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말씀

(눅 1:20, 개역)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지난 주에 이 본문을 읽다가 이 부분이 눈에 확 띄이기 시작했습니다. 5절 6절 입니다.

(눅 1:5, 개역)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눅 1:6, 개역)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성령만이 활동하는 무대에 인간들은 그저 배치물에 무대장치 소품에 해당될 뿐입니다.
지나가는 사람 1 지나가는 사람 2 행인 상인 원 투 쓰리처럼
연극 무대의 소나무 1 가로등 1 꽃 1 등등등 연극무대에서의 장치물입니다.

그렇다면 악인도 의인도 결국 배치물입니다.
악인이라고 해서 주인공을 안돋보이게 하는게 아닙니다.
주인공만을 돋보이게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악인이 공로자냐? 그것도 아닙니다.
관심사는 악인이 공로자든 아니든 그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전지적 가카 시점인 감독의 시선에서 봐야 합니다.

의인이라고 해서 아주 잘믿는자냐? 제목 보세요? 안그렇다는 겁니다.
의인 조차도 주인공을 위한 소모품입니다. 일회용 컵입니다.
자기 역할 끝나면 그냥 버릴뿐입니다. 배역이 그런 겁니다.
섭섭해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제가 눈에 확 띈 것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구절에서
두 사람의 대립구조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아닙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하나로 묶고
유대 왕 헤롯 때 라고 해서 헤롯과 사가랴(엘리사벳)의 대립이다는 겁니다.

여기서도 직분이 또 대립성을 보입니다.

하나는 유대 왕 이요 또 하나는 제사장직분입니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의인이라고 일방적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늘 오해하는 것이 성화론자들 처럼 주장하듯,
의인이니까 또

(눅 1:6, 개역)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없이 행했다고 하니까
거짓목사들인 성화론 개혁주의 목사들이 교인들을 그렇게 사기를 치는 겁니다.
아니 사기랴뇨? 성경에 기록 되어 있는데도? 그게 사기입니까? 오히려 당신이 사기치는군요? 라고 하겠지요.

성경말씀은 믿음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행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기록되었는데
그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부정을 피로 덮는 행함입니다.
즉 이것은 피흘리신자의 피 흘림이라는 행함입니다. 곧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이 피 흘리심의 행함도 없는(곧 성결제사) 인간들이 피흘리는 척
특히 인간의 땀을 피로 사기를 치는 겁니다. 인간의 땀은 저주의 형벌입니다.
의인의 피가 아니라 도리어 죄인의 형벌이다는 겁니다.

(창 3:17, 개역)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 3:18, 개역)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 3:19, 개역)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모든 아담은 다 이 형벌의 죄 아래 놓여있습니다. 아니 그것을 의인이라고 하지 않는데
그 죄를 흘리는 것은 성화론자들은 의라고 사기를 치면서 교회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결국 교회 유지 조차도 예수님의 피 곧 의인의 피가 아니라 땀으로 유지 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러니 필경 흙으로 돌아가고 지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가 의인의 피를 가장 싫어합니다.
곧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없다면 하루도 살수 없는 악마의 세상이라는 것을 모르고
도리어 교회가 악마에게 사로 잡혀 있음을 세상보다 더 노골적으로 보여줍니다.
돈 없이는 못산다 돈도 돈도 돈 줘 돈 달라말이야 돈에 목말라 합니다.

목사들을 보면 참으로 불쌍하고 목사야 워낙 연기의 달인으로써 아무리 연기를 못해도 매일매일 하다보니 얼추 티를 내기도 하지만, 목사의 사모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자 자체가 아주 아주 현실적입니다. 여자에게는 비밀이 없습니다. 제가 버스 타다 보면 몇 집안 구석의 비밀들을 다 알게 됩니다.

실제로 그 내용을 듣고 보이스 피싱 보다 더 자세하게 사기를 친 사건도 뉴스에서 본적 있기도 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집안의 내막을 술술술 다 알게 되거든요. 누구 어떻고 저떻고 다 나옵니다.

그러니 목사 사모를 보면 세상사람들 보다 몇배나 돈에 미쳐 환장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정죄할 수 있는 입장이 못됩니다. 우리 또한 돈에 미쳐있는 것은 당연하니까요? 돈에 안 미쳤다고요?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주님이 돈 아래에 가두어 버렸기에 돈 없이는 하루도 못사는 죄 안 짖고는 못살도록 구조를 그렇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인간은 갇혀진 상태인 겁니다. 불뱀에게 안 물린자가 없다는 겁니다. 불뱀에게 안 물린 신체가 없습니다. 그 증거가 선악을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행함을 기다릴수가 없어서 우리의 선악이 미리 행하고 말아버리는 겁니다.

비록 그럴지라도 주님의 용서를 바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오히려 여자가 우리는 뱀에게 물린 몸뚱아리입니다 라고 아주 노골적으로 먼저 터트려주는 부정의 몸을 먼저 보여줍니다. 그래서 주님의 긍휼이 몇배나 여성에게 더 부어지는 겁니다. 일방적인 용서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제발 땀 흘린 것을 피 흘린 것으로 사기를 치면 안됩니다.
피는 의인의 피 이어야만 하고 의인의 피 만이 죄를 씻지
땀은 피도 아니며 타인의 죄를 깨끗게 할 수가 없습니다. 흠없는 양 보다 더 더러운 겁니다. 흠 없는 양의 피에 무시를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오히려 땀은 부정한 겁니다. 몸에서 나오는 모든 액체는 레위기에서 다 부정한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부정하기에 씻겨주는 외부의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무시했던 양의 피입니다.

