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냐 교리냐] 

십자가마을 여름 수련회(7. 29 ~ 31. 가야산 관광호텔)에 참가를 희망하시는 분들은 해당 지역 담당자에게 7월 20일까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서울, 경기 지역: 이미아 선생 (010-9998-4171)
부산, 경남 지역: 이성희 집사 (010-8501-9180)
대구, 경북 지역: 이상규 집사 (010-2685-8211)
광주, 전라 지역: 김을수 집사 (010-2627-7800)
대전, 충청 지역: 김종인 권사 (010-8808-7111)
울산 지역: 김병만 집사 (010-4379-1471)
그외 지역: 서경수 목사 (010-2962-7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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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여름 십자가 마을 수련회 교재 ]

천국 가기 

-  복음이냐 교리냐 -                    

주제 말씀: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Ⅰ 서론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십자군을 독려하기 위해서 클레르몽 공의회(서기 1095년 11월)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한다. 

1. 십자군에 참가하는 자에게는 완전한 면죄가 주어진다.
2. 질병 등 불가피한 이유로 참가하기 힘든 자는 다른 사람의 참가에 필요한 비용, 즉 의복이나 무기를 구할 돈을 헌금할 것.
3. 동산과 부동산을 불문하고 참전자가 남기고 가는 자산은 로마 교황이 보증하고 주교와 사제가 책임지고 감시해서 귀국할 때까지 보전한다.
4. 십자군 참가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산을 팔아야 하는 경우, 또는 그 자산을 담보로 빚을 내는 경우는, 정당한 값을 받을 수 있도록 교황이 보증하고 주교와 사제가 책임지고 감시한다.
5. 십자군에 참가하기를 원하는 자는 먼저 자기가 속한 교구의 사제에게 신청하고 허가를 받은 후, 십자가에 서약하고 나서야 출발할 수 있다.
6. 십자가에 서약한 후에도 출발하지 않거나, 혹은 출발했어도 도중에 일찌감치 돌아와 버리는 자는 곧바로 파문에 처한다.

- 『십자가 이야기 Ⅰ』 시오노 나나미 저  문학동네(파주: 2011) pp 31-32. -

이 주장은 지금도 활동하는 천국과는 상관없으며 단지 교리적으로 하자 없다고 자부하고 나온 발언이다. 즉 교리로서는 잘못이 없어도 천국과는 거리가 먼 경우를 교회사는 계속 뱉어내고 있다. 어째서 교회역사가 복음과는 상관없어도 교리에 저촉이 안 되면 이단이 아니라고 우길 수가 있는가? 그것은 교리(敎理)라는 것이 구성해낸 그 바탕이 ‘권력화 된 단체’로서 활동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천국이라는 곳이 완벽하게 죄가 전혀 없는 자만 집결한다는 소식을 접한 자들이 이 이론에 부합하기 위해 지상에서 현실적으로 무슨 노력을 해왔던가? 스스로 ‘하나님의 의(義)’가 되기 위해 어떤 실천방안을 강구해야만 했던가? 성직자는 성직자로서, 평신도는 평신도로서, 주부는 주부로서 각자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어떠한 삶의 자세를 견지해야만 하느냐고 믿어왔던가? 이런 실천방안들이 집대성된 것이 오늘날 교회 내의 역사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분류작업은 고려하지 못했다. 분류 기준도 알지도 못했다. 그저 세상에서 세력과 권세 키우기에 급급한 것이다. 이는 교회가, 교회 존립 그 자체가 목적으로 변질되어 있는 바다. 마치 일반 회사가 회사 존립 그 자체가 사업 목적인 것과 같은 발상으로 그동안 버텨왔다. 그런데 이런 교회 존립이 곧 천국으로부터 배제의 대표적 표상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반(反)-천국의 대항마로 구체화된 것이 교회다. 구약에서 ‘멸망 받을 이스라엘’과 같은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멸망의 요인을 품고 존립한다. 그 내부에서 실시되는 행정들과 사도 바울의 복음에서 외치는 바는 늘 정반대로 부딪치고 있다. 소위 ‘현실과 이론’의 차이에서 빚는 갈등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이란, ‘천국 가고자 하는 대중들의 열망의 묶음’을 말하고, 여기서 말하는 이론이란 ‘사도 바울이 외치는 복음을 말한다.  

이론은 듣고서는 곧장 잊어버린다. 실익이 못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손에 쥘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원한다. 세례증이라든지, 머리 위에 뿌려진 차가운 세례수에 대한 느낌이라든지, 입 안을 잠시 고였다고 목구멍으로 금세 사라진 포도즙의 새콤함이 자아의 천국 확정됨과 관련 있기를 원한다. 게다가 성직자의 특별한 복장과 교회 1년 행사 스케줄과 교회 건축물이 품고 있는 서구 중세풍의 그림이나 디자인들이 자신의 ‘천국 가기’를 도와주는 고귀한 분위기임을 감히 부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미 다른 세계에 진입된 자임이 교회의 그런 특이함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모두 속임수이고 진짜 천국활동을 훼방하는 유혹들이라면 과연 이것들을 부정할 용의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호기심으로 혹은 흥밋거리 삼아 이런 종교 쇼를 가끔씩 보고 싶어 하지는 않는가? 혹시 예상 밖의 행운을 안겨다 줄 것이라는 내심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동조하고 있지는 않는가?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면죄’보다 교회라는 인간들의 집결체에서 제공하는 ‘면죄 방식’이 훨씬 대중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면 이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정면으로 모독하는 태도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대중을 선동하시는 분이 아니라 쉬지 않고 분류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설쳤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지상에서 십자가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셔야 했다. 이것이 분류 작업의 유일무이한 기준이라면 인간들의 구원 염원 자체가 자신을 지옥으로 데려하는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는 중이다.

‘구원을 가로 막으시는 하나님’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서 표현해도 같은 말이다. “너희들이 영으로 시작해서 육으로 끝내려고 하는가?”(갈 3:3)


 Ⅱ  본론

1. 교리의 내부 짜임새
인간들이 익히 아는 신 관념(=종교성)과 성경의 내용을 연결 짓기 위해서 이미 인간 정신계를 장식하고 있는 용어들이 동원되어 교리라는 것을 편성하게 된다. ‘신(神)’을 언어적으로 규정시켜 놓게 되면 어떤 효과를 갖게 되는데 그것은 종교화된 정치적 집단을 만들 수가 있다. 신의 보호가 ‘교회’ 형식으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신이란 사람들의 정신을 하나로 묶는 궁극적인 방안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다 안다. 옛날 이스라엘이 그런 식으로 그럭저럭 버티다가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매 맞고 멸망당했다. 신은 곧 ‘하나(1)’다. 이 양보할 수 없는 하나(1)를 돋아내기 위해 둘과 셋의 아이디어는 경유로서만 역할을 하고서는 곧장 철회되어야 했는데 이 논리적 작업을 재료로써 성경구절들이 동원된다. 어쨌든 하나(1)를 살리기 위한 둘(2)과 셋(3) 개념을 도입할 때, 필연적 1,2,3을 넘어서는 초월적 하나(1)의식을 불러낼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되면 초월되기 이전의 하나(1)와 초월된 이후의 하나(1)의 관계가 둘(2)이 있어야 성립되기에 이 둘(2)을 철회시키고 하나(1)로 돌려놓는 작업에 있어 합당한 논리를 위해 새로운 단어를 도입하게 되는데 이 단어 안에는 모든 것을 하나(1)의 자리로 되돌려놓기 위해 잠재되어 있는 의미가 함유되어 있다고 우길 수밖에 없다. 하나(1)로 모아져서 최종 정리되는 의식의 흐름은 이미 예수님께서도 지적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마 6:24) 이것저것 균형 잡아 안다고 해서 앎으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믿음’이다. 앎의 끝 대목에서는 앎의 능력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믿음의 영역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믿습니다. 일방적으로!” 이 주장을 달리 말해서 “나는 나의 믿음을 믿을 뿐입니다.”는 말이다.
  
교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교회만을 믿는다. 비록 여러 가지 사실을 경험하고 안다할지라도 최종적으로 믿는 것은 결국 교회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들의 존재 방식이 예수님의 말씀 활동과 충돌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아버지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예수’라는 용어가 실제로 살아계신 예수님의 현재적 작업을 대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교회가 스스로 교회답게 되기 위해 정리되어야 될 것과 인간들이 정리할 것도 없이 살아계셔서 지금도 일하시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만드시는 교회와의 차이점이 어떤 식으로 표출되는지 유념해야 했다. 인간들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죄인 됨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5세기 말엽,(AD 420-450) 교회는 다음과 같이 신에 관한 교리를 정리했다. 소위 ‘아다나시우스 신조’다.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무엇보다도 공교회의 신앙을 고수할 필요가 있다. 누구든지 이 신앙을 전적으로, 온전하게 보존하지 않는 자는 의심할 것 없이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이다.

공교회의 신앙은 바로 이것이니 곧 우리는 삼위일체 안에 한 하나님과 일체 안에 삼위를 경배한다. 격위들을 혼동하지 않고, 본질을 나누지도 않는다. 이는 성부의 한 격위가 계시고, 성자의 다른 격위가 계시며, 성령의 또 다른 격위가 계신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이 모두 하나이다. 그 영광이 동등이며 그 존귀가 함께 영원하다.

성부가 바로 이같으며, 성자가 이와 같고, 성령이 또한 이와 같다. 성부가 지음 받지 아니했고, 성자가 지음 받지 아니했고, 성령이 또한 지음 받지 아니했다. 성부가 불가형언이며, 성자가 불가형언이며, 성령이 불가형언이다. 성부가 영원하며, 성자가 영원하며, 성령이 또한 영원하다. 그러나 세 영원들이 아니고 한 영원이다. 이와 같이 세 불가형언들이 아니고, 세  비피조들이 아니다. 오직 하나의 비피조이며, 하나의 불가형언이다. 이와 같이 성부가 전능하시며, 성령이 또한 전능하시다. 그러나 세 전능들이 아니고 오직 하나의 전능이다. 이와 같이 성부가 하나님이시고, 성자가 하나님이시고, 성령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세 하나님들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시다. 이와 같이 성부가 주님이시고, 성령이 또한 주님이시다. 그러나 세 주님들이 아니고, 한 주님이시다.

이는 우리가 기독교적인 참된 신앙 양심으로 이같이 믿지 않을 수 없다. 각 격위가 친히 하나님이시며 또한 주님이시다. 보편교회 공교리가 다음과 같이 말함을 금한다. ‘삼신들이 계시거나 세 주님들이 계신다는 것.’

성부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조성되거나 지음 받지 아니했고, 나지 아니하셨다. 성자는 조성되지 않고 지음 받지 아니하셨고, 오직 성부에게서 나셨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지음 받았거나 나지 아니하셨고, 오직 나오신다. 그러므로 한 아버지가 계시고, 세 아버지들이 아니다. 한 아들이고, 세 아들들이 아니며, 한 성령이고 세 성령들이 아니다. 이 삼위 안에 누구도 앞서지 않고 뒤지지도 않는다. 그 누구도 보다 크거나 낮은 분이 안 계신다. 그러나 전 삼위가 함께 영원하며, 같이 동등이다. 따라서 이미 고백한 것 같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고백한다. 삼위 안의 일체, 일체 안의 삼위께서 경배를 받을지니라.”


2. 아래 그림은 사도 바울의 복음을 교회가 자체적인 보존을 위해 복음을 인위적으로 변경시켜야만 했던 그 현황을 보여준다.

‘패러다임paradigm’이란, 인식을 만드는 그 틀 자체를 의미한다. 인간들의 인식이란 주변 상황에 대해서 자아라는 현재 몸의 가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바깥 세계를 늘 재구성하기 마련인데 자기 존재에 도움 되고 변명하는 식으로 나타난다. 인간들은 항상 이런 시도를 긍정하므로 자신이 결국 신(神)처럼 살아야 될 절대적 존재임을 확인하고 외부로 발현하려 든다.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나는 신이다”(겔 28:2)


- 『그리스도교』   한스 큉 저   분도출판사(왜관:2010) 표지그림 -


3. 바울의 복음

(1) 우주론

심판을 보여 주기 위해서 우주는 만들어졌다. 우주는 멸망하기 위해서 존재해야 했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히 1:10-12)

이 심판을 통해 주님의 주되심이 나타난다. 즉 주되심을 위해 반드시 심판행위가 실시된다는 말이고 그 실시의 대상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세계다. 그래서 피조 세계 속에는 주님에 대한 ‘심판 요청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 필히 자체적으로도 심판이 유발되어야 한다.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창 4:10-11)

쉽게 말해서, 땅은 주님으로부터 심판받기 위해 요동치는 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땅 속 마그마가 들끓는 것처럼. 그것도 매일같이!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시 7:11)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그 요동의 원인을 ‘인간(아담)이 지은 죄’로 보고 있다. 즉 인간의 행위는 우주의 운명과 구조적으로 얽혀있다는 말이다. 그것도 죄로써. (이점에서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은 실패한다. 과학자들은 자신의 과학적 탐구성이 본원적 죄에서 나온 것임을 모른다) 그래서 성도는 오직 ‘나타난 복음’을 통해서 자기 죄를 알고 그 어떤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

여기서 ‘죄’란 자기만의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죄를 의미한다. 죄는 사적인 것으로 끊어낼 수 없다. 인간은 홀로 죄 지을 수가 없다. 모든 죄는 집단 속에서 생성되어 개인적으로 배당받는다. 모든 사적인 죄는 집단 죄로 모아져야 하고 이로써 전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구조를 미리 보여준 것이 바로 구약 이스라엘의 국가 시스템이다. 이스라엘이 지나가는 그 주변에 벌어지는 자연 세계의 변동 상황은 ‘주님을 위한 우주’임을 미리 보여주는 장치이다. (출 4장, 7장-12장의 10가지 재앙들/계 6장, 8장, 16장)

(2) 인간론

죽음으로 시작되는 것이 인간론이다. 즉 죽음의 의의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은 만들어졌다. “정녕 죽으리라”(창 2:17) 인간은 죽기 위해서 나타나야 했다. 달리 표현해서 ‘죽음의 열매가 곧 인간이다.’ 죽음은 꼭 인간의 모습으로 인격화되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죄의 배후 인물이 밝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죄가 인격화되지 아니하면 주님의 인격화가 전 우주에 새겨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영과 영의 대결에서 승리하신 인격에 대한 기념물로 영원한 하나님의 거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악마는 인간을 살리려고 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죽이려고 하신다. 살리려 하는 자와 죽이려 하는 자의 전쟁터로서 인류의 역사가 마련되었고 거기서 죽은 자가 산 자를 이긴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눅 24:5) 부활을 통해서 비로소 모든 인간은 산 자 속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 속에 포함된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이 실은 죽은 자인 것이다.(고후 5:14)

죽은 자이면서 산 자로 행세했다는 것은 악마의 충복이면서도 실은 절대적인 신적 존재로 행세하며 산다는 말이다. 유일하게 산 자는 예수님뿐이다. 이 산 자의 ‘살려주심’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새로운 ‘삶’을 누릴 수 없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인간은 마음껏 살려고 하는 몸부림을 평생 보여줌으로써 저주와 심판의 진수를 평생 경험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시 90:9-11)

인간의 몸은 새 세상과 옛 세상의 접경지점이다.

(3) 그리스도론

모든 이에게 걸림돌이 되는 존재로 나타나신 인간이다. 인간들의 모든 종교 행위나 해석에 대해서 역시 걸림돌이 되는 존재시다. 그리고 종교단체로부터 종교적인 판단을 받고 사형 당하신 분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알려면 그 최후의 취지로부터 거꾸로 의미를 끄집어내면서 추적해야 한다. 쉽게 말해서 인간들의 어떤 종교심이 예수님을 보고 살해의지를 갖지 아니하면 안 되게 했던가를 파악하는 것이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 통하는 논리 방식이다. 그것은 인간들이 벗어날 수 없는 올무, 즉 ‘자기 의(義)’이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3-4)

인간 속에서 발동이 되는 ‘자기 의’ 속성은 그리스도를 대하면서도 그 그리스도를 자신 속에 담겨있는 ‘자기 의’의 모델로 삼아 자신의 의(義)도 그리스도 의처럼 일치시키고자 노력하는 발작을 보이게 된다. 걸림돌을 어떻게든 제거시켜놓고 걸림돌이 제거된 상태에서 본격적으로 ‘예수 닮기’에 매진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자기 의(義)’의 본격적인 발현이다. 기어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 못하겠다는 것이다. 아니, 인간은 복종을 모른다. 단지 복종하는 척하면서 수시로 눈치를 보면서 자기만이 영원히 즐길 ‘나만의 의(義)’를 따로 장만하고자 한다.

‘예수 의(義) 따라잡기’는 교회사 내내 실시되어 왔다. 지금도 매주 진행된다. “우리 성직자들이 시킨 대로 하시면 여러분들도 예수처럼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신학을 배우십시오. 그래서 교회 없이는 구원도 없는 법입니다.”라고 대중들을 설득하면서 교회를 지탱해 왔다. 그렇게 되니 교인들은 자기 의를 버리기 위해서 교회에 온 것이 아니라 자기 값어치를 질적으로 증강시키기 위해서 온다. 그것도 경쟁적으로.

구원은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부어지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의(義)’ 생산을 위한 원료로 투입되어 갈아 뭉개진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자연스럽게 인간의 ‘자기 의(義)’도 갈아엎어진다. 죄인으로 더욱 드러나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 “죄가 더한 곳에 은혜도 더욱 더 넘치느니라”(롬 5:20)

사도 바울에게 있어 예수님의 현존은 ‘예수 안’으로 표현된다.1)1) 바울 친서에 “그리스도 안”은 56번, “주님 안”은 34번 나온다.  로마서 13번과 8번, 고린도전서에 13번과 9번, 고린도후서에 7번과 2번, 갈라디아서에 7번과 1번, 빌립보서에 10번과 9번, 데살로니가전서에 3번과 3번, 빌레몬서에 3번과 2번. ‘그분 안’에는 포함시키지 않은 숫자다. 

 ‘예수 안’에 들어 있지 않는  예수는 예수가 아니다. 이 말은 예수 안에는 인간들의 지혜와 노력으로 들어올 수가 없다는 말이요 더 나아가서 ‘예수 밖’에는 저주와 영원한 형벌만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이는 복음이란 ‘인간 안’과 대비를 시키는 방식으로만 전달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 안에서 밖으로 자유롭게 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다 인간 안에서 아우르게 되는 세계관이 형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세계관만을 그려내기 마련이다. 심지어 ‘인간 안’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과 악마마저 다 인간 안에 담겨서 표현된다. 이것이 현대판 우상이다. 바로 이점을 공략하는 것이 ‘예수 안’ 곧 ‘십자가 안’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4) 구원론

사도 바울은 율법을 개입시켜서 설명한다. 율법 도입으로 인하여 구약 이스라엘의 구조가 자연적으로 복음 안에 조성된다. 즉 이스라엘이 율법을 어떤 식으로 오해했으며 결국 어떤 식으로 율법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는가를 보라는 것이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롬 2:23-25)

즉 ‘율법 지키는 자’가 율법으로 인하여 ‘율법을 못 지키는 자’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구약 이스라엘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율법이 오기 전에는 모든 인간들은 마치 본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정도로 단단히 신앙적 준비가 되었다고 장담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 복음이 들어오게 되면, 도리어 화가 나서 십자가에서 눈 돌이고 “우리에게 율법을 다오. 그것으로 우리가 의인이 되겠다.”고 외치는 본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모든 선교단체, 모든 교회가 다 이런 식의 학습 교재를 만들어 버틴다.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갈 2:18-19)

법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인간을 향하여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도 율법에 대해서는 저주받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즉 저주를 피해서 받는 구원은 없다. 말씀으로 인한 저주가 늘 유발되는 그 현장에서 ‘율법 없이 되는 구원’이 늘 이루어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5) 성령론

영은 선물이다. 긍휼을 내리신다는 증거로 주시는 것이기에 은혜로만 받아지게 되어 있다. 은혜가 아니라 삯으로 여겨진다면 성령 안 받은 것이다. 따라서 성령은 기적인 능력 소지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인간 행함에 대해 ‘부정’으로 찾아오시는 ‘어떤 분’으로 그 실체가 받아들여지게 된다. 즉 “누구십니까? 나의 행함의 가치를 근원적으로 부정하시는 당신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기계적인 능력 소지가 아니라면 그 관계는 ‘사랑’이다. 사랑하는 자 앞에서는 자기 능력을 자랑하거나 과시하지 않는 법이다. 왜냐하면 사랑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성령의 은사, 곧 선물로 받은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존재 집착이다. 성령님이 가져다주는 선물은 종합선물이다. 그 안에 성도의 운명 전부가 담겨 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따라서 성령님은 늘 새 것으로서의 교체를 촉구하신다. 탄식하시면서.(롬 8:26)

이 탄식이 사랑이다. 속에서 탄식 소리 들어가면서 나오는 성도의 삶이 곧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삶이다.(갈 5:22-24) 사랑받았으면 더 이상 다른 것은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육체를 위한 삶은 썩어질 것만 얻게 된다.(갈 6:8) 선교나 목회나 구제 행위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들이 사랑이 아닌 것이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사랑은 직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근거를 둔 ‘정죄함이 없음’으로 고백된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Ⅲ  결론

교회란, 인간이 붙잡을 수 없는 식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관리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교회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있는 식으로 늘 거기 있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성도’의 교회됨을 늘 새롭게 지정하는 식으로 나타난다. 이 말은 성도가 교회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으로부터 늘 다루어진다는 말이다. 즉 늘 교회이기에 늘 교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늘 주님만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성도의 눈앞에서는 늘 교회만을 생각하는 유사성도들이 눈에 들어오고 어느새 그들에게 둘러싸여서 핍박을 받게 된다. 그들은 교회 일에 종사함을 통해서 형제 됨을 확인하자고 덤벼든다. 그러나 성령 받은 성도는 다음과 같이 외칠 수밖에 없다. “십자가 피 앞에서 자기 부인이 되는지를 통해서 합시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눅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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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1강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부터 끝 날까지 주께서 저희들과 함께 하셔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참 뜻이 어떤 뜻인지를 다들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사도행전 16장 16절부터 18절까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이 본문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이 말한 이야기가 아니고 귀신이 말한 이야기인데 귀신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17절에 나오죠.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구원’이라는 단어가 나와요. 귀신이 구원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구원을 다른 말로 하면, 구출이거든요. 탈출, 빼내가는 그런 건데 그러면 구원을 받아야 된다는 마귀 쪽에서 하는 말이에요. 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구출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살만한 세상이 못 된다는 이야기가 되죠. 살 수 없는, 살 필요도 없는, 살아서도 아무 가치 없는 세상에서 인간들은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 세상이 아무 가치 없다고 단정을 짓더라도 빼도 박도 못하는 형편에 놓여 있는 것이 또한 우리 인간들의 형편입니다. 유일하게 사도와 실라 이 사람들은 우리를 거뜬하게 더러운 세상, 악한 세상, 지옥 같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빼낼 수 있는 일을 하시는 분들이라는 말을 마귀가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이 말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느냐를 모르는 사람은 진정으로 구원 받은 자들을 만나 본 적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귀신이 신경 쓰고 있는 인물을 인간들은 전혀 그 가치를 모르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의 형편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구원받은 자들이 들어갈 새로운 세상을 인간들이 볼 수 있도록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오늘은 경북 경산 지방의 최고 기온이 38.2도였습니다. 얼마나 덥습니까? 이거는 올해만 그런 게 아니고 내년되면 또 그래요. 2014년도 또 그럴걸요. 점점 온난화되어서 더 심해질 건데. 그러면 이 세상이 못 살겠다, 덥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이 세상을 버리고 나가긴 어딜 나가요? 나갈 데가 있어야지 나가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과 실라와 귀신은 말합니다. ‘구출 작업’에 관해서 말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갈 곳도 모르는 상태에서 누구의 말만 듣고 따라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위태로운 일인가를 누구든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덥더라도, 춥더라도 익히 아는 이 세상에 죽치고 있는 게 안심되지 만약에 이 세상을 벗어나서 불확실한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으로 보입니다.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누가 본 사람이 있느냐 말이죠.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혹시나 상상의 유토피아를 상상으로 만들어낼 수 있지만 상상은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 현실은 아닌 거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그냥 이 세상에서 죽치고 살겠다는데 귀신이 앞장서서 소개하는 이 사도들은 사람을 빼내서 다른 세계에 집어넣는 작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랍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라고 언급하면서 말입니다. 귀신이 이야기한 거예요.

그렇다면 과연 구원이 되어서 따로 살게 되는 세상이 있다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걸까요, 아니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할까요? 우리가 이 귀신 이야기가 거북스럽게 들리는 이유는 우리는 좋든 싫든 이 세상의 문제에만 몰두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형편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좋든 싫든 간에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가 이것밖에 없는 겁니다.

강의를 귀신이 말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우리 인간들은 귀신만도 못한 영안을 갖고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귀신이 국회의원 됐다고 좋다고 하는 사람을 향하여 “당신 국회의원입니까?”라고 묻는 게 아니고, “당신도 탈출됐어요?” 이렇게 묻는다는 겁니다. 그 사람은 국회의원 되려고 얼마나 애썼습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공들인 것이 귀신의 안목에서 보면 전혀 무의미한 짓이 되는 겁니다. 목사의 교회일도 이와 같습니다. 당신네 교회가 얼마나 크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당신 구원되었습니까?”를 묻는 겁니다.

고르기아스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의 주장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확실한 것과 절대적인 것, 두 가지가 있답니다. 절대적이라는 것이 뭐냐 하며, ‘세상은 신이 창조했다.’ 절대적이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분명치 않아요. 절대적이지만 확실치 않는 게 있는 반면에

“2+3=5다.” 이것은 확실하죠. 하지만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2+3을 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됩니까? 이게 밥 먹여 줍니까? 배고픔을 해결해요? 사과장사하는 아줌마가 “사과 사세요!” 이렇게 해야 되는데 아줌마가 하는 말이, “2+3=5입니다. 2+3=5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과 팔립니까? 안 팔리죠. 분명히 2+3=5라는 게 사과 파는 아줌마가 틀렸다는 말은 아닌데 그게 별 도움이 안 되잖아요. 자기 생활에. 깨놓고 이야기해서 사람들은 진리 때문에 사는 게 아니고 밥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사는 거잖아요.

흔히 중학생들 늘 이야기하는 게 수학이 어려우니까 수학 안 해도 먹고 사는데 왜 이 수학을 해야 되느냐고 하지요. 부모님이나 선생님한테 하지요. 삼각함수가 무슨 도움이 됩니까. 도움 안 되거든요. 농사짓는데 삼각함수 동원해서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돈이 안 되는데 쓸데없는 걸 많이 배워야 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밥 먹여주면 배우겠는데 밥 먹여주는 것도 안 되는데 왜 그렇게 많이 배우느냐 이 말이죠.

심훈의 [상록수]나 이육사의 시 외워서 사과 하나라도 팔립니까? 그런데 고등학교 교과서에 그 시가 나온다 말이죠.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런 시 외워서 농사가 잘 되는 게 아닌데 그 시를 왜 외우는데. 그게 틀렸다는 말이 아니고 나한테 당장 이익이 없는데 왜 외우느냐. 머리 좋은 것 시합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뭔가 절대적이기도 하고 확실한 게 없을까? 확실히 계시면서 절대적인. 그걸 고르기아스는 ‘신’이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그걸 신이라고 이야기하든 뭘 하든 간에 그 주장은 귀신보다 더 못한 거예요. 귀신은 노골적으로 이 세상 접고 여기서 빠져나오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더라는 그걸 이야기하는데 이 사람들은 빠져나가지도 못하면서 신을 이야기한다고요. 신을 이야기하면 신이 사는 세상도 이야기해야 되잖아요. 그걸 천국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신이 있고 천국이 있기에 사람들은 그 세계마저 조작해 내어야 했답니다. 그럴싸하게.

노메니오소라는 철학자는, 이 세상의 신은 하나로 되지 않고 세 개가 된다고 했습니다. 삼(3)신. 하나는 천지를 만든 신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이 세상 자체가 만들어진 자체도 그 안에 신이 작용해야 되고, 그 다음에 보이지 신이 하나만 만드는 게 아니잖아요. 똑같은 사람 만드는 게 아니고, 공장에서는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요. 공장이 아니고 사람들에게는 얼굴 모습이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하나에서 여러 가지 나왔으니까 여러 가지 솜씨를 부리는 신이 있어야 돼요. 데미우르고스라 해서 중재자란 뜻인데.

그러니까 신이 창조하시고 편안하게 모시는 신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만들어진 세상 속에 우리의 신이 있어야 되고, 그 중간에 만들어진 신, 그래서 삼신이 있어줘야 그래야 세상은 모든 것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게 귀신 말 듣기 전에 세상 사람의 아이디어에요.

지금 강의하는 방향이 뭐냐 하면, 신앙이니, 성령이니, 성경용어 안 따져도 사람이 갖고 있는 머리로, 아이디어로 얼마든지 삼위일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거예요. 삼위일체도 만들어내고, 예수도 만들어내고, 성경도 만들어내고, 교회도 만들어내고. 이것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실력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제가 지금 언급해드리는 겁니다.

흔히 기독교에서 말하기를 천국은 믿음으로 간다는 거예요. 그 믿음을 아는 것으로 바뀌면 안 되겠습니까? 믿음으로 천국 간다 하게 되면 그 때부터 ‘믿고’ '아니 믿고‘가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 대 인간끼리 의사소통이 막히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을 ’아는 것‘으로 바뀌게 되면 교육 정도에 따라 ’더 잘 아는 것‘, 곧 ’더 잘 믿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겁니다.

“네가 믿어?”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너, 여기에 대해서 알아?” “내가 거기에 대해서 공부를 적게 했어.” “그러면 공부를 하면 알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믿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뭔가 아는 것으로 가게 된다면 구태여 믿음으로 할 필요 없이 실력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고, 없는 사람도 공부만 좀, 노력만 하고 시간만 주어지게 되면 실력 없는데서 있는 데로 발전하게 되니까 구태여 믿음으로 구원받는 자체가 더 이상 필요치 않는 상태에 돌입되게 되면 얼마나 편하냐 말이죠. 또한 전에 교육을 많이 받아 충분히 알고 있는 상태라면 구태여 새삼스럽게 ‘믿음 여부’를 안 따져도 상관없이 되는 편리함이 있습니다.

중장년 되시는 여러분들이 만약에 중학교 때 배웠던 물리책에 나오는 내용이라든지, 지리책에 나오는 도시이름이나 나라이름 기억합니까? 잘 기억 못하죠. 다 각자 전문직에 종사하고 농사짓고, 사업한다고 잊어버렸단 말이죠.. 그런데 중학생이 하는 말이, “아버지, 현재 올림픽 열리는 나라의 수도이름을 압니까?” “몰라.” “아버지는 믿음이 없어.” “얘야 그건 믿음이 없는 게 아니고 잠간 잊어버린 거야.” “아니야. 아버지는 믿음이 없어.” “아니야.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게 아니고 기억이 안 난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야.”

그래서 기억이 안 나는 것은 신문 보면 런던에서 하고 있네. 영국의 수도는 런던, 그러니까 다시 알 수 있는 기회만 부여받으면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 논리입니까.

교재, 3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에 봅시다. [ 5세기 말엽 교회는 다음과 같이 신에 관한 교리를 정리했다. 소위 ‘아타나시우스신조’다. ] 여기 초반에 서론부분을 봅시다. [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무엇보다도 공교회의 신앙을 고수할 필요가 있다. 누구든지 이 신앙을 전적으로, 온전하게 보존하지 않는 자는 의심할 것 없이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이다.]

이 문장은 곧 지옥에 갈 거냐, 말 거냐를 결정하는 것이 몇 개의 문장에 대한 동의로 결정지을 수 있다는 것이 서기 5세기 말엽에 로마교회 전체가 이구동성으로 동의를 한 일입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닙니까?

극장에 갈 때 여자직원이 앞에서 표를 받지요. 표 받으면 입장시켜주고 표 안 받으면 입장 안 시키잖아요. 그와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나온 직원이 나와서 묻기를 방금 보았던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보여주면서 “동의하시고 인정하십니까?”라고 묻고 동의한다면 천국가고, 동의 못하면 지옥 가는 겁니까? 정말 구원이 이런 식으로 되는 겁니까? 악마도 귀신도 이 방식에 동의해서 사도 바울을 향하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한다.”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이 신조를 외울 때 더듬거리면 구원도 불확실해지는 겁니까? 과연 그런 겁니까?

 [공교회의 신앙은 바로 이것이니 곧 우리는 삼위일체 안에 한 하나님과 일체 안에 삼위를 경배한다. 격위들을 혼동하지 않고, 본질을 나누지도 않는다. 이는 성부의 한 격위가 계시고, 성자의 다른 격위가 계시며, 성령의 또 다른 격위가 계신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이 모두 하나이다. 그 영광이 동등이며 그 존귀가 함께 영원하다.]라는 글자를 외우시면 구원받습니다. 그 당시 공교회에서.

여러분 과연 천국, 지옥 보내는 그런 문장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5세기경에 이것이 모든 교회라면 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실시를 했고 이 기준에 의해서 심사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모든 교회가 이렇게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어느 누구라도 “이건 아니다!”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 제가 나서고 있는 겁니다.

아는 것은 반복되는 심화학습으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원숭이라도 한 문장 할 때마다 바나나 하나 주면 15년 만에 다 외워요. 아이큐 40밖에 안 되는 원숭이라도 다 외웁니다. 군에서 기합을 받으면 사병규칙 열 가지도 일주일 만에 다 외워요. 그렇게 외우기 싫어하는 농사짓다 온 사람도 다 외우게 돼있습니다. 군에선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식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목사님 그걸 외운다는 게 아니고 그 내용을 알고 고백해야 합격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겠지요. 여러분 인간이 ‘안다’는 것은 너무나도 주관적입니다. 내가 뭘 안다는 자체가 문제 있다는 것을 현대수학과 현대과학에서 밝혀냈습니다. 사실은 ‘내가 안다는 것’은 ‘나에게만 의미가 있다’라는 뜻입니다.

제 말은 ‘안다는 것’이 시대에 따라서 환경 따라서 그 시대에게만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과거의 의미가 오늘날까지 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옛날 조선시대 때 아는 것과 고려시대에 여진족이 쳐들어왔을 때 아는 것과 일본이 조선을 지배할 때 아는 것과 지금 아는 것이 다 다릅니다. 이순신 장군이 뭘 압니까? 이순신 장군이 삼위일체 압니까? 모르죠. 이순신 장군에게 삼위일체 이야기하면 그분이 압니까? 머리 좋으니까 외우기는 잘 외우겠는데 삼위일체가 뭔지 알겠어요? 신학자도 삼위일체가 뭔지 모른다니까요.

그러면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고백케 하거나 아니면 아예 입을 다물고 있거나 결과적으로 틀린 게 없습니다. 사도신경을 외운다, 주기도문을 외운다고 해도 그 의미와 ‘안다 것’은 본인들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에는 유령이 깔려있습니다. 그 유령은 한 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자아주체성을 수립할 때마다 그곳에 쏠려서 그 사람만이 은밀하게 간직하고 싶은 의미를 담는데 유용할 뿐입니다. 마치 금속 속의 자유전자의 이동은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자유전자’는 한 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언어라는 것은 한 곳에 의미가 박혀있는 것이 아니고 언어의 표현, 즉 기표에서 기표로 옮겨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가 있을 때 의미와 둘이 모였을 때 의미가 달라지고, 세 개 모이면 또 달라지고, 위치 바꿔도 또 달라지고, 모든 게 다 달라져요.

예를 들면, 남자라는 게 뭔 뜻입니까? 남자란 여자가 아닌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팻말을 붙이면 졸지에 ‘남자화장실’이 됩니다. 빨강색이 파랑색을 만나 횡단보도에 나타나게 되면 교통 신호체계가 됩니다. 즉 “건너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언어라 하는 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그 사람이 자기만 갖고 있는 의미를 남한테 떠벌이면서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단입니다. “나, 여기 있습니다.”라는 것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눈이 오네.”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내가 눈 오는 것이 기쁜 것처럼 내 말을 듣는 너도 나의 기쁨에 동참해다오”라는 뜻입니다. 곧 명령어가 되는 겁니다. 이 명령어의 기반에서 무슨 울림과 외침이 터져 나올까? 그것은 바로 영어로 “Help me!"입니다. ”날 도와 주오“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뭔가 말을 내뱉는다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네가 인정해주고 내가 뭘 요구하든지 너는 내 요구를 들어줄 책임이 있다고 외치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해서 모든 언어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거예요. “모든 것들아, 내가 원하는 바를 충족시켜다오!”라는 뜻입니다.

할머니가 손자를 돌보는데 갑자기 맞벌이 갔던 며느리가 들어왔다. “오늘 많이 덥지. 얼마나 더운데 애가 땀띠가 막 나려고 한다.” 이건 뭔 뜻일까요? “힘들어 못 키우겠다. 좀 데려가라.” 그런 뜻입니다. 언어에는 유령이 있어서 그 유령은 포착되지 않아요. 잡히지 않아요. 의미를 안다는 것은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뭐냐 하면, 이런 문장을 제출한 권력 체에 복종하면 네 목숨은 내가 유용성 있게 사용할 용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앞에서 없어져라!“는 명령 같은 겁니다.

이 세상에서 귀신은 탈출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과 실라가 하는 말은 사람들은 무슨 의미인 줄 몰라요. “저 사람들은 저런 식으로 밥 먹고 사는 구나”라고 여깁니다. 진정 탈출이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하다면 떠나야 할 기존의 세계와 도착해야 될 이 두 세계를 보여주고서는 “너희들 어느 나라 갈래?”라는 식으로 신이 제안해야 옳다는 것이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그 나라를 보여주지 않은 입장에서 뭔가 탈출하라 하니까 기껏 나온 아이디어가 이 세상에 천정만 튀다가 내려오는 거에 불과합니다. 바로 이처럼 천장만 튕기다가 도로 내려와서 이 땅에 거룩을 모토로 해서 정치적인 단체를 만든 것이 곧 교회입니다. 아무도 탈출한 적도 없으면서 저희끼리 탈출하려고 시도해보겠다고 그냥 모여든 곳이 교회입니다. 거기서 반복적으로 삼위일체를 비롯해서 온갖 교리를 배웁니다. 아타나시우스신앙교리를 배우고, ‘십자가 복음은 이런 것이다.’는 것도 배웁니다.

백날 배우면 뭐합니까? 자기 자신의 존재가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사는데 말입니다. 교회에서 식사당번 봉사하다가 누가 싫은 소리라도 하게 되면 그 다음에 교회에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배우면 뭐합니까? 십자가 알고, 언약을 알아도 가장 인식과 행동이 나오는 근본적인 바탕은 “날 도와줘요”입니다. 그저 위로받기 위해 교회를 찾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예수님 계시다’보다 더 진지하고 중요한 문제로 느끼면서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겁니다. 혼자 살려니까 외롭고 심심하니 교회에 나가서 정 나누고 재미있잖아요.

