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이데올로기

예수 믿고프면 예수 믿고, 부처 믿고프면 부처 믿고

몸은 이데올로기로 가득차다.
만졌다 하면 마이다스의 손처럼 저주 덩어리로 변한다.
황금 덩어리로 변신케 될줄 알았는데
썩음이 왕노릇하는 죽음으로 변해 버린다.

이게 진짜 실상이다. 손만 대면 다 죽음으로 변한다.

그래서 이 몸이 수상하다.

이 몸을 막 수셔보고 수셔보면
연가시와 같은 것들이
우글 우글 거리면서
막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인간의 몸을 숙주로 삼아 기생하는 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아파트 핸드폰 방언터트리기 좋은믿음 착한인간되기 사도바울처럼되기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수 없을까
베드로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살수 없을까 세뇌 시키는 가스펠 이데올로기

차라리 구원받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처럼
구원받은 강도처럼 그렇게 살수 없을까? 라는 노래는 왜 만들어지지 않을까?

이 모든 것이 만났다 하면 접속이 되었다 하면 모조리 이데올로기라는 허구를 만들어내는
숙주가 된 몸의 특징이다.

누가 조정하고 있을까?
그 조정 당하는 것을 또 누가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일까?

시아버지 유다는 약속의 가문을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항상 이데올로기를 삼은데에서
이 이데올로기를 뚫는 방법은
이데올로기가 형성된 그 시점에서 그 이데올로기가 가장 싫어하는 몸이 있다.

캬 이게 답이다. 싫어하는 몸이다.
싫어버린바 된 몸.

어른이라는 몸이 싫어하는 몸은 연약하기 짝이 없고 어리석은 몸인 어린아이다.
그래서 애들은 가라 라고 쫏아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쫏겨나야할 판국에 놓인 어린아이를 가장 중앙으로 데리고 와서는

단절을 외친다.

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이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간다.

이 어린아이로 인해 불가능성이 외쳐진다.

도리어 이데올로기가 먹혀들지 않는 영역이 생겨버린 것이다.
단절과 차단이 생겨버린다.
그렇다면 이것 또한 이데올로기인가?

그 흔해 빠진 어린아이로 인해 차단을 외쳐 버렸는데
아무리 차단을 외쳐도 흔하다.

그런데 도저히 도저히 어린아이와 같이 될 수가 없다.
이 불가능성을 어떻게 이룰까?

한 아이가 외친다.

예수 믿고싶으면 예수 믿고, 부처 믿고싶으면 부처 믿고 ...

어른들은 예수든 부처든 종교든 뭐든지
신학으로 포장하든 교리로 포장하든

이 몸뚱아리는 오로지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데 미쳐 있다. 우상이다.
인간 몸이 우상이니 나올 것은 우상 밖에 없고
자나깨나 우상만 조각하는데 그 허깨비를 조작하고 그 허깨비에 손을 비비며
지성이면 감천이다고 자기자신에게 마져도 최면을 건다.

늘 이런 식이다. 심지어 아이에게도 자신들의 탐욕을 심어서 못다 이룬 꿈을
아이에게 심어서 아이를 숙주로 삼아 그 뇌를 잠식해 기생충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른이 아이를 숙주로 삼아 기생하는 괴물이였던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몸은 이데올로기에 잠식 당한채
또 다시 이데올로기를 매일 매일 같이 조작해 내고 있다. 우상을 부지런히 세운다.

다행스럽게 이 이데올로기가 가장 싫어하는 몸이 졸지에 있다는 것
시아버지 유다는 며느리 다말이 그렇게도 밉다.
이데올로기를 세울려고 할 때 마다. 눈에 가시다.

솔로몬 이후의 이스라엘의 왕들이 그러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여? 또 너냐?

참선지자들은 그야말로 눈에 가시다.

이 몸이 있기에 힌트 삼게 된다.

며느리 다말은 그야말로 시아버지 유다가 형성한 믿음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바알세불 걸린 악마다. 불법자다.

그 불법에 대한 형벌을 시행하는 제일 하이라이트 절정이
믿는자들이 보는 앞에서 이 악마를 화형시키는 마녀사냥으로 악의 근원을 뿌리 뽑는
이벤트 곧 제사를 지키는 것이다.

어 그런데 도리어 말려들었다.

이스라엘 왕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다시는 이 성전 이 율법 이 이스라엘을 가로막는 방해꾼 노릇을 아예 못하도록
공개처형 하나님이 퍼붓는 가장 저주 중의 저주를 공개이벤트로써 행사를 펼친다.

본보기로 삼아서 이 이데올로기의 견제함을 과시하기 위함이다.
인간의 제사인 가인의 제사는 이런 과시 용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죽음은 처참하기 짝이 없다. 갈기 갈기 찢어버린다.

