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 되기가 아니라 탕자로 태어났음


강이아빠랑 대화 했던 대부분의 이야기가 바로 탕자이야기이다.
평생을 아버지 말씀 어긴적 없이 모든 말씀을 지킨 맏아들과
정반대로 탕자는 그야말로 자기멋대로 막사는 자였다.

이 둘을 갈라내고 차이내고 구별내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긍휼의 개입이 차이내는 거룩이다. 곧 사랑이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아버지의 거룩이 개입이 되니까
차이가 생겨난다.

마치 기드온 300명 군사 뽑는 것과 같다.

이 차이난 긍휼을 입은 자를,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저 아버지의 긍휼만으로써
앞장세움을 당해서 벌어지는 것이 바로
거룩한 전쟁이다.
전쟁이란 싸우겠다는 여호와의 의지이다.
우리 싸움이 아니다.
주님 자신의 기필코 성사시키겠다는 의지이다.

그리고 내세우는 무기는 고작
항아리 횃불 나팔 뿐이다.

이 세가지 부정한, 전쟁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없음] 이라는 부재성을 나타내는 무기를 통해서
이미 벌써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무기로써
나팔을 분다. 승리한거 맞네 라고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탕자다.
탕자로 되는 것이 아니라(자기부인해서 탕자되기가 아니라)
이미 자기부인한자로 태어난 것이다. 탕자로 태어난 것이다.

탕자로 태어났다고 하니까
아 그럼 탕자 되기 하지 않고 탕자로 태어나야지 라고 또 탕자되기를 선언한다.
니고데모가 그래서 성령이 주체가 된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어찌 하여 어머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날수가 있습니까 라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라는 것을 모른다.
어머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날수만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행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럼 예수님의 답변은 뭔가?
니고데모와 구별난 차이를 낸
우물가의 여인을 들이대신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수를 달라고 하는
되바라진 이 여인에게 남편을 데리고 오란다.
없다
그러니 넌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다.
내가 너의 남편이 되겠다고 하신다.
내가 너의 아버지가 되겠다고 하신다.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하신다.

왜?

이미 탕자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자에게만 해당된다.

이미 가진자에게는 충성할 것이
지킬것이
전쟁에서 싸워 승리할 것이 있지만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자에게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머리를 든다.
이미 완료된 십자가의 긍휼만을 말이다.


동네 사람들 나의 죄를 아는 선지자가 나타났어요

동네 사람들 나 같은 이런 망나니 탕자를 용서해 주는 아버지가 나타났어요 라고 말이다.

이 불가능한 사랑은 벌써 이루신
넉넉한 사랑으로 다 이루신 분이 나타났어요!!!

(누가 개입했다고 누구 를 외치는 것인가? (성령이 임하심인가?)

아니면 끝까지 나의 숙제라고 누구를 외치는 나 의 회귀인 내 숙제인가?)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