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와 연가시
(반드시 갈라야 한다. 반드시 쪼개야 한다. 날카롭기 짝이 없는 그 어떤것도 못 짜를것이 없는 뿔로써)
연가시 라는 영화를 봤다. 초반에는 거의 이기적 유전자 도킨스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인간신체강탈이라는 인간 몸을 건드리게 되니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다 드러난다.
이런 연가시와 같은 불뱀 또는 최종적인 십자가
즉 십자가의 영(성령)이 아니면
우리는 원래 저주 받아 죽어 마땅한 몸인줄 모르게 된다.
마침 아침에 어머니랑 이런 대화를 했다.
구원받은 강도는 강도로 태어났어야만 했다.
청년회때 강도는 강도로 태어났어야만 했다는 것을 진희 학생이 묻자
그렇다 라고 했을 때 얼마나 그 표정이 당황하고 놀라워 했는지?
그런 강도의 최후의 순간의 그 저주의 자리에 그 죽음의 자리에
예수님이 올지 누가 알았겠는가?
여호와의 팔이 나타날줄 누가 알았겠는가?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수제자 베드로의 절대로 가시면 안된다는 그 정의롭고 의로운 소리를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뿌리치시고서는 그 강도 옆에 오신 것이다.
죽으러 오셨다.
사람의 일은 이데올로기이다. 허구이며 그 허구에 충실하다. 아니 저 진심어린 진정성의 말이 허구라고?
그렇다. 허구다. 자신에게 충실한 것이다. 성령이 아니면 자신에게 충실했다는 것을 모른다.
하나님의 일은 어린아이만이 알아먹을 수 있다.
옳소이다.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겐 나타내심이 감사하나이다.
(눅 10:17, 개역)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0:1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눅 10:1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눅 10:20, 개역)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눅 10:21, 개역)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눅 10:22,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마 11:20-30)
예수님은 바쁘시다. 죽으시면서 까지 강도를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구하실려고 돌파하신다.
베드로의 이데올로기도 돌파하고 뚫어버린다. 돌진이다. 죽음도 뜷어버린다.
그런데 다른 강도는 이 둘의 대화를 듣고 헛소리한다고 기가막혀 한다.
아니 죽는 순간에
둘이 같이 죽어가면서 무슨 낙원이 어쩐니
기억해 달라는 놈이나 오늘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소리다. 다 헛소리요 미친소리이다.
(눅 23:39, 개역)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눅 23:40, 개역)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눅 23:41, 개역)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눅 23:42, 개역)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눅 23:4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44, 개역)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눅 23:45, 개역)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결국 끝까지 죽어가면서까지 자신은 강도 아닌데 왜 날죽이냐 라는 강도는 강도 맞고
이런 강도의 비천한 죽음에 까지 뛰어드시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그 주님을 비로소 만나야만 했었던 강도는 강도가 아니라 성도였다.
(또 이렇게 말하니? 강도 조차 이데올로기화 하는 놈이 반드시 생기기 마련이다. 하긴야 십자가를 이데올로기로 만드는 놈들을 우리가 한 두번 본게 아니다. 나는 십자가에 미쳤다. 십자가만 사랑한다 라고 하는 자들 말이다. 알고보니 돈에 미쳤는데? 그것을 숨기고자 상대적인 표현이였던 것이다.)
가장 그늘지고 더럽고 어두운 저주의 습지 구석 구석 까지 찾아가서 두 갈래로 나뉘신다.
이것이 거룩이다. 차이내신다. 이것이 사랑의 진수이다.
(모든 곳이 주의 목전이다. 신체 구석 내장 구석 구석 조차도 주의 눈 앞이다. (시 51:4, 개역)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실로암 소경은 소경으로 태어났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일 때문이다. 그런데 소경 아니다고 우긴 자신 만만한 자들은 비로소 소경임이 드러난다. 죄를 연구하고 다루고 죄를 안 지을수 있다고 장담한 것이다. 누구의 죄이니까? 자기 죄 입니까? 부모 죄입니까? 거룩이라는 차별성을 자신들은 근육운동과 개방성으로써 유지할수 있다고 본 것이다. 죄를 멀리하면 과연 거룩한자일까? 정작 예수님은 거룩한자에게 뛰어들지 않고 베드로를 사탄아 라고 뿌리치시면서까지 마땅히 죽어야할 강도의 옆으로 달려 달음박질 하셔서 반드시 급박하게 맹렬하게 죽으셔야 하시는 이유는 뭘까? 죄를 너무 너무 얍잡아 본 것이다. 예수님만 심각하다. 죄도 거룩도 이데올로기화 된 인간 세상에 구멍을 뻥뻥뻥 뚫고자 주님은 바쁘시다. 지금도 그 맹렬함은 여전하시다.)
이것을 싫어하는 자들이 기독교라는 종교이다.
