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끼고 어리석은 이단적인 지혜 곧 십자가 지혜 스캔달

2012년 6월 20일 수요일 오전 8:39:17  김대식


오늘 아침 식사를 하면서 어머니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틀전에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서 빵 터졌는데
어제 밤에도 그 이야기를 되네이면서 얼마나 웃으시던지?

이틀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조작해낸 급조한 이야기인데

어떤 여집사가 자기 남편이 예수님을 안 믿으니까 교회도 안다니고
어떻게 해서든 교회를 다니게 할려고
온갖 방법으로 남편을 드디어 교회에 다니게 하니
얼마나 기쁜지 감사의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마침 남편은 교회에 들어갈려고 담배도 끊고 술도 끊고
옷 매무새를 여미면서 단정하게
혹시나 입에 배인 담배내가 나지 않을까 가글까지 하고서
겹겹으로 향수까지 뿌리면서 들어갔습니다.

처음이라 낯설고 생소한 분위기이지만
이내 그렇게 사람 괴롭히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별 부담없이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처음듣게 된 설교가 마침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다 라는
예수님을 향한 바리새인의 별명에 관한 설교였습니다.

다 듣고 집에 와서 보니
가만히 보니 자신이 평상시에 하고 있는 것을
왜 구지 교회간다고 쫄아가면서 끊고 해서 했는지?
예수님도 다 했네 라고 해서

그 남편은 더욱더 동기부여가 된 성경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술을 더 잘 마시기 시작했고
친구들에게 까지 아니 예수님도 포도주를 즐기면서
먹고 마시기를 탐했는데 어서 마음껏 마시고 즐겨라 라고
성경말씀까지 자발적으로 전도하고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연고로 친구들 아낙네들의 불평에 시달려서
이 여집사는 괴로워서 기도를 했습니다.

아이고 주님 왜 성경말씀 중에 해필이면
그 내용을 성경에 적어서
우리 남편 저꼴로 만드십니까?
이 구절이 없었다면 남편이 저렇게까지 나오지 않았잖습니까?
라고 불평을 감히 내뱉었다가는 눈치보이니까
속으로 말하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얼마전에 쓴 글 이단 되기를 생각해서 만들어낸 이야기 였습니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했는고 하니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지

10원짜리 동전을 잃어버린 사람이
하루 종일 이 10원짜리 동전 하나를 찾는다고 온 방구석을 뒤지고 있었습니다.
소파도 뒤지고
가구 뒤도 훌쳐 보고
그러다가 만원짜리 지폐도 발견하고
500원 짜리 동전뿐만 아니라
수많은 동전도 찾았으나

주인은 그것은 찾은게 아니라 주은 것이고
원래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그래서 찾은 것도 아니다 라고 했지만
자신이 잃어버린 것은 어디까지나 10원짜리 동전이였습니다.

얼마전에 은교 라는 영화를 봤는데 다 같은 거울이 아니라
유독 그 거울만큼은 다른 차이나는 거울이였습니다.
그것을 잃어버리니 미쳐버리듯이 팔짝 팔짝 짜증내면서 뛰는 겁니다.
조교가 다 같은 거울인데 잃어버렸다면 사줄게 사줄게 얼마면 돼? 라고 했지만
은교는 한사코 그게 어떤 거울인데 그게 어떤 거울인데 라고 떼쓰면서 울어버립니다.
그때 노인 교수가 그 거울을 찾아서 은교에게 줍니다.
은교는 너무 너무 좋아서 팔짝 팔짝 뛰고 난리입니다.

그 다른 동전과 차별이 나는 10원짜리 동전을 찾아서
주인은 너무 너무 기쁜 나머지
잔치를 벌렸는데 그 잔치 비용을 99만원이라는 과한 비용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잃어버린 10원짜리 동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주인의 기쁨에 비하면
정말 심각하지 않은 99만원이였습니다.

하나님 나라 비유는 단절성입니다. 부재성 곧 숨어있는 세계를 끌어당기는
일종의 겁탈입니다.