그래서 성화론자들 곧 악마들이 요구하는 인간의 땀에 목말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피가 뿌려지는 것을 원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악마가 심각하다는 겁니다. 죄가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이 피를 거부하는 자들이 오늘날 기독교라는 자들입니다.

죄가 심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면죄부가 오늘날 돈으로 둔갑합니다. 돈이야 말로 현대인의 유일한 인정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형편상 안되면 땀입니다. 노동입니다. 잉여입니다.

이것을 바치라고 오늘날 삯꾼들이 난리도 아닙니다. 피를 때려죽어도 싫어합니다.
피를 들이대면 드라큐라같이 반응을 합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말입니다.

자 그래서 인간이 말하는 믿음은 예수님의 믿음과 정반대입니다.
인간의 믿음 곧 행함은 땀입니다. 부정한 겁니다.
예수님의 믿음 곧 행함은 피흘리심 곧 십자가입니다. 부정한 악마의 실체를 제대로 보여줍니다.
넌 악마라는 뱀에게 물린 육체다 라고 제대로 지적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피흘리심의 십자가를 쳐다봐야 합니다. 인자가 장대 높이 달림을 쳐다봐야 합니다.

이 쳐다봐야한다는 것을 행함이 아닌 믿음의 차원 믿음의 노선 즉 예수님의 피흘리심의 차원은 전지적 가카 시점에서 봐야 그 차이를 알수가 있습니다. 즉 절대로 동일하지 않다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행함)과 예수님의 믿음(행함)이 다르다입니다.

붐뱀에게 물렸다고 해도 전지적 가카 시점이 아닌 뱀에 물린 육체의 시선에서는 약이 필요하지 말도 안되는 장대높이 달린 구리놋뱀을 쳐다본다는 것은 도리어 죽음을 앞당기는 어리석은 짖이다 라는 계산입니다. 그 계산 맞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맨날 저보고 하는 말이 너는 그 십자가를 우상숭배 하는 자다. 구리놋뱀을 우상화해서 멸망당한 구약의 내용을 너는 무시하느냐? 왜 그런 변명과 말도 안되는 소리를 우리 예수 믿는자를 유혹하느냐? 이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달려드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즉 육체의 계산은 십자가를 쳐다본다는 것은 죽음을 도리어 앞당기는 어리석은 짖입니다. 그 계산 정말 정말 정확한 것 맞습니다. 항상 마귀는 맞는 말만 합니다. 계산기 두드리면 그 계산된 것 외에는 다른 답이 나오질 않기 때문에 그것만 외치는 겁니다. 맞잖습니까? 아니라고요?

님의 육체의 계산기를 백날 두들겨 보세요 다른 답이 나오나? 그 계산이 맞다니깐요.

문제는 다른 계산기가 있다는 겁니다. 선악이라는 육체의 계산기가 아닌
예수님이라는 십자가 계산기입니다.

십자가 계산기를 두드리니까 육체의 계산기처럼 같은 답을 냅니다. 거봐 맞네 !!!
어떤답? 죽음을 앞당기는 어리석은 짖이다는 답이 나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의 계산기는 육체의 계산기와 답이 같은 답이다 라고 제가 말합니다. 그럼 차이가 없네요 그렇죠?
그런데 뒤에 하나가 더 나옵니다. 죽음을 앞당기는 어리석은 짖이다 라고 육체의 계산기 선악의 계산기처럼 답을 같이 내지만 그 육체의 계산기를 십자가의 계산기가 못 박아 버린다는 겁니다. 여기서 감사와 기쁨이 터져나옵니다.

여기서 차이가 납니다.
자 그렇다면 육체의 계산기도 이 뒤에 하나가 더 나오는 것을 육체의 계산기가 그 연산의 값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아무리 두드려도 안 나옵니다. 성화론자 계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산한다는 것은 곧 제사 드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항상 거룩이 그 답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성화론자들 곧 거룩되기에 미쳐있는 자들은 십자가를 쳐다볼수 없는 이유가 자신이 매일 매일 성화론을 추구하든 말든 이미 뱀에게 물려버린자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뱀에게 물렸기 때문에 약이 필요해야 원인의 결과로써 약을 추구해야 하는데
어리석은 짖을 해야하는 것처럼 십자가를 쳐다봐야 하니까
만약에 거룩이 나오지 않는다면 거짓임이 들통나는 셈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인간 쪽에서 어떻게 조작하거나 바꿀수가 없다는 겁니다.
전적으로 예수님 마음대로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쪽에서 최선의 방책은 얼추 비슷한 거룩이라는 거룩은 다 끌어모아서 모양새를 갖추는 겁니다. 이게 성화론입니다. 인간들 세계에서 거룩이다 싶은 것은 자신의 신체속에 끌어 모아 장착시키는 아이템이 된 겁니다. 일종의 게임이 되고 만겁니다. 취미요 장난입니다. 정작 그들은 얼마나 진지 합니까? 아이템이 떨어지면 죽는 겁니다. 성화 덜된 자는 왕따입니다. 돈이라는 잉여물이 세상에서 그렇게 작용하던 것을 종교 속에서는 용어만 바뀌었지 하나 더 추가가 된 셈입니다.