소위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이데올로기를 형성하였기 때문에
기독교라는 종교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강도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간다.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
아이가 장래희망이 대통령이다 라는 소리에 아빠는 너무 너무 기뻐서
그래 그럼 아빠에게 뭐 시켜줄거냐 라고 물었을 때
한 자리 해 먹을려는 어른에게
아이는 자리 개념이 없다. 그래서 음 ~~~~~ 음 ~~~~
아빠는 재촉한다. 아니 아니 뭐 시켜줄건데? 너가 대통령인데 뭐든지 할수 있잖아.
아이가 한참을 고민하더니 탕수육을 시켜주겠단다. 자기가 제일 맛있어 하는 것이며
시켜먹는 메뉴 중에서 한참을 고르다가 내린 결정이다.
아이는 이데올로기를 형성할 재주가 없다.
(한국은 외국인이 보기에 희한한 나라 이란다.
아파트가 이데올로기가 되고
심지어 스마트 폰도 이데올로기가 되고,
종교는 더 심하다. 복받았다 하면 이데올로기가 된다.
신앙심은 물론
한때 방언이 이데올로기가 되어 그 허구에 말려든자가 한둘이가 아니다.
뭐 좀 특이하다 싶으면 뭐든지 이데올로기가 되는 나라이다 라고
심지어 외국에서 좌파 정신으로 만들 물건일지라도 한국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 좌파 물건도, 집시정신의 물건도, 졸지에 이데올로기가 되는 참 희한한 나라이다 라고
그 정도로 허구와 허상을 보기에 좋은 나라이다.
종교나 특히 기독교 그것도 정통 그것도 소수개혁정통들 성화론자들
하여튼 자기자신들을 차별화 시킬려고 유난히도 열심히 깨끗한 정신으로 실천할려는 자일수록
이런 이데올로기는 심하다. 한번 연가시에 감염 되어봐야 정신을 차린다.
회개란 자신이 연가시에 감염이 되어 도저히 가망 없군요 라고 자신의 육체가 찢겨져야함이 마땅함을 아는 자 이지, 아브람처럼 믿음의 조상 됨이라는 약속을 자신이 지킬려고 하는자가 아니다. 도리어 이삭 때문에 갈기 갈기 찢겨져야 한다. 이삭에 접붙임 당해야 한다. 이삭이 얼마나 고마운가 그동안 쌓아올린 약속지켰다고 라고 내세울 것들이 한 순간에 다 추풍낙엽처럼 날려버리니까 말이다. 그런 허구는 이 약속이 죽어야하는 그 죽음 앞에서는 그 심판 앞에서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허상임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저주 만이 실상이다. 유일한 사랑이요 실상 곧 믿음이다.)
이런 이야기를 강도 이야기와 더불어서 어머니랑 아침에 나누었는데
강이아빠를 만나 이 이야기를 했다.
아 그리고서는 우연적으로 연가시를 무심결에 골라 보게 되었는데
이 영화내용의 전개가 이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하는 가는 잘 보여주고 있다.
다 보고 나서 강이아빠에게 우리가 나눈 대화가 다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강도가 왜 제일 수지 맞은 자인지? 로또 대박난 자 인지
강이아빠의 표정을 보니 얼마나 기뻐하면서 그 강도를 부러워하길래 나도 덩달아 기뻐했다.
불가능하기에 믿음이 외부에서 개입한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뚫는 방법은 간단하다.
구원의 뿔만이 뚫는다.
내 숙제 아니다. 예수님 숙제다.
강도 되기 어린아이 되기
즉 탕자 되기이다. (불법자)
상대적으로 이데올로기에 말려든자는
이데올로기를 지킬려고 안달이 난 자가 바로 맏아들이다.
불법자가 안될려고, 막살지 않을려고, 탕자가 안될려고, 단절되지 않고 개방될려고, 모든 근육에 모든 것을 올인 한 자이다.
나는 저 탕자와 다른 자입니다 라는 것을 고수하다가 지옥간다.
이 이데올로기하는 환상에 허상에
말씀 잘 지키기 라는 허구에 빠져서
한 발짝도 벗어날수가 없게 된다.
예수님의 막살기만이 (막죽으심,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랑의 일을 생각한다) 이데올로기 라는 우상을 볼수 있는 주님께서 건져주시는 십자가의 저주로 뚫은 허구이다. 비로소 실상이 드러난다.
곧 육과 정을 십자가에 못 박는 성령의 일하심이다.
(갈 5:22, 개역)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개역)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5:25, 개역)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 5:26, 개역)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인간 자체가 허구다.
인간이 믿는 하나님도 허구 곧 이데올로기다.
예수님만이 실상이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알길이 없다.
실상만이 저 이데올로기를 뚫는 숙제를 펼치신다.
이 실상의 활동만이 하나님의 일이다. 그 외에 십자가 외에 다른 모든 일은 사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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뚫어 !!! 막힌 길을 뚫어라 !!! 권력의지, 힘에 의지,
뚫어 !!! 막힌 담을 헐어라 !!! Under Press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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