겁탑이라는 비역질은 반대로 이 세상은 종말을 맞게 되는 식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침노하는 겁니다.
가나안 땅을 침략하듯이 정복하는 겁니다. 그 정복의 양상
곧 거룩이라고 하는데
곧 차이내기 죠
그 차이내기가 비역질 즉 겁탈의 침노의 방식이 바로 종말이라는 겁니다.

사고방식의 전복입니다.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 99마리 양은 버리는 겁니다.

자 이것을 본 세상사람들은 방금 제가한 잃어버린 10원 동전 비유를 듣고
참으로 어리석다 라고 외칩니다.

지혜라면 써먹을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써먹는 본인도 지혜로운자 라고 취급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거 써먹었다가는 지혜롭기는커녕 어리석은자 라고 취급받게 됩니다.
먹보에 술꾼에 죄인의 친구처럼 제 2의 이름인 별명이 따라 붙게 됩니다.
이번주 설교처럼 불법자의 동무가 되는 겁니다.

세상사람들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사실 세상의 현실이 이런 시선이면 성도는 이 땅에서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이런 전염병이 퍼지도록 놔주질 않습니다. 시체를 빨랑 빨랑 치워버려야 위생적인 사회질서가 유지가 되걸랑요!)

유대인 오늘날 종교인 특히 교회다니는 사람은 이 이야기를 듣고 뭔가 찝찝하고 거리낌이 됩니다.

마치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변사또 앞에서 붓글씨 솜씨를 자랑하면서 밥 한그릇이나 얻어먹고자 글씨를 써내려 간 듯이 보이지만

정작 그 글의 내용을 본 소위 신학해석을 할줄아는 성경박사들에 해당되는
(까막눈은 세상사람들이고, 소위 글을 읽을줄 아나 뜻은 잘 모르는 이방 변방 정도의 수준은 믄소리인줄 모르지만 자 이들은 세상사람에 해당되지만, 소위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에게 정확한 별명을 붙일줄 아는 그 해석능력을 가진 자들은 제대로 이름을 붙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너를 좋게 봐줘도 너는 먹보에 술꾼에 세리와 강도와 죄인의 친구다 라고 이름을 붙여버립니다. 이름이 그 사람의 운명이니까 말이죠.)

변사또의 친구들인 양반들은 학자들인데 그 붓글씨를 보자마자
갑자기 오금이 저려와서 벌벌벌 떨면서
하나 둘씩 그 잔치자리를 빠져 나가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땅에 뭐라 뭐가 글씨를 쓰니까 돌삐를 든 율법을 운운하고 외치던 자들이 한둘씩 돌삐를 내려놓고 즉 칼 또는 총 또는 사형기구들을 내려놓고 도망을 치는 겁니다.)

변사또는 어 왜 다들 왜저러지? 라고 도대체 뭔데?
라고 이도령이 쓴 그 붓글씨를 읽어 보게 됩니다.

밥 한그릇 값을 제대로 한 글인지 어디? 밥 한 그릇 값 하나? 어디보자?

보자 마자 변사또는 벌벌벌 떨기 시작합니다.
침략 당한 것처럼
침노 당한 상태로 변합니다. 총 맞은 것처럼 ~~~~~

그러자 종말이 찾아옵니다.
암행어사 출또요?
인자가 구름타고 왔습니다.

바로 이것이 유대인들이 뭔가 꺼림직한 내용이 담겨진 어리석은 10원짜리 잃어버린 동전 비유인 겁니다.

남들은 몰라도 유대인들은 아는 내용입니다. 변사또는 알더라 말이죠.
왜? 사실상 자신들이 그 잃어버린 10원짜리 동전에 해당된다고 우기는 그 이스라엘이거든요.

그 이스라엘이라는 의미를 본인들이 10원짜리를 무시해서 즉 종말적 유물을, 종말적 인물, 종말적 무리들, 을 미워하고 무시해서 스스로 발로 차버린 그 이스라엘이라는 의미를

지금 잃어버린 10원 동전 비유를 통해서 이도령에게 도리어 역으로 그 자리를 빼앗길 판국에 놓여졌기 때문에 벌벌벌 떨며 거리끼는 걸림돌의 비유가

바로 단절성의 비유인 예수님 나라 비유인 십자가라는 걸림돌이라는 겁니다.

