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선악(믿음)이란 거리두기 이다

2012년 6월 16일 토요일 오전 9:05:51  김대식


희망의 철학으로 기존의 사유세계를 전복시킨 긍정의 철학자 니체를 기준으로 하여 들뢰즈까지의 철학은 무자아 곧 자아 없다 영구 없다 이다.

불교가 신으로부터 인간을 떼어놓는데 성공했다면
자아로부터 인간을 떼어놓는 자유까지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

무자아의 욕망이라는 희망을 추구하는 것이
오늘날의 철학이요 신학이기도 하다. 곧 인간 그 자체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신과 같이 되어버린 이상
아무리 하나님이라는 신을 떼어놓았다손 치더라도
신이 되어버린 인간을 인간으로부터 떼어놓을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 방대한 천기의 비밀을 편집증으로 모아서
그 수수께끼를 풀려는 신경증에
더더욱 신은 자본주의라는 바벭탑으로 집결토록 만들어 버렸으니
분열증은 더더욱 심해진다.

그냥 그 분열증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무자아요
차라리 속 편한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우연이 졸지에 소 뒷걸음질 하다가 우발적인 짤막한 답 순간적인 답으로써
수수께끼의 답을 풀었다고
또 답을 푼 자아와 곧 무자아와
답을 못 푼 자아와의 공생불가인 거리두기를 통해서
바리새인의 전도처럼 열심이 하늘을 찌르는 열정을 보인다.

무자아야 말로 그들에게서는 욕망이 끝없는 과잉의 세계요 모자람이 없는 영원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망의 철학이다. 다른 희망이란 없다. 조금해 보면 금방 질려서 결핍이 생겨버리면 그것은 거짓이 된다. 아무리 써도 써도 줄지 않는 과잉의 욕망이야 말로 그들에게서는 진리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자아가 그 과잉이라는 진리를 누릴수 있는 유일한 답안지가 된다.

그러나 거리두기란
자아를 포기하고 누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자아를 포기하고 누구의 세계로 들어갔다고 해놓고서는 도리어 그 자아는 생생하다.
이런 모순을 무슨 수로 극복하며 그 수수께끼는 또 무슨 수로 풀수 있겠는가?

차라리 진짜로 포기한다면 그것은 곧 죽음이다.
심지어 진짜로 죽어버리는 철학자들은 결국은 사기를 친 것이다. 자아를 포기한게 아니고
자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생생했기 때문에
수수께끼를 풀려는 자아를 추구할려고 죽음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중동의 종교에서 천국을 위해서라면 자살폭탄이 되어서
신의 뜻을 따르겠다는 것과 같다. 그 순교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 신이 결국은 자아가 만든 신이니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낸 수수께끼에 자기를 죽음속으로 뛰어들어놓고서는 풀었다고
모호한 소리 하고 자빠진 것이다.
결국 자기가 낸 자기 수수께끼를 원인인 자아를 없앰으로써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소리이다.
자아 없애기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돌아보는 순간 제명이 되어버렸다. - 개콘)

이것이 그들의 답이다. (그래서 그 원인을 제거한다. 학생주임선생, 자아가 누구야? 자아 없애!)

Gag Concert 교무회의 20120603

http://www.youtube.com/watch?v=91GAJDWGsV8


그러나 이에 반하는 정반합이 또 있다.
자아는 끝까지 물고 늘어지지 자살한다고 끝나지 않는다. 귀신이다. 악마다.

부정의 철학은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듯이 죽고자 하는 욕망도 있다고 했다.
선하고픈 욕망이 있듯이 악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악해지고 싶어서 악한게 아니라 악함이 인간을 덮쳤기 때문이다.
선해지고파서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선함이 덮쳐서 그런 것이다.

이것을 바로 성 sex 라고 본 것이다.