이러한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은 이게 오늘날만 그런 게 아니고 인류 역사를 통해 대대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신앙 선배가 아니라 교회 선배들이 작성한 ‘아타나시우스 신조’ 같은 것들과 비슷한 것을 오늘날 교회에서는 교단 자체적으로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교회입니다”가 통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자기 부인을 하겠습니까? 자기부인을 해서 얻을 수 있는 힘이 도로 자기 긍정을 세울 수 있다면 이 사람들은 자기 부인까지 마다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 자기 부인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목사가 신학교 세워서 학생들에게 바른 교육시켜 말씀을 바로 가르쳐서 앞으로 전 세계에서 바른 교회가 세우도록 계획을 잡고 일을 추진했건만 신학생이 한 명도 없게 되자 가정적으로 부인과 논쟁이 격해지면서 부모로부터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그것 자체로서 비-진리가 아닌 겁니다. 단 한 명의 신학생이 없더라도 진리는 여전히 진리이면 그만인 겁니다. 하지만 신학교 세우면서 은행에서 돈을 무리하게 빌린 것은 뭔가 노렸던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날 도와줘요”였습니다. 신학교에서 가르치겠다는 모든 교리와 말씀도 그 바탕에 ‘날 도와주세요’가 깔려 있다면, 다시 말해서 “날 도와주어야 돼”가 깔려있다면 그 목사는 그가 가르치는 말씀과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신학교를 세웠다 하지만 그 목사의 부인은 노골적으로 “헬프 미”를 외친 겁니다. 인간 자체가 자기 위주이기에 두 사람이 모였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되는 겁니다. 모든 신학과 철학에서 뭔가 빠져있어요. 하나님은 어떻고, 삼위일체는 어떻고, 주님은 어떻게 일하시고. 좋은 건 신학과 철학에서 다 담겨있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 때문에 피해 입은 피해자라는 이야기를 어느 누구도 한 사람이 없었어요. 아무도 그런 소리를 안 합니다. 신학을 하는 나로 인하여 하나님이 피해를 봤다는 소리를 신학자가 과연 하겠습니까? 내가 목사 노릇을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피해를 본다고 소리를 누가 감히 하겠습니까? 신학박사와 철학박사가 예수님 목 조르면서 얻어낸 학위라고 누가 감히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고백을 하지 않는 대신 그들은 삼위일체와 각가지 교리와 신조를 고백하는 것으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진짜 하나님은 이 세상에 피해보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피해자로 왔다는 말은, 피해자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가해자라도 등장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피해자가 등장하면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앞장 세워서 가해자를 추적하는 식으로 일하십니다. 결국 전체 아담, 모든 인간이 다 연루돼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추적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를 죽이는데 전부다 가담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 죽는데 제가 가해자입니다.”라고 고백한 사람은 구원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한 분이고 예수님 옆에 있던 강도도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십자가에 달리면서도 구원받지 못한 강도는, 끝까지 자신을 가해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라는 거예요. 엮여지지를 못했어요. 엮여지지 못한 상태에서는 오직 최후로 남는 심보는 “세상이여 나를 도와주오”입니다. 곧 “예수여, 당신이 진정 메시아라면 당장 이 십자가 위에서 나를 내려가도록 해다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구원자로 믿어줄게”라고 나오게 됩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교회사는 숱한 선배들을 행한 것들을 나열해보여주게 됩니다. 2000년 교회사에서 교회가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언어와 교리와 신앙고백들을 제작해서 사람들을 그 속으로 통과 시켰어요. 이것 외우면 통과, 못 외우면 탈락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학습,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그 문장을 만들어낸 그 주최 측의 권력에 고개 숙이고 복종하라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그 권력체가 외우라고 하는 것을 외우게 되면 “우리 모두는 이걸 고백했습니다. 이로서 우리들은 한 형제고 그리스도 몸의 지체입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소위 ‘교회 공동체’이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생각했던 공동체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그 나라와 의’입니다. 이 나라는 문장 외워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도리어 내가 그 어떤 몸부림을 쳐도 들어갈 수 없는 나라이며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셨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이 세상에서 분류된 모든 규격이나 교단들의 경계선들은 일체 인정받지 못합니다. 즉 우리 개개인에서 뭔가 떨어져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헬프 미”를 외치기 위해 달라붙은 그 언어와 단어들이 용납 받지 못하는 세계가 ‘그 나라와 그 의’입니다. 오직 예수님에게만 쏠리는 나라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귀신이 알려준 대로 바울과 실라는 오직 ‘그 나라와 그 의’를 외치는 자입니다. ‘ 그 나라와 그 의’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야 될 나라임을 전제로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 나라와 이 의’는 떨어져나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표 뒤에 풀처럼 뭔가 들어붙어있어 우리 힘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이 떨어지지 않는 죄를 떨어져 나가게 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 만들기’ 전략입니다.

죄인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 때는 개과천선하는 게 아닙니다. 이 사람이 반성하고 회개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죄인이 스스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여기는 것은 진정 죄를 아는 죄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죄인 되기 위해서는 자체적으로 죄가 떨어지는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그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 속으로 집어넣어야 합니다. 더 이상 “살려주세요”라는 소리를 못하게 말입니다. 살만큼 가치 있는 것은 본인이 아님을 확실히 하시는 겁니다.

만약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는 구원 하겠다”고 하신다면 사람들은 어느새 바리새인의 뒤를 따르게 됩니다. 자신을 죄인 만들기 위해 필히 인간은 그 작업을 제대로 수행하는 의인으로 자처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죄인 만들기’ 나설 만큼 의로운 자들은 구원받는다는 엉터리 원칙이 세워집니다. “교회에서 도 닦으라”라는 구호에 해당됩니다.

금식기도 일을 맞아서 바리새인들이, 유대인들이 죄인이다 할 때 예수님은 술 잡수러 가셨어요. 가시면서 하는 말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다”고 했거든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죄인입니다.”하면 주께서 받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곧 “나는 죄인이고 구원받고 싶어 하니까 헬프 미”를 외치는 게 됩니다.

사람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모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다 스스로 꾸며낸 주장입니다. 진정한 죄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야 지을 수도 있고 알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즉 은혜 없이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능력이란 기껏 현재 짓고 있는 죄를 되풀이 지을 수밖에 없는 수준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의 개입으로만 가능합니다. 십자가 능력이 개입되면 죄와 선의 판가름은 인간 스스로 내리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죄를 짓더라도 언제든지 의인 쪽으로 돌아설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놓고 짓는 죄는 참된 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죄는 결코 의로움으로 돌아설 수 없는 죄입니다.

예를 들면, “목사님, 제가 술 끊은 지 10년 됐지만 오늘 기분 나빠서 한 잔했습니다. 그래서 죄지었습니다.”라고 하는데 이건 죄지은 게 아니에요. 나는 술 안 먹을 수 있다는 걸 뻔히 아는 상태에서 술을 먹었다면 그것은 그 다음에 술 안 먹는 의로움도 가능하다는 소리 밖에 안 됩니다. 참된 죄는 나 스스로 죄를 다룰 수 없고 죄가 나를 다루고 있음에서 나온 죄를 말합니다.

진짜 죄짓는 것은, 내가 전혀 의인 될 여지가 없다는 것이 다가올 때 나타나는 죄입니다. 자식이 시험에 합격해서 기분 좋아서 속으로 웃으면서 “아니야 교만한 것은 죄야. 참아야 돼.” 하면서도 자기 기분 정리하는 것은 겸손도 아니고 자기를 상대로 장난치는 거예요.

진짜 죄짓는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는 전혀 구원받을 가망성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일방적으로 건져주지 아니하면 전혀 구원이 안 되는 상태, 그게 죄짓는 상태에요. 쉽게 말해서 보통 우리 일상이라고 보면 됩니다. 보통 일상적으로 살면 되는데 갑자기 회개하고 반성하고, “주여 죄인입니다.” 그것 죄 아니거든요. 그거는 괜히 폼재보는 거거든요.

죄냐, 아니냐는 우리가 판정할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이 판정할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판정을 내릴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는 죄인이면서 의인 행세했구나.” 판정을 내리시면 그것이 예수님이 완성 때 비로소 예수님에 의해서 발각당한 죄입니다. 발각시킬 뿐만 아니고 그 죄인은 주께서 100% 알아서 의인으로 바꿔서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천국에 들어가게 되면 그 사람은 면류관까지 주 앞에 바칩니다. “미쳤어, 미쳤어. 이런 것 왜 쓰고 있어.” 하면서 하는 말이, “주여, 제가 쓰는 것이 합당치 않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한다 이 말입니다.

디즈니 만화에 보면 있잖아요. 그냥 시커먼 쇠도끼가 있는데 산신령이 와서 손을 대니까 신비로운 음악이 들리면서 금으로 변하듯이 예수님께서 오시게 되면 전부다 의인으로 변하고 마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손 안 대면 지가 여기서 착한 일해야 되고, 번짐처럼 자꾸 번져나가야 돼요. 그 선의 영역을 넓히는데 상당히 공들여야 되고 애먹죠. 새로운 아이디어도 필요하고요.

이런 것을 바리새인 선배들, 교회 선배들이 다 해왔어요. 그래서 첫째 시간에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어떤 언어를 어떤 문장이나 삼위일체나 성경의 어떤 구절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구원 자체가 뭔지도 모르고 있는데 영적인 존재인 귀신은 알고 있다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 사람을 빼내가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이 과정을 이렇게 설교합니다. “어떻게 너희가 영으로 시작해서 육으로 끝나겠는가.”(갈 3:3)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오게 되고, 십자가를 앞장세우면 우리는 하나님 안목에서 죄가 무엇인지 비로소 드러나면서 이거는 반성이나 그런 여유도 없이 그냥 죄인이에요. 그 죄인은 어떤 죄인이냐 하면, 의인되기 위한 재료로서 일단 만들어진 죄인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이면 이것이 바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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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2강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교재 2페이지 밑에서 열째 줄을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면죄’보다 교회라는 인간들의 집결체에서 제공하는 ‘면죄방식’이 훨씬 대중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면 이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정면으로 모독하는 태도이다.] 사도바울의 면죄보다 죄를 용서해주는 방식에 사람들이 구미가 당기면서 어떤 감동을 받는다든지 호감이 간다면 이것은 사람들이 헛수고한 겁니다. 소용없는 짓을 한 거예요.

동방교회나 천주교에서 앞에다 성수를 축성이라 하죠. 뿌리는 것. 1톤 트럭 앞에도 뿌리고, 돼지 앞에도 뿌리고, 가게 문 앞에도 뿌리고. 아가씨들이 개업했다고 춤추면서 들어오라고 하는데 신부가 와서 뿌리고. 귀신 나가라는 말이거든요.

여러분, 귀신은 하나님이 필요해서 보낸 분들입니다. 그걸 나가라 하면 어떻게 돼요. 사람들은 자기 좋은 것만 골라서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아니면 말고. 왜 그래요. 오늘 낮에도 그런 설교했지만 지금 메시아는 오디션 봐야 돼요. 마음에 드는 메시아가 나중에 우승하고 차 한 대 타고. 일주일마다 한 사람씩 떨어뜨리고. 이런 판국이에요.

면죄방식을 왜 자꾸 집어넣느냐 이 말입니다. 사람들이 면죄는 모르고 뭐는 눈에 확 들어옵니다. 그것은 용서받을 수 있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이 소문에 소문이 나서 단골이 되어 교회가 이뤄지고 권력단체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면죄 방식을 빼봅시다. 면죄방식 없는 하나님의 사죄 방식, 용서 방식 없는 용서를 해버립시다. 그러면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 붙어있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곧 교회가 제시하는 사죄 방식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AD 500년경부터 면죄 방식이 ‘전례(典禮)’라는 이름으로 도입되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세너는 그리스식 ‘마가 전례’와 ‘콥트-에디오피아 전례’가 도입됩니다. 안디옥에서는 ‘야고보 전혜’와 ‘요한 크리스토무스 전례’가 도입되고,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비진틴 전례’와 ‘아르메니아 전례’가 교회에서 사용되고, 로마에서는 ‘로마 전례’가 보급됩니다. 그런데 이 전례라는 사죄 방식이 구약에서 그 아이디어를 차용했습니다.

성경적으로 봐서 구약의 모든 내용은 이미 십자가 안에 다 포함되어있습니다. 구약을 한약재라 합시다. 이 좋은 한약재를 다리면서 인삼도 넣고, 당귀도 넣고 짜니까 십자가 피가 나왔잖아요. 즉 십자가 사건 안에 구약의 모든 의미가 그 안에 다 담겨있는 거예요.

면죄, 속죄하는 능력이 어디서 나옵니까? 십자가에서 짠 피에서만 나와요. 다른 건 어설퍼서 안 돼요. 소 잡고, 양 잡고 해봐야 그건 어설퍼서 면죄 안 돼요. 제사장 복장 걸치고 선무당처럼 날뛰어봐야 안 돼요. 오직 예수님의 피 안에서 되는데 그걸 마지막 언약 완성, 새 언약이라 해서 언약으로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은 없다고 해서 끝난 문제란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면죄방식에 관심 있다는 그것을 포착해서 교회를 구약의 형식으로 인테리어를 다 바꾸었어요. 구약 인테리어로. 제사장도 제사장 복장을, 정통이라고 우기는 동방교회는 성직자들이 수염까지 기릅니다. 키에프 공국이라 해서 현재 러시아 되기 전의 나링빈다. 키에프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입니다. 모스크바로 옮긴 것이 1300년경이거든요.

그렇게 옮기고 난 뒤에 로마 가톨릭에서 파견한 사절단 목 쳐서 죽이고 우리 러시아의 종교는 러시아가 우두머리라 해서 따로 러시아 슬라브 종교 만들어서 남쪽으로 세력을 넓혔습니다. 유고슬라비아부터 해서 알바니아, 체코슬로바키아, 쭉 내려오면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그 밑에 가면 마케도니아, 등등으로 말입니다.

이러한 영토 전쟁에서 교리, 종교라는 것이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어떤 민족이나 집단을 단체로 몽땅 가입시키는 방법이 된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만약에 지금 북한에 선교한다면 개인을 선교할 필요 없어요. 집단으로 선교하면 됩니다. 즉 최고 지도자가 예수 믿으면 북한은 전부 기독교 교인들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민족이 집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종교 뒤에는 국가권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국가교회’라 합니다. ‘국가교회’와 ‘교회국가’는 서로 차이가 납니다. 교황이 하나의 대통령이 되어서 황제가 되어서 지배하는 그런 교회를 교회국가라 합니다. 국가교회는 아예 나라 전체가 교회로 운영되는 것을 국가교회라 합니다. 러시아 같은 경우에 국가교회입니다. 폴란드, 헝가리 밑에 있는 이슬람교 나라 다 마찬가지에요. 터키도 마찬가지고. 사우디아라비아 전부다 국가이슬람교가 되겠죠.

사람이 자기 구원을 위해서 종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권력적 환경이 강제로 개인을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그 종교권에 운명이 맡겨지게 됩니다. 광고에 보면 피로가 짐이 되어서 어깨 위에 있는 것 본 적 있지요.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가 무서운 게 아니고 예수 믿는 대통령이 무서운 거예요. 예수가 무서운 게 아니고 회사 취직하면 예수 믿는 사장님, 회장님이 무서운 거예요. 회장님 따라서 종교가 바뀌는 거예요. 만약에 대통령이 소망교회 가면 소망교회로 교회 바꿔야 출세하듯이 말입니다.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당회장 목사가 무서운 법입니다. 

사람은 혼자 산다고 하지만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겁주고 지배하는 세력에 묶여서 삽니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신체적인 안정과 생계의 보장을 위하여 사람들은 자기를 지배할 세력에 속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그렇게 길들여져 있어요. 불교 집안에서 교회 간다? 이것은 자칫하면 호적 파는 일이 생깁니다. 기독교 집안의 아이로 태어나는 모태신앙을 갖고 어릴 때부터 유아세례 받아서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는 것으로 신앙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어깨 위에 짊어진 무거운 짐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무게로 짓누르고 있는 짐입니다. 

아버지, 엄마 따라 교회 갔다가 아버지가 장로라 해서 억지로 학생회 회장되고 신앙 있는 티를 내다가 고3이 되었다고 핑계로 교회 안 나가다가 그 다음부터는 해방과 자유를 만끽하면서. “이제 종교는 내가 선택합니다, 아버지.” 이런 식으로 나가게 됩니다. 

사도바울과 예수님은 예수님의 피로 용서한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이미 국가에 매여 있고, 집안에 매여 있습니다. 지금부터 학문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주무실 분은 주무세요.

요한복음 1장에 로고스란 말이 나오는데 이 단어가 기독교 이전에 이미 그리스 세계에서 쓰여졌습니다. 이태리가 장화 비슷하게 돼있어요. 여기에 크레타 섬이 있습니다. 유럽문명의 발상지가 됩니다. 이 밑에 아가야, 위에는 마케도니아라는 지방인데 지금 마케도니아라는 나라는 따로 있어요. 이 지방에 중요한 도시는 데살로니가라 해서 현재 그리스 두 번째 도시고, 아가야, 아테네는 제일 큰 도시고. 여기 보스포러스 해협이라 해서 흑해에서 내려오는 해협이고 여기가 터키가 되는 겁니다. 여기에 보면, 이스탄불이라는데가 있어요.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옛날 이름이 있어요. 칼케돈 여기 있고. 키프러스 섬, 곧 사이프러스라는 섬이 있어요. 사도 바울이 이 섬에도 전도 했습니다.

로고스란 말은 바로 이 지도에 나와 있는 지역에서 사용한 언어입니다. 원래 사도 바울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표현하는 복음이라는 것이 이스라엘 나라에서 창안한 그러한 언어와 개념들이 구약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 받는 이쪽 지역의 교회는 이방인 교회에요. 이방인 교회에다 구약에 있는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개념을 고스란히 담아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담을 수 있기 위해서는 언어를 새롭게 개발할 필요가 있었어요.

이 언어를 개발하면서 동원되는 사상이 바로 로고스 사상입니다. 로고스라는 단어는 처음에는 ‘모으다’, ‘집합하다’ 그런 뜻도 있지만 나중에 이성. 혹은 철학자 하이데거에 의하면 숨어있는 게 드러나는 계시 같은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성(理性), 말. 또 그런 것을 포괄적으로 말해서 ‘질서’라고 할 수 있지요. 로고스란 말이 구약성경에는 없는 말이란 것입니다. 신약에서 ‘말씀’이라고 번역에서 구약의 모든 것들을 이 안에 담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와플 있죠. 와플을 자를 때 듬성듬성 자르고 그 한 조각을 단어라고 한다면 이 단어 하나가 포함하는 개념이 너무 포괄적이에요. 이것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입니다.  옛날에는 단어가 그렇게 많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생산물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단어 사용도 지금 생각하면 해괴망측해요. 만약에 식물, 동물을 분류할 때 새끼를 배면 포유류고, 물에서 뭍으로 왔다 갔다 하면 양서류고, 지금 이렇게 표현하잖아요. 옛날 중국의 한 백과사전에 보면 동물 분류법이 다음과 같이 됩니다. 황제에 속하는 동물, 향로로 처리하여 방부 보존된 동물, 주인 없는 개, 인어(人魚), 전설상의 동물, 미세한 붓으로 그려낼 수 있는 동물, 멀리서 볼 때 파리 같은 동물 등등으로 분류됩니다. 밑에는 다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 시절이 있어요.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시간은 강물처럼 흐른다.” 옛날 시인들 다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지금도 문학가들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리고 데카르트라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물체는 좌표로서, 점으로 표현한다. x, y 좌표라 해서 그 지점을 정확히 묘사할 수 있다. 이것이 공간개념입니다. 이런 내용은 17, 18세기 때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으로 박혀있다고 여겼던 시절에는 이런 것들이 다 이해가 되고 용납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는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으로 박혀있는 게 아니에요. 공간이 곡률에 따라 휘어져있습니다. 빛이 곡률 따라 날아오고 있어요. 공간 자체가 휘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시간도 이 공간과 더불어 같이 변한다는 겁니다. 우리 생각에는 지나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현대의 시간관에서 우주 그 어느 지점에서는 우리의 과거를 되풀이할 수도 있고, 혹은 현재 우리가 이미 지나간 어떤 우주 공간의 역사를 되풀이해서 뒤따라 갈 수도 있습니다.

제가 하나 예를 들면, 길이 두 갈래 있는데 차가 시속 100킬로로 달립니다. 북쪽으로 달리죠. 그런데 이 차가 샛길로 100킬로로 달립니다. 그런데 북쪽과는 점점 더 멀어지죠. 아무리 달려도 이 차는 북쪽에 가까운데 이 차는 북쪽에 느리게 접근해나간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시간과 공간은 결합돼있어서 공간적 속도로 인하여 시간적 속도가 영향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실제로 밝혀집니다. 

식당에서 두 사람이 낮 12시 정각에 식사를 했다고 해봅시다. 식사를 끝나고 난 뒤에 “다음 날 이 자리에서 점심시간에 식사 합시다”하고 헤어졌습니다. 그 사람은 그 다음 날까지 식당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다음 날 열두 시까지 분주하게 돌아다니다 그 다음 날 그 자리에 찾아왔어요. 과연 둘이 차고 있는 시계의 시간이 같으냐 이 말입니다. 같이 않습니다. 달라져 있습니다. 설친 만큼 시간이 빼앗겨서 시간이 정작 12시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시간과 관련된 공식은 이러합니다.

 


우주공간에까지 시공간의 지평 범위를 확대시키면, 우주 비행기 타고 다음날 나타나니 프런트에 앉아있던 아가씨가 어느새 할머니가 되어 앉아 있고 우주 비행기를 타고 빛의 속도로 여행한 사람은 그냥 그대로인 겁니다. 이게 지어낸 것이 아니고, 이걸 믿자가 아닙니다. 믿든 아니 믿던 세상의 시공간은 이런 식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겁니다.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그렇게 진척이 되니까 뒤늦게 우리는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것뿐이에요. 내가 일의 주체가 아니니까.

이게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원리라는 거예요. 제가 사기 치는 게 아닙니다. 어느 한 순간에 꽃이 피어 있다고 칩시다. 내가 꽃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 시간에 어떤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있어요. 그 동일한 시간에 남자가 핸드폰을 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시간에 여러 가지 있단 말이죠. 그것을 이렇게 나란히 깔아봅시다. 동시대에 일어난 일들이 나란히 포진되어 있습니다. 나란히 세워보는 겁니다. 이 사건들은 우주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들을 덩어리 속에서 한 단면을 잘라낸 그 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주 전체를 식빵 덩어리가 여기면 칼로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우주 멀리 떨어진 어떤 우주인이 빠른 속도로 달아나게 되면 그 공간적 속도로 인하여 그 우주인은 자기 쪽에서 새로운 현실 단면을 자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주인이 보여주는 그 동시적 단면 속에는 지구인에게는 이미 과거에 속하는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과거사가 저쪽의 시작과 같은 시대에 속해버립니다. 우리의 고려시대 이야기가 저 안드로메다에서 어떤 사람은 같은 시대로 보고 있는 거예요.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허블 망원경이 접수하는 모든 현장 사진은 어떤 것은 10년, 20년 전에 있었던 그 시간대가 지금 접수된다 말이죠.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보다 빠른 게 있다면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것이 그들이 이미 이뤘던 것을 되풀이하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1장 15절에 보면,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지금 우리끼리 통하는 시간 층이 따로 있고 우리가 아직까지 합류되지 않는 시간 층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묵시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묵시의 세계와 역사의 세계를 세례요한은 섞어서 우리에게 이야기해버립니다. 그래놓고 하는 말이, “네가 믿어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그걸 믿지 못하고 알기를 원하죠. 알아버린 것은 안 믿기 때문에 대체물로 아는 거예요. 즉 믿는 게 아니고 아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럼 진짜 믿는 건 뭐냐? 내가 믿고자 하는 모든 것은 기껏 아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믿는 것.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현재가 믿는다고 우기지만 사실은 안 믿기 때문에 믿음 티를 내기 위해서 알기 위해 노력하는 죄에 불과하다는 것이 발각된 것, 그 발각되게 하시는 주님의 일관성 있는 주님의 현재의 작업이 바로 믿음의 내용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짧게 이야기해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가 됩니다. 즉 내가 만들어 나가는 나가 주님이 만들어 나는 나와 늘 충돌을 일으켜서 주님의 계획이 이기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 믿음이란 필히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그 내용이 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내 행함이나 공로가 아닙니다. 그런 뜻이란 말이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귀신 말대로 본인은 이미 영적 세계에 빠져 나가 속해있으면서 “나처럼 영적 세계에 갈 사람, 혹시 누구 있어요?” 하는 식으로 이방 말로서 전도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권력에 의탁한 사람은 예수님의 안목에서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지상의 역사적 권력체, 국가라는 권력, 민족이라는 권력, 그 권력체 안에서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습니다. 하지만 이 믿음은 아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구원이 되지를 않습니다. 

헬라어에서 로고스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말했지만 쉽게 말해서 ‘질서 잡기’입니다. 질서 잡는다고 했는데 원래 질서 잡혀 있는 게 아닐까요? 지금도 도시에는 질서 잡혀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촌에 가거나 조금만 벗어나면 자연세계는 결코 인간에 의해서 질서 잡혀 있는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변덕스러워요. 이걸 헬라어로 뮈토스라 해요. 곧 신화입니다. 로고스는 이성이고. 뮈토스는 신화입니다. 곧 ‘신화의 세계’입니다. 신화의 세계에서 이성의 세계로 넘어오면서 과학과 철학이 되는 겁니다. 제가 방정식 하나를 적어볼게요.

 
이 방정식이 뭐냐 하면, 왼쪽부분은 공간이 휘어지는 곡률을 나타나고 등식기호(=)오른쪽은 물질의 분포도입니다. 물리학자들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정식이라 해요. 이것이 바로 일반상대성원리의 결론부분입니다. 이것은 우주가 휘어지는데 따라서 존재가 희박하기도 하고 존재가 밀도가 차 있기도 하죠. 곧 ‘있음’ ‘없음’의 비율을 보여주는 겁니다. 우주의 곡률이 휘어짐에 따라서 많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단 말이죠.

이것은 ‘믿으라’를 요구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가 믿던 아니 믿던 이런 식으로 우주가 자리잡고 있다는 말입니다. 태양 옆으로 빛이 올 때 태양의 중력으로 인하여, 곧 태양이 질량을 가지고 차지하고 있는 공간의 휘어짐으로 빛도 그 휘어짐을 따라 날아온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반상대성 원리와 시장 한복판에서 채소 파는 아줌마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지금 시장바닥에서 콩나물 팔아서 애 공부시키는 아줌마가 상대성원리와 무슨 관계있으며 신학에서 말하는 삼위일체와 무슨 관계있습니까? 신학생들에게 이 문제를 내고 싶습니다. 즉 “삼위일체와 붕어빵 파는 노점상의 관계는?” 과연 관계가 있을까요? 관계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주가 이런 식으로 되어간다는 것을 우리가 손댈 수 없듯이 내가 내 자식 위해서 떡볶이 파는 것은 누가 와서 손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그냥 할 뿐이에요. 이런 점에서 인간은 우주를 그렇게 쏘옥 빼닮았어요.

뮈토스, 즉 신화의 세상에서 사람들이 우주를 설명하면서 우주의 변덕을 신의 변덕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자연과 신과 인간이 교류가 가능한 이치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로고스’ 개념이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즉 신의 움직임과 거기에 반응하는 인간의 마음이 연결되어 있기에 같은 질서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주가 화를 내는 것으로 이해했기에 우주 변화의 일부를 담당하는 신이 화를 낸다고 표현할 수 있어야 인간도 우주질서와 연합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싸움질하는 신이 있고, 망치 들고 설치는 신이 있고. 신은 변덕스럽고, 욕심쟁이 신이 있고, 바람기 많은 신도 있고, 인간하고 연애하는 신도 있고 그 자식을 낳는 신도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뮈토스, 곧 신화(神話)의 세계입니다.

모든 민족에는 신화가 기본으로 다 깔려있어요. 8세기 멕시코에 마야라는 문명이 있는데 데 거기는 처녀를 잡아다가 제단에서 잡아버렸어요. 시집 안 간 처녀를 잡고 어린 아이를 잡아 피라미드 제단에서 잡아 태양신에게 바치게 되는데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느냐 하면 오직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란, 신과 소통하는 공동체를 유지를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신의 노여움으로 멸망한다는 겁니다. 옛날 신화의 세계에서는 개인의 권리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아프가니스탄이나 인도나 파키스탄 그런 동네에 가게 되면, 누이동생이 길을 가다가 어떤 남자한테 수치를 당하면 그 성폭행범을 잡아다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가문을 더럽혔다고 집안의 오빠들이 그 누이동생을 죽이게 됩니다. 즉 신이 지배하는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 여인은 희생을 해야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권력 아래서만 사람으로 살아가는 신화의 세계에서의 인간성입니다. 인간 세계의 권력의 끝은 자연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우주의 일부로서 자연이 번개 치면 그때는 같이 울어야 되고, 화도 내야 되고, 자연이 고요하면 찬양해서 제물도 드려야 되고, 자연 따라서 온 몸이 같이 움직이는 겁니다. 한의학사상도 이와같은 사상입니다.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는 겁니다.

이것이 뮈토스 세계인데 우리는 지금 로고스 세계로 진입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로고스. 단어 하나에 이런 긴 역사가 있어요. 로고스가 등장한다는 시점은 신화의 세게에서 이성의 세계로 변모할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이성의 칼로 자연세계를 잘라 질서잡기에 나서는 시기입니다. 프로타고라스의 말대로 ‘인간이 곧 만물의 척도’가 되는 시기입니다.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흔히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교리나 신학 모든 것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자연세계에 로고스가 개입해서 질서잡기에 나선 그 이성의 시기의 결과물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성이란 나한테 이익 되는 것과 아니되는 것을 기준으로 이성적 작업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유용성(有用性)’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성적 작업을 하는 이유가 모든 것은 유용성 때문입니다. 플라톤이라는 철학자가 이야기한 건데 이걸 ‘선’, 착함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집안에 시집 안 간 딸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엄마가 골치가 아파져요. 딸은 나이 서른이 차면 시집을 가는 역할을 해줘야 되는데 딸이 시집을 안 가니까 얼마에게는 이게 선이 아니고 악으로 보이는 거예요. 결국 선과 악은 뭡니까? “너는 왜 네 할 일 안 하고 시집 안 가고 있느냐?” 딸은 말합니다. “시집은 혼자 갑니까?” 이렇게 나오면 그 다음부터 다툼이 시작되죠.

유용성 자체가 선이 된다는 말은 이익이 있을 경우에만 자연은 우리에게 선하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은 변덕스러워서 폭풍도 치고, 비도 안 오고, 가뭄도 드니까 이것을 우리 인간에게 유용한 질서로 사용할 수 있도록 우리의 이성으로 ,우리의 로고스로 자르자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적인 이익은 허용할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개개인에게 자유를 주면 자신만이 욕심을 채우려고 무질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뭔가 통제가 필요합니다. 강력한 국가적 통제에 의해서 최고의 선을 달성하자는 것이 플라톤이 제시한 국가론압니다.

국가는 전체 다수의 선을 위해서 개인에게 역할과 책임을 맡겨야 하고 그래서 보다 선한 사람은 정치적 엘리트로서 높은 자리에 앉아야 마땅하고, 좀 멍청한 사람은 밑바닥에 앉아서 똑똑한 윗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해야 안전하며 어중간한 사람은 중간 쯤에 해당되는 일에 종사해서 전체적으로 혼돈하고 통제가 안 되는 자연세계에서 인간이 선하게 버티기 위해서는  이러한 국가체제가 필수적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이런 최고선을 지향하는 국가 시스템에  도전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법으로 처벌되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다수의 선(善)을 구현하기 위해서랍니다.

똑똑한 사람이 왕이 되고, 철학자가 왕이 되어서 되는 이유는 세상을 보다 넓게 보는 것이 합당한 선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국가에 속하는 개인들은 똑똑한 통치자에 의해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교육 실시가 전체 선을 이룰 수 있는 방도가 되는 이유는 모든 인간 속에는 이성이 있기 때문이랍니다. 즉 인간에게는 누구나 로고스가 있거든요. 신이 인간 만들 때 로고스를 집어넣었어요. 그 로고스는 아이큐 낮은 사람, 무식한 사람, 게으른 사람은 사전에 몰랐다가 교육을 받게 되면, 비로소 자극을 받아서 잠자던 로고스가 깨어나면서 “그렇구나. 이거구나.”하면서 비로소 전체적인 선에 봉사할 수 있는 자기 책임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그런 자기 역할을 하지 않고, 일도 하지 않고 게으름 피우고 이러면 전체적인 국가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그것은 국가를 헤치는 죄가 됩니다.

그래서 옛날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살후 3:10)  북한에 세 번 다녀오신 분이 이야기하는데 북한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북한은 쓰레기장이다.”고 말입니다. 평양 시내를 왔다 갔다하는 그 사람들 전부다 연출하는 거예요. 혹시 관광객 사진 찍을까 왔다 갔다하는 거예요. 아파트 바로 뒤에서 허물어져가는 아파트죠. 그게 뭐냐 하면, 현 상황에서 북한체제의 선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김일성을 숭배해야 된다는 이것은 유용성 때문에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여기에 거부하는 것 같으면 정치범 수용소인 요덕 수용소에 보내든지 해서 사정없이 잘라버려요.

여러분, 국가라는 것이 이처럼 뭔가 개개인의 몸에는 맞지 않는 억제 체제입니다. 지금 군 입대를 앞두고 있는 사람은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있느냐고 이런 고생시키느냐고 할 거예요. 그 반면에 어떤 사람은 과감하게 국가를 위해서 자기 한 몸 던지겠다고 해병대에 들어간 사람도 있습니다. 논개 같은 심정으로 이 몸 바쳐서 나라 살리겠다고 해병대에 자원입대해서 최고 온도 37도 올라가는데……. 엄마는 걱정도 안 되는 모양이라.

도대체 국가가 뭔데 내 허락도 없이 함부로 집어넣고 머리 깎고, 전화 못하게 핸드폰 뺏고.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절대적인 선을 위해서 너는 네 자리를 찾아가야 된다. 어차피 나라 지키는 사람은 있어야 되기 때문에 널 뽑아서 세워야 된다.” 이게 똑똑한 로고스, 인간의 이성인 겁니다.

그러면 이성이라 하지 않고 뮈토스, 신화세계로 돌아가면 편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실험해보세요. 일단 도시를 떠나보세요. 뒤늦게 귀농하는 겁니다. 하지만 과연 귀농해서 도시에서 벌던 돈이 그만큼 벌리겠습니까?

결국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국 이성적 놀이를 스스로 포기하는 걸 말합니다. 질서체제를 버리고 혼돈스럽게 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남들이 원하는 기대치에 부응할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도시민의 욕망을 접어야 합니다. 욕망의 세상에서 질서가 잡혀 있다는 말은 그 질서로 인해 ‘나의 자리’를 강요당하는 처지에 놓인다는 말입니다. 숱하게 실패하고 숱하게 시험을 떨어지면서 사람은 서서히 서열화된 세상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게 됩니다. 모든 게 시험이고 모든 게 경쟁입니다. 거기서 또 타인이 요구하는 업무가 주어져요. 이 모든 것이 로고스 안에서 이성적으로 이뤄지는 세계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로고스가 만들어준 질서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나의 피난처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산성은 로고스입니다. 국가가 나의 로고스가 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국가 없이는 불안정해서 살 수가 없는 법입니다.

이쯤해서 로고스가 하나님 뜻이 아니라면 성경을 뭐라고 이야기할까요? 성경에서의 하나님, 곧 요한복음에 나오는 로고스라는 말씀은 피해자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뮈토스도 아니요 세상에서 말하는 그 로고스도 아닙니다. 로고스를 치고 혹은 로고스 사상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그런 로고스로서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내 죄 때문에 대신 죽은 분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에요. 무엇이 죄일까요? 내가 죄를 짓는 게 아니거든요. 죄가 나를 죄 짓게 만드니까.

나로 하여금 죄 짓게 만드는 체계와 그 시스템, 그 중에 교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핍박하는 단체로서 세상적인 로고스 시스템을 갖추면서 그동안 2000년 역사로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 신조,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들이 이성적 로고스 관점을 가지고 권력체로서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악마의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 있는 이성은 바로 이 로고스 체제에 길들여있고 우리는 그것 없이는 구원이고 뭐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의 지상 삶을 보세요. 무엇과 싸우고 투쟁했는가를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을 살해를 주모한 자들이 누구인가를 보세요. 요즈음 식으로 말하자면 거대 종교단체입니다. 그 종교 단체가 품고 있는 로고스를 통해서 사람들은 구원도 따내고 천국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천국은 로고스의 세계, 이성의 세계가 아니라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신학이 세 파가 생겼습니다. 하나는 로마파, 하나는 알렉산드리아파, 하나는 안디옥파, 곧 동방파입니다. 이탈리아에 로마파 있고, 여기 이집트에는 알렉산드리아파 있고, 시리아 쪽, 곧 여기에는 안디옥파가 있어요. 이 동방파가 나중에 476년 이후에는 동로마 제국이 되는 겁니다. 비잔틴 제국이라고 합니다. 서방은 이방민족이 쳐들어와서 프랑크 왕국이 세워지고 그 프랑크 왕국은 지금의 프랑스인 서프랑크, 지금의 독일과 폴란드, 항가리인 동프랑크와 지금의 남 독일과 스위와 오스트리아인 중프랑크로 나뉘어집니다. 이 때 조약이 메르센 조약입니다.(870년)

고대 교회에서는 힘없는 예루살렘파가 있는데 126년에 로마가 와서 쿰란공동체고 다 파괴할 때에 같이 파괴당하고 말았습니다. 흔히 에비온파라고 알려진 이 파는 구약성경이 기본으로 하고 복음은 부록입니다. 지금도 에비온파들이 있어요. 산상설교가 최고로 여기고 사도 바울은 부록이라고 여깁니다. 이 말은 산상설교부터 출발해서 사도 바울 거쳐서 다시 산상설교로 돌아와야 된다는 겁니다. 

뭐냐 하면, 그동안 우리가 산상설교 지키려했는데 믿음이 모자라서 못 지킨 것을 사도 바울 로마서 가서 믿음 얻어서 이젠 산상설교를 제대로 지켜서 이 땅에 하나의 천국을 이뤄보자는 주의입니다. 신칸트파입니다. 하르낙이라는 종교사가가 이쪽에 속합니다. 

사도바울이 교회를 다 버려놨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겁니다.(롬 4장) 그리고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거저 받은 은혜로 구원받는데 이러한 법칙은 율법에 관한 법칙이 아니고 은혜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어지는 식으로 의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마음이 해이해져서 예수님의 진짜(?) 뜻인 산상보훈을 지킬 생각을 하지 않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사도 바울이 뭘 버려놨느냐 하면, 이 로고스 세계를 버려놨어요. 로고스 세계가 무엇이라 했습니까? 이성세계. 이성세계의 극단적인 모습이 국가. 국가 없이는 우리는 죽는다는 그 생각, 그리고 그런 식으로 교회의 체제와 전통을 세워나가겠다는 마음을 버려놓은 것은 맞습니다. 천주교 신부가 이런 주장을 합니다. “교회 없이는 살지만 국가 없이는 못 산다”고 말입니다. 교회보다 국가가 우선이라는 겁니다. 그 신부는 아주 솔직한 편이죠.

그것은 국가를 사랑함이 아니라 이미 국가 형태가 되어버린 이 가톨릭 자체가 구원받게 하는 생명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투로 말한 겁니다. 가톨릭의 황제가 교황이죠. 그러니까 교황 말 좀 잘 들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교황 계급 밑에 그 다음 단계가 추기경이 있고, 추기경 밑에 주교가 있고, 주교 밑에 사제가 있고, 사제 밑에 부제가 있고 그래요. 그걸 제일 먼저 거론한 사람이 로마에 클레멘트 또는 클레멘스란 사람입니다.

군대에서 대장 없이는 안 되는 것처럼 교회는 주교가 대장이라고 했어요. 모든 성도가 다 장군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키프리안이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교회란 가견적인 정통 기독교의 최종 상태라고 했습니다. 주교 없는 교회가 없고, 교회 없는 구원이 없으니 주교 말 안들으면  지옥 간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주교가 교인들에게 언어로 된 문장을 나열하겠지요. 그 문장을 주교 말대로 알아듣는다는 말은 주교의 권력에, 로고스 권력에 복종한다는 뜻이고, 그렇게 복종할 때 주교가, “당신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확정해 줄 것이고 이렇게 확정받으므로서 말미암아 로고스적 이상체, 즉 국가형태의 교회 안에 적재적소에 자기 자리를 한 자리 차지하면 그 단체는 그대로 이동해서 천국에 자리로 확정된다고 그렇게 로고스적인 질서 사고방식을 옛날부터 선배들이 해왔습니다.

한스 큉이 ‘패러다임’(인식체제)을 도입해서 교회사를 정리한 이유는 기존의 교회는 권련단체고 자기민족과 국가를 로고스로 국가단체의 최고의 극대적인 선을 옹호하기 위해서 하수인 격으로 교회를 이용한 것뿐이지 이것은 진정한 교회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뜻에서 이렇게 도표를 만든 겁니다. 각 시대마다, 국가마다, 종족마다 유리한 대로 자기 민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교회도 그런 조직체로 재편하고 개편하고 온 겁니다. 나름대로 자기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민족의 역사와 함께 교회역사도 같이 따라왔고.

미국선교사의 역사를 위해서 한국은 감리교역사, 장로교역사가 따로 마련돼야 돼요. 이들은 ‘정통개혁주의’라는 말을 거론하면서 이 정통개혁주의에서 벗어나면 이단이라는 겁니다. 오늘날도 옛날 선배들이 했던 권력형 교회를 그대로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면죄방식’을 형식을 동원해서 로고스에 입각한 구원체를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이중삼중 계속해서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는 짓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내일 아침에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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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3강

(강의: 이 근호 목사)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첫째 시간, 둘째 시간 동안에 믿음이 없어도 구원받을 수 있는 그러한 아이디어가 있을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냥 알기만 하면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그 믿음을 대신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입니다. “당신 믿음 있습니까? 없어요? 그래도 교육만 잘 받으면 당신 속에 있는 이성이 믿음을 대체할 수 있게 하고 그 믿음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모든 복음을 당신 것으로 만들어주어서 구원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라는 거죠.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을 로고스적으로 조립해서 신조, 신앙고백, 그런 것들을 교회에서 제조해서 일반인들로 하여금 이해만 시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장사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는 영업전략으로 그동안 교회사는 이어져 오고 있었습니다.

