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계간하여 자아를 넘어서기?

왜!! 들뢰즈는 왜 자살로 자신을 계간했는가? 네가지 왜 !!

2012년 6월 4일 월요일 오전 11:20:30  김대식


들뢰즈의 철학방법인 계간은 어디로부터 얻은 아이디어일까? 라고 며칠전부터 궁금해졌다.
이래 저래 살펴보니 역시나 성경을 차용한 것이다.

사실 들뢰즈와 지젝은 엄청나게 성경을 차용해서 인간의 욕망을 분석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도 서양철학은 기독교의 문화이기 때문이니 어쩔수 없다.

계간 사생아 개념을 통해 검색하다보니 무염시태 라는 단어가 동일어로써  나타난다.
동정녀마리아의 무죄잉태설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호 징후 암호라는 것이다. 흔적 홈파기

얼굴은 아니 참 반대이지 예수님은 얼굴을 새롭게 창조했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인들은 아시아인 황인종이든 유럽의 백인종이든 아프리카의 흑인이든
모조리다 백인 예수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곧 얼굴이 가면이 되는, 가면이 얼굴인
현재의 모든 인간은 예수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그것을 예수님이 창조했다고
그런 얼굴을 창조했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데요?
불교인인데요 라고 해도 소용없다.
들뢰즈 본인도 무신론자라고 우기고
선불교에 매료되었다고 우기는 판국에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

그것은 판대기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의 얼굴을 했다는 자체가 악마의 얼굴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이 보편적인 마귀얼굴을 보편화 시켰다.

알튀세르는 총으로 자살했다. 마누라를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에게도 그렇게 쏴 죽여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자아가 없다는 것이다. 자아가 없기 때문에
나 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쏴 죽여도 상관 없다는 식이다.

어차피 천국이라는 곳에 간다해도 천국에서는 기억조차 못할테니 의미 없는 것에(총으로 쏴 죽인 의미없거든요? 심각한게 없거든요? 자아란 없는데 뭘?) 의미를 달 필요가 없다는 식과 같은 식이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같은 성향의 철학을 가진 아내와 결혼하면서 자신은 한낯 이론가로만 활동하였고, 아내는 반대로 그런 철학을 실천하는 실천가로만 활동하다 보니 거기에 대한 불만 또는 열등의식이 있어서 그래서 아내를 쏴 버렸다는 소리가 있었다.

항상 인간은 행위 뒤에 뭔가를 감추고 있다. 본인도 모른다.
(배후가 있음에 있어서 그 배후는 들키듯이 하지 않는다. 안들키기에 배후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그 배후가 마귀였고, 베드로는 그 배후가 사탄임을 지적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찬양 곧 외친다.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말이다. 성령이 임해서 외치게 되는 것이다. 주인이 바뀌었으니 외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참으로 뻔뻔스럽게도 그 주인을 찬양한다. 감사한다. 사랑한다. 주님을 사랑의 대상으로 비로소 삼아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비로소 이제야 주님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았던 악마성을 끊고 그 차이성으로써 본인이 긍휼의 대상이 되었음을 즉 막사는 죄인이 되었음을 기뻐서 기쁨이 임해서 아니 외칠수가 없었던 것이다. 먼저 계신 이가 벌린 자작극이다.)

방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 또한 이 글 뒤에 타인의 욕망을 항상 감추고서 쓰기마련이다.
행함이라는 것이 그렇다, 알수 없는 권세가 항상 배후에 깔려서 행동으로 옮겨지기 마련이다.
그 배후는 어쩔수 없다. 생각해서 생각하는게 아니라 생각 되어서 생각이 나는 것이듯
자신이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현미경 위에 놓여진 무능해 보이는 대상물이 도리어 나를 관찰하고 있다는 것이다.