모든 것이 성적충동에 의한 것이다.
(긍정의 철학은 이 욕망을 생산이라고 희망적인 긍정으로 창조로 해석했다. 섹스 없인 열매란 있을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모든 과잉 잉여는 창조 생산물이다. 이 과잉을 무슨수로 주체하랴? 감당이 불감당이다. 반면 부정의 철학은 욕망을 결핍으로 해석했다. 백날 채워도 채워도 채울수 없는 밑빠진 장독대 이다. 차라리 니 멋대로 해라 이다. 어차피 채울수 없기 때문에 죽어도 소용없다. 안 채워진다.)

심지어 신이 인간을 사랑해서 죽어서 구원하고자 하는 신의 욕망 조차도 모두다 성적충동이다. 곧 에로스다. 아가페는 틀린 해석이다. 신의 사랑은 어디까지나 에로스다.

그래서 라깡은 니 마음대로 살아라 라고 했다.

왜? 어차피 인간은 갇혀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살수가 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벗어날래야 벗어날수가 없으니 니 마음대로 살아라 라는 것이다.
해볼 것 다 해보고 너 꿀리는대로 니 마음대로 해 보라는 것이다. 과연 니 마음대로 되는게  단 한 개라도 있는가 보라는 것이다. 과연 단 하나라도 있는지?

(눅 12:27, 개역)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아무리 달음박질 해 봐도 죽음이라는 손바닥에서 한치도 벗어난적이 없이
제자리에서 몸부림치며 제자리 뛰기만 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선악이란 적당한 거리두기를 한다손 치더라도 제자리 뛰기이다.
적당한 거리를 둔다는 것은 서로가 간섭하기 싫은 차이두기이다.
너는 너 대로 가고 나는 나 대로 간다 이다.

그러나 성령이 덮치면 그 적당한 거리 두기인 차이두기가
도리어 십자가에서 그 정과 욕심을 못박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거리두기인 차이두기의 차이점이다.
결국 인간의 차이두기 곧 거룩이라는 지혜의 끝은
인간으로 회귀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의 차이두기는 곧 거룩은
창세전에 기록한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회귀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이 사랑은 시기와 질투 덩어리이다. 일체 양보 없다.
창세전의 피 외에는 그 어떤 다른 사랑이 없기 때문이요
모조리 거짓사랑으로 취급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피는 차이두기를 실행한다.
이것이 유일한 거룩이다.

그런데 이것을 모방하는 것이 인간의 지혜요 인간의 신앙이다.
자기들도 사랑이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차이두기 거리두기인데
그것이 바로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는 짖꺼리이다.

(눅 14:12, 개역)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눅 14:13, 개역)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눅 14:14, 개역)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갚을수 없도록 하는 이웃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원수까지 용서한 예수님 뿐이다.
영원히 빚지게 만들어 버린다. 그것이 자유이다. 영원한 용서의 노예이다.

인간의 이웃사랑은 도리어 그 사람을 옭아메어 영원히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그 에너지로 그 자본으로 기독교라는 권력 바벨탑을 쌓고. 교회를 쌓고, 성전을 쌓아서 우상건립에 미쳐버린 피라미드를 제작하는데 자아를 건립하는 느부갓네살이라는 짐승과 같다.

그 우상조각을 더 높게 더 크게 더 깊게 세움으로써 차이두기를 하는데 환장해 있다.
그들이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음이라는 욕망이 또 살고자 하는 욕망이 덮쳤기 때문에
벗어날 길이 없다. 무조건 이유없이 원인없이 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그들의 거룩이다. 곧 지혜다.

이 배경을 깔고서 그 지혜를 꺽어버리는 것이
참 지혜인 어리석다는 십자가의 지혜이다.


