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성 구별성 차별성인, 끊어내는 성령의 활동

2012년 6월 8일 금요일 오전 11:03:15   김대식


자 오늘은 다시 누가복음 처음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어머니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누가복음 처음에 데오빌로 각하에게 편지한다고 되어 있는데 그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이가? 라고 물었습니다.

그건 모르죠!! 지금 사도누가가 복음을 전하고 있으니
믿게 될지도 안믿을지도 모르는 거죠

실제로 그가 복음을 믿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성경은 언급없습니다.

(눅 1:3, 개역)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행 1:1, 개역)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제가 왜 이런 모호한 주제로 이 인물을 언급하고 들어가는고 하니
사실확인이 중요한게 아니라

누가복음 처음부터가 인간들의 활동 중심이 아니라
성령의 활동 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치 신화처럼 확인될수 없는 것처럼
천사들의 활동이 무지 무지 분주하게 활동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박정희처럼 박혁거세 신화를 동원해서 결국은 인간을 찬양하기 위한 용도인가?

아니죠.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성령의 활동이 있다면 그 반대인 악마의 활동이 그 대조적으로 나타납니다. 곧 육의 활동입니다. 육의 소욕입니다.
그 육의 소욕을 단절시키면서 등장하는 것이 성령의 활동인 겁니다.

그럼 육의 소욕 곧 악마성이 나쁜놈들에게 해당되느냐 라는 겁니다.
아닙니다. 모든 인간 곧 지금 누가복음을 증거하는 누가 본인도
그 편지의 수신자 데오빌도도
천사들의 활동 대상이 되는 세례요한 그리고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
어머니 엘리사벳
특히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모두 해당 됩니다.

결국 이들 모두는 단절성을 격어야 합니다. 곧 심판입니다.

더 나은 제사란 그냥 구원이 아니라
반드시 심판 속의 구원입니다.

그것을 차이나는 구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곧 거룩입니다.

모든 육체가 구원을 바라고 기적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요 구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즉 차이나는 표적입니다.
그 구별성은 바로 더 나은 구원인데
더 낫다는 것은 차이성인데
더 나은 차이성 때문에
차이나지 못하는 구원이 거짓으로 밝혀지는 겁니다.
그럼 더 나은 표적인 요나의 표적은 뭡니까?

곧 죽음이요 저주요 심판입니다.

이것이 구원 장사를 펼치는 성화론자들에게는 있을수 없는 겁니다.

아침에 잠깐 어머니가 물었던 물음은 이런 겁니다.
그 사람 예수 믿었냐? 라는 겁니다.

제가 그 의도를 파악하고서
어머니 사적인 구원
개인적인 구원이란 있을수 없어요

전체 판대기를 주님이 다루시는 겁니다.

천사들은 지금 부지런히 분주하게 예수님의 구원만 챙깁니다.
그것이 차이나는 구원입니다.

거기에 우리가 집단적인 이스라엘로써 딸려갈 뿐이지
구원을 개개인이 하나 하나 챙길수 있는 문제가 안됩니다.

예수님만 구원 받으면 됐지, 우리를 지옥 보내셔도 상관없는 겁니다.
왜냐? 먼저 계셨던 분 만 성경은 증거합니다. 딴 사람은 관심 없어요
사도바울도 성경은 관심 없습니다. 예수님만 관심 있습니다.

저번에 말했잖아요
유명한 철학자들 책들
신학자들 책들 백날 들따 봐도
누구 에 대해서 언급이 없다고

결국 인간 구원 인간이 지혜 또는 진리를 어떻게 아느냐 라고
늘 인간만 언급하고 있다고
오로즈 육체만 언급할 뿐이다고

지지난 주에 어머니가 이번주일에는 버스가 너무 복잡하니까 못간다고 해서
나 혼자 갔는데 버스가 아무리 기다려도 안오길래 그냥 돌아와서
어머니랑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말씀을 새언약이라는 본문을 인터넷에 나온 짧은 주보요약글로써 말씀을 나누었는데

새언약은 반드시 옛언약을 동원해서 증거한다고 했습니다.