자 이렇게 예수님의 믿음을 인간의 믿음과 대조해서 차이가 나듯이

지금 본문에서 인간 세계에 통용되는 직분인 왕이라는 직분과
주님께서 부여한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대립시킵니다.
물론 인간들이 해석하는 제사장 곧 오늘날로 치면 목사라는 직분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제사장은 피를 내는 자입니다. 제사장 본인(오늘날 목사처럼)이 거룩을 내는 자가 아니라
거룩은 이 피입니다 라고 소개하는 있으나 마나한 우리가 보기에 별가치성이 없는 직분입니다. 바로 이겁니다. 별가치성없는 무익하다라는 부재성입니다.
빈터 빈공간의 의미입니다. 없음입니다. 없음.
위에서 말한 여자들처럼 여자에게는 비밀이 없어요 비밀
그러면 스파이로 쓰면 안되는데 바로 그것이 가장 적스파이를 잡는 가장 뛰어난 스파이라는 기능이 되는 겁니다. 적의 스파이를 잡는 스파이. 마타하리처럼 말입니다. 논개처럼 말이죠. 이걸 같은 의미로 제목 삼아도 되겠네요. 스파이를 사랑한 스파이

가장 치졸한 방법이겠지요. 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스캔들이 아니면 안되니깐요. 불륜 말입니다.
그런데 적 스파이 에게는 이 스파이를 사랑한 스파이 라는 이 말도 안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짖이자 동시에 가장 뛰어난 지혜로써 모순점을 그대로 안게 되는 겁니다.

사실 이것이 일급살인자를 용서하신 행함이 있는 믿음을 제대로 설명하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원수를 사랑한 예수님(이웃)이라는 겁니다.

일급살인자 모세 타인을 살인한 놈이 구원자로 나서겠다고? 모래위에 싹 몰래 몰래 파묻어 놓은데두? 야 임마 임마 임마 그게 그렇게 될줄 누가 알았어 임마 ~~~~

일급살인자 다윗이 철저한 계산 속에서 우리야 장군을 죽여서 남의 아내를 빼앗은데두?
야 임마 임마 임마 어쩔수가 없잖아 남편이 죽었으니 거두어 주어야지 임마 임마 임마~~~~

일급배신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알면 장지지겠다고 했는데두?
야 임마 임마 임마 갑자기 사람이 당황하면 장담아닌 장담을 내뱉을수 있지 임마 임마 임마~

일급사기꾼 사도바울이 이단범인 잡겠다고 스데반집사님을 죽였는데도?
야 임마 임마 임마 자기가 이단 잡겠다고 하다가 도리어 이단될 수도 있지 뭐 임마 임마 임마

그런데도 이것이 피가 벌린 영광의 일이다고 믿음의 일이다고
참으로 뻔뻔스럽게 히브리서 11장 믿음장에 이 믿음들을 나열하고 믿음의 사람들의 이런 행위를 사기치듯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분명 두려워서 도망쳤다고 출애굽기에서는 그렇게 기록하고서는
히브리서에서는 그것이 믿음으로 두려워 하지 않았다고 카파르 덮여진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그렇게 했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 버렸으니 힐문할자 없습니다.

마치 말씀이 죄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안보이도록 죄라는 것을 분명히 출애굽기에 기록하고서는 안그랬지롱 영구없다. 죄없다 라고 덮어버리는 그 능력을 아주 당당하게 뻔뻔스럽게 기록하고 있다는 겁니다. 모순이요 앞뒤 안맞는 성경말씀 스스로의 배신이요 부조리 아닙니까?

여기에 비해 마귀는 일관적이요 사실적이며 사실 그대로만 말합니다. 전혀 모순이나 배신 부조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거짓입니다.

피란 곧 믿음이란 거짓된 원수된 인간이기 때문에 그 거짓 곧 죄를 대신 뒤짚어 쓰는 예수님의 행함에 초점을 맞춥니다. 전지적 가카 시점입니다.

그런데 거짓은 거짓되기 때문에 모순 배신 부조리를 대신 뒤짚어 씌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마일리지로 쌓아올린 성화가 그 반대로 마이너스 통장 신체포기각서 까지 가게 되면 자신은 영원한 지옥꼴이 나기 때문에 자신을 끝까지 챙기기 위해서는 모순이나 부조리 배신속에 휘말려서 안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거짓입니다. 거짓 속에 휘말려서는 안된다는 것.
여전히 거짓의 세계에 갇혀있음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가장 마귀가 제대로 심은 악마적인 신앙을 소유한 가장 걸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그것을 반대로 가장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신앙으로 자부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빛과 어두움의 대조로써 가장 어두운 곳에 들어간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것이 가장 싫어버린 일이 된 겁니다.
왜 예수라는 작자가 왜 우리 민족에게 오느냐 라는
제일 싫고 미운 짖이며 가장 거리끼는 일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자나 째나 없애고 사라지게 만들어 버리고 그의 흔적을 없애고자 하는 일에 박차를 가합니다. 가장 하나님을 잘 믿는 자들이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똑같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가 나타나면 그 짖을 우리가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화는커녕 귀신들린 자인 것이 들통나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십자가 입니까? 나를 제대로 푹 찌른 겁니다.
나를 제대로 푹 찌른 십자가의 날카로운 못이 나를 해체시킴으로써 나를 제대로 치료하는 겁니다.

