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 되기 ?  - 종말인간

2012년 6월 15일 금요일 오전 7:52:34  김대식


서양의 철학은 희망의 철학과 부정의 철학으로 나뉠수 있습니다.

마치 욕망을 긍정으로 보는 것과 반대로 부정으로 해석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로 희망의 철학은
니체 스피노자 들뢰즈 등.

부정의 철학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라깡 지젝 등.

그럼 이것도 저것도 아닌 철학은
항상 중용의 중도의 길을 모색하는 자들
화해의 철학을 추구하는 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모든 것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모색으로써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들뢰즈의 철학을 보면 참재미있게도
시대의 이단아를 아주 좋아합니다.
단순한 팬 수준이 아니라
이들이 바로 현실에 부딧힌 문제를 해결하는 자로써 제시할
지혜의 산물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니체.
아르토.
카프카.
로렌스도 포함됩니다.

이들을 이단이라고 말한게 아니라 이단이라고 한 것은 제가 붙인이유이고
위대한 스피노자의 네 제자 라고 붙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스피노자 자체가 그 시대의 발상을 뒤 엎어버린 전복자 곧 이단아로써
들뢰즈가 본 니체 아르토 카프카 로렌스 들의 특징들이 이단이라는 특징입니다.

시대의 흐름을 뒤 엎어버려서 새로운 물꼬를 트게 해서입니다.

자 그러면 무조건 이단이 되는 것일까요?
그래서 들뢰즈 본인도 이단이 되고자 한 것일까요?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유일한 희망의 길이라고 본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 또한 그것이 옳았고 그렇게 실천했으며 다른 길이 있으면 말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연변이 만이 희망이다,
신의 심판에 맛서서 싸워 이길수 있는 대안이다 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 또한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죽음 뒤의 세계가 얼마나 과잉적인 창조의 산물인데?
뭣 때문에 못누릴 이유가 뭔가? 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죽음이라는 부정마저도 뛰어넘는 긍정인가?
자신의 신체에만 갇혀 있지 말로 나와서 뛰어 날라 보자 라는 것입니다.
기관없는 신체가 이미 준비 되어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몸
여자와 같은 생명을 잉태한 몸
창조의 몸을 우리는 갖고 있으니
해탈 성화 하자 라고 외칩니다.
그것이 이단이다 라고
이단만이 유일한 대안이다 라고 말합니다.

아니 대안도 아닌, 적을 일부러 만들어 내거나 어쩔수 없는 적 때문에 매일 필요가 없이
지금 누리기 바쁘고 그 경계선의 날 위를 도주하는 그 기쁨을 줍기도 바쁜 판국에
그럴 신경이 어디있겠는가? 모든 것은 나의 자유를 위해 처음부터 있어왔던 것
그 어떤 거리낌 없이
법없이 나르는 별처럼 날라갈 뿐이다. 끊임없는 비행을 할 뿐인 비행청소년일 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릅니다.
차이납니다.
저들의 자신의 신체를 차이낼려는 그 시도를 원천차단합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가두워 버립니다.

가두워 버리고 철저하게 제한적인 육체로 만들어 버립니다.
한발짝도 자신의 육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자유란 처음부터 없도록 단절시켜 버립니다.

그 이유는 딴 몸 때문입니다.

딴 몸만 차이날 뿐이지 우리 몸에 신체에 희망을 걸지 않습니다.
오히려 딴 몸을 위해서
그 차이나는 딴 몸 때문에 반드시 차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저런 인간들의 지혜로 차이나는 몸이면 자신도 만족하는 자기도 용납하는 차이이겠지만
자신도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차이나는 몸을
이 딴 몸 이 딴 차이나는 몸 때문에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 딴 몸 에서만 나는 사건을 십자가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 딴 몸은 인자의 몸이며 유일한 차이나는 사건은 십자가에 인자가 달리는 몸으로써 벌어지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이 딴 몸 만이 이질적인 몸 곧 이단. 다른 몸입니다.
이단짖을 백날해 봐라? 다른 몸이 되는가?
다른 몸이다는 증거는 십자가의 사건이 또 재현됩니다.
물론 지 입으로 십자가 사건이 재현되었다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곧 모세의 꼬챙이가 주인공이듯이
유물적인 아무 생명도 없는 그저 나무 밖에 안되는 그 십자가가 사건을 벌림으로써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몸이 다른 몸 곧 이단입니다.

