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과 배제로 시작되는 이름 : 다윗의 자손과 요한
(눅 1:26, 개역)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눅 1:27, 개역)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눅 1:28, 개역)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눅 1:29, 개역)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눅 1:30, 개역)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눅 1:31, 개역)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눅 1:32, 개역)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눅 1:33, 개역)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눅 1:34, 개역)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눅 1:35, 개역)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눅 1:36, 개역)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눅 1:37, 개역)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눅 1:38, 개역)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눅 1:39, 개역)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눅 1:40, 개역)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눅 1:41, 개역)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눅 1:42, 개역)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눅 1:43, 개역)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눅 1:44, 개역)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눅 1:45, 개역)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눅 1:46, 개역)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눅 1:47, 개역)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눅 1:48, 개역)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눅 1:49, 개역)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눅 1:50, 개역)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눅 1:51, 개역)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눅 1:52, 개역)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눅 1:53, 개역)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눅 1:54, 개역)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궁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눅 1:55, 개역)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눅 1:56, 개역)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 1:57, 개역)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눅 1:58, 개역)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저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눅 1:59, 개역)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눅 1:60, 개역) 『그 모친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눅 1:61, 개역) 『저희가 가로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눅 1:62, 개역) 『그 부친께 형용하여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으니』
(눅 1:63, 개역) 『저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 쓰매 다 기이히 여기더라』
(눅 1:64, 개역)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눅 1:65, 개역)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
(눅 1:66, 개역)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심이러라』
(눅 1:67, 개역)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눅 1:68, 개역)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눅 1:69, 개역)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눅 1:70, 개역)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눅 1:71, 개역)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눅 1:72, 개역)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눅 1:73, 개역)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눅 1:74, 개역)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눅 1:75, 개역)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눅 1:76, 개역)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눅 1:77, 개역)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눅 1:78, 개역)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눅 1:79, 개역)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눅 1:80, 개역)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보면은 육의 단절로 시작됩니다.
즉 영으로만 모든 활동을 구현합니다. 육은 일부러 배제된 상태를 부각 시킵니다.
실체를 말하기 위해서는 항상 그림자 곧 허상을 동원시키듯이 말입니다. 그 허상을 배경으로 깔고서 실체를 증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실체는 늘 비밀 곧 은폐 숨어있는 함축적인 성향을 띱니다.
지나개나 다 알고있다면 비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동시적으로 밖으로 표출될 때 은혜로 곧 공짜로 알게 되는데
그때 실컷 노력으로 공부한 자는 갑자기 화를 버럭내는 성향을 띄게 되는 겁니다.
어차피 다 알게 되는 것을 괜히 공부하게 되니까 자기의 노력이 빛을 발하지 못하고
도리어 완악케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육은 항상 영과 맛물리면서
영이 스스로의 영광을 발현하는데 있어서 쓸모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쓸모없는 것이 없도록 작용케 되는 겁니다. 배제의 원리로써 말입니다.
결국 처음부터 누락되어야 했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사용되는 소모품이 된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결국 모든 것은 주의 십자가의 사랑을 밝히는데 작용되는
그 사랑의 과잉을 돋보이도록 작용하는 겁니다.
사단도 그렇게 이용될 뿐이고
악의 권세도
정치권력도 모조리 함부로 흐트러짐이 없이 다 쓸모있게 작용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그래서 유대를 통치하는 헤롯과 엘리사벳(사가랴)를 대립시키는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엘리사벳과 사가랴의 의인됨의 의미로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의는 오히려 헤롯이라는 왕이 졸지에 영들이 붙여주는 붙임에 의해서 대립상태가 되고
그들 세력은 오늘 엘리사벳과 사가랴의 자녀 세례요한으로 인해 그 절정의 대립상황을 보여주는 겁니다.
마치 출애굽기의 모세와 애굽나라 바로왕의 대립같지 않나요?
한 쪽은 일방적으로 긍휼을 덧입었습니다. 즉 무조건 편애로써 아무것도 한 것이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들이고
다른 한 쪽은 그저 자기 일만 자기를 위해서 열심히 사는 일반적인 사람이요 일반적인 왕입니다. 다른 왕들과 별반 다를바 없는 자기나라의 부국을 위한 애굽왕일 뿐인데
졸지에 모세가 나타나는 바람에 완악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도 여호와의 영광을 위해서 말입니다.
(출 14:4, 개역)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출 14:17, 개역)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출 14:18, 개역) 『내가 바로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사탄의 권세를 통해서 여호와 자신을 부각시키는 영광을 드러낸다는 겁니다.
즉 사탄의 권세가 아니면 그 차이성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 차이성이 바로 사랑 곧 거룩입니다.