그래서 쳐다보라는 겁니다. 어리석은 지혜 맞습니다 맞고요. 육체의 계산기든 십자가의 계산기든 어리석은 것 맞습니다. 죽습니다 죽어요 안죽을려고 약을 찾아야지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왜 쳐다봅니까? 그 어리석은 짖을 왜 합니까?  죽는 판국에 약은커녕 죽음을 왜 쳐다봅니까?

왜 육체의 계산기나 십자가의 계산기 둘다 죽는다 라는 답을 내었는고 하니
인간의 육체 계산기는 그거 쳐다보면 죽는다 라는 답을 내니까 약을 구합니다. 쳐다보기는커녕 그거 쳐다볼 것 같으면 그 쉬운 짖을 뭐가 어렵다고 못하겠습니까? 죽음이라는 당장 닥친 문제에서는 그것이 답이 안되기에 어리석다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 계산기는 쳐다보는 것은 어리석다 라고 답을 내지만 그 어리석음이 답입니다. 어리석음이 옳다고 답은 낸 겁니다.

같은 답인데 의미가 다릅니다. 육체(선악)계산기는 답이 어리석음(죽음)입니다. 라고 답해놓고 의미는 쳐다보지 마세요 라는 의미가 함축된 겁니다. 안낫는다는 겁니다.
십자가(은혜)계산기는 답이 어리석음 이라고 똑같이 답합니다. 그러나 내용이 이중분절 됩니다. 어리석음이 옳다 라는 겁니다. 너는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니가 뭔데 살려고 답을 찾느냐 라는 겁니다. 살고 죽고 하는 것도 주님소관인데 말입니다. 마땅히 너는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아느냐 라고 되묻는 겁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십자가를 쳐다보라는 겁니다. 결국 아 맞구나 나는 죽어도 마땅한 죽어도 싼 인간이구나 라고 쳐다보니 내가 달려 죽어야 할 그 자리에 그 빈터에 누가 대신 달려 있다는 겁니다. 어 뭐지 뭐지 뭐지 라고 전혀 다른 공포의 세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딴 몸이 공중에 높이 달려있는 그 딴 죽음의 공포의 세계에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 이 무서운 불뱀에게 물려 죽는 그 공포의 죽음세계에서 더 나은 더더욱 심각한 더 극심한 공포의 폭력의 세계에 딴 몸이 달린 이유로 모든 시선과 감각을 다 빼앗겨 버려서 그 딴 몸이 달려있는 공포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지금 내 죽음이 어떻니 저떻니 사니 죽니 하는 판국에
내 딸 내 아들 내 부모 내 아내 남편이 죽고 사는 그 심각한 판국에
전혀 딴 인물이 공중 높이 달려 죽어가는 그 시선에
땅에서 죽고 있는 내 가족 내 친지의 죽음을 다 내팽개치고
저 한 인물의 죽음에 시선을 다 빼앗긴다는 것은
내 죽음보다 더 큰 죽음이 아니면 빼앗길수가 없다는 겁니다.
결국 내가 쳐다보는게 아니라
그 강렬한 죽음이 날 안쳐다보고는 못배긴다는 겁니다.
성화론은 이것을 거부합니다. 도리어 그렇게 될까봐 겁을 먹습니다.
주님의 죽음에 시선을 빼앗겨 버리면
성화를 하지 않을까봐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운영이 개판되고 교회질서가 개판되고 신학으로 교리를 형성한 그 형식과 내용이 한순간에 블랙혹에 빨려 사라지고 누락되고 삭제되고 배제당할까봐 전전긍긍하는 겁니다.

도대체 누가 공중에 매달려 달렸길래
나의 죽음보다 더 심각한 것이 없는 판국에
나의 살고자 하는 욕망, 그래서 성화되고자 하는 욕망 보다 더 심각한 것이 없는 이 땅의 현실에

왜 이런 심각한 현실 죽음의 공포요, 살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심각한 현실에 이 땅의 현실에

우습다는 식으로 깡그리 무시하면서 저 공중에 달려 죽는 현실이 이 땅의 심각한 현실을 개차반 만들어 버리고 얼마나 심각하게 벌어지면 그 참혹하기 짝이 없는 십자가의 피 흘리심의 현실로 변개시켜 버리는 그 강렬함은 도대체 누가 달렸느냐 라는 겁니다.

상상할수 없는 현실이 더 강렬하게 내리꼿는 겁니다.

이 땅의 현실도 심각한데 저 공중에 달려 죽는 딴 몸이 격는 현실은 이루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현실을 이 땅에 쏟아 붓겠다는 겁니다.