(마 5:43, 개역)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4, 개역)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5, 개역)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 5:46, 개역)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7, 개역)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눅 6:25,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눅 6:26, 개역)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눅 6:27, 개역)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눅 6:28, 개역)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 6:29, 개역)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눅 6:30, 개역)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눅 6:31, 개역)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눅 6:32, 개역)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눅 6:33, 개역)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눅 6:34, 개역)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눅 6:35, 개역)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그래서 이 말씀은 지키라고 행하라고 한 것이 아니다. 무자아라는 불가능성에 도전하라는 뜻이 아니다.

어차피 무자아를 또는 이웃사랑을 실천해 본든 실천했다는 언표를 남기기 위해
남에게 말하기 위해서 남겨두고 저장하고 기록하는 순간
그 순간 자아를 쳐다보게 되니
무자아가 아니라 더더욱 생생하게 이전보다 더욱더 또렷하게 남아있는 자아로 회귀하게 된다.

이것은 어쩔수 없으니 가책할 필요도 없다.

다만 배치를 무조건 반대로 두면 된다. 이것이 바로 거리두기 차이두기인 거룩이다.
예수님만이 원수를 사랑한다.
원수의 자리에 우리는 놓일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다.
이 성령을 성령운동을 펼치는 성화운동을 펼치는 성화론자들이 제일 무시한다. 안보인다는 이유이다. 자아는 생생하게 보이니까 말이다. 자아 인간은 무시하지 말라꼬 생떼를 쓴다.

이 불가능한 원수사랑을 예수님만이 하셨구나
그래서 대상의 위치를 바꾸어야 한다.
항상 우리는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자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성령이 그렇게 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웃사랑을 이루시는 대상이 된다.
대상물이 까불 까불 까불이가 되어도 대상물일 뿐이다.
타인을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몇 번 용서할까요? 7번?
그래서 대상으로 삼겠다는 그 사고방식을 전복시킨다.
니가 용서의 대상이란다. 몇 번씩이나?
70에 7번 이 이레는 누가 죽으면서까지 넌 용서 받아야 된다는 개무시이다.

아니 내가 뭐 그리 잘못이 크길래? 아무 죄도 없는 자가 죽어야만 합니까?
제물이 되어서까지 죽어야 제가 용서 받을 정도로 그 정도로 제가 악합니까?
그래 악하다.
그래서 넌 이 죽어야할 제물보다도 못한 놈이야?

꼬기오 꼬끼오 꼬끼오

아 그렇군요. 이 제물의 시체를 늘 어깨에 매고 살아야 하군요.
그래 너는 평생을 피 범벅이 되어야 할 정도로 악한 놈이야. 마귀야. 죄인 중의 괴수야.
사도바울은 자신이 괴물 괴수 짐승임을 십자가가 밝히 보임으로써 비로소 알게 된다. 그리고 늘 이 외침은 그를 따라다니면서 피로써 보호해 준다. 그 피가 이렇게 외치면서 보호 곧 구원해 준다. 너는 죄인 중의 괴수야 라고. 자기 고백으로 인한 차이두기가 아니라, 성령의 외침이다.

두 점이 찍힌 성령의 옷이다. 죄인 중의 괴수 복이자 동시에 피 옷 긍휼의 옷이다.
이것을 중첩시켜 디자인해 옷을 만들면 그리스도의 옷인데
그냥 죄수복이 아닌 사형수 죄수 복에 빨간 피가 합격이라는 특별사면 용서라고 찍힌 옷이다.
이것을 차이내기 곧 거룩이 덮쳤다고 한다. 꼭 마귀 보는 앞에서 그 옷의 가치를 돋보이게 한다. 모세가 주인공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지팡이가 주인공이였듯이

그런데 이 차이두기가
역으로 차이두기를 끌어들인다.

성령이 아닌 인간의 신앙운동으로 차이두기를 하는 놈들을 끌어들인다.
제대로 걸려든 것이다. 이것이 집단화 된 것이 거룩전쟁이다.

이런 인간의 지혜와 십자가의 지혜는 끝장날 판국을 향해서 영원히 갈라지기 위해 치닫고 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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