사랑은 사랑 스스로의 자기영광을 위해 모든 다양한 복수적인 역량들을 자유롭게 펼쳐놓고서는 그 다양한 모든 것을 잘개 잘개 쪼개어서 사랑만 남겨버리고 조각내는
사랑 자기마음대로를 펼치는 모습으로써 영광을 돌리는 겁니다.
사랑이 사랑 스스로를 높이지 다른 것은 따라갈수도 없을뿐더러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사랑 자체발광을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빼놓고서는 모두다 누락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구원되길 바란다는 자체가 십자가를 모독하는 겁니다.
십자가는 십자가 스스로를 차이내기 위해서 모든 역량들을 사용하고 이용하고 조각조각 쪼개어 부수는 겁니다.
돌아오는게 뭐 있느냐? 그렇게 하면 남는게 뭐냐 라고 물을 수 없는 것이
결국 남는 것은 십자가 뿐이다는 겁니다.
예정이란 최종적으로 남는 것으로 결정됩니다. 창세전에 예정이라는 예정론 선민론에 빠져 있는 유대인들 조차도 시간적인 앞에서 결정된바를 취사선택했지만
그것이 십자가 앞에서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최종적으로 남는 것 즉 회귀하는 것만이 최초의 예정된 겁니다.
우리는 그저 시다바리 로써 그 사이의 간격에 그 거리감에
3일의 간격처럼 광야에서 죽은자 짤린자 배제된자처럼
십자가의 모태에서 태어날 뿐입니다.
십자가가 어머니라면 그 자식은 그 열매는 십자가만 외칠 뿐입니다.
처음부터 십자가만 예정되었고 십자가만 남겨질 뿐이며 모든 것은 누락될 뿐이다고 말입니다.
(요 16:21, 개역)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요 16:19, 개역)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요 16:20, 개역)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요 16:21, 개역)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요 16:22, 개역)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6:23, 개역)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요 16:24, 개역)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과거 모세와 애굽왕 바로왕의 대립은 과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유효한 유훈정치와 같은 겁니다.
지금 한국에서도 두 죽은 사람의 과거가 아직까지 현제에도 펼쳐지는 유훈정치의 대립입니다.
한쪽은 박정희 유훈정치요 다른 한 쪽은 독재의 대항 아이콘 노무현의 유훈정치입니다.
그러니 과거가 그냥 과거로써 지나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유효와 된 채로 현재를 지배하는 셈입니다.
모세와 바로왕의 대립은 그런 두 트라우마의 대립이 아니라
한 쪽은 일방적인 이중긍정의 공격이요(하나님의 진노인 심판 곧 노아홍수공격)
다른 한 쪽은 그 긍정의 공격에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는 바벨탑의 잔상인 노아홍수 방어 시스템인 겁니다.
모세와 바로왕의 대립이 노아언약을 상기시키듯이
다윗과 이스라엘(사울왕)의 대립 또한 모세언약을 구체화 시켜줍니다.
오늘 다윗의 자손(눅 1:27)이라고 언급되는 새언약의 출발에서는
정작 다윗을 배제시키는 인물의 등장으로써
다윗의 육을 잇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정신을 잇는자의 등장으로써
다윗이 이중분절로써 쌍둥이처럼 갈려져서
한 쪽은 육을 다른 한 쪽은 영을 보여주는 대립으로써 증거 됩니다.(마태복음 족보에서 다윗을 보기좋게 빼버리고 우리야를 집어넣음으로써, 그 다윗을 배제 시키는데 동원이 되는 것이 다섯명의 여자 “~에게서”의 개입입니다.)
오늘 누가복음 본문에서의 대립이 바로 이름으로써 보여줍니다.
이름 때문에 졸지에 넣니 마니, 이름 붙이니 아니 이름 빼버리니 하는 등의 이야기가 마치 쓸모없는 듯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중요하게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이름을 집어넣는 쪽과, 그 집어넣는 쪽에 반대하여 이름을 빼고 딴 이름을 하는 쪽의 대립이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기여이 육이 개입해서 붙이는 이름 곧 육이 아무 의미없이 부르기 좋게 특히 육의 조상에 따라 붙이는 작업(자기들 따나는 심각하지만)에
기여이 단절시키고 누락시켜서 딴 이름을 차이나게 하는 그 기능들이 오늘 본문에서 눈에 확연하게 명료히 보여주시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을 언급하면서 과연 예수님은 요셉의 뒤를 잇는 요셉의 열매이냐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동정녀 인 처녀가 낳은 자식 곧 열매만이 다윗의 자손이다는 겁니다.