이거 뭐 2012라는 영화에서 나오는 종말에 족히 비교도 안되는 종말을 퍼붓는 겁니다. 그 딴 몸이 격는 현실을 이 땅에 쏟아부을 때

과연 기쁨과 감사가 나오느냐 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은 기쁨과 감사가 그래서 나온다는 겁니다.
땅은 그 반대인데? 죽음이요 미움이요 이빨을 감이요 적개심이요 살인의지를 표출하는데 말이죠.

자 그래서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영만이 행동하는 곧 천사들의 활동 속에서
두 종류의 인물들이 배치를 하는데 그 직분이
하나는 왕이요 하나는 제사장입니다.
하나는 남근이요 하나는 부재성입니다.
이 대립 구조는 출애굽과 똑같습니다.

하나는 애굽의 바로 왕이요 또 다른 하나는 모세 곧 물에서 건진 죽었다가 살아난 거세된자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두 대립이 싸우고 충돌하는데 있어서 천사들이 싸움을 붙였다면
그 싸움이 공정하게 힘의 우의나 아니면 기타등등 비슷해야 합니다.
예로 싸우기 위해서 같은 레벨 같은 급 끼리 붙입니다. 그래서 무게를 조절한다고 땀을 억지라도 빼서 몸무게 조절한 뒤에 시합에 나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천사들이 붙이는 싸움은 그런게 아닙니다. 아예 불가능한 시합을 붙입니다.
지난 글에 젖먹이와 거인을 싸움붙인다고 했잖아요.
정말 되도 않는 싸움입니다.
아니 일부러 더더욱 그렇게 싸움붙입니다.
성경지식 십자가지식이 많으면 과연 이길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아예 죽으라는 소리입니다. 그냥 거인 골리앗에게 밟혀 죽으면 속시원하게 끝나는 겁니다.
아무도 비웃을 꺼리 조차도 안됩니다. 처음부터 다 예상된 게임이니까 말입니다.
그 예상을 일부러 형성한 게임이니까 말이죠.

저는 이 본문 두 구절을 보고서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의인이다 라고 한 표현에서 참으로 뭐랄까 참짖굿다? 참으로 어이가 없다 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누구누구가 의인이다 라고 성경말씀이 일방적으로 선언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의인이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성화론자들처럼 말하는
의를 많이 행하고 쌓아서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의인이라고 뒤짚어 씌워서
즉 의가 없어도 의를 행치 않아도 무관하다는 겁니다.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주님의 관심사는 저쪽 세계이다는 겁니다.
저쪽 세계를 견디지 못하도록 꼴보기 싫타 라는 겁니다.
그래서 의인을 세웠다는 겁니다.
의인이라고 졸지에 세움을 받는 겁니다.
뜻하지 않게 말이죠.

저는 이것을 군사용어로 봅니다.
주님은 자신의 거룩한 전쟁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적군이 나타나니까
그 적군을 이유없이 무조건 깨부시기 위해서
말도 안되는 전혀 군사 군인 답지도 않은
무훈련 무근육 무행함 무믿음 무의로움
한마디로 저쪽이 무장한 영웅 군인의 반대의 반대로만 추구하고자
그 차이성으로써
얼토당토 않는 골리앗에 대립되는 꼬마를 앞장세우듯이
지금 이 두 사람을 의인이라는 명분을 뒤짚어 씌워서 대립구조를 만드는데 신경쓰고있다는 겁니다.

골리앗에 대항하는 자를 이스라엘 속에서 그 얼추 비숫한 근육질 성화론 영웅자는 일찌감찌 나가 떨어지도록 남이 아닌 여호와가 조치시킨 겁니다.

일부러 약하게 약하게 남근이라는 남근은 이스라엘 속에 아예 없도록 다 짤라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곧 사울 왕을 짜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꼬마 다윗을 왜 내세우는 겁니까? 왜 창세전부터 계획된 인물이 아니고서는 안되는 방식으로써 남들 다 누락시켜버리고서는 골리앗을 쳐부수시는 것입니까?

유대 왕 헤롯과 대립되는 주님이 일방적으로 의인이라고 뒤짚어 씌운 이 의인의 초점이

(눅 1:5, 개역)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눅 1:6, 개역)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눅 1:7, 개역)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의 초점이 의를 뒤짚어 씌운 초점이

반드시 유대 왕 헤롯과 대립됨의 의로써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고 무자하고 나이가 많다는데 있다는 겁니다.

왕이란 이런 요소가 있다면 대중은 왕으로 세울수가 없습니다.
백성이 거부 합니다.

그런데 여자가 그것도 나이 많은 할머니가 이 헤롯왕에 대립되는 꼬마처럼 없음으로 부재성으로써 대립된다는 것은(사가랴는 꼽사리입니다. 마치 드보라의 치맛자락을 붙잡는 바락처럼, 물론 제가 이 글에서만 언급하고자 하는 내용으로써 말입니다.)

단순히 인간 속에서의 인간 끼리의 싸움 붙이기가 아닙니다.
하늘의 세계와 땅의 세계의 충돌을 이 두 인물의 대립에 함축시킨 겁니다.