판대기가 형성되었기에 사적인 영역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배후가 누구냐 라는 것이다. 바로 악마다. 예수님이 아니다. 악마다. 예수님은 그 악마를 거쳐서 오라는 것이다. 악마를 거쳐서 예수님이 찾아오시니 자신이 원수임을 비로소 고백한다. 왜 날 원수 만듭니까? 라는 자는 예수님이 찾아오지 않았다. 날 하나님의 원수 만들어 버린다면 그 또 죽여버리니까 말이다. 막사는 죄인 만드는 예수를 인간은 원치 않는다.
막살지 않는 의인으로 만드는 예수를 악마는 조작해서 수많은 교회에 뿌렸다. 유대교를 장악한 마귀가 예수님의 명을 따라서 거짓 메시아로 모든 유대인을 장악했듯이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 혼자서 새로 출발하는 출예루살렘을 실시 했듯이, 성령은 날마나 우리를 새로운 죄인을 만든다. 죄인이 뭐가 새롭냐 라고 따지겠지만. 죄가 새롭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십자가로부터 지적 받을 것이 없는 징계가 없는 사생아일 뿐이다. 죄가 없더고 죄를 새롭게 만드신다. 골프 치는게 죄가 아니라, 상상도 못한 새로운 죄 말이다. 격도 보도 못한 새로운 죄 말이다.)

왜 그럼 들뢰즈는 계간이라는 방식으로 철학적 방법을 삼았던 것일까?
(들뢰즈는 모든 철학자의 철학을 파악해서 자신의 철학을 펼치는 방식이 아니라.  구지 파악할 필요없이 그 자체로써 한덩어리로 두고서, 자신의 것을 그 곳에 심어서 사생아를 만들어서 그 전복성으로써 새로운 사유를 펼치니, 전혀 새로운 것이지. 연장선상의 것이 아닌 방법을 펼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철학자들은 계간이 자신뜻대로 이루어졌는데, 니체만큼은 되지 않았고 도리어 그 과거의 인물이 미래에도 활동하여서 여전히 들뢰즈 자신을 겁탈하고 있음을 본인이 감각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부러워한 것이다. 니체를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

명령어(아버지) 라는 말도 안되는 기호에서 빠져나오고 싶어서일까?
명령어와 통과어를 서로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창조해 냈다 라는 생명성은

무염시태를 통해서 새로운 방향을 생산해서 본 것이다.

그렇게 해 보니 실제적으로 많은, 아니 무수히 다양한 생명을 볼수 있게 되었으니 구태어 이전 것에 대해 미련을 가져볼 이유가 뭐가 있는가 말이다. 그 과거 조차도 원인 없는 결과로써 이 잉여를 위해서 있어왔던 이전 것은 전복되어야할 것이 아니던가?

줍기 바쁘고 누리기 바쁜 판국에
줘도 못먹는 것은 그야말로 새것 앞에서의 옛것의 미련인가 자존심인가?
배개 덜 고파서인가? 체면은 믄 체면?

카프카에서 아버지에게 수차례 소송거는 이유가
놀랍게도 아버지가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책을 보다가 내가 상상하게 된 내용을 적어본다,)

아버지라는 법의 명령어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통과하라는 것이다. 뚫고 나아가라 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잉여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치면 칠수록 아버지는 더욱더 샘쏟는 것이다.
아버지를 사수하고 보호하고 성전에 가두는 것은
고립시켜 썩게 만드는 것이다.
아버지를 소모하면 할수록 아버지는 넘쳐난다.
(꼭 과거 인디언이였던가? 아니면 아프리카 부족이였던가? 아버지의 시체를 뜯어먹음으로 인해서 아버지의 부활 또는 새로운 태어남을 수많은 부족의 풍습에서도 있었듯이, 그러고 보니 피라미드 사상도 그러하지 않은가? 모든 제사가 그렇다, 유훈정치이다. 먼저 있었던 자들의 부활 곧 영생불멸처럼)

그래서 무조건 아버지에게 대가리를 쳐박으면서 아버지를 이겨볼려고 소송거는
마치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환도뼈까지 뿌싸지면서까지 들이박던
야곱이 얻게된 새이름이 바로
하나님과 겨루어 싸워 이긴자 라는 뜻의 이스라엘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야곱에게 그렇게 명명했다.
그런 의미에서의 앙띠 오이디푸스이다.

그것에 정작 아버지가 매우 매우 흡족하다는 것이다. 차이나는 아버지다.