로마 콘스탄틴 대제 시대에 313년 밀라노칙령에 의해서 전체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국교’라는 이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인간의 ‘국교 전략’에 동조하시겠습니까?

여기 이태리가 있으면 여기 밀라노가 있습니다. 여기에 콘스탄틴 대제가 칙령을 발표하고 그 이후 데오도시우스 황제 이후에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국교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공무원의 승진을 비롯해서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교인이 되면 인센티브를 얻게 되는 겁니다. 반면에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은 생활면에서 상당한 압박을 받게 됩니다. 또한 황제가 신학자들을 모아놓고 “어떤 것을 알고 익히면 신자라고 할 수 있느냐”를 묻고 법률적인 기준책 마련을 종용하게 됩니다. 교리를 암축해놓은 신조를 만들고 그것을 수용하는 백성들에게는 로마 제국 내에서 기독교신자로서 행세할 수 있게 만들겠다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천국을 미끼로 해서 사람들을 교회라는 권력체 속에 모집하기 위한 정책입니다. 그렇게 해서 드넓은 로마제국이 일치된 사상 속에서 결집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이런 황제의 의중과 그 안에서 정치적인 권력을 추구하는 교회의 의중이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교회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만들었는지 다시 요약하면, 뮈토스에서 로고스로 바뀌면서 만들었다 했습니다. 뮈토스, 곧 신화란 상당히 변덕스러운 자연에 대해서 같이 변덕스러워하면서 자연에 순응하는 식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적응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자연은 크고 위대하고 인간은 작으니까 고개 숙이고 들어가는 것도 하나의 생존의 방법이 되는 겁니다. 어부들이 바다에 갈 때는 포세이돈 신에게 제사함으로서 그만큼 되고, 또 마야문명에서 가뭄이 든다하면 신에게 사람을 공양하는 겁니다. 신을 달래는 방식이 신으로부터 사죄받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신화적인 방식에는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공동체의 생존문제입니다. 어린애 하나 죽어서 우리 공동체가 자연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감행할 수 있는 일입니다. 희생제물을 바치는 고대종교의 행태가 다 이런 신화적 발상에서 나온 겁니다.

이 신화에서 로고스로 바뀌었다 했죠. 원래 뜻은 모아서 정리 정돈한다입니다. 크게 봐서 질서가 되는데 이 질서를 잡는 아이디어가 인간 내부에서 나오니까 인간 내부에도 로고스가 작용한다고 보는 겁니다. 그리고 그 로고스에 입각해서 타인들과 공통적인 관심사를 나눌 수 있는 겁니다. 여기에 쓰여지는 것이 곧 언어, 로고스의 집약형태인 ‘말’이 되는 겁니다.

뮈토스에서 로고스로 되면서 로고스는 자연세계를 손질합니다. 무질서한 자연을 이제는 질서 있게 우리가 잡아내겠다. 그걸 재단(裁斷)이라 합니다. 무질서한 신화의 세계를 로고스, 이성의 세계로 정리해버리는 겁니다. 혼돈스러운 자연을 관리하면 여기서 살기에 편리한 게 나올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게 유용성이라는 거예요. 유용성을 선이라. 우리말로 착함이죠.

이 착함을 나의 착함, 개인적인 착함이 아니라 전체적인 착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필요한 조직, 시스템이 있는데 그게 바로 플라톤에 의하면 국가라는 겁니다. 국가라는 시스템을 통해서 공동의, 최고의 선을 찾아내는 거죠. 여기서 철학자 플라톤의 말을 먼저 들어봅시다. 제가 플라톤을 대신하겠습니다. “사람들 속에 혼자 살지 못하고 더불어 사는 것, 이것은 인간 속에 로고스가 있기 때문이다. 질서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질서 감각이 극대화된 것이 국가기 때문에 인간은 싫든, 좋든 국가를 찾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왕 찾는 국가 제대로 한 번 만들어보자.”입니다.

여러분 장롱에 서랍들 있잖아요. 서랍에 들어가지 않는 속옷들이 방에 있으면, “애가 밖에 나가면서 어지럽혔구나. 청도도 안 하고.” 하고 엄마가 와서 속옷을 서랍에 넣어주죠. 서랍 바깥에 있는 옷은 더럽힌 것이고, 악이죠. 서랍 안에 집어넣으면 이건 선이 되는 거죠. 이건 우리 속에 플라톤에 의하면 로고스가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했죠. 그 로고스가 그 로고스다 이 말이죠. 신학자들에 의할 것 같으면 말입니다. 철학자에 의해서 조성된 단어가 신학자들에게 의해서 그 철학적 아이디어를 교회에 집어넣은 재료가 되는 겁니다. 철학자들 보기에, 혹은 신학자들 보기에 성경이야기는 전부다 자기들 철학 속에 다 포함돼있는 거예요. 성경은 작고 철학은 크다 이 말이죠. 성경은 좁고 철학은 넓은 거예요. 성경에서 무슨 논의를 해도 그건 철학에서 커버가 된다 이 말이에요. 성경은 믿으라 하지만 넓은 철학은 알면 되는 거예요. 지가 알아서 구원받는다 이 말이에요.

지가 알아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구태여 성령이 필요 없고 반복된 교육하면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나중에 갈수록 더 알고 넓혀 가면 나중에는 얼추 신학박사 정도로 많이 아는 거예요. 목사가 이상한 소리하면 저건 아닌 것 같은데. 하고 감 잡습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서랍 바깥에 있는 것은 악이 되는 겁니다. 로고스를 벗어나면 악이 되는 겁니다. 뮈토스, 신화의 세계에서는 바깥에 나와 있는 것도 선이고, 안에 있는 것도 선인데 로고스 시대에는 그렇지 않아요. 서랍에 집어넣으면, 예를 들면, 속옷은 두 번째 서랍에 양말과 같이 넣게 되면 정돈이 되고 질서가 잡힙니다. 인간은 어디서 안심을 느끼느냐 하면, 내가 이 나라에서 어느 소속에 있으며 나는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가를 잡기 위해 내 자리를 찾아갈 때 비로소 나는 사는 재미를 느끼고 안심을 느낍니다. 물론 그 다음부터 아랫배가 나오기 시작하겠지요.

여기서 같은 나라에 국민이라는 소속감을 느끼고, 올림픽에서 양궁 경기 보면서 눈물 흘리면서 “잘한다 기보배!” 하고, 박주영 한 골 넣으면, “와!” 하고 소리치는 겁니다. 바로 이런 점을 두고 플라톤은 말하기를 , 그것이 원래 인간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인간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안에는 로고스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 로고스는 국가로서 최종적인 모습을 갖춘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지중해에 빠졌던 소말리아 난민들이 자신이 태어난 소말리아를 버리고 프랑스, 이태리를 찾는 이유는 새로운 소속감을 얻기 위함입니다. 터키 사람들이 독일을 찾아 이민 오는 것도 새로운 최고선 체제에 소속되기 위함입니다. 유렵에서 집시 이외는 모두 소속감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 소속감이 극대화된 형태가 바로 이차대전 때 이태리의 파사즘이나 독일의 나치 같은 겁니다. 이런 사상은 극우파의 양태를 지니는 겁니다. 기독교를 앞장 세워 로마제국의 소속감을 집어넣는데 기독교 삼위일체라든지 기독교교리가 로마제국을 하나의 ‘국가 로고스’ 노릇을 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예수님과 신까지 동원해서 로마제국을 하나로 만드는데 사용했는데 교회는 이 정책을 ‘면제 방식’으로 활용하여 대중들을 집단적으로 교인만든 겁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개인구원을 용도가 아니고 국가를 위한 교리입니다. 어제 교재 3페이지를 봤지만 아타나시우스신조라는 게 나오죠. 아타나시우스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325년 니케아회의 때 주도적인 발언을 한 알렉산드리아파 사람입니다. 이집트 신학자이지요. 현재 터키 이쪽에 니케아라고 있어요. 325년 니케아회의에서 콘스탄틴 대제가 고집해서 “나라를 위해서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게 뭐냐? 전부다 가지 말고 여기서 결정해.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국교인데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여기서 이런 걸 믿으면 기독교신자요, 이런 걸 거부하면 기독교신자 아니라는 것을 정해. 다 집에 못 가. 출장 왔어. 여기서 다 정해. 다수결로 하든지, 만장일치로 하든지 다 정해. 만약에 정해진 것을 위반하면 이단으로 내가 알아서 경찰력 동원해서 처리할 테니까 날 믿고 다 하란 말이야”라고 명령해서 니케아회의에서 삼위일체교리가 정립됩니다.

이때 기독교교파가 셋이었음이 노골화됩니다. 그 하나가 로마파인데 이 로마파는 법으로 구원받을 사람을 결정하자는 겁니다. 구원받을 사람을 결정하려면 제정자가 있어야 되는데 그 제정자로 로마교회가 나서줄게 한 거예요. 네가 무슨 자격으로 개인적인 신앙을 관리하려고 하느냐 시비 걸면 자기네들 쪽에는 베드로 무덤도 있고, 사도 바울의 무덤도 있기 때문에 우두머리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교회가 아무리 많더라도 영(0)순위가 로마교회라고 주장한 겁니다.

무덤 있는 것이 어떻게 교회 머리로서 자청하는 이유가 뭡니까? 무덤이 뭔데요? 무덤이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성지순례 가듯이 원조, 근원을 찾고 싶은 인간의 심리입니다. 한류를 찾아서 한국으로 오잖아요. 기독교복음을 누가 정립하고 누가 전했느냐가 그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했던 모양이에요. 하여튼 그들에게는 예수 믿는 건 없습니다. 같은 사람을 믿고 싶은 겁니다. 어떻게 기독교신자가 되느냐가 중요하지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런 것은 없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그전에 로고스 신앙이 있었기 그래요. 로고스 신앙, 이성 신앙, 합리적 신앙이죠. 로고스 신앙은 모든 종교를 재조립하기 때문에 기독교도 마찬가지고 복음도 마찬가지고 로마에서는 법으로 하는 겁니다.

로마파는 원죄개념이 있어요. 그러면 다른 파는 원죄개념이 없습니까? 다른 파는 원죄개념이 없어요. 신기하죠. 정통동방정교회는 원죄 개념이 없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렇게 욕했던 동방파교회, 그림 그려놓고 거기다 뽀뽀하고 아이콘을 섬기는 그 동방파. 촛불 켜놓고 구약으로 돌아가서 신부가 치렁치렁 사제옷 입고 축성하고 물이나 뿌려주고, 성직자가 수염을 기르고, 수염 기르지 않는 성직자를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그 러시아정교회는 원죄 개념이 없습니다. 현재 러시아 정교회가 가장 교세가 큽니다. 이러한 종교적 파당문제는 실은 민족 정체감을 위한 구실로 이용됩니다.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는 연방으로 된 나라입니다. 연방이 해체되면서 7개의 국경, 6개의 공화국, 5개의 민족, 4개의 언어, 3개의 종교, 2개의 문자를 쓰는 복잡한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중에 분쟁의 요인이 되는 나라는 서쪽에 있는 세르비아라는 나라입니다. 그 위에 접경한 나라는 크로아티아라는 나라인데 이 나라는 가톨릭입니다. 세르비아는 정교회이고, 그 옆에 세르비가 시비걸어서 내전을 일으킨 나라인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는 이슬람교나라입니다.

그래서 세르비아 밀로세비치가 화가 나서 자기 고향 찾겠다고 보스니아를 1998년에 공격해서 이백만 명을 청소했어요. 이단이 어디 고향에 살아? 여기에 대해 너무 심했다고 여긴 크로아티아가 개입했다가 정작 도움받고자 하는 보스니아가 종교적 고집을 부리자 이제는 내전이 3파전이 되고 만 겁니다. 이것이 유고슬라비아 내전입니다. 코스보라는 세르비가 남쪽 자치구 동네가 세르비아의 공격을 받고 완전히 작살납니다.

그게 교리문제를 앞장 세워 민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겁니다. ‘국가교회’가 되어야 성이 풀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민족 정체성이 종교 정체성으로 정립되고 이는 인간 속의 로고스 의식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교회가 있다는 것은 그 교회를 전부 수용하는 국가가 있다는 말이고, 국가가 있다는 것은 한 종족 전부가 국가 한 덩어리 될 때 이것이 가장 로고스다운 거예요. 로고스로서 하나되는 일체감 말입니다.

유아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는 내 집안 사람이다”는 가문 정체성을 종교적인 형식으로 실시하면서 동시에 신으로부터 사죄 받을 수 있는 종교적 욕망도 함께 달성할 수 있다는 보는 겁니다. “목사 딸이 그 짓하면 돼?”라는 식으로 집안에서부터 계속 세뇌 주고 교육시키는 겁니다. 종교가 하나 돼야 집안이 편안하다는 겁니다. 종교가 다르면 집안 꼴이 안 된다는 겁니다. 신앙이 같을 때까지 민족 정체성은 멈추지 않는 겁니다. 국가 전체가 종교법으로 묶여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 법을 정하는 어떤 원칙에 따라 신학도 3세로 나눠요. 로마파, 알렉산드리아파, 동방파가 그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에 있어요. 이집트에 아주 번창했던 도시에요. 나중에는 콘스탄티노플이 생기고, 서열로 따지면 로마파 1등, 콘스탄티노플이 2등, 알렉산드리아 3등, 안디옥 4등, 예루살렘은 망해버리니 5등입니다. 이런 식으로 서열 정하면서 황제는 반드시 로마출신이어야 한다는 그런 시대가 된 거예요. 그게 바로 오늘날 천주교가 된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 캘빈과 루터를 따르는 개혁주의는 이 잘못을 너무너무 알기에 두 번 다시 이런 잘못을 안 저지를 겁니다.”라고 주장하고 싶은 구호도 있을 겁니다. 오직 믿음 중심이니까 이런 과오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의 패러다임에 불과합니다. 나름대로 역사와 전통 굳히기 들어가는 이유는, 사람이란 이런 로고스적 질서를 사면 형식으로 삼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정통개혁주의가 신형 천주교라고 하면 됩니다. 교회는 신종 성당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사람을 교회에 데려오는데 그 사람을 설득시키고 납득시키려면 네가 아는 단어와 내가 아는 단어를 연결시키면 딜 것입니다. 이야기하면서 결속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언어로 상대방의 공통점을 끄집어내어서 바로 그 단어를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그 단어로 교체하면 그것으로 우리는 한 형제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교회에서 내세우는 아이디어입니다. 문제는 단어 선정을 어떻게 해서 조립하느냐에 달렸겠지요. 여기에 따라 교단과 교파가 갈라지는 겁니다. .

초대 교회에는 ‘삼위일체’에서 ‘일체’에 해당되는 단어가 ‘우시아’라는 단어이며 삼위에 해당되는 ‘위’‘라는 단어는 ‘휘포스타시스’입니다. 우시아는 본질에 해당됩니다. 호모우시아하면 동일본질이고, 호모이우시아하면 유사본질이 됩니다. 325년에 니케아에서 회의할 때 단어 싸움이 벌어진 겁니다. 아리우스라는 알렉산드라아 출신 사람이 있어요. 이 아리우스가 뭐라고 자기 주장을 그 회의에서 펼칩니다. 이것은 교회사 책에는 잘 안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고 야사는 아니고요. 흔히 정통 교회에서는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아리우스는 이단이라고 비난받는 사람입니다.

아리우스가 진짜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본질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호모이우시아, 즉 유사본질이라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안디옥 동방교회파에서 그런 주장을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로마파에서 이참에서 로마 제국 전역에서 동방파의 기세를 정리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교회의 중심부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로마 황제를 덧입고 대결을 통해서 세력 정리에 나섭니다.

아리우스가 했던 본심에 대해서 나온 글이 거의 없어요. 겨우 찾았어요. 맨 날 피고의 입은 무시당하기 일수이니까요. “ ‘예수님이 하나님과 똑같다. 예수도 하나님이고, 성부도 하나님이다’고 하는데 그건 잘못이다. 왜냐?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과 성부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개념을 인간이 정할 수 없다는 거예요. 같은 신이지만 신이라는 의미가 차원이 다르다는 거예요. 다른데 너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으로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이 갖고 있는 신이라는 개념을 왜 아버지께 그대로 적용하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는 신이라 하지 않고 뭐라 하느냐고 반박이 들어오니 “그냥 입을 다물자.”라는 겁니다. 그것은 예수님한테 신이라고 말을 붙일 수도, 하나님 앞에 신이라고 말을 붙일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언어 이상의 초월하는 존재기 때문에 삼위일체를 초월하는 신의 개념을 예수님한테 적용시켜버리면 그때부터는 격이 다른 단어를 한데 섞어버리면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 아리우스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아타나시우스는 주장하기를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다는 거예요. 로고스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신에서 나왔습니다. 일자에서 나왔어요. 로고스가 하는 역할은 신과 피조세계를 중재하는 역할입니다. 누메네우스(2세기 후반 사람)가 삼신을 주장했어요. 창조자도 신이고, 중재자도 신이고, 만들어진 피조세계도 신이 된다는 거예요. 피조세계가 신이 된다는 말은 그 피조세계 안에 신의 영향력과 신의 흔적이 남아있다는데 성립이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삼신이 있다고 누메네우스가 이야기했고, 그 전에 에우도로스(1 세기 사람)은 그 3신을 하나(1)라 해서 삼중신을 언급했어요. 삼위일체 성립하기 이전에 철학자들이 이런 아이디어를 먼저 내놓은 겁니다. 그 다음에 알비니우스라는 사람이 그걸 발전시켜서 정립을 했는데 제일 신이 있고(일자(一者), 그 다음에 두 번째 신이 이성(Nus), 세 번째 신이 영혼이라고 했습니다. 일신한테 사명을 받아서 활동하는 것은 누스, 이것은 이성인데 2세기경에 플로티누스라는 철학자 이론을 빌려서 했는데 그 다음에 이성이 전달되면 영혼이 되는 거예요. 나머지는 질료, 재료가 되겠죠.

누스, 이성, 일자, 일자는 하나밖에 없는 존재, 이것이 일체가 되는 겁니다. 왜 일체가 되느냐 하면, 옛날부터 사람들이 이성으로 재단을 할 때 제일 고민이 뭐냐 하면, 신은 하나인데 왜 사람 숫자가 많으냐는 겁니다. 공장에서 코카콜라를 제조하면 특징이 뭐냐 하면, 코카콜라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코카콜라는 한 개만 잡아도 똑같지요. 같은 제품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런데 신은 사람을 만들 때 얼굴이 똑같지 않느냐 하는 문제에요. 이것이 철학자들의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쉬운 것이 여러 신이 여러 명을 제각기 만든다면 제일 쉬워요. 고대 신화에서는 그래요. 그런데 이성적으로 들어가서는 원래 만드는 신은 둘이 아니고 하나여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여야 된다는 것은 좋은데 어떻게 하나가 둘, 셋, 넷이 되느냐는 그 문제에 빠질 때 해결책이 없습니다.

탈레스란 사람은 물이다. 아낙시만드로스란 사람은 무한정자라 해서 최초로 추상적인 개념을 집어넣었어요.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 했고요, 엠페도클레스는 그것을 당기는 것은 사랑과 미움으로 당긴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습니다. 특히 아낙사고라스라는 사람은 정신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고, 파르메니데스는 모든 변화는 결국은 존재하는 것이 변하기 때문에 변화에 신경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떤 변화이든 일단 멈추면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재밖에 없다고 이야기했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하는 자체가 진리기 때문에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자체로서 성립한다고 본 겁니다. 그러니까 변화한다는 자체가 신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들이 무슨 뜻에서 이야기하느냐 하면, 왜 신은 하나인데 다양하냐 이 말이에요. 그것 때문에 해결이 안 돼요.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골치 아픈 신을 안 믿으면 되는데 할 때 그것도 문제가 있어요. 신은 안 믿으면 되는데 어디서 생기느냐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도대체가 있는 것은 왜 있느냐?는 겁니다. 이미 있는 존재자 중에하 하나를 뽑아서 “네가 이 세상을 다 만들었지?”라고 물어보세요. 분명 아니라고 할 겁니다. 예를 들면, 토끼에게 “토끼야 네가 전 세계를 다 만들었지?” “아니요. 나는 안 만들었는데요.” 그러면 거북이한테, “거북아 네가 만들었느냐?” 즉 현재 만들어진 것한테 네가 전부를 만들었느냐고 물어보니까 전부다 아니래요.

그러면 분명히 생기기는 생겼고, 만들었다고 나선 사람은 하나도 없고, 그걸 모르니까 로고스가 속이 타고 괴롭지요. 내가 누구이미 어떤 존재자며, 어디서 만들었는지 모르면 맛있는 걸 먹어도 밥맛이 안 나고 인생의 의미를 결정적으로 제시할 수가 없잖아요. 요즈음은 돈만 있으면 그 딴 것 신경 쓰지도 않지만 말입니다. “신 없어도 밥만 잘 먹더라”

옛날에는 인생의 의미를 신에게 찾는데 그런 사람에게 해결책이 없으니까 이것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고민거리에요. 그래서 천재가 나타나서 속 시원하게 해달라고 했는데 그래서 몇몇 천재들이 등장했습니다.

그중에 플라톤이라는 천재가 등장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 그거 가짜입니다. 왜 가짜냐? 그것은 재료에다가 형상을 가미한 거예요. ‘형상’이란 말 나왔지요. 중요한 용어입니다. 왜 중요하냐 하면, 창세기 1장 28절에 나오거든요. 창세기 1장 28절을 해석하면서 플라톤 철학을 여기다 도입한 거예요. 왜요? 내 안의 로고스(이성)이 납득이 돼야 되니까요. 사람이 납득을 하고 문장을 이해할 때 기독교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건 옛날부터 그랬어요.

형상+질료, 질료라는 것은 흙 이런 것, 물질이죠. 물질이 바로 실체가 되고, 실체는 물질이 부서지면 실체도 날아가고 형상은 형상끼리 따로 모이는 거예요. 인간 속의 형상은 뭐가 되겠습니까? 영혼이 되고 물질은 흙이 될 수밖에 없는, 60조 개의 세포, 이것이 질료가 되죠. 그래서 인간은 영혼과 질료로 되어서 육은 죽지만 영혼은 떠나서 하나님께로 간다는 전도서, 또는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을 표현하는데 ‘영혼이 떠나시다’는 그 표현들이, 바로 사람들이 이런 성경적 표현을 자신의 로고스로서 일체감을 갖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납득해서 신자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용어들이 언어입니다. 언어라는 것은 마치 난타공연과 같아요. 난타공연에서 북에다 물을 뿌려놓고 주방장 복장을 한 연극배우들이 쳤습니다. 치면 물방울이 뛰죠. 물방울 뛰는 게 언어고, 언어를 뛰게 만드는 내부에 로고스의 덩어리가 있어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언어가 이 언어를 사용해도 이쪽 언어와 서로 소통이 되는 것은 이렇게 바로 소통이 되질 않고 이렇게 내려와서 소통이 되는 겁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했죠. 할머니가 손자 보면서 자기 며느리 오니까 하는 말이, “바깥에 덥지?”라는 말이 무슨 뜻이겠어요? “나, 힘들었어. 더 이상 못 보겠다.”는 겁니다. 그것도 이해 못하는 며느리가, “어머니. 지금 어제보다 0.5도 내려왔습니다. 오늘 36도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지금 시어머니의 언어 사용 의미를 이해 못하는 거예요. 즉 “더워서 애 못 보겠다. 돈 들여서 바꾸든지 해라. 나이도 많고 이제 내 인생 즐기겠다.” 그런 뜻인지 그 말을 이해 못하는 거예요.

언어는 언어로 바로 통하는 것이 아니고 뭔가 내면을 통해서 가는 거예요. 뭔가 내뱉을 때는 어제 이야기했잖아요. 모든 언어는 “헬프 미, 나 좀 살려줘”에서 울어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모든 언어가 인간의 로고스에서 나온다 말이죠. 그러니까 플라톤은, “여러분들, 몸은 안 중요해요. 신에게 복귀하는 형상이 중요합니다.”라고 외치는 겁니다. 플로티누스(2세기 사람)는 신이 이 땅에 머물다가, 드러내다가, 복귀한다고 했습니다. 들어보면 마치 로마서 11:36에 나오는 “주께서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로 돌아간다”는 그것과 비슷한 거예요.

로마제국은 모든 성경말씀을 철학으로 다 바꾸어서 믿음 없어도, 즉 성령 받지 않더라도 구원되게끔 조치를 취하는 겁니다. 성령이란 스토아철학(기원전 3세기 경)에 의하면 프뉴마에요. 성령도 철학이라니까요. 철학의 한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어요. 그러니 로마제국의 신자들은 집단적으로 세례 받아도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거예요. 왜요? 빨리 세례 받아서 공무원 승진해야 되니까. 모든 사업이 인센티브가 있으니까. 로마제국에서. 자기도 기독교신자라는 거예요. 아타나시우스신조 이해하고, 아리우스가 왜 나쁜지 이해하고 그게 왜 이단 돼야 되는지 동의한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신이지 어떻게 예수님은 낮은 신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도 동의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헬프 미” 즉 “나의 생존과 구원에 협조해 달라는 겁니다.

신학자들은 이걸 미끼로 자기 교세 키워서 이익보고 영지를 넓혀서 정권과 잡고 정치에 관여하는 겁니다. 권력에 염증을 느낀 사람은 수도사로 나섭니다. 11세기부터 본격화 됩니다. 수도원 건립은 356년 안토니우스의 생애가 알려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군대식 수도원 운용은 포코미우스가 시작했습니다. 군대식 규율과 힘든 노동을 기본으로 합니다. 6세기 경에는 베네딕도 규칙서가 만들어집니다. 수도 생활이란 포기 생활을 의미합니다. 고독이 취미가 되는 것이지요.

이는 자처해서 사회적 죽음을 갖는 겁니다. 새로운 아담이 되기 위한 대안, 일종의 독고노인되기 취미입니다. 주로 사막으로 나아갓는데 수 천명이 나갔습니다. 사막에서 마귀하고 한 판 싸움을 벌리기 위함입니다. 거룩한 남자되기, 이는 곧 ‘신의 친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얻은 사람은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겁니다. 이것을 항시적인 은사로 소유하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영적 엘리트’가 되고 싶은 겁니다.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영발 소지자가 되고 싶은 겁니다.

로고스에서 뮈토스로 돌아갈 사람들은 마귀와 한 번 싸워보겠다는 거예요. 성경에 있으니까 자기도 그렇게 해보겠다는 겁니다. 이게 나중에 영발이 되고 되고 권력으로 우대받는 신앙분위기가 조성됩니다.

여러분 선교사들 수백 명 모여도 누구한데 기죽는 줄 알아요? 아마존 선교사 등장하면 기 팍 죽어버려요. 습도 90%, 최고기온 40도, 거기서 20년 살아보세요. 말라리아에 배길 사람 없어요. [아마존의 눈물] 찍었던 피디는 죽을 뻔 했잖아요. 거기서 20년 동안 봉사하신 분이 이번에 참석하려다 참석 못했는데.

그쪽 동네에서는 완전히 감히 엄두가 안 나요. 어떤 수도사는 높다란 기둥 위로 올라가서 내려오지도 않고 기도합니다. 아마 다른 사람은 70미터에 도전할 거예요.

수도원이 운영은 이콘 제작으로 연명하다가 나중에 성화나 명화 제작. 요새말로 토산물, 공예품 팔아서 운영했습니다. 게다가 옛날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걸 믿기 때문에 올레길에서 게스트 아우스 운영해서 유지했습니다. 올레길이 제주도가 최초가 아니고. 1092년도 우르바누스2세가 십자군운동 할 때 올레길 성폭행 방지한다고 cctv용으로 기사단들이 돌아다닙니다. 거기서 생긴 기사단이 템플기사단입니다. 이 수도원 사람들이 종교 재판이 성행할 때에는 재판관으로 채용됩니다.

‘형상+질료’가 사람이라면 이제 사람은 구원받으려면 내 형상, 내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영혼으로 인정받으면 기독교신자가 돼버리는 겁니다. 참 편리하죠. 그리고 목사한테 고백하기를 “제 몸은 땅에 죽고, 내 영혼은 우리 주님 품에 안깁니다.”고 고백하면 될 것이요. 왜냐하면 목사는 교회의 대표자이요 하나님의 대행자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삼위일체마저 집어넣으면 더 세련된 신자가 될 것입니다.

스토아학파에서는 섭리개념을 언급합니다. 신이 세상을 운명적으로 섭리하는데 신은 초월자라 너무 신비로워서 말로 표현 못해요. 그래서 피조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신의 지시에 따라서 섭리하는 것이 곧 로고스가 하는 일입니다.

이게 기독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신은 있고 피조세계를 데미우르고스란 신이 창조했는데 데미우르고스는 스스로 활동하지 못하고 로고스를 통해서 다스리는데 로고스는 이성이니까 곧 신의 이성, 하나님의 질서가 다양성을 일자로 모으면서 신에게 찬양이 되고, 찬미가 되는 그런 구조로 이 세상은 짜여져 있다고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스토아 사상이 퍼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고대 유럽이 오늘날 한국교회보다 더 기독교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는 셈이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삽니까? 우리 속에 영혼을 신께 가까이 다가가도록 정화시키는 작업이 남아 있어요. 신의 성품을 유지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하나님 형상 닮기’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에서 강단에서 시도 때도 없이 계속 튀어나오는 말, 주의 형상 본받으라 하거든요. 그래놓고 설교 마지막에는 돈 내라는 구실로 사용하지만.

목사들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여러분 속에 신의 형상이 있는데 그 신의 형상을 박대해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박대해놓고 축복 받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뻔뻔스럽습니다. 받은 게 있으면, 해먹은 게 있으면 내놔야 될 건데 그게 은혜를 아는 상식적인 사람입니다. 은혜받아 천국에 가면서 돈도 안내어놓는 인간은 나쁜 놈이요 은혜를 모르고 염치없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부흥집회의 주제입니다.

목회, 어렵지 않아요. “여러분의 아이가 아프고 공부 못하고 남편하고 싸우는 것은 다 신의 저주받아 그렇습니다. 여러분 속의 신의 형상을 회복해서 빨리 저주를 벗겨내란 말이죠.” 바로 이런 말들이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는 겁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합리적인 질서가 속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의 말을 듣고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그래 나는 신과 엮여져있어. 신은 나한테 뭘 원할까? 신에게 어떤 존재가 될까? 옳지. 내 속에 있는 신, 영혼이 있으니까 이 영혼을 신의 성품에 닮아가게 되면 주께서는 내가 원하는 부귀영화를 보너스로 채워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선배들이나 후배들이나 모든 인간들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겁니다. 그것으로 자기는 같은 교인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동의하고 같이 사도신경 외우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라고 여기고 형제간의 결속과 우애와 친교와 계모임을 나누기만 하면 됩니다. 교회가 실질적으로 운영되려면 여기에서 뭔가 더 필요한 게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익히 몸으로 체험되는 철학이 스토아적 운명체험이요 스토아적 윤리, 도덕인식입니다.

스토아학파에서 신의 섭리라 할 때 다른 말로 하면, ‘운명’입니다. 운명이라서 일층 서랍, 이층 서랍에 들어가는 것은 이미 신이 짜놓은 계획대로 되기 때문에 네가 거기서 저항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저항하면 너만 힘들다는 말입니다. 선택론이에요. 네가 정해진 위치, 네 위치에 들어갈 때 전체로 봐서 유용하니까 네 몫을 다 할 때 너는 선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너의 사적인 목적과 여러 가지 목적이 모여서 총체적으로 신의 목적에 도달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스토아가 나왔으니까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약간의 차이점이 있어요. 플라톤은 말하기를 “세상은 전부다 헛것이니까 진짜는 하늘나라에 있으니까 빨리 하늘나라로 가자. 동굴의 우상이라 해서 동굴 속에 있다 밖에 나가면 같이 있다는 걸 알듯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서 신의 나라에 가면 그동안 우리가 같이 있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400년, 500년 전에 다 이야기를 다 했다 이 말이에요.

거기에 나온 단어들이 성경번역에 다 들어가면서 그것이 로마제국 통째로 모든 국민들이 예외 없이 전부다 일괄적으로 기독교신자로 결속을 다지는데 아주 유용하게 그 철학들이 동원이 된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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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 4강


로마교회의 신학을 라틴신학이라고 합니다. 라틴신학에서는 원죄개념이 있고 동방신학에는 원죄개념이 없습니다. 원죄개념이 없이 무슨 기독교가 되느냐,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 되지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부터 모든 인간은 죄 속에 갇혀 있다, 이것이 원죄개념인데 동방교회의 신학에 그 개념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기독교라고 할 수 있느냐, 동방교회는 다른 것이 있어요. 신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신이 직접 사람이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신이, 하나님과 함께 있던 로고스가 육신을 입으면 그것으로 구원은 충분히 되는 거예요. 그런데 로마서는 그것이 아니고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것을 씻어주기 위해서 법적으로 된다는 보상설, 이것이 안셀무스의 보상설이라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의로운 분이고 자기 백성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값을 치르지 아니하면 죄용서가 되지 않기에 값을 치르는 것이 사랑이고 값을 치러서 그 형벌에 대해서 만족하게 되면 그것이 공의고,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 그 두 가지를 다 만족시키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법적으로 된다는 거예요. 동방신학에서는 이렇게 반박해요.

“그러면 묻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안 따먹었으면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올 일이 없겠네요. 아담이 죄를 안 지었으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려 올 일이 없네”하는 거예요. “일 없지” 하니까 “웃기고 있네.” 하지요. 동방에서는 인간이 죄 짓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이 인간되는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죄를 지었던 안 지었던 관계없이 하나님은 사람이 되기로 작정했다,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이 말 들으면 이 말 맞는 것 같고 저 말 들으면 저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럴 때 방법은 두 개 다 집어넣으면 되지요. 괜찮다 싶으면 다 집어넣으면 돼요. 괜찮으면 다 담아버려요. 그것이 바로 개혁주의신학입니다.

그냥 괜찮다 싶으면 다 집어넣고 그냥 일괄적으로 “믿습니다.” 하면 끝나는 거예요. 마구 집어넣고 흔들어서 마시듯이 그냥 “믿습니다.”하면 다 되는 거예요. “삼위일체를 믿습니다.” 삼위일체가 뭐냐, 몰라도 돼요. 다만 뒤에 추임새만 붙이면 돼요. 무조건 “믿습니다.” 하기만 하면 돼요. 나중에 알렉산드리아파는 라틴신학으로 붙습니다. 그래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이쪽은 동방으로 따로 나라가 갈라지면서 로마제국을 동방이 계승한다는 식으로 동로마제국이 되고 그것을 비잔틴제국이라 하고 서쪽은 게르만 쪽이 내려와서 나라를 조각내 버렸어요. 이 게르만 족이 프랑크왕국을 거쳐서 다시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로서 현재 유럽의 나라들이 됩니다.

유럽의 나라들을 살펴보면 현재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런던, 프랑스, 독일,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시리아, 이집트, 이 중간에 흑해라는 바다가 있고 저 위쪽에 러시아가 있습니다. 19세기에는 제정러시아, 수도는 모스크바죠, 그리고 폴란드, 헝가리,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가 있는데 동방에서 전도할 때 이 알바니아 쪽으로 했거든요. 그쪽을 슬라브 민족이 차지하고 있었어요. 슬라브 민족 전체가 동방교회(政敎會, Orthodox Church)의 신학이 정립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개개인이 신학을 알아서 한 것이 아니고 영주 같은 우두머리가 그 종교를 받아들이면 백성들은 일괄적으로 그 종교를 수용했습니다.

그 이유를 아까 설명했지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국가 없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를 하나의 큰 테두리로 본다면 나라는 존재는 혼자서는 의미가 없고 이 국가에 대해서 어떤 위치, 어떤 계급, 어떤 자리를 잡느냐에 따라서 비로소 그 나가 나다.”라고 하는 거예요. 국가는 하나의 테두리고, 공동의 선이고 나는 그 공동선에 기여하는 하나의 자리를 점유함으로 말미암아 공동선의 혜택과 보호를 받으면서 행복한 삶을 산다, 그것이 교육을 받아서 몸으로 익혀진 겁니다.

그래서 항상 종교라 하는 것은 결국 민족과 결부되는 겁니다. “네 종교가 뭐냐?” 하는 말은 “네 민족이 뭐냐?” 하고 같은 물음이에요. 1800년대에 마냐라는 여자가 있었어요. 나중에 퀴리라는 아저씨와 결혼해서 퀴리부인(Maria Skłodowska-Curie 1867-1934)이 되는데 그 사람이 폴란드 사람이거든요. 퀴리부인이 어릴 때 폴란드가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우리 폴란드는 절대로 우리 국가를 잊어서는 안 돼.” 하면서 폴란드 역사를 몰래 배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러시아 장학사가 들이닥쳤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미리 준비한 뜨개질 도구를 전부 꺼내놓고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장학사가 와서 “지금 무슨 시간입니까?” 하니까 “우리는 지금 양재시간입니다.” “그래요? 여러분에게 이제 폴란드는 없습니다. 이제 러시아에 속한 겁니다. 얼마나 교육을 잘 받았는지 시험을 해 보겠습니다.” 선생님은 러시아어를 제일 잘했던 퀴리부인을 일어서도록 했어요. “러시아 황제의 계보를 이야기 해 보라.” 남의 나라 황제의 계보를 왜 이야기합니까? 우리나라 식민지 시절에 일본천황계보를 외워보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지금 걸리기만 하면 선생님은 사표제출 할 판이에요. 어린 퀴리부인이 답합니다. “표트르 1세, 예카테리나 1세, 표트르 2세……파벨 1세, 알렉산드르 1세, 니콜라이 1세.” “지금은 누가 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지? 지금은?” “지금은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황제 2세폐하가 다스리고 계십니다.” “고뢔~?” 여기서 그 유명한 개그 “고뢔~?”가 나왔어요. 그래서 무사히 그 교실이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중에 퀴리 부인이 되어서 라듐 발견했는데 연구하다 하도 방사선에 노출되어서 암 걸려서 죽어버렸지요, 뭐.

그 당시 러시아에 복속된 나라는 강제로 러시아 말로 주기도문을 외웠어요. 우리 민족이 되려면 종교가 일치 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개인적인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보통 인간한테는 해당 안 되는 이유가 개인은 국가의 안전과 보전, 국가라는 더 큰 권력 체 밑에서 생존을 누리고 싶은 충동이 있는 이상은 내가 사적으로 예수 믿겠다, 하는 것이 성령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점을 누가 아는가, 이 점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성령을 집어넣어준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사태가 벌어지도록 하느냐?

옛날에는 국가 되기 전에 뭐가 있었는지부터 먼저 봅시다. 옛날에 국가 이전에 부족사회가 있었고 그 이전에 부족연맹이 있었지요. 부족연맹 밑에는 씨족사회, 씨족사회는 어느 시대냐 하면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시대의 씨족사회인데 보통 그 시대를 청동기시대로 보지요. 그 이전에는 신석기시대, 그 이전은 구석기시대, 그 전에는 호모 사피엔스, 호모에렉투스, 호모하빌리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런 식으로 죽 거슬러 가는데 진화론에서는 이것을 약 2백만년 전으로 보지요. 호모에렉투스(Homo Erectus)에서 에렉투스라는 뜻은 ‘직립’ 똑바로 서서 걷는다는 뜻이고 하빌리스라는 것은 도구를 사용한다는 뜻이고 호모사피엔스라는 것은 머리를 쓴다는 뜻이지요.

호모에렉투스는 두뇌의 부피가 500cc인데 호모사피엔스는 1500cc여서 세배나 커지면서 그만큼 두뇌피질이 많아졌고 두뇌피질이 많아진다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더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인간두뇌 속에 제일 밑바닥층위에는 먹고 마시는 충동적인 것만 있다가 점차 세월 따라 진화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어쨌든 국가로의 발전이 이어지는데 잉여 생산물의 증가로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하는 4문명(이집트의 나일 강 유역, 인더스 강 유역, 중국의 황하,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 강 유역)이 일어나지요 사실은 기원전 6천년 전경의 아프리카가 가장 먼저고요, 4대 문명의 발상지라 하는 지역들은 기껏해야 기원전 약 4천년 경에서 기원전 2000년경에 일어난 거예요.