이 싸움의 충돌에서 그 배경 그 얼굴 그 바탕 그 구조를 깔고서
그 전조 징후를 통해서 예수님의 아기로써의 등장은

인간들의 믿음과 무관하게 벌어지는 예수님의 믿음이다는 겁니다.
즉 아기 라고 하면 딱 떠오르는 것이 출애굽 사건 아닙니까?

아기는 마치 제사의 제물처럼 무능하게 바쳐진 제물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그 무능이 무능이 아니다는 겁니다.

전쟁의 촉발의 전조 징후를 몰고온 회오리 바람이다는 겁니다.
아기 모세가 물에서 건짐 받습니다.
그러나 다른 아기들은 다 죽임을 당합니다.
그 죽임을 당해야 마땅한 환경 속의 아기 임에도 불구하고 물 속에서 건짐 받습니다.

이것은 모세라는 단순한 인물이라는 인물성의 배치가 아니라
이 세상의 구조를 제대로 보여주는 의미입니다.

이 땅은 악마의 세계라는 겁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 교회에 백날 다녀본들 소용이 없을 정도로 마귀가 귀를 막은 내용입니다.

교회도 악마의 세계임을 유대 성전도 그랬듯이 여전히 마귀가 장악해서 못 듣게 한 겁니다.

아무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갇혔습니다.

거기에 무모하게 그 회칠한 견고한 무덤을 뚫는 자가 등장한 겁니다.
그게 아기입니다. 아기

[없음]입니다 [없음]

감히 [있음]에 [없음]이 도전을 한 겁니다.

남근의 세계에 부재성이 도전을 한 겁니다.
뱀의 후손의 세계에 감히 여자의 후손이 침략을 하는 겁니다.

이 대립 구조를 말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장기 알로써 배치된 자로써 모세였듯이
지금 엘리사벳이 그렇게 언급이 되는 겁니다.

사가랴는

(눅 1:12, 개역)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눅 1:13, 개역)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눅 1:14, 개역)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눅 1:15, 개역)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눅 1:16, 개역)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눅 1:17, 개역)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눅 1:18, 개역)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눅 1:19, 개역)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눅 1:20, 개역)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이 믿음이 벌리는 일에 동원되는 하나의 장기알 바둑알로써 배치될 뿐이지
사가랴의 믿음 여부를 따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리 앞당겨서 안믿는다는 것을 아예 전제로 깔아 버립니다.

자 저는 여기서 기존의 많은 교회 목사들이 사기를 치듯이 믿어야 한다는게 아니라
안믿도록 되어 있다 라는 성령의 일하심을 보자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완전반대이니까 이단이죠.
성령의 일하심은 안믿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백날해도 안됩니다. 안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염치없이 그 믿음으로 다 된 일을 그냥 그 결과물을 선물로써 넙쭉 받아먹더라 라는 겁니다.
나는 안 믿었는데 주님은 주님의 믿음대로 하신일을 다 이루셔서 그냥 값없이 주더라 라는 겁니다.
여기에 또 마귀들이 가만히 안있습니다. 값없이 먹었으니 은혜를 갚도록 해야 한다고
은혜를 갚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는 자체가 뭔가를 노리는 겁니다.
진짜 은혜를 받았다면 그 사람이 알아서 하는게 아니라. 그 은혜가 그 사람을 알아서 다루는 겁니다. 그것을 눈꼴 시러워서 못보기에 간섭하고픈 겁니다. 은혜가 그 사람을 알아서 다루는 꼴을 못 봅니다. 자기의 노예로 삼고픈데 은혜의 종이 되어버리니 자기 말을 안듣는다는 겁니다. 끝까지 선생노릇을 하고픈데 말이죠. 사람을 장악하는 즉 그 사람을 먹고픈데 더 이상 자기말이 씨알이 안 먹히는 자가 되어버리니까 뭐 할 수 없죠 조직의 쓴맛을 보여줘야겠죠.

이게 빈말이 아닙니다. 유대 왕 헤롯을 언급한다는 것은 조직의 쓴맛은 바로 졸지에 은혜를 입어 노아처럼 의인이라고 의를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뒤짚어 씌움을 받는자로 인해서 소위 조직이라는 것이 슬슬 그 정체를 드러내면서 기어나오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언제 악마가 씌여져 있는가를 보게 되는고 하니
항상 지 혼자 딸랑 나와서 덤비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자기 직분 즉 소유죠 시스템이죠 그것을 등에 업고서 덤빕니다.
곧 조직입니다. 힘입니다. 힘,
유명한 자의 말을 등에 입고 나서는 것 또한 조직입니다.
골리앗이 자신의 힘만으로써 덤비는 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는 항상 감추어진 배후의 힘이 있습니다.
예로 성화론자들이나 개혁주의자들이 항상 주장할 때 누구의 힘을 항상 언급합니다.
그 사람이 정통인 칼빈이나 루터라면 자신의 지금 주장이 힘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죽은자 말고
지금 살아 움직이는 십자가를 등에 업고 주장한다면
오늘날 교회가 비웃습니다.
십자가를 말하는 유명한 목사를 등에 업고 주장하면 힘 되지요.
그 뒤에 다 숨어버리면 변호라도 해 주겠지요.
그러나 십자가 자체는 힘이 없습니다. 그거 등에 업었다가는
싸워보기도 전에 십자가에 의해서 배신 당합니다. 짤려납니다. 죽습니다.
블레셋 군사들아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 뒤어 숨어있단다 라고 언약궤가 소리쳐서 배신 때리지요.