이도령이 거지 옷을 입고 다 떨어진 모자 곧 갓을 쓰고 너덜너덜하게 나타나
변사또 앞에 볼품없이 밥 한그릇 구걸하는 듯이 보이지만
정작 가장 위세가 당당했던 그 변사또를 짜를려고 온 유일한 구름타고 온 암행어사였던 겁니다.

이런 이야기는 자동적으로 사랑으로 이어지는 간택의 문제 곧 플라톤이 말한 신화를 끌어들여서 정치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신데렐라 콩쥐팥쥐 심청전 춘향전 안데르센 동화 등등 어릴적의 동화 내용은 모두 정치적인 간택 문제요 이것이 커서는 종교 곧 신화가 되듯이 말입니다. 곧 신의 사랑 신의 선택, 간택인 에로스 입니다.

그런데 춘향전에서 나오는 사랑은 변사또를 배신 때려야 이뤄지는 사랑입니다.
변사또를 감옥에 쳐 넣지 않고서는 그 사랑은 그 평화는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화 은교에서 사랑의 배신을 맞은 늙은 노 교수는 종말을 맞이합니다.
사랑은 너무 너무 뾰족하고 날카롭기 때문에 (연필) 죽음을 동반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사랑은 시기와 질투를 끌어안은 것처럼, 지옥을 끓어안고 자폭하는,
죽음 보다 강한 겁니다.

그래서 불법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숨어있던 세계 곧 사랑의 세계가 쳐들어 오기 때문에 죽음은 반드시 필 코스가 되어버립니다.

선생님 그거 아세요? 불륜이예요 불륜 스캔들 이란 말이예요.

예수님이 바로 이 불륜을 저지르러 오신 분입니다.
아예 불 질러 버립니다. 화평은커녕 불지르러 오신 분입니다.

나만 사랑이다 라고 사랑의 불인 스캔들의 십자가를 확 뿌려버립니다.

먹보에 술꾼에 죄인의 친구가 되십니다.

우리는 먹보에 술꾼에 죄인의 친구가 될게 아니라
원래 먹보이며 술꾼이며 죄인입니다.
이런 자를 친구 삼는 예수님의 대상물이지
우리가 말씀을 대상물로 삼을수 없기에 성경말씀을 내 쪽으로 끌어당길수가 없습니다.
(실천하고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누구냐 라는 인물에 관한 문제 입니다.
내 숙제란 없습니다. 예수님 숙제 뿐입니다.)

바리새인 곧 마귀로부터 얻는 이름은, 별명은, 그 이름 값을 톡톡히 합니다.
마귀가 장악한 유대인
물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믿고 성전에서 예배 제사드리고 율법을 매일 준수하는 것이 전혀 이상할게 없을 정도로 마귀와 무관하다고 여기지만은
오히려 그것이 마귀의 가장 멋들어진 작품이였던 것을
예수님만이 밝히시고자
유대인과 모든 세상사람들을 장악한 마귀의 정체를 밝혀내는데

돌이 떡덩어리 되게 하는 메시아를 인간들은 믿고 있고 ?  / 그런 인간에게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는 자라는 별명을 듣고

거룩한 성전에서 뛰어내려라 천사들이 손으로 받쳐줘서 몸이 하나도 상치 않게 된다 라고 사랑받고 기적이 함께 하는 자가 우리가 믿는 메시아 이다 ? 라고 그런 자들에게  / 예수님은 포도주를 즐기는 별명의 자신의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 라고 유월절 피를 뿌리고 있는 겁니다.

이제는 마귀가 온 천하 만국을 보여줘서 내게 절하라 온천하를 주겠다 왕이 되게해 주겠다 라고 정치적인 문제로 간택을 하겠다는 인간들에게 택함 받는 메시야가 되어라 라고 할 때 ?  /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죄인, 즉 죄인의 간택이야 말로 유대인들이 가장 못 견디는 문제입니다. 선택의 문제이니까 말이죠.