씨족연맹이 부족연맹으로 그리고 국가로 발전하면서 어째서 인간은 개인위주가 아니고 단체위주냐를 따져 봐야 합니다. 그것은 종교 곧 신과 관련있습니다. 스페인의 알타미라라는 곳에 동굴이 있는데 거기 보면 사냥하면서 제사하는 것이 나온다는 말이지요. 호모사피엔스, 현생인류(크로마뇽인)가 머리를 쓰는데 추상적인 신개념이 어떻게 그때부터 있었느냐는 말이지요. 신이라는 것은 인간에게서 쏙 빼내버릴 수는 없는가, 왜 인간 속에 신이 박혀 있는가 하는 겁니다. 그 신 개념이 뭐냐, 하는 거예요.

그래서 문화인류학자들이 조사를 해보니 신(神)개념은 의외로 간단했어요. 경계선 개념이었습니다. 숲에 사는 동물은 숲에만 살고 민간으로는 넘어오지 마세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숲이 우거졌다, 침침하고 어둡다, 그 안에는 인간을 해코지 하면서도 인간에게 저항할 수 없는 힘센 무엇이 거기에 들어 있다, 그래서 숲속에 들어갈 때는 그냥 가면 안 되고 예물을 드리고 제사를 그 신에게 바쳐야 무사히 나물이라도 캘 수 있고 여러 가지 위험을 방지할 수 있다, 하는 경계선입니다.

여기서 여기까지는 인간의 영역이고 여기서부터는 인간이 손 댈 수 없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미지의 영역을 뭐라고 하느냐, 그것을 그냥 신의 영역이라고 하자, 이게 바로 구약에 나오는 다신사상, 이방종교의 특징입니다. 민수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지경을 통과할 때에 이스라엘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우리가 아무것도, 과수의 열매를 비롯해서 무엇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니까 그냥 이 땅을 통과하게 하라.”고 하는 거예요. 옛날에 애들 데리고 소풍갈 때 과수원을 지나가게 되면 과수 막 따먹었어요. 애들은 먹지도 않을 거면서도 막 따고 그랬어요.

그때 모압은 이스라엘에 저항했지요. 왜냐? 그 땅이 누구 땅이냐 하면, 자기도 범접 못하는, 자기들의 신이 사는 모압 신의 땅이기 때문에 그래요. 모압의 그모스, 암몬의 밀곰, 이런 신들이 다 국가 마다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옛날에는 곰 같은 동물이 신으로 많이 등장했어요. 단군신화에도 곰이 등장하잖아요. 그래서 한국말에서 ‘고맙다’는 말은 ‘곰답다’는 이야기입니다. 꼭 이런 것까지 이야기해야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고맙다’ 하는 것은 ‘당신에 내게 베풀어주는 이것은 신의 은총입니다.’ 하는 ‘곰답다’에서 왔다는 연구가 있는데 이것은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모압지방을 통과하겠다고 하는데 그것을 허락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도 마음대로 범접하지 못하는 신이 사는 곳을 인간이 들어가서 어지럽히면 신이 화를 내서 갑자기 천둥번개가 친다든지 비가 안 온다든지 하는 우환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 뮈토스(신화)의 세계에서는 신은 신대로 놀고 우리 인간은 인간끼리 놀자, 이것이 에피쿠로스학파의 특징이에요. 이것이 당시에 스토아파와 라이벌 관계에 있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주의인데 그냥 먹고 즐기자는 것이 아니고 “신은 인정하되 신은 인간에게 관여하지 않는 신이다.”라는 신입니다. 신은 인정하되 그 신은 인간에게 관여하지 않는 거예요.

현대철학으로 본다면 칸트철학과 마찬가지입니다. 신은 신대로 놀고 우리 인간은 인간들끼리 놀면 되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여러분! 구미가 확 당기지 않습니까? 신은 신대로 놀고 우리는 우리끼리 놀고, 그러면 그 반대편에 서 있던 라이벌 학파인 스토아학파는 뭐냐하면, 신이 섭리해서 운명적으로 우리를 관여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신이 관여하기 때문에 우리는 로고스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로고스는 신에게서 나온 성품이기 때문에 우리는 신 앞에서 겸손하게 마음을 낮추면 된다는 거예요. 지난 광주강의에서 한 내용을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공리주의,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공리주의라 합니다.

벤담의 공리주의가 뭐냐,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은 ‘쾌락-고통=행복(쾌락에서 고통을 뺀 이것이 행복’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행복 하고 싶어서 사는데 어떻게 하면 되는가? 고통을 줄이든지 아니면 쾌락을 늘이든지 하면 되지요. 이혼을 했다(고통이 늘어났다) 싶으면 골프를 쳐서(쾌락을 늘여서) 행복이 늘어나게 하는 방식을 취하면 되지요. 행복이 그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스토아학파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쾌락을 증진시키려면 뭐가 필요합니까, 돈이 필요하거든요. 돈이 없는데 어떻게 고통을 줄이고 쾌락을 늘일 수가 있겠습니까? 이 때는 마음을 낮추면 되는 겁니다. 절제지요.

갑자기 절제가 나오니까 성령의 열매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절제를 하게 되면 어지간한 고통도 “그래, 나 보다 못사는 사람을 생각해서 견뎌야지.” 이렇게 하면 행복해진다는 겁니다. 뺄 것이 별로 없으니까. 그게 바로 스토아학파에요. 이 스토아학파가 인간 속에 로고스로 자리 잡게 되면 그것이 플라톤이 말한 상기설(想起說)이 됩니다. 기억나게 하는 것, 어떤 기억, 인간은 흙이고 모방에 불과하지만 인간 안에 로고스(영혼)이 있는데 그것은 신이 갖고 있던 신의 성품이 우리 안에 잠재된 채 들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교육을 하게 되면 인간 속에 잠재되어 있는 착하 성품, 거룩한 성품을 개발해 낼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것과 유사한 교육이론이 바로 존 듀이의 교육학이론입니다. “교사는 간섭하지 마라. 제자들이 갖고 있는 자질을 마음껏 개발해 주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미국의 교육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교사는 될 수 있는 대로 간섭하지 말고 그가 갖고 있는 소질이 무엇인가를 개발함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자의식을 빨리 정착시켜서 훌륭한 이 나라의 시민으로, 여기 국가가 또 튀어나오지요, 국가의 궁극적인 목적인 최고의 선한국가가 되는데 서랍에 있는 자기 자리로 정착해서 기여할 수 있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박태환은 수영만 잘해야 되고 연애하고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식이에요. 수영하는 그것이 자기 자리가 되는 겁니다.

자기목적에 합하여 잘했을 경우에 그것을 ‘선’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선한 것은 뭐냐, 역량껏, 욕심내지 말고 해라.” 이렇게 하니까 또 로마서 12장이 생각나지요. ‘믿음의 분량대로 살아라.’라는 것이 나오지요. 그것과 또 연관되는 거예요. 스토아학파의 ‘선’을 보면 잠언서가 또 생각납니다. ‘가난한자도 부한 자도 다 하나님이 합당하게 지으신 것이다.’ 잠언 서에 나오는 그 이야기도 스토아학파에서 나온 그 이야기와 유사하다면 이제 성경 볼 필요도 없이 철학만 하면 그 안에 다 포함이 되는 거예요. 플라톤의 ‘상기설’이라는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잠재적 자질로서 누구나 다 신을 알고 있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서 신의 성품을 닮도록 할 수 있다.”라고 할 때 그 상기, 깨닫게 해주고 기억나게 해주는 그 능력이 로고스인데 어거스틴(354-430)이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이것을 무엇으로 봤느냐하면, 그것을 ‘성령의 조명’이라고 본 거예요. 이것이 어거스틴이 조명설(照明說)이에요.

성령의 조명, 세상적인 지식은 인간의 로고스가 담당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받는 은혜에 관해서는 성령이 조명하게 되면 다시 기억이 나게 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많이 알고들 있지요.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그리고 장로교는 개혁주의 계통을 밟습니다. 개혁주의, 곧 칼빈과 루터는 어느 계통을 경과했느냐 하면 사도바울로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에 유일하게 인정하는 사람은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에서 그대로 붕 떠서 닿은 것이 루터, 그 루터를 베낀 것이 칼빈, 이렇게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 ? 어거스틴 ? 루터(칼빈)’ 그 칼빈에 의해서 개혁주의가 ‘기독교강요’로서 신학으로 정립되게 되는데 그 뿌리를 캐보면 그 원조가 어거스틴이 나오고 그 어거스틴은 어디서 나왔는가, 어거스틴이 사도바울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그것은 칼빈과 루터의 자기네들 생각일 뿐이고 실상 어거스틴은 플라톤에서 나왔어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왔어요. 또 스토아학파에서 나왔다는 말이지요. 시대 시대의 논리는 플라톤이 담당하고 윤리에 관한 것은 스토아학파에서 나온 거예요. 스토아학파의 윤리가 뭡니까, 절제하고 마음을 낮추면 행복 안할 것이 없다는 거예요. 결국 사람 사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을 믿으면 행복해집니다, 그것이거든요. “행복하소서.” 결국 그거예요. ‘행복하소서’에 대해서 싫어하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없잖아요. 그러면 다 기독교신자가 되는 겁니다. 얼마나 간편합니까? “자식아, 네가 이렇게 부모 속 썩이고 교회 안 나가는데 너도 교회 나가서 하나님 믿어라.” “어머니,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네 속에 이미 하나님의 영혼이 있는데 마음을 낮추고 나 죄인이다, 이렇게 하면 나쁜 친구들도 떠나가고 너는 이제부터 행복해질 수 있는 거야.” 행복 못해서 환장을 했어, 환장을!

“어머니, 행복은 무엇입니까?” “행복이라는 것은 네 자리 찾아가는 거야.” “제자리가 뭡니까?” “욕심내지 말고 실력껏 해라. 공무원시험에서 일곱 번 떨어지거든 그거 하지 말고 치킨집을 하든지 다른 것을 해라. 네 자리를 빨리 찾아가라. 결혼을 안했거든 얼른 시집이나 가서 애나 순풍순풍 낳고 그저 시부모 잘 섬기고 치매 걸리면 등 떠밀어서 요양원으로 보내고, 그렇게 살면 훌륭한 며느리가 되니까 그렇게 살아라. 제발 네 자리 좀 찾아가 줘. 그것이 주께서 주시는 역할이다.” 그 역할을 가지고 휘포스타시스(hypostasis)라고 합니다. ‘위격(位格)’이에요, 위격. 삼위일체에 나오는 그 위격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위격을 페르소나(persona), 하나의 인격이라 하는데 그 ‘휘포스타시스’라 하는 위격이란 하나의 신분이에요.

삼위일체 속에 그 신분이 결정되어 있어요. 누구 신분, 성부는 하나님이니까 빼놓고 또 성령은 영이니까 그 분도 빼놓고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하나님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성자지요. 성자 예수님이 갖고 있던 그 위격, 신분이라는 위치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위치니까 신자가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누구를 롤 모델로 삼으면 되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본성과 존재성을 모델로 삼아서 예수님이 삼위일체 속에서 갖고 있던 그 위치, 그 역할을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본받게 되면 우리도 예수님 못지않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는 위치에 있게 되는 겁니다. 그 위격을 강조한 사람이 ‘둔스스코투스Duns Scotus, Johanes (1266-1308)’라는 신학자고요, 토마스 아퀴나스를 반대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 전에 중간에 하나 빠진 것이 있는데요, 지금 신론을 하면서 ……, 이제부터 어려운 것을 시작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신론을 정립할 때 초반에 제일 어려웠던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했잖아요. 이때 철학자들이 제일 난처했던 것은 이 천지를 창조하면 악은 어디서 튀어나오느냐?’ 하는 문제에요. 악은 어디서 나왔게요? 악은 악에서만 나왔다고 하면 안 되지요.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일자(一者)가 아니고 이자(二者)가 되니까 그것은 로고스가 용납을 못해요. 시어미 둘 섬기려면 골치가 아파요, 하나로 모아야 돼요. 대통령도 둘 되면 곤란하잖아요.

결국 마지막 오디션도 두 명이 최종 남게 되지요. 여러 명이 하게 되면 골치 아파서 안 되니까. 왜 골치 아픈가, 이 로고스가 불안정해서 안 되겠어요. 신이라는 것은 자기 안정하기 위해서 신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세 분입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이것이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세분 같으면 시어미가 세분인 셈인데 이쪽 시어머니 섬길 때 저쪽 시어머니 삐질 텐데, 몸은 하나지 하나님은 세분이지 이것은 미치고 환장할 짓이 아닙니까? 그래서 동방신학에서는 성부를 하나님의 대표자로 세우는 거예요. 이것이 동방신학입니다. 그런데 라틴신학, 로마신학에서는 최종대표를 정하기를 성부와 성자 성령 다 똑같이 하자고 정한 거예요. 최종대표는 성부가 아니고 성부와 성자와 성자가 똑같이 대표자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동질본질’이라는 단어를 여기에 사용하는 겁니다.

성부가 대표자가 되면 성령은 어디서 오는가? 오직 성부께서 성자를 통해서 성령이 우리에게 온다는 것이 동방신학, 곧 정통(Orthodox)한 교회신학인데 종교개혁 할 때 동방정통스교회는 영향을 안 받았어요. 왜 영향을 안 받았을까요? 그들은 국가가 교회고 교회가 국가기 때문에 자기 국가를 스스로 깰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원래 민족국가 자체가 정통이기에 손 댈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 동방교회에서는 성부께서 성자를 통해서 성령을 주신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로마 라틴교회에서는, 그것이 아니고 “성령은 성부에서도 나오고 성자에서도 나온다.” 하니까 동방신학에서는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라고 말합니다.

이게 필로꾸베(Filioque, 아들로부터)논쟁인데, ‘아들로부터 나온다.’는 문구를 집어넣자는 거예요. 동방교회에서는 “아들에서 성령이 나와 버리면 성령께서 두 군데서 나온다는 말인가? 성부 한 곳에서 나와서 아들을 통해서 성령이 나오신다, 이렇게 해야 맞지.”라고 한 거예요. 성령이 성부에서도 나오고 성령이 성자에서도 나온다면 성령이 ‘이번에는 아버지에게서 나왔나, 이번에는 아들에서 나왔나?’ 성령 본인조차 헷갈린다는 말이지요.

예를 들면, 냉장고를 한 대 받았는데 이게 장인이 보냈는지 장모가 보냈는지 분명치 않아서 아파트 주소 따라 처갓집에 가 봅니다. “냉장고 한 대를 장인어른이 보냈습니까, 장모님이 보냈습니까?” 물어보니까 장인이 하는 말이 “내가 우리 집사람한테 사위네 냉장고 하나 바꾸라고 해서 보냈다.” “그래요??” 하면 이해가 쉽게 되는데 “장모님이 보냈습니까, 아니면 장인어른이 보냈습니까?” 하니까 장인과 장모가 서로 “내가 보냈거든!” 하면서 부부싸움을 할 판국이라.

냉장고가 두 대면 말이 되는데 냉장고는 딱 한 대만 왔으니까. 서로 보냈다면 도대체 누가 보낸 겁니까? 이게 오늘날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이 ‘필로꾸베’를 칼빈, 루터도 동의헸습니다. 어거스틴이 하늘 같은 선배이니까요. 거기서 어긋나면 이단입니다. 교인들은 그 내막도 몰라요. 왜, 모태신앙이니까. 그런 것은 필요 없어요. 삼위일체를 믿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다녀온 그 교회를 믿고 그 당회를,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를 믿습니다. 그래서 목사나 장로가 기도할 때 맨날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를 집어넣어서 기도하지 예수님이 누군지를 말을 안 해요. 어제 오후에 우리교회에 주께서 보내신(필로꾸베) 분이 오후예배 기도를 했어요.

기도내용은 간단합니다. “말씀이 역사하사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까지 우리이 모든 것을 쪼개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경구절이 들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평소에 성경 구절을 품고 산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품고 산다는 것을 믿음이 좋다는 것과 동의어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그냥 품고 사시는 거예요. 분명히 다시 이야기합니다. 품고 사셨던 거예요. 그것은 어떤 점에서 다른 사람에게 좋으냐 하면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전제함으로써 다같이 그 말씀을 너나눌 수 있어 좋은 겁니다. 사람들이 살기가 바쁜데 언제 말씀 봅니까, 그런데 그 장로님이 기도시간에 말씀이 이렇게 들어가게 되면 잊어버렸던 그 말씀을, 플라톤의 뭐? 플라톤의 ‘상기설’, 또는 어거스틴의 ‘성령의 조명설’에 의해서 다시 기억이 나서 은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겁니다.

제가 기도내용에 성경구절을 넣어서 하면 구원받는 장로님이 된다는 그런 말을 안했지요? 그 이야기를 안 한 거예요. 자꾸 오해들을 하시는데 오해들 하지 마세요. 누가 구원받고 안 받고는 같은 피조물이 관여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동방교회 입장에서는 서방교회와는 달리 법적인 것이 아니에요. 법적인 것이 아니고 신비적입니다. 신이 우리에게 임한 거예요. 그래서 모든 교회 이벤트, 행사, 쇼 같은 거지요. 러시아의 문학가 톨스토이나 토스토예프스키의 경우에는 정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은 종교쇼로 봤습니다. 토스토예프스키의 경우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해서 그리스정교회를 권력단체의 하수인으로 본 겁니다. 또 토스토예프스키뿐만 아니라 톨스토이도 반대했습니다.

톨스토이는 평생 동안 정교회와 싸웠습니다. 톨스토이의 신학은 뭐냐, “산상설교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자기가 시범을 보이겠다는 겁니다. 대지주의 아들이었지만 그 받은 유산을 몽땅 다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었어요. 바보 같은 짓을 한 겁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마누라와 평생 싸웠어요. 그리고 죽을 때는 거지꼴로 죽었습니다. 자식들도 아버지를 안 좋아 했어요. 아버지가 유산을 처리할 때 자식의 허락을 받아야 됩니다. 왜, 일부 거기에는 자기 몫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것이 아닙니다. 일부 자식들 몫이 들어 있어요. 큰 아들, 둘째 아들, 딸까지 법적으로 다 들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기 아내 것에 해당되는 몫만큼만 기부하고 그 나머지는 손대지 말아야 됩니다. 그것 잘못돼서 삼성 가는 지금도 싸우고 있잖아요. 톨스토이나 토스토예프스키는 뭐냐하면 “성경을 봐라. 기독교는 하나님의 그 나라와 의를 이 땅에 세우는 것이다. 어떻게 세우는가, 산상설교는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에 있는 대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가난한 자들을 그냥 도우라.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릴 때 사람은 행복해진다.’” 이것이 무슨 철학입니까? 아까 배웠지요? 이것이 스토아철학이에요.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신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이 스토아 철학이에요. 성령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 역사를 건성으로, 표피적으로라도 볼 기회가 없잖아요. 그런데 이 시간을 통해서 교회사의 내막을 돌아보게 되면 우리가 현재 하는 짓을 같은 인간인 선배들이 이미 다 해 왔던 것입니다. 그것이 잘 팔리니까 수도원에서 아이콘(성화)을 만들어서 팔았어요. 성지순례 때, 그림도 팔고 또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해서 수도원을 유지했거든요. 올레 길은 우리가 처음이 아니고 이미 저 사람들이 다 했다니까요. 유럽에 무슨 성지순례가 있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유럽의 교회들이 성인들을 계속 추대해왔다는 점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유럽의 성지는 성인이 나올 때마다 성인이 나온 그 고향, 학교, 일가친척, 주변의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서 다 성지가 되는 겁니다. 돌아보는 거지요.

자칫하면 이 가야산 이곳도 성지가 될 수가 있어요. 여러분하기 나름입니다. 여름에만 오지 마시고 4월이나 7월에도 와서 둘러보는 거예요. ‘내가 이 사우나에서 은혜 받았는데.’ 하면서 둘러보는 거지요. 사람들이 느끼는 모든 뮈토스 적인 신비감은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고 느껴지는 이런 것을 통해서 되는데 동방신학이 그것을 가지고 집단화 즉 국가 전체를 신자로 만드는데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식한 사람들, 짐승 잡는 도살자나 고상한 철학자나 상관없이 인간의 기본적인 것은 신과 합일하고 싶은 그 욕망, 그것을 가지고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 또는 플로티노스의 경우는 삼중신 표현한 거예요. 세명이 신이 하나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결국 신을 찾고 결국 인간의 모든 안식은 신의 품안에서, 하나님의 품 안에서 누린다.” 이것을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이것을 누가 이야기해서 유명해졌습니까? 어거스틴이 이야기해서 유명해졌습니다. 이런 것이 액자로도 많이 팔렸을 거예요. “내가 신의 품안에 있기 전까지는 안식을 누리지 못했는데 신의 품 안에서 비로소 안식을 누렸다.”는 겁니다. 많이 행복들 하세요. 행복이란 쾌락에서 고통만 제거하면 되니까요. 부부가 서로 싸워서 불행하다. 그러면 행복의 방법은 뭡니까? 고통의 요소, 즉 이혼하면 되겠지요. 얼마나 간단합니까?

하지만 실은 고통이 내부로 들어가서 흐릅니다. 이것을 가지고 ‘내재적 신론’이라 합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입니다. 플라톤 철학과의 차이점이에요. 플라톤은 “세상의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닌 허상이다. 잊어버려라.” 이렇게 됩니다. 성경 야고보서에는 “인생은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다.”라고 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목적을 갖고 있다. 목적이 있는 이상 우리는 거기를 향해서 달려가야 된다.” 어디를 향하여? ‘신을 향하여.’ “그냥 달려가면 안 되고 점점 더 신을 모방한 영혼을 가지고 달려가게 되면 그만큼 우리는 선해지고 선한만큼 우리는 유용하고 유용하면 신의 축복을 받아서 우리는 행복해진다. 목적 없는 인간은 인간도 아니다. 목적 없는 인간은 개나 소나 마찬가지다. 인간은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이란 신을 향한, 저 높은 곳을 향한 선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베낀 사람이 누구냐,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사람인데 천주교의 대부, 천주교의 멘토, 지금의 모든 천주교의 신학을 제공하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것을 이야기한 거예요. 그래서인지 천주교는 부동산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어요. 교회에 제일 위에 누가 있습니까? 교황이 있지요. 교황은 교회의 머리가 돼요. 처음에는 교황제도가 없었습니다. 황제의 정치적 술수에 의해서 교황제도가 만들어졌거든요. 황제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교황제도가 있어야 된다고 주교들이 부추겼어요. 처음에는 주교가 있었고 주교 다음에 요새 말로 하면 목사인 사제가 있지요. 주교는 디모데전서이 용어로 하면 ‘감독’이고 주교 다음의 사제는 목사, 또는 목자, 그 다음에 부제라는 것이 있는데 이 부제라는 것이 뭐냐, 성령을 받아서 교회 봉사하는 사람, 현대교회로 하면 이것은 집사쯤 되겠지요.

사도행전에 보면 일곱 집사가 나오지요. 그것을 그대로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평교인 들이 있고, 그래서 계급이 형성되는 겁니다. 이 계급이 형성되면서 제도가 구약의 제사제도로 바뀌었습니다. 미사가 제사거든요. 예배가 아니고 제사입니다. 이 차이점이 뭐냐, 예배라는 것은 그냥 집에 있어도 되는 것이 예배지요. 그런데 모여서 형식을 갖추게 되면 그것은 제사형식을 취해야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약 때 보면 구약 백성들이 자기 집에서 모였습니까, 아니면 성전에서 모였습니까? 성전에 모였지요. 신약 때 집에 모인 것과 퍽 대조적입니다. 모여서 제사형식을 갖추면서 예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감독이 구약의 제사제도로 변경을 시켜 놓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은혜가 오는 통로를 독점한 거예요. 다른 통로로서는 복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마치 구약의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활동한 것처럼. 제사복장을 하고 제사 제도를 갖추고 제사의식을 하니까 그때서야 국민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수긍이 되는 거예요. 신약 적으로는 안 믿던 사람이 구약 적으로 해서 믿었다는 그 말은 그것이 믿음이다, 아니다? 믿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이다, 아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눈에 딱 보이니까, 촛불 켜고 구약 복장을 하고 설쳐대니까, 제사장은 거룩하고 자기는 속되고 더럽고, 이러니까 그것이 비로소 ‘아, 교회 와야 구원받는구나.’라는 식으로 아는 거예요.

그리고 요한복음에 보면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니까 네가 누구의 죄를 사해주면 죄가 사해진다.”(요 20:23)’는 사죄권이 등장한 거예요. 그래서 고해실안에 사제가 삐딱하게 앉아 있고 밖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하게 되면 “사도신경 스무 번 외우시고 기도문 외우시면 됩니다.” 라고 영적 처방전을 끊어주지요. 어떤 영화에 보면 마약 판매하는 갱들이 갑자기 고해하는 척 하다가 고해실 안의 사제에게 기관총 세례를 퍼붓는 장면도 있어요. ‘야, 성당도 저렇게 당하는구나.’ 하고 봤는데 신부가 북한에 왔다 갔다 하고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하는 정부에 반대데모를 선두에 서서 해도 다른 사람이 손을 못 대는 것은 이 사람이 신의 패밀리 같은 거기 때문에 저지는 해도 아예 말릴 수는 없는 거예요. 장가도 안간 사람들이죠.

그 카리스마, “나는 하나님 외에, 예수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그 것, 내 배 째라는 식이지요. 그런 식으로 북한에 왔다 갔다 하고 해군기지 건설하는 것 반대하는 거예요. “내 배 째라. 나는 고아와 같다. 내가 죽으면 너희가 무사할까 보냐.” 그런 큰소리를 치는 것, 그러니까 마귀 들린 사람들은 거기에 그만 기가 죽지요. 거기에 기 안 죽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사실은 다 철학하는 사람들이거든요. 이렇게 해서 체계를 갖추게 되면 그 당시 농노가 있던 사회에서는 이 주교제도에 단체로 가입을 하게 되면 신자 되는 혜택을(사실 전 국민이 신자니까 혜택이랄 것도 없지만)을 입게 되는데 그 대신 연줄이 있어야 돼요.

애들 세례줄때나 결혼식 할 때 초야권 같은 것,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관계는 봉건사회에는 계속 있어왔던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굳건하게 있었던 그 기독교 국가가 어떻게 해서 오늘날 이렇게 개판이 되었습니까, 어떻게 해서 거기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휘포스타시스(위격)에 있어요. 위격이란 뭐냐, 개인적인 개성을 인정해주자는 거예요. 하나님은 세분이지만 각자 개성이 있다는 거예요. 주님이 개성을 갖고 있을 때 영광이 된다면 우리도 개성을 갖고 있을 때 영광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지가 따로 있지만 우리의 의지도 따로 있어서 우리의 의지로 뭘 해도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것이 둔스 스코투스라는 사람, 즉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에 나온 사람이 드디어 불을 지폈습니다.

이것이 ‘의지주의’인데 “인간의 의지, 인간의 자율적인 선택도 하나님의 선택의 한 모양새가 된다.”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따로 있고 우리는 거기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곧 하나님의 선택이 된다. 마음껏 선택하라. 그러면 그것을 곧 하나님의 선택으로 간주해준다.” 하는 거예요. 그것을 그대로 인수한 사람이 윌리엄 오컴이라는 사람입니다. 윌리엄 오컴이 등장해서 “모든 법을 초월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요 곧 우리의 의지다.” 그렇게 된 거예요.

그 당시 성령 안 받은 사람 없고 다 받았어요. 전부 다 안에 로고스가 있기 때문에 다 받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성령 받은 사람의 모든 의지가 곧 하나님의 의지가 된다.” 이것이 윌리엄오컴의 주장인데 여기서 오컴의 제자가 누구냐, 마르틴 루터라는 사람입니다. 수녀와 결혼함으로서 나의 수녀와의 결혼이 곧 하나님의 선택인 것을 행동으로 보여줬습니다. 행동하는 양심가, 행동하는 개혁가. 여기에 불이 붙은 것은 농민들, 이들에게 불이 붙었습니다. 마르틴 루터 킹, 흑인 해방운동가와 이름도 비슷하잖아요. 농민해방, 흑인해방, 그런 것도 비슷하잖아요.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95개조의 교황과 그 당시 교회에 대한 반박문을 써 붙여놓았어요. 거기 써 붙여 놓은 것, 그것 성경 아니거든요! 성경 아닌데 뭘 자극했겠어요? 나의 선택과 나의 개성도 곧 누구의 지시와 누구의 명령도 받을 필요 없이 그 자체가 신의 뜻이 될 수 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그것의 몸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온 이 휘포스타시스가 실체라는 말인데 그것을 후대의 철학자들은 무엇을 바꾸는가, 그 유명한 ‘주체’라는 말로 바뀌는 겁니다. 주체로 바뀌면서 사회가 완전히 뒤바뀌는데 드디어 근대시민국가로 바뀝니다. “귀족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누리는 것을 우리도 누릴 자격이 있다.” 거기서 나오는 문화가 로코코문화라는 겁니다.

바로크라는 것은 프랑스왕궁의 화려한 문화가 바로크라면 니들만 누리나, 우리도 누리자 해서 대중적이면서 천박한 문화스타일로 나온 그것이 로코코라는 것입니다. 기묘하고 뒤틀린 선들로 표현되는 문화로 가면서 대중화 되고 그래서 “돈 있는 자는 누구나 귀족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이 일어나면서 이탈리아 북부의 피렌체, 십자가운동 당시에 돈벌이 톡톡히 했던 무역상들의 그 피렌체 같은 도시들로부터 ‘내 느낌대로 살기, 내 느낌대로 성경해석하기 운동’, 바로 르네상스, 문예부흥운동이 일어나는 겁니다. 르네상스가 뭐냐 하면, 성경해석에 대해서 교회에서 내려온 전통적인 성경해석 말고 내가 느낀 마리아, 내가 느낀 예수, 내가 느낀 하나님에 대해서 그걸 그대로 그림으로 그려내는 거예요.

아담을 귀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아담을 소외된 인물로, 아주 고통스럽게 보이도록 그림으로써 고통스런 자기 처지를 그런 식으로 묘사해서 화폭에 담는 겁니다. 기독교를 안 벗어나는 척하면서 거기서 개인적인 개성을 돋보이게 만드는 거예요. 마리아를 그리던 그림을 모나리자로 그려버려요. 비록 눈썹은 없지만. 눈썹 없는 여인을 그림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단아하고 단정했던 것을, 마리아가 차지했던 그 극단의 아름다움을 개인적인 아름다움으로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에피쿠로스학파지요. 뭐냐, 신을 안 섬기겠다는 것이 아니에요. 신을 섬기되 “신은 어른들끼리 노세요.” 둔스 스코투스의 이론에 의해서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감사로 영광 돌리면서 살겠습니다. 우리의 직업 하나하나가 소명된 것이고 귀한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 때부터 현미경이 만들어져서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목성의 위성이 두 개인지 세 개인지 갈릴레오가 보기 시작했고 그래서 갈릴레오의 상대성원리가 나와서 그때부터 “모든 등속 하는 입장에서는 같은 물리법칙이 통한다.”고 했고 그 후에 유일한 등속을 가진 것은 오직 빛 밖에 없기에 아인슈타인은 “모든 인간의 시계가 같이 가지 않는다.”고 한 겁니다.

아인슈타인에 따르면(상대성 시계 속력공식) 옆에 같이 살아도 시계가 달리 간다는 말입니다. “공간의 속도가 시간의 속도를 잡아먹고 우리는 지금 절대시간이 아니고 시간 속을 여행하고 있기에 시간을 믿지 말라, 공간도 믿지 말라.”고 한 겁니다. 만약 속도가 모두 공간을 통해 움직이는데 사용되면(빛의 속도로) 시간을 통해 움직일 속도는 하나도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지금 우리는 어디로 여행하는지 분간도 못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어요. 이러한 로고스가 지금은 과학이라는 것, 과학이라는 이름의 로고스가, 국가 대신 이 과학이 우리를 지켜주고 우리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이성으로 지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요? 내가 보기에는 아인슈타인을 믿고 물리법칙을 믿는 것으로 보여요. 하나님을 믿어요? 아닐걸요?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따로 놀고 이 땅에서 우리가 일구어낸 과학의 발전을 우리가 믿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뿌리까지 캐내니까 우주의 역사는 137억 년 전부터 있었고, 그때에 빅뱅이 있었고 평행우주론이 나오고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 이야기, 그것은 옛날의 신화적인 이야기일걸, 이제는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놀고 그저 착함으로써만 하나님을 믿지 그 나머지는 우리에게 맡겨놓으라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이미 과학이라는 이름의 로고스에 지배를 받고 있는 거예요. 과학이 로고스, 진리가 되는 겁니다. 과학이 아니면 진리가 아니에요. 뭐가 되었든지 과학적으로 수학적으로 이야기를 해야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겁니다. 경제도 통계를 내놓고 이야기를 해야지 통계 없이는 아무 이야기도 못하는 시대에 와 있어요.

이러한 분위기가 그 당시에도 있었는데 거기에 대해서 교회가 나름대로 성경책에 나오는 내용을, 그런 철학을 이용하면서 뭔가 그런 철학과 독특함, 개성이 있도록 하기 위해서 뭔가 한소리 해야 될 텐데 그 한소리 한 것이 뭐냐, 하나님은 유에서 유를 만든 것이 아니고 없는데서 있는 것을 만들었다는 망발을 해버렸어요. 이게 망발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없는데서 만들었다, 이렇게 하니까 사람들이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기독교 신자면서도 납득이 안 되는 이유가, 없는데서 있다면 있음 안에 없는 요소가 있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있는 것은 없어지지 않아요. 형태만 바뀔 뿐이지, 우리의 몸은 바뀔 뿐이지 없어지지는 않아요.

그러니 기독교가 성경에 나오는 대로 말은 해 놓았는데, 없는데서 만들었다고 해 놓고는 뒷감당이 안돼요. 뒷감당이 안 되니까 삼위일체를 만들어서 삼위일체의 언어를 가지고 믿고 따라오려면 따라와 봐, 해서 그것을 가지고 소위 신학자들만 따로 은둔하듯이 그들만이 아는 대화로 삼위일체논의를 전개하기 시작하고 민중들은 우리 위대한 신학자들을 따라오기만 하라는 식으로 겨우 숨통을 트는 짓들을 그들이 담당했습니다. 쉬었다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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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 5강


지난시간에 기독교회에서 철학과 차이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했습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려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하면, 하나님은 한 분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은 유대교전통이 그러하니까 그런 겁니다. 구약전통에 하나님은 한 분입니다, 유일신으로서 하나님은 한 분인데 하나님 옆에 있는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한분 같으면 하나님 빼놓고는 전부다 누가 만들었을 것인데 그렇게 만들었을 때 없는데서 만들었다면 예수님마저도 없는데서 만들었다는 거기에 포함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없는데서 만든 거기에 예수님도 포함이 되느냐, 이 문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들 때는 없는데서 만들었는데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만들 때는 그것도 없는데서 만들었느냐, 하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사람 사고방식, 사람의 논리에서는 없는데서 새로 만들었다는 것이 성립이 되지를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없는데서 만들었다고 하면 있기는 있는데 원인이 없다는 뜻이에요. 있기는 있는데 원인이 없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진 것은 없음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가 없겠지요. 이미 있으니까, 이미 있는 것이니까 없음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한 번 만들어 놓고는 손을 쓸 수가 없는 겁니다. “내가 괜히 만들었어. 괜히 만들었어.” 이렇게 후회를 해도 이왕 만든 것을 다시 원점으로 돌릴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아예 안 만들었으면 몰라도 이왕 만든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든 간에 그것을 없음의 자리로 다시 돌이킬 수 있는 그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된다면, 이것이 성립한다면 이 있음에서 없음, 이것은 성립이 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왜냐, 어쨌든 있는 것인데 있는 것이 어떻게 없어지느냐는 말이지요. 이렇게 되면 창조가 무효가 되지요. 창조가 무효가 된다면 하나님은 실없는, 쓸데없는 일을 하신 거예요.

이 있는 것을 지옥 보내든지 천국 보내든지 그것은 돼요. 왜냐하면 천국가도 있고 지옥가도 있으니까 그것은 되는데 “너 있는데 너 이제 없어졌어.” 그것은 이해하기가 상당히 난해한 겁니다. 그러면 기독교에서 없는데서 있다, 라고 언급을 꼭 해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해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보다도 예수님을 제시해서 다른 종교와 차별화를 해야 되거든요. 예수그리스도를 제시하기 위해서 뭘 집어넣는가, 없는데서 있는데 여기에 예수님이 어떻게 관여했다, 라고 설명을 해서 예수님 위주로 종교의 방향을 틀다 보니 없는데서 있게 했다고 되는 겁니다.

그 당시의 모든 종교는 하나님의 있음에서 세상이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원인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원인이 되고 그 하나님의 있음이 아까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이죠, 하나님의 형상이 물질과 결합이 되면 이것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피조물이 되는데 여기에 데미우르고스라 해서 창조주가 등장하는 것은 없음에서 창조한 있음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이 다양성을 할 때 그 다양성에 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 중간에 창조주를 집어넣은 것이지 없음에서 있음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는 않은 거예요.

그런데 기독교는 뭐냐, 예수님을 집어넣어서 없음에서 있음으로 해서 뭘 노리는가하면, ‘이 있음이 바로 하나님께로 갈 수 없고 예수님을 통해서 소통한다’. 이렇게 설명하기 위해서 기독교에서 이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기독교신학자들이 내세운 것은 뭐냐, 예수님을 빼버리면 피조세계는 하나님과 연결할 수 있는 어떤 통로도 없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 “없는데서 생겼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없는데서 생겼는데 어떻게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을 통해서만 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하기 위해서 없는데서 있음이라고 논리를 몰고 간 겁니다.

약간의 일리가 있지요. 일리는 있는데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되지를 않아요. 하나님 앞에서 없는데서 있었다, 이것은 이해가 되는데 이 있음의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 있음의 원인을 예수님으로 본 겁니다. 철학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으로 있게 했다”는 그 문제가 형태만 바뀌어서 그대로 유지됩니다. “예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원인이 예수님 때문에 있음’가 되고 이는 곧 “예수님의 형상이 있음 속에 개입이 된다.”가 됩니다. 이렇게 설명해야 논리가 맞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어떤 분이기에 현재 있음을 있게 하느냐, 라고 설명을 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서 신학자들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없음에서 있음도 예수님으로 해결하고, 죄 있는 것에서 죄 없음으로 만드는 것도 예수님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이 신학자들이 지어내고 고안해 낸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은 하나님도 되지만 인간도 된다.”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있는 피조물과 하나님관계를 어디에 대체해서 축소시키느냐 하면 예수님 존재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 인성과 신성의 그 교환 작용에 의해서 이 존재문제도 해결하고 이 죄 있음이 죄 없음으로 되는 이 두 가지 문제를 다 해결 보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또 문제가 하나 생겨요.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우리 인간이 타락했잖아요. 인간이 타락했는데 예수님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예수님 내부에서 타락 작용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 내부의 타락 작용을 예수님이 처리를 해 놓고 그 처리를 일단 ‘예수님의 형상’ 속에 담고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죄 있는 우리가 죄 없이 된다는 논리를 제시하려 합니다. 딱딱 맞아 떨어지거든요. 이 신학자들, 나름대로 고민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어쨌든 철학보다 기독교가 우위에 있다는 자존심을 걸고 나름대로 연구를 많이 한 겁니다. 물론 배후에서 데오도시우스 같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황제의 도움이 있었겠지만.