즉 다윗이라는 의미는 하나의 사람이라는 의미보다 동물(세번 우는 닭처럼) 또는 유물 또는 소품으로써 보게 되면
하나의 그릇으로써 약속을 담는 그릇으로 보면
다윗언약은 곧 이스라엘이 말해야할 이스라엘은 내가 아니라 이분입니다 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중 부정입니다.
이 이중부정은 내가 아니요 이분이 진짜입니다 라는
곧 이중긍정입니다.
이중부정 차제가 차이를 드러내며 곧 거룩을 드러내며
이중긍정인 차이는 곧 거룩은 이중부정을 거쳐서만이 차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배제놀이 누락시키는 해학에 이 주사위놀이에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오직 은혜인 사랑 뿐인 십자가의 용서만 그 피흘리심만 남고 배제되는 겁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은 영광스럽게 참예가 된 것입니다.
그런에 이 이스라엘정신이
다윗이라는 육체가 오해했듯이
다윗의 자손이 잘못 이해했듯이
참이스라엘 되신 유일한 이스라엘이신 예수님이
다윗을 배제시키고 누락시켜서
다시 접붙이시는 첫사랑으로써 다윗의 정신을 잇는 겁니다.
그 다윗의 정신은 육적 다윗이 오해한 그 바탕을 거쳐서 그 배경을 깔고서
다윗의 정신을 잇는 우리야의 계보로써 잇는 겁니다. 여기에 여자 다섯명이 개입이 되듯이
다윗 조차도 우리야에 접붙여서
즉 이름없는 아이의 꺽으신 뼈에 접붙여서
죽은 태를 잇게 하듯
죽은 다윗을 육적인 다윗을 죽여서
영으로써 다윗정신을 이어서
이 다윗언약을 기준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심판 속에 집어넣었다가 빼내심으로써
다윗언약을 성취하시는 새언약으로써 지금 다윗언약을 완성하시는 겁니다.
그것은 곧 다윗의 배제이자. 다윗정신인 십자가를 잇는 겁니다.
이 단절성이 이름에 표출됩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듯이 (이삭에게서 접붙여서 태어난 아브라함 / 아니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것이 이삭 아닌가요???? ㅋㅋㅋ )
다윗을 남의 아내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태어나게 하시는 그 계통으로써
솔로몬 여디디야에 접붙여서 태어난 새다윗을 기준으로 그 정신으로써
오늘 이 이름이 대립상태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름이라는 기호 곧 징후 속에 인간들의 모든 염원 즉 육의 소망이 다 담겨져 있습니다.
육적 이스라엘의 소망이 다 담겨져 있는 그 속에서
대립적으로 그것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고 배제시킴으로써
새언약의 이름으로써
이 새 이름이 있기에
옛이름 곧 육적인 이름은 사라져져도 상관없는 이름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 이름은 곧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주어진 이름입니다.
죽어도 살겠고 라는 믿음의 이름이 주어지는 겁니다.
이 이름이 아니면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곧 종말의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인지 아닌지는 죽여보면 압니다. 심판 속에 광야속에 불속에 집어넣어보면 압니다.
다 타버리고 죽어버렸지만 그 그릇에 담겨진 약속 곧 믿음이 있다면
언제든지 예수 안에서 사는 자입니다.
예수 밖에서는 살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다시 일어서지 않는다면 그 자는 처음부터 육이였고 육으로 끝나는 겁니다.
다윗이 육으로 끝나는 꼴을 예수님은 도저히 볼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꼴을 도저히 못 보신다는 것을
다윗은 이 육의 세계의 지옥됨을 거쳐서
그 지옥 속에서 자신이 무능함을 거치고(요나의 물고기 뱃속의 3일 거리감의 간격처럼)
그 십자가의 용서가 아니면 아무리 겉모양새를 완벽하게 율법으로 포장해도 소용이 없음을
거기서 한 발짝도 벗어날수가 없음을 격도록 함으로써
오로지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도록 차단시키시는 겁니다.
그 단절을 격도록 하는 겁니다.
십자가는 그 단절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게 아니라 라는 겁니다.
내가 믿은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 뿐입니다. 그것이 피 흘리심입니다.
이 피 흘리심을 막는 짖이 바로 마귀의 짓입니다.
다윗은 율법을 지켜서 그 피 흘리심만은 막고자 했습니다.
언제든지 자신이 돌이켜서 회개해서 못 지키던 율법을 지키면 되지
구지 피 흘리실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의 사랑이 구지 올 필요없이
자신이 개방적으로 또 근육을 사용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본 것입니다.
이 오해를 거치는 겁니다.
안됩니다. 자신이 지옥인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마귀인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귀요 원수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개입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십자가로 조각 조각 쪼개어짐을 당함으로써 비로소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육의 단절을 거치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의 씨앗을 단절시키는 탄생의 열매입니다.