맏아들에게서 제일 못참는 것은 아무리 참고 참고 참아야 이 간택 문제에서 탕자에게 아버지의 정치적 성향이 쏠린다는 점은 그야말로 도저히 못 견디는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보란 듯이 코 앞에서 세리 강도 창녀 문둥병자 눈봉사 과인 거지 앉은뱅이 등을 일부러 보란 듯이 친구 삼아버립니다. 바리새인이 있어서 삼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없으면 안하죠. 바리새인 코 앞에서 간택합니다.
(사랑이란 차이내기 입니다. 빼내기 입니다. 소유하기 입니다. 그것을 습관 곧 반복합니다. 증식합니다. 차이내기를 반복 빼내기를 반복하여 증식 확장 시키는 겁니다. 곧 십자가의 확장입니다. 부재성의 확장입니다. 단절성의 확장입니다. 이것만이 사랑입니다. 음부의 권세 곧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사랑은 거짓입니다.)

여기서 인간들은 특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여버립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성도를 죽여버립니다.
약을 바짝 올려서 엉뚱한 놈을 간택해 버리니까 말이죠.
둘다 똑같다 라고 죽여버리는 세상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이런 거리끼는 지혜를 만들줄 모르는 성경이라면 가짜 성경이요
가짜 예수요 가짜 성도입니다.

가짜 복음입니다.

즉 분열 단절 차단이라는 갈라짐이 없다면 거짓입니다.
(불을 지르러 왔는데 불난 티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입니다. 누가 이겼냐 졌냐는 상관 없습니다. 갈라졌다는 그 자체가 바로 거룩입니다.)

이것이 세상사람들이 보기에 저거들끼리 싸우는 어리석은 지혜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저거들끼리 싸우는게 아닙니다.
영원히 갈라버리는 물과 기름처럼 분리 시키는 영과 육의 싸움인 겁니다.

싸움은 인간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께 속하기 때문에
걸러내는 작업
단절하는 작업
차단하고 차이내는

잃어버린 10원짜리 동전을 찾아내시는 주님의 작업은
동시적으로 99마리 양을 버리시고 소모하시는 작업또한
지금도 쉬지 않고
주무시지도 멈추시지도 않으시고 계속 되고 있습니다.

일부러 변사또 앞에서 변사또 보란 듯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혔다고 뒤짚어 씌움을 당한 춘향이에게
이도령 묻습니다.

변사또 보란 듯이 춘향하 숙청을 들라

이놈의 남정네들은 다 똑같구만
이 몸은 지아비가 있는 몸입니다.

지아비가 있는 몸인데 어찌 숙청을 들라 하십니까?

죽었으면 어찌하겠느냐?
천하를 호령하는 저 변사또도 벌벌떨게 하는 이 암행어사의 아내가 되면
너는 팔자가 편거야? 어서 숙청을 들라.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춘향이에게 더욱더 간음질 하라고
변절자가 되라고 부축입니다.

누구 보란 듯이 ?

천하를 호령하던 변사또 보란 듯이 말입니다.

이 몸은 지아비의 몸

어허 또 그 소리

춘향아 니 몸이 쇠사슬에 매였구나
배신 때려라 배신
그러면 다 잘될 것이다. 라고 변사또 보란 듯이 말합니다.

지 아비의 몸을 자랑하듯이 말입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돌삐든 마귀들 다 떠난 자리에서 마저
주님은 마귀 보란 듯이
어리석은 지혜를 펼치십니다.

이 걸림돌이 아니면 거리끼는 지혜가 아니면
죽음을 구멍 뚫을 사랑이 없는 겁니다.

(요 8:5, 개역)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요 8:6, 개역)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 8:7, 개역)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요 8:8, 개역)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 8:9, 개역)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요 8:10, 개역)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 8:11, 개역)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결국 차이냄을 당하는 이 여인에게 촛점이 아닌
신 자신의 차이성을 인간들의 신 과의(인간 합체 결합인 신) 차이를 스스로 내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사랑) 스스로가 차이내는 방식입니다. 그것을 소유했냐? 그 여인은  그 소유를 계속 유지할수 있느냐 라는 성화문제가 아닙니다.

차이 자신의 차이가 이런 일만 벌린다는 겁니다. 이 복음의 침략에 당하는 일 밖에 없습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Posted by 김 대식
,