? 제 4의 사나이 네 번쩨 사람으로써 말이다.

도저히 불 속에서는 그 아무도 춤을 출수 없다.

불이 잡아먹지 않고 불이 도리어 불 바깥의 인간들에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은 이제 다 죽었지롱 이미 죽은자임이 드러났지롱 하고 말이다.

장난이 너무 심하다.

어찌 죽음이 생명이 되고
생명은 죽음이 되는가?

광야란 바로 이런 시선으로써
너희에게 발린 피가 바로 이런 능력이다는 것을 뼈속 구석 구석까지
곧은 목 뼈 뿌셔지면서 까지 배우는 곳이다.

세상사람들이 죽었다 깨어나는 부활을 해도 못 알아먹는 것을
광야 속에서의 이스라엘 만큼은 알려준다.

항상 저들의 시선에 대조적인 저주 속이 축복이고, 축복이 저주임을 말이다.


그 광야에서 외치는 한 사람이 있다. 솔론몬 왕이다. 가장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고
가장 큰 힘을 지녔고, 가장 높은 지혜를 가졌으며, 모든 부를 쥐고 있는
그야말로 복의 복을 누리는 축복의 종결자 로써 외친다.

지혜의 말이다.

헛되고 헛되니 다 헛되도다

에라이 그것이 무슨 지혜냐? 어리석고 어리석으니 다 어리석도다 라는 말과 같잖아 !!!

맞다 그렇다.

배부른 소리다. 장난의 소리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소리다.
모든 인간을 못 밖겠다는 것이다.

정과 욕심과 육체를 박겠다는 것이다.
그런 자 만이 축복의 종결자 라고 말이다.

세상에나 이런 소리는 교회도 외치질 않는다.

그러나 솔로몬은 분명히 외쳤다.
그 소리는 이제 우리를 잡아먹도록 되어 있다.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 자는 저주 받은 자 이다.
왜냐하면 인자의 살과 피가 나를 잡아먹어서 정과 욕심과 육체를 뜯어먹기 때문이다.

오늘도 밥상에 놓여진 주님이 허락하신 것을 본다.
바다 깊은 곳에서 주님이 길러 길러 어부에게 잡히고 수많은 차를 거쳐서 이 밥상에 까지 올라왔다. 내가 그 허락된 음식을 감사히 먹는 이유는 정작 그들이 나를 먹기 위함이다.

그들은 소모품으로써 등장한 선지자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계획된 프로그램에 의해서 나의 입속으로 들어오는 나를 잡아먹기 위한 나를 뜯어먹기 위한 선지자로써 허락된 헛되고 헛되니 다 헛되도다의 지혜가 나를 불태우기 위해서 그 수많은 시간 공간을 거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롬 8:20, 개역)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 8:21, 개역)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 8:22, 개역)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하물며 피조물이 이러한 선지자일진데
인자야 라고 불리우는 선지자들은 인간이라는 허무함에게 뜯겨먹혀져야 할 자들이 아닌가?
그러나 정작 먹히고 먹히는 가운데 최종적으로 먹히는 것은 인간 자신들이다. 단 한번도 제대로 씹어본적이 없이 입에 가득한 채로 숨막혀 죽여버린다.

(출 16:2, 개역)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출 16:3, 개역)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출 16:8, 개역) 『모세가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출 16:12, 개역)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시체가 산더미 된 산이름 지역이름 뭐였는데 에이 못찾겠다 꾀꼬리

인간이 어차피 숨막혀 죽을 것인데 왜 고기까지 죽어야 하는가? 라고 묻는자가 감히 없을 정도다. 왜 예수님 때문에 2살 밑으로의 아기가 죽어야 하냐고 따지는 인간은 억수로 많아도 말이다.

철저한 논개작전 물귀신작전이 바로 소모품이라는 선지자로 인해서 벌어진다. 미끼가 없으면 물지를 않는 법이다.

낚인 것이다.

자신의 허무함을 니벤또 니까무라 라고 자폭하면서 인간에게 뒤짚어 씌우면서 죽는 하나님나라에서 파견한 독립투사이다. 그것도 모르고 거꾸로 가룟유다 등등이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으니 그 장난을 까발리는 것이다.

그 허무함의 목베임이 아니면, 그 어리석음의 지혜가 아니면 자신의 허무를 알 길이 없다.

이것이 지혜가 펼치는 잔혹하기 짝이 없는 지혜 혼자만의 영광 돌리기 이다.

괜히 저 깊은 산에서 바닷속에서 우리 입으로 온 것이 아니다.

허무함에 철저하게 충성한 것이다. 그 허무 속이 지혜이기 때문이다.


ps 교회 다녀와서 계속 이어서


교회에 가는 길에 버스 정류소에서 갑자기 도심지 속에 있는 나무들이 갑자기 눈에 띄였다. 단순히 미화 차원에서 나무들은 박아 놓은 것이다. 이동 이동 해서 심겨진 나무 말이다.

그런데 과연 누가 물을 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비도 오고 하니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거 같으면 가계 앞 집 앞에 가로수 등의 나무를 물로 주고 했지만

지금은 물 값이 비싸다. 점점 더. 그러면 지자체에서 날이 가물면 예산의 편성대로 또 물주는 차를 동원해서 물을 주게 될 것이다. 만약 물이 너무 너무 비싸게 되면 그 예산이 다 떨어지면 누가 소에게 물주랴? 누가 나무에게 물 주랴?

결국 최종 책임자는 주님 밖에 없다. 그런데 나는 그런 생각 속에서 무서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그렇게 까지 저 나무들에게 물을 주시는 겁니까? 나무들의 존재의 이유가 갑자기 궁금해 졌다.

아뿔사 !!! 그 나무를 키워서 나를 불태우는 장작불로써 씌여지기 위함이였다.

이것이 그들의 존재 목적이다. 그런 사명을 가지고서 저 나무는 지금도 주님이 무럭 무럭 잘 자라도록 물을 일일이 먹이시고 기르신다.

이것이 계획된 프로그램 바로 유일한 소망 믿음 사랑인 십자가다.
즉 종말이다.

(마 6:25,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26, 개역)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7, 개역)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28, 개역)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29,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30,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1, 개역)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개역)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개역)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4, 개역)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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