엣언약은 인간의 모든 악마성을 들추어낸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었습니다.
즉 인간의 제사는 안된다는 겁니다.

더 나은 제사가 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기다리는 이들도 새언약이 지정해줘야하지
옛언약의 사고방식에서 기다린다는 꼴은 결국 악한세대가 기적을 요구하고자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 밖에 안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단절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옛언약입니다.
그런데 이런 옛언약을 뛰어넘고 바로 새언약으로 온다면
그것은 새것이 아니라
여전히 옛언약인 셈입니다.
옛언약의 사고방식처럼 여전히 예수님을 대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곧 인간의 구원 탐욕입니다.

그럼 새언약은 그것을 단절 해서 인간은 무조건 배제 누락해서
오로지 성령으로만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인 없는 결과가 그냥 무상의 선물처럼 무시험 합격처럼 오게 되면
정작 누가 가장 시기하는고 하니
이스라엘 당사자 본인들이 시기가 나는 겁니다.

아니? 이방인은 선물도 싫타 했습니다.
선물 받기를 바라는 자는 오로지 이스라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선물 받기로 한 당사자 이스라엘은 안주고
선물 원치도 않고 그 선물이 뭔지도 모르는 이방인에게 주면
반칙이요 반칙, 배신이야 배신 이렇게 되는 겁니다.

모욕 중의 모욕인 겁니다.

선물이라는 결과를 도출시키기 위해서
자신들이 원인이 되는 삶을 살았다는 말이죠.
이것이 악마성이라는 겁니다. 정반합 아닙니까? 악한 세대입니다. 부자청년의 근심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시기케 한다는 말씀은

(롬 11:11, 개역)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롬 11:12, 개역)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롬 11:13, 개역)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롬 11:14, 개역)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롬 11:15, 개역)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롬 11:16, 개역)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롬 11:17, 개역)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롬 11:18, 개역)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롬 11:19, 개역)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롬 11:20, 개역)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롬 11:21, 개역)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롬 11:22, 개역)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롬 11:23, 개역)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롬 11:24, 개역)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롬 11:25, 개역)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이스라엘이 원래 없는데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태에서 살리신 유령같은 존재인데
자꾸 육체의 세계를 부러워 하고
그들에게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소유의식만 있다보니까

주님께서 멸망이라는 방식으로써 그들을 구원하시는 겁니다.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말도 안되는 의식을
오히려 이스라엘을 넘어뜨림으로써(인간의 한계를 들추임 받는 대표성으로써 삼음으로써)
아 이래서 이스라엘은 실패할 수밖에 없구나 우리도 어쩔수 없구나
그럼 누구를 쳐다봐야지 주님만 쳐다봐야겠구나
라고 처음자리를 도리어 이방인이 쳐다봄으로써
이스라엘이 시기하게 됨으로써 다시금 이스라엘이 처음자리를 다시 쳐다볼수 있는 기회를
성령의 활동으로써만 (그 몇백년동안 성령의 활동이 없어서 자기들끼리 묵시문학을 발전 ; 곧 정반합이라는 반성문학처럼 발전시킴. 오히려 이런 회개 반성의 문학이 예수님을 죽여버림, 접촉은커녕 더더욱 단절성으로써 거리두기가 되어버림) 다 이루심을 보게 되는 겁니다.

처음자리 곧 이스라엘의 자리는 인간이 못 맏들고
또한 못 유지하고
못 유지보수, 불가능 그 자체임을 성령을 통해서만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방인이 그 처음사랑을 받음으로써 아 참 우리도 저렇게 시작했었지 라고
시기 곧 사랑을 다시 보게 되는 기회를 성령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겁니다.

우리도 원래는 다 이방인 잡족 곧 히브리인 이였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누구 라는 인물 때문에 동원이 되는 이스라엘이기에
먼저 계신 분의 존재성을 위해서 우리 이스라엘은 태어났었어야만 했다는 겁니다.

곧 이스라엘은 가치 없다는 겁니다. 언제든지 원가지도 아끼지 않고 버리십니다.

먼저 계신 분을 위해서 반드시 없는데서 태어나야 하고, 죽어도 사적인 죽음이 아닌
먼저 계신 분을 위해서 죽어야 하는 겁니다.