그들이 이 신학을 가지고 기안을 올려서 황제의 결재를 맡으면 로마전역의 학교나 교회에 유포를 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그대로 교육받으면 누구나 신자가 되는 거예요. 이미 신자는 되었지요. 유아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고 난 뒤에 신자 된 것이 뭐냐, 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제 2차, 제 3차 세미나와 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그래야 로마 제국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타락했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타락했다고 하면 곤란하거든요.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니까. 죄 없으신 분이 어떻게 죄 있는 죄인을 용서하는 자격이 되느냐, 이런 골치 아픈 문제가 또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여기에 뭘 집어넣는가, 여기에 예수님의 로고스를 집어넣습니다. 예수님 속에는 로고스가 들어 있다는 거지요. 자, 예수님 안에 로고스(신성)가 들어 있고 또 인간이 들어 있는데 이 인간 속에는 육과 영과 혼이 있다는 말이지요. 영과 혼을 합해서 영혼이라 하지요.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310?~390?)는 말하기를 “예수님이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서 타락한 형태를 지녔기에 이 영혼을 로고스에 살짝 집어넣으면 신성도 괜찮은 신성이 되고 예수님의 인간성도 괜찮은 인간성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괜찮은 신성과 인성으로 만들어 놓으면 여기서 프뉴마(영), 곧 예수님의 영이 오게 되면 예수님의 영으로 복제를 해 버리면, 예수님의 이 육과 영혼의 괜찮은 이것이 인간 속에 덮쳐버리면 인간의 모든 죄가 예수님이 괜찮은 영으로 정화가 되고 정화가 되면서 예수님 안에 일단 들어가고 난 뒤에 뭘 기다리느냐하면 예수님의 고상한 신성을 기다린다고요, 그러면 인간이 예수님 안에서 신성으로 합류가 되면서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는 장치를 예수 그리스도로 마련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 못해서 환장했어! 창세기에서 선악과 생명나무 따먹지 못하게 괜히 막아놓고 애먹인다는 식이죠. 이 아이디어가 어떻습니까? 그럴듯하지요? 그래서 요한복음에 ‘너와 내가 하나가 된다.’는 성경구절(요 17:21)의 내용은 이런 논리적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교류와 직류전류를 바꾸는 트랜스, 나이 드신 분들은 도란스라고 많이들 부르지요, 그 트랜스를 사용해서 전류를 바꾸게 되면 예수 안에서 인성에서 신성으로 변한다는 겁니다. 원죄, 죄, 이런 문제보다도 신성만 입히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동방신학의 진수를 여기서 그대로 보여주게 되는 거예요.

아폴리나리우스의 논리에 대해 그 당시 교회는 “그러면 안 돼!” 라고 했죠. 381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러면 예수님 속에 있는 인성의 영혼을 로고스가 대체해 버리면 예수님은 영혼이 빠져 있기 때문에 진정한 영혼이 아니게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간 모습을 띤 가현체에 불과해서 삼위일체에 어긋난다.” 해서 거부당했습니다. 거부당했다는 말은 뭐가 남아 있다는 말입니까? 결국 예수님 속에는 인성과 신성 둘 다 있다고 한 거예요. 문제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뭐라고 하느냐하면, “신성과 인성, 인성과 신성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 계실 때도 인간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계실 때도 인간 같으면 독립적인 예수라는 분이 둘이 된다.”는 말이지요.

둘이 되니까 인간들이 어떤 경우 기적을 원할 때는 신적인 예수님을 골라잡아서 “주여!” 하고 신적인 예수님을 부르고 또 어떤 경우에는 인간적으로 연약해져서 예수님에게 인간적인 동정을 사고 싶을 때 “주님은 인간이 아니십니까? 우리의 아픔을 체휼하시는 분이니 우리 아픔을 이해해 주시겠지요?” 이렇게 해서 편리한 대로 예수님을 골라잡아 이용할 여지를 제공하는 거예요. 이용하는 것 까지는 좋은데 예수님 본인이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 이렇게 되지요. 아예 가시나무새가 되어 버렸어요. 내안에 내가 너무 많아서 예수님께서 밥을 떠 잡수실 때 이것을 인간적으로 먹어야 되느냐, 아니면 신적으로 먹어야 되느냐, 아주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내가 물위를 걸을 때는 신적으로 하다가 마리아, 마르다 집에 가서 울 때는 신은 울 수 없기에 인간적으로 트랜스, 교류와 직류를 변환해서 “지금부터 인간입니다, 삐리리리리!” 이런 식으로 한다는 식밖에 안되거든요. 실제로 목사들이 강단에서 설교할 때 “이것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행동이고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입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는 인간으로 죽었지만 부활할 때는 신성으로 부활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그 말이지요. 예수님 옆구리에 스위치가 하나 달려 있는 모양이라.

또 문제가 뭐냐, 예수님의 의지가 두 개가 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인간적인 의지로써 할 때냐, 하나님의 의지로 할 때냐, 그 때 그 두 의지가 충돌한다면 어떻게 하는가, 온갖 쓸데없는 걱정들을 다 하는 겁니다. 레온티우스(485-543)라는 사람이 ‘위격내재(엔티휘포스타시스)’ 라는 용어를 만들어서 “예수님의 내부에서 로고스라는 그 신성이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예수님의 인성에 늘 개입해서 관리하고 조절하는 식으로 예수님의 본성은 유지된다.”라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예수님의 신성이 인성을 늘 관리한다는 이 말은 언뜻 보면 예수님 자체 내의 문제인 것 같지만,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믿는다는 말 자체도 부끄럽지만, 예수님을 파악하고 이용해서 구원받으려 할 때……, 믿는다는 소리도 이제는 부끄러워요, 믿는다는 소리도 하지 맙시다, 그렇게 할 때 예수님의 내부장치를 제대로 파악을 해줘야 우리는 제대로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이해한다고 한다면 누가 마중을 나오느냐하면, 로고스가 예수님의 인성에 마중을 나오니까 “저는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믿습니다.”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왜냐, 예수님은 진짜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하고 상대하거든요.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없는데서 생긴 사람이 하나님과 상대하려면 중간에 똑같이 인간같이 생긴 인간을 만나서, 인간같이 생긴 인간이 아니고 인간이신 예수를 만나서……, ‘인간같이 생긴 인간’이라고 하면 안 되지요. 삼위일체에 걸리면 큰 일 나니까 말을 조심해서 해야겠지요. 자칫하면 아리우스(알렉산드리아사람)처럼 돼버려요. “예수님은 하나님과 유사본질로서 창조된 분이다.”라고 이야기한다고요.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되면 예수님이 마중을 나올 때에 우리가 “예수님, 너무 인간적입니다. 신은 너무 고귀해서 만날 수 없고 우리 인간적으로 만납시다.” 예수님 인간은 어떤 인간이냐 하면 십자가 죽기까지 복종한 인간, 그만큼 겸손하고 낮춰진 인간이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이제부터 친구’라는 말씀을 하셨지요.(요 15:14) “이제 우린 친구 아이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일단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서 “우리 친구 아인가!” 이렇게 가게 되면 거기서 누가 기다리느냐하면, 로고스가 기다려요. 갑자기 126층 하늘나라로 솟구쳐 올라가서 하늘나라에 합류가 되는 겁니다. 굉장히 구원 쉽죠.

왜, 우리는 하늘나라 하나님이 너무나 무서운데 그것을 익히 아시고 친밀하신 인간성을 가지고 오셔서 그 인간성을 가진 우리를 데리고 천국으로 데려갈 수 있는 내부적인 교류장치가 예수님 안에 장착되어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을 교육 자재로써 로마 전역에 쓴다면 어지간하게 교만한 인간 아니라면 “이거 다 믿습니다!” 하지요. 이것은 사실 믿음이 아니고 그냥 아는 것인데 전부 다 “믿습니다.”가 돼버려요. 그러면 일단 신학자들은 한 숨 돌리지요. 이렇게 해서 고을마다 예수를 다 믿어버리니까. 세례 받을 때 “일단 뿌릴 테니 받아 봐.” 해서 받았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뿌려놓고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게 되면 “예수 믿으라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를 모르는데요?” “누구처럼 성질 급하게 하지 말고 가만있어 봐.” 해서 그 다음부터 육으로 교육에 나서면 “아하, 그래서 우리는 다른 이슬람교나 토속종교나 신화의 종교가 아니고 제대로 구원의 메시아를 만났구나. 이 정도까지 우리를 생각해서 배려해 준다면 우리 쪽에서도 예수를 믿을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행사에 대해서 우리가 될 수 있는 대로 참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러면 로마 제국이 편안하고 정신적으로 안정이 되지요. 눈치 들을 보니 지금 다들 그렇게 살아들 오셨어요.

이게 바로 문제가 되는 거예요.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교재 2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줄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면죄’보다 교회라는 인간들의 집결체에서 제공하는 ‘면죄 방식’이 훨씬 대중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면 이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정면으로 모독하는 태도이다.】 사도바울이 면죄를 이야기할 때 면제받는 방식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이게 무에서 유로 창조했기 때문에 면죄방식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인가, 그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언급하지 않은 것을 교회는 아주 친절하게, 대중들 편에서 서서, 또는 아주 고상하게 그들의 신앙적인 표현으로 제공해주겠다는 말입니다. “주께서는 하지 않은 것을 우리 인간들의 끈끈한 정에 의해서 특별히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서 온갖 것을 신학적으로 차분하게 체계를 만들어줬으니까 분명히 하늘나라 가면 상급이 많을 것이다.”라고 그들은 자부했습니다.

사람을 꾀어서 데려오는 것은 하나님이 하지 못하고 우리들이 교육이라는 방법으로 해야 된다는 거지요. 인간 속에는 이성이 있고 질서를 구현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데려오는 겁니다. 일단 교회에 데려오게 되면 제 2의 작업, 삼위일체 교육을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동방교회 같은 경우에는 무엇이 교회의 주제가 되느냐하면, 마리아, 성인숭배, 삼위일체 숭배하는 것, 지금도 오소독스(Orthodoxie) 교회에 가면 삼위일체를 같이 모시고 있어요. 왜 삼위일체를 같이 모시는가하면, 여러 신학자들이 그동안 애쓰고 노력해서 이 만큼 교회가 유지되기 위해서 인간의 모든 지혜를 집약해서 결론 내린 것, 그것이 바로 역시 삼위일체가 땡이다, 그 말입니다.

삼위일체 거부하면 그것은 지옥가고 삼위일체 수용하면 그것은 천국가기로 온 가톨릭교회가 정했던 겁니다. 가톨릭(catholic, 보편교회)이라는 말을 이그나티우스(Ignatius Antiochenus ? ? 107?)라는 교부가 처음 사용했는데 전체 교회가 삼위일체로 천국이냐, 지옥이냐가 결정되기로 한 판국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을 필요 없어요. 그냥 삼위일체 공부하면 구원 받습니다."라고 활짝 개방된 거예요. 그런데 교재에 보면 “사도바울은 ‘면죄’가 아닌 ‘면죄방식’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네가 면죄함을 믿느냐?”라고 하는 것이지 “네 면죄함을 받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라.”는 말이 아니거든요.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네 죄 용서를 받아라.”라든지 “네 죄 용서함을 입었다.” 이러면 되는데 “네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게 되면 면죄가 너에게 주어진다.”라는 방식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다 이 말이지요. 심지어 세례라는 것도 사도바울은 준적이 없다고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이야기하지요. ‘나는 누구에게도 세례준적이 없다.’(고린도전서 1:14-16) 이 말이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사도바울에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당신은 방식도 없다고 하는데, 당신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인데 다 같은 인간임에도 당신은 방식이 없다고 하고 나는 방식이 있다고 하고, 삼위일체 교육을 받아서 그렇게 말한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방식이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해서 구원받느냐?”라고 물을 때 “나는 십자가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았다.”라고 해서 여기에 ‘믿음’이 들어가요. 사도바울이 믿음을 이야기할 때는 이런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행함들이 이런 식으로 다 결론 내려진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어요. 구약에서 다 했기 때문에.

따라서 이렇게 실컷 해본들 이것을 결코 믿음이라고 쳐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이것은 어디에 속하는가, 육에 속하는 거지요. 그러면 육은 뭐고 영은 뭐냐, 사도바울이 영이라고 하는 것은 걸림돌이 있어야 돼요. 이런 행함, 인간의 아이디어, 로고스, 여기서 나오는 신학체계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엎어지고, 코 깨지고, 면상 다 망가지고, 도저히 일어나지도 못한 채 좌절되고 절망이 되어야 그것이 영적인 이야기가 돼요. ‘내가 옛날에는 바리새인이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지만 그리스도를 알고부터는 그런 것은 다 똥이고 오줌이었다.’ 하는 겁니다. 분뇨 치우는 차 불러와야 돼요. 교회마다 다 똥차 불러서 호스 대고 다 빼내버려야 돼요. 똥, 오줌 빼내는 전문 업체 불러서 다 빨아내야 돼요. 빼내도 또 나오겠지만.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이쪽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할 때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겠어요? “그것은 네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지.” 정신을 지금 엉뚱한 데 팔고 있다는 말이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국가라는 것에 인간의 자기존재를 심어놓아 버리면 그 국가의 존재와 더불어서 자기 존재를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나라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나는 나라 안에서 복을 받아서 내가 존재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 국가가 교회로 바뀌면 이제는 국가라는 이름의 교회로부터, 또는 교회라는 이름의 국가로부터 나는 내세까지 보장받는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으로 자기가 어느 정도 안심을 느끼는 겁니다.

그동안 있었던 모든 삼위일체 교리 같은 것은 사실은 우리가 듣고자 했고 우리가 기대하고자 하는 나의 육적인 욕망의 화신들이지요. 나는 이런 소리를 듣기를 원했고 이렇게 해서 나는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을 외부에서 마귀가 눈치 채고 잘도 나에게 봉사하고 협조를 해 왔던 흔적이 교회사가 되겠습니다. 사도바울은 여기에 대해서 양보가 없지요. ‘면죄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면죄는 이렇게 하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존재분석에 들어간다든지 예수님의 신성이니 인성이니, 로고스가 어떻게 침투하니, 인격이나 의지가 두 개니 한 개니, 그런 것이 일체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바울뿐이 아니라 사도들은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그것은 바로 ‘오른편’입니다. 포지션이지요(위치). 오른편에 누가 서 있느냐, 이 존재문제가 아니고 포지션입니다. 예수님을 존재로 생각한다면 인간은 자기 존재를 엮으려고 새로운 예수라는 존재를, 메시아를 상상하게 돼요. 그런데 ‘오른편’은 인간이 상상해 낼 수가 없습니다. 왜, 오른편은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 발생된 포지션, 위치이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라는 개념은 ‘주’라는 어떤 인물이 계시는 것이 아니고 ‘주’라는 자리가 있고 그 자리에서 비로소 주님이 발생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사도바울도 그렇게 이야기했고 구약에서부터 언약 적으로 그렇게 흘러 내려오는 겁니다. 우리는 주 예수를 믿습니다, 그런데 그 주 예수는 어디에 계시는 주 예수인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 예수입니다. 하나님 우편이란 어디냐,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들어 낸 자리,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 자리에 서실 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이미 그동안 꾸준하게 이 세상을 관리하도록 조치했습니다. 하나님의 오른편 자리는 주의 이름이 있던 자리입니다. 그 주의 이름이 드디어 실체화 되고 인물로 등장할 때 그 분이 바로 우리의 구세주가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주의 오른편에 있다는 말이지요. 자, 이것을 그림으로 한 번 그려봅시다. 구약은 유일신입니다. 신이 하나밖에 없어요.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하면, ‘면죄방식’은 필요 없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면죄했다는 사실만 있으면 되지 면죄방식은 필요 없어요. 주께서 하는 면죄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은 어떤 방식을 동원하면 그것을 우리가 우리 것으로 인수해서 따낼 수 있습니까, 라고 할 때 인간이 세운 삼위일체의 그 분석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구원을 따 낸다고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것은 면죄 받는 방식의 일종이라서 그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런 방식을 허용한 적이 없어요. 그런 것이 없고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는 그것만 이야기한다는 말이지요. 용서하시는데 주님만이 용서가 돼요. “주님이 용서한다.”는 것과 “우리는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것이 같은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용서를 하실 대상은 언약에 해당되는 사람만 주님의 용서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여긴다.”(출 33:19 ; 롬 9:15)는 말씀이거든요.

“주님께서 언약에 해당되는 사람만 용서해준다.”고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언약에 해당되는 사람이 됩니까?”라고 또 묻고 싶지요. 자꾸 우리는 ‘주께서 하신다.’고 하게 되면 또 어느새 내 모습이 여기에 등장해 있다는 말이지요. 자꾸 우리는 주께서 뭘 하게 되면 또 뭘 하나 걸치게 되고, 또 뭐가 하나 등장하고, 회개하라, 하면 회개해서 구원되고자 하는 사람이 등장하고, 이렇게 항상 이 바깥, 주께서 하시는 이 바깥에서 다가가려고 하는 거예요.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의 사용방식이 뭐냐 하면, 예수님 빼놓고는 모든 것이 ‘없음’이 되는 겁니다. 인간보기에 있어 보여도 그것 자체를 ‘없음’으로 간주하고 일을 시작하시는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사래가 태가 죽어서 거기에 자식이 없습니다. 없는데 없는 자식이 있게 되었어요.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네가 믿으면 그것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여기서 없다는 말을, 내가 여기 있는데 없어지면 없는 것인가, 이런 식으로 자꾸 내 중심으로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언약에서는 누가 없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역사 속에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이 없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자꾸 우리 이야기로 끌어당겨서 이용하겠다는 억지를 부리는데 예수님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성부께서 성자와 두 분 사이의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자리를 하나님의 오른편으로 제시해주시고 주님은 언약대로 원수를 이기면 주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주의 자리에 앉게 되면 이 앉은 자리에서 뭐가 나오느냐하면, “이제 내 백성,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더 이상 악마, 원수에게 사로잡히지 않도록 조치가 취해지는” 자리가 주의 자리입니다. 이 주님의 자리로부터 성령이 주어지게 되면 뭘 아느냐하면, 주님 입장에서 우리는 없는 자요, 주님 입장에서 우리는 죽은 자인데, 죽었다는 말과 없다는 말이 같은 말이 돼요.

‘죽었다’는 말과 ‘없다’는 말이 왜 같은 말이 되느냐하면……, 이게 우리 입장에서는 같은 말이 아니에요. 하지만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 같은 말이 된다고요. 없던 인물이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등장했고 그 없던 인물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이 죽음은 세상 어떤 인간도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죽음, 사실상 유일한 죽음, 제대로 죽음의 내막을 다 함유하고 있는 진짜배기 죽음……, 우리의 죽음은 제대로 죽음도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죽음은 그냥 의미 없는 죽음이에요, 목적 없는 죽음이고 이유도 없는 죽음이고 그래서 아무 이유도 모른 채 그냥 죽어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 사이에서만 알고 있는 죽음이에요. 여기에 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은 주제넘게 끼어들면 안 되는데, 이 성부와 성자사이에 자기들의 삼위일체를 들고 와서 자꾸 끼어드는 거예요. 끼어드는 이유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인가, 이런 것은 묻지도 않고 그저 사람들을 여기에 다 집어넣으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니 하나님 자신이 만들어놓은 것이니 버릴 리가 없다, 이러면서 전부 다 집어넣는 거예요. 로마제국 전체 국민들을 여기에 교육을 시켜서 다 집어넣는 거예요. 대단한 모세지요, 대단한 모세.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보기에 인간들끼리 인간이라고 하지만 주님보기에는 다 죄인입니다. 죄인을 가지고 우리가 인간이라고 우기는 것은 우리 인간의 자유지만 주께서 일체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인간 맞잖아, 할 때 주께서는 언약 사건을 일으켜 버립니다. 언약 사건을 일으켜 버리면 “거 봐, 네가 인간 아닌 것이 들통 났잖아.”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제사를 드릴 때는 인간으로 제사를 드렸어요. 나중에 보니까 인간이 아니고 죄가 지배하는 겁니다.

사람이 지배하는 인간이 아니고 죄가 지배하는 겁니다. 죄가 지배하는 그것을 가인이 어떻게도 반항할 수가 없어요.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죄가 지배하는 속에서 가인이 해야 될 일은 있어요. 특별한 일이 있어야 됩니다. 가룟유다가 속에 사탄이 들어가니까 가룟유다는 그냥 쉴 수가 없어요. 멀뚱하게 있을 수가 없고 뭔가 자기가 맡은 사명을 다 해야 됩니다. 이 땅에서 그가 해야 될 사명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값을 쳐서 팔아먹는 그 역할, 일당 받고 하는 작은 엑스트라 같은 배역을 맡아서 할 뿐이에요.

아담은 한 분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아담이지 나머지는 아담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는 이름 그대로 아담은 흙이지 인간이 될 수 없어요. 인간이 아니고 그냥 흙으로서의 아담이지요. 진짜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창조하시면서 원한 것은 의로운 인간을 원한 겁니다. 죄지은 인간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인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 인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작업이 호출되고 초청받은 겁니다.

첫째 시간에 한 이야기지요. 사탄이 와서 하는 말이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길을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바울과 실라를 소개해 줘요.(행 16:17) 마귀는 이렇게 바울과 실라를 아는데 정작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를 못 알아봅니다. ‘어디서 사기꾼이 또 왔나.’라고 생각하지 못 알아 봐요. 그런데 마귀는 알아요. “당신은 빛의 세계로 구원하는 하나님의 종이지요.”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럴 때 바울이 하는 일이 뭡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일은 사람들을 건지는 거예요. 건질 때 이 세상에서 건진다는 것은 플라톤 철학에도 나오는 겁니다.

하지만 너 자신으로부터 너 자신을 건지는 이것은 플라톤 철학에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플라톤 철학은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고 시작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인간인데 앞으로 죽고 난 뒤에 어떻게 영원히 살 것인가?’ 출발점이 ‘나는 인간이다.’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나는 짐승과도 다르고 다른 누구와도 다르다.’ 여기서 출발하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의 마태복음이나 사도바울은 뭐냐 하면 “너는 악마에 속한 존재에 불과”한 거예요. 그것을 자체적으로 인간되는 방법은 없어요. 없는데 진짜 예수님이 와서 영을 줄 때 예수님을 섬기는 용도로 그리스도 몸의 지체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사세요. 걱정을 하면서 살든 걱정을 안 하면서 살든, 결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죄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하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를 면죄행위, 주께서 벌이시는 용서행위에 우리가 그동안 어떻게 관여해 왔습니까, 하는 것을 고백하면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용서받았는데 어떻게 해서 용서받았습니까? 여러분이 아시잖아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사도바울이 어떻게 용서받았습니까? 사도바울이 용서받기 위해서 무슨 짓을 했습니까? 어떤 분들은 사도바울이 용서받기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였다고 하는데,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들 잡아 죽이면 우리가 용서 받습니까? 안되거든요.

그냥 주님이 찾아오신 거예요. 이것을 성령이 찾아 오셨다, 주님이 찾아 오셨다, 할 수 있는데 그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너무 절망적이지 않습니까?” 하는데 이 절망을 즐기세요. 이 절망을 즐겨야 됩니다. 절망을 즐겨야 쓸데없는 삼위일체 환상을 꾸지를 않지요. ‘예수님의 존재를 분석해서 예수님의 인성으로 가서 신성으로 튀어 나온다,’ 이런 되지도 않는 상상력을 발휘하지를 않지요. 사람들이 하는 이 삼위일체 이론들은 다른 종교에도 이미 다 있어요. 철학에 있으니까 이것이 없을 리가 있습니까, 다 있지요. 다시 한 번 정리한다면 면죄방식에 대해서 왜 사도바울은 언급을 하지 않느냐하면, 면죄하는 방식은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예수님의 독점적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면죄하는 유일한 방식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방식은 주께서 사용하실 때 우리는 그냥 결과물이고 예수님의 작품이 될 뿐이에요. 그냥 살아가면서 용서받았다는 것을 티내면 되는 겁니다. 용서받은 그것을 티내시기 바랍니다. 용서받은 것을 티내는 방법은 세상에서 아무리 죄 있다 해도 그게 죄가 안 된다는 사실을 떠벌이면 되는 거예요. 니사의 그레고리우스(Saint Gregorius of Nyssa, 330?~395?) 라는 사람이 갑바도기아의 3대교부중의 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어요. “신도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도 우상이라는 거예요. 이유가 뭐냐, 인간의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 속에 담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렇게 말을 해놓고는 그게 왜 우상이 되는지 그 이유를 설명 안 해놓았어요. 그게 우상이다, 그러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말을 안 했어요. 제가 그 애매한 것 정해 드립니다. 인간의 언어가 자기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언어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단체로 소속되어 있는 그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미국 가서 신, 하면 못 알아듣습니다. 그때는 영어로 god, 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이라고 하면 그 사람들은 얼추 sin, 이라고 알아듣습니다. 그 시대 문화의 언어를 자기도 만들어 낼 수 없고 기존에 있는 언어를 골라잡아서 자기 마음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있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신은 인간 속에 매이지 않는다.”는 뜻에서 “신을 믿는 그것도 우상”이라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러면 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느냐, “쉿! 그 입 다물라.” 그렇게 되는 거예요. 입을 다물어야 되는 거예요. 디오니소스 아레오파기타(Dionysius Areopagita)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이 신비주의 계열입니다. 나중에 나오는 보나벤투라, 쿠자누스 같은 사람들이 교회사에서 다 신비주의라서 연구하다 하다 안 되니까 “우리 그만 입 다 다뭅시다.” 하는 쪽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입을 안 다물었습니다. 다물라고 때려도 안 다물었어요.

유대인들이 입 다물라고 때려도 입을 못 다물겠다고 한 거예요. 왜냐,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입을 다물 수가 없는 겁니다. “너희들이 죽었다고 한 예수님은 살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를 왜 죽였습니까? 결국 삼위일체를 끄집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런 ‘잠재태’가 있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거지요. 그리스도가 하는 일이 무슨 소리인지를 우리는 뭔지 모르지만 그들은 알았거든요. 우리가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활동하시던 그 현장에 없었잖아요.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말을 2차, 3차에 걸쳐서 한 번 들어보자는 말이지요.

들어보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해요. 다 그게 현명한 선택들입니다. 그 때 등장한 것이 뭐냐, “예수 그리스도는 또라이”라는 거예요. 예수님은 돌아버린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마음은 가는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고 믿으라고 하면서도 믿는 방식은 이야기 안하고 죄 사함 받으라고 해놓고 죄 사함 받는 방식은 말하는 적이 없고. 어떤 사람에게는 거듭나라고 했는데 “거듭나면 된다고요? 아, 그럼 되겠네요. 그러면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면 되겠네요.” 그것은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왜 거듭나라는 말을 사용했느냐, 그 말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이렇게 해요. “네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내가 한 것이다.” 하니까 “성령이 뭡니까?” “너는 성령도 모르나?” 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바람 이야기를 했어요. “바람이 임의로 불 듯이 성령이 임의로 분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니고데모 입장에서 처음부터 거듭난다는 이야기를 하면 안 되지요. “바람이 부는데 바람 불면 구원받은 줄 알아라” 그렇게 돼야 되거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거듭나야 된다는 말을 해 놓고 바람(성령)도 모른다고 면박을 주고 땅에 살면서도 땅의 일을 모르냐, 고 하면서 제시한 땅의 일이 뭐냐, 바로 유일무이한 사건, 십자가사건입니다. 십자가사건!

“모세가 놋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죽어서 하늘로 들리는 사건이 벌어지면, 그리고 그것이 나중에 바람같이 임하면 다시 태어나는 거듭난 사람이 되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그 외에는 없다는 거예요. 이 예수님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종합해 보면 간단하게 이겁니다. “네가 하늘나라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보내줄 때만 하늘나라 들어갈 수 있다.” 그 말이거든요. 이것이 다윗언약에 보면 나와요. 다윗언약에 보면 다윗약속에 의해서 오신 다윗의 자손만이 이 땅에서 어떤 일을 마감(완성)을 할 때 영광의 문은 열립니다. 시편 24편에 있는 말씀처럼.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시24:7-8)

제가 주일 오후에 그런 설교 했는데 장례식에 시신이 누워 있다 합시다. 목사가 설교본문을 시편 24편으로 잡아서 “영광의 문이 열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신다.”라고 했을 때 그 누워있는 시신의 유족들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마치 뭐와 같은가, 마술사가 “뜬다, 뜬다, 뜬다, 뜬다.” 하면 그 시신이 막 하늘로 올라가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문들아, 열려라! 빨리 문 안 열어? 안 열어? 안 열어?”하는 식으로요. 그처럼 성전이라는 유일한 통로를 통해서……, 성전이라는 통로는 그 안에 죽음이 있습니다. 선풍기가 있으면 팬이 돌아가고 여기서 바람이 나와서 시원하잖아요. 요새 나오는 선풍기는 가운데 구멍이 뻥, 하고 뚫려 있어요. 그런데 바람이 그 뚫린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전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기 때문에 여기는 뭘 집어넣는가, 어린양의 시체를 집어넣어요. 어린양의 죽음을 넣어버려요. 흠 없는 어린양의 제물을 여기에 담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어린양을 잡는 것이 면죄방식이 된다, 안 된다? 될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어린양 잡는 것은 우리가 잡을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초복 중복 때 닭 모가지 비틀어서 잡는 것처럼 어린양도 잡을 수가 있어요. 어린양의 죽음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양을 잡는 너도 죽어 마땅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저쪽에서(선풍기의 뚫린 그 구멍 자체에서) 바람이 불어야지 이쪽 인간 쪽에서 나가는 것은 삼위일체든 뭐든 안 받는다는 거예요.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어리석음이니까.

십자가라는 말은 걸림돌이에요. 오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가서 너를 건질 테니 네가 오는 수고로움은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사이의 언약은 아들만 이루기 때문에, 주는 우리가 주가 아니고 따로 한 분이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주님이 일을 하도록 좀 내버려 두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일을 해야지 우리가 일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일해서 주님의 공로로 공짜로 구원받으면 그 사람은 자기 일을 거기에 집어넣지를 않지요. 뭐라고 합니까?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은혜고 주님의 공로로만, 주의 이름으로만 말미암아 구원받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노렸던 천국 백성의 방식입니다. 십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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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 6강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두 분이 아니고 한 분입니다. 그래서 단일신이에요, 단일 신. 주의 자리를 오른쪽에다 낼 줄은 아무도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로봇이 변신하듯이. 하나님은 한 분이에요.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습니다.’ 신은 한 분인데 그 신이 자기 오른편에 포지션을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이 세상 어느 민족도 그런 것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신이 둘이든 셋이든 되어야지 단일 신인데 여기서 변신을 해서 “여호와께서(주께서) 내 주에게”라는 시편 110편 1절을 말씀을 다윗언약에 의해서 이렇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여기 “주께서 내 주에게”라고 할 때 조건이 있어요. 다윗언약대로 완수하면 주의 자리에 앉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른 편 자리가 있는 이유가 있어요. 하나님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원수 때문에 그래요. 전쟁상태지요. 창세기 3장 15절에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거기 나오는 이야기를 다윗 언약에서 소급해서 보면 ‘아하, 다윗 언약을 위해서 처음부터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그러한 약속이 되어 있구나.’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 그것을 우리가 외운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구원은 주께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원수, 옛 뱀, 악마와의 전쟁의 결과에 의해서 우리는 그냥 전리품이 될 뿐이에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엡 4:8) 에베소서 4장에 나오잖아요. 에베소서 4장에서 교회가 뭐냐, 할 때 “너희들은 전리품으로서만 교회 된다.” 하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자진해서 나와서 교회되는 그런 법은 없다는 겁니다.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았기 때문에 교회 특징이 뭐냐, ‘믿음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그리스도 하나요.’(엡 4:4-6) 다 하나가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여러 명이 되어서 다양하지만 색깔도 모양도 다 다양하지만, 여자든 남자든 헬라인이든 유대인이든 관계없이 다 한 성령으로 마셨으며 한 주님을 섬기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이미 다양성, 우리 인간들의 작업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인간을 제쳐두고 오직 한 분, 원수와 대결했던 그 한분의 업적에 의해서 파생된 결과가 교회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다.’라는 그 정도가 아니고 교회의 머리는 계속해서 자기 지체를 생산하는 생산 활동력이 나오는 것이 교회 머리의 자리에요. ‘내가 존재한다’. 이것은 사는 것이 아니거든요. 진짜 내가 주님의 생산력으로 산다, 이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머리에서 주신 힘으로 매일 같이 살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나는 날마다 죽고 죽음에 넘기우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 생명이 날마다 살아나기 때문에 그렇다.’(고후 4:11)고 사도바울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어려움에 처하고 난관에 처하더라도, 우겨 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는 이유는 성령의 능력이 날마다 나를 휘감아 돌기 때문인데 그 성령이 바로 머리되시는 예수님에게서 쉬지 않고 계속 공급이 되기 때문에 그 덕분에 나는 지금 사도 짓을 하고 있다.’ 그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 대목을 이야기하면서 뭘 끊어버리느냐 하면, 사도바울이 하는 것은 다 끊어버리고 사도바울 그 사람이 하는 것을 자기도 흉내 낼 수 있는 요소만 끄집어내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요단강 세례 받을 때 비둘기가 왔잖아요.

비둘기가 오니까 비둘기가 와서 성령 받은 것은 생각 안하고 예수님 따라 다니면 구원 받을 줄로 알고 있는 겁니다. 정 아쉬우면 비둘기 한 마리 사서 머리에 이고 다니든지. 주께서 주의 자리를 내 놓지요. 만화식으로 표현 한다면 (보이지 않고 숨어 있던 긴 로봇 팔이, 혹은 우주선에서 밖으로 길게 옆으로 활주로 같은 것이 튀어나오는 모양새) zzzzzzzzzz……! 하고 나오는데 주께서 내놓은 주의 개념, 이것이 나올 때 언약 적으로 나오는 겁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이것을 가지고 아들이라고 합니다.

만들어졌다고 해서 만들어진 모든 것이 아들이 아니고 아들은 다윗언약을 완성해 내는 분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나머지는 마귀자식이 되는 겁니다. 아들 없거든요! 아들 아니거든요! 그것은 자기가 자기보고 아들이라고 우기는 것이고 다윗언약을 완성 안했거든 아들이라는 말을 하지 마세요. 아들은 오직 한 분, 오직 예수님만 아들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 우리는 그냥 양자지요. 왜, 양자의 영을, 아들의 영을 받았기에 그것을 양자라 합니다. 그러면 아들의 영을 안 받았을 경우에는? 아들 아니지요. 아버지는 모른다고 하는데 자기가 자기보고 아들이라고 우기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없는 겁니다.

대통령 아들도 아니면 청와대 가서 아들 왔다고 아무리 우겨 봐도 “나 너 누군지 모른다.” 하는 겁니다. 도무지 모르겠다, 하고 문 팍 닫아 버립니다. 문 좀 열어 달라고 해도 닫히는 문은 도무지 열리지 않습니다. 다윗언약에 계신 분이 문을 열고 안에서 당겨줘야 돼요. 그래서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사람 차별하네.”라고 하는데 사람 차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별이라는 것은 있음에서 있음이 될 때는 이것과 저것, 이렇게 차별이 되겠는데 애초부터 없을 때는 차별도 없는 거예요. 선택이라는 것은 있음에서 가려내는 것이 아니고 아예 없는데서 선택이 먼저 있었고 그 선택에 합당해서 없던 것을 있게 만드는 겁니다.

에서와 야곱의 경우를 보세요. 그 전에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없는데서 있게 했습니다. 그러면 옆에 있는 이스마엘은 뭐가 돼요? “하나님 아버지, 저 여기 있습니다.” “없거든.” “저 있다니까요?” “없거든.” 개그콘서트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일본여성 하나 등장시켜 놓고는 “너, 갸루상이지?” “저 갸루상 아니므니다. 갸루상 업스무니다.” 꼭 하나님이 언약을 말하는 것 같아요. 있어도 없는 거예요. 있어도 없어져야 날마다 있게 하는 것은 나로부터 있는 것이 아닌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말이 어려워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현재 있는 것이 나로 인해서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인정하는 것은 내가 있음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있게 하심에 내가 있는 거예요. 그게 참새의 운명이고 들풀의 운명이 아닙니까? ‘오늘 있다가도 내일 아궁이에 집어넣는 들풀도 주께서 기르신다.’는 조건하에 들풀은 들풀인 거예요. 그냥 하나님이 뜯어내 버리면 그것은 들풀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둘 다 없는 거예요. 없는데 리브가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없는 자식이 태어나는데 세트로 태어난 거예요.(창 25:21-23)

에서 없는 야곱 없고 야곱 없는 에서가 없다고 둘 다 짝을 이루어서 같이 태어난 겁니다. 뭘 하기 위해서. 이 원수, 예수님 주께서 이 원수하고 어떤 전쟁을 치르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지상의 밑거름을 그리는데 그 밑거름을 그리는 크레파스와 도화지등이 필요하기 때문에 야곱과 에서가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에서는 나라가 에돔이 되고 야곱의 나라는 나중에 뭐가 됩니까?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에돔과 이스라엘이 전쟁상태에 돌입한 그 와중에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보고 ‘너는 내 아들이라.’ 하니까 이 이스라엘이 자기가 아들인줄 알고 착각을 했습니다. 착각한 이스라엘은 다 망하지요. 아들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하는 그 아들 기능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야곱을 통해서 야곱의 자손으로서 예수님이 태어나게 만듭니다. 야곱이라는 것은 뻥튀기 할 때 덮어씌우는 커다란 망태역할,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뻥, 하면 거기서 예수님이 태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망태 역할은 점차로 좁아집니다. 점차로 좁아져서 마지막 남은 자가 누구냐, 해서 예수님을 보여주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동안 있었던 이스라엘은 “나는 이스라엘 아니므니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 이 세상 속에 펼쳐져야 되는 거예요. “나는 이스라엘 아니므니다. 나는 교회 아니므니다.” 그걸 계속 해야 돼요. “나는 그리스도 몸이 아니므니다. 내가 그리스도 몸이라고 우긴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므니이다.” 이것을 위해서 사는 거예요.

교회 되게 하시는 그분의 활동을 우리가 잊어버리고 자꾸 중심을 내가 뭐 하는 것으로 구축하고 덩어리를 따로 장만하려 합니다. 주께서 교회를 만들어나간다는 생각을 해야지 “일단 교회 되면 이것은 제가 알아서 제 선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이러한 교회는 주께서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가 다 망했다는 사실을 알지요? 망할 수밖에 없지요. 그 땅이 지금 터키 땅인데 터키는 97퍼센트가 이슬람 교인입니다. 이번 강의가운데 나오는 통계 있잖아요, 믿지 마세요. 내 맘대로 내가 알아서 대충 하는 겁니다. 아까 말한 동서로마제국이 갈라지는 연도도 476년입니다. 이것 중요한 것 아닙니다.

조금 더 상세히 이야기할게요. 여기 야곱과 에서, 에서와 야곱이 없는데, 야곱이 하는 말이 “나 여기 있다.”하고 나온 거예요. 그것은 야곱이 실수한 거예요. ‘나 야곱이 있으니까 나 야곱은 축복받는 야곱이고 싶어.’ 그런데 축복이란 아버지에게서 오거든요. 그런데 장자에게 재산이 다 가게 되면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어떻게 해서든 나는 축복받아야 돼.’ 이겨야 되니까, 이겨서 복을 받아야 되는데 경쟁자 형이 있단 말이죠. “그 형에게 있는 장자권을 내가 빼앗아 오게 되면 나는 그 축복을 받을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는데 그것이 어린 시절의 철없는 짓이에요.

역시 형은 어디 가도 형이라고, 형이 동생의 그런 모습을 보고 얼마나 같잖았겠습니까? 형이 속으로 “얘야, 형과 동생은 이미 결정난거야. 네가 그렇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권리를 산다고 해서, 형 아우 바꾼다고 해서 우리 선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냐. 아이고, 바보같이! 그냥 팥죽만 한 그릇 빼앗긴 줄 알아라.”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야곱은 고집을 부리면서 기어이 자기가 형이 되겠다고 하는 겁니다. 형이 되겠다, 하는 것도 야곱의 문제고 형이 되면 절대로 빼앗기는 법이 없다는 그것도 문제고 둘 다 문제가 되는 이유가 자신의 가치를 자기 존재에서 찾으려고 기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 여기 있는데 나는 형이고, 나 여기 있는 나는 동생이고, 나 여기 있는 동생인 내가 어쨌든 형인 존재가 되고 싶다, 존재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거예요. 둘 다 다 치워버려야 돼요. 다 치울 것을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야곱과 에서를 태어나게 했느냐, 이게 바로 전쟁이거든요. 영은 무엇과 전쟁한다? 육과 전쟁한다. 전쟁의 대상이 육이기 때문에 육으로 태어나야 되는 거예요. 육의 모습으로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서 육의 모습이 하나님의 하시는 그 일을, 야곱이 얼마나 하늘의 일을 흉내 내고 있다는 것, 종교적인 모습과 신앙적인 모습을 띄면서 근사하게 비슷하게 흉내 내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다 보여줘야 돼요.

축복이라는 것이 뭐가 축복인지를 몰라요. 그저 많이 가지면 축복이라고 아는 이것이 육적인 본성임을 그대로 다 노출시켜야 되는 겁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들처럼. 성경에서 뭐라고 이야기해도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중요하지 않고 예수 믿어서 얼마나 챙겼느냐에 우리는 강조점을 두면서 아부하고 아양 떠는 식으로 교회 와서 찬송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그러고 싶은 심정을 우리는 숨길 수 없습니다. 숨기지 마세요. 다 아는 이야기인데요. 야곱이 그랬다 그 말입니다. 감사한 것은 그런 야곱도 뭐가 되었습니까? 그런 야곱도 하나님이 찾아오니까 구원받았잖아요.