인자 밖에 없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바리새인 이든
로마인 빌라도 이든
또는 이단아 곧 전복자 초인을 추구하는 긍정의 철학자이든
성경 속의 트라우마를 언급하는 부정의 철학자들이든
하여튼 간에

이 인자에게 접속을 시도하는 자는 왜 아무도 없을까?
동질성으로 찾아보니 니체든 스피노자든 카프카든 결국 인간일 뿐인 육의 접속 시도로
힌트를 삼아보겠지만

정작 진짜 딴 몸 전혀 다른 신체인 진짜 이단의 몸에
접속을 시도하는 자는 아무도 없도
또 한다고 해도 접속 되지도 않습니다.

(눅 11:9, 개역)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눅 11:13, 개역)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골 3:1,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그 이유가 뭘까요?

말로는 아니 어쩔수 없이 육으로는 이단 이단 카지만
정작 이단이 되기 싫은 것입니다.

아니 이런 철학자들은 진짜로 이단 될려고 뼛속까지 이단이 희망이다 라고 할 정도로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육입니다. 오로지 성령으로만 이단이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안됩니다. 성령으로 다윗이 비로소 이단이 되니까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두 조각이 나는 겁니다.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도 그런 이유로 두 패로 갈라져서 한 쪽은 주의 오른편 때문에 피흘리심으로 용서받아야만 하는 피발리는(피에 소유당하는 습관 곧 거룩케 하심) 원수의 자리에 놓이게 되고 다른 한 쪽은 주의 오른편이 구지 필요없는 자기 구원을 자기가 이루어야 하는 마귀집단으로 형성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그루터기 또는 순 등등의 표현으로 그 기준에 의해 갈려지는 현상이죠. 왜 멀쩡한 이스라엘 갈라서 인자가 구름타고 오시는 그 종말의 현상을 이스라엘이라는 신체에 할례하듯이 각인시키는 것일까요? 또 그와 무관한 이스라엘 곧 육적 이스라엘을 대립으로써 펼치시는 것일까요? 맞습니다. 인자의 영광을 위한 마지막 때를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참혹하게 격었던 이스라엘의 체험을 우리는 이제 더욱더 참혹하게 앞으로 격게 되는 겁니다. 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인자의 몸을 드디어 이 육체와 대비된 몸으로써 그 인자를 쳐다보게 되는 겁니다. 불뱀에게 물리지 않는 판국에 쳐다볼 이유도 없고, 또 물려도 하필이면 내가 싫어하는 몸이다고 내 몸을 고치는데 전혀 무가치하다고 낫게 할 수 없다고 우찌 똥물에 들어가야 낫겠냐 라는 전혀 차이나지 않는 이단의 몸이 아닌 다른 몸이 아니다는 이유로, 또는 딴 몸이라는 이유로 못보게 하는 그 몸을 미리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겁니다. 아무도 자력으로 자신의 믿음으로 그 몸을 영접할 몸은 없습니다. 오로지 약속하신 성령만이, 그 모든 것을 빼앗는 성령만이. 그 성령의 소유당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전혀 딴 몸인 성령의 전인 딴 몸의 딴 신부인 겁니다.)

해적도 이단질도 자신이 주인공이 되기를 바랄 뿐이지
또 비역질이라는 계간의 철학방법을 무염시태라는 성경을 통해서 아이디어를 따오긴 하지만은
정작 어디까지나 그것을 해석하고 분석하고 말하는 자신이 어디까지나 주인공이지
무자아를 추구하는 자아는 결국 무자아가 아닌 자아인 셈입니다. 이 얼마나 모호한 초등학문입니까?
결국 자기숙제이지 지팡이는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완악함입니다.
지팡이가 대신 숙제를 할 리가 없다는 겁니다.

지팡이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설사 알아도 소용없는 것이
주인공이다면 자신은 그 무능한 지팡이의 똘마니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설사 주인공임을 인정하고 똘마니가 된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성령이 아니면 소용이 없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오른편이 언급 되어야 하는 겁니다.
함께 다시 살았다면 위엣 것을 찾아서 거기 위엣 것에 그리스도가 우편에 앉아계심을 보고 외치고 증식 반복을 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 말은 이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넌 이단되기가 아니라 처음부터 이단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왜?
이유는?