다윗의 이름을 빼버리는 겁니다. 실패는 빼버립니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으로써 무조건 편애 받는 이름으로써 시작하는 겁니다. 복음의 시작입니다.
곧 예수입니다. 곧 다윗의 주입니다.
다윗이 다윗의 자손에게 다윗의 주라고 하는 겁니다.
이중부정에서 이중긍정이다는 겁니다. 이중부정을 거친 이중긍정인 이름입니다.
바로 이 정신 곧 배제 누락 곧 회개로 할례로 단절로써의 이름으로써 복음은 시작되는 겁니다.
(여기서 말한 이중부정이란 다윗 자신도 아니요 그런 다윗이 내세운 하나님도 아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중부정입니다. 다윗이 내세운 하나님 뒤에 다윗은 숨고자 했는데 그 하나님도 가짜요 그 가짜 뒤에 숨은 다윗도 가짜라는 허상이다는 겁니다. 허구 곧 우상입니다.
우상이든 말든 자기도 모른채 죽으면 그만이지 않느냐 하지만 정작 문제는 지옥에 들어갈 때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그 꼴을 못보시겠다는 겁니다. 주체는 다윗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자신의 사랑을 허트로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실상은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그 실상이 드러나는 겁니다.
우상을 믿든 말든 인간 끼리 관계에서는 문제꺼리가 되지 않지만 예수님의 자신의 약속에서는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반드시 지옥에서 건지시겠다는 겁니다. 지옥 가는 꼴을 못 보겠다는 겁니다. 다윗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약속이 다윗이라는 그릇에 담겨져 있기에 자신의 약속의 회수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피 흘리셨습니다.
이중긍정이란 바로 그것을 거쳐서 다윗이 아닌 예수님 이 진짜 실상이요 그 진짜 실상의 하나님인 예수님의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하나님은 결국은 다 가짜였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만이 진짜입니다. 이 하나님을 이 예수님을 믿는 길은 다윗의 방법에서는 없습니다. 다윗에게 선물로써 주어진 성령만이 옮기우시는 일을 하셨듯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성령만이 옮기우지 우리는 갇혀있을 뿐이기에 성령만을 선물로 주시는 겁니다. 곧 인간 믿음 배제요 인간 행위 단절입니다. 자기 약속만 회수하시는 겁니다. 잃어버린 자기 사랑만 다시 찾을 뿐입니다. 이름 단절처럼)
인간이 할수 있는 회개
인간이 할수 있는 믿음
인간의 할수 있는 행함 (말씀 지키기)
인간이 할수 있는 사랑을
보기 좋게 누락 시켜버려서
오로지 자기 믿음으로 자신의 믿음을 세우시는 (이중긍정) 것만이 차이나도록 거룩이 되게 하신 겁니다.
자 오늘 본문에서 영들의 활동이 이름을 배제시켜서 다른 이름을 추구합니다.
기여이 인간들이 이름을 어떻게 잇는가를 동기유발시켜놓고서는
그 이름을 보기 좋게 누락 시켜서
단절 시켜버립니다.
그러면 이름이 빈 공백이 됩니다.
이름 없는 자가 됩니다.
그 이름 없는 자라는 이름에서
숨어 있는 이름이 등장 합니다.
그 이름 앞에서 도리어 접붙임 당할 판국이지
자기 이전의 이름을 내세울 입장이 되지 못합니다.
이유는 심판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 라는 이름의 뜻이 뭔줄 아느냐 라고 어떤 목사가 저에게 한수 가르쳐 주겠다고 물어왔습니다.
제가 쌀쌀 맞게 대답했습니다. 인터넷 검색해서 나오는 뜻을 말하지 말아라 했더니
그러니 가소롭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구원자요 기름 발린 자 라는 뜻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짜라꼬? 그건 마귀도 다 아는 지식인데 우짜라꼬?
그래서 화를 내더니 그럼 너는 이 예수 라는 이름의 뜻이 뭐냐고 묻더군요.
내 이름을 삭제시키는 유일한 이름이다 라고 했습니다.
무슨 소리인줄 몰라 하길래 쫏아냈습니다.
인간의 이름을 가진 인간은 인간의 이름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삭제 누락 시킬수가 없습니다.
(마 10:28, 개역)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그러나 예수님만은 유일합니다.
생명책에서 삭제 시킬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여 주여 마귀가 예수이름을 외치니까 하늘에서 떨어집디다
마귀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기뻐하지 말고
니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라 라고 말씀한 겁니다.