누가복음 1장을 딱 보니 이거 무슨 신화내용처럼
천사들이 휙휙 날라다니고 마치 천상의 하늘세계가
이 땅에서 그대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조도 신화 구조 같고
인간은 그저 똘마니일 뿐이고 기계고 로봇고
리모콘으로 작동되는 소품에 지나지 않고
천사들만이 분주하게 아기예수님의 등장을 위한 카페트를 분주히 깔고 있습니다.

그 카페트처럼 유물로, 무대장치의 소품으로써 등장하는 것이 인간소품입니다.
평상시 말 잘하던 자가 천사 만난후 입이 단혀 실어증처럼 벙어리가 되질 않나

늙은 할머니 몸에서 아기가 태어난다고 하질 않나

남자 없이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말은 남자와 성관계를 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아기를 놓느냐 라는 말입니다.

(눅 1:34, 개역)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마리아가 틀린 말을 한게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실이지만 더 나은 사실 때문에
아이가 태어난다는 겁니다.

이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제사인데 사실인데 성화인데 진리인데
그것을 이중분절처럼 쪼개어서 더 나은 제사, 더 나은 사실, 더 나은 성화, 더 나은 진리,
더 나은 표적인 요나의 표적이 된다는 겁니다.

이중분절이 오히려 되지 않는 것이 바로 남근사상이 되는 겁니다. 우상입니다. 악한세대도 믿어댈줄 아는, 마귀도 믿고 떠는 겁니다. 즉 거룩이 아니다는 겁니다.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잉여 곧 은혜란 값없는 은혜란 그 은혜를 쪼개고 쪼개고 쪼개어도
여전히 흘러 넘치는 겁니다.

그래서 물이라는 생명은 아무리 칼로 베어도
베며 밸수록 물쌀이 더 또렷하게 생생하게 힘차고 활기차게 넘쳐 흐릅니다.

그냥 물이 흐른다고 보니 흐르는지 안흐르는지 모르는 겁니다.
그런데 칼로 베겠다고 칼을 물에 대는 순간

순! 간!

물의 역동적인 흐름과 주름과 파동이 생생이 보이는 겁니다.
그동안 보이지 않는 주름들이 말이죠. 칼이라는 방해물이 오히려 힘찬 물줄기를 또렷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애굽의 바로왕과 애굽 군사를 통해서 영광받으시고자 한다는 겁니다.

오늘 누가복음 1장에서도 악마의 활동을 통해서 성령의 활동을 보게 되는 겁니다.

새언약을 언급하면서 육체는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누가복음 1장에 배치된 인물들은 미리 앞당겨서 선취 , 격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계류 라고 했습니다. 곧 심판입니다.

예레미야 설교가 지금 수요예배에 한참인데요
하필이면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서 구원을 증거할까요?
심판속에서의 구원입니다. 요나도 마찬가입니다.
(할례를 통한 세례입니다. 아니 세례 자체가 할례요 십자가입니다. 단절, 끊어냄 닙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차이내기, 그래서 십자가는 내가 모르는 죄까지도 파고들어 짤라냅니다. 찾아냅니다. 심지어 한 아담이라는 한통속이라는 이유만으로 죄를 뒤짚어 씌워서 죄를 짤라냅니다. 병주고 약주고입니다. 구별 짖기 위해서 말입니다. 십자가 스스로가 영광받고자 북치고 장구치고 혼자 하듯이 말입니다. 법궤 혼자 우상의 목 손목 발목 다 짤라내고서 돌아오듯이 말입니다. 바지 안 벗겨지는 찬양이라면 가짜겠지요.)

그냥 진짜 신화처럼
죽은자도 살리시고
없는데서 있게 하신다면

(롬 4:17, 개역)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 4:18, 개역)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박혁거세의 알처럼 태어나시지
하필이면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비유로는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천국과 같습니다.
즉 부재성입니다.
단절성입니다. 심판성입니다.

바리새인이라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들의 악마성이 이겁니다.
왜? 구름타고 오지 않느냐입니다.

구름타고 오면
마귀도 넙쭉 엎드립니다.