그리스도가 우편에 계시거든

아 그렇구나

그래서 우리는 원수 중의 원수에 놓여야 하는 것입니다.
곧 죄인 중의 괴수의 자리인 처음자리 입니다.

그래야 마귀를 끌어들이는 포획장치이자
동시에 간택되는 신부인 구스여인이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말이 그렇지 어디 말처럼 쉬운일인가요?
그럼 그렇게 될 경우도 없겠지만
정작 그렇게 되면 요나처럼 도망치기 바쁘고
엘리야처럼 내 열심히 특심인데 라고
각기 제 갈길로 가는 양 같을 뿐인데
누가 이 불가능한 일을 할수 있단 말인가요?

그래서 이단의 몸 즉 딴 몸만이 하십니다.

그래서 찾으라 구하라 두드리라
너 딴 몸 그렇게 되고 싶으냐? 접속하고 싶으냐?
네 이 몸 거짓입니다. 이 몸이 무지 무지 싫습니다.
딴 몸 만이 희망입니다.
그 딴 몸을 찾고 구하고 두드려라
그러면 성령을 주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즉 성령이 없는 몸의 또렷한 현실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결국 성령을 선물받으면 즉 성령에게 소유당하면 찾기 싫어도 찾고
구하기 싫어도 구하고 두드리기 싫어도 두드리는 겁니다. 매일 매일 그런 사건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였거든요.

내가 주께만 범죄 했다고 외치는 다윗은
자신의 마음에는 성령이 없음을 비로소 보았다는 겁니다.
율법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지키고 싶은 마음도 없으면서
외모적으로 지킬려고 했던 그 육을
홀라당 완벽하게 벌거벗김 당한 후로

내 속에 정직한 영이 없다 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처음자리가 없다는 것을 비로소 직시 합니다.

이것은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없다는 소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소유 문제로만 생각했다는 것이 사랑도 안하면서 지킬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럼 사랑하면 되겠네 라는 또 여전히 소유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그 반대입니다. 소유 당하는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의 처음자리는 인위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 모태를 무슨수로 이스라엘 스스로가 만들어 낼수가 있습니까? 긍휼의 자리는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 뿐입니다. 즉 오른편 뿐입니다.
어느정도로 안 찾고는 못배기도록. 안 구하고는 못배기도록, 안 두드리고는 못배기도록
모든 자존심이나 모든 뼈 마디 마디 하나 하나를 다 꺽어버리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 소유 개념이 간택의 문제가 되는 정치가 되고 습관인 소유문제가 되는 겁니다.
차이내기 곧 빼앗기다 라는 의미가 되는 겁니다.

즉 율법 지키고 교회 충성봉사하고
믿음 좋고 복받았다고 칭찬받던 것 모조리
소유 당해야 곧 빼앗김을 당해야

비로소 나오는 소리가
정직한 영이 없다는 소리입니다.

곧 부재에 대한 철저한 직시
부재의 뼈저린 현실입니다.
또 그것만을 누리는 자들을 광야교회라고 하고
이것을 이스라엘의 처음자리 곧 모태가 되는
두 점 찍고 3일이라는 죽음의 간격 그 빈공간을 이스라엘의 자리라고 합니다.

침노 라는 의미도 동일합니다.

빼앗김입니다.
이것이 소유당함입니다. 탈탈 털어버립니다.

얼마나 제대로 탈탈 털렸으면 신발 두 컬레 옷 두 벌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정도로 누리는 겁니다. 매일 꺽고 꺽고 딴 몸 이 있다는 이유로 말이죠.

이것을 습관적으로 매일 매일 어쩔수 없이 십자가의 은혜로 지적받는 죄를
매일 매일 습관적으로 죄씻음을 당하는 일의 반복이 바로 십자가 사랑의 증식입니다.