(눅 10:17, 개역)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0:1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눅 10:1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눅 10:20, 개역)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눅 10:21, 개역)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눅 10:22,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또 어떤이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까
주의 이름만 주문처럼 외우면 됩니까 라는 자와
주의 이름만 부르면 구원 잘도 되겠냐 라고 나 방금 주의 이름 불렀는데 왜 구원 안되냐 라고 따지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단 한톨이라도 버릴것이 없는 다 쓸모짝이 있는 육의 소욕들 아닙니까
우리도 과거에 다 이랬습니다. 그 버릇 어딜 안 갑니다.
대신 이들이 완악함으로 우리가 감추인 버릇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런 육의 소욕을 거쳐서 성령의 소욕의 차이성을 부각 시키시는 겁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던자들이 주의 이름이 뭔지도 모른 상태에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더라 라는 이사야서 말씀입니다.
(사 65:1, 개역)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이것은 주의 이름을 불러 주면 구원이 된다는 취사선택인 제발 주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구원 시켜드릴께요 라는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행 2:21,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그 반대인 강제성입니다.
강제성 보다 더 심한 표현으로써 단절성입니다. 취사선택 없습니다. 도리어 무조건적인 심판을 때려붓겠다는 모든 시선의 빼앗김입니다. 심판과 이레 라는 글에서 말했던 심판만이 실상이고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 심판앞에서 다 타 사라져야할 허상임이 명료한 심판 앞에서 드러나는 겁니다. 그 심판성이 주의 이름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바로 이름이 딴 이름인데
이 딴 이름 때문에 그 육적인 식견에서 나오는 이름(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육의 소욕, 기대치 염원 소원 장래희망) 도리어 삭제 누락 되어야함이 마땅하고 명료한 이름이 이 이름 때문이다 라고 기준이 되는 이름이다는 겁니다. 그 이름이 바로 예수 라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 앞에서 다윗도 누락을 거쳤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예 누락 자체로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세례요한인데
요한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다시 그 이름의 취지에 맞겠끔
이스라엘이 없는데서 등장한 부재성의 원리를 담도록
물에 빠뜨리는 세례를 펼치는 겁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맞이하고자 한다면 너의 이름은 죽어라입니다.
아니 내 이름은 다른 민족의 이름과 다르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서 펼쳐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이 요한이 보기에 엉터리정신에 빠졌다는 겁니다.
진짜 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진위를 알고프냐?
그럼 물에 빠져 죽어라 라고 자꾸 물에 빠뜨립니다.
처음자리인 이스라엘 자리로써 새로 시작하시는 예수님을 보자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구지 예수님으로부터 새로 시작하는 새역사가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장치는 다 있습니다.
성전도 있지요
율법도 있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 이해 못하겠다는 겁니다.
왜 이 모든 차려진 밥상에 예수 라는 숟가락이 왜 필요하냐 라는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필요성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은 물 속에서 보자 그러면 안다는 겁니다.
죽음 속에서 보자
큰 물로기 뱃속에서 보자
지옥에서 한번 보자
왜 예수라는 분이 오시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말입니다.
다윗이 그것을 뿅가서 보게 되니까
성전도
율법도
이스라엘도
심지어 자신도 필요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니 그것을 거쳐서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것임을 비로소 보게 된 겁니다.
(롬 11:36, 개역)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심지어 그렇게 외치고 있는 세례요한 조차도 단절성에 놓여있습니다.
지도 모르면서 말하네 라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몰라도 이 그림자를 거쳐서 실상을 기다리는 입장에 놓여진 자신도 믿어야할 판국인 겁니다. 그림자 직분에 충실하면서 그 그림자를 실상으로 믿는게 아니라 그것도 죄이기에 실상을 더욱더 갈망하는 단절에 놓여진 자라는 겁니다. 그러니 빈들에서 외치는 겁니다.
자신은 아니다 내 뒤에 오실 분이다 그런데 뒤에 오실 분이 내 앞서서 계신 분이다 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다윗처럼 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보고 다윗은 주 라고 하는 원리와 같습니다. 시간이 졸지에 뒤죽박죽처럼 된 것처럼 우리의 시간관 공간관처럼 우리 몸처럼 의식하지만 시간조차도 공간 조차도 예수님을 드러내기위한 소품들로써 작용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세례요한 자신은 당연히 소품일 뿐인 그림자요 허상일 뿐이다는 겁니다.
허상이기에 예수님을 외치는 영광에 감사하다는 겁니다.