그러나 인간의 몸으로 오면 숨어버리고 부재요 누락이요 배제의 모습인
심판 받는 고난 받는 인자가 되는 겁니다.
구름 타고 오면 아무도 저주하거나 십자가에 못 박는자가 없습니다.
가는 곳 마다 소동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가는 곳마다 소동이 일어납니다.
즉 뭔가가 건드려졌다는 겁니다. 악마의 소욕이 움찔 건드림 당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소동이 일어납니다.
즉 제대로 거룩의 사건이 펼쳐진다는 겁니다.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 말입니다.

그거 우리도 같이 심판 받아야 하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된 나를 지적 받는 겁니다.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을꺼야 하는 선악의식을
예레미야때  난 절대로 식인종 야만인처럼 자기자식을 뜯어먹지 않을꺼야 라고 다짐했던
그 선악의식을
보란 듯이 무참하게 밟아 뭉개버려서 뜯어먹지 않고서는 구원이 안되는 방향으로 잡아버리시는 겁니다.

선악의식과 무관하게
성화되겠다는 윤리의식 도덕의식과 무관하게
오히려 그런 토대를 밟아버리고서

오로지 인자의 장대 높이 달리심 만으로만 구원 받겠다는 취지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불뱀에게 물려서 불뱀을 제공한 하나님을 원망하고 마는
신앙 마일리지 무참히 꺽어서
오로지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는 사랑으로만 용서로만
불쌍히 여길 정도로 그정도로 무시받는
자존심 꺽어버리는 구원소유를 탈탈탈 털어서
매일 매일 불쌍히 여겨주지 않으면 안되는 그 성령의 활동으로써만
새언약의 의미인 인자가 달려야 한다는 취지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인간은 가룟유다처럼 저마다의 구원관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제해방을 꿈꾸는 독립군투사처럼 가룟유다의 구원관도
예수님이 그런 유대인의 꿈을 이루워 줄주 알았습니다.
그런 악마성을 마귀가 심었기 때문에
그것을 대표적으로 표출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참히 밟아버립니다.
이스라엘은 인간의 필요에서 세워진 민족이 아닙니다.
먼저 계신 분을 위한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통해서 가룟유다와 다를바 없지만
베드로에게서는 예레미야의 울음처럼
닭울음을 옆에 붙여서
그 불의한 모욕 상품 세가지를 통해서
주님은 처음사랑으로 되돌려 놓는 겁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그는 주님의 죽으심(심판성을 이룰려는)을 막는 사단성을 보이는 겁니다.
사단이 제대로 작동한 겁니다.

그러나 주님의 죽으심은 그런 사단의 작동을 베드로에게서 막고자 닭울음(예레미야의 울음)과 끝까지 기도하심(사단이 내어놓아라고 결제서류에 도장 안 찍으심 : 예수 너를 배신한 놈이다)의 십자가 사랑을 이룰려고

미리 심판의 단절성을 베드로에게 부으시는 겁니다. 선악의식 차단입니다.
내 쪽에서 주를 위해 섬긴 모든 것을 차단합니다. 도리어 주님 쪽에서 끝까지 섬기심을 보는 겁니다. 주님이 얼마나 제대로 나를 섬겼는지 나의 것들을(육의 소유:거룩한 것으로 가장한) 빼앗아 차단시킴으로써 제대로 쳐다볼수 있도록 머리를 들게 하신 겁니다. 인자의 달리심을 보라고

먼저 계셨던 분을 위해 우리는 태어났고 심지어 죽어야만 했다고 심판 받아야만 한다고

하나님도 독생자를 버리시는 그 판국에 내 구원 챙기겠다는 것은
여전히 큰 흐름을 못 보고 내 사적인 영역이 따로 있다는 것을 부각시키겠다는 것은
끝까지 예레미야의 울음, 닭 울음, 예수님의 기도가 보이거나 듣기지 않고