일부러 15일 길을 괜히 밑에 있는 시내산 거쳐서 내려가는 겁니다.
에이 그럼 15일 그렇다 손 치더라도 나머지 15일 길 가면 한달 만에 갈 가나안 땅을
왜 일부러 40년 동안 뺑뺑이 돕니까?
털겠다는 겁니다. 아직 안 털린 것 있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딴 몸이 될려는 딴 몸 곧 이단 되신 예수님을 만날려면 탈탈 털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조리 다 죽여버리고 새세대로 갈아버려서 가나안 땅에 재입수해서 들어가는 겁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 말은

(고전 15:10, 개역)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1, 개역)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고전 15:12, 개역)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전 15:13, 개역)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고전 15:14, 개역)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전 15:15, 개역)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고전 15:16, 개역)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고전 15:17, 개역)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 15:18, 개역)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고전 15:19, 개역)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전 15:20, 개역)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1, 개역)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 15:22, 개역)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3, 개역)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고전 15:24, 개역)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고전 15:25, 개역)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고전 15:26, 개역)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전 15:27, 개역)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고전 15:28, 개역)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고전 15:29, 개역)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침례를 받느뇨』
(고전 15:30, 개역)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고전 15:31, 개역)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리스도의 우편 때문에
매일 매일 저주의 자리로 내몰리는 십자가가 주인공인
그 현장에서 지팡이의 똘마니 곧 소유물로써 지팡이의 소유물로써 여김을 받는
그 매일 매일 사건의 현장에 놓여진 자 라는 겁니다.
(광야에서 원망하는 길로만 인도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피만 나타내도록 말이죠.)

어찌 설명이 더 어렵나요?

나 내인생 예수님에게 다 빼앗겼다
소유당했다.
그 소유자가 십자가인데
십자가의 피용서를 증식하고 반복하는 일에
그 습관적인 일에
나는 날마다 죽는 영광에 놓여졌다. (단절에 놓여진 겁니다. 왜 연합하기 위해서)

왜 그게 영광인데?
다시 사니까
아 그럼 이것은 모두다 부활이 벌린 자작극?
부활이 일으킨 사건
부활은 십자가만 주인공으로 삼는 일에
우리까지 배치물로 소유물로 삼으셨다?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이단되기가 아닌 아예 이단으로 태어난 겁니다.

십자가가 벌리시는 그 사건에
시공간을 초월해서 늘 호출당하고
아무리 못가는 상황
또는 다시스로 도망쳐 버려서 멀리 가버려도
어느새 그 도망친 그 현장이 십자가의 사건이 여전히 벌어지는
증식의 현장
용서의 현장
종말의 현장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내 열심히 특심이니 라는 소리도 필요가 없습니다.
더 큰 열심히 덮쳐버리면 심각한게 아무것도 없는 7천명의 세계가 되는 겁니다.
단 한 사람도 남겨지지 않은 그 단절의 세계를 거침으로써
단절의 점을 찍고(십자가)
7천이라는 과잉의 점을 찍어서(부활)
그 3일이라는 간격 거리 두기를 하심으로써
거기에서 그 빈자리 자궁에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가 태어나는 겁니다.
그것을 차이 곧 거룩이라고 합니다.

그 차이성 때문에 두 점을 찍으러
해산하는 고통을 한다고 사도바울은 뻔뻔스럽게 외치는 겁니다.

매일 단절 찍고 과잉 찍고
단절 찍고 과잉 찍고
간격 벌려서 새이스라엘 태어나고
그 빈자리 광야 교회가 바로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입니다.

그 빈자리를 차버리니 자신들의 태생이 바로 음부가 되는 겁니다.
모태를 차버리니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모태를 갈아버립니다. 율법이 아닌 긍휼의 피로 모태를 갈아버립니다.
아무도 건널수 없는 그 부조리의 모순을
다윗은 오히려 먹고 마시고 춤추고 함으로써 아이처럼 기뻐합니다.
아무도 용서하지 않는 음부에서
나도 내 자신을 용서 못하는 데에서
내 기도 내 회개 내 금식 내 눈물로써 씻을 수 없는 그 음부에서
나를 용서하신 분은 하나님이 아닌 예수님이라는 것을 기뻐 외치면서
막먹고 막마시고 막춤을 추면서 그 간격의 빈자리에서 새로 태어나는 겁니다.

이 기준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기존의 법을 쥐고 있던 자들과
다윗이 방금 알게된 덮치게 된 소유당한 빼앗은 새기준과 갈라지는 현장이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뚜껑이 열려
갈라지게 되는 겁니다.