원수이기에 오른팔을 펴신 주님을 비로소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누락 되어야 하기에
배제 되어야 하기에
그것은 실상을
심판의 명료함을
그 이름을
제대로 봤다는 겁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역량을 다양하게 자유롭게 마음껏 펼치도록 해놓고서는 다시 그것을 조각 조각 다 쪼개어서 불순물을 쫙 빼버리고 사랑만 다시 회귀하도록
불쌍히 여기심의 용서만이 회귀하도록 사랑만 남기고 사랑 자신만 남기고 다 배제시켜버린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마리아는 하나의 그릇으로써 낙찰된 당첨된 겁니다.
그런데 소유물처럼 한낱 미물처럼 보이는 이 아기로 인해서 자신은 정작 이스라엘 중에서 끊쳐짐을 당하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화로다 나여 망했구나 이스라엘 중에 나는 이제 끝났구나
졸지에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이 정도로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이스라엘 사회로부터
그 조직으로부터 짤림을 당할정도로 그 정도로 던져러스한 위험한 겁니다.
국가 사회 민족 가족 교회로부터 짤려도 상관없느냐 할 정도로의 은혜입니다.
실제로 은혜는 그렇습니다.
은혜는 곧 선물은 졸지에 미움받기로 작정당함을 아주 구체화 명료화 되겠끔 가시화 됩니다.
실제상황입니다.
마리아는 시집도 가기전에
남자도 알기도 전에
졸지에 배는 불러옴으로써
자기 인생이라는 것이 한순간에 날라가 버리는 상황을 격게 되는 겁니다.
약속을 담는 그릇으로써
다윗처럼 졸지에 이스라엘로부터 짤려야 할 판국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회로부터 짤려야 할 판국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은혜요 선물이요 복되도다 라고 합니다.
누구에게만?
그야 당연히 동병상련인 자에게만입니다.
같은 처지로 당한 자만이 말입니다.
엘리사벳이 같이 당했습니다. 그 은혜를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육의 소욕을 단절된 상태인 겁니다.
소박하게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초가집을 짖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다는
남들 다 꿈꾸는 소박한 꿈을 단절된 졸지에 멘붕된 재수없는 지지리도 재수없는 삶만이 남아 있다면 얼마나 앞이 캄캄하겠습니까?
그것을 지금 젊은 마리아가 겪고 있는데 엘리사벳이 같이 겪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웃을 일인지 울 인지 모를 정도로 뱃속의 아기가 발길질을 하면서
그 은혜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길이 없다는 겁니다.
피할수 없으면 즐겨라? 즐겨라 수준이 아닙니다.
하늘 위를 날라갈 정도의 날개 달린 천사와 같은 자유자의 수준입니다.
어느 정도로 자유한가 하면 아기가 뱃속에서 발길질을 할 정도입니다.
(눅 1:41, 개역)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눅 1:42, 개역)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눅 1:43, 개역)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눅 1:44, 개역)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아이는 이 하나님의 심판에 명료하고 또렷한 심판에 춤을 춥니다.
여호와의 불 속에서 덩실 덩실 춤을 춥니다. 다니엘과 다니엘 세친구 그리고 한 사람(이레)
이삭이 제물로 바쳐져서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에 아브라함은 참예당하게 됩니다.
요한은 뱃속에서 큰 물고기 뱃속에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고 펄쩍 펄쩍 뛰어놉니다. 얼마나 기뻣으면 그 심판이. 얼마나 명료했으면 기뻐 뛰어 놀겠습니까?
왜? 다른 구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심판 속에서의 구원입니다. 죄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구원이 되지 않습니다. 죄가 없어야 구원인 겁니다.
죄가 조금이라도 한톨이라도 남겨져 있다면 구원이 아닌 셈입니다.
그 구원을 이루고자 다 태워 버리는 여호와의 불을 본 겁니다.
이 얼마나 절망 속에서의 희망입니까?
마리아가 외칩니다. 기도합니다. 자신의 아이디어 아닙니다. 성령을 입어서 부르짖습니다.
전쟁 선포입니다. 영과 육의 전쟁입니다. 마귀권세와 어린양 예수님의 싸움입니다.
이 심판성을 빨리 빨리 땅에 가시화 시켜 달라는 겁니다.
이 땅의 실체를 빨리 들추어 내어달라는 겁니다.
그리고 석달을 머물다가 갑니다.
그리고서는 요한이 태어나는데
친척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서 이름을 짖고자 합니다. 사가랴로
아마 다들 그렇게 하는 관습을 쫏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된다 라고 엘리사벳이 단절 시킵니다. 육의 관습 소욕 등등을 따라 이름 짖는데 뭘 별나게 유별스럽게 별종같이 까딸스럽게 구냐 라는 거죠
엘리사벳은 요한이라고 이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친척들이 그렇게 하라 하면 될 것인데 또 이것을 구지 아버지가 되는 사가랴의 입장을 알아보자 라고 묻습니다. 그야 당연히 부부 일심동체인데 뭘 그리 따질까요?