야곱이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거지요. 구원받았다는 말은 내 있는 존재가 구원된다는 것이 아니고 어떤 역할과 기능을 부여받은 것이 돼요. 뻥튀기 망태, 뻥! 하고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만드는 그런 망태역할로 초청받은 겁니다. 그 망태에 우리도 하인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보여주는데.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조상들이 죽 나열되어 있어요. 거기 명단이 나오는데 키순서가 아닙니다. 몸무게 순서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에요. 거기 있는 사람은 앞에 있는 사람을 뒷사람이 흉내 낼 수도 없어요.

노아가 방주 만들어서 구원받았다면 방주 전문업체가 분명히 생겼을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선배를 감안해서 구원의 면죄방식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그 시대는 방주로 구원받는데 그 다음 시대는 방주로 구원받지 않아요. 그 다음 시대는 자식이 없는 것으로 구원받고, 그 다음 시대는 팔을 어긋맞게 해서 구원받고, 그 다음 시대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인데, 소위 말해 재벌 2세인데 다 포기하고 광야의 길로 나가는 그것으로 구원받고, 그 다음부터는 칼싸움으로 구원받고, 그 다음에는 목 베임으로 구원받고, 이렇게 구원받는 방식이 전부 다 제각각 다릅니다. 그 모든 색깔들을 종합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는 예수님의 이 지상 사역을 일일이 떼어서 나누어서 모자이크처럼 부분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 한 부분이 지금 여러분처럼 어떤 분은 녹색, 어떤 분은 빨강색, 이렇게 다 다른 것처럼 전부 다 각자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통일 하지 맙시다. 행동이나 모든 환경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임의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주어진 겁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듯이 지금 아내와 다시 태어나도 그 아내와 만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다 했어요. 어떤 목사님은 그것이 듣기 싫어서 녹취하기도 싫다고 했어요. 사람이 ‘아, 그 때 선택을 잘못해서 지금의 마누라를 만났다.’고 하지만 다시 태어나도 그 여자와 반드시 만나서 애 둘 낳았으면 셋도 아니도 반드시 둘 낳게 되어 있어요. 셋 낳으면 하나 죽고 반드시 둘만 남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인생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발걸음, 우리의 머리카락 빠지는 것도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있는 이 자리는 포지션, 주의 자리와 관련된 포지션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했지요. 사도바울이 가시가 들어간 것이 아마 전도하기 이 전에 아마 다소라는 곳에서 8년간 있었는데……, 사도바울이 32살 때 회개하고 1차전도가 46년도, 2차전도가 49년도, 3차전도가 52년도, 52년도에 잡히고 62년도쯤에 목 잘려 죽었을 거예요. 아마 사도바울이 예수 믿고 다소에 있는 동안에 사탄의 가시가 들어온 것 같습니다.

왜 그런가, 그때 아마 삼층 천을 본 모양이죠.(고후 12장) 그것을 본 뒤에 까불지 말라고 가시를 집어넣었어요. 우리 같으면 삼층 천 안 보여주고 가시도 안 집어넣는 것이 좋은 거예요. 누가 보여 달라고 했습니까? 일부러 보여줘 놓고 눈 나빠진다는 식으로, 본 것 자랑한다고 가시 넣어놓고, 그러니까 들어온 사탄의 활동인 가시나 보여준 것이나 어느 것 하나 우리 좋으라고 주어진 것은 하나도 없어요. 사적으로 우리 존재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사적으로 우리존재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주신 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느 한 가지도 없습니다. 주님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뭘 하면 됩니까? 야곱의 역할을 해주세요. 우리의 역할은 야곱이고 야곱이 이스라엘 되는 것은 주님의 역할이니까 우리는 실컷 야곱의 역할을 하라는 말이지요. 주변에 에서 있는가 한 번 살펴보고 팥죽을 팔든지, 식사대접을 한 번 하든지, 갖고 싶은 것 있으면 빼 내고 그러다가 얻어맞고 빼앗기고, 하여튼 우리가 할 수 있는 야곱의 일은 다 하세요. 그것이 우리 본성에 맞습니다. 그것이 아주 자연스럽고 “어렵지 않아요!!” 사람이 죄 지을 때 가장 기쁘다는 말이 있잖아요.

몰래 먹는 떡이 맛있다니까요. 떡 주면 “누굴 돼지로 아나?” 그런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떡을 그냥 주는 것이 아니고 감춰놓으면 그것이 더 맛있어요. 그러니까 즐겁게 죄를 짓는데 그 죄짓는 것도 주께서 허락을 해 줘야 됩니다. 괜히 남 죄짓는 것 흉내 내지 마세요. 괜히 제주 올레 길에 서서 기다리지 말고, 그것은 그 사람 몫입니다. 집에서 죄 지을 수 있는데 뭐하려고 거기까지 가서 죄를 짓습니까? 평소에 하던 대로 하면 다 죄를 짓는데. 어디서 본 영화 흉내 내는 식으로 하지 말고, 현재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그 삶으로 야곱의 역할을 다 해주시면 됩니다.

야곱의 역할을 다 해주시면 우리는 뭘 알 수 있느냐, ‘아, 죄 짓는 것도 내 맘대로 안 되는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삭개오가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뭐라고 했느냐, “내가 토색한 것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습니다.” 하지요.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어떤 아이디어가 퍼뜩 떠오르는가 하면, 삭개오가 “네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하는 이야기를 듣고 “네 배나 갚겠습니다.” 했다는 말이지요. 그 때 우리는 일단 네 배를 갚아주면 구원이 나에게 주어지는 줄 알고 있어요. 이런 통박을 또 굴려요.

네 배 갚는 것은 삭개오고요, 우리는 구원받고 난 뒤에 불현 듯 돈 안 갚은 생각이 나서 오히려 네 배나 감사할 수가 있어요. 그것은 우리 몫이고 남의 면죄 받은 통로, 환경을 우리가 본받는다든지 따라가지 마세요. 테레사 수녀 따라가지 마세요. 사람들이 자꾸 모범적 모델을 생각하는데, 현재 여러분을 여러분 자신이 시시하게 볼지 모르지만 주께서는 절대 여러분을 시시하게 안 봅니다. 왜, 주님이 친히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머리 훌렁 벗어져도 “아이고, 예쁘다. 머리숱이 왜 그렇게 많나?” 이렇게 이야기 한다는 말이지요. 뭐든지 보기에 심히 좋아 보이지요.

거지 나사로가 뭐가 보기 좋겠습니까? 그런데 천사를 보내서 vip 모시듯이 모셔갑니다. “거지 나사로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하고 모셔갔다고요. 거지 나사로가 믿음이 좋아서 아픈데도 꾹 참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긁었어요. 가려우면 긁고 헌데 있으면 또 긁고 안 아프면 그냥 퍼지고 더우면 그저 덮고, 그렇게 하시되 그렇게 누릴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축복인 것을, 이것이 주께서 사용하시는 환경, 내 환경이 아니고 주님이 환경이라는 것인데 그 환경의 주체를 내 쪽으로 가져올 필요 없어요. 내 쪽에서는 그냥 누리고 즐기기만 하면 되지요.

그래서 우리가 즐겁다고 해서 그 즐거움을 또 기대하지 마세요. 기대하게 되면 어느새 또 대상이 바뀝니다. “그때 주께서 이렇게 해서 참 재미있었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좋았다고 해서 그것을 지금의 즐거움으로 가져오지 마세요. 과거에 어느 바닷가에 갔을 때 좋았다고 해서 그 바닷가에 또 가보세요. 가 봐야 재미 하나도 없어요. 스티로폼만 둥둥 떠다니지 재미 하나도 없어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늘 변화하는데 그 변화조차 주께서 주신 변화입니다.

중요한 것 해보겠습니다. 시편 110편에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까지”라는 것은 묵시적 시간입니다. 역사적 시간 개념으로는 모릅니다. 이렇게 “앉으라” 했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새로운 개념이 나옵니다. 어떤 개념이냐,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개념이 아니고 예수님의 활동과 몸에서 나오는 개념이 인간이 알고 있는 성경 단어를 통해서 이것이 다 녹아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언약, 다윗언약 하는데 다윗언약이 뭐냐, 다윗 언약에 하라, 하라, 하는 것이 있느냐? 없습니다. 다윗언약은 이렇습니다. ‘내가 다윗의 자리를(포지션입니다), 주의 자리를 영원히 할 때까지 나는 다윗 자손을 떠나지 않으리라. 이것을 나의 성실함으로 이루리라.’ 시편 89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셀라).”(1-2절)

여기에서 ‘~까지’라는 것은 단지 시간상의 마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지속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완성을 보기 전까지는 내가 너를 포기하지 않겠다, 그 말입니다. 완성하고 난 뒤에는 손 떼고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잖아요. 완성할 때까지 주께서 알아서 다 마감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다윗언약입니다. 그러면 다윗언약대로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일단 껍데기로 본다면 그 예수라는 껍데기 안에 다윗언약이 살아 있어요.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살아 있습니다. 이 말은 ‘주께서 내 주에게’ 맹세하신 원수와 싸워서 승리했다는 그 내용이 예수님 안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 있으면 예수님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우리 몸에 퍼져요. 그러면 우리가 우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마귀를 이겼던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지키게 됩니다. 그런데 마귀는 무기가 있어요. “너 죽는다! 너 이러면 죽어!”라고 하는 거지요. 이것을 설명하고 이번 시간은 마치겠습니다. 제가 진작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아주 벼르고 있었어요. 어떤 사람이 “나는 믿음이 있습니다.”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제가 묻지요. “국가가 신앙을 버리라고 강요해도요?” 국가가 너무 거창하면 집에 있는 아버지가 신앙 버리라고 해도 신앙을 지킬 것이냐. 또는 아내, 남편이, 자식이 신앙을 버리라고 해도?

요새는 연로하신 분이 자식 말을 그렇게 잘 듣데요? 아마 재산을 이미 다 줘버린 모양이에요. 죽을 때까지 자식 재산 주면 안 된다니까요. 뭘 쥐고 있어야 이것이 미끼가 되어서 자식들이 벌벌 떨지 자식 다 주고 나서 아무것도 없으면 그 다음부터 자식들에게 천대받는 것만 남아요. 신앙이 있다고 했을 때에 주께서는 과연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를 국가의 이름으로, 가문의 이름으로,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의 이름으로, 자식의 이름으로 압박을 가할 때에 두렵지 아니하겠느냐, 하는 겁니다.

신앙이 있다 할 때 이 말이 ‘주께서 신앙을 주셔서 주의 것’이 되었느냐, 그럴 경우에는 안 두려운데 내가 내 신앙을 나를 지키기 위해서, 신앙이라는 것이 있어야 나를 지킬 수 있다고 자부해서 신앙을 지키고 있는, 그야말로 내가 지키고 있는 신앙은 어디서 파토 나고 다 깨지느냐하면, 주변에 깔려 있는 이런 압력에 의해서 몽땅 다 깨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깨져서 자기가 믿음 없음이 들통 나는 것이 겁나기 때문에 더욱 더 어디에 매이느냐 하면, 신앙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국가가 가정에 매이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믿음이 있다고 자부하는 처녀가 자기는 불교집안인데 자기 혼자 교회 나왔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다고 자부하면서 사는데 결혼 할 때 예수 믿는 가정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이제 가정적으로 내 믿음이 가짜가 아님을 커버해줄 수 있는 권력단체로 작용한다는 점을 감안해서 그 집에 시집가려고 시도하게 되는 거예요. 진짜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보살하고도 결혼할 수가 있습니다. 진짜 믿음 있는 사람이 보살하고 결혼한다면 제가 주례를 설 용의가 있습니다. 기독교 가정을 선택했다는 것은 내가 믿음을 그대로 지켜 왔는데 행여나 어떤 돌발사태가 벌어져서 더 이상 내 힘으로는 내 신앙을 지키는 것이 힘이 부치게 되면 주변의 힘을 도용해서 그 힘을 의지해서 내 신앙을 유지하려는 계산으로 믿음의 가정에 들어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거 믿음, “아니거든요!!” 이런 식으로, 그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그것은 일종의 반복된 교육, 학습의 효과였습니다. 교회 다니면서 집안에서나 교회 밖에서 겪는 외로움, 혹은 설움에 대한 보상을 교회 가서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칭찬으로 받으려다 보니 그런 것이 자기 몸에 생리처럼 박혀서 자기가 믿음이 있는 것처럼 오해한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그것이 아니고요, 더 중요한 것은 그동안 기독교 국가라는 것, 만약 한국이 불교국가라서 핍박이 있다면 사람들이 미국이나 호주나 기독교를 옹호하고 기독교 믿게 되면 물건이라도 하나 더 팔아주고 공무원 취직도 할 수 있고 승진도 잘 되는 국가에 가려고 할 때, 그것이 과연 신앙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신앙 없지요. 왜 그런가, 신앙이라 하는 것은 원조가 있는데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 마귀가 포진된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사람들이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주변에 은근히 돌이 떡 되게 하고 기적을 베풀어서 추종세력, 팬클럽이 여기 저기 많이 생겨나고 그 다음에 결국 노리는 것은 세상 부귀영화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것을 주께서 이미 아시고 악마가 그렇게 자리 잡고 있는 그 포지션, “그 악마의 나라에 지금 너희들은 살고 있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광야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 번씩이나 시험을 받게 됩니다.

그것을 시험, 테스트, 유혹이라 하거든요. 예수님에게만 유혹입니다. 믿음이 진짜 있는 사람에게만 유혹인데 믿음이 없으면서도 믿음이 있는 체 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일상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유혹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심방을 갈 때는 과연 저 분이 축복을 받고 싶어 하는지, 아니면 진짜 유혹을 축복으로 생각하는지 그것을 점검하는 차원에서 심방을 해 보셔야 돼요. 그럴 때는 신명기 28장을 들춰야 돼요. 그 중에서 15절을 읽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심방 받는다고 생각하고 들어보세요. 제가 신명기 28장 15절을 여러분 집에 심방 가서 읽는 거예요. 제 좌우로는 좌청룡 우백호처럼 할 일 없는 권사님들 대동해서 죽 앉아 있는 거지요.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그러니까 마트에가 가서도 저주받는 거예요. 선반에 있던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져서 머리가 깨지는 저주를 받는 거예요.)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신월동 뱀 있잖아요. 괜히 길거리 가는데 누가 풀어놓은 뱀한테 물리는 것 같은 재수 업는 것) 네 몸의 소생과(자식이 밖에서 보이스 피싱에 걸려서 돈 2천만 원 뜯기는 것)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남편이 술 먹고 들어와서 마구 두들겨 패는 것)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쓰레기 잘못 버렸다고 이웃집과 싸우고 주차문제로 시비 붙어서 싸우는 것).”

이 신명기 28장 15절부터 19절까지 액자로 해서 붙여놓고 사는 사람 봤습니까? 이것을 액자로 만들어서 개업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는 거예요. 대전에 이 종분 집사님 바이올린 학원 개업한다는데 이것을 액자로 만들어서 선물로 주면 좋겠어요. 왜 사람들은 그렇게 일방적이고 편파적입니까? 주께서 하는 이것은 왜 빼고 이야기합니까? 신명기 28장의 앞부분만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예요? “들어가도 복을 받고” 이것은 ‘나는 복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예수님이 당했던 세상하고 자기가 꿈에 그리는 세상하고 차이가 나도 너무 차이가 나는 거예요.

같은 세상인데 세상을 보는 눈이 왜 그렇게 예수님과 다릅니까? 다르면서도 우기는 것은 “나도 믿음이 있다”는 소리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예수님이 보는 세상을 같이 봐야지. 예수님의 주변에는 악마가 배치되어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된 것이 자기 주변이 다 복 주는 사람만 있어요. 뭐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거지요. 한스 큉의 책에 보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속는 것은 ‘제발 좀 속여 줘’ 해서 속는다는 겁니다. 사람이 속는 것은 누가 망상과 환상으로 나를 좀 기분 좋게 안 속여 나, 해서 속는다는 거예요.

그것이 잠언 서에 보면 나옵니다.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잠 11:27) 믿음이 있는 성도는 “주여, 제발 제가 와장창 깨지는 일이 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깨지는, 내 모든 교만이 다 깨지는, 그런데 교만은 깨져봐야 합니다. 물론 그래봤자 밑에 있는 교만이 또 올라오지만. “매일같이 내가 만든 나 됨이 깨지는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기도를 굳이 안 해도 이미 다 준비되어 있어요. 실제로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심방을 해도 이처럼 예수님이 심방하는 것과 오늘날 당회장 목사님이 좌청룡 우백호 거느리듯이 별 할 일도 없는 사람들 죽 대동하고 하는 심방하고는 그 질이 다릅니다.

저주를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네가 갖고 있는 것이 어떤 보호막 속에 싸여있는, 네가 스스로 꾸며낸 그것으로 유혹을 자처한다.’고 하는 거예요. 유혹을 자처하는 그것이 아니면 나는 그냥 그저 사는데 주께서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찾아오는 거예요. 얍복 강가로 야곱을 찾아오셔서 야곱이 깨졌고, 사울을 찾아와서 사울로 하여금 눈이 멀게 만들고, 잘 살고 있는 어부 베드로를 찾아와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는데 예수님 죽을 때 보니 사람 몇 명 낚지도 못했어요, 낚기는 뭘 낚아요, 예수님 혼자 가버리니 뎅그러니 남게 된 베드로가 사람 낚는 것은 못하겠다, 하고 다시 ‘고기나 잡으러 간다.’ 해서 평소 하던 대로 고기나 낚으러 간 거예요.

뭘 하든지 ‘내가 사람 낚는다.’는 것을 주께서 저지하고 주께서 날 통해서 사람 낚게 했을 때 비로소 그때부터 사도베드로가 되는 겁니다. 내가 사도로서 사람 낚겠다는 것은 아직도 사도 아니에요. 다락방에서 기도하든지 뭘 하든지 성령을 불같이 받든지 해서, 이제부터는 나는 쓰인다는 사실, 쓰이는 입장에서 ‘이것 쓰이게 해주세요, 저것 쓰이게 해주세요. 이왕 쓰일 것 나는 재벌 3세하고 결혼해서 쓰이게 하옵소서.’ 이것을 우리가 생각하면 안돼요.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여러분이 늘 기도하면서 사세요. 결혼을 앞두고도 기도하시고 늘 기도가 일상화 돼야 됩니다. 그게 나훈아의 노래에 나오는 ‘무시로’라는 거예요.

무시로 늘 기도해서 사셔야 되는데 그렇게 기도해줘야 어느 것 하나 응답되는 법이 없다는 것을 생생하게 만끽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어느 것 하나 응답 안 됨으로 말미암아 주에게 쓰이고 싶다는 거예요. 만약에 내 기도가 응답되어 버리면 내가 주님을 개 끌 듯 주님을 부리면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하시되 우리가 평소에 하는 기도가 있잖아요. 하고 싶은 것,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 부흥되도록’ 하는 이런 것 있잖아요. 전부 다 하세요. 다 해놓고 그게 되나 한 번 보세요.

혹시 되거든 내 기도 덕분이 아니고 내가 하기 전에 주님이 기도한 덕분에 된 줄로 아시고 그냥 얻어먹는 처지라는 것을 느끼시면 되는 겁니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고, 무시로 기도해야 합니다. 늘 헌금하시고, 그래서 헌금의 효과가 아예 없다는 것을 늘 온 몸으로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또 행여나 행운 찾아올까 싶어 내다가 또 실망하고, 이렇게 잔뜩 자기한테 실망을 해야 돼요. 6페이지를 봅시다.

다시 정리합니다만 사죄의 방식은 우리한테 허용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죄 받은 결과물이에요. 우리가 이미 용서받았는데, 주님이 이미 용서했는데 뭘 또 용서해요. 우리는 사죄 받은 결과물로 살면 되지 새삼스럽게 사죄 받는 방식을 우리가 자꾸 찾아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찾아다닌다는 것은 그만큼 용서 안 받았다는 증거밖에 안되거든요. 교재에서 “바울의 복음”을 봅시다. 여기에 (1) 우주론, (2) 인간론, 이런 순서로 되어 있는데 사도바울이 이런 식으로 ‘우주론, 인간론’ 이런 것 언제 했습니까? 한 적이 없어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뭘 했느냐? 제가 총신 졸업하면서 쓴 석사논문이 있습니다. 은근히 석사학위 자랑하는 것은 아닌데, 제가 박사는 안 받았습니다. 그만큼 마음을 많이 낮춘……(???) 논문 제목이 “약속과 언약의 관계”에요. “로마서에 나오는 약속과 언약의 관계”가 제 논문 제목이었습니다. (*정확한 제목은 이 근호, 『로마書에 나타난 바울의 約束觀』, 총신대학교, 1988년, 국회도서관청구기호, 227.1 ㅇ614ㄹ) 사도바울은 조직신학을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약속 안에 구약의 약속들이 여기에 어떻게 층층이 달성되어 있느냐,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림을 그렸어요. 십자가를 그려놓고 “십자가 약속 안에 구약의 언약들이 층층이 달려와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여기에 소속 된다.”라고 한 겁니다. 이렇게 해 놓고 노아방주는 노아방주를 그냥 보지 말고 십자가로 먼저 와서 십자가의 의미를 가지고 노아방주를 해석해야 그 해석이 다시 십자가로 돌아온다, 한다고 설명한 논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약속에 대해서 한 거예요.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 1:9)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여기서 사도바울의 복음이 중요합니다. 약속이 등장하게 되면 약속 주변에 있던 것은 다 뭐가 되느냐, 이 주변에 있던 것은 다 죄가 되는 겁니다. 이 죄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 죄 개념이 무엇을 추가 되느냐 하면, 있음은 없음이 되고 산 것은 죽은 것이 되는 여기에 죄들이 포함이 되면서 사도바울의 개념 하나 하나가 사도의 입에서 탁탁 터져 나와요. 있음은 없음으로, 살아 있음은 죽음으로, 그런데 사도바울이 말한 다른 복음은 뭐가 빠져 있느냐하면, 죄를 여기에 집어넣지 않고 그냥 있는데 죄 있는 인간, 살아 있는데 죄 있는 채로 살아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죄 있는 인간, 죄가 있는 채로 살아 있기 때문에 이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 것인가, 거기서 나온 것들을 사울은 이미 경험했어요. 뭘 경험했습니까? 사도바울은 본인이 뭐라고 했습니까?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지요.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뭘 느끼냐, 죄를 느낍니다. 죄를 느끼니까 ‘살아 있는 내가 죄가 있다. 아, 나는 용납 못하겠다.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내속에 있는 죄를 어떻게든 제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더 매진하고 열심을 내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만 뭐든지 할 용의가 되어 있다는 식으로 해서 내 속에서 죄가 사라지게 하는 방도를 사용했었는데, 바로 그것이 약속이 아닌 비약속이고 비 복음이라고 이제는 과감하게 제대로 전파할 수가 있는 겁니다.

전파하면서 뭐라고 이야기했느냐하면, 의미심장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유대인에게 보낸 사도가 아니고 이방인들에게 보낸 보냈다.’(갈 2:8)고 했지요.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을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현재 교회는 유대인교회가 아니고 이방인 교회입니다. 맞지요? 유대인 말고 언약이 없는, 구약이 없고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의 교회가 되고 말았어요. 그런 사람들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 율법이 없기에 율법을 지켜야 되는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의인이 되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누가 왔지요? 그분이 찾아왔지요. 누가 찾아왔습니까? ‘내 말을 듣고 성령세례를 받은 자는 의인이 되고 구원’이 되는 겁니다. 빌립집사가 전도한 에티오피아 내시의 경우는 이방인입니다. 내시니까 직업으로 보면 별로 좋은 직업은 아니지요. 내시가 이사야 53장을 보다가 난데없이 빌립집사가 나타나고 “이분이 누구십니까?” “이 분이 예수십니다.” 해서 세례 받고 성령 받고 성도 되었어요. 성경 펼치는 것도 율법입니까? 아니거든요.

율법 안 지켰는데도 불구하고 천국 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방인 교회의 특징이에요. 그러면 사도가 전하는 복음 안에 뭐가 빠져 있어야 돼요? 율법을 안 지켜도 의인이 도 되는 교회가 이방인 교회지요. 율법을 안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의인 되었다면 그 율법을 누가 지켰다는 말입니까? 율법은 다 지켜야 되니까, 그런데 그 율법은 누가 지킨 거예요? 누가 우리 대신 지켰다는 사실을 본인이 수용하면 그것이 율법외의 한 의로서 주께서 한 화목제물로 의인 되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좀 뻔뻔스럽지요.

그런데 이것이 뻔뻔스럽다고 욕할 문제가 아닌 것이 성령이 아니고서야, “저는 하나님의 법을 위반했고 위반한 것에 대해서 제 쪽에서 어떻게 회복할 길이 없습니다.”라는 이것을 성령이 아니고서야 고백할 위인이 없습니다. 인간은 나름대로 로고스가 있어요. 나름대로 자기가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자체는 선하다고 보는 겁니다. 말이 어렵지요? 선과 악을 판단할 그 정도의 의지와 선택권과 이성에 대해서는 인정해 달라는 겁니다. 내가 나쁜 짓은 안하겠는데 ‘나쁜 짓이다, 선한 짓이다. 다시는 나쁜 짓 하지 않고 선한 짓을 해야지.’라는 그 의지와 결심만큼은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해 줘, 그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씨앗이 되니까. 아낙사고라스가 그랬죠. 아낙사고라스가 말하기를 “인간 속에는 씨앗이 있다”는 겁니다. 그 씨앗은 착한 신과 연계되어 있는 씨앗이 되어서 그 씨앗을 노력해서 발현시키는 만큼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선비, 군자가 되는 겁니다. 그게 돈이 되는 거예요. 섭씨 36도의 더위에도 갓도 안 벗고 사람 불러 가면서 ‘이리 오너라.’ 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안동에 가면 있어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선비답게 살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씨앗이 누구에게나 다 있다는 겁니다.

누구나 있기에 그것은 교육을 통해서 개발하게 되면 누구나 선한 사람이 되고 선한 사람이 모이면 그것이 선한 공동체가 되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 소위 안철수의 생각, 그런 식이지요.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안철수고 김철수고 관계없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죄밖에는 지을 것이 없다, 율법을 두 개든 세 개든 백 개 든 적게 지켜도 못 지킨 것이고 많이 지켜도 못 지킨 것이고, 그것을 십자가 앞에서 고백을 하는 겁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다시 자기 의로움으로 돌아올 길이 아예 차단되어 있어요.

이방인의 교회가 누구를 부끄럽게 한다? 유대인의 교회를 부끄럽게 해서 이방인을 보고 “아이고, 우리가 메시아를 죽였구나.” 회개케 해서 온 이스라엘을 구원받게 한다는 것이 로마서 11장 25,2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라고 우긴다고 교회가 아니에요, 대한예수교 장로회 간판 걸고서. 그런데 그중에 진짜 교회가 등장해 버리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자칭 목사입네, 장로입네, 이렇게 우기다가 진짜 순수하게 “나는 뭘 해도 죄인입니다.”라고 나오면 그 앞에서 다 낯 뜨거운 거예요. 물론 성령 받아야 낯 뜨겁지 성령 안 받으면 낯 뜨거운지도 모릅니다.

‘너도 나처럼 돼 봐라. 너도 나처럼 그런 생각 다 없어진다. 나도 한창 젊을 때는 개혁주의 외쳤다. 지금에 와 보니 개혁주의 그거 아무 소용없더라. 그거 해 봐야 복도 못 받고, 나가면 복이 아니라 나가면 사기당하고, 들어오면 복이 아니고 들어오면 집에 불나고, 아무 소용도 없더라.’ 이렇게 된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 성령이 임해버리면 이방인 교회가 이미 유대인 교회가 되어버린 그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두 증인(계 11:3)으로서 활동을 하게 되는 겁니다. 아주 유명한 증인이죠, 두 증인. 죽기 위해서 증언해야 될 사람들.

막상 말씀이 입에서는 달았지만 속에 들어가니까 쓰게 된 사람, 이것은 자기 운명이라 어쩔 수가 없어요. 에스겔처럼 그렇게 되는 겁니다. 말씀은 좋았는데 그 때부터 뭔가 내장에 탈이 생겨서 꼬였는지 어쨌는지 속이 안 좋아요. 말씀이 들어가니까 속이 안 좋은 거예요. 그런 입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게 바로 주님의 이방인 교회입니다. 바깥에 있는 사람은 “당신 구원받아서 좋겠지.” 하면 이방인 교회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라는 것을 알게 된 이것이 기쁘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끝까지 교회를 안 믿습니다. 끝까지 교회를 안 믿어요. 왜, 믿을 분이 따로 계시기 때문에 끝까지 교회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자, 예수 믿었으니 교회 믿자, 이런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신경 끝부분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을 믿”는다고 되어 있지요. 성도는 그것을 안 믿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으면 이미 그것은 공회 속에 포함되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 따로, 교회 믿는 것 따로,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교회인 것은 아니에요. 내가 교회가 아니고 나는 주님을 믿는 사람이고 주님을 믿는 사람인데 그게 교회가 되는 거지요. 주어와 술어를 ‘내가 교회’라고 바로 당기지 말고 ‘나는 주님을 믿는다.’ 하고 주님을 중간매체로 집어넣으란 말이지요. 이렇게 주님을 믿게 되면 주님을 믿는 그것이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여지를 남깁니까? 내가 만약에 주님 안 믿고 교회 믿으면 항상 잘렸다, 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 자체 내에 포함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었으니 이제는 교회 믿어야지, 라고 하거든 주께서 나보고 “너는 신자 아니다.”라고 이야기 해주세요, 라는 데까지 우리가 이미 예상하고 믿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사람에게 사랑의 대상이 둘이 될 수 없거든요. 주님을 사랑하면 나를 미워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주님 대신 또 믿을 만한 것들이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사랑 안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가 이미 교회 사랑하는 것으로 주께서는 주의 개념 속에, 주의 자리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되고 살아 있는 것이 죽은 것, 죄악된 것이 된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면서 이미 우리는 새로운 개념, 주님 안에 있게 되고 주님 안에서 살게 된, 사랑하는 주님 안에서만 우리는 있고 사는 사람들, 이 작업에 우리가 종사했기 때문에 우리는 육적인 본성을……이야기 이상하게 되는데 끝까지 잘 들어야 됩니다, 육적인 본성을 마음껏 발휘하세요.

마음껏 드러내세요. 드러나는 것을 우리가 말릴 수는 없습니다. 아닌 척 한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껏 드러내면서 주의 성령과 항상 마주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쉬었다가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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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7강


지난 시간에 사도바울의 복음이 삼위일체와 다른 것, 동방교회는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고 마리아 숭배, 성인 숭배, 삼위일체 섬기는 것을 가르칩니다. 혹시 유럽 여행을 가서 동방교회를 가보게 되면 하나님 세분이 나란히 놓여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어리석은 십자가’를 이야기합니다. 십자가는 반드시 뭘 포함하고 있는가 하면 예수님의 죽음만이 십자가가 아니라 예수님을 죽였던 자들까지 포함해서 십자가 사건을 형성시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피해자와 가해자 두 가지 구조를 다 갖고 있어야 십자가를 설명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을 복습해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있고, 아들은 어떤 때 아들이냐 하면 다윗 언약에 의해서 완성된 아들이고, 이 다윗 언약은 반드시 여기에 하나님의 원수를 염두에 두고 아들을 통해서 원수를 치게 되어 있고, 하나님은 유일한 신인데 주의 자리를 따로(주께서 내 주에게) 마련하는 겁니다.

원래 신은 하나인데 하나에게 두 분의 주가 등장하는 이러한 변신이 이스라엘에게만 나타나는 특이한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존재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고 기능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일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파악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다윗의 아들이 나타나거든요. 아들이 나타나게 되면 아들을 살해하고 가해하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살해하고 가해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하면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소급해 보면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혈육으로 엮어져서 그들을 모세를 따라서 애굽에서 벗어나서 하나의 국가가 되었고, 이 국가가 약속의 땅을 차지한 그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다윗이라는 왕이 등장하죠.

다윗 왕을 등장시켜 다윗 왕의 후손으로 나온 이스라엘이 누구를 죽입니까? 이스라엘이 다윗 언약을 따라 온 아들을 죽임으로써 육적인 자기 본색을 다 드러내고 이러므로서 다윗 언약은 육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영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것이 폭로된 것입니다.

목적은 같은데 목적을 기대하는 양쪽이 서로 원수지간으로 만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수가 어디 있느냐? 인간의 육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들통 나는 겁니다. 육이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것인데, 그러면 아담 안에 뱀의 자손이 담겨 있는 겁니다. 같은 아담 안에서 한쪽은 메시아가 나오고 한쪽은 마귀가 나오고.

이걸 다시 한 번 소급해 보면 몸 안에 마귀 있고 예수님 있고. 양쪽이 다 들어 있는 것이 역사들 통해서 만개하고 펼쳐지게 되는 아주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살해당하고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이 영역 빼놓고는 전부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고 있는 그런 세력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이 밝혀지지요.

아까 동방교회 이야기했는데, 동방교회가 진짜 교회라면 바로 이 십자가를 증거해야 하고 그 십자가 사건에 모든 인간들이 가해자로서 가담되고 있음을 알려야 합니다. 이 십자가는 가해자를 노출시키는 십자가를 섬겨야 할 텐데 그들은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고 삼위일체 교리로 단체 회원 모집하는데 급급했단 말이지요. 사람들이 납득하고 이해하는 이론을 가지고. ‘신이 인간이 되었기에 여러분도 신이 될 수 있습니다.’ 간단한 논리를 유포하고 교육합니다..

“여러분도 신이 되고 싶지요? 이왕이면. 하나님이 먼저 인간이 되셨는데 그것을 믿기만 하면 여러분도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했단 말이지요. 그렇지 않아도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호시탐탐 하나님이 되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단체라고 자처하는 교회에서 ‘하나님 만듫기’를 이벤트로 제시하니 마다할 위인은 없습니다.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여기서 뭐가 빠졌는가 하면, 십자가 사건을 구성하는‘가해자- 피해자 구조’가 완전히 다 빠졌어요. 이 바쁜 세상 가운데서도 하나님 믿어 주니까 스스로 생각해도 얼마나 대견하겠습니까? “하나님, 저 아시죠? 바쁜 중에도 주의 말씀 듣는 것 아시지요?” 이렇게 나오니까 여기에 무슨 가해자의 의식이 생기겠어요? 안 생기지요. 열심히 하면 할수록 사랑받는다는 생각만 든단 말이지요.

이게 다 육에서 나온 것입니다. 방금 말한 이것이 바로 신구약을 전부 합쳐놓은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단순화 시킬 수 있을까? 이렇게 단순화 시킬 수 있지요. 이스라엘에서 아우라처럼 번져 나오는 것이 있는데, 우유를 그릇에 부으면 크라운현상(왕관 모양이 생기는 현상)이 일어나지요. 이스라엘이 세상에 던져지면 여기서 크라운현상이 생긴단 말이지요. 이게 뭐냐 하면 우주론입니다.

육에서 나온 우주론 말고 진짜 우주론은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움직임을 나타내면서 그 주변에서 번져 나오는 우주론입니다. 언약적 우주론입니다. 그 우주론이 아인슈타인과 현재 천문학자와 망원경이 밝혀내는 그러한 우주론의 차이점은 이스라엘에게서는 하나님의 원수가 밝혀진다는 점이고, 망원경으로 아무리 찾아봐도 거기에 하나님의 원수는 안 나타납니다.

우리 인간은 마귀는 봐도 마귀인줄 몰라요. 왜냐하면 인간의 안목은 마귀에 의해서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뒤틀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귀 취급 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판단력은 완전히 망가져 있어서 마귀를 천사로 보고, 천사를 마귀로 여기는 그런 혼란 속에 있기에 마귀를 본다고 해서 알아볼 수 없겠지요.

이스라엘이 가는 통로에는 하나님의 원수가 등장하는데 그 원수는 데살로니가후서 2장 11절에 ‘거짓 것’이라고 합니다. ‘거짓 것’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반드시 존재하고, 그 주변의 것과 엮여지면서 비로소 등장해요. 육이 ‘거짓’이라고 무엇을 규정하는 그 자체가 엉터리요 거짓입니다. 마치 사기꾼이 남을 보고 “저 사람 사기꾼이야”라고 외치는 것을 믿을 것이 못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저 사람은 나를 해코지했으니까 하나님께 벌 받아야 해.”라는 주장을 정당화해 줄 수는 없습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왕을 공격하고 귀찮게 했어요. 그래서 헤롯은 세례요한을 목 잘라 죽이고 쟁반에 그 목을 담아 사람들이 보게 했습니다. 그러면 어느 쪽이 거짓 것입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세례요한은 참되고 헤롯은 거짓된 자입니다. 이 말을 헤롯에게 해 보세요. “헤롯 당신은 참된 세례요한을 죽였기에 거짓된 자입니다.”라고 한다면, 헤롯을 말하기를 “왕인 나를 공격하고 귀찮게 했기에 세례요한은 거짓된 자다.” 이렇게 나올 거예요.

그러니까 참과 거짓은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는 모르고 하나님의 아들인 이스라엘 나라 속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의견 차이가 있느냐를 통해서 밝혀집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되는 집단적인 이스라엘이 활동하면서 거짓 것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이 집단적으로 움직일 때만 ‘하나님의 원수’도 집단화되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집단이란 다수가 되더라도 숫자로는 1로 표현됩니다. 이스라엘을 집단으로 표시함으로 말미암아 육적이고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 혈육(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개인 가정사 문제입니다. 그래서 의식의 중력이 자기 안으로 쏠립니다. 우리 집안 잘 되고 나만 잘 되면 복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개인에서 하나님 쪽으로 나아가려면 개인이 집단을 위해서 포기해야 될 사태들이 일어나야 됩니다. 집단을 위해 개인을 포기해야 될 사태에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아이성을 공격할 때 이스라엘이 실패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그 중에 하나님의 전리품을 훔친 사람이 있었어요. 아간이란 사람인데, 이 아간 때문에 집단이 전부 전쟁에서 패했어요.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사적인 이득을 얻고자 하는 것이 집단적으로 이뤄야 될 하나님의 계획에 방해를 놓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서 뭘 알아야 됩니까? 사적으로 내가 이득을 챙길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집단이 나보다 우선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겠지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한다는 집단의식이 발생됩니다.

이렇게 집단의식이 발생되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오해를 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모든 언약, 십자가라든지 이 모든 것이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있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는 십자가 믿고 이런 이익을 얻었다.” 라고 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한쪽이 이득을 얻게 되면 반드시 다른 한쪽이 손해를 보는 그런 구조입니다. 한쪽이 주식이 올랐다는 것은 다른 쪽에서 주식을 사서 망한 사람이 내린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부동산이 올랐다면 다른 지역에서는 부동산으로 상대적으로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어떤 약속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멀리까지 생각하지 않고 앞의 것만 챙기고 자기 것만 챙기는 것을 옳은 행동으로 봐주자는 그런 룰이 있어서 그 룰에 따라 살아가는 거예요. 다윈에 의하면 이것이 자연도태설입니다. 안 될 놈은 제거하고 될 놈만 남아서 계속 살아가는 그 원리.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우리는 그 사회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이것은 사적인 이익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개인이 이득이 아니라 전체가 되어야 합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쳐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사적인 용심을 챙깁니다. 거짓말로 나아만에게 속이고 돈과 옷을 받아 챙깁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 장군이 갖고 있던 문둥병이 나아만 장군 개인의 문둥병이 아니라고 본 거예요. 이스라엘이 아람 나라 옆에 있어야 될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서 아람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린 거예요.

그런데 전체적인 언약을 모르고 게하시는 커미션을 챙기려고 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그 게하시에게 나아만 장군이 갖고 있던 그 문둥병이 그대로 옮겨가서 멀리 있던 거짓 것이 엘리사 바로 옆에 있는 거짓 것과 대비되도록 한 사태가 일어난 것입니다. 문둥병은 저주를 의미합니다. 저주받는 인간조차도 구약의 언약 아래서는 그것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문둥병이 걸린 거예요.