자신의 뉘우침이라는 자신의 회개 눈물 금식기도에 갇혀서
자신의 바른소리로 옳았다는 것만 외치고 자살하는 꼴로, 끝까지 신앙을 포기 못하겠다는 심뽀로 끝까지 스스로 뉘우치고 스스로 자신을 심판해 버리는 선악을 포기 못한 겁니다. 돈의 맛이라는 영화처럼 선악과를 인간이 따먹은 것이 아니라, 돈의 맛을 인간이 맛 본 것이 아니라. 돈이, 선악이 가룟유다를 따먹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 27:3, 개역)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마 27:4, 개역)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마 27:5, 개역)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마 27:6, 개역)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 하고』
(마 27:7, 개역)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마 27:8, 개역)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반대로 그 상대적인 생명나무는 베드로를 간택했는데 그 선택이 곧 베드로를 심판하는 쪼개기입니다. 가룟유다와 별반 다를바 없는 인간이지만 먼저 계셨는 분이 그를 쪼개어서(이중분절) 차이내는 겁니다. 그 차이라는 거룩 곧 진정성이 바로 부정의 3종 세트 꼬끼오 라는 무시받는 미물의, 완돼 ~~~~~~~~~~~~ 라고 외치는 울부짖음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라는 뜻입니다. 즉 내 쪽에서 미리 거룩을 챙길수가 없습니다. 더 나은 제사를 만들 수 없습니다. 주님이라는 거룩이 새롭게 와서 비로소 성사 되는 겁니다. 오히려 내 쪽의 거룩은 가짜였을 뿐임을 들통나는 것이 가짜거룩을 배경으로 깔고서 들통내는 참으로 얄미운 예수님의 거룩이 십자가입니다.)

생명나무의 울음입니다. 생명나무의 대신 죽음이 대신 심판이 대신 저주가
심판 속에서의 구원을 이루는 더 나은 제사인 겁니다. 더 낫다 라는 것은 부정의 3종 세트가 따라 붙었다는 겁니다. 정작 그 부정의 3종 세트를 베드로가 직접 부인했는데 말입니다. 유다가 다말의 부정의 3종 세트로 인해 구원 받듯이 말입니다.

내 쪽에서가 아닌 생명나무 쪽에서의 조치입니다. 그 부정의 3종 세트는 언약궤에 담긴 3종 세트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한 3가지 물증입니다. 꼬끼오입니다. 그 심판 속에서 구원 때문에
광야(죽음) 속에서의 생명이요, 저주 속에서의 은혜인 겁니다.

그들이 차이나는 거룩한 존재라서가 아니라

차이나는 하나님의 거룩을 심판 속에서 체험하는 겁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찌어다 라는 거룩 덮잇흠을 입은 사건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이것이 새언약입니다. 십자가가의 저주가 아니면 구원받을 길이 없도록 차단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겁니다.(수치를 자기들 스스로 뉘우치고 제거합니다.)
안죽인 것도 아니고 거부하고 싶어도 거부할수 없는 딱 걸려든 부정할수 없는 물증인 겁니다.
이 물증이 나를 웃사쓰럽게 말들고 발가벗기게 만드는 심판성인데
그것이 싫은 겁니다.

그래서 종교꾼들에서는 거리끼는 쪽팔림입니다. 구원은커녕 천박한 수치입니다. 부끄러움이요 비거룩한 더러움입니다.

또 세상 지혜꾼들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미련하기 짝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미련하다고 판정 받은 것이 도리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것이다 라고 영광스럽게 된다면
시스템 와해와 질서가 개판이 된다는 겁니다.
즉 예수는 니 애비도 없냐 이겁니다. 아들이 높아질수 없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높이는데 말입니다. 서열이다는 겁니다. 서열. 곧 인간이 선악을 끝까지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이 십자가가 미련한 것도 거리끼는 것도 아닌
권능입니다. 능력입니다. 이것보다 더 명료하고 또렷한 사랑이 없다는 겁니다.

남들은 사랑이 아니다 지혜도 아니다. 구원(사랑)도 아니다 라고 외치는 곳에서
당당하게 외쳐지는 십자가의 심판의 저주가 사랑이다고 외치는 겁니다.
성령 스스로가 말입니다.