그러니 탕자와 불의한 청지기야 말로 제대로 된 앙띠 오이디푸스 내용이 아닐까?
사실 성경 전체의 내용이 다 그렇다
특히 예수님의 비유는 더더욱 그렇다.
하나님 나라 비유 자체가 구멍을 뻥뻥 뚫어버리는 이미 완료된 희년으로써
미래완료로써 침노하는 식이다. 이것이 거룩전쟁 차이내기 전쟁이다.
(물론 이스라엘은 그 기능을 이해 못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무리 예수님의 비유를 곧 통과암호인 비밀언어를 들어도 여전히 명령어로만 들을 뿐이다. 그래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수 없다. 왜 패쓰워드 걸려있으니까? 그래서 약속한 성령이 와야한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비유는 부재성이다. 비로서 죽음으로써 그 비유의 의미가 성령으로 인해서 알게된바 되게 하신 것이다. 여기에 이스라엘은 죽음 곧 멸망을 통해서야 비로소 알게 하신다. 결국 이스라엘은 부재성이였다는 것이다. 이유는 예수님이 먼저 있었기에 예수님이 먼저 있었음을 말하기 위한 자들로써 이스라엘이 없는데서 생겨난 이유이다. 그러나 늘 이스라엘은 존재 타령을 하다보니 알지못하다가 이스라엘이 멸망 당함으로써 비로소 알게 된다. 빈자리를 드러내기 위함으로써 말이다. 그래서 아벨 대신 주어진 셋의 족보는 아벨 대신 살았더라 족보가 아니라, 아벨처럼 퍼뜩 퍼뜩 죽었더라 족보이다 라는 것이다. 부재족보이다. 얼마나 퍼뜩 퍼뜩 죽었뿌리는 족보인데? 보통 900년 정도 살고 죽는, 일부러 천년을 못채우는
천년?1 족보이다. n-1 족보이다. 얼마나 빨리 빨리 퍼뜩 퍼뜩 죽어나갔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누락 족보, 단절 족보, 할례족보, 차단 족보, 차이내기 족보, 더 나은 제사 족보이다. 즉 은혜가 입혀진 족보인 성령의 작품이다는 뜻이다. 누가 먼저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족보이다. 누구? 예수님의 족보로써 그 진위가 밝혀지는 것이다.)

예를들어보면
아버지가 마친 아들이 다니는 학교의 선생이라고 치자
그런데 아들이 매번 매번 두발검사에 걸려서 얼차례를 받는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 학교선생인 아버지와 연관이 되어서
아버지의 명예를 까먹게 되는 식이였다.

그래서 교무회의가 열렸다.

아이고 선생님들 요즘 아이들 두발상태가 개판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무슨 방도를 좀 내 보세요. 수학선생님 의견없나요?
좋은데!!
닥쳐라 수학? ㅋㅋㅋㅋ
교장선생님 미워
삑삑삑 선생들이 말이야 애들이 복장불량으로 다니고 말이야, 헛소리나 하고 말이야

확실한 근본대책이 마련된다. 그 원인을 없애면 된다.
학교 만든놈 누구야? 성전 손으로 건축해 만든놈 누구야?
엄마 모시고 와!!
두발검사가 문제네! 두발검사 만든 놈 누구야??

Gag Concert 교무회의 20120603

http://www.youtube.com/watch?v=91GAJDWGsV8



지금 예를든 것이 진짜 농담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적으로 성경에서 예수님이 이 비유 방법 외에는 말씀하시지 않았다.
(노아의 벌거벗은 몸을 비웃은자를 일부러 만들어 함만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함의 열매인 가나안을(노아를 비웃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이 벌리는 전쟁지로 삼아서
그들의 신체가 즉 몸이 땅이 되는 함땅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내용이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이다. 여기에 이스라엘은 참예케 된다. (뒷걸음질하여 카파르 수치를 덮은 것은 윤리적 행위가 아니라, 차이나는 더 나은 제사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땅을 누리는데 그 함 땅(애굽)과 가나안 땅을 누리는데, 자신의 신체가 누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계신 예수님의 신체가 누리는 것이다. 약속이 성취됨을 말이다. 이스라엘도 그 어떤 인간도 약속 성취에 전혀 안 기쁘다. 오늘날 성경을 읽는 자라도 말이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자는 그 누림을 주님의 먼저 계심으로써 주님이 기뻐 뛰시는데 있어서 괜히 덩달아 기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 곧 동참, 동행이 되는 것이다. 나의 사적인 소유물은 따로 생기질 않으니 이 얼마나 기쁜가?)
놀랍게도 단 한번도 이스라엘은 이 거룩한 전쟁을 한 적이 없다. 그저 전리품을 누릴 뿐인데 그 누리것 조차도 할 수가 없어서 전리품으로써 이스라엘은 이리 저리 공차이듯이 어쨋거나 저쨋거나 참예된다. 멸망 곧 죽음으로써 심판으로써 말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거룩한 전쟁은 자기 혼자 다 이룬다. 그게 무슨 구원이냐 라고 따져본들 이미 이룬 구원 취소될리 없다. 싫으면 지만 손해지? 그저 염치 없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누릴 뿐이다.)