사가랴는 마치 아브라함이나 그의 아내 사래처럼 비웃고 키득 키득 웃는 것처럼
천사가 전하는 말을 안믿는다는 것을 아예 전제로 하고 전함으로써
오죽 안믿는다는 것을 아예 전제로 했으면 벙어리로 만들어 버리겠습니까?
이것은 배제요 누락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일이 안되는 것입니까? 인간이 안믿어주니 아이구 섭섭해라 하시나요?
아니지요 그 반대죠. 오히려 그것이 주님의 일이다는 겁니다. 제발 믿을생각하지 말라고 일부러 처음부터 배제 누락시켜버립니다. 즉 단절입니다. 성령의 일은 단절입니다.

이것 보세요 성경말씀과 성화론자들이 말하는 것과 정말 반대이지 않습니까?
성화론자들은 인간들이 믿음을 멈출까봐 걱정 합니다.
자신처럼 제발좀 움직여서 제발 믿어라 라는 겁니다.
그렇게 안쓰러워 발을 동동 구르는 자를 우리는 그 유명한 목사를 통해서 봤습니다. 박모모 목사라고 하나님의 열심의 저자죠.

그러나 성경말씀은 반대입니다.
제발 믿지 말아라 혹 믿을까봐 걱정되어서 입을 가로막아 버립니다.

오히려 얼마나 잘 믿었으면 아기 예수님이 어디서 태어나는줄까지 다 알아내고서는
모조리 다 죽여버리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은 일관성이 없고 또 일관성이 있었어도 안되며
시공간에 따라 달라지는 환경을 넘어설수가 없기에
아예 [믿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말씀] 이기에 벙어리로 만들어 버립니다.
설마 믿을까봐 처음부터 할례를 해버립니다. 머리 짤라버립니다.

여기도 또 잔머리 굴리는 놈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속성입니다.
아 그러면 안해도 되겠네 라고 안함을 행함 이라고 내세우고 있습니다.

야 너 또 말꼬리 잡아서 또 빙빙돌리네
네 맞습니다. 인간이 그 말을 듣자 마자 그 꼬투리를 잡아서 빙빙돌렸듯이
그 빙빙 돌린 것을 말씀이 지적함에도 불구하고 또 완악해 지는 겁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이니까. 주님 앞에서 아무리 우리 자신의 정당성을 추구해본들 그 자체가 죄이듯 우리의 존재성은 그 자체로써 죄일 뿐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다고 하니까
은혜를 더할려고 죄를 짖는 것은

이 말을 듣자 마자 우리 속의 죄가 반드시 빙빙 돌리는 겁니다.
그러면 말씀은 또 빙빙 돌리지 말라고 또 지적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간섭이 또 싫어지게 되는 겁니다.
이래서 우리는 죄 아래 갇혀있는 육체의 속성 곁사람의 후패함을 또 직시하게 됩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지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뒤의 것을 빠드리면 안됩니다. 벙어리가 되는 겁니다.

나 자신을 내 스스로가 누락 시킬수가 없습니다.

내가 내가보기에도 시퍼렇게 살아 움직이는 것을 내가 막지 못하는 판국에
어떻게 살아 있는 나를 내 스스로 누락 배제 부재 또는 없음으로 만들어 버리겠습니까? 자살한다고 될까요?

그래서 [믿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말씀]이 나를 벙어리로 만든다는 자체가
믿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말씀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벙어리로 만든다는 겁니다.

수태치 못한 엘리사벳
졸지에 벙어리가 된 사가랴

참 어중이 떠중이 다 모였습니다.

산자라고 우기고 싶어도 졸지에 벙어리가 되었으니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죽은자로 취급받아야만 한다는 겁니다.

할머니 엘리사벳이 졸지에 아기를 임신하게 되면
다들 부러워할까요?
이거 혼자 떠안고가야할 문제가 되었습니다.

산부인과가 있나요? 누가 과연 도와주겠습니까? 과거의 경험이라도 있었으면 대수롭게 생각하지도 않겠지만 초임입니다. 아무것도 몰라요입니다. 남편은 졸지에 벙어리 되었으니 도움줄자 과연 있을까요? 천사를 통해 낳게될 아기 세례요한이니까 안아프게 될 것이다? 그런거 없습니다. 젊은 사람도 감당 못하는 해산하는 고통은 늙은 신체라고 해서 그냥 넘어가주질 않습니다.