이것은 차이성 때문입니다.
이 별난 이름 자체가 이렇게 사람들을 움직이게끔하고 또 대립 상황으로 몰고가는 것은
자신들의 인생살이를 자신들이 움직이게 하는 원리가 아닌
모조리 다 예수님의 활동의 발판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하나 하나 허트로 쓰지 않고 꼼꼼하게 배치시키는 겁니다.
우리 각하는 얼마나 꼼꼼하신지
치밀하게 십자가라는 심판
십자가라는 저주를 배경으로 깔고자
한 사람의 이름조차 곧 운명조차도
철저하게 다루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름에 관여하고픈 자들도 그 이름 때문에 졸지에 대립되고
배치되는 양상으로써 판을 형성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비가 되는 사가랴에게 물어보자 라고 하니까
지금 벙어리가 된 입장이니 종이 곧 판대기에 이름을 쓰게 하자 하니 요한이라고 쓰는 겁니다.
사건은 여기서부터입니다. 앞의 것은 징후 전조입니다.
이 때 판에 이름을 요한이라고 적자
벙어리 된 입이 풀려서 말을 하게 되는 겁니다.
(눅 1:62, 개역) 『그 부친께 형용하여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으니』
(눅 1:63, 개역) 『저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 쓰매 다 기이히 여기더라』
(눅 1:64, 개역)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눅 1:65, 개역)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
(눅 1:66, 개역)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심이러라』
이로 인해 동네 마을은 두려움이 쫙 퍼져버렸습니다. 찬송하고 기뻐하면서 같이 동참하고자 해도 이 차별나는 은혜로 인해 두려움이 퍼지는 겁니다. 즉 평범한 아이로 해석하고자 했고 그냥 이름을 붙일려고 간섭했던 자들이 도리어 이 아이의 미래가 나에게 평안을 주는 운명인지 나에게 해를 안겨다 주는 운명인지 모르는 모호함에 빠졌기에 두려움이 오는 겁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관계 자체가 모조리 유익과 손해의 관계에 따른 겁니다. 그런데 유익도 아니요 손해도 아닌
이 땅의 원리가 아닌
하늘의 원리인
심판성을 가진 이름이요 운명이라면
유익은커녕 손해 자체를 생각지도 못하도록
급속도로 빠르고 맹렬하고 또렷한 심판 이라면
그 앞에서 나를 추슬러 챙길수 있는 입장이 못된다는 겁니다.
미쁘심과 시험의 차이가 뭐라고 했습니까?
시험은 나를 챙기고플 때 생기는 겁니다. 두렵습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미쁘심은 나를 아예 생각조차도 할수 없도록 깔끔하고 또렷하게 삭제를 제대로 시키고
제대로 단절 시키고
제대로 누락 시키는
나를 삭제시키는 것이 미쁘심입니다.
얼마나 믿음직 스럽나요?
나를 제대로 지워 버리니 말입니다.
정말 정말 나를 제대로 밟아 버려서 멘붕으로 만들어 버리고
모조리 빼앗아 버려서 지워 버리는 겁니다.
미쁘심이 아니면 그럴수가 없기에 미쁘심을 제대로 만난겁니다.
곧 믿음을 제대로 만난 겁니다. 사랑이 예 계시네
사랑을 만난 겁니다.
그 앞에서 죄책감? 내가 예수님 버렸다? 언제는 그럼 안버렸나요? 세 번 부인했다? 네 했습니다 우짤겁니까? 다시 되돌릴수 있나요? 없습니다. 시공간은 주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뻔뻔스럽게 주님이 저를 사랑하는줄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라고 뻔뻔스럽게 외치는 겁니다.
마귀가 들린 자신의 모습도 반항할수 없었고
그런 마귀의 손에서 건져내시는 주님의 사랑도 용서도 말릴수 없는 사랑이니 어쩔수 없는
반항못하는 거부할수 없는 은혜입니다.
지금 마리아만 인생 조진게 아닙니다.
요한만 인생 조진게 아닙니다.
(사실 오늘 두 사람의 기도 내용 속에 원수가 갑자기 나옵니다. 이 원수가 누구인가가 관건입니다. 숨어있는 원수는 예수님의 활동에 의해 그 정체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눈씻고 봐도 원수가 없습니다. 억지로 원수 삼으면 그 원수를 피해 멀리 멀리 떨어져 살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기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원수가 둘러 싸워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원수에 의해 갇혀진 입장이라써 이 이름의 가치를 높이고 있습니다. 왜 갇혀있고 왜 물린 입장인지? 그 배경을 깔고서 등장하는 이름이다는 겁니다. 안 물린자는 전혀 무관한 이름입니다. 출애굽의 상황처럼 말입니다.)