이것이 바로 계간이다.
율법을 겁탈 강간하여 사생아를 낳아 그 괴물로써 율법의 완성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 외에 한 의가 아니면 안된다.
그 의가 바로 싫어버린바 된 의다. 괴물이다.
모두다 율법과 양심의 얼굴을 하는가운데
예수님은 괴물의 얼굴인 바알세불 얼굴로 그들앞에 섰다. 이 자체가 거룩이요 의다.
그 바알세불을 영접하는 자는 바알세불 걸린자로 취급받는 자들 뿐이다.
곧 탕자요 불의한 청지기이다.

이들 탕자와 불의한 청지기에서 나오는 행동이 바로 믿음 곧 행함이 있는 믿음인데
바로 비유 외에는 말씀하시지 않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곧 비밀언어, 통과암호인 패쓰워드와  같은 의미이다.

저절로 율법을 지키는 행함과 다른, 비밀암호가 그들에게 덮쳐져서 안행하고는 못배기는 막살기로써 나타는 차이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바로

탕자에게서만 불의한 청지기에게서만 나타나는 비유 이다. 곧 해석불가이다.
명령어 체제에서는 불의 외에는 다른 해석이 있을수 없다.

오죽 해석 불가이면 불의라고 할까
부정의 부정인데

그래서 불의라고 규정 당할 수밖에 없다.

그 불의가 예수님은 당당하게 세상의 지혜보다 더 뛰어난 지혜라고 아예 노골적으로 자랑하며
성경말씀에 기록하셨다. 이 보다 더 진정성이 어디 있을까? (차반에서 놀랍게도 이 진정성을,  이 차이나는 불의를 거룩 곧 사랑이라고 표현했다. 성경말씀은 불의한 스캔들인 십자가가 사랑이라니? 십자가에 모든 육체를 다 못 박아 버리겠다는 그 저주가 진정성이라고? 그래서 불의함을 일부러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 보다 더 뛰어나다고 차이내시면서 불의를 칭찬하신다. 이 차이가 난 불의가 아닌 것은 지옥깜일 뿐이다. 불의 자체가 천국깜이 아니라 - 은혜를 더 할려고 죄를 더하리요?, 의롭다 하는 자들을 뚫어버리는 더 나은 의가 불의로써, 차이나는 불의로써의 의 보다 더 나은 불의를 말하는 것이다. 의보다 더 나은 의는? 십자가라는 불의 뿐이다. 다른 불의는 없다. 즉 다른 의는 없다. 의로움 백날 세워봐라 의 보다 더 나은 의가 아니면 가인의 제사일 뿐이다. 명백한 또렷한 선명한 차이나는 의 이어야만 한다. 남들 다 하는 의는 거짓이다.)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탕자와 불의한 청지기는 웃음이 넘친다.
웃음이란 웃기는자로부터 웃음의 대상이 되었을때에만 나타난다. 선물이기에.

웃기는자로부터의 대상이 되지 못하면 웃을수가 없다.
막살기 라는 웃음은 곧 실어증(세례요한 아빠)은 그야말로 계류중의 계류요 계간 중의 계간이다. 나이많은 할머니의 몸에서 아기가 태어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비웃음꺼리일 뿐이다. (엘리사벳,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죽은 태 에서만 태어나야만 하는 열매이어야 한다. 멸망에서만, 단절에서만, 차단에서만, 그것이 차이 곧 거룩이다. 사랑만이 하는 그야말로 요상스럽기 짝이 없는, 민망스럽기 짝이 없는, 쪽팔리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 일을 먼저 계신 주님이 벌리신다면 우리는 기쁨을 누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쪽팔려서 성화하겠다는 것이 인간의 악마성이다. 곧 성화론이다. 즉 성령이 하시겠다는 일이 때려죽어도 못믿겠으니 장대 높이 달린 민망스럽기 짝이 없는 인자의 들리심을 안쳐다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을 뿌라뜨려서 보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일이다.)