얼마나 인간들이 교리에 미쳐있으면, 교리를 완벽주의 결벽증처럼 만들려고
동정녀 마리아의 아기예수 탄생은 월경을 통한 것이다 아니다 라는 둥둥의 논쟁의 글을 보고
야 참 인간은 마귀 맞구나. 죄 없이 태어났으니 뭐 어쩌고 저쩌고
그거 제대로 알아 맞추면 그럼 그 내용이 복음일까요?
성경은 그런거 관심도 없는데?
그거 알면 예수 믿을까요? 아니 믿는 것은 둘째 치고
과연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결국 인간의 믿음은 복수심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게 아닙니다.
자기 믿음을 폭력화 곧 정당화 하는 겁니다.
자기 믿음을 거부하거나 인정안해주면 상대방도 예수처럼 세 번씩이나 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믿음은 베드로의 믿음을 거부하고 세 번 부인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겁니다.
오른편에 서지도 못할 것들이 감히 말이죠.
반대로 오른편에 서신 주님에 의해서 원수가 되어야지요. 그래야 그 원수를 용서하는 그 피의 활동을 쳐다보게 되는 겁니다. 그 죄인 중의 괴수 곧 원수 만들기가 오른편에 서신 주 되심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말씀이 벌리는
저쪽과 차이나게끔 만드는 구조배치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우리 인간 쪽으로 땡겨올 말씀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 배부른 소리를 성화론자들처럼 할 입장이 못됩니다.
그 반대죠. 지금 말씀에 죽어나가야 할 판국입니다.

어떤 말씀?

믿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말씀에 의해서 죽어나가야 할 판국에
믿겠다고 나서는 놈 있으면 그거 조져 버려야 합니다.

지금 지근 지근 밟혀서 목 꺽이고 팔 짤리고 다리 절단당하고
벙어리 되고 문둥병자 되고 창녀되고 세리되고 강도되고 병신되도록 당해야 할 판국인

우리는 그 정도로 어두움입니다. 즉 빛이 등장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조로써 이런 배치 속에서
그 배경을 깔고서 천사들이 움직이는 겁니다.

자 인간들이 움직인 것 있나요?
움직이기는커녕 꽁꽁꽁 묶여버립니다.

이삭이 제물이 되는 것처럼 꽁꽁꽁 묶여서 입에 제갈을 물려서
음음음 ~~~~~~~~~~

백날 소리쳐도 소리있음이 아닌 소리없음으로만 취급받을 뿐입니다.
백날 떠들어 보세요 니 목만 아플뿐입니다. 요나가 큰물고기 뱃속에서 아무리 외쳐본들 소용없습니다. 그런 세계임을 알아라 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낙심도 되고
죽은자로 취급받으니
주변에서 자살하라고 외치는 것을 듣는 것 보다
오히려 자기자신이 그것을 견디지 못해서 자기 스스로 누락시키고 싶어하는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요나처럼 자살하고픈 욕망이 듭니다. 요나 뿐 아니죠. 다 그래요. 엘리야 차라리 날 죽이세요. 모세도 그랬고. 안그런자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요? 그래도 소용없는 것은 소용없는 겁니다.

자 보세여 그러니까 믿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말씀을 쳐다본다는 것이
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내 믿음을 배신 때리는 믿음을 만났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나의 믿음은 배신 당해야 합니다. 어딜 감히 뻔대기 앞에서 막주름을 잡으며 배설물을 끄집어 들이댑니까?
보기좋게 쭐꾸덕 미끄러져서 그 배설물(나의 되도 않는 믿음, 행함, 성화)의 악취에 실컷 당해봐야 비로소 썩은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믿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말씀이 나를 벙어리로 만드는 것이 이 얼마나 큰 기쁨이냐 말이죠.
나의 소유로 만드는 기쁨이 아니라(성화론자들처럼 자신의 소유로 만드는 성화가 아니라)

그 반대로 믿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말씀에 소유 당하는
큰 기쁨에, 복음에, 소유당하는 사가랴이기에
벙어리가 되어도 상관이 없고
누락 배제 부재 수태치 못하는 자가 되어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저 믿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말씀
성령 혼자만 일 다 처리하시는 그 일에
우리는 그 일의 목격자로써 기뻐 찬양만 할 뿐입니다.

믿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그 말씀에 그저 당할 뿐입니다.
벙어리가 됨으로써 그 부재 누락됨의 노선에 예수님이 온다는 것

아기 예수님이 골리앗 마귀를 상대로해서
새이스라엘을 구하신다는 것

이 예수님의 믿음만
있으면 다 이루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사가랴가 벙어리가 되듯이
우리는 벙어리로써 외치는 겁니다.

벙어리인데 어찌 외칩니까?

벙어리이니까 마음껏 외치는 겁니다.
오히려 벙어리 아닌자는 못 외치도록 하는 말씀인 것을

우리는 믿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말씀에 의해 졸지에 벙어리가 됨으로써
우리는 알게 되었지 않습니까?

아니 말을 할줄 아는데 이 말씀을 못 외칠까?
벙어리로 만드셔야만 외쳐지는 말씀이니? 이 아니 놀라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사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태어날 때부터 팔 다리가 없는데도
말씀의 세계를 마음껏 달리고 있는 중증 장애아동 젖먹이 어린아기가

팔 있다고
다리 있다고
그래서 거인이 되었다고
고래 고래 고함도 칠줄 안다고 떠들어 대던 그 골리앗을
그저 돌맹이 하나 던졌을 뿐인데
목소리가 단절되고
다리도 짤려버리고
팔도 댕캉 날라가 버리게 하는 그 믿음

아기의 믿음이 아니라.
주의 이름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이 젖먹이 전쟁(영적 전쟁, 십자가 전쟁)은 지금도 쉬지 않고
주의 이름 스스로가 홀로 펼치십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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