아니 마리아 인생
요한 인생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심판의 거룩전쟁을 펼치심 앞에서
그릇으로써 삼아주셨다는 그 자체도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내 인생 돌려도 할게 아니라
오히려 마리아처럼 전쟁을 더 붙여버립니다.
주여 이 땅을 빨리 멸하소서
주님을 모독하는
주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이 악마의 세상을 빨리 심판하소서 라고
심판을 더욱더 재촉하는 겁니다.
왜냐?
자기 인생 조졌으니까 어차피 조진 것 에라이 다 조졌뿌라가 아니라
이 심판만이 유일한 미쁘심이다는 겁니다.
다른 것은 다 거짓이요 가짜믿음이다는 겁니다.
여호와의 불이 지나간 자리를 보세요
얼마나 깔끔하게 제대로 청소를 했는지
죄가 없습니다 죄가
그 깨끗하게 청소된 방에 누워 보세요
얼마나 상큼하고 기쁘고 기분이 맑고 상쾌한지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가 넘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호와의 불이 아닌 청소를 바라거나
아니면 죄가 있는 그 방 그냥 그대로 잠자고 씻고 빨고 청소하고
백날 문질러도 죄가 가시지 않는 육체라는 방에 그냥 머물러 살려고 하는 겁니다.
가고싶은 방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 머물러 버리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딴 방이 있습니다.
깨끗하게 청소된 방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몸
예수 안입니다.
그 예수 안이라는 방은 매일 매일 불이 꺼지질 않습니다.
그러니 죄가 스며들지 않습니다. 스며들어봤자 홀라당 타 버리는 것을 매일 매일 목격합니다.
쓰잘데 없이 성전청결이라고 해서 행사 이벤트처럼 물청소를 하는 절기를 정해 놓고 하지만
그런 연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안에는 늘 생명수가 넘쳐 흘러서 매일 매일 성전청결인 겁니다. 퍼도 퍼도 줄지 않는 흘러 흘러 넘치는 생명수입니다. 피 흘리심입니다.
이 과잉을 때려붓는 것이 바로 하늘의 영광을 땅에 붓는 겁니다.
마귀가 비로소 발작을 합니다.
피로 방청소 하는 꼴을 못보는 겁니다.
구석 구석 다 청소를 하니 세균이 살 곳이 없어지는 겁니다.
이 청소에 목말라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청소해 주십시오
저 좀 삭제해 주십시오
저 좀 단절 시켜 주십시오.
앉은뱅이요 귀머거리요 문둥병자요
창녀와 세리와 강도입니다.
이들이 천국에 왜 먼저 갈까요?
(마 21:31, 개역)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나는 갇혔습니다. 나는 불뱀에게 물렸습니다.
저 좀 고쳐 주시옵소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피의 가치를 제대로 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심판을 회피하고자 하는 자는
청소한 티를 공로로 내세우지
피의 가치는 무시합니다.
죄를 싫어해야 합니다.
자신을 미워해야 합니다.
이 피의 가치에 사로잡힌 자들이
이름의 의미로써 단절시키는 이름으로써
이 이름의 의미에 사로잡히지만은
다른 사람들은 이 이름의 가치는 무시하는 자로써 동원이 되는 겁니다.
여전히 그런 이름이 필요없는 자신의 이름만으로 충분히 살다가 죽는
그 이름으로만 만족해 버리고 끝나는
딴 이름의 의미도 모른채 살다가 죽으면 끝이지 뭐 하는 자들에 의해
반드시 그들에게 비방받는 표적이 되도록 하시는 이름이 등장하는 겁니다.
모든 이름을 무릎 꿇게 하시는 이름은 이렇게 단절속에서 등장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삭제시키고 단절시키는 이름 전쟁 앞에서
빨리 빨리 예수의 이름에 자기이름이 삭제당하는 영광을 그 은혜를
그의 피흘리심을 받는 기쁨이 넘치는 미쁘심만을 십자가는 실행하십니다.
(엡 1:17,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 1:18, 개역)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엡 1:19, 개역)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20, 개역)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엡 1:21, 개역)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엡 1:22, 개역)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엡 1:23, 개역)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넝쿨랑 : 넝쿨째 굴러온 무지개 사랑 (십자가의 피) (0) | 2012.07.27 |
---|---|
연가시와 이데올로기 (2) | 2012.07.21 |
심판과 이레 (0) | 2012.07.14 |
주가 너와 함께 하심과 부끄러운 수치 (눅 1:18-37) (0) | 2012.07.14 |
믿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말씀 (눅 1:20) (0) | 2012.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