그러니 모든 육체는 차단 됩니다. 아니 그 어떤 육체도 사랑이다고 안 외칩니다.
성령 홀로 외칠 뿐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다 도망갈 뿐입니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제 갈길로 갈 뿐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런 우리들을
뿔뿔히 다 흩어진 우리들을 일일이 다 모으시는 겁니다.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각기 다른 성격과 모양과 생김새와 피부와 성깔 그 어떤 것도
십자가의 용서만을 쳐다보고서 모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천사의 활동만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 우리는 그 요소 요소에 배치될 뿐입니다.

먼저 계셨던 분이
십자가의 심판을 바탕화면에 깔고 죽으셨듯이
우리 또한 그 성령의 일에 배치 당하고 먼저 계셨던 분을 위해서 태어났듯 죽는 겁니다.

나이 많은 이 엘리사벳의 아기 가짐은 오히려 경사일수도 있습니다.
원래 무자하던 집안이고 아기를 간절히 바랬으니까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이삭사건을 이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느정도 처음맡는 사건이 아니다는 이유로 여유로울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 시집도 아직 간적 없는 처녀 마리아가 아기를 갖는 것은 그야말로 성경에서조차 처음입니다. 일부러 구약에서도 이런 사건이 있을수도 있는데 빈공백으로 그동안 비워놓았던 겁니다.

드디어 새언약이 펼쳐지는 가운데 동정녀탄생이 처음 벌어집니다. 앞으로도 없습니다.

이것은 동시에 마귀들의 본격적인 공격의 활동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시므온 선지자가 아예 잠자던 사자의 콧털을 건드리듯이 아예 뚜껑을 엽니다 열어

이 아기는 이스라엘의 흥함과 패함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라고 외치고
자신은 악마와 아기예수님과의 싸움을 붙여놓고 드디어 무대뒤로 퇴장합니다.
즉 죽었습니다. 이 말 할라꼬 그동안 죽지 않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을 외치고 드디어 죽습니다.

뚜껑열린 싸움터는 이제 본격적인 마귀와 아기 예수님의 전쟁터일 뿐
이스라엘의 터전이 아닌 겁니다. 인간이 개입할 수도 없습니다.

마리아도 이런 기도를 외치고 얍삽하게 뒤로 빠집니다.

곧 마치 심판성만을 이루는 외침만을 한 겁니다.
마리아가 이런 기도를 본인이 했어도 계속 기억에 남을지
까먹을지 모릅니다.
문제는 성령께서는 절대로 잊지 않는다는 겁니다. 성령의 기도이니까 말입니다.

마리아가 그 기도를 했다고손치더라도 누락 될 뿐입니다. 단절 됩니다.

성령이 이루시는 겁니다.

우리 인간을 장악한 마귀를
마귀에게 갇혀진 이미 장악당한
이미 불뱀에게 물려버린
원망만 할 수밖에 없는
벗어날 수 없는 한계적인 인간을 어떻게
마귀와 싸워 이겨서 먼저 계셨던 분을 영광스럽게 하는지
그분을 어떻게 구원하는지를

성경말씀이 아니고서는
성령의 활동이 아니고서는 알 길이 없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는 우리도 똑같이 마귀 속에 갇혀서
이 육체 속에 갇힌 가운데서 실제상황으로 아기예수님만의 활약상을 보게 하시는 겁니다.
성령으로써 말입니다.

그것을 목도함으로써

이런 원수도 용서하실수 있나요 라고
누구와의 만남을 통해서 찬양하는 겁니다.

이미 다 승리한 그 완료된 승리를
어떻게 이루었는지를 다시 되돌려 보게 함으로써
이렇게 사랑을 이루셨음을 우리는 광야에서
죽음의 세상에서
심판 받아야할 세상에서
같이 심판받으면서 외치는 겁니다.

이런 원수도 용서 하시는 권능의 피라고

이 무시 받는 피를

저들에게 꼬끼오 라고

내가 무시했던 것처럼 똑같이
지금도 매순간 순간 마다 나에게 울리는 꼬끼오를
외치는 겁니다.

나에게 부끄러움을 없게 하실려고
내 대신 십자가를 지심을 높아 찬양하듯 말입니다.

(눅 1:24, 개역)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가로되』
(눅 1:25, 개역)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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