문둥병이 걸리면서 나아만 장군은 진짜 놀라운 것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해야 되고, 하나님을 위해서 문둥병 걸려야 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정당하고 그 정당함이 나의 정당함으로 왔다.”는 것을 나아만은 감사히 여겼습니다. 사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에게 부탁하지요. “혹시 제가 고향에 가서 여호와 아닌 다른 신을 섬기더라도 저는 마음속으로 여호와로 생각하고 섬길 테니까 이해해 주세요.” 라고 했어요. 일종의 파견 근무를 하는 것처럼 어디를 가도 “여호와 때문에 살았습니다. 여호와 때문에 살았습니다.”를 반복해요.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집단화 되고 그 안에서 사적인 것은 빠져야 됩니다. 뺀다고 빠집니까? 안 빠지지요. 여기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발생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오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는 사람은 자기 딴에는 이스라엘 집단을 위한다고 하지만 사적으로 전환된 이스라엘을 위해서 예수님을 죽입니다.

요한복음 11:50에 보면 “한 사람이 죽어서 우리 민족이 살면 유익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죽이는 것을 정당화 했습니다. 야구 경기에서는 희생 번트를 통해서 자신이 죽고 팀이 승리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칭찬들을 일입니다. 그러나 사적인 경우에 개인적으로 희생을 하게 되면 그 보상은 누구 해줍니까? 다른 사람들은 좋아하지만 본인은 손해잖아요. 그래서 희생할 때는 반드시 개인적인 희생이란 자체를 없애버리고 이 희생마저도 하나님께서 시켜서 한 고귀한 희생이라는 감을 가지고 희생에 나서도록 합니다.

12사도가 순교하는 것도 사적으로 손해 본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나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게 된,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역할을 맡은 것을 감사함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헌금과 기도와 모든 봉사가 다 그렇습니다. 사적으로 이것 해서 얼마나 이득을 얻을 것인가 라는 생각은 하지 말란 말이죠.

신약 성경에도 그런 것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특히 현대인들에게 난처하게 만드는 구절이 뭔가 하면 “네가 누구를 대접하려거든 대접 받은 사람이 고마워하면서 되갚을 여력이 없는 사람에게만 대접하라.” 그래서 여러분들이 남을 대접할 때 먼저 물어봐야 돼요. “제가 회를 대접하고 싶은데 혹시 돈 벌어서 저에가 회를 사줄 의향이 있습니까?” 그렇게 나오면 상대방이 “그럼요 사람이 염치가 있지. 형편만 되면 회보다 더한 것도 사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당신은 탈락입니다.” 이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씀은 어느 인간이 지키겠습니까?

이것을 예수님이 언급하시는 이유는 “나를 통해 구원 받았다고 그 은혜를 내게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예수님만 지켜야 하니까요. 만약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놓고 “근호야, 구원 받았지. 은혜 갚아야지.” 이러면 예수님마저 그 말씀의 위반자가 됩니다.

제가 헌금하지 말라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 헌금으로 사는데 받아 챙기는 사람이 다시 헌금해 버리면 방향성이 이상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고 자기도 십자가 지고, 예수님 금식한다고 자기도 금식하면 주님이 고맙다고 하시겠어요? 교만한 짓입니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 지고 같이 고통스러워하자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 십자가 지게 하신 자는 바로 저입니다.’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십자가 믿는 사람이에요. ‘내가 얼마나 못났으면 그분의 혜택을 입겠는가?’ 그걸 받아드리는 사람이 십자가 믿는 사람인데, 예수님 십자가 지셨다고 죄송한 마음으로 “다른 것은 없고 닭이 있는데 이것 삶아 드릴까요?” 이렇게 나오면 곤란합니다.

우리가 은혜 받았다고 은혜의 값을 하게 되면 예수님은 싫어하십니다. 그러지 마세요. 그래서 하고 싶거든 딴 거 하세요. 내가 나의 죄를 얼마나 교묘하게 숨기고 있는가를 찾아내면 돼요. 자기 잘남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색하게 걸쳐놓는 여러 가지 행위들의 껍질을 벗기시면 그 죄로 인하여 더욱 더 주님의 은혜가 더 높아 갑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3차 전도여행을 했던 사도바울이 고백했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거짓 것’이나 ‘하나님의 원수’ 이런 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진행하는 방향에 아우라(뒷배경)처럼 등장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어느 시대를 거친다면 그 시대에 합당한 거짓 것이 등장하고, 그 다음 시대는 그 다음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거짓 것이 나오고. 이런 식으로 계속 나와요.

처음에 이스라엘의 거짓 것은 이방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약이 첨가되고 이스라엘이 계속 진행되면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내부에 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이스라엘을 지키겠다는 사울 왕이 하나님의 적이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사울 본인도 몰랐어요. ‘내가 하나님만을 위해서 이스라엘에 봉사하겠습니다.’ 하고 선언한 왕인데, 그 왕이 오히려 이스라엘을 못 되게 만드는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을 몰랐어요. 언제 알았는가? 덩치 큰 골리앗이 자기 눈앞에 등장했을 때 비로소 자신은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신의 왕권을 지키려 했다는 것이 들통 납니다.

가정에서 아들을 장가보내면서 예수 믿는 며느리를 맞이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아들과 며느리의 신앙을 생각해서라기보다도 “우리 집안이 기독교 집안인데 절에 다니는 며느리가 들어오면 집안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본인의 신앙이 제대로 된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평소에 자신이 자기의 의로움을 지키기 위해 산다는 점을 몰랐는데 아들이 절에 다니는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겁니다. 골리앗이 등장한 거지요.

골리앗이 등장했는데 이쪽은 여호와 하나님 편이니까 이겨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여자를 불러놓고 “우리는 기독교 집안이니까 교회 나가야 되고 교회 나간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승낙하겠다.” 이렇게 했는데 골리앗이 달리 골리앗이겠습니다. 키만 큰 것이 아니라 고집도 센 거예요. “저는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댁의 아들이 하다 결혼하자고 졸라서 하려고 했는데 그런 조건을 지켜야 한다면 저는 결혼 못하겠습니다.” 그러면 아들이 옆에서 “엄마, 왜 그래? 내가 사랑하는 여자야!” 이렇게 나오고. 결국은 부모가 지지요.

누가 골리앗을 보냈습니까? 만군의 여호와께서 보냈습니다. 사울 왕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소년 다윗이 해결함으로써 드디어 사울이 발작을 일으킵니다. 악신이 사울을 움직이는데, 이것이 고린도후서 2장에 보면 ‘악마’고 ‘거짓 것’입니다. 악신에 들어가 다윗만 보면 발작을 일으키는데 사울도 어쩔 수 없어요.

이 악마라는 것, 하나님의 원수, 다윗 언약의 원수는 인간 대 인간의 감정이 아니고 감정을 초월한 그 다윗 속에 그리스도가 들어있어요. 사울은 악신에 들려 예수 그리스도를 겨냥하고 다윗에게 창을 던지는 겁니다. 창을 던질 때 다윗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게 던지는데 다윗은 자기에게 던지는 줄 알고 황급히 피한 후 황당함을 토로합니다. “왕이여, 왜 이러십니까? 저는 당신의 사위입니다.” 그 때 사울이 하는 말이 “내가 미쳤지. 어떻게 너에게 창을 던질 수가 있어? 정말 미안하다.” 본인의 행동을 본인도 몰라요.

나중에 본격적으로 강도가 심해질 때, 그 때 다윗은 시편 22편에서 비로소 압니다. 내가 골리앗을 이기고 내가 하나님 잘 믿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내 안에 뭘 발견하는가?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시편 22편 1절에 나오는 이 대목은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외친 말씀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같은 계통, 다윗 언약의 계통이기 때문에 다윗 안에 장차 예수님이 지실 십자가 사건이 먼저 스며든 거예요. 그래서 다윗 본인은 몰랐죠. 하지만 본인이 처해있는 시대적 상황에 각색된 신약의 십자가가 미리 앞당겨서 오게 되면 앞당겨진 그 시대에 각색자와 그 원수들이 그 시대 인물을 중심으로 하나의 연극을 펼치는 겁니다.

비로소 다윗은 ‘내가 잘났다.’가 아니라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내 속에 있는 그분이여, 그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가 됩니다. 요한복음 8:56에 보면 아브라함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다가 보고 기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아브라함이 언제 예수님을 보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보고 기뻐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구약에는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봤다는 말이 없어요. 기껏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세 분의 등장인물을 만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삼위일체라고 하는데, 그것은 너무 비약한 말이고, 천사 세 분을 만나고, 중간에 천사 한 분은 어디 갔는지 사라지고, 두 천사에 의해 고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행사하기 위해 가십니다.

그럴 때 우리가 아브라함에게 물어봅니다. “아브라함이여. 당신이 언제 예수님을 봤습니까?” 아브라함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네가 내 죄가 뭔지를 모르는 이상, 내가 언제 예수님을 보았는지를 너에게 설명해 줄 수가 없다. 너는 네 시대의 ‘하나님의 원수’을 알고 나는 내 시대의 ‘하나님의 원수’를 안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 시대의 그리스도는 그 시대 사람만 알고,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는 우리 속에 퍼지고 있는 적그리스도, 반복음적 요소들이 우리의 활동에서 계속 번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주론은 반드시 거짓 것이 표출될 때 그것이 제대로 된 우주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에서의 우주론은 별들의 생성, 블랙홀부터 해서 중력의 입자를 발견해서 처음에 질량이 어디에서 발생되었는지, 진동하는 초끈에서 어떻게 질량을 주는 근원적인 입자라고 불리는 힉스입자로부터 각종 입자들이 나왔는지를 규명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냥 있음에서 있음으로 에너지 형태가 바뀌어졌을 뿐입니다. 그냥 ‘있음’에서 ‘거짓 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현대 우주론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윗과 사울의 관계에서는 다윗이 피해자가 되는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다윗이 피해자고 가해자는 사울인데, 나중에 피해자 다윗이 가해자가 됩니다. 그리고 다윗에 의해 피해 당한 자가 있습니다. 우리야 장군입니다. 개인적으로 우리야는 억울하지만 사적으로 억울함을 따질 수 없고 집단적인 진짜 이스라엘은 따로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희생된 것뿐입니다.

그리고 남편이 그렇게 죽었으면 적어도 아내가 수절하고 참으면서 살아야 될 텐데 좋다고 다윗에게 가서 아들까지 나았지요. 여자의 마음은 갈대인가요? 만약이 다윗이 동사무소 직원이었다면 그와 결혼했겠습니까? 안 했겠지요. 왕이니까 얼른 결혼했지요. 처음에는 남편이 죽고 피해자인 것 같았는데 다윗에게 시집을 가서 가해자가 되고. 이것이 인간입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인간은 종잡을 수 없어요. 럭비 공처럼 내가 어디로 튈지를 모릅니다.

사도바울의 모든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대로 되도록 우리를 채용하는 거예요.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그 말씀 되도록 우리를 채용해서 그 말씀으로 몰아넣는 식으로 우리를 말씀 속에 있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든지 하는 말씀은 우리가 못 지키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목을 조르지요. 우리가 사용되는 겁니다. 왜요? 우리는 재료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생성케 하는 재료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사용해서 말씀이 생성되는 거예요. 우리 같으면 거짓 것은 없애버리겠는데 주님은 그것이 아닙니다. 계속 거짓 것이 생산되어야 할 이유가 성경에 거짓 것이 나오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성경에 적그리스도가 나오기 때문에 적그리스도는 양산되어야 합니다. 왜요? 세상은 말씀대로 되도록 되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귀찮은 것은 없애버리고 이것은 지워버리고 싶겠지만 우리가 결정할 사항이 아닙니다. 쓸데없이 주의 말씀에 관여하지 마세요. 그냥 내 담당이 뭔가만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의 시스템으로 움직이면 그 주변에 하나님의 새로운 우주관이 등장하는데 그 우주관에는 주님과 싸워야 될 원수가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이 국가기 때문에 원수도 국가로 등장합니다. 국가대 국가로 등장하는 것은 후대의 이야기고 옛날 고대국가는 각각 신봉하는 신을 내세웁니다.

블레셋은 다곤 신이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죠. 그래서 우리 한 판 붙어볼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골리앗과 싸울 때는 “거 할례 받았나?” “할례 안 받았다.” “우리는 할례 받았는데 한 판 붙어볼까?” 그래서 이 집단 대 집단의 싸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과연 효과가 있는지를 계속해서 보여주는 그러한 기계장치가 이스라엘입니다.

여리고 성을 돌 때 기계가 돌지요. 이스라엘 기계가 돕니다. 이스라엘 기계는 모세언약대로 작동합니다. 모세 언약대로 작동한다는 말은 하늘에 있는 거룩이 지상에 장착되어 지상과 함께 움직이는 거룩으로 내려오는 것이 모세언약입니다. 그래서 모세 언약은 법궤가 가만히 있으면 안 돼요. 움직여야 됩니다. 하루 한 바퀴씩 돌고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 돕니다. 돌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여리고 성이 마지막 일곱 바퀴 돌 때 무너진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냥 그들은 언약궤가 시키는 대로 돌 뿐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이 하늘로 올라가는지 땅으로 꺼지는지 그것은 그들이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언약궤를 바라볼 때는 언약궤에서 나오는 거룩만 발산하면 되지 뒤따라가는 내 쪽에서 나오는 것을 신경 쓸 이유가 없습니다. 마치 행진을 할 때 북소리에 맞춰 걸어가듯이 기계처럼 움직이면 됩니다. 그런데 일곱 바퀴 돌 때 무너질 것은 아무도 예상 못해요. 그런데 일곱 바퀴 다 돌때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양쪽 다 놀랐어요. 진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은 거룩한 분인 것을 이스라엘 본인도 놀랐고 여리고 사람들도 놀랐고. 이스라엘 본인들이 거룩한 하나님이 승리하심에 놀랐다면 여리고 성의 전리품을 그들이 갖겠다는 마음조차 먹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면 십자가 알고부터 ‘십자가 알았으니 은혜 갚겠습니다.’라는 생각이 들 수가 없어요. “아, 십자가가 이처럼 무서운 것이구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공짜로 천국에 넣어주다니. 이것 정말 충격이야. 나를 이토록 무시하다니.”라고 놀란다면 더 이상 이 세상에 무서울 것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죽이시는 하나님보다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이 더 무섭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우리 자신에게 기대를 걸 게 아무 것도 없음이 확연해졌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고 완벽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무시당하는 그 즐거움이 구원받은 자의 충격적인 즐거움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께 무시를 안 당하려고 하니까 문제잖아요. 무시당합시다! 무시당하는 그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주님께 철저히 무시당하고 “이 멍청아! 너는 내가 아니면 지옥 갔어.” 이런 무시당함이 행복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주님께 철저히 무시당하면 당할수록 우리의 사적인 고민은 없어집니다. 그런 고민은 사치입니다. “아들이 키가 안 커서 고민입니다.” 이것도 사치입니다. 아들 키가 그보다 더 작아도 괜찮아요. 주님이 우리를 무시하는 그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리와 창기가 구원 받을 때 그들의 직업을 탓하지 않습니다. 직업이 뭔가 하는 것은 구원 앞에서는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눈 돌리면 갑자기 “이왕 구원 받을 것, 국회의원이나 하면서 구원 받지 창기가 뭐고?” 이렇게 됩니다. 쇼크를 받으세요. 특히 연세 높으신 분들은 “내 청춘은 어디로 갔나?” 이런 한탄 하지 맙시다. 나날이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가 더해지면 늘 이팔청춘입니다. 82세를 거꾸로 하세요.

무슨 뜻이냐 하면, 십자가 앞에서 우리 자신들이 원수라는 말입니다. 내가 원수인데 원수를 엉뚱한 곳에서 찾으려 해요. 무시 안 당하려 하고, 주님과 같이 이야기하려 하고, 주님과 겸상하려 하고, 신처럼 되려 하고, 삼위일체 알아서 구원 받고자 하는 이 모든 것이 원수인데, 그런 것 안 해도 구원하셨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신학공부하고, 해외 선교하고 난리들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이스라엘은 일종의 기계인데 그 기계에 거룩이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담겨있는 거룩이란 분이 자기 언약을 성취하는 결과로써 주변에 거짓 것에 대한 승리를 보장하는 겁니다. 나의 승리가 아니고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승리의 전리품으로 있는 것을 우리는 족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여호와는 우리의 용사요, 우리의 반석이요, 우리의 피난처시며 산성인데 그분이 만든 성전에 우리가 문지기라도 된다면 세상에서의 천 날보다 더 낫습니다. 참새는 좋겠다. 공중을 마음껏 날 수 있어서. 처마 밑에 집을 짓는데 나는 왜 날개가 없어서 새처럼 집을 짓지 못하는가?

‘주님의 성전에서 살고 싶다.’ 이런 마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위기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위기가 나중에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뭐냐 하면, “내 살과 내 피를 먹으라.”고 하실 때 극단적이 되지요. 예수님 십자가 피를 우리는 피를 가지고 마중 나가야 됩니다. ‘나는 죽은 목숨이다.’라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마주쳐야 됩니다. 내가 살아 있고서는 십자가에 죽은 주님을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고 우리를 만날 때, 그 때 우리의 모든 향수도 주님 발 앞에 뿌린 여인처럼, 주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보다 더 귀한 죽음임을 고백하게 되지요. 베드로가 원치 않는 길로 갈 때는 이미 주님은 베드로를 죽은 목숨으로 간주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거기에 이 일을 통해서 살겠다는 생각은 접어야 했습니다. 이미 죽은 목숨인데 죽은 목숨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시는 겁니다.

이제 [인간론]을 봅시다. 교재 6페이지 밑에 있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복음에서는 이 인간론이 어떻게 개입되는가? 여기서는 고린도전서 15장 45절 말씀이 들어갑니다. 뭐라고 되어 있는가 하면,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해서 아담은 산 영이 되었는데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입니다.

이 말은 뭔가 하면, 죽은 자를 늘 살려내는 거예요. 여기서 죽었다는 말을 숨 끊어진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율법에 의해서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율법은 거룩입니다. 모세 언약은 거룩입니다. 진짜 거룩함 앞에서 우리가 살았다는 말을 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율법이 유대인에게 주어진 것은 “모든 사람으로 입을 막고 심판과 저주 아래 있게 하심이라.”(롬 3:19)

그러면 심판과 저주 아래서 죽은 사람이 무슨 수로 살 수가 있습니다. 고맙게도 같이 율법 안에 들어오신 분이 있어요. 율법 안에 같이 들어와서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죠.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인간론은 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봅니다. 예수님이 죄가 있다는 것은 율법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 아래서는 모든 인간이 죄가 있는 거예요. 비록 흠이 없고 죄를 안 지었다 하더라도 율법 아래서는 다 죄가 있는 겁니다.

죄 있는 육신으로 율법 아래서 죄인 되었고 저주를 당했기 때문에 육신에 있는 그곳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어디에 있었는데 어디로 갔다는 그 경로를 나타내 보여줍니다. 전에는 육에 있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육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신학자들은 크게 오해를 했습니다. 뭐냐 하면, ‘예수님은 부활 후 육신이 여전히 있는가, 아니면 영으로 존재하는가?’ 이것을 따지는 거예요.

십자가 복음 안에서의 모든 개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적 개념과 상관없단 말이지요. 예수님이 말하는 영은 육체와 대비되는 영이 아니고 육신이 있고 다 영광스럽게 있더라도 육이라는 악한 세대와 비교되는 차원에서 영이라고 하는 겁니다. 육신의 어두운 세계와 비교해서.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났으면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이제는 예수님의 부활에 속한 사람은 육으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우리를 다루시는 거예요.

“똑바로 살아!”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이미 구원 받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네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는 것을 왜 모르느냐? 왜 육신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법에 대해서 겁내고 두려워하고 염려하느냐? 이 바보야!’ 하는 식으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왜 네 신분도 모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군 복무를 마친 후에 10여 년간 꿈에서 군 복무를 했어요. 꿈에서 계속 제대 날짜 계산하고 아침에 눈을 뜰 때 ‘오늘도 어떻게 하루를 보낼까?’ 이런 생각을 하며 잠에서 깼어요. 군 생활에서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아요.

이 트라우마( 정신적 상처 ) 이것이 우리 몸에 배어있어요.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너는 육에 있지 않고 영에 있나니 누구 너를 정죄하리요.” 아무도 정죄할 사람이 없는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죄합니다. “내가 오늘도 나쁜 짓했구나. 내가 회초리를 맞아야지.” 스스로 채찍질합니다. 그래서 꿇어 앉아 기도하기. 점식 식사 금식. 이런 것으로 나쁜 짓을 착한 일로 보상하려는 시도를 하는 거예요.

이것이 트라우마입니다. 군 복무는 이미 끝났는데 아직도 군대생활을 하고 있어요.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위해 주께서 대신 죽으셨는데 누가 너희를 정죄하리요? 환란과 곤고나 핍박이나 위험이나 적신이나 칼이랴!” 라고 이야기해도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환란과 핍박이 오면 두려워하면서 “이제 주님의 사랑에서 잠시 끊어진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해요.(롬 8:35-39)

사람이 몸이 아프면 원상복귀만 생각해요. 인간론이란 것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 받는가가 아니라 주께서 우리를 통해서 살려내는 영을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인간인가 그것이 인간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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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8강
 

교재 7페이지 [그리스도론]입니다. 기존 신학에서 그리스도론을 이야기할 때는 그리스도론이 먼저냐 아니면 구원론이 먼저냐를 따집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있는지, 아니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구원이 있는지. 우리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있다고 한다면 인간이 중요한 것이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구원 작업이 있다면 인간은 소외되고 배재되는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인간이 소외되고 그리스도만 높이면 어느 인간도 예수를 믿을 마음이 없고, 예수님을 알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를 제일 먼저 사랑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실로 느껴지는 것은 내 몸이 여기 있다는 것. 데카르트는 말하기를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어요. 다른 모든 것은 의심해도 의심하고 있는 나의 존재는 의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은 모르겠는데 이렇게 의심하는 것으로 봐서 내가 존재하는 것은 맞잖아?” 라고 나서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모든 관심사가 항상 나에게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칸트 이후에 피히테라는 사람, 그 후 셀링, 그 뒤에 헤겔. 이들을 독일의 관념론자들이라고 하는데 관념론이 무엇인가 하면, 신을 설명할 때 세상적인 움직임으로 신을 설명하는 것을 관념론이라고 합니다. 피히테라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우주론까지 다 나(자아)에서 나왔다”고 했고, 셀링은 “그 나(자아)라는 것도 자연의 일부”라고 했고, 헤겔은 “자연이고 인간이고 간에 하나님이 성육신 된 거기에 종속되어 있다”고 했고, 따라서 “세상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할 때까지 정신적으로 발전해서 이루어간다’고 주장했는데, 발전해 갈 때 반드시 성경에 대해서 반대하는 세력을 통해서 정과 반대가 합쳐서 최후의 목적의 나라로 간다고 했고, 그러한 정신적인 발전을 물질적인 것으로 바꾼 사람이 포이에르바하고, 그 물질적인 발전에다 경제적인 여건을 집어넣은 것이 마르크스고, 그 마르크스를 유교적인 전통과 접목한 것이 김일성입니다.

우리 민족을 살리되 자체적으로 높은 사람 없이 공산사회를 이루어서 조선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유교적인 전통을 유지하면서 경제적인 것은 협동해서 해보겠다는 것이 김일성의 주체사상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북한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못 먹고, 못 사는 것은 남조선을 미제국주의에서 해방하기 위해서 참아야 한다.”

이 전체 사상이 추구하는 것은 인간해방이 목적입니다. 예수라는 분도 우리 인간해방을 위해서 존재해야 사람들에게 먹히는 메시아가 된다는 겁니다. 사람을 위해서 신이 있다는 것이지요. 사람을 배제해서 인간을 모독하는 메시아는 오디션에서 탈락하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선택 대상이 안 됩니다. 그러면 종교단체가 운영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합니다. “성경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가 있다.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것이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다.”라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면 진정 가슴으로 행복이 벅차오릅니까? 아니면 이론상 그러니까 억지로 정답은 발설하지만 그것이 가슴으로 답답함을 느낍니까? 답답할 겁니다. 뭔가 강요당하는 느낌이 들지 않던가요?

성경상 ‘하나님을 위한 인간’이지만 실제로는 내 몸의 욕망을 위한 하나님이 되었으면 하고 바랄 겁니다. 이것은 역시 내가 우선이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이 몸에 젖은 버릇을 떨쳐버릴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없는 마당에 하나님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내가 죽는 마당에 그리스도가 뭐 그리 중요합니까?

내가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지, ‘하나님 있고 내가 있다’고 하면 그것을 광신도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따져보세요. 현대인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어설프게 미쳐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갈등 속에 있기에 자아분열 때문에 불행합니다. 한 곳에 미치면 세상이 없어져도 행복을 느낍니다.

일본의 중년 아줌마들이 K-pop 젊은 연예인들에게 빠져서 용돈을 모아서 한국까지 와서 가수들의 콘서트에 다니고 영화촬영 장소를 찾아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하면서 미쳐보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다니는 것도 미친 교회에 가면 사람들 수가 많습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에게 당부합니다. “제발 미치지 마세요.” 라고.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마저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를 포기했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포기한 거예요. 구원이고 뭐고 이런 것은 생각 못합니다. 왜? 인간 구원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 구원은 없고 구원이 있다면 그리스도에 의한 자기 구원입니다. 나사렛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이것이 성부와 성자 사이에 창세전에 합의한 사항입니다.

어떤 것을 합의했는가 하면,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님이 “예수야, 너 자신에서 벗어나서 예수 안을 만들어야 된다.” 에베소서 1장 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에서 뭐로 바뀌어야 되는가 하면 ‘예수 안’으로 범위를 확장시켜 줘야 되는 겁니다. 확장시키는 이 언약이 나사렛 예수 본인의 처지보다 더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했지요. 잔을 마시는 것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이미 합의한 사항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후 사흘 만에 부활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어요. 마태복음 16:21에 나옵니다. 부활하실 것을 알면서도 막상 죽음 앞에서는 자기 자신보다 주님의 계획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그 문제를 놓고 예수님도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자기 자신을 어떤 계획 앞에 포기한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아예 안 하잖아요. 안 되는 일 시도하지도 마세요.

안 되는 것은 말씀이 여러분을 되게 하시는 겁니다. 되지도 않을 것을 자기가 해보겠다고 설치지 마세요. 예수님은 말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에서 예수님에게서 뭐가 발생됩니까? 십자가 사건이 발생되는데, 십자가 사건이 발생해야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직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맡은 이 직무, 반드시 마시도록 되어 있는 쓴잔,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 자신마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포기하고 난 뒤에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되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 ‘예수 안’이 발생됩니다. 이번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에 이르렀습니다. 이걸 설명하려고 하니까 저도 골치가 아프고 여러분도 골치 아플 거예요. 무엇이 먼저 있을 때는 먼저 있는 것 안에 들어오면 ‘안’이고 그 바깥은 ‘밖’이라고 분명히 드러나요. 그런데 ‘예수 안’은 예수님께서 언약을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발생된 범주(영역)입니다. 이것은 ‘예수 안’이라고 합니다.

풍선을 생각해 봅시다. 어떤 풍선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풍선 안이 생기고, 이것을 경계선으로 해서 밖에 생기지요. 자, 이 풍선이 없다고 합시다. 그러면 안과 밖이 있을 수 없지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인간이 ‘나는 (집안)여기 있으니까 너는 (집)밖에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 전혀 먹히지 않는 소리입니다. 인간이 사적으로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결정은 주께서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봅시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7-8절입니다. “환란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라고 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자기 한 몸이나 잘 간수를 하지 왜 전 우주를 다 치시는 겁니까? 이런 일괄적인 행동을 하시는 권한이 왜 생긴 거예요? 내가 옆집에 불을 지르면 안 되지요. 본문을 다시 봅시다.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형벌을 주시다는 겁니다.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다는 이유로 내 가족이고 식구라 하더라도 형벌을 내린다는 아주 냉혹하고 무서운 말씀을 착하고 유순한 사도바울의 입을 통해서 쏟아내고 있습니다. 바울이 맞아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 다행입니다. 편지 글에는 이런 과격한 내용을 썼고 실제로 복음을 전할 때는 거북한 소리는 안 했을까요? 그런 일은 없어요. 실제로 설교한 내용이나 서신을 통해 쓴 내용이 같은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보면서 이런 말씀을 전하겠다는 자체가 인간으로써는 예의 없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인격을 모독해도 이렇게 모독할 수는 없어요.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치 않는다고 자기 엄마, 아버지 가리지 않고 다 불태워 죽인다는 것은 패역무도한 인간입니다. 학교 다닐 때 공납금 누구 줬는데? 어릴 때 기저귀 누가 갈아줬는데? 이제 와서 복음 모른다고 불살라 죽인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사도바울이 개인적으로 자기 안과 자기 밖을 나누면서 이런 경솔한 발언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지요. 풍선이 없을 경우에는 누구도 안과 밖을 의미 있게 주장할 하등의 권한이 없어요. 예수님이 계시다. 예수님이 계시면 ‘예수 안’이라는 것이 비로소 발생합니다. 하여튼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도 안과 밖이 없었어요. 예수님의 안과 밖에 등장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다 이루시고 주의 자리에 앉아서 비로소 새롭게 만들어진 영역, 아무것도 없는데서 풍선이 하나 생긴 것처럼 새로운 영역이 발생되면서 ‘예수 안’이 생겼고, ‘예수 밖’이 따로 생긴 겁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개인의 자격으로 하는 말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의인의 자격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예수 안’에는 다 이루심의 혜택을 입는 영역입니다.

‘예수 안’은 예수님이 받았던 모든 혜택, 아브라함 언약을 지키면 축복된 약속을 받지요. 그 축복된 약속이 제공되는 장소가 ‘예수 안’입니다. 왜? 예수님은 아브라함 언약을 완성했기 때문에. 모세가 신명기 28장에서 이 말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는 그 복이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다 옵니다. 십일조 안 해도 복 받고, 전도 안 해도 복 받고, 예배 참석 안 해도 복 받고, 성경공부 참석 안 해도 복 받아요. 진짜로 그래요.

신명기 28장의 말씀은 모세의 율법 차원이고, 모세 율법을 새언약에서 모세 율법까지 다 포함해서 이루거든요. 이루면 의인이 되고, 의가 있는 곳에는 복이 오고 죄가 있는 곳에는 저주가 오게 되어 있어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의인이 되어서 복이 오지 말라고 해도 오게 되어 있어요. 예수 믿는 사람은 뭘 해도 복을 받습니다. 밭에 가도 복이고, 발톱이 뽑혀도 복이고 뭘 해도 복이에요.

우리 생명은 이미 하늘에 있으니까 땅의 목숨가지고 염려하지 말라는 거지요. “네 생명은 누구도 손 못 대는 곳에 따로 챙겨놓았으니까 걱정 말아라. 지상의 네 목숨 건드리는 자가 있거든 그것은 옷과 같이 벗은 것이기에 그들이 가져가도 상관없다.” 이렇게 생각하라는 거지요. 골로새서 3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 밖입니다. ‘예수 밖’이 저주 받을 이유가 뭔가를 ‘예수 안’에서 따져보는 사람, 그가 성도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 있으니까 우리끼리 행복하자.’ 이것이 아니고, ‘이상하다. 예수 밖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지?’

내가 천국을 간다는 말은 내가 천국 감으로 말미암아 낸 대신 지옥 갈 사람이 필히 발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 하나 천국 가는 명단이 밝히질 때는, 누가 하나 지옥 가는 명단도 밝혀지는 겁니다. 유도 시합 같아요. 심판이 깃발을 들어요. 한쪽이 승리했다는 신호로. 그러면 반대편은 자연적으로 패배가 선언된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하는 이유가, 야곱과 에서 양쪽이 있어야 그리스도가 예수 안에서 택했다는 의미가 발생되거든요. 예수님이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는 것이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적용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야곱 군(그룹)에 속하는 사람과 에서 군에 속한 사람이 있어서, 에서는 모든 지옥 가는 사람의 대변자고 야곱은 천국 가는 사람의 대변자로 등장하는 겁니다. 같이 등장하는 거예요.

등장할 때 이쪽을 ‘예수 안’이라고 했다는 것은 저쪽은 그냥 ‘예수 밖’이라는 뜻이 아니고,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축복을 축복 되게 하기 위해서는 반대로 예수님께 있는 모든 저주는 이쪽에 축복이 온 분량만큼 저쪽은 저주를 받아야 되는 거예요. 천국에서 찬송소리가 높아질 때 지옥에서는 곡소리가 높아지는 겁니다.

저쪽에는 이를 갈며 슬피 울고 통곡의 소리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이쪽에는 찬송소리가 더욱 높아지는 거예요. 극과 극입니다. 너무나 대조적이에요. 부자는 목이 타서 물 한 방울이 그리워 물을 요청하는데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서 편히 쉬고 있어요.

그렇게 하는 그 모든 것이 개인적인 역량이나 능력에 따라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선이 예수로 인하여 새롭게 발생되었기에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 안’입니다.

제 강의를 정리해 보면, 기독론은 예수님에 관한 것이 아니고 우리 구원을 위한 것도 아니고, ‘예수 안’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하나님과 합의 된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이 일하셨다. 이것이 기독론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일하셨다.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구원을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마저도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일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철학에서 이야기한 ‘모든 것은 신을 위해서 있다’는 것이 안 맞지요. 그들은 ‘예수 안’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신이 있으면 신은 만물을 위해 존재할 것이다.’ 이것이 철학에서는 상식입니다. ‘모든 것이 나타나서 머물다가 회귀한다.’ 이것이 플로티누스의 주장입니다. ‘모든 것은 신에게 복속되어 있다. 그럴 때 더욱 신에게 영광을 돌린다.’ 이런 철학자의 이야기나 구약의 유대인들 주장과 유사해요.

구약의 유대인들은 어떤 신앙을 갖고 있었는가? 삼위일체. 그런 것 없어요. 그러면 철학에서 말하는 ‘신을 섬기자.’ 이런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엇을 믿었는가? 성전 회복, 이스라엘 회복, 땅 회복 같은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수표가 아니고 현찰입니다. 구체적으로 믿은 것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1948년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수용소에서 나와서 팔레스타인, 현재의 이스라엘 땅에 와서 자치 정부를 세웠습니다. 여기에 도움을 준 나라가 누구냐 하면 영국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탈레스타인 지역을 영국이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점령하고 있었는데 강제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주변 땅으로 몰아내고 떠돌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곳으로 가도록 연합군과 힘을 합해서 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곳에 간 후에 살다보니 땅이 좁다고 여겼어요. 그들은 유대인들이기에 연합군의 결의 내용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다윗 시대에 가졌던 약속의 땅을 회복하려고 했어요.

여러분 중에 약속의 땅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없지요. 지금 그곳을 가도 약속의 땅이 어딘지 모르고 그냥 땅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땅을 유대인들은 그냥 땅으로 보지 않고 약속의 땅으로 보는 거예요.

정신적으로 우리와 달라요. 약속의 땅에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후손이 살고 있으니까 그들을 빨리 내쫓아야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찾습니다. 그들은 사람들과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야 될 종교적인 사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원자폭탄이 왜 있는데요? 그것을 언젠가는 터뜨려서 빨리 약속을 땅을 회복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큰 욕심도 안 내요. 요르단, 시리아 땅 그 정도 땅을 차지하려 합니다. 그래야 아브라함 약속과 맞으니까.

괜히 사도바울이 등장해서 예수라는 사람을 거론하면서 갑자기 약속의 땅을 영적으로 처리해서 “약속의 땅은 하늘에 있다”는 되지도 않은 소리를 해서 사람들을 버려놓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성경을 똑바로 보라는 거지요. 에스겔, 예레미야를 보면 ‘약속의 땅은 약속된 씨에게 준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말씀이기에 정치적 차원에서 타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원자폭탄을 던져서라도 유대인들은 약속의 땅을 회복해야 되는 거예요. 이게 유대인입니다.

이런 유대인 중 한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깨달은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할 메시아로 예수님을 보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힘으로 믿을 수 없도록, 우리로 하여금 오해할 만한 분으로 몰래 잠입하듯이 메시아를 보내었고 인간들을 지배하는 숨어있는 세력, 곧 악마는 인간들을 꼬드겨서 이 메시아를 실제로 살해토록 했다는 겁니다.

예수님 태어날 때 헤롯이 미친듯이 두 살 이하의 아이를 다 죽였지요, 타국에서 온 동방박사를 곱게 돌려보내면 되는데 죽이려고 다시 불렀고, 천사가 나타나서 아이 예수님을 애굽으로 피신시키고 이런 일이 벌어졌잖아요.

이런 이야기를 보게 이런 마음이 생겨요. 주님은 왜 우리한테는 그런 일을 안 일으킵니까?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빨리 피하라!”든지 그런 계시는 안 내려 주시는 걸까요? 그에 대한 답변은 간단합니다. 아무 일 없는 것을 고마운 줄 아세요.

암 걸려서 낫는 것보다 아예 안 걸리는 것이 더 좋다는 거지요. 이것은 제 해석입니다. 믿지 마세요. 세상은 다른 차원에서 물결이 치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육적인 차원에서 치고 있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 안은 어떤 뜻을 갖고 있는가 하면 예수님께 일어났던 모든 사건을 형성했던 그 무대장치 전부가 예수 밖으로 밀려나는 사건, 그것이 ‘예수 안’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그 모든 것이 그 다음부터는 ‘예수 안’에 의하면 바깥에 위치하도록 새롭게 조정된 그런 구조가 정착되고 정립된 그 관계가 ‘예수 안’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영을 받지 아니하면 눈 씻고 찾아봐도 ‘예수 안’은 없습니다. 들어 갈 수가 없어요. 사람이 못 들어가면 그들은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없다고 합니다. 자기가 못 들어가니까 없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했어요. 미쳤지요. 공상 과학영화를 보면 사람들을 공간이동 시킬 때 캡슐 같은 것이 있어서 쑥 들어가면 다른 곳에서 나타나잖아요. ‘예수 안’이 뭔가 하면, 캡슐이 들어가는 것처럼 사도바울이 “예수 안에 있다.” “어? 없어졌네.” 보니까 25Km 밖에서 새롭게 등장했어요. 이런 것이 예수 안입니까?

사람들은 안과 밖을 구분하는 ‘예수 안’을 찾지를 못해요. 그런데 이 안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요한 1서에 보면 예수 안에는 성령이 있고, 성령이 있는 자는 사랑이 있어서 두려움이 없고 심판이 이르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래서 ‘예수 안인지 밖인지 어떻게 압니까?’ 라고 묻는다면, 이걸 그대로 보시면 되는 거예요.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이 안 보이니까 이것은 가위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 ‘사랑이 뭡니까?’ 사랑은 주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한 것이다. 이것은 있는 것 같으니까 세모. ‘두려움이 없나니’ 요새 며칠 동안 두려움이 없어졌다. 이것은 동그라미.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 나는 심판 걱정 없어. 나는 죽으면 천국 갈 거야. 이것도 동그라미.

‘사랑이 있고, 두려움이 없고, 심판에 이르지 않고’ 이 모든 것이 있으면 자기가 합격된 자로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예수 안에 있을 때는 ‘성령 안에 있다. 사랑 안에 있다. 두려움이 없다.’할 때는 이 안에서만 논의되는 것이 아니고 이 바깥에서 쏘아대는 것들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 없고, 심판이 이르지 아니하고, 사랑으로 감사하고, 성령 안에 있다’ 이런 방식으로 안과 밖을 설명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모든 편지 내용들이 그래요.

이걸 생각하시고 편지 내용들을 보시면 다 이해가 됩니다. “내가 우겨 쌈을 당하고 어떤 일을 당해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내가 극한의 환란에 처했어도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거든히 이길 수 있는 것은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심이라.”

이 모든 것은 바깥에서 주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압박이 왔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하는 말입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세 번이나 맞고, 도적의 위험과 강의 위험과 굶주림을 겪으면서도 “내 은혜가 네가 족하다(고후12:9).”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가는 곳에 항상 귀신이 와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희들은 누구냐? 너희들은 가짜야!” 마귀가 그런 소리를 합니다. 우리 같으면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면 가는 길이 수월하도록 가는 곳마다 대우받고 환영받고 말씀 전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은혜 받고 하면 좋겠는데, 가는 곳마다 핍박을 받고 죽음의 위험을 겪고, 몸도 아프고, 옥에 갇히고, 풍랑을 만나고 했어요.

로마에 전도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가는 길에 풍랑은 왜 만났어요? 주님은 왜 이렇게 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예수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나게 하기 위해서 그런 일을 겪도록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성도 바깥에서 계속 터지는 상황에서 “너는 예수 안에 있느니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그런 일을 겪으며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여기에 우리를 위한 주님이 어디 있으며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어디 있겠어요. 지금 일하기 바쁜데 언제 우리를 챙깁니까? 그리스도의 안과 밖, 다 이룬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살아야겠지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론입니다. 인성과 신성이 어떻고 이런 신학자의 주장은 다 성경 내용과 무관합니다.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을 몰라야 하는가? 꼭 알아야 해요. 어떤 분은 “이번 수련회 초반 강의가 어렵다. 꼭 이런 내용을 공부해야 하는가?”라고 하시는데, 꼭 아셔야 합니다. 인간의 아이디어가 그 정도로 계속 나오기 때문에 미리 알아야겠지요.