다시는 이데올로기의 눈밖에 나지 않도록 충성을 강요케 만드는 가장 멋진 행사이기 때문이다. 자동적으로 충성할 수밖에 없다.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이 자동적으로 되는 몸으로 변해버린다.

예수님도 이런 노선으로 오신다.

갈기 갈기 찢겨죽임을 당하는
싫어버린바 되도록 하는 공개처형 하늘의 하나님이 퍼붓는 저주

정 예수 믿고프면
인간 세계에
인간 교회에
이렇게 싫어버린바 됨을 당해 공개처형이 되는 것 마저도 각오하라 라는 이 이데올로기 형성에 아무도 믿음이 불가능케 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를 형성한다.

그 어떤 반항의 몸이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몸을 그때 그때 구상해 낸다.

이 판대기에서 예수님은 불법자로써 그 구멍을 뚫어버렸다.
죽음으로써 뜷는다.

도리어 그 허상인 이데올로기의 숙주가 된 자들은
자신을 찌른 자들을 도리어 건져내신다.
그 숙주들의 몸에 기생한 이데올로기를 다 제거하신다.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고전 1:17, 개역)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가장 심각한 아주 중증의 숙주인 바울의 몸에 기생한 이데올로기를 제거하신후
이 바울을 도구로 삼으셨다.

이 일급 살인자도 구원받는데 너희 숙주일까 보냐?

이 일급 배신자 베드로도 용서받는데 너희 숙주일까 보냐?

오히려 이데올로기에 가장 충성이였던 자들의 성령으로 인한 고백을 통해
이 이데올로기들의 내막을 하나 하나 숨겨진 껍질을 벗겨 알려주신다.

그리고 이 몸들은 가짜이다고 숙주일 뿐이다고

암을 이기지는 못한다.
생로병사를 보니 암을 이기지는 못하지만 퍼지지 않게 하는 방법이 있단다.
암을 굻기는 것이다.
암이 퍼지지 않도록 최소한의 양식만으로 암을 굶겨 죽이는 방법이다.
암은 이 몸 뚱아리를 숙주로 삼아 영양분을 보충한다. 즉 확장이다.

그 확장을 끊는 방법은 그 전이를 끊는 방법은
군수물자를 차단하는 것이다.

아무리 나폴레옹 군대가 그 용맹함이 어느 군대 보다도 몇천배 뛰어난다해도
군수로를 차단해 버리면
총과 칼이 필요 없이
자멸시킬수 있다.

인간이라는 숙주들이 세뇌 당해 이데올로기를 확장 시킬 때 마다
이 이데올로기를 차단하는 방법은

바로 군수로 차단이다.

돌을 변케해서 떡덩이가 되게 하라
거룩한 성전 가장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라 그 기적으로 사랑받는 자 복받는자 임을 확인케 해 줘라
온 천하 만국을 주겠다. 권력도 있고 힘도 있고 백성들도 있다. 나에게 절하라 다 주겠다.

예수님은 아주 간단하게 대답하신다. 단절이다.
말라꼬 뭣땀시?

군수로 차단이다.

(마 4: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4:7,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마 4:10, 개역)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래도 차단 저래도 차단 오로지 차단 뿐이다.
말라꼬 떡주노 도리어 적극적인 굻어 죽어라 이다.
말라꼬 뛰어내리는 놈 두 손으로 받쳐주냐이다. 사랑받는지 못받는지 시험하냐? 에라이 뛰어서 디지든 말든 귀찮다 라고 하신다. 이 얼마나 미쁘신 답변인가? 미쁘심과 시험의 대조이다.
말라꼬 온 천하를 소유할려고 하는가? 경배받을게 없다. 도리어 다만 그만 경배하고 섬기면 된다.

이 얼마나 어린아이와 같은 답변인가?

어린아이에게
돌을 떡덩이 되게 하라
뛰어내려라
온 천하를 줄게 라는 말에

어린아이의 답변은 딱 하나다.

예수 믿고 싶으면 예수 믿고
부처 믿고 싶으면 부처 믿어라

모든 인간에게 먹혀들던 이데올로기가

이 어린양 되신 예수님에게는 먹혀 들지 않는다.

도리어 이 어린양으로부터 그 허구를 들통 당해야 할 판국이다.

이 몸에 기생한 이데올로기
이 이데올로기로부터 조정당하는 이 가짜 몸의 내막을 말이다.
어린양이라는 진짜 몸이 십자가로 수셔대는 것이 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 십자가에 달린 몸이 진짜 참된 몸으로써
딴 몸을 들이대면서

이 가짜의 숙주 몸으로써 하나 하나 내막을 펼치신다.

(갈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매일 매일 가짜임을 들키는 재미로 남은 인생을 살 뿐이다.
들키는 재미가 솔솔한 감사한 딴 몸이 있기에.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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