그래서 풀수 없는 비밀언어 통과암호이다. 따따따따따 따따따따 까르르 웃는 아기웃음처럼 말이다. 이삭

이삭은 그 어떤 수(방법) 로도 해석 못하는 존재 자체가 되어버렸다.

(갈 4:21, 개역)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개역)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8, 개역)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 4:29, 개역)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 4:30, 개역)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 4:31, 개역)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웃음이 터지는 것을 막을수가 없어서 학교를 얼마간 휴교시킨 사건이 있었다.
탄자니아에서 일어난 여자 초딩 아님 중딩 되는 12세 쯤 되는 여자아이들에게 일어난 사건인데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이렇게 잉여란 다른신체 즉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법 부재의 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법을 구멍뚫어버리는
아버지가 법을 어기고서 법 아닌
웃음으로써 창조한 이 새세계의 새피조물을 탕자와 불의한 청지기를 통해서 기뻐하셨다.
심히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다.
이것은 반대로 마귀들에게는(명령어를 쥐고 있는) 절대로 보기에 안좋다는 것이다.
오히려 비리로 가득한 다윗의 가문을
그 막살기의 가문을
가면 갈수록 오히려 그 견재함을
그 든든함을 견딜수가 없다.
더 기가막힌 것은 오히려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갑자기 엘레베이트를 타고 잉여세계인
미래완료로써 넉넉한 승리의 완료가 또렷하게 되어버리니

마귀는 미워 죽을 판국이다.

법들이 법을 지켰다고 우기는 순간
비유 곧 패쓰워드 인 통과암호를 풀 수가 없다면
그것은 법을 지켰다는 모양새를 가득 갖추고 평생을 성전에서 살 듯이 하며
율법 말씀을 완벽하게 지켰다고손 치더라도

악마다.

그들 악마에게 악마로 취급받는 자들이 등장해야만
그들의 악마의 얼굴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악마의 얼굴을 밝혀내지 못하는 얼굴은 같은 패거리일 뿐이다.

예수님의 얼굴은  악마의 얼굴만을 배경으로 깔고서만 등장할 뿐이다.
약속 스스로가 함 땅 가나안 땅을 깔고서 그 카페트 위에서 마음껏 자유 곧 거룩을
곧 차이를 펼치면서 약속 스스로를 홀로 이루셨듯이 말이다.

ps 캬 요즘 미치겠다.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님이 이렇게 기쁠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할게 너무 너무 많이 생겼다.
그러나 몸이 농띠 몸이라서 따라주질 않는다 정신력은 물론 제로요
얼마나 돌대가리인지?
그런데도 날 공부시킬려고
책들이 날 못살게 군다.
찔끔 찔끔 보고 있지만
하루 종일 그 내용들이 떠나질 않는다.
그렇다고 외워지면 참 좋으련만 ㅋㅋㅋㅋㅋ

외울필요가 없다고 하니 내 머리나쁜줄 아나봐?

얼굴이 정치성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정치 곧 증여의 나눔과 연관된 선택의 문제라는 것인데
곧 차이요 차별 거룩성이요 진정성이며 영원회귀인 사랑인
진정한 역동적인 다이나믹한 운동성인데

아 그래서 플라톤의 정치를 봐야하나?
내가 왜 이러지?
살면서 책 한권 본적이 없는 놈인데?
심지어 난독증환자 아닌가?
아무리 읽어본들 앞의 것 다 까먹는 판국에 ㅋㅋㅋㅋ

이런 마귀들 책인 철학책의 봐서 뭐하나 싶었는데
오히려 더 꼿혀버렸네
진리를 찾고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헤매고 헤맸다는 것이
참으로 눈물겹다만
우짜겠노

십자가가 아닌 이상 헛된 속임수 일 뿐인데

(골 2:8, 개역)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등학문이 장난이 아닐정도이니 원?
그래서 세상의 지혜에서는 어리석고 미련하기 짝이 없는 도리어 초딩취급 유치할 뿐이다.

(골 2:14, 개역)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 2:15, 개역)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 2:16, 개역)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골 2:17, 개역)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 2:18, 개역)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골 2:19, 개역)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골 2:20, 개역)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골 2:21, 개역)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골 2:22, 개역)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골 2:23, 개역)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을 바라는 종교인들에게서의 십자가는 그저 거리끼는 불의할 뿐이니 원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6, 개역)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개역)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개역)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개역)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여! 이 악마의 세계에서 건져주시옵소서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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