예수님의 기독론은 언약을 다 이루어서 예수 안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마저 거기에 따라 일하시는 모습이 그리스도론입니다.

이제 구원론을 봅시다. 사도바울의 구원론은 이걸 아시면 됩니다. 율법 이 한 가지만 아시면 구원론은 다 떼는 거예요. 율법은 거룩한 것이죠. 사람을 죽이는 겁니다. 율법을 지킬 위인이 있어서 준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율법을 지킬 수 없고 전부 다 율법에 의해서 저주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왜? 너무 거룩하고, 거기에 대해서 인간은 너무 더럽기 때문에. 그런데 더러움을 심판하는 것이 멈출 수 없는 주님의 할 일입니다.

제가 강의하면서 언급했지요. 철학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면 어떤 것이 문제가 된다고 했습니까? 아들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하는 점입니다. 선한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어 놓았으면 선한 세상이 되어야 할 텐데 악이 있고 죄가 있더란 말이죠. 그러면 그 죄와 악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는 문제에서 어거스틴과 많은 철학자들이 이런 해답을 내립니다.

“악은 없다.” 간단하지요. 분명히 사기꾼 있고, 나쁜 짓하는 사람이 있는데 왜 그런가? 그것은 ‘선의 결핍’이라고 합니다. ‘착함이 얇아서 그런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IQ가 낮아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악하다면 그 사람을 좋은 환경과 IQ높이는 주사를 놓아서 자신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하고 어릴 때부터 따뜻한 사랑을 마음껏 받으면 그 사람은 결코 악해질 수가 없다. 악한 것은 그 사람에게 잠재되어 있는 선을 발휘할 기회를 주변상황 때문에 갖지 못해서 악한 것이다. 배고픈 사람이 빵을 훔치는 것은 악한 짓이지만 배부른 사람은 빵을 훔칠 리가 없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스토아 학파의 주장에 따르면 ‘많이 가진 사람이 선이 약간 모자란 사람에게 자신의 남은 선을 나눠주면 국가 전체가 공통적인 선을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스토아 학파의 윤리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기독교보다 낫지요? 기독교 뭐 별것 있나요? 이런 마음이 기독교교리가 아닐까요? 마치 고린도후서 8장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나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은 뭔가 하면, “시간적 여유와 환경의 풍요만 제공되면 얼마든지 사람을 교육시켜서 나쁜 사람도 선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형제도는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사형제도가 있으면 선할 수 있는 기회를 사전에 인간적인 방법으로 차단하는 것이기에 그 사람 속에 잠재되어 있는 선한 것, 동양철학에서는 ‘성(誠)’이라고 합니다.

맹자의 성선설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선하게 태어났기에 선한 품성이 꽃피기까지 그것을 꺾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여기에서 인권운동이 나와요. 복수가 공공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사랑과 용서가 공공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가를 따져보자는 겁니다. 성폭행과 살인 피해를 입은 가족들은 가해자를 죽이고 싶지만 그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오는 것은 아니잖아요.

살려두면서 차츰 회개시키면 혹시 압니까? 사랑의 원자탄이 될 지. 손양원 목사처럼 자기 아들을 죽은 자를 양자 삼은 행위를 두고 사람들이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했는데, 혹시 그런 인간으로 변할지 누가 알겠어요? 사람이 복수를 안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해서 그런 것입니다. 뭐냐 하면, 내가 복수하게 되면 복수당한 가족에 의해 내가 또 복수를 당할 우려가 있어요.

더 나아가서 복수를 해야 할 사람인데도 안 하고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장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아들 죽인 놈 나와! 내가 교회 다니고 목사니까 너를 용서하는 거야.” “목사님, 고맙습니다.” “그래, 이제 신학교에 가서 선교사가 되어라. 내가 등록금도 대주고 뒷바라지 할게.” 그러면 그 사람은 가는 곳마다 간증하겠지요. “저는 진작 죽어야 될 살인자인데 하나님 은혜로 훌륭한 목사님을 만나서 이렇게 주의 사랑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복수하지 말고 용서를 하신다면 주님의 사랑이 세상에 가득 찰 것입니다.”

이런 간증에 감동, 감격해서 헌금하고 난리를 치지요. 여러분, 세상에서 감동 받을 생각하지 말고 무시당할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가해자입니다. 착각하지 마세요. 남들에게 감동 줄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는 남을 사랑할 권리가 없습니다. 맞아죽지 않은 건만으로도 천만다행으로 여기세요.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남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니고 나는 사랑을 베풀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내 주제에 무슨 사랑을 해!” 이런 고백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인간의 모든 입을 막는 것입니다. 예수님 빼고는 사람이라고 설치지 말란 말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의인도 아닌 것이 의인인 체하며 일하고 그러지 말란 말이지요. 우리는 율법 앞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어요.

그 다음에, 건져주고 안 건져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권한이 저쪽에 넘어가 있는 겁니다. 지금 구원론하고 있어요. 자, 그러면 기존 신학에서의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분석해서 그 속에 인성도 있고 신성도 있는데, 인성과 신성 어느 것도 불완전하게 되면 온전한 구원이 되지를 않아요.

어설픈 우리가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의 인성에 합류하게 되면 어설픈 인성이 주님 안에서 완벽한 인성으로 간주되고, 완벽한 인성을 기다리고 있는 로고스라는 하나님의 신성이 들어 오면 밝아진 신성에 의해서 우리의 인성과 하나가 되면 그야말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신적인 존재가 된다. 이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알고 수용함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이디아 같으면 구원론에 있어서 뭐가 필요 없습니까? 구약부터 내려오는 율법이 불필요하게 돼요. 율법을 왜 주셨습니까? 구원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거예요.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이 하나님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제사법에 의해서 하나님과 소통합니다.

흠 없는 어린양을 잡고 제단을 쌓을 때, 그 때 ‘그 위에 나의 이름이 임해서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복 주는 것은 우리를 보고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가해자가 되고 우리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그 어린양이 약속에 부합되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복을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어린양을 받친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어린양 자체가 복을 받겠지요. 어린양 자체가 하나님의 일을 하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린양 받쳤으니까 이제 내 일을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종속되어야 돼요? 어린양에게 일어난 그 일에 우리가 종속될 때 비로소 우리는 구원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성전이 이렇게 있고 동서남북 네 방향이 있는데, 동쪽에 문이 있어서 이쪽으로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죽습니다. 죽게 되면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불에 태우지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이사야 6장에 나오는 것처럼. 태우는데 안 태우고 남는 게 있어요. 피를 남기고 기름을 남깁니다. 피와 기름을 남기고 여기서 피를 뿌려요. 성막 중간에 커튼이 있고 맨 안쪽은 지성소, 바깥은 성소라고 합니다. 지성소는 7월 10일(대속제일)에만 들어가고 다른 날은 못 가고, 성도에는 제사장이 들어갑니다. 7월 10일에는 지성소까지 들어가고 피를 일곱 번 뿌립니다.

지금 보세요. 분명히 양이 들어갔는데 양은 분해되어 없어지고 피만 하나님께 나아가 만납니다. 피가 덮치는 여기에 율법이 있습니다. 율법에다가 흠 없는 제물의 피가 첨가되면 그 순간 이 전체의 나라가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되는 거예요. 만약 이 나라에 울산대학교가 있다면 그 간판 내려야 합니다. ‘울산제사장 나라’로 간판을 바꿔야 합니다. 여기에 잠실운동장이 있다면 운동장은 ‘잠실 제사장운동장’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 신나라양복점이 있다면 ‘신나라 제사장양복점’이 되어야 합니다.

제사장에게 종속 되어야 해요. 그런 것이 그림자로 하늘나라 천국의 모형으로 지상에 있는 겁니다. 지금 모세 율법에 의하면 이 나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 씻었으니까 이제 경기하러 가자.’ 경기하러 가면 삼성 라이온즈은 없어지고 ‘삼성제사장 라이온즈’가 있어요. 어디를 가도 전부 거룩한 나라에요. 더 이상 옛날의 내 모습으로 돌아갈 여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게 바로 ‘예수 안’입니다.

거룩이 싫지요? 귀찮고 거북하지요? 그 거룩 앞에서는 더 이상 우리가 죄로 인하여 받는 저주와 사망은 없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긴 상태에서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된 거예요. 왜? 무엇 때문에? 우리 행실이 올바르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피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주 받은 율법 구조에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으면 그것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구원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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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9강


지난 시간에 율법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구원론을 하다가 조금 남았는데, 율법 안에 있음으로써 예수 안과 예수 밖에서 한쪽은 율법에 대해 이미 해결한 것이고 한쪽은 율법에 대해 해결하지 않은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했습니다.

예수 안이라는 경계선이 있고, 예수 밖은 율법의 전류가 흐르고, 예수 안은 율법의 모든 것이 축복으로 변하고 예수 밖에서는 저주로 변하지요. 축복과 저주로 변하는 것은 예수님의 새언약이 율법을 다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 안은 율법으로 다루시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이기신 예수님이 다루시고 이쪽은 그냥 율법으로 다루지요.

다룰 때 다루는 방법은 양쪽 다 똑같아요. 율법의 기능은 구약에는 구약 이스라엘을 상대로 했고, 그것이 신약에 오면 모든 인간에게 확대되었는데 확대되면서 나타난 것이 뭔가 하면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하지 말고, 할 수 없는 것을 해라!” 라는 명령으로 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늘 거부당합니다. 이제는 할 수 있어 라고 장담하는 것은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할 것만 그만큼 키워 왔는 셈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확보한 율법 완성은 예수님의 몫이지 우리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믿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 흠집을 내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 독자적으로 자기 영역을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작업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예수님께 희생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이 아니고 반복적으로 타락케 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보통 신학에서는 “타락했느냐? 이제는 너를 그 타락에서 구원했다.”라는 공식을 주입하는데 하나님의 방법은 도리어 계속해서 타락케 함으로써 그 타락케 하는 작용 자체를 구원케 하시는 작용으로 실시하시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존 교회사에 나오는 교회들이 하는 일들이 사도바울의 복음, 특히 로마서 같은 경우와 전해 맞지 않아요.

제가 왜 교회사를 거론했는가 하면, 유럽과 미국이 신자가 많다고 하는데 그들은 믿는 것이 아니고 국가가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 기독교를 도입한 결과지요. 1917년에 레닌에 의해 러시아에서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납니다. 볼세비즘이 전 유럽이 퍼질 때 독일에서는 그것을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생긴 당이 있어요. 이게 나치당입니다.

나치당은 볼세비키 혁명으로 노동자의 천국이 되는 그런 사상을 방지하기 위해서 독일에서는 강력한 우파가 등장할 필요가 있었고, 그 때 히틀러가 등장해서 독일 교회(특히 루터교회)에 요청을 했어요. ‘공산당을 막아줄 테니까 우리의 정책에 협조해 달라.’ 그래서 교회가 협조를 했습니다.

교회의 협조를 받은 후에 히틀러는 이런 법을 만들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조직에서 유대인들이 직분을 맡는 것을 금지하는 아리안 법이 통과 돼요. ‘아리안 민족만이 교회에서 성직을 가질 수 있지 유대인들은 안 된다.’ 여기에 대해서 교회는 협조하자는 파와 협조할 수 없다는 파가 나눠졌어요.

마틴 니뮐러라는 사람은 강력이 반대를 했습니다. 독일은 종교성이 있고 종교 세금이 있어서 소득의 0.1%를 세금으로 거둬 그 돈으로 교회 운영 자금과 성직자의 봉금을 지급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국가의 정책을 거부하기 힘들었어요. 거부하면 그 교회에 돈을 지급하지 않으니까요.

전 국민에게 종교 세금을 거둬서 그 돈을 교회 운영을 위해 지급했는데, 국가 정책에 따르지 않으면 국가에서 “이 교회는 국가에서 인정할 수 없는 교회입니다.”라고 판정을 하면, 자금 지원이 끊어집니다. 그래서 국가 정책에 동의할 수 없는 점들이 있어도 노골적으로 반대할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틴 니뮐러를 앞장 세워서 교회의 뜻을 전했습니다. “‘성경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하나다.”라고 했기에 교회에서 유대인을 배척하는 정책에는 동의할 수 없다. 유대인들도 교회의 직분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나오면서 교회가 두 패로 갈라졌어요.

국가 정책에 반대하는 파는 고백교회입니다. 고백교회는 “당신과 정책을 같이하는 것보다 우선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신앙을 고백하는 이것이 진실로 교회의 바탕이 된다.”는 그런 뜻에서 고백교회입니다. 이 고백교회에서 배출한 유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칼 바르트.

여하간 이 고백교회가 국가 정책에 반대하면서 많은 교회들이 고백교회를 떠나게 되고 고백교회는 그 규모가 상당히 작아졌습니다. 사람들은 신앙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돈이 지급되지 않는 교회를 계속 유지할 수 없었기에 고백교회를 떠났습니다. 예수님이 돈을 주는 것이 아니고 히틀러가 돈을 주는 현실을 당시 사람들이 외면할 수 없었지요.

교회를 운영하려면 전기세, 관리비, 성직자 봉급 이런 비용이 들고, 또 교회에는 많은 세금 감면 혜택이 있었는데 교회가 국가 정책에 반대하면 이런 모든 혜택을 받을 수 없으니 쉽게 반대를 못한단 말이지요. 그래서 대다수가 고백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마틴 니뮐러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끝까지 남아서 저항을 하는데 점점 나치당의 횡포가 심하니까 본 훼퍼는 히틀러 제거에 나섰습니다. “당신은 목사로써 어떻게 살인을 계획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으니까 본 훼퍼는 대답하기를 “많은 사람이 탄 차를 미친 사람이 운전하는데 그냥 둘 수 없다.”고 하면서 히틀러 암살을 계획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나치당에 의해 죽습니다.

이런 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교회가 표면으로 내세우는 구호는 대단히 복음적이고 성경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배후에는 복음이 없고 오직 이득을 얻겠다는 그런 심보가 강렬하게 펼쳐진 것이 그동안 이어져온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뭉치게 된 것은 첫째 시간부터 이야기한 로고스고, 이 로고스는 칸트에 의하면 이것은 ‘인간의 이성’인데, 인간의 이성은 그냥 이성이 아니고 신의 이성, 신의 거룩, 신의 온전함 이런 것의 일부를 우리가 할당 받았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것은 십자가와 관계 없이 타고난 인간의 종교심입니다.

내 안에 있는 선한 것을 개발해서 신의 선한 것을 마중 나가서 신도 선하고 나도 선하니까 죽어서 신과 함께 거한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서 교회에 나갑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구원 방법은 율법을 줘서 “그렇게 착하고 선한 것 같으면 이 율법을 한 번 봐라.”고 주시지요.

그러나 이 율법을 그냥 들이대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에 보면 율법은 그냥 문자로 들이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피하고 싶은 것은 드러내고, 우리가 드러내고 싶은 것은 안 받고. 어떻게 하든 반복적으로 우리는 타락한 존재, 아무리 노력해도 타락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 인생인 것을 폭로하는 것이 이 율법입니다.

이 율법적 기능이 예수 안에서 여전히 작용하면서 예수님의 일방적인 공로와 마주치게 만들지요. 이렇게 해서 구원 받는 겁니다. 타락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아담의 타락이 지금 나의 타락으로 더 구체화 되고 현실화 되면서 구원되고 있는 거예요.

본 훼퍼(목사)가 히틀러 죽이는 그런 일에 가담하면 곤란하죠. 왜냐하면 심판하는 것은 주께 있습니다. 본 훼퍼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의 이면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하면, “전통이 있는 루터교회 개혁주의 고백교회를 히틀러가 나치당을 만들어서 그렇게 무시하는데 대다수 교회는 굴복했다. 나는 굴복하지 않고 그들을 제거하겠다.”

우리가 넉넉히 구원 받았으면 무시당해도 되잖아요. 이번 강의의 주제는 “이렇게 값진 구원을 받았으면 이제는 무시당해도 된다.”는 말입니다. 이곳에는 군 입대를 압둔 청년도 있는데, 군에 가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무시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 한 번 체험을 해보세요. 무시 안 당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렇게 무시당하게 하시는 그것이 주님께서 이미 준비해 놓은 구원의 넉넉함이 훼손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가 무시당하면 당할수록 구원은 충분하고 넉넉함은 더욱 드러납니다. 넉넉히 무시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은 어디를 가도 자유인입니다. 무시당하지 않으려하는 자는 도리어 예수님에 의해서 무시당한 사람입니다. 강의 마지막부분에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마구 무시 당합시다!” 이 한 가지만 알면 돼요.

부부싸움도 무시당하자고 마음먹으면 일어날 일도 없어요. 가정사와 모든 일이 “그래, 내가 무시당할 게.” 이런 식으로 살면 세상에 걱정거리가 뭐 있겠습니까?

이제 성령론을 하겠는데, 성신과 성령의 차이를 먼저 알아야 돼요. 성령은 구약에 안 나오고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 처음 출발합니다. 그 전에 마리아가 잉태할 때 나오지만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할 때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면 성령이고, 다른 선지자가 등장하면 성신입니다.

성신이 등장할 때는 미완성이란 뜻이에요. 구원에 보탤 것이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이 와버리면 더 이상 우리가 구원에 대해서 보탤 것이 없다는 뜻이에요. 아무것도 보태지 말란 말이죠. 성령을 받고 성령으로 세례주실 그분이 온전한 것을 준비했기 때문에 내 쪽에서 뭔가를 꼼지락거린다든지 내 쪽에 구원 받을 사전의 정지작업을 한다든지 그런 짓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 정지작업까지 주께서 준비하시는 겁니다.

율법을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철저하게 타락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임을 폭로하는 그것이 구원의 정리정지작업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3장에 나와요. “율법이 옴으로써 모든 사람들은 율법을 못 지킨다.” 이 정도라면 제가 말을 안 합니다. “율법이 옴으로 사람들은 율법 지키느라 수고한다.” 그 정도가 아니에요. “율법이 옴으로 모든 사람은 율법이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이게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 그 말씀이 나와 있어요.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율법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둡니다. 이렇게 되면 어느 인간도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의 모든 명령이나 규칙들도 바로 이 율법적 기능을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이란 반드시 율법적 기능과 더불어 복음이 나옵니다. 만약에 그냥 십자가를 믿게 되면 그것은 십자가 믿는 법을 지킨 것이 돼요. 십자가 믿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일하심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러면 신약의 성령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과 더불어 완성상태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작동이 복잡한 TV를 구입했을 때 TV기사와 함께 물건이 와요. 그러면 집에 있는 할머니들은 포장이 뜯는 것은 할 수 있지만 TV 선을 연결하고 리모컨을 작동하고 채널을 조정하고 하는 것은 모릅니다.

TV를 가지고 온 기사가 TV를 놓고 그냥 가지 않습니다. TV를 볼 수 있도록 모든 장치를 완벽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리모컨 조정하는 방법과 TV 조작방법 등을 자세히 알려준단 말이지요. 그렇게 설치하는 기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예수님을 앞장세워 들어오십니다.

들어오시면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모든 것을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이 성령을 다른 말로 보혜사라고 합니다. 이 보혜사는 예수 그리스도만 관계하지 이만희 목사(자신이 보혜사라고 주장하는 사람)와는 관계 안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관계해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자가 되고 모든 것은 이미 끝난 것입니다.

이 말은, 나(예수님) 외에는 다른 구원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은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 오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뭔가?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어떤 인간이 등장하더라도 다 가짜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마호메트가 등장하고 문선명이 등장하고 그 어떤 사람이 등장해도 전부 가짜입니다.

제가 가짜로 통일교 문선명을 거론했는데 사실은 지금도 교회 간판 걸고(대한예수교 장로회 등) 그리스도를 가리고 성령을 그리스도에게서 떼어 내서 순복음과 관련시키면서, 성령을 예수님 믿는 것과 분리해서 ‘우리 교회 믿기’로 바꿔치기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교회 유지와 성령과 관련시키는 인사들은 100% 가짜들입니다.

그들은 공부를 안 해서 그런지,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본의 아니게 그들이 하는 모든 작태는 지난 2,000년 동안 천주교를 그렇게 욕하고 그들로부터 벗어나서 개혁주의라고 자체하면서 그들은 점차 구약 성경의 형태로 갔던 동방교회, 천주교 그 시스템을 그대로 도용합니다. 왜요? 다수 대중이 원하는 것을 제공할 때 집단적으로 기독교에 입문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공부를 해서가 아니라 하다보니까 어느 새 목사는 특이한 복장 로만 칼라를 하는데, 로만 칼라는 로마식 칼라입니다. 그런데 감리교 신부가 로만 칼라를 하니까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감리교의 원조가 로마인가?’ 이런 의문을 가지요. ‘서울 칼라’라고 하든지 ‘세종시 칼라’라고 할 수도 있는데.

영국 성공회의 경우는 복장만 특별한 것이 아니라 개신교이면서 목사라고 하지 않고 신부라고 해요. 여러분들은 잘 모르는데 교회 달력이 따로 있어요. 교회의 절기를 표시해 놓고, 그 절기를 지킵니다. 그리고 교회 강대상 뒤쪽에 절기에 따라 휘장을 바꾸기도 하고 바꿀 때마다 헌금을 합니다. 그러면서 성령께서 그렇게 했다고 주장합니다.

성령은 성령 오신 날을 지키지 않습니다. 성령 본인이 절기를 안 지켜요. 독일은 국경일(공휴일)이 성인축제일, 성령강림일, 부활절, 성탄절 이런 날입니다. 옛날 전통적인 기독교 축제일에 맞춰서 지켜온 것인데, 이것이 구약 식입니다. 구약은 성령이 아니고 성신의 시대였습니다.

성신과 성령이 불완전과 완전함의 차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성신이 오면 어떤 점에서 불완전하냐? 성신이 활동하는 에스겔, 예레미야, 모세, 다윗 이런 사람들은 그 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을 수행하기 위해 움직였던 사람입니다. 말이 좀 어렵지요?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기드온이란 사람이 나와요.

제가 기드온을 알게 된 것은 젊은 시절 교회 다닐 때 이웃 교회와 축구시합을 하면서 처음 알았어요. 그 때 교회 출석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목사님이 굉장히 강조를 했어요. “우리는 기드온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 때는 기드온이란 이름을 처음 들었어요. 빵집 이름 같기도 하고 선교단체 이름 같기도 하고.

그 때는 성경 내용을 몰랐으니까 기드온이 누구인지 몰랐어요. 그런데 나중에 성경을 보니까 기드온이 방앗간 주인인데 비급한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하기 싫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회피하려고 했어요. 기드온은 나름대로 정당성이 있습니다. 제사장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냥 농사짓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자기보다 믿음 좋고, 믿음 있는 척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자기는 평범한 농부인데 “왜 저에게 찾아오십니까?”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네가 가장 못났기 때문에 찾아왔다.” 라는 취지로 찾아오셨어요. “네가 전혀 신앙과 무관한 사람이기에 적임자였다”는 거지요. 기드온의 하는 모든 행세가 무엇을 대변하는가 하면 당시의 전혀 믿음이 없는 일반적인 이스라엘의 신앙상태를 보여주는 표본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믿음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한 사람을 뽑아냈는데 그가 바로 기드온입니다. 그런 자(기드온)에게 하나님이 일을 시키니까 하긴 해야겠는데 불안해서 새벽에 아무도 몰래 가서 바알 신당을 훼파했는데, 아침에 난리가 났지요. “누가 바알 신상을 깼느냐? 범인을 잡아라!” 그렇게 해서 추적을 하니까 기드온이 한 것이 밝혀졌지요.

주께서 일을 시켜도 그 주님을 믿지 못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시험하는데 그 수준이 어떤 것인가 하면, 양털을 놓고 “양털에는 이슬이 내리고 다른 곳에는 이슬이 내리지 않게 하옵소서.” 지금 생각하면 약간 촌스럽고 어린애처럼 순진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여러분 같으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시험하겠습니까?

이왕 하나님을 시험하려면 로또복권 구입해서 ‘이것 대박 나면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해서 돈도 챙기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도 경험하고 이렇게 하겠지요. 기드온이 양털을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쨌든 처음에는 양털에 이슬이 맺히고 다른 곳에는 이슬이 맺히지 않게 해 달라고 했고, 하나님은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남자답게 이제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나가면 되는데 한 번 더 시험을 합니다. 두 번째는 반대로 “양털에는 이슬이 없고 다른 곳에는 이슬이 내리게 하옵소서.”라고 요청했어요. 하나님이 그 요구도 들어주셨습니다.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고 하나님이 시키시는 데로 했습니다. 이 말은, 성신시대는 명령이 인간의 내부에 오지 않습니다. 인간의 심령까지 오지를 않아요. 율법은 율법 밖에서 놀고 율법을 지켜야 할 사람은 강제적으로 믿음 없는 사람을 뽑는 식이에요.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성신이 율법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것까지 하지만 그 지키는 당사자도 자기 내부까지 그 율법의 완성이 스며들지를 않습니다.

십계명이 살아서 십계명에 박혀있던 글자가 우리 마음을 돌판으로 사용해서 새기는 것은 신약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새언약 시대입니다. 새언약 시대는 십계명이 우리 내부에 오게 됩니다. 그런데 저 밖에 있는 율법은 우리가 꼴보기 싫으면 율법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내부에 장착하시면 말씀을 보려고 하지 않아도 말씀 자체가 생산되어 불현듯 말씀이 생각나게 해서 우리의 심령과 골수를 수시고 다녀서 말씀 앞에서 항상 벌거벗은 채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히브리서 4:12-13에 나오지요. 그렇게 만드는 것은 성령시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드온은 농사를 짓다가 주의 일에 나서게 되는데, 이것이 구약 시대라면 우리는 농사짓는 중에도 주의 일을 하는 현장이 됩니다. 구약 시대는 집에 있을 때는 주의 일이 아니고 성전에 나와서 제사를 드리고 봉사를 하면 주의 일이 되겠지만, 신약 시대는 사우나에 가서 탕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에도 주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 돼요. 성령이 임하였기 때문에 그래요.

성신의 시대에는 신성한 일을 특별히 따로 만들어요. 성령 시대는 따로 만들 필요 없이 현재 우리가 하는 일상적인 모든 것이 주께서 일하시는 현장으로 성령께서 그렇게 전환시키고 마는 것입니다.

수능 시험 치는 광경을 뉴스를 통해 보니까 시험 시간 전에 모든 학생이 기도를 해요. 전부 교회 다니는 아이들 같아요. 막상 시험시간이 되어 문제를 못 풀면 ‘사바사바 분신사바’ 주술을 외우면서 어느 것을 찍을까 고르고 있어요. 그런 아이들이 시험 전에는 다 기도하고 있더란 말이지요. 이게 바로 성신 시대의 모습입니다..

다급할 때, 위기 때, 어려울 때 기도하게 되면 비로소 내 밖에 있기에 내가 호출해야 돼요. “하나님이여, 오셔서 도와주소서!” 호출하면 쪼르르 달려와서 “뭘 도와줄까?” 이것은 성신 시대고, 성령 시대는 호출하기 싫어도 호출하게 만들어서 호출한 사람까지라도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너를 쟁기로 파낸 하나의 사건인 것을 깨닫게 하는 것, 모든 것을 소급해서 결과와 원인을, 시작과 끝 전부를 주님의 일로 깨닫게 하는 것’이 성령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성령시대의 특징은 성경을 오래 본다고 해서 그것이 은혜가 되는 시대는 아닙니다. 기도를 오래 한다고 그것이 주님과 은밀히 교제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몸이 갖고 있는 구약 시대의 습성이 그대로 발휘된 겁니다. 진짜 성령 받고 기도의 응답을 받으면 내가 기도하지 않을 때도 주께서 기도하고 계시고, 내가 주님을 찾지 않을 때도 주님은 은혜를 내려주신다는 것을 소급해서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전15:10)”임을 깨닫지요.

내 밖에 계시다가 호출할 때 오시는 분이 아니고 호출하기 이전부터 내 자리를 주님의 자리 자리로 삼아서 일하십니다.

기드온 이야기를 계속해 봅시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전쟁에 나갑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을 앞세우셨기에 기드온은 어쩔 수 없이 떠밀려 갑니다. 마치 일요일에 아버지가 소파에 누워 뒹굴고 있을 때 아이들이 팔을 잡아끌면서 “아빠! 놀이동산에 놀러 가요.” 하면 아버지가 밀리잖아요. 이처럼 기드온이 밀려가 나갑니다. 그 때 전쟁에 나갈 사람이 22,000명이 나왔습니다.

적은 수십만이 되는데 22,000명으로는 게임이 안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이러한 사람들을 돌려보내라고 해서 10,000명이 남았어요. 그런데 그것도 많다가 하면서 물가로 데려가서 또 나눕니다. 그래서 겨우 300명만 남았습니다. 남은 자들이 침착하거나 전쟁에 나갈 의지가 탁월해서 남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들이 침착해서 뽑혔다면 이 전쟁은 주의 일이 아니라 침착한 사람의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큰 일 날 소리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무릎을 꿇고 물을 먹었는데 300명은 전방을 주시하면서 손으로 물을 떠서 먹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 전쟁은 ‘침착의 전쟁’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전쟁입니까? 침착한 사람들 때문에 전쟁에 이긴 거예요? 그렇다면 침착한 사람과 다수의 적들이 한 번 싸워보세요. 누가 이기는가? 이건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제일 작은 수를 뽑은 것입니다.

제일 작은 수는 없는 쪽이 있는 쪽을 이긴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속에 의로운 것이 하나도 없어요. 없는데 죽으니까 천국에 가 있고, 교회 목사는 어떻게 그렇게 착한지 천사 같아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지옥에 가 있고. 이것은 없는 것으로 있는 것을 부끄럽게 만드는 거예요. 무시당하는 세리, 창기가 소위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보다 하늘나라에 먼저 가있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개한테도 무시당하던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 안겼지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아무 것도 없는 존재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머리 둘 곳도 없고, 참새보다 못해요.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고 떠났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천국 가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아요.

마치 남자 목욕탕 같아요. 아무것도 안 가져가도 다 줘요. 여자는 바구니에 수건도 넣고 화장품도 넣고 가지고 가지만 남자는 그냥 가면 수건도 있고, 로션도 있고 다 있습니다.

기드온은 떠밀려서 갔기 때문에 전쟁의 모든 승리는 주님의 승리가 되고 그 칼은 여호와의 칼이 되는 겁니다. 여호와의 칼이 놀라운 사실은 지상에서는 ‘기드온의 칼’이 되는 거예요. 기드온은 군인이 아닙니다. 농사꾼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용사가 된다는 것은 그 배후에 누가 숨어 있느냐?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양했던 ‘주의 이름’만이 용사인 것이 구약의 핵심적인 요소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과연 완성태냐? 메시아냐? 아니지요. 기드온은 메시아가 아닙니다. 기드온을 흉내 내면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교회 오지 말고 방앗간부터 가야 돼요.

AD 200년경에 마귀와 싸운다가 사막에 간 사람이 있었어요. 오늘 같은 날씨에 사막에 가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모래찜질하기 위해서. 그런데 사막에 가서 귀신을 쫓아낸다는 거예요. 그 사람은 본인이 귀신인 것을 몰라요. 본인이 귀신입니다. 뭔가를 채우려고 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비우려고도 하지도 마시고. 비운다고 하니까 법정 스님이 생각나는데, 요즘 하버드 대학 졸업한 젊은 중이 나와서 만날 마음 비워라고 하는데 그것은 스토아 학파가 한 주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토아 학파에 대해서 공부한 거예요. 성령님의 사역을 스토아 학파가 주장하는 윤리로 이해하는 비非-복음적 사고방식을 복음으로 지적해야 합니다.

“마음을 낮춰서 행복에 이르는 것은 인간 속의 로고스의 작용이다” 이것은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교회. 신학자들이 이 로고스 작용에다 성령으로 대체하면 그것이 성경적인 안목인줄 알았던 겁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피를 우리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가해자-피해자 구조 안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마음을 낮추어도 여전히 죄인입니다. 복받을 자격없습니다. 마땅히 무시당해야 합니다. 복받을 수단으로 무시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성이라는 말은 우리가 나름대로 기대하고 있는 완성을 항상 공격하는 그런 완성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완성은 신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면 완성에 가깝다고 여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은 나를 신처럼 대우해 주는 그런 것을 완성이라고 본단 말이지요. 그러나 성령께서 하시는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길 준비가 되어 있느냐? 그리스도를 섬김 마음이 있는 사람만 천국에 가야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저 멀리 있고 내가 나에게 가장 가까이 있어요. 그래서 성령님은 이것을 그냥 두지 않지요. 왜냐하면 이런 인간을 천국에 보내면 천국이 예수님의 나라가 아니고 인간들의 나라가 된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무슨 조치가 있어야지요.

성령이 그 조치를 완전하게 해 내십니다. 하자 없이, 실수 없이 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접목된 영이기 때문에 “네가 갖고 있는 포부와 기대를 완성적인 차원에서 내가 잘라 줄게.” 이런 작업을 성령께서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어거스틴의 조명론과 반대되는 사도바울이 말하는 성령님의 적용입니다.

성령님의 적용이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찾아보고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입니다. “우리가 이 보베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우리를 보고 질그릇이라고 해요. 지금은 성신시대가 아닙니다. 기드온은 성신 받아도 다시 집안에 문제가 있었어요. 성신 시대는 찾아 왔다가 떠나고 맙니다. 성신은 왔다가 머무는 것이 아니고 떠나가 버려요. 다 이용했다고. 그러나 성령 시대는 우리 자리를 예수님 자리로 바꿨기 때문에 떠날 이유가 없어요.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우리가 혼란스럽습니다. ‘능력이 크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 제가 언젠가 설교한 적이 있어요.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사람들이 예수님 눈을 가리고 뺨을 때립니다. 그래놓고 “우리 중에 누가 당신을 때렸는지 알면 메시아로 믿어줄게” 라고 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신은 초월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초월(내 능력은 이것까지인데, 메시아는 이것 이상의 능력을 펼칠 수 있다고 여기는)에 가담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들 게임에 말려드는 것이기에.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예상 못한 능력으로 기존의 능력을 날카롭게 담아버리면 이쪽 능력에서 저쪽 능력으로(우리 행함으로) 건너올 수 없도록 차단시키는 식으로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계신데 베드로가 가다보니까 분명히 땅에서 출발한 발걸음이 뭔가 이상해요. 가다보니까 물위를 걷고 있는 거예요. “내가 미쳤지!” 하는 순간 물에 빠졌어요. 베드로로 하여금 초능력은 내가 기대한 것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출발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염두에 둔 하나님이란 개념 자체를 완전히 박살내는 식으로 초능력이 오는 겁니다.

베드로가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거물을 던졌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어요. 어떤 분은 말하기를 베드로가 멍청하게 배 왼쪽에만 계속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못 잡았다고 해요. 베드로가 명색의 어부인데 배 왼쪽에만 거물을 던졌을 리가 없지요. 앞뒤 좌우 다 거물을 던졌어요. 그래도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못 잡도록 했으니까 못 잡았지요.

그런데 주님이 찾아오셔서 “배 오른편에 거물을 던지라.”고 하시니까 엄청난 고기가 잡혔습니다. 예상 밖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놀랍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눅5:8).” 이 말을 한 것이 기적입니다. 왜냐? 어느 누구도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주님, 저에게 저주를 퍼부어도 합당합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내가 구원받고 천국 가고자 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고, 나에게 원초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 드러나니까 차마 그런 말을 못합니다. “내가 모든 겸손을 다 보일 테니까 저를 천국에만 넣어 주세요.”라는 것이 우리가 기껏 생각하는 우리가 소지한 종교적인 능력입니다.

주님은 그 능력을 쳐버립니다. “네가 원해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게 찾아옴으로 갈 수 있는 나라다.” 그 나라가 천국이란 말이지요. 그래서 그 나라에 간 사람은 면류관도 주께 반납하고 우리는 죄인의 괴수 신분으로 천국 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무시를 당하세요. 어떤 무시를 당해도 상관없을 만큼 우리는 넉넉한 주님의 사랑(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정도로 잘 생겼으면 남들이 무시(무슨 소리를)해도 괜찮아요.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단절을 주어서 우리가 기대하는 천국은 마귀가 시나리오를 짜서 영화로 만든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

문학 이론에 보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모든 문학에서 제일 많은 공동 요소를 뽑아봤어요.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문학이라도 동일한 흐름으로 전개시키는 틀을 밝혀냈어요. 네러티브(narrative) 이론인데, 이것이 뭔가 하면 처음에 영웅이 등장하고 그 영웅이 고난 받고 결국은 역경을 이기고 자기가 기대했던 그 이상의 성과를 얻는 것. 이것이 모든 인간들이 고대하고 기다리고 듣고 싶어하는 드라마이고 영화입니다.

‘마법의 성’이죠. 산 넘고 물 건너 마법의 성에 찾아가서 공주를 탈출시킴으로 자기의 존재가치를 높일 때 그 속에서 인간은 대리만족을 느끼면서 카타르시스를 얻으면서 예술과 문학에 흠뻑 젖게 되지요. 모든 인간이 이런 마음을 갖고 있어요. 이것을 익히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원하고 기대했던 메시아와 전혀 다른, 사람에게 희망과 낭만을 제공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주는 것과는 정반대의 메시아를 하나님이 보냈습니다. 그것도 성령에 의해서.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꼼짝 마라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다루는 것은 십자가 지고 부활하셔서 주의 자리에 앉아 있을 때고, 십자가 지시기 전에는 성령이 시키는 대로 해야 돼요. 질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못해요. 성령이 임해야 됩니다. 오병이어를 행하는 것도 성령이 임해야 돼요. 십자가 죽는 것도 성령의 힘에 의해서 죽게 되어있고 살아나는 것도 자기 힘으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성령께서 마련한 것이 뭐냐? 준비된 말씀에 입각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경로였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그분의 삶을 우리에게 적용시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로 태어났기 때문에 영웅이 되고 싶습니다. 그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을 충분히 노출시키면서 그것을 꺾어버립니다.

우리가 기대한 것은 꺾어버리고 전혀 기대하지 않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케 하고 체험케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러했고 12제자가 다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상상한 것인데, 만약 예수님이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인물이 좋고 자라서 키가 180Cm에 배에는 초콜렛 복근이 있고 머리가 좋아서 카이스트 졸업했고 삼성그룹에 취직해서 부자로 살다가 죽을 때도 평안하게 죽었다면, 우리에게 찾아온 성령도 우리를 천재되게 하시고, 키다리 되게 하시고, 대기업의 주인이 되게 하시는 그런 식으로 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인(성령)을 잘못 만났습니다. 이 땅에 머리 둘 곳도 없고, 사람들에게 미움 받고, 겨우 12명밖에 안 되는 제자들마저 다 떠나가고, 죽임 당하기 전에 옷 벗기고 뺨 맞고 창에 찔려 피 흘려 십자가에서 죽었어요. 로마 군병들은 승리했다고 기뻐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단절된 상태에서 아무도 손댈 수 없는 다른 영역에서 부활의 능력으로 등장할 때, 그 형상을 우리에게 입혀 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준비된 구원의 축복입니다.

흙에서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가느라 고생했는데 이제는 예수로 인하여 하늘의 형상을 입었으니 더 이상 걱정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길에 동참한 것으로, 그것이 기적과 기적의 연속인 것을 알아가면서, 이 과정에서 주님의 십자가 피가 얼마나 대단한 용서인지를 알아가면서 타락의 모습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남이 나를 무시하기 전에 내가 나를 무시하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라는 것이 사도바울의 복음입니다.

악이 있는 곳에서 구원은 항상 새롭게 개시된다는 사실, 악에서 벗어나면 구원도 없다는 사실, 가장 악에 가까울 때 가장 구원에 가깝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복음입니다. 이런 복음에 사람들이 찾아오겠습니까? 안 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2,000년 역사가 사람들의 영웅이 되려는 마음과 가짜 복음이 결탁해서 교회가 지금까지 온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이 바빠 예수님 가신 길을 생각 못했습니다. 성경의 예수님은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성령에 의해서 주님의 일생이 우리 속에 주인공으로 자리 잡으셔서 매사가 내 뜻대로 되지 않게 해주시고, 그것 자체가 기적인 것을 저희들이 느끼기 원합니다. 무시당하지 않으려는 삶을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그런 삶을 포기하고, 무시당해도 되는, 성령 안에서 사랑의 이름으로 저희와 항상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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