마치 시므온 선지자가 아기 예수님을 안고서
이스라엘의 흥함과 패함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표적이다 라고 외친 것처럼

두 패거리가 양쪽으로 갈라져서 벌어지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의 영역으로 자유롭게 넘어갈수 없는
마치 사마리아 여인이 말했던 것처럼 이미 자기들끼리의 기준에 의해서 갈라놓은 그 경계를 예수님은 마음껏 넘어섬에 있어서 어찌 당신네들이 이 선을 넘어오십니까? 당신 유대인들이 그어놓은 선인데요? 라는 그 선을 전혀 딴 선으로 영원히 갈라버리신다.

(요 4:4, 개역)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요 4:5, 개역)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요 4:6, 개역)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육시쯤 되었더라』
(요 4:7, 개역)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요 4:8, 개역)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요 4:9, 개역)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딴 선이 딴 몸인 전혀 딴 이단인 인자 라는 몸에서 새롭게 그어져서 넘어오지 못하도록 한 그 선이 바로

십자가 이다.  십자가는 계류다 모조리 검문검색해서 다 걸러낸다.

수학의 공식에
잘 기억나지 않고 또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a=a 이다면 a’=a’ 도 동일하다.
그러면 마이너스를 넣어도 동일해야, 같은 값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a=-a , -a’=-a’ 이렇게 말이다.

믄 공식이지 싶은데 저 공식은 아닌 것 같고 하여튼 믄말 할려고 하는지는 아실것으로 안다.

즉 예수님은 아무리 마귀짓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예수님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마귀 짓을 하시기도 하신다.

바로 그것을 놓치지 않고 바리새인들은 바알세불의 왕이다 라고 정통신학적으로 끄집어 낸다.
즉 이단이다.

정확하게 찍어낸다. 먹기를 탐하고 그냥 잘먹는 수준이 아니다. 몇 번을 먹는데 탐닉하는 그 탐욕성을 확인하고 확인했다. 제대로 이단을 규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분에 욱해서 지은 별명이 아니다. 얼마나 조심성이 있는 인간들인데?
포도주를 즐긴다. 오죽하면 그 즐김이 거슬릴 정도로 과잉적이다.

여기서 제일 견디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세리와 죄인의 친구 됨이다.

세리는 그야말로 매국노 1호 다
죄인들은 율법을 거스리는 1호 다.

이들이 판을 치면 이스라엘은 와해 된다는 교리적은 법을 규정할 정도이다.
사실 어떤 사회이든 당연하다.

그런데 그들의 친구 곧 거리낌없이 나눔이 가능하다면
소유물을 서로 주고 받고 한다면
이거 보통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들 보다 이들의 친구가 되는 예수가 더욱더 경계대상 1호가 되는 식이다.
경계가 아니다 퍼트리는 전염병 1호 급속확산될 1호이니
한 개인의 운명은 안타깝지만은
전체를 위해서는 빨리 제거해야만 하는 그야말로 이단인 셈이다.

그 이단의 친구들은 나중에 제거해도 별탈이 없을 정도이니

이 보다 더 명확한 바리새인의 해석이 어디 또 있으랴?


감히 이데올로기를 심을려고 하다니 말이다.

그런 헛된 망상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자신들을 한데로 묵는 이데올로기에 더욱더 전념하기 위해서라도
또 이단적 이데올로기에 저항할수 있는
더 강력한 백신 이데올로기를 더욱더 만든다면
그야말로 자신들의 뜻이 저절로 확장하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를 정치적으로 더 잘 활용한다면
그 뿔뿔히 흩어진 수많은 파들의 그 결집성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래서 십자가의 처형을 대대적인 이데올로기를 형성해서
죽여버리는 겁니다.

잔인하게 이단을 처형함으로써
그 철저한 단절을 통해서 다시는 과대망상인 십자가는 침묵이 되도록 종자를 끊어버리는 겁니다.

어라 그런데 오히려 더 퍼트리는 결과요
그것이 십자가가 벌린 자작극에 말려든 것입니다.

십자가 라는 이단을 막을길이 과연 있을까요?
정통신학으로 막겠다고요?
보이지도 않는 실체를?

인자라는 딴 몸 이단 몸을 인간의 육으로는 막을 길이 없습니다.
다만 소유당하는 습관 곧 증식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차이 곧 거룩이 거룩 스스로 거룩을 퍼트리고 증식시키는 일입니다.

피가 스스로 모든 우상을 모든 육체를 파 하듯